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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마을 10문 10답
Ⅰ
큰마을에는 어떠한 사람들이 참여하는가?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만물만생(萬物萬生)과 하나로 어울려 평화롭고 즐겁게 살려는 사람들이 참여한다.
-자본주의 현대과학기술문명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회의를 가지는 사람들이 참여한다. 자구책으로 스스로 살리고, 그럼으로써 세상을 살리려는 사람들이다.
2. 큰마을은 어느 곳에 위치하는가?
-대한민국의 시-군-구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다만, 농촌과 산림을 가까이에 두고 있는 지역이 좋다. 생태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삶을 위해서이다. 특정 베이스캠프를 중심으로 차로 30분 이내에 거주하거나,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하면 좋다. 물론 먼 거리나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도 참여할 수 있다. 교통과 통신, 정보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다.
3. 큰마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규모는 어떠한가?
-자본주의 과학기술문명이라는 삶의 시스템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삶의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는 규모가 될 필요가 있다. 임시로 설정하기는 100명~300명 정도이다. 실천을 통해 그 규모는 조절될 것이다. 300명이 넘으면, 분화하는 것이 좋다.
Ⅱ
큰마을에서 수행은 어떠한 방식으로 자리잡는가?
-큰마을에서 수행은 일상화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개인적으로, 또는 수행단체에 참여하여 비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일상적으로 수행을 하려 하는 개인은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큰마을에서는 인간의 본성과 함께하는 삶이 자연스럽고 편안하다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 공동으로 삶을 영위한다. 밥 먹고, 농사짓고, 놀이하고, 선물을 나누고, 회의하는 일상의 모든 것들이 영성에 기초하여 이루어진다.
-큰마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있는대로, 먼 곳에 있으면 정보통신망으로 연결되어 거리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수행생활이 집단화되고, 탄력을 받을 것이다. 삶 전체가 고양될 것이다.
-수행에 관하여 집단력이 형성됨으로써 영성에 기초한 삶의 규모와 그 질적 수준이 커질 것이다.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없이 많은 수행법중에서 그 엑기스가 추려져, 더 편하고, 더 쉽고, 더 효과적으로 수행법을 익힐 수 있을 것이다.
2. 큰마을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적 삶의 시스템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인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시스템은 한편으로는 재화와 권력이 피라밋형으로 분배되는 종적(縱的) 위계체계로서, 본성에 기초한 삶을 보장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누천년 역사가 집적된 대한민국 국민이 공유하는 삶의 시스템으로서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 큰마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대한민국이 보장하지 못한 자연친화적인 삶, 영성(靈性)에 기초한 삶을 위해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삶의 시스템을 구축한다.
-다시 말하면, 큰마을 입주민들은 양서류(兩棲類)이다. 두 개의 시스템을 능동적으로 활용한다.
Ⅲ
큰마을에서 경제시스템은 어떻게 작동되나요?
-공동구매-소비, 공동 생산이 일상화될 것입니다. 현 자본주의 국가시스템에서는 자연의 순리에 따른 제품을 생산하고 구매하는 데에 일정한 한계가 있습니다. 생산자 입장에서는 소비자의 구매력을 판단하면서 생산을 해야 하기 때문에 생산량, 생산단가 등을 정하는 일에 제약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큰마을을 비롯한 다양한 공동체들의 공동소비-공동구매는 생산량과 품질을 결정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한편 소비자들도 생산자의 제약을 그대로 받아 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품가격이 높게 책정되기도 하고, 한정 생산되는 제품으로 마음껏 구매할 수도 없습니다.
공동소비, 공동생산은 생산자-소비자 모두에게 이익과 편리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사적 소유와 공동소유가 공존하게 될 것입니다. 공동소유의 비중은 큰마을 입주민들의 총의(總意)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재화와 용역이 큰마을 안에서 내부 순환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그 비중이 높아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벼 농사를 짓는 농민은 쌀을 판매하기 위해 농협이나 한살림 등으로 많은 노력을 들였던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정직하게 농사를 짓고, 정당한 댓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필요한 다양한 재화와 용역이 그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재화와 용역은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구체적 대상에게 주어지는 선물(gift)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큰마을 및 그와 유사한 호혜서클 안으로 수렴되는 재화와 용역이 점점 커져 넉넉한 살림살이를 이루는 기초가 될 것입니다.
