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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 150주년 역사신문 편집. 2편
10. 베르뇌 주교 체포 이후 충청도 지역 전체로 박해 확산
1866년 병인박해 전후 충청도 지역 신자 현황
1866년 병인박해 이전까지 19세기 중반의 조선 천주교회에서 교세가 가장 성한 지역은 충청도였다. 관변 자료인 「포도청등록」과 교회 사료인 「치명일기」ㆍ「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기록된 전체 신자 수는 3475명이다. 이 중 출신지가 분명한 신자 937명 가운데 42%를 차지하는 396명이 충청도 신자다. 이는 병인박해 시기 천주교 신자의 절반 가까이 되는 이들이 충청도에 거주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곧 충청도가 병인박해 시기 조선 천주교회의 신앙 중심지임을 웅변하고 있다.
1866년 12월 현재 조선 천주교회는 지난 1861년 10월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가 설정한 8개 사목구로 나뉘어 있다<표 참조>. 이 중 5개 사목구가 충청도 지역이다. 배론 성 요셉 신학교를 제외한 1861년 충청도 교회 통계를 보면 상부 내포 홍주 지역(홍주, 면천, 당진, 덕산, 아산, 온양, 신창, 예산, 청양, 대흥)에 387명의 신자가 있다. 하부 내포 서부 충청도 지역(태안, 서산, 해미, 결성, 보령, 남포, 비인, 서천, 홍산)에는 신자 170명이 거주한다. 또 충청도 동북부(단양, 목천, 연풍, 영춘, 전의, 제천, 직산, 진천, 천안, 청안, 청주, 청풍, 충주)지역에는 249명의 신자가 성사생활을 하고 있다. 아울러 공주와 인근(강경, 금산, 노성, 보은, 부여, 연기, 연산, 영동, 옥천, 은진, 임천, 정산, 진감, 한산, 황간) 지역에는 신자 218명이 터하고 있다.
베르뇌 주교가 작성한 이 통계를 보면 충청도 지역 신자의 50% 이상이 내포에 거주하고 있으며, 상부내포 지방 신자 비율이 가장 높고, 충청도 교회의 중심지가 바로 홍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주요 순교지
1861년부터 올해 1866년 병인년까지 충청도 지역에서 사목하는 사제는 모두 8명이다. 다블뤼 주교와 조안노ㆍ랑드르ㆍ리델ㆍ페롱ㆍ칼래ㆍ오메트르ㆍ위앵 신부가 바로 이들이다. 올해 2월 23일 베르뇌 주교의 체포로 시작된 병인박해는 3월 2일 배론 성 요셉 신학교 교수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를 체포하면서 충청도 지역으로 확산했다. 이후 다블뤼 주교, 위앵ㆍ오메트르 신부가 순교하고, 리델ㆍ칼래ㆍ페롱 신부가 중국으로 피신하면서 충청도 교회는 풍비박산이 났다. 1866년 12월 말 현재 올해 충남 지역에서 순교한 천주교 신자는 공주 109명, 홍주 43명, 해미 28명 등 총 180명으로 집계됐다.
눈여겨볼 만한 것은 갈마진두 순교자를 제외하고 병인년 충청도 지역 순교자 대다수가 신중한 판결을 위해 3번 심리하는 삼복제를 따르지 않고 곧바로 사형됐다는 점이다. 또 충청도에선 순교자들이 일반적으로 교수형에 처해졌고, 사형 판결을 받기 전에 장살과 아사로 옥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홍주와 해미에선 생매장과 같은 법이 정하지 않은 형벌이 남용됐다.
갈마진두(갈매못) : 수군절도사가 상주하던 공충수영(公忠水營)이 있던 곳으로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ㆍ위앵 신부, 장주기(요셉), 황석두(루카)가 1866년 3월 30일 갈마형장 모래밭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해미읍성 : 정3품 현감 겸 진영장이 주재하던 곳. 진영 동헌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서문 밖에서 교수형과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또 조산리와 읍내리의 여숫골 진둠벙에서 순교자들이 생매장됐다. 옥터 옆의 호야나무에는 천주교인을 매달아 몽둥이로 고문한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공주 감영 : 충청 관찰사가 관할하는 감영으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전 베드로, 1866년 3월 손자선(토마스) 등 초기부터 지금까지 많은 신자가 이곳에 갇혀 고문을 받고 옥사했다. 이달 곧 12월에도 김원중(스테파노), 최천여(베드로), 최종여(라자로), 고의진(요셉), 배문호(베드로) 등이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공주 황새바위 : 충청 진영 자리로 이곳 역시 공주 감영과 같이 초기 때부터 이어져 온 순교지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을 비롯한 초대 교회 회장 10여 명이 여기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목에 큰 항쇄 칼을 쓴 죄수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죽어갔기 때문에 ‘항쇄바위’라고도 불린다.
