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뤼드박 성모 발현지(기적의 메달)
뤼 뒤 박은 여러 성모님 발현 성지 중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장 많이 담고 있는성지라 할수 있다. 뤼 뒤 박 발현은성모님이 당신의 신분 을 ‘ 원죄없이잉태되신 마리아’ 라고 알려주시어 무염시태
교리의 본격적인 시발점이 되었으며,성모님 발현의 시대를 여는 첫 번째 발현이자,전에 볼수 없는새로운 성모상이 등장한 발현이다. 예전에는 성자를안고 발현하셨다). 그리고 레지오 마리 애의 수호성인인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가 예언한,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반드시 와 야 할 성모님의 시대가 드디어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는 발현이다. 또한 성모님의 지시에 따라 세상에 널리 퍼진 기적의 메달로 유명하며,성모님을 목격 한 시 현자가 성 인품에 오르기도 했다.
가. 성모님의 발현
첫 번째 발현
첫 번째 발현은 사랑의 딸회의 창설자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뱅상드폴)의 축일 전날인 1830년 7월 18일 밤 11시 반경 수도원의 경당에서 일어났다. 축일 전야 행사에서 가타리나 타부레 수련
수녀는 빈첸시오 성인에게 하느님의 어머님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그날 밤에 성모님을 볼 것이라고 확신하며 잠에 들었다. 그녀는 잠결에 세 번이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는데 침대 옆에 너 댓 살로 보이는 어 린아이가 서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그 어린아이,곧 수호천사는 말하였다. “일어나서 경당으로 가십시오.
성모님이 당신을 기다리십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밤 11시 반이 지나 모두들잠들어 있습니다. 내가 당신과 동행할 것입니다.” 그녀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수호천사를 따라 방을 나섰는데 복도가 불빛으로 온통 환한 것을 보고 놀랐다.
가타리나가 경당에 도착하자 수호천사가 문을 열었는데 경당 안은 마치 자정미사를 진행할 때처럼 모든 촛불이 켜져 있있다. 그러나 성모님은 보이지 않았고 수호천사는 그녀를 제대로 이끌었다. 그녀는 제대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야간 사감에게 들켜 벌을 받을지도 모른 다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자정 이 되자 그녀는 실크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어 성모님 이 하얀 겉옷 위 에 하얀 베일과 하늘색 망토를 입고 나타나셨다. 성모님이 감실 왼쪽에 있는 주임신부 자리에 앉으시자 수호천사가 말하였다. “여기에 성모님이 계십니다.” 가타리나는 일어나 성모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다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손을 성모님의 무릎에 얹었는데 이것은 시현자가 발현하신 성모님의 몸과 접촉한 유일한 경우였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너에게 특별한사명을 맡기길 원하신다. 너는큰 슬픔에 빠질 것이나 은총을 입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마라. 프랑스에 혼란과 위험이 닥쳐올 것이다. 십자가와신앙이 모독을 당하고 파리의 대주교가 고통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눈물을 보이셨다. 성모님은 마치 구름과 같이 사라지셨고, 수호천사는 가타리나를 다시 침실로 데려다주었다. 그때 새벽 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훗날 가타리나는그 순간을 이렇게 고백했다. “제 삶에서 가장 황홀했던 순간이며,말로 어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성모님을 만났다는 것과 성모님 이 말씀하신 바를 자신의 고해신부 알라델에게 모두 전하였다.
두 번째 발현
두 번째 발현도 11월 27일 오후 5시 30분경 가타리나가 첫 번째 발현 장소인 경당에서 묵상을 하고 있을 때 일어났다. 발현하신 성모 님은 십자가가 붙어 있는 작은 황금색 지구본을 두 손에 들고 시선을 하늘로 향하고 계셨는데, 여기에는 지구를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의미 가 있다. 잠시 후 지구본이 사라지고 성모님은 두 손을 아래로 향하셨다. 성모님의 손가락에 있는 세 개의 반지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강렬한 빛은 성모님이 밟고 계신 커다란 지구본을 비추었고 이에 성모님은 말씀하셨다. “이 빛은 은총을 구하는 이들에게 베푸는 은총을 상징한다.” 그리고성모님의 발은녹색 바탕에 노란 점이 있는 뱀의 목과 꼬리를 밟고 있었다. 이는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이 너(뱀)의 머리에 상처를 입힌다’는 구절과 연관된 것이다.
