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임금님들의 치통(齒痛) –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다
임금님도 사람인지라 태어나서 많은 질병에 시달림을 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겠지요. 그 많은 질병 중에서도 치통은 고도로 의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며 무서워하는 질병입니다. 지금과 같은 의학기술이 없었던 조선시대, 특히 한 나라의 지존이자 국가 그 자체였던 임금님들은 과연 치통을 어떻게 치료하였을까요?
치통으로 고생한 임금님 중 가장 먼저 기록에 이름을 올린 임금은 성종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1년 7월 8일자를 보면 “내가 치통을 앓은 지 해가 넘었는데, 널리 의약을 시험하였으나 효력이 없다. (중략) 명나라 사신에게 물으면 저들이 반드시 마음을 다하여 약을 구할 것이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 나라의 주인이 체면 불구하고 약을 구해달라고 할 정도의 통증이 바로 치통이지요.
성종의 맏아들 연산군도 치통을 피해갈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고 해야 할까 폐위되기 6개월여 전인 연산군 12년 2월 28일 관련 관청으로 하여금 양치질 할 수 있는 나무를 만들라고 명을 내립니다. 기록상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칫솔을 사용한 사람은 바로 연산군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양치질의 궁중용어인 ‘수부수하다’가 연산군 때 처음 생겨났다고 합니다.
연산군의 광폭한 행동이 어머니를 죽게 만든 신하들에 대한 사무친 원한 때문이었겠지만 어쩌면 치통이 일정 부분 작용을 하지는 않았을까 한번 쯤 상상도 해봅니다. 성종의 치통 유전자는 연산군도 모자라 이복동생인 중종마저 고생하게 만들었다고 해요.
치통에 관한 임금의 기록은 광해군 때 다시 등장합니다. 이 때는 명의 허준이 어의로 활동하고 있는 시기였지만 허준도 딱히 치통을 치료하는 방법은 몰랐던 듯합니다. 그로부터 약 삼백년이 흐른 뒤 고종과 순종도 치통으로 고생하는데요, 일본에 먼저 들어온 근대 의학의 혜택을 입은 부자(父子)는 다행히 큰 고통 없이 치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신분의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치통은 큰 고통을 안겨주는 질병임에 틀림이 없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