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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 모자 *
(1) 화관(花冠)
점점 커지는 가체의 폐단 잡으려다…
작가 미상-[여인 초상]
양반 가문에서 결혼이나 경사가 있을 때 쓰던 의례용 관이다. 화관이 보급된 건
영·정조 이후라고 한다. 조선 중기쯤 여자들 사이에 가체(加髢·부인들의 머리 위에 얹는 큰머리)가
유행하면서 가난한 사람들도 유행을 따르느라 머리카락을 사고파는 등 폐단이 심해졌다.
가체의 크기와 화려한 장식이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영조 때는 열세 살짜리 며느리가 무거운 가체 때문에 목이 부러져 죽은 일도 있었다.
아침 문안 인사를 가려고 방에서 가체를 쓰고 있었는데
시아버지가 갑자기 들어오자 급하게 일어서다 사고를 당했다.
조선 정부는 이 같은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화관을 권장했다. 하지만 화관이 보편화되면서
또 다른 문제가 벌어졌다. 옥이나 금·조개 등으로 화관을 장식하는 데 사치하는 여성이 늘어난 것이다.
가체든 화관이든 과도한 꾸미기와 사치가 조선 시대의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던 셈이다.
화관은 부녀자들이 예복에 갖추어 쓰는 관모의 하나로서
관모라기 보다는 장식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화관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신라 문무왕 때로서, 여자의 복식도 중국 당의 제도를 따르면서
활수의, 색사대(화의, 원삼)와 함께 화관이 전래되었으며, 일반화 시기는 족두리와 마찬가지로
조선 영조때 가체 금지령에서 가체를 대신케 하던 때로 파악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궁중양식이 되어 동기, 무녀, 여령들이 썼으며 그 모양은 약간씩 달랐다.
관에는 오색 구슬로 찬란하게 꽃 모양을 둘렀고 떨나비를 달았다. 이것이 고려에 전승되어
귀족이나 양반계급 부녀자들의 예복에 쓰는 관모가 되었다.
(2) 족두리
노론은 오목한, 소론은 볼록한 모양
화관과 마찬가지로 예복을 입을 때 쓰는 관이다. 고려시대 몽고에서 들어온 풍습으로
알려져 있다. 광해군 때부터 유행해 영·정조 때 가체를 대신하기 위해 보급됐다.
궁중이나 사대부가의 여인들이 쓰던 검은 비단으로 만든 관으로서
아래는 둥글고 위는 여섯모로 되었으며, 속에 솜이 들어 있고 가운데는 비어 있다.
장식이 없는 것은 '민족도리', 패물로 장식을 하면'꾸민족두리'라 한다
(3) 굴레
돌부터 네댓 살까지 쓰는 양반집 모자
조선 후기 상류층 가정에서 돌쟁이부터 4∼5세 남녀 어린이가 쓴 수놓은 모자. 돌 지날 때쯤부터 쓴다고 해서 ‘돌모자’라 불리기도 한다. 방한(防寒)을 겸한 장식적인 쓰개로, 지방에 따라 형태가 약간씩 다르다. 서울의 굴레는 3가닥으로 되었고, 개성의 굴레는 9가닥으로 되었다. 겨울에는 검정 비단으로, 봄·가을에는 갑사(甲紗)로 만들었다. 정수리 부분에는 구슬·보석 등으로 장식을 하기도 하였다.
가닥마다 색이 다르며 수를 놓거나 금박을 박았다. 뒤에는 도투락 댕기를 달고,
(4) 조바위
부녀자들이 사용한 방한모
엘리자베스 키스-[민씨 가문의 규수]
조선 후기부터 서양의 목도리가 등장할 때까지 부녀자들이 사용한 방한모. 겉은 검정 비단, 안은 남색 비단이나 무명이 대부분이며, 겹으로 만들었다. 꼭대기는 열려 있고, 앞이마와 귀 ·머리 전체를 덮는다. 뺨에 닿는 부분은 동그랗게 되어 있어 귀가 완전히 덮이고 길이는 뒤통수를 가릴 정도이다. 귀를 덮는 부분은 안으로 1∼3 cm 오긋하게 휘었다. 옥 ·마노 ·비취 등을 앞과 뒤에 장식하고 오색술을 달았으며, 꼭대기의 앞뒤에 끈목이나 산호줄을 연결했다. 부귀 ·다남 ·수복 ·강녕의 글자와 꽃무늬 금박을 가장자리에 올려 만든 것도 있다. 요즈음도 간혹 돌날 여아들이 금박을 박은 조바위를 착용한다.