이어 성모님의 머리 주위에 타원형의 판 같은 것이 나타났고,이 판에는 황금색 글씨로‘오,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당신께 의탁하는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 었다. 성 모님은 가타리 나에게 이 문장을 기도로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 문장이 현재 유명한 무염시태 기도문이다. 그리고 이 타원형의 판이 뒤로 돌면서 그 뒷면이 보였다. 판의 중앙에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십자가와 성모님을 상징하는 알파벳 엠M 자가 겹쳐진 문양이 있었으며, 문양 아래에는 예수님의 성심을상징하는 가시관을 쓴 심장과성모님 성심을 상징하는 칼에 찔린 심장이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그때 성모님의 얼굴 주위에는 열두 개의 별이 밝은 빛을 내며 돌고 있었는데, 이는 성모님 이 열두사도 위에 세워진 교회의 어머니임을 의미한다. 성모님은 가타리나에게 “지금 본 것을 그대로 재현하여 메달로 만들도록 하여라. 이 메달을지니는 사람들은 큰 은총을 받을 것이다. 그 은총은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에 게 풍성히 내릴 것이다”라고 약속한 뒤 사라지셨다.
세 번째 발현
1830년 I2월 30일,성모님이 경당에서 묵상하고 있는 가타리나에게 마지막으로 나타나셨다. 그녀는 제단 뒤에서 옷이 스치는 소리를 들었고 빛을 볼 수 있었다. 이어 제대의 중앙에 나타나신 성모님은 “이 빛은성모님에게 자비를요청하는사람을위한은총의 빛이다. 이제 더 이상 나를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11월 27일에 당부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강조하셨다. 가타리 나는 알라델 신부에게 성모님의 메시지를다시 전하였다.
나. 발현 장소
가타리나 수련수녀가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경당은 빈첸시오 아바오로사랑의 딸회의 본원에 있다. 사랑의 딸회는 1633년 11월 29일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와 성 루이즈 드 마리야크가 파리 뤼 뒤 박에 세운 병자와 가난한 이들의 간호를 담당하는 수도회로, 여자 수도회 최초의 활동 수도회로 평가받고 있다. 빈첸시오는 프랑스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어려서부터 목동으로 일했으나 그의 재능을 발견한 아버지의 지원으로 프란치스
코회 수도원에 맡겨져 교육을 받았고,1600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고아와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일생을 바치며 자선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는데, 이런 이유로 1885년 레오 13세는 그를 모든 자선단체와 병원의 수호성 인으로 선포하였다. 청 빈한 생활을 하며 가난한 이들을 도왔던 대표적인 성인으로 이탈리아에 프란치스코 성인이 있다면 프랑스에는 빈첸시오 성인이 있는 것이다. 1668년에는 사랑의 딸회가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1813년 사랑의 딸회는 나폴레옹 제국의 법령에 의해 현재 위치에 있는 뤼 뒤 박부지와 건물의 사용권을 확보하였다. 2년 후 1815년 6월 28일부터 그곳을 사랑의 딸회 본원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성모님이 발현하신 경당은 1815년 8월 6일 완성되어 봉헌되었다. 1815년 30명으로 시작한 본원 수녀가 500명까지 늘어나자,1849년 경당 확장 공사가 이루어졌다. 1856년에는 지금 성지에서 볼 수 있는 성모상이 제작되어 배치되었다.
그 후 성모상은 몇 차례 이동 끝에 1881년 현재 위치에 자리 잡았고, 1897년 교황 레오 13세의 허락을받아성모상에 대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1930년에는 발현 1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내부 개조가 이루어졌다. 제단 상부의 벽면이 크게 늘어났고, 그곳에 첫 번째 발현의 모습이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졌으며, 2층 상단의 보가 철거되어 개구부가 크게 확대되면서 경당에 개방성과 충분한 빛이 확보되었다, 3년 후 제단 위 벽면에 현재 경당에서 볼수 있는 벽화가 다시 그려졌다.