홍주 관아와 진영 : 충청도 교회의 신앙 중심지였던 홍주인 만큼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도 700여 명에 이른다. 특히 홍주 목사의 동헌인 근민당과 이곳 진영장의 동헌인 경사당에서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 내포 지역 첫 순교자인 원시장(베드로)이 1792년 옥사한 이후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라우렌시오), 황일광(시몬), 이여삼(바오로), 최대종(요셉) 등이 순교했다. 또 모방ㆍ샤스탕 신부가 이곳에 투옥됐다가 서울 좌포청으로 압송돼 순교했다. 1866년 올 한해 49명이 천주교 신자가 홍주 관아와 진영에서 순교했다.
11. 신유박해(1801년)로 쓰러진 전라도 교회에 다시 박해의 불길이
전주 진영 군사들의 훈령장인 숲정이는 중죄인의 처형지였다. 조선 천주교회는 신유, 기해, 병인박해 때 이곳에서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다. 숲정이 순교지를 기념해 성모자상과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병인박해의 불길이 전라도 지방까지 휩쓸기 시작한 것은 1866년 12월부터다. 올해(1866년) 전라도 박해는 전주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으나 곧 여산까지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전주 지역 박해 상황에 앞서 전라도 천주교회에 대해 살펴보자.
전라도 교회 현황
전라도에 천주교를 전파한 사람은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6~1801)이다. 전주 초남이 출신인 그는 경기 양근 권철신(암브로시오)의 집에서 서학을 탐구하다 1784년 이승훈(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전라도 첫 천주교 신자인 그는 가족과 식솔들을 영세 입교시켜 고향인 전주에 신앙 공동체를 이룬다. 이후 그는 이종사촌인 윤지충(바오로, 1758~1791)과 외사촌인 권상연(야고보, 1751~1791)에게 세례를 줘 전라도 북부 지역인 진산에도 복음을 전했다. 유항검은 이어 김제, 영광 등지에도 복음을 전해 ‘호남의 사도’가 됐다.
윤지충은 1791년 5월 모친상을 당했다.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 권씨는 장례 때 교회 가르침에 어긋나는 미신적 행위를 절대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에 그는 외종형 권상연과 상의해 고인의 상례를 갖추었으나 제사와 신주를 모시지 않았다. 이들의 ‘폐제분주’ (廢祭焚主) 는 전국에 즉각 알려졌다. 유생들은 왕에게 패륜적인 역적 행위라며 이들을 참형할 것을 상소했다. 정조 임금은 이 사건이 정치적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역적죄가 아닌 일반 형사범으로 사건 처리를 해 처형하도록 판결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1년 12월 8일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돼 조선 천주교회 첫 순교자가 됐다.
주목할 또 한 명이 있다. 윤지헌(프란치스코, 1764~1801)이다. 윤지충의 동생인 그는 형이 처형되고 가문이 폐족되자 고산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그는 때마침 저구리로 이사 온 충청도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2~1801)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이뤘다.
한편, 유항검은 1785년 8월 주문모 신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조선 교회가 박해를 벗어나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서양의 큰 배를 보내 줄 것을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청하는 일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편지에서 주 신부는 △ 북경 주교에게 서양 큰 배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는 청원서를 쓸 것 △ 작성된 청원서에 지도층 신자들의 연대 서명을 받을 것 △ 북경까지 청원서를 들고 갈 인물을 추천할 것 △ 이 일에 필요한 경비를 담당할 것 등을 당부했다.