2. 삶의 단위가 모두 큰마을로 이전되는 것인가요?
큰마을이 작동되기 시작하면, 삶의 상당 부분이 개인-가족에서 큰마을로 옮겨갑니다. 물론 그 양적 규모 및 질적 수준은 개인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일정 영역만을 이전할 수도 있고, 큰마을로 삶의 모든 것을 이전할 수도 있습니다.
큰마을의 경영은 각 개인의 다양한 조건과 상황을 판단-종합하여 이루어질 것입니다.
Ⅳ
일반 단체(종교)와 큰마을은 어떻게 다른가요?
-일반적으로 단체는 하나, 또는 두 세개의 주제를 중심으로 활동을 합니다. 큰마을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활동을 합니다.
-일반적인 진보적인 단체, 환경단체 등은 개혁을 지향함에도 불구하고, ‘~에 대한 반대’는 결국 역설적으로 반대하는 체제의 안정에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큰마을은 자본주의 현대과학기술문명의 문제점을 직시하면서, 삶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새로 세우려고 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새로운 삶의 내용물에는 새로운 삶의 시스템에 장착되어야 온전한 기능을 합니다.
-종교는 신의 뜻에 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의 종교는 삶의 시스템을 신의 뜻에 부합하도록 세우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존 삶의 시스템 속에서 체제유지의 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별첨>
■ 큰마을을 3가지 키워드로 한다면?
--->고향(故鄕), 하나됨과 어울림, 신명(神明) 등 세 가지입니다.
-고향 : 현대 들어서 우리 한국인이 잃어버린 대표적인 것이 고향입니다. 고향이 없어 삶이 퍽퍽하고, 힘들 때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지역으로서의 공향마을은 있어도, 그곳은 이미 고향으로서의 격(格)이 없습니다. 맛과 정취가 없습니다. 고향의 근원을 타고 올라가면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인 마고에까지 이를 것입니다.
큰마을은 참된 의미에서의 고향을 복원하는 일이면서, 하늘의 뜻에 따라 살던 ‘마고’로 반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됨과 어울림 : 우리는 모두 하나에서 비롯된 서로 다른 하나입니다. 본래 하나이니 큰마을에서는 그 하나됨의 삶으로 가는 길을 오롯하게 구현할 것입니다. 그 하나가 기화(氣化)되어 서로 다름 몸체를 갖고 있으니, 하나됨을 구현하는 길이 바로 어울림입니다. 하나됨과 어울림의 문화, 경제생활, 정치 등이 모두 생생하게 살아서 되돌아 올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인간과 자연, 3차원과 4차원-5차원, 사람과 신 등이 하나됨과 어울림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신명 : 우리 한민족은 신명이 나야 무슨 일이든, 잘 됩니다. 신명을 가져올 수련법, 공동체 문화 등의 원형이 그동안 잘 연구되고, 실천되어 왔습니다. 큰마을에서 신명(神明)은 일상화될 것입니다. (끝)
붙임 문서.
민본(民本) 삶의 틀과 대동 세상으로 가는
큰 사람, 큰 마을, 새 부족(部族)
황선진(3.1서울민회 의장, ‘신성과 하나되어’ 회원)
차례
가. 머리말
나. 때가 왔다
다. 지속가능한 삶으로 가는 길 ---> 귀본(歸本), 귀공(歸共), 귀농(歸農) 등 삼귀의(三歸依),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삶
라. 저물어 가고 있는 자본(資本)살림, 동터 오는 민본(民本)살림
마. 호스피스(hospice)와 산파(産婆)
바. 양서류(兩棲類)와 이군일민(二君一民)
사.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직접 스스로 해나가는 삶
아. 대동 세상
자. 새로운 마을(공동체)가 등장한다. ------>큰 사람, 큰 마을
차. 맺는 말
가. 머리말
코로나19 팬데믹에 인류가 직면하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성찰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 길고 긴 장마를 통해 물난리를 겪으면서기후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인 현 문명을 지속하는 일이 어렵다고 실감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속 가능한 삶은 어떤 것일까요? 전 세계의 지성인들이 앞다투어 그 대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대책들이 실제 적용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지금 세계인들의 삶을 규정하는 삶의 틀은 자본(資本)입니다. 자본 삶의 틀은 24시간, 전 방위적으로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지구에 사는 그 누구도 단 한 순간이나마 자본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물질 생산력을 극대화시킴으로써, 인간의 삶의 편리함을 가져왔지만, 그에 따른 자연 파괴, 인간 사회 내부의 대립 격화, 지구 환경의 악화 등을 초래하였습니다. 인간 및 뭇 생명이 신음하고 있고, 나아가 죽음의 그림자가 지구를 뒤덮고 있습니다. 결국 이제 자본중심의 삶의 틀로는 더 이상의 생산력 발달을 기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너무나 속속들이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고, 거의 모든 삶이 그 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그 관성을 멈출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자본 중심의 삶의 틀을 해체하지 않는 한, 그 어떤 대책도 미봉책으로 그치고 말 것입니다. 자본 중심의 정치경제사회 시스템 너머에 무엇이 오고 있을까요?