(5) 아얌
뒤에는 넓고 긴 아얌드림이 달렸다
아얌과 조바위
겨울에 부녀자들이 나들이할 때 추위를 막으려고 머리에 쓰는 이엄(耳掩). |
이엄은 원래 귀까지 덮는 것이었으나 아얌은 귀를 내놓고 이마만 덮기 때문에 액엄(額掩)이라 불렀다.
아얌은 부녀자들이 겨울나들이때 쓰던 쓰개로서 양반층에서는 방한용으로,
평민층에서는 장식용으로 사용하였다.
윗부분을 둥글게 파서 공간을 두고 앞에 술을 달았다. 이마 둘레의 검은 단에는 모피를 대고
뒤에는 흑색, 자색등의 넓은 비단으로 드림을 길게 달아늘였다.
아얌드림은 댕기와 비슷하며, 검은 자줏빛에는 밀화 ·금판(金板)으로 만든 매미를 군데군데 달아 장식하였다.
앞이마와 뒤에는 자주 또는 검정색 조영(組纓)이나 산호주(珊瑚珠)를 꿴 끈이 달려 있어
끝에 술장식을 드리웠다.
(6) 남바위
겨울에 쓰는 방한모의 한가지'
풍차와 비슷하지만 '볼끼'가 부착되어 있지 않다
조선 초기부터 사용했으며 상류층 남녀가 쓰다가 착용범위가 넓어져 서민층도 썼다.
방한모로는 조바위, 남바위, 풍차, 볼끼, 만선두리, 아얌, 굴레 , 털벙거지 등을 꼽는다.
남바위는 귀와 머리 부분을 가리되 위가 트여 있고,
가장자리에 모피를 대었으며 뒤골을 길게 하여 뒷덜미를 덮게 했다.
겉감은 비단을, 안감은 비단이나 면직을 사용하며, 안에는 따스한 털이나
부드러운 융을 대거나 솜을 두기도 하였다.
풍차, 만선두리, 남바위는 볼끼의 장식을 빼놓고는 그 모양이 비슷했다.
개화기로 접어들면서 조바위가 퍼지게 되자 아얌은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되고
풍차보다는 남바위를 많이 사용하였다.
남바위 위에다 갓을 쓴 노인
일제 강점기에 <조선풍속>이라고 기록되어 나온 빙상 얼음낚시 사진
김홍도-[설후야연(雪後野宴)]
늦었는지? 남바위 쓴 노인(우측 끝)이 헐레벌떡 신발도 벗지 않고
화문석 위로 발을 올려 놓는다.
(7) 볼끼
뺨과 턱을 가리기 위한 겨울철 방한구의 하나
짧은 볼끼
긴 볼끼
안쪽에는 털을 받치고 겉은 주로 남색이나 자주색 비단을 대고, 혹은
가죽이나 헝겊조각에 솜을 두어 기름하게 접어 만든다. 종류에는 짧은 것과 긴 것이 있는데,
짧은 것은 좌우 2개를 남바위에 붙여 턱 밑에서 동여매며,
긴 것은 턱과 양 볼을 가려싸고 양끝에 달린 끈을 머리 위에서 동여맨다.
노인들은 때로 볼끼 위에 남바위를 덧쓰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키스-[결혼식 하객]
엘리자베스 키스-[새해 나들이]
풍차는 조선시대 방한용으로 착용한 모자의 하나로
초기에는 양반계급에서 주로 썼으나 점차 평민화되었다. 뒷목·귀·볼을 모두
감쌀 수 있도록 뒷부분이 목덜미까지 내려오고 귀와 볼을 감싸는 ‘볼끼’가 달려있다.
풍차는 독특한 모양 때문에 ‘풍뎅이’이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뒤에서 보면 풍뎅이를 닮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겉은 흑색, 자색, 남색 단(緞)을, 안은 남색, 초록의 견(絹)을 넣어 만들며
가장자리는 흑색이나 밤색의 토끼, 여우의 모피를 두른다.
형태는 남바위와 비슷하며 꼭대기에는 둥글게 공간을 두었고
귀와 뺨, 턱을 가리는 볼끼를 달아 사용하지 않을 때는 뒤로 제쳐서 끈을 맸다.
여자용은 앞뒤에 봉술을 달고 산호, 비취 등으로 장식한다.
모피를 두른 형태의 것은 겨울용이나 모피를 두르지 않고 안을 융으로 대어
비교적 엷게 만든 것은 늦가을이나 이른 봄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풍차는 조선시대 어휘집에서 풍령(風領), 난이(暖耳)의 대역어로 기록되어 있어
귀를 가리는 볼끼가 더해진 방한구였음을 알 수 있다.