유항검은 동생 유관검과 조카 유중태, 윤지헌과 함께 이 일을 구체화해 밀사로 황심을 추천하고 최창현, 황사영 등이 연대 서명한 청원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경비 400냥도 내놓았다. 황심은 1797년 1월 28일 북경에 도착해 구베아 주교에게 주문모 신부의 편지와 조선 신자들의 청원서를 전달했으나 거절당하고 만다. 이후에도 유항검과 윤지헌은 조선 밀사를 북경 교구에 파견하는 일을 주도적으로 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지자 이들은 전라도 교회 지도자로 일찌감치 체포된다. 심문 과정에서 유관검의 배교로 밀사를 보내 서양 배를 보내 달라고 청원한 사건이 발각돼 모반대역죄로 능지처사 형을 받고 전주 남문 밖에서 순교했다. 신유박해로 전라도 교회는 거의 전멸했다. 전라도 신자 200여 명이 순교했다. 여파가 너무 컸다. 살아남은 신자들은 전라도 지역 깊은 산골짜기와 섬으로 들어갔다. 또 경북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등지로 피신했다. 19세기 중반 전라도 교회는 전주, 여산, 진산, 고산, 무장, 영광, 정읍, 곡성, 남원, 순창 등지로 확산하지만 1861년 10월 베르뇌 주교가 전국을 8개 사목구로 나눌 때도 독립 구역으로 포함되지 못했다.
1866년 병인박해 전라도 순교자와 순교지
올해(1866년) 전라도에 병인박해의 불씨가 제일 먼저 튄 곳은 전주다. 12월 5일부터 이틀간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에서 살던 손선지(베드로, 1820~1866), 한재권(요셉, 1829~1866), 정문호(바르톨로메오, 1801~1866)와 소양면 유상리 성지동의 조화서(베드로, 1814~1866), 조윤호(요셉, 1848~1866), 이명서(베드로, 1820~1866), 정원지(베드로, 1846~1866) 등이 체포돼 전주 옥에 갇혔다. 아울러 진산가새벌에 사는 김영삼(1847~1866)이 체포돼 전주 진영으로, 고산 넓은 바위에 살던 박 도미니코가 체포돼 여산으로 끌려갔다.
전주옥에 갇힌 8명의 신자 중 손선지, 한재권, 조화서, 이명서, 정문호, 정원지는 갖은 형벌에도 배교하지 않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김영삼도 옥에 갇힌 지 두 달 후 20살 나이로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처형됐다. 조화서의 아들 조윤호는 부자나 형제를 한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칼로 처형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12월 18일 전주 서천교 다리 밑 장터에서 태장 200여 대를 맞고 18살 나이로 순교했다.
전주 숲정이는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순교지다. 이곳은 전주 진영 군사들이 훈련하던 장소로 중죄인의 형장으로도 사용됐다. 신유박해 때에는 전라도 사도 유항검의 처 신희와 며느리 이순이(루갈다), 유관검의 처 이육희와 아들 유중성(마태오)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또 김대건(베드로), 이태권(베드로), 이일언(욥), 신태보(베드로), 정태봉(바오로) 등이 기해박해 때 숲정이에서 참수됐다.
12. 박해의 칼날, 밀양 등 교우촌을 쑥대밭으로
경상도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1790년대 후반이다. 충청도 지역 신자들이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경상도로 이주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퍼져 나갔다. 특히 안동, 문경, 상주, 풍기 등 경상도 북부 지역으로 많이 이주했다. 1798년 경상도로 이주한 충청도 홍주 출신인 황일광(시몬, 1757~1802)과 김대건 신부의 종조부인 김종한(안드레아, 1768~1816) 순교자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 1815년과 1827년에 체포된 경상도 북부 지역 신자 대부분이 충청도에서 박해를 피해온 이들이었다.
경상도 남부 지역은 1801년 신유박해 전후로 유배 온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졌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언양으로 유배 간 김범우(토마스, 1751~1787)다. 아울러 경상도 북부 지역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동래, 김해, 밀양, 언양 등지로 이주하면서 경상도 남부 지역 신앙 전파에 한몫했다.
