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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훤당유고(負暄堂遺稿) / 負暄堂先生年譜卷之全 / 年譜
| 명종 | 15 | 1560 | 경신 | 嘉靖 | 39 | 49 | 겨울, 冬至使로 중국에 가다. 閭陽을 지나던 도중 賊에게 잡혔다가 풀려나다. 長子 吳以和가 子弟軍官으로 따라갔다가 義州에서 病死하다. |
| 명종 | 16 | 1561 | 신유 | 嘉靖 | 40 | 50 | 봄, 돌아와 대사헌, 대사성, 대사간, 병조 참판, 호조 참판을 역임하고, 양관 대제학, 세자빈객을 겸대하다. ○ 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히다. ○ 8월, 첨지중추부사로서 司馬試 試官이 되다. 부훤당(負暄堂) 오상 (吳祥) |
辛酉。先生年五十。春。還朝。歷大司憲,大司諫,大司成,兵曹參判,戶曹參判兼帶兩館大提學,世子賓客。是時。以文章養望。與金 澍,李 珥,閔 箕,鄭 惟吉,林 洙,李 樑,沈 守慶 諸人被選。號爲八文章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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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吳祥 | 1512 | 1573 | 海州 | 祥之 | 負暄堂 |
| 金澍2 | 1512 | 1563 | 安東 | 應霖 | 寓庵, 萬窩 | 文端, 文靖 | 花山君 |
| 李珥 | 1536 | 1584 | 李見龍 | 德水 | 叔獻 | 栗谷, 石潭, 愚齋 | 文成 |
栗谷先生全書卷之三十三 / 附錄 一 / 年譜上
戊午三十七年 先生二十三歲
春。謁退溪李先生于禮安之陶山。
冬。魁別試解。所對天道策。見原編。
考官鄭士龍,梁應鼎諸人。見先生策曰。吾輩經思數日。始構此題。而李某之短晷所對若此。眞天才也。
| 權克禮 | 1531 | 1590 | 安東 | 敬仲 |
| 권극례(權克禮) [문과] 명종(明宗) 13년(1558) 무오(戊午) 별시(別試) 병과(丙科) 2위(05/11) 자(字) 경중(敬仲) 생년 신묘(辛卯) 1531년 (중종 26) 졸년 경인(庚寅)(주1)【補】 1590년 (선조 23) 향년 60세 합격연령 28세 본인본관 안동(安東) 거주지 미상(未詳) 선발인원 11명 [甲1・乙2・丙8] 전력 유학(幼學) 관직 한림(翰林) 관직 이조판서(吏曹判書) |
己未三十八年 先生二十四歲
庚申三十九年 先生二十五歲
有書韓長興敍後語及至夜書懷古詩 竝見原編
辛酉四十年 先生二十六歲
五月。丁贊成公憂。
| 명종 | 13 | 1558 | 무오 | 嘉靖 | 37 | 23 | 봄, 禮安의 陶山書院으로 가서 退溪 李滉을 찾아뵙다. ○ 겨울, 天道策으로 別試에서 장원하다. |
| 명종 | 16 | 1561 | 신유 | 嘉靖 | 40 | 26 | 부친 贊成公의 喪을 당하다. |
| 명종 | 19 | 1564 | 갑자 | 嘉靖 | 43 | 29 | 봄, 聽松 成守琛의 喪에 곡하다. 祭文을 짓고, 후에 行狀을 짓다. ○ 生員進士試에 모두 합격하고 生員試에는 壯元하다. 文科 覆試와 殿試에서도 장원하다. 전후 모두 9차례나 장원하여 九度壯元公이라 불리다. ○ 호조 좌랑이 되다. |
이이(李珥) 숙헌(叔獻) 율곡(栗谷) 문성(文成) 병신(丙申) 1564 29 덕수(德水) 한성([京])
이이(李珥) 숙헌(叔獻) 율곡(栗谷) 문성(文成) 병신(丙申) 1564 29 덕수(德水) 한성([京])
이이(李珥) 숙헌(叔獻) 율곡(栗谷) 문성(文成) 병신(丙申) 1564 29 덕수(德水) 한성([京])
| 閔箕 | 1504 | 1568 | 驪興 | 景說 | 觀物齋 | 文景 |
| 鄭惟吉 | 1515 | 1588 | 東萊 | 吉元 | 林塘, 尙德齋 |
| 임수(林洙) 조선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의 문신ㆍ문인. 본관은 순창(淳昌). 문장에 뛰어나 오상(吳祥)ㆍ김주(金澍) 등과 함께 당대 팔문장(八文章)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 등을 지냄. [문과] 중종(中宗) 23년(1528) 무자(戊子) 별시(別試) 병과(丙科) 2위(04/19) [진사] 중종(中宗) 17년(15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進士) 2등(二等) 4위(9/100) 1543년(중종 38) 사헌부 탄핵 장악원첨정 파직 |