나. 때가 왔다.
때가 왔습니다. 마침내 “하늘의 이치에 따라 순리(順理)대로 사는 삶”이 가시적으로 등장할 때가 왔습니다. 수운 최제우 선생이 동학의 깃발을 들어, 시호시호(時乎時乎)를 외친 그 시각은 1861년. 수운의 때는 1861년에 그칠까요? 수운의 그때는 바로 지금, 2021년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당신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수십 년 후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수운 선생이 씨를 뿌리고, 수백만-수천만의 생령(生靈)들이 피를 흘려, 거름을 주면서 길러낸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 이제 그 열매를 맺으려 하고 있습니다.
무엇의 때이며, 누구를 위한 때인가요? 하늘이 이치가 땅에 펼쳐지는 때입니다. 민(民)이 본(本)이 되는 세상! 말 그대로 민이 중심이 되는(民主) 때입니다. 민본과 함께 대동(大同) 세상이 오고 있습니다. 아직은 어둠이 짙고, 갈 길을 가로막은 세력이 준동하고 있습니다만, 오는 새벽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기존 체제의 병이 심각하면 할수록 새로운 삶의 방식은 밝아오는 듯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때가 아니면, 일이 되지 않습니다. 봄 가을을 거쳐 마치 벼 이삭이 팰 때가 있는 것처럼, 마침내 하늘의 때(天時)가 열리고 있습니다.
다. 지속가능한 삶으로 가는 길 ---> 귀본(歸本), 귀공(歸共), 귀농(歸農) 등 삼귀의(三歸依),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삶
그러면 새로운 삶의 방식은 무엇일까요? 간단히 이야기해서 <하늘의 이치에 따라 순리대로 사는 삶>입니다. 순천(順天)의 삶은 곧 삼귀의(三歸依)의 삶입니다. 삼귀의는 귀본(歸本), 귀공(歸共), 귀농(歸農) 등 세 가지이며, 그것은 삼위일체입니다. 그 중 어느 하나가 빠지면, 나머지도 공허해집니다. 삼귀의(三歸依)의 삶은 저 옛날, 우리 민족이 자연스럽게 영위해온 삶이며, 우리 민족의 DNA에 내장되어 있는 삶입니다. 오래되었고, 새로운 삶의 방식인 <삼귀의>의 삶을 몸에 붙이는 사람이 늘어나고, 그러한 삶이 틀(시스템)을 갖추면, 그것이 곧 한민족 르네상스일 것입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아무나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의 이치에 따라 순리(順理)대로 사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승선(乘船)할 수 있습니다. ‘나뿐’인 생활을 하는 사람, 또는 세상의 다른 존재와 위아래로 ‘벽’을 치고 사는 사람은 누가 막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이 배에 타지 않습니다.