이런 이유로 경상도 지역 교우촌은 충청도와 맞닿아 있는 경상도 북서부 지역과 남쪽 해안가 지역에 집중 형성됐고, 두 지역을 제외한 내륙 중부권에는 신자들이 거의 살지 않았다. 경상도 중부 내륙으로 신자들이 모여 산 것은 19세기 중반에 와서다. 따라서 선산, 성주, 김천, 경주, 청도, 영천, 군위, 칠곡, 대구, 울산, 동래, 김해, 산청, 창원 등지의 교우촌은 1860년대에 생겨난 것이다.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가 1861년 10월 조선 교회 전체를 8개 사목구로 나눌 때 경상도에 서북부와 서부 2개 지역을 설정한 것으로 보아 적지 않은 신자들이 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상도 지역은 1866년 병인박해 초기부터 피해를 보았다.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를 체포해 본격적인 박해의 불씨를 당기기 전인 1월 26일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이 요한이 문경에서 체포돼 공주에서 순교했다. 1866년 현재 경상도 서북부 사목구는 페롱 신부가, 경상도 서부 사목구는 칼레 신부가 담당하고 있다. 리델 신부도 경상도 지역 일부를 책임지고 있다. 이들 세 신부는 지난 2월 23일 베르뇌ㆍ다블뤼 주교와 위앵ㆍ오메트르 신부가 체포돼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 긴급회의를 한 후 박해 소식을 프랑스에 알리기 위해 중국으로 탈출하기로 했다. 먼저 리델 신부가 장치선ㆍ최선일 등과 함께 7월 1일 중국으로 떠났고, 페롱ㆍ칼레 신부는 10월 11일 탈출해 같은 달 26일 체푸에 도착했다. 이들의 탈출로 조선 교회는 다시 목자 없는 교회가 됐다.
올 한해 경상도 지역의 대표적인 박해지는 밀양이다. 포졸들의 습격으로 경상감영으로 압송된 신자들 가운데 밀양 백산 출신 오야고보(42)가 3월 15일에, 밀양 명례에 사는 신석복(마르코, 39)이 3월 31일 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3월 성직자와 조선 교회 지도급 인사들의 순교 이후 경상도 지역의 박해도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지난 9월부터 석 달간의 병인양요 사건 이후 11월 21일부터 전국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는 제2차 박해가 다시 시작됐다. 경상도에서도 상주, 문경 한실과 여우목, 진주, 함안, 대구, 통영 지역 교우촌이 박해의 불길로 쑥대밭이 됐다. 이때 체포된 이윤일(요한), 박상근(마티아), 정창문(안토니오), 구한선(타대오), 김기량(펠릭스 베드로) 등의 사형이 설 전인 내년 1월 초에 집행될 예정이다.
-.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
신석복(마르코, 1828~1866)은 밀양 명례에서 태어났다. 순교하기 10여 년 전인 20대 후반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웁실 출신인 김부연을 아내로 맞아 5명의 자녀를 뒀다. 소금과 누룩 장수였던 그는 진해 웅천 장터를 드나들며 장사를 했다. 올해 초 병인박해가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대구의 경상감영 포졸들이 명례까지 들이닥쳤다.
포졸들은 신석복의 집을 약탈해 재산을 탈취하고, 집이 보이는 가동 나루터 인근에서 잠복해 있다가 장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를 체포했다.
포졸들은 하룻밤 사이에 그에게 무수한 형벌을 가했다. 석방을 빌미로 가족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였다. 가족은 돈 80냥을 가지고 따라와 포졸들과 협상했다. 이를 안 신석복은 가족에게 “나를 위해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마라”고 당부했다.
그의 당부는 초대 교회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주교의 말과 닮았다. 이냐시오 주교는 107년 12월 20일 로마 원형 극장에서 사자 밥이 돼 순교했다. 그는 순교하기 전 로마 신자들에게 “나는 모든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여러분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내가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죽으러 간다고 모두에게 알렸습니다. 나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제게 베풀지 마십시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내버려 두십시오.…형제들이여, 나를 잊어버리십시오. 내가 이 생명을 얻는 데 방해하지 마십시오”라고 간곡히 청했다.
신석복은 이처럼 가족에겐 “나를 위해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마라”고 당부했지만, 포졸들에겐 “나를 놓아 준다 해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이라고 강변했다. 그는 대구 경상감영에서 세 차례 모진 형벌을 받았다. 그의 온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뼈가 부러지고 옷은 피로 물들었다.