1980년 경당 전체에 대한 복원이 대규모로 진행되었고, 경당이 새로이 단장되어 열린 5월 31일에는 교황요한 바오로2세가 방문하여 직접 미사를 집 전하였다.
다. 시현자
가타리나는1806년 5월 2일 프랑스 부르고뉴주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십 남매 중 여덟 째인 그녀는 9세때 어머니 마들렌을 여의고 어려운 생활환경으로 학교를 다닐수없어서 읽고 쓰는 법도 배우지 못하였다. 그러나 12세 때 첫영성체를 받은 이후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1.61^ 이상 떨어진 경당으로 가서 미사에 참례했다.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금식하였으며 엄격한 보속도 잘지켰다. 1828년 그녀가 22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 피에르는딸이 신앙
생활에 지나치게 빠지지 않게 하려고파리 인근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오빠에게 보냈다. 그녀는 식당에서 일하던 중 어느 날 우연히 사랑의딸회라는 수도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찾아갔다. 수도원 응접실에는 어느 노 신부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데,그 초상화는 18세 때 꿈에서 본 신부의 모습과 똑같았다. 자신을 안내하던 수녀에 게 저분이 누구냐고 묻자 사랑의 딸회 창립자인 성 빈헨시오 아 바오로라고 말해 주었다. 그녀의 꿈에서 그 신부는 “너는 나한테오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정말꿈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이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하여 수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830년 1월 가타리나는 파리 근교 샤티용쉬르센에 있는 사랑의 딸회에 입회하였고, 3개월 후 파리 뤼 뒤 박에 있는 본원으로 이동하였다. 수녀가 된 후 가타리나라는 수도명을 받았으며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다음 해인 1831년 1월 30일에는 정식으로 착복식을 하고 다음 날부터 파리 한구석에 있는 가난한 동네인 뤼드뢰이의 엉기앙호스피스로 보내져서 46년 동안 노인과 병자, 가
난한 이들을 돌보았다. 1876년 12월 31 일 70세의 나이로 선종하였고 유해는 호스피스의 성당 지하 묘지에 묻혔다. 가타리나는 자신이 체험한 성모님의 발현을 고해신부 외에는 결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이는 성모님이 그녀에게 요구하신 것이었고,그녀는 이를 죽을 때까지 지키면서 자신에 게 올 수 있는 세상의 불필요한 관심을 차단할 수 있었다. 1876년 12월 31일 선종 때까지 그녀가성모님을 만난사람이며, 기적의 메달에 관한 메시지를 교회에 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이는 시현자가 자신의 생전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유일한 사례이다.
1933년에는 시복 조사를 위해 가타리나의 유해가 밖으로 꺼내졌는데, 전혀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 후 유해는 사랑의 딸회 경당에 있는 유리관으로 이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타리나는 1933년 5월 28일 교황 비오 11 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47년 7월 27일 교황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라. 기적의 메달
가타리나 수녀는 고해신부인 알라델에게 성모님의 발현을 알리며 메달을 만들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젊은 수련수녀의 환각으로 간주하여 바로 허락하지 않고 그저 일상을 관찰하였다. 알라델 신부는 1 년 넘게 가타리나를 관찰한 이후 그녀에 대한 신뢰가 생기자 파리 대교구장인 이아생트 루이 드 겔렝 대주교에게 가타리나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성모님의 발현과 그 메시지를 알렸다. 파리 대교구는 세밀한 조사를 벌이고서 가톨릭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메달 주조를 허락하였다. 1년이 넘는 관찰과정과 성모님이 보여 주신 메달의 모습을 제대로 재현하는 과정을 거친 끝에 1832년 6월 30일 최초의 메달이 2,000개로 제작되었다.
메달 앞면에는 성모님과 무염시태 기도문을,뒷면에는 십자가와 엠M 자문양, 예수님 성심과성모님 성심 그리고 12개의 별을 새겨 넣었다. 메달에 가타리나 수녀가 보았던 모든 것이 빠짐없이 들어가게된 것이다. 1832년2월 파리에 콜레라가발생하여 이미 2만명 이상이 사망하게 되자, 사랑의 딸회는 콜레라 환자들에게 먼저 메달을 나누어 주었고,많은 환자들이 전염병에서 회복되 었다.