| 이량(李樑) (1519~1563) 조선 명종(明宗) 때의 문신. 효령대군(孝寧大君)의 5세손이며, 정사룡(鄭士龍)의 문인. 윤원형(尹元衡)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되었으나 전횡을 일삼고, 사림(士林)을 숙청하려던 계획이 발각되어 강계(江界)로 유배된 후 죽음. |
| 심수경(沈守慶) | 1516 | 1599 | 풍산(豐山) | 희안(希安), 희안(希顔) | 청천당(聽天堂), 청천(聽天) | 심사손(沈思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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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林泳 | 1649 | 1696 | 羅州 | 德涵 | 滄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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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훤당유고(負暄堂遺稿) / 負暄堂先生年譜補遺 / 年譜補遺
四十年辛酉。先生五十歲。春。還朝。歷大司憲,大司成,大司諫,兵曹參判,戶曹參判兼帶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賓客。○以賜祭文攷之。長烏府。在於陟亞卿之後。舊譜恐失先後也。是時。以文章養望。金 澍,李 珥,林 洙,閔 箕,鄭 惟吉,李 樑,沈 守慶 諸人被選。凡八人號爲八文章云。所被選。不知何選也。○八月。以僉知中樞府事。爲司馬試試官。取趙廷機,洪聖民等二百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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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193권, 선조 38년 11월 3일 癸酉 1/1 기사 / 1605년 명 만력(萬曆) 33년
《주역》의 건괘를 읽다. 입시한 신료들과 근래의 문장·약방 의술·북로남왜의 방비·천재지변 등 국사를 의논하다
上曰: "今之文體, 視祖宗朝如何?" 柳根對曰: "臣少時聞之, 先王朝選文士六七人, 號爲文章養望。 今之文體, 安敢望祖宗朝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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負暄堂遺稿 / 負暄堂遺稿序
昔在中仁明宣之世。德敎休明。彬彬多文學之士。時則有若負暄堂吳公。出而歷事四朝。爲國藎臣。爲世名儒。蓋公天賦超卓。已自幼少時。志于學。與兄溪山公慶。受業於慕齋金先生 安國。克盡向裡之工。先立大本。遂貫穿經史百家。十三歲。擢陞補試異等。所作悲硎谷賦。傳播一世。二十。中進士。又三年而登別試文科。華聞益彰。與鄭林塘 惟吉,閔觀物 箕,沈聽天守慶,李栗谷 珥,金寓菴 澍,林滄溪 洙 諸君子。竝稱八文章。始由侍講院司書。遍歷知製敎,侍讀官,大司成,副提學,大提學,知經筵,左賓客,禮曹判書。以佐聖朝笙鏞黼黻之治。公之文章。於此焉可見矣。若其道義之交。則退溪 李滉,河西 金麟厚,東臯 李浚慶,忍齋 洪暹,石川 林億齡,斗巖金應男,菊磵 尹鉉 諸君子也。公之德行。於此焉可見矣。不惟是已。出而爲東南西三道觀察使。則惠澤之及人者廣矣。入而爲天官冢宰。則選賢以輔治者衆矣。玆豈非學問之力。踐履之實耶。文集之有無。固無損益於公。而今其次胄孫玄模。以年代久遠。散佚泯滅爲恨。捃摭其零金瑣玉於兵燹之餘。爲負暄堂遺稿二卷。又以溪山公之詩若干附焉。命其子采燮。負笈以來。責不佞以序文曰。吾子前旣爲節惠之誄。知吾祖之事行者。宜無如吾子。是爲請。勿謂老耄而固辭。
癸未仲夏長至節。孔巖許傳。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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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林洙)
자(字) 학원(學源)
생년 ?(미상)
졸년 ?(미상)
시대 조선중기
본관 순창(淳昌)
활동분야 문신
[관련정보]
[문과] 중종(中宗) 23년(1528) 무자(戊子) 별시(別試) 병과(丙科) 2위(04/19)
[진사] 중종(中宗) 17년(15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進士) 2등(二等) 4위(9/100)
[상세내용]
임수(林洙)
생졸년 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학원(學源)이다. 본관은 순창(淳昌)이고, 거주지는 충청남도 홍주(洪州)이다.