(9) 가리마, 일명 차액(遮額)
조선시대 기녀. 의녀 등이 쓰던 쓰개의 하나
의녀 기녀
신윤복- [청금상련(聽琴賞蓮)]
김홍도- [연광정연회도] 부분
가리마는 조선시대 기녀(技女).의녀(醫女) 등 특수층 여자가 얹은 머리 위에 쓰던 쓰개.
차액(遮額)이라고도 한다. 그 형태를 임하필기<林下筆記>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는
검은색 또는 자색 비단의 가운데를 접어 두 겹으로하고 두꺼운 종이를 그 안에 접어 넣고
머리에 쓰는데 이마에서 정수리를 덮고 뒤에 드리워 어깨를 덮는다고 하였다.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기녀는 검은 베로 된 것을, 의녀는
검은 비단으로 된 것을 쓰는데, 그 형상은 책갑(冊匣)과 같다고 하였다.
이 가리마는 광해군 중기 이후 얹은머리의 금지와 더불어 족두리를 쓰게 되어
차차 사라져갔는데, 신윤복의 그림에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정조 때까지는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0) 전모(氈帽), 일명 지紙삿갓
천인이 쓰던 쓰개의 일종으로 기녀들이 즐겨 썼다
대의 테두리에는 14~16개의 살을 대고 한지를 두 겹으로 바른 뒤에 풀을 발라 말려
부(富),귀(貴),수(壽),복(福) 글자를 꽃이나 나비 무늬와 함께 그렸고, 살 한가운데에
태극을 그려 넣었다. 오복을 빌기 위해 박쥐무늬를 8개 그리기도 하였다.
신윤복-[전모를 쓴 여인]
전모는 천인이 쓰던 쓰개의 일종으로 가늘게 쪼갠 대오리에 기름에 절인
유지로 만들어, 일명 '지삿갓'이라고도 부른다. 형태는 갓과 유사하며
원형으로 되었고, 필요 이상의 크기를 가지고 있어 어깨를 덮고 남을 정도로 넓었다.
전모의 안에는 쓰기에 편하도록 머리에 맞춘 테가 있으며,
머리테 양쪽에 끈을 달아 턱밑에서 매게 만들었다.
성협-[길거리에서 기생을 엿보다]
(11) 너울 [羅兀]
부녀자의 내외용(內外用) 쓰개
조선시대에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쓰던 쓰개로는 너울·족두리·가리마 등이 있다.
너울은 조선시대 여자들의 쓰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고려시대에 들어온 몽고의 유습으로 보인다.
유래에 대해서는 〈연려실기술 燃藜室記述〉 기호조(奇虎條)에 "천을 원립 위에 씌워 아래로 드리우며
얼굴 부분은 망사를 사용하여 앞을 투시할 수 있게 했다"고 하며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궁녀들이 너울을 썼는데 그 종류는 푸른색, 검은색이 있고 직책에 따라 다른데 대개 검정색이 귀하고
푸른색은 천한 것이었다"고 전한다. 유교통치이념 속에서 삼종지도(三從之道)를 강조하는 내외법(內外法)은
여자들로 하여금 함부로 남자들을 만날 수도 없거니와 친척조차 정해진 촌수 이외에는
만나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외출할 때에는 반드시 너울 등으로 얼굴을 가려
상대편 남자들이 볼 수 없도록 했다.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중 '친영반차도'의 일부분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는 정비인 정성왕후와 사별한 영조가 3년 상을 마친 1759년(66세)에
15세 된 정순왕후 김씨를 계비로 맞이하는 혼례식을 기록한 책이다
너울은 주로 멋내기를 좋아하는 기녀들이 바깥나들이를 하거나 말을 탈 때 썼으며,
<가례도감의궤(家禮都監儀軌)>에 실린 행렬도에 말을 탄 시녀(侍女)와 기행나인(騎行內人)들이
너울을 쓴 모습이 그려져 있어, 궁중에서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12) 쓰개치마
조선시대 부녀자들이 나들이할 때
머리와 몸의 윗부분을 가리기 위해 사용한 내외용 쓰개
신윤복- [月下情人]
신윤복-[처네를 쓴 여인]
쓰개치마는 조선시대 상류층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너울 대신 간편하게 사용한
내외용 쓰개이다. 형태는 치마와 같으나 길이가 치마보다 약 30cm정도 짧고 폭도 좁았다.