신석복은 3월 31일 경상감영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13. 새해에도 천주교인 처형, ‘피바람’은 계속
고종 임금은 올해 1월 1일 대왕대비의 육순을 맞아 죄인들을 사면한다는 교서를 내렸다. 고승지 심승택이 지은 고종의 교시에는 “이처럼 성대하고 큰 경사에는 다른 사람에게도 크게 은택을 베푸는 거조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법전을 쳐들음에 어진 마음으로 이끌어서 따르고, 경사를 만나 은혜를 베푸는 예법을 드러냄에 시기를 상고해 보니 옳은 것이다. 이달 초하룻날이 새기 이전에 범한 각종 죄 가운데 잡범(雜犯) 사죄(死罪) 이상을 제외한 도류(徒流) 이하 죄인을 모두 용서한다”고 사면을 선포했다. 하지만 천주교인들은 국사범이었기에 사면 대상에서 제외됐다.
경상도
올해 천주교인의 처형은 대구 감영에서 먼저 시작했다. 1월 21일 충청도 홍주 사람 이윤일(요한)이 문경 여우목에서 체포돼 대구 경상감영으로 끌려왔다가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같은 날 문경 한실에서 잡힌 김예기도 함께 참수됐다. 관덕정은 대구읍성 남문 밖에 있던 연병장으로 군관과 별무사를 선발하던 곳이다. 이 연병장 가장자리인 아미산 등마루에 처형장이 있었는데 주로 국사범들을 공개 처형했다.
경남 진주에서도 연초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죽어 나갔다. 진주 허유고개에 살던 정찬문(안토니오)은45세 나이로 진주 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1월 25일 순교했다.
통영에서는 제주 함덕 출신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이 1월 통영 관아에서 교수형을 받고 처형됐다. 포졸들은 김기량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그의 시신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전라도
전라도 지역도 올 한해 내내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이 끊이지 않았다. 올 2월 전라도 고산 소양에 살던 양반 출신 김사집(필립보)이 모친과 함께 전주 진영 포졸들에게 체포돼 옥에 갇혔다가 5월 순교했다. 또 경상도 사람 이택경의 아들이 전라도 진산 오항동에 이사해 살다가 지난 5월 김사집과 함께 전주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소양면 유상리에 살던 이 서방은 올해(1867년) 7월 체포된 후 전주 숲정이에서참수형을 받았다.
리고 8월 4일에는 전라도 고산 호엄에 살던 오 아가타가 최 베드로와 함께 여산 포졸들에게 잡혀 끌려가다가 최 베드로는 도중에 도망치고, 아가타는 전주로 압송돼 순교했다. 같은 날 고산 모약골에 살던 박 베드로도 여산 포졸들에게 체포돼 전주 옥에 갇힌 다음 신앙을 증거하다 매 맞아 죽었다.
지난해 체포된 남종삼의 아들 남명희와 홍봉주의 아들은 만 15세가 되자 올가을 전주 싸전다리 건너편 초록바위에서 교수형에 처해졌고, 시신은 전주천에 버려졌다.
1866년 병인년 박해 때 새남터에서 남종삼(요한)이 순교하자 가족을 한 감옥에 가두지 않는다는 국법에 따라 남종삼의 부친 남상교(아우구스티노)는 공주 감영으로, 14살밖에 안 된 큰아들 남명희는 전주감영으로 이송됐다. 또 남종삼의 부인 이조이(필로메나)는 노비가 돼 종살이했다.
충남 예산 사람인 홍봉주(토마스)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홍낙민(루카)의 손자로 부친 홍재영(프로타시오) 역시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 홍봉주 가문은 4대가 신유ㆍ기해ㆍ병인박해를 거치며 순교했다.
이들의 처형은 8월 3일 대사헌 김병규와 대사간 김기찬, 사간 권종록, 장령 김양연ㆍ황정연, 지평 고경준ㆍ이은춘, 헌납 송규호, 정언 이연수ㆍ권인두 등이 고종에게 올린 계(啓)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이들은 “남종삼ㆍ홍봉주가 몰래 나라를 팔아먹을 흉측한 생각을 품고 근거 없는 요사한 말을 내뱉어 한세상을 선동하고 뭇사람을 현혹하였습니다. 그들이 한 소행을 따져 보면 남종삼과 홍봉주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였으니, 근래 사교가 마구 퍼져 화란의 기미가 만들어진 것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됐습니다”라며 두 당사자만 주벌하지 말고 가족 모두에게 연좌제를 시행해 사형에 처할 것을 간했다고 밝히고 있다.