귀본(歸本) : 근원(根源)으로 돌아가, 의지하고, 그에 입각하는 삶을 영위합니다. 근원으로부터 벗어나 ‘나뿐’인 생각, 감정, 말과 행동을 여읩니다. 삶의 뿌리를 근원에 둡니다. 하늘님, 하나님, 하느님, 부처님, 알라, 도(道) 등 종교와 신념에 따라 표현은 다르지만, 모두 하나의 존재를 의미합니다. 나의 뿌리 및 우주 만유(萬有)의 뿌리에 바탕을 두고 생활하는 일, 귀본은 인간과 하늘(神)의 관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귀공(歸共) : 귀본을 전제로 하는 삶을 함께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공동체입니다. 육체가 서로 다르지만, 그 뿌리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자기 형상과 개성에 따라 어울립니다. 삶의 모든 것을 나눕니다. 근본 철학에 조응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공동체를 단위로 생활하는 일, 귀공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귀농(歸農) : 인간은 본래 자연의 뭇 생명과 하나로 어울리며 사는 것이 이치에 맞는 삶입니다. 뭇 생명은 인간을 돌보고, 인간은 뭇 생명을 돌봅니다. 인간중심주의 문명에서 벗어나 동식물, 자연 등과 하나로 어울리는 삶을 영위하는 일, 귀농은 인간과 뭇생명 및 자연의 관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현재의 자본주의 정치경제사회 시스템이 질병, 기후변동, 경제침체, 인종-종교 갈등 등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최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면서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야 할 것입니다. 기존 체제를 이끌어 온 주류(主流) 세력들이 지금까지의 철학과 체제 운영 방식을 바꾸면 길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를 바랍니다. 한편으로는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오지 않았나 하는 판단도 듭니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심각해져 가는 현 체제를 다시 살릴 지혜와 기술이 부족해 보입니다.
라. 저물어 가고 있는 자본(資本)살림, 동터 오는 민본(民本)살림
현대의 자본주의 중앙집권적 국가시스템을 달리 표현하면 자본(資本) 살림이고, 민본정치경제 시스템은 민본 살림입니다.
사람이 그 속에 묻혀 살아가는 삶의 틀(시스템)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류 역사상 존재했거나 존재하고 있는 삶의 시스템은 크게 세 가지로 단순화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나뿐인 사람들이 갖는 철학과 문화가 주류를 이루는 시스템’이요, 그 둘은 ‘질서정연하게 피라미드형 종적(縱的) 위계질서가 구축되어 있는 시스템’이고, 그 셋은 ‘각각 중심인 사람들이 서로 하나됨과 어울림을 이루면서 원(圓)의 한 점이 되어 서로 어깨를 걸어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시스템’입니다. 줄여서 나뿐인 시스템, 종적 위계 시스템, 원형(圓形) 네트워크 시스템 등으로 불러 보겠습니다.
세계 자본주의로 일원화되어 있는 체제는 한편으로는 피라미드형 종적(縱的) 위계체제를 구축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나뿐’인 존재들이 횡행하여 무질서와 약육강식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 체계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靈長)으로서 다른 뭇 생명을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구성원들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설치되어 있어 늘 갈등과 대립, 반목과 죽임이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민본(民本) 살림살이는 민(民)에 뿌리를 두는 정치경제사회 시스템입니다. 이 시스템에서는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습니다. 사람과 자연의 모든 동식물은 공생(共生)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모든 주체들이 소우주로서, 각각 ‘떼를 이루고 있는 알’입니다. 하나의 떼알은 또 다른 떼알과 연대를 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합니다. 마치 나무에 달려있는 포도송이처럼.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시공(時空)에 펼쳐집니다.
마. 호스피스(hospice)와 산파(産婆)
이 세상의 운수는 개벽의 운수라, 천지도 편안치 못하고, 산천 초목도 편안치 못하고, 나는 새, 기는 짐승도 다 편안치 못하리니, 유독 사람만이 따스하게 입고 배부르게 먹으며, 편안하게 도를 구하겠는가? 선천과 후천의 운이 서로 엇갈리어 이치와 기운이 서로 싸우는지라, 만물이 다 싸우니 어찌 사람의 싸움이 없겠는가?
낡은 정치는 이미 물러가고 새 정치는 아직 펴지 못하여, 이치와 기운이 고르지 못할 즈음에 천하가 혼란하리라. 윤리 도덕이 자연이 무너지고, 사람은 다 금수의 무리에 가까우니, 어찌 난리가 아니겠는가?”---해월신사법설, <개벽운수>중에서
낡은 질서가 아직 완전히 물러가지 않았고, 새 질서는 아직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낡은 질서를 잘 거두고, 새 질서를 순조롭게 태동시킬 때입니다. 호스피스와 산파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호스피스는
첫째, 기존 체제의 주류세력들과 각축을 벌여 기존 체제의 자산을 최대한으로 보호합니다.
둘째, 재화와 권력이 기존 체제의 뿌리까지 잘 흘러 들어가도록 제도와 법을 만들면서 그
일을 할 사람들을 조직하여, 다음 세상을 위한 인적-물적 기반이 되도록 합니다.