1834년 50만 개, 1835년 100만 개, 1839년 1000만 개, 가타리나 수녀가 선종한 내76년까지 무려 10억 개의 메달이 전 세계에 배포되었다. 특히 1842년 로마에서 유대인 알퐁스가 이 메달을 목을 걸고 성모님을 목격한 뒤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는 기적이 일어나자 메달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처음에는 메달의 이름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메달, 즉 무염시태 메달이었으나 수개월 동안 메달로 인하여 수많은 치유와 개종 등이 보고되면서 점차 기적의 메달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이 기적의 메달을 지니고 신앙생활을 하였다. 19세기에 기적의 메달은 수백만 명의 믿음을 이끌어 내는 촉매 역할을 하였고, 기적의 메달 전파와 동시에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한신심도 확산되었다.
마.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레지오 마리 애의 수호성인 중 한 분인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는『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에서 성모님의 발현과 성모님의 원죄없는 잉태에 관한 교의 선포로부터 레지오 마리애를 포함한 성모님 군대의 출현을 일련의 과정으로 예언하였다"레지오 마리애 공인 교본』,212 쪽).『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오실 때 먼저 성모님이 계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에도 먼저 성모님의 시대가 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모님의 시대를 지키고 이끄는 것이 바로 성모님의 군대인데, 성 루도비코 마리아는『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114절에서 세속과 악마와 부패된 본성과 맞서 싸울 성모님의 군대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성모님의 군대가 전 세계에이미 5단체나 존재하고 있다는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① 1917년 성 막시 밀리 아노 마리 아 콜베가 창설한 성모기사회
② 1921 년 프랭크 더프가 창설한 레지오 마리 애
③ 1943년 키아라 루빅 이 창설한 포콜라레 운동(마리아사업회)
④ 1946년 해 럴드 콜건이 설 립한 푸른 군대(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⑤ 1972년 스테파노곱비가시작한 마리아사제 운동
성모님의 시대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성모님의 군대가 존재한 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고 성 루도비코 마리아의 예언과도 어긋난다.
따라서 성모님의 군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어느 시점에 이미 성모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성모님의 시대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성모님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성모님의 군대도 본격적으로 시작되 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므로 성모님의 군대가 최초로 창설된 1917년 이전에 성모님과 관련하여 일어난 중요 사건이 바로 성모님의 시대가 시작되 었음을 알려 주는 표징 이라 할 수 있다. 1917년 이전에 성모님과 관련한 최대 사건은 바로 ‘성모님 발현의 시대’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1830년 뤼 뒤 박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신 것이 성모님 발현시대의 시작으로,이후 100년 동안 지역 주교의 공인과 교황청의 인
정을 받은 성모님 발현이 무려 11 건이나 되면서 성모님 발현의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 성모님 발현의 시대가 끝날무렵부터 성모님의 군대가 연속적으로 창설된 것이다. 이는 루도비코가 예언한 성모님의 발현과 성모님의 군대가 일련의 과정에 있다는 것과도 일치한다. 즉 뤼뒤박의 성모님 발현은 성모님 발현 시대의 시작이며 동시에 성모님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바. 성지 소개
뤼뒤박 성지는 골목길에 있는 초록색 문을 통하여 들어갈 수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천장이 없는 긴 통로가나온다. 우선 통로 왼쪽에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의 성상이 있으며,벽면에는 기적의 메달로 은총과 치유의 기적을 체험한사람들의 감사관과 뤼 뒤 박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에 대해 설명하는 게시판이 있다. 통로의 다른 한쪽에는 성물방이 있으며 통로끝에는 성모님이 발현하신 경당이 있다. 경당은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으며 2층에도 신자석이 있어 경당을 내려다보며 미사에 참례할 수 있다. 성지가 골목길에 위치하다 보니 성지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기 어렵고 성지로 들어와도 순례할 수 있는 공간이 작다. 성지를 방문한다면 성물방에 들러 기적의 메달을 구입하자. 무염시태 성모님이 발현하신 성지에서 무염시태 메달을 직접 구입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미사 시간과 성지 개방 시간을 성지 공식 홈페이지를통해 미리 확인하고방문하는 것이 좋다.
[자료: 세계의 성모발현 성지를 찾아서. 분도출판사. 최하경 지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