충청도
충청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1867년 12월 말 현재 올 한 해 동안 공주에서 56명, 홍주에서 17명, 해미에서 6명 등 총 79명이 순교했다. 이 중 13명이 타지역 사람이다.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은 누구인가
김기량(펠릭스 베드로, 1816~1867)는 천주교 신자들에겐 ‘제주도의 사도’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제주목 함덕리 출신인 그는 1857년 2월 18일 일행 넷과 함께 배를 타고 서귀진에서 모슬포로 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 그해 3월 30일 중국 광동성 해안에서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됐다.
영국인 선원들은 그가 조선인임을 확인하고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인계한다. 이곳에서 김기량은 조선인 신학생 이바울리노를 만났고, 그에게 가톨릭 교리를 배웠다.
그는 1857년 5월 31일 홍콩 대표부 부대표인 루세이유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조선으로 귀국했다. 귀국 직후 배티 교우촌에 있던 최양업과 페롱 신부를 만나 제주도 복음화를 위해 투신할 것을 다짐했다.
1858년 5월 제주도로 귀환한 그는 고향 제주도에서 가족과 뱃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1866년 10월 장사하러 통영으로 갔다가 게섬에서 체포돼 순교했다.
14. 설상가상, 덕산 사건으로 천주교인 박해 가속
1868년 5월 10일 오후 5시 30분쯤 충청도 덕산에 있는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 1788~1836)의 묘가서양인들에 의해 파헤쳐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남연군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선대인(先大人)이자 현국왕인 고종의 할아버지이다.
이번 사건을 주도한 범인은 유다계 독일인 상인으로 인류학자이기도 한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로 밝혀졌다. 또 중국 상해 미국 영사관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한 미국인 목사 프레더릭 헨리 배리 젠킨스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조선 선교사 스타니슬라오 페롱 신부 등 백인 10명과 마닐라 출신 선원 20명, 중국인 인부 100명, 조선인 6명이 동조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남연군 시신을 탈취해 조정에 통상을 위한 개항과 그리스도교 신앙 자유를 요구하기 위해 범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오페르트 일행은 1일 독일인 묄러가 선장인 증기선 차이나 호를 타고 상해에서 출발해 6일 나가사키를 거쳐 8일 밤 10시 서해안 남양만을 통해 9일 오전 10시 행담도에 정박했다. 오페르트 일행은 10일 새벽 차이나 호의 기선인 그레타 호로 옮겨타고 삽교천을 거슬러 오전 11시 구만포에 상륙해 덕산읍 가야산 중턱에 있는 남연군 묘에 도착, 오후 5시 30분부터 다음 날 새벽이 밝을 때까지 밤새도록 무덤을 파헤쳤다.
하지만 이들은 봉분 한쪽을 파냈으나 단단한 석회층을 뚫지 못해 남연군의 시신을 탈취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오페르트 일행은 썰물 때가 되어 물이 빠지면 차이나 호로 돌아가지 못해 생명이 위험해질 것으로 판단, 작업을 중지하고 11일 오전 6시쯤 그레타 호를 정박해 놓은 곳으로 돌아가 12일 행담도에서 차이나 호로 갈아타고 아산만으로 떠나 영종도 인근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13일 남연군 무덤이 파헤쳐진 ‘덕산 사건’을 보고받은 조정은 큰 충격에 빠졌다. 고종은 “덕산의 묘지에 서양놈들이 침입해 사초를 훼손한 변고가 있다고 하니 아주 놀랍고 황송한 일”이라며 “홍주 목사 한응필을 가승지(假承旨)로 임명하니 빨리 달려가서 철저히 조사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고종은 아울러 “바다 밖의 서양놈들이 어떻게 길을 알아서 거침없이 쳐들어왔겠는가? 필시 우리나라의 간사한 무리 가운데 그들을 부추기고 길을 인도한 자가 있었을 것”이라며 “이번에 간사한 무리로서 법망에서 빠져나간 자에 대해서는 안으로는 포도청에서, 밖으로는 각 진영에서 일일이 붙잡아 남김없이 처단하라”고 명했다.