산파는 지속가능한 삶이 가능한 시스템을 탄생시키는 일을 합니다. 삼귀의의 삶으로 가는 길을 개척합니다.
호스피스와 산파의 두 역할은 곧 양서류(兩棲類)의 삶입니다. 한 사람이, 한 공동체가, 하나의 떼알이 중앙집권적 국가 시스템의 기존 체제에서도 기능을 하고, 새로운 시스템에서도 역할을 합니다. 하나의 국가 시스템안에 있으면서도, 나름 상대적으로 자족적(自足的)인 삶의 틀을 구축합니다. 정치-경제 등의 영역은 물론이고, 문화-의료-교육 등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합니다.
동학농민군들이 왜 그렇게 부질없는 싸움에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는지 이제야 좀 알겠다.
"집강소에 들어가서 잡세는 어떻게 하며 결세는 어떻게 할 것인지 상의도 허고 큰 소리도 내고 그맀는디 아, 그것이 시상 없이 재밌는 일이드란 말여. 우리 일을 우리가 결정하고 득 되는 일을 허는디 신이 안 나? 그렁게 이놈들이 지금까지 지들만 해먹었등개벼."(농민군)
"받아먹지 못한 환곡을 갚고, 노상 부역에다 군포는 군포대로 내는 세상으로 다시 가겠느냐? 양반의 족보를 만드는 데 베를 바치고 수령들의 처첩까지 수발을 들면서 철마다 끌려가 곤장을 맞을 테냐? 나는 그렇게는 못 산다. 우리는 이미 다른 세상을 살았는데 어찌 돌아간단 말이냐? 목숨은 소중하지만 한 번은 죽는 것이다." (전봉준)
---<나라없는 나라>, 이광재, 다산책방
민본 정체경제사회 시스템은 위 인용문에 나오는 ‘다른 세상’입니다.
바. 양서류(兩棲類)와 이군일민(二君一民)
하나의 세상, 두 개의 살림, 즉 양서류의 삶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는 고대 아시아에 존재했던 이군일민(二君一民) 체제를 연상하게 됩니다.
①이군일민 체제는 고대 아시아의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던 정치경제 시스템입니다.
②여기서 군(君)이 상징하는 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 및 자연과 맺는 삶의 시스템입니다. 군(君)은 어떤 시스템의 리더, 즉 천군(天君)과 왕(王)이라는 두 종류의 임금을 의미합니다.
③이군일민 체제의 핵심은 하나의 민(民), 또는 민(民) 공동체가 두 개의 시스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④하나는 중앙집권적 국가 시스템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는 바로 그 소도(蘇塗) 및 소도 간의 네트워크 시스템입니다.
⑤중앙집권적 국가 시스템에서는 교환시장의 원리가 작동되고, 소도(蘇塗) 및 소도 간의 네트워크 시스템에서는 호혜시장(홍익시장)의 원리가 작동됩니다.
⑥중앙집권적 국가시스템은 피라미드형 종적 위계체제이고, 소도(蘇塗) 및 소도간의 네트워크 시스템은 소우주들의 횡적 네트워크 체제입니다.
⑦피라미드형 종적 위계체제는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이 있는 시스템>이고, <사람 밑에 동식물이 있고, 동식물 위에 사람이 있는 시스템>입니다. 이에 비해 소우주들의 횡적 네트워크 체제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동식물 사이에 온전한 평등, 나아가서 무등(無等)의 체제입니다.
⑧중앙집권적 국가시스템이나 민본 네트워크 시스템 모두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의료 등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합니다.
⑨중앙집권적 국가시스템과 민본정치경제시스템은 당분간 공존(共存)할 것입니다. 지금은 전자가 주류(主流)이지만, 점차 후자가 주류로 되어 갈 것입니다.
사.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직접 스스로 해나가는 삶 : 민본
앞으로 우리 사회가 가고자 하는 길을 ‘민본’과 ‘대동’으로 압축하여 사용하려 합니다. 민본(民本)은 정파(政派)와 종파(宗派), 사상과 이념, 보수와 진보 등의 벽을 넘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용어입니다.
정치 : 직접 민주주의
경제 : 민본(民本) 경제, 소규모-자족(自足)-네트워크 및 연대
교육 : 배움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스승을 찾아감
건강-의료 : 스스로 돌보고, 서로 돌봄.