증조부는 임부(林鳧)이고, 조부는 임계지(林季枝)이며, 부친은 임승후(林承後)이다.
1522년(중종 17) 식년시에 진사 2등 4위로 합격하였고, 1528년(중종 23) 별시에서 병과 2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황해도사(黃海都事)‧온양군수(溫陽郡守)‧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 등을 역임하였다.
1535년(중종 30) 문기(文記)를 위조하여 위법한 송사를 좋아하고, 품행이 바르지 못하여 등용이 불가하다는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았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재차 아뢰면서 탄핵되었다. 1540년(중종 35) 황해도사를 역임하고 있었는데, 사간원(司諫院)에서 천성이 아둔하고 술을 즐겨 마신다며 체직을 청하여 체직되었다. 1542년(중종 37)에 열린 식년추장(武年秋場)에서 고향의 아는 사람의 사정을 봐주어 과장에 입장시켰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구타를 당하였다. 이 일로 사헌부(司憲府)에서 추고를 청하여 잡혀들어갔다. 또한 다음해 1543년(중종 38) 에 사헌부에서 장악원첨정으로서 비루한 행동을 많이했다며 파직을 청하여 해당 관직에서 파직되었다.
[참고문헌]
[집필자] 이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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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팔문장(八文章) 우암(寓菴) 김주(金澍)
구본만 | 기사입력 2010/08/26 [13:14]
우리군 향토사료관에는 조선 명종대 문장과 경학으로 명성이 뛰어났던 팔문장(八文章)으로 유명한 우암(寓菴) 김주(金澍, 1512~1563) 선생과 관련된 유물이 있다. 이 유물은 2005년도에 안동김씨 안렴사공파 문단공 종중에서 우리군 향토사료관에 기증한 유물이다.
1539년 별시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우암은 1563년(명종 18) 5월, 제학으로 있을때 선계변무사로 명나라에가서 태조의 호적을 바로 고친 이른바 종계변무를 깨끗이 마무리한 공으로 국가 공신이 된 인물이다. 그는 이 과업을 수행하는 도중 이질에 걸렸으나, 병을 무릅쓰고 일을 완수한 뒤, 1563년 9월 17일 밤에 빈관(賓館) 옥하관(玉河館)에서 향년 52세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명나라 세종은 애도를 표하며 특별히 예부에 명하여 자작나무로 관(棺)을 만들게 하고, 폐백은 자폐(紫幣, 자주색 비단)로 하여 상례를 잘 치르게 하였다.
1563년 11월 25일, 우암의 부음을 들은 명종은 크게 슬퍼하여 조회를 이틀간 중지하고 소찬(素饌)을 올리게 하였으며, 특별히 정헌대부 예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에 추증하였다. 또한 우암에게 전(田) 30결과 외거노비 5명을 하사하였다.
1565년 정월 27일 여주 흥천면 귀백리 백양동에 우암의 묘를 안장하였으며 1580년 부인이 죽자 선생의 묘에 합장하였다. 여주 귀백리는 우암의 고조부인 김환(金丸)이 충북 오창에서 이곳으로 입향한 이후 (구)안동김씨가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우암집』에는 「묘표음기」가 실려있으나 현재 그 비갈(碑碣)의 소재는 알 수 없다. 1590년(선조 23) 그의 공이 인정되어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화산군(花山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우암은 1544년 임금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시강관이 된 이후 『주역(周易)』·『강목(綱目)』·『서전(書傳)』등을 진강하였는데, 특히 『서전』에 능통하였다. 우암은 36세되던 1547년(명종 2) 특정한 경전에 전공을 지닌 전경문신(傳經文臣)에 선발되었다. 이 당시 경회루에서 전경문신을 대상으로 강경을 할 때, 우암은 『서전』에서 통(通)의 성적을 받았던 것이다.