조정 대신들은 이에 “서양인들이 변란을 일으킨 것은 조선 사람들이 부추기고 호응한 결과라며 천주교인들을 모두 잡아 처형할 것을 고종에게 건의했다”고 밝혔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12일 영종 첨사 신효철로부터 오페르트가 보낸 통상 교섭 서한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해 마닐라 선원 2명이 사망하고, 유럽인 1명이 부상당했다. 서한에는 “남의 무덤을 판 것은 예의 없는 행동임을 알지만, 귀국의 안위가 오히려 귀하의 처리에 달려 있으니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으면 좋은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일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몇 달 지나지 않아 우환을 당할 것”이라는 협박성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을 확인됐다.
이에 흥선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를 추적하라”고 명하고 “덕산 사건 이면에 천주교도의 내응(內應)이 있다며 사학쟁이를 잡아들일 것”을 명했다.
이 사건에 대해 외신도 상세히 다뤘다. 5월 22일 자 상해 영자 신문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는 ‘도굴을 목적으로 한 어설픈 원정’이란 제목 아래 서양인들이 남연군 묘를 파헤친 내용을 소개하면서 “유다인과 미국인은 배에 남아 있었고 페롱 신부만 장터에 상륙해 작은 규모의 일행들을 이끌고 산을 올랐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어 “그들이 찾던 무덤을 발견하고 땅을 팠으나 봉분 밑에서 지하 무덤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벽돌 구조물을 발견하고 몹시 놀랐으며 그것을 부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지니고 있지 않아 계획을 단념해야만 했다”고 전했다.
천주교인 대대적 색출 작업 벌여
오페르트 일행이 남연군 묘를 파헤친 덕산 사건으로 잠잠하던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가속화되고 있다.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지시로 한성 포도청과 각 도 감영에서 천주교인을 체포하기 위한 대대적인 색출 작업이 벌어지고 있다.
이번 천주교인 단속으로 중국을 왕래하던 교회 밀사 최인서(요한), 장치선을 비롯해 이정식(요한), 양재현(마르티노), 이양등(베드로), 김종륜(루카), 허인백(야고보) 등 수많은 신자가 서울 포도청과 절두산, 경기도 수원, 남한산성, 죽산, 남양, 충청도 덕산, 해미, 공주, 홍주, 충주, 청주, 전라도 전주, 나주, 여산, 경상도 대구, 울산, 진주, 황해도 해주, 황주, 함경도 영흥 등지에서 순교했다.
조정은 체포된 천주교인들에게 참수형을 선고했으나 지방, 특히 남연군 묘가 있던 충청도 덕산과 해미 일대에선 생매장과 백지사형(白紙死刑)과 같은 간혹한 방법으로 천주교인들의 처형이 자행됐다.
15. 천주교인 '패륜적 흉악범, 국가 전복자' 오명 쓰게 돼
남연군 묘 파헤친 덕산 사건 자행한 페롱 신부, 그는 누구인가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덕산 사건으로 잠잠하던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전국에서 재점화됐다. 이와 함께 이 사건을 계획하고 자행한 결정적 인물인 페롱 신부와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페롱 신부는
스타니슬라오 페롱 신부는 1827년 2월 프랑스 동프롱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즈 소ㆍ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850년 12월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플레르와 아르장탕에서 사목하다 1854년 10월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해 1857년 3월 조선에 입국했다.
조선 선교사로 활동하던 그는 1861년부터는 경상도 서북부 지역을 맡아 사목했고, 1866년 병인박해 때 베르뇌ㆍ다블뤼 주교와 사제 7명이 순교한 후 조선 선교지 장상이 됐다. 그는 중국 상해에 있는 프랑스 공사와 극동 함대에 박해 사실을 알려 도움을 청하기 위해 1866년 7월 리델 신부를 중국으로 보냈고, 칼레 신부와 함께 자신도 10월 조선을 떠나 중국 체푸로 피신했다. 이후 조선 재입국을 시도하던 그는 1868년 5월 오페르트 일행과 동조해 남연군 묘를 파헤치는 덕산 사건을 일으켰다.