문화 : 스스로 하고-즐기고, 서로 하고 즐김.
수행 : 전문가 수행 문화를 탈피하고 스스로 구함. 생활과 수행을 분리하지 않음.
앞으로의 세상은 진리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삶을 향해 있는 민(民), 즉 보통 사람들이 삶의 모든 것을 직접, 이웃해 있는 사람, 동식물, 자연 등과 어울려 살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 대동 세상
인간 사회에 민본정치경제사회 시스템은 곧 대동 세상을 건설하는 일입니다. 대동 세상은 하늘, 인간, 자연이 하나로 어울려 사는 질서가 서는 세상입니다. 대동 세상은 저 동학이 가고자 한 세상입니다. 그리고 동학 이후에 물밀듯이 다가왔던 서양 사조, 문물, 물질과학 등의 입장에서도 별 반감없이 사용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동아시아의 사상전통에서는 유토피아를 말할 때 늘 대동세상이라는 표현을 써왔다 그럴 때 대동(大同)이란, 큰 천막 아래에서 여러 사람들이 밥을 함께 먹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라고 하는 해석을 들은 적이 있다 공감이 가는 해석이었다. 좋은 세상이란, 밥 먹는 것을 빼놓고는 결코 이야기할 수 없으니까 예수의 행적에서도 가장 뚜렷한 것은 사람들과 밥을 같이 먹는 장면이다. 그리고 밥을 함께 먹되, 그 누구든 차별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예수의 메시지 중 가장 혁명적인 선언의 하나였다. 부자와 가난한 자, 남녀노소, 신분의 비천을 가릴 것 없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종, 민족을 가릴 것 없이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같은 밥상에서 평등한 관계로 밥을 먹는다는 것 - 그것이 바로 천국이고,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이다. ------대동세상과 밥, 무위당의 생명사상 : 김종철(전 녹색평론 발행인)에서 인용
자.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마을(공동체), 새로운 부족(部族)이 등장한다. ------>큰 사람, 큰 마을, 새 부족
우리가 ‘마을’에 대하여 통념(通念)으로 갖고 있는 바, 어느 작은 시골이라는 개념은 이제 상당 부분 수정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중대도시 동(洞)을 마을로 규정지으려는 생각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골마을이나 도시의 마을은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주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국가 권력, 또는 자본이 실질적인 주인입니다. 상당히 많은 분들에게는 거주지로서의 역할만 합니다. 삶터로서의 기능이 온전하지 않습니다.
마을은 일차적으로 민(民)이 중심이 되는 인적(人的) 네트워크가 있어야 구성됩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이곳>에 조응하는 새로운 마을은 우선적으로 순천(順天)의 뜻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네트워크가 이루어지는 다음과 같은 마을입니다.
①하늘의 이치에 따라 순리대로 사는 사람들
②삼귀의(三歸依)를 오롯이 담는 공동체
③삶의 모든 영역에서 최소한의 자족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인적 구성의 마을
④충분히 열려있고, 벽이 없으며, 공동체 밖의 일반 사람들과는 언제든지 오고갈 수 있되, 막(膜)이 있는 공동체
⑤구체적으로 삶의 모든 것(정치, 경제, 문화, 교육, 의료 등)을 나누고, 함께 할 수 있는 마을
⑥큰 마을은 지역의 기반을 가질 수도 있고, 종교-문화 등의 기반을 가질 수도 있다. 지역의 기반을 예로 들자면, 민(民)의 생활권 지역에서 100인(한가정 당 1인) 내외로 구성되는 공동체. 민(民) 생활권 지역이란 시군구 등의 행정구역--->광역형 마을
⑦공동체는 중앙집권적 국가시스템에서의 읍면동 주민자치 활동과 함께, 민본정치경제시스템의 가장 작은 단위로서 역할함
⑧공동체의 형태는 협동조합, 대동계, 치유농장, 온라인 공동체 등 다양하게 할 수 있다.
큰 마을은 지역적으로 농촌의 작은 리(里) 단위 마을보다 광역입니다. 소-중-대도시의 동 단위보다 큽니다. 뜻이 같은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소임에 따라 협력합니다. 큰 마을은 또한 밝음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공동체입니다. 순천(順天)의 삶을 살고자 하는 보통사람(民), 누구나 대인(大人)입니다. 큰 마을은 저 동학의 포(包)와 접(接)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하여, 그 뜻을 계승합니다.