1560년에는 문장양망(文章養望)으로 선발되어 왕명을 받들어 배율(排律)을 지어 올렸다. 이때 오상, 정유길, 민기, 심수경, 이량, 이이, 임수 등 문장양망에 선발된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팔문장(八文章)이라 불렸다. 즉 1560년(명종 15) 7월에 명종은 문장으로서 명망이 있는 신료를 선발하여 우대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당시 선생의 나이 49세때 선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몇가지 사실만으로 볼 때 우암의 문학과 경학은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증된 유물 중 『광국지경록(光國志慶錄)』은 종계변무가 깨끗이 마무리된 1588년(선조 21)에 선조임금이 종묘(宗廟)에 고하였는데, 숙종 때에 이르러 이를 다시 종묘에 고하고, 왕이 친히 지은 시에 대하여 신하들이 지은 시를 모아 엮은 귀한 책이다. 1703년(숙종 29) 목판본 1책으로 간행하였다.
또한 우암 김주의 문집인 『우암집(寓菴集)』은 원래 모두 7권1책으로 엮어 기유년(1789, 정조13)에 목판본(木版本)으로 간행되었으나, 내용이 소략하여 후손이 우암과 관련된 기록들을 보강하여 1934년에 6권3책의 목활자본(木活字本)으로 중간(重刊)한 것이다.
안동김씨 문단공 종중에서는 이 『우암집』에 대해 국역사업을 추진하여 2005년 2월 27일 여주 봉황부페에서 『국역 우암 김주문집』 출판기념회를 개최한바 있다.
안동김씨족보(安東金氏族譜)는 1778년(정조2)에 발간된 안동김씨 족보이다. 원래는 총 20권으로 제작된 것인데, 현재 2권과 15권이 결실되어 18권만 남아 있다. 1권의 첫장에는 승정원 도승지 김광국(金光國 1685~?)의 서문이 있다. 목판본으로 인쇄하였지만, 글씨가 뚜렷하고 정교하여 조선후기 족보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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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극례(權克禮)
[문과] 명종(明宗) 13년(1558) 무오(戊午) 별시(別試) 병과(丙科) 2위(05/11)
| 왕대년 | 명종(明宗) 13 |
| 시험일 | 1558년 08월 06일 |
| 합격자발표일 | 1558년 08월 09일 |
| 시험종류 | 별시(別試) |
| 방목정보 | 방목명 : 무오13년별시방(戊午十三年別試榜) 표제명 : 國朝文科榜目 권수제 : 國朝文科榜目卷之七 |
| 시험장소 |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 |
| 시험관 | 문형(文衡) 정사룡(鄭士龍) |
| 문과장원 | 장원급제 : 오운기(吳雲驥) 합격인원 : 11명 |
| 시험실시이유 | 별시이다. 세자 책봉을 축하하기 위하여 실시한 시험이다. |
| 특이사항 | 모든 종합방목(문과)에 “별시방”으로 나오고, 실시 이유로 “세자책봉경(世子冊封慶)”을 언급하고 있다. 이 세자는 바로 13세로 요절하는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1563)이다. 그리고 모두 실시일을 8월 9일이라고 적고 있다. 규백육본에 무과 장원 남언순(南彦純), 승지를 지냈다고 나오는데, 오기이다. 남언순은 다음에 나오는 10월에 실시되는 식년시의 무과 장원이다. 국중도본에는 시험관이 나온다. 실록에 의하면 8월 6일에 근정전에서 문과를, 광화문 밖에서 무과를 실시하였다. |
| 출전방목명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 106]) |
| 참고문헌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太學社, 1984.)-[규백육본] 『국조방목(國朝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貴 11655], 國會圖書館, 1971.)-[규귀중본] 『국조방목(國朝榜目)』(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26-47])-[국중도본] 『국조방목(國朝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3538])-[장서각본] 『명종실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