위정자들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
조선의 위정자들은 덕산 사건으로 천주교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인식했다. 먼저 박해의 정당성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덕산 사건을 병인양요의 연장선 위에서 파악해 천주교인들은 외세를 끌어들여 국가를 전복하려는 자들이라고 확신했다.
위정자들은 천주교는 사악한 가르침으로 조선 사회의 바탕을 이루는 유교적 윤리 덕목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근절해야 한다고 보았는데, 임금의 할아버지 무덤마저 파헤쳤다고 하니 과연 천주교도들은 패륜의 극치에 이른 흉악한 무리임을 판명됐다고 결론지었다.
또한, 오래전부터 위정자들은 조선의 천주교인들과 프랑스 선교사들이 외세를 끌어들여 조정을 뒤엎으려는 흉계를 지닌 자들이라는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의심은 1866년 병인양요 당시 리델 신부가 길 안내를 한 것이나, 덕산 사건에 조선 신자들이 연루된 것을 보면서 확신으로 굳어졌다.
위정자들은 1866년 2월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가 체포되면서 시작된 병인박해, 7월에 있었던 제네럴 셔먼호 사건, 9월부터 11월까지 4개월간 2차례에 걸쳐서 진행됐던 병인양요, 2년 뒤인 1868년 4월 미군함 셰난도어 호의 내한, 그리고 1개월 뒤에 터진 덕산 사건은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파악했다.
왜 사건을 공모했나
페롱 신부는 병인양요와 같은 대규모 군사 작전으로는 조선 천주교회의 회생을 도모할 수 없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조선 조정에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중국 조정의 중재를 통해 박해를 종식시키고 교우들과 선교사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봤다. 하지만 중국 주재 프랑스 공사의 미온적인 태도에 실망한 페롱 신부는 평화적인 방법이라는 미명 아래에 조선 위정자 조상의유골 탈취라는 기상천외한 시도를 감행했다.
페롱 신부는 이 일을 1867년 5월 이전부터 계획한 것으로 파악했다. 자신의 이 계획에 대해 처음으로 내비친 것은 이 파리 신학교 지도자들에게 보낸 1867년 5월 15일 자 편지에서다. 그는 이 편지에서 “저는 꽤 오래전부터 머릿속으로 궁리하던 계획이 하나 있습니다. 미친 짓이 아닌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라고 썼다.
동료 선교사들과 주중 프랑스 공사의 페롱 신부에 대한 평가
주중 프랑스 랄르망 공사는 1868년 6월 22일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덕산 사건에 대해 “해적질이며 추후 사법 조치가 뒤따를 것”이라고 분명히 했다. 르모니에 신부는 “상해에 있는 신부들 모두가 놀라고 괴로워했다”고 답장했다.
리델 신부는 덕산 사건이 박해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보고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만 해도 조정은 유럽인들과 그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는 집주인, 복사, 회장, 가장 영향력 있는 남자 교우들만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1868년에 일어난 불행한 사건으로 … 대원군이 천주교를 증오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도굴 사건 당시 페롱 신부는 상해의 조선인 교우들이 가담하기를 원치 않자 강제로 그들을 배에 태웠고 하선할 때도 권총 소지를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자 개머리판으로 교우들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 이 사건으로 여자 교우들은 순교의 행복도 누리지 못한 채 외교인의 첩이나 노비가 되어 팔려갔고 이후 박해는 5년간 지속됐으며, 부친의 묘 도굴 사건으로 유럽인들에 대한 증오심이 격화된 대원군은 곳곳에 척화비를 세웠습니다”(1877년 12월 6일 델페슈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 선교사 칼레ㆍ마르티노ㆍ리샤르 신부 등도 페롱 신부의 무모한 행동이 박해를 가중시켰다며 그의 조선 재입국을 반대했다.
1869년 제6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리델 주교는 싱가포르에서 조선 입국을 기다리던 페롱 신부에게 “조선으로 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인도 퐁디셰리 포교지 주교가 신부님을 받아들였으니 그곳에서 성직을 수행하라”고 지시했다.
※ 이 기사는 지난 9월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가 주최한 병인 순교 15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에서 조현범(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박해와 양요: 덕산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주제로 발표한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평화신문, 2016년 11월 6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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