전국의 곳곳에서 저 옛날의 새로운 부족의 초기적 모습에 해당하는 모임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치 저 구약성서(舊約聖書)의 출애급기(出埃及記)에 나오는 백성들처럼, 귀농인으로, 도시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예수처럼 사는 사람들 모임의 일원으로, 붓다로 사는 사람들로 순천(順天)의 새로운 삶을 찾아나서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큰 사람, 큰 마을, 새로운 부족원들은 결국 ‘민본과 대동으로 가는 새로운 삶의 시스템’을 구성하는 방향으로 길을 잡을 것입니다. 마치 실개천들이 모여 강을 이루고 바다로 흘러가듯이......
“대저 대인이란 자는 천지와 더불어 덕을 함께 하며, 일월과 더불어 밝음을 함께 하며, 사시(四時)와 더불어 질서를 함께하며, 귀신과 더불어 길흉을 함께 한다.”---『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
아울러 『맹자(孟子)』 <진심장구 하, 25>에 보면 호생불해(浩生不害)가 맹자에게 악정자(樂正子)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대목이 있는데, 맹자는 호생불해의 질문에 대해 “바람직한 모습을 충실하게 내면화함으로써 그것이 밖으로 빛나는 사람을 대인(大人)이라 한다.”고 대답하는 구절이 있다.
민본(民本) 삶의 틀 안에서 살아가려는 보통사람 또한 누구나 큰사람(大人)입니다. 대인들이 사는 공동체가 바로 큰 마을입니다. 대학의 삼강령(三綱領)은 ‘道在明明, 德在新, 民在止於至善입니다. 민은 지극한 착함을 향하여 있으니, ’지극한 착함‘이란 바로 본성이고, 본성에 착 달라 붙어 있어 꼼짝않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강화 진강산마을공동체의 유상용은 ’마을의 귀환은 원의 귀환‘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피라미드의 왕은 다시 귀환하지 않는다. 대신 둥글게 손을 잡은 보통의 사람들로 이어진 마을이 귀환한다. 이 마을에도 능력과 지혜 있는 자가 있지만, 그는 ‘빈터’로서 사람들이 디디고 살 낮은 땅이 되어 순환한다. 구분은 있으나 분리는 없던 인간의식이 분리-단절의 착각을 일으켜 차차 현상계에도 소유-형벌-계급-국가로 벌어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분열, 찢어지는 아픔을 안고 수 천 년을 살아오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마을은, 작지만 온전한 우주, 물질-소통-영성이 다 갖추어진 작은 완전 사회다. 인간 사회의 본연의 모습이 실현된 곳이다.
마을은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 인생의 원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시간의 원이 완성되는 곳이다. 마을은 순환하는 대자연과 나고 죽는 뭇 생명이 함께 돌고 돌아가는 공간이다.
마을은 본질이 현상에 이루어지는 곳이다.
‘둥글게 손을 잡은 보통 사람’이 ‘인간 본연의 모습을 실현하는 곳’으로서의 마을을 말하고 있습니다. 큰 사람(大人)들이 원을 이루고 사는 ‘큰 마을’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큰 마을은 민본(民本) 삶의 틀이 구현되는 마당입니다. 민(民)이 중심에 있는 세상이 대동(大同) 세상입니다. 대동 세상에서는 자연스럽게 인간과 뭇 생명과 신(神) 등 이 세상을 구성하는 세 주체가 하나로 어울리기 마련입니다.
차. 맺는 말
민본 삶의 틀을 세우려는 인적 네트워크를 목적의식적으로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사회개혁을 목표로 하는 차원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흘러온 세상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탈바꿈(革)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시작은 작고 소박하게. 읍면동, 또는 더 작은 단위 지역에서부터 전국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더 나아가 범지구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민본 네트워크 시스템을 위한 구체적 노력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대업(大業)은 하늘을 덮을 만큼 큽니다. 동시에 작습니다. 작은 지역에서, ‘나뿐’인 삶의 고개를 넘어 착함을 향해 선, 보통사람들이 가는 길입니다. 어렵고도 쉬운 길입니다. 이 지구에서 그 길만이 지속 가능할 것입니다. 줄지어 나타날 코로나19와 같은 괴질, 기후위기 등의 난관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다음의 인류문명을 열어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