붉은 색이나 옥색의 홑치마에 옥양목 허리를 달아서 이마에서부터 턱으로 돌린후
머리위로 볼록한 주름을 만들어 썼으며, 허리에 달린 양쪽 끝을 턱밑으로 모아
흘러내리지 않도록 손으로 잡고 다녔다.
옥색 옥양목이나 명주로 만들었으며 계절에 따라 겹으로 하거나 솜을 두기도 하였다.
여름 철에는 사(紗)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아무리 더운 날씨라도
외출시에는 반드시 쓰개치마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신윤복-[휴기답풍携妓踏楓]
쓰개치마의 허리말기에 사용된 백색은 쓰개치마와 착용자의 의복색 사이에 분할선으로 개입되어
배색효과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백색의 개입은 양쪽 색을 선명하게 해주거나 부드럽게 하는
특징을 가지므로, 여인의 쓰개치마에 사용된 백색은 청결하고 화사한 색채이미지와 함께
청초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김홍도-[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의 일부분
1786년 황해도 안릉에 신임 현감이 부임하는 광경을 그린 그림 중 일부분으로
전모를 쓰고 쓰개치마를 어깨에 걸친 여인들, 장옷을 착용한 여인들이 말을 타고 등장한다.
전모는 머리에 써서 가리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쓰개치마는 한쪽 어깨가 드러나도록
두르고 있거나 손에 들고 있어 얼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이목을 끌고 있다.
(13) 장옷(長衣)
조선시대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사용하던 쓰개의 하나
신윤복-[年少踏靑]
김홍도- [路上破顔]
신윤복-[장옷 입은 여인]
장옷은 조선시대 초기에는 서민 부녀자들만 사용했고, 후기로 오면서 양반집 부녀자들도 착용했으나
개화기를 맞아 여성의 활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점차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전체적으로는
두루마기의 형태와 같으나 옷깃, 옷고름, 겨드랑이의 삼각무 등이 다른 색으로 되어 있다.
유물로 남아 있는 장옷은 초록색 길에 깃과 고름은 자주색이고 소매 끝에 흰색의 거들지가 있다.
외출할 때는 앞머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마 위에서 턱 아래로 둘러
고름 부분을 잡을 뿐 소매를 팔에 끼우지 않는다. 조선 후기 장옷의 모습은
신윤복이나 김홍도의 풍속화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능화는 <조선여속고 朝鮮女俗考>에서 "평민의 처는 장옷을 썼다.
장옷은 초록색 명주로 지은 긴 옷으로 머리와 낯을 가리며 종아리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이 장옷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기록에 없으니 알 수 없다."고 했으나, 두루마기가
후기에 여자의 쓰개장옷으로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부녀자들의 장옷 풍습은 나이에 관계없이 조선 말까지 이어진 듯하다.
한말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제임스 게일은 <코리안 스케치>에서 "아줌마는 예순 살이지만,
아직도 거리를 다닐 때는 처녀와 마찬가지로 장옷을 입는다."고 적고 있다.
엄격한 내외법의 전통사회에서 비롯된 장옷 풍습이 개화기 직전까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14) 婦女 삿갓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만든 삿갓.
조선시대 서민층의 여인들이 외출할 때 사용했다
신윤복-노중상봉(路中相逢)
김홍도-[가두매점(街頭買占)]
사내와 한 여인이 춤추는 가운데, 삿갓 쓴 여인이 관객에게 돈을 거두는 모습이다.
아마도 거리에서 즉석 연희와 점을 쳐주는 유랑객들인 것 같다.
갈대나 대오리를 엮어 우산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드는데 가장자리를 육각형으로
엮은 것을 삿갓이라고 한다. 조선시대는 남녀 모두 착용하였던 것으로 김홍도의 <가두매점>에
삿갓을 쓰고 부채를 들고 있는 여인이 있다. 이 여인이 쓴 삿갓은 근처에 서 있는
남성이 쓴 삿갓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혼잡한 평양의 시장길 (1940년)
그런데 후대가 되면, 주로 이북 지역에서는 삿갓을 크게 만들어 여성들의 가리개로
착용하였는데 현전하는 유물을 보면 직경이 90cm 정도로 몸을 가리고도 남는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방갓이 있다. 삿갓의 가장자리가 육각형인데 반해
방갓은 사각형으로 만들어 붙여진 이름으로 역시 여성의 가리개로 사용하였다.
삿갓이나 방갓이나 크기가 커서 두 손으로 잡고 다녀야만 했는데, 길을 가다
사람과 마주칠 때에는 갓을 앞으로 약간 숙여 자신의 얼굴을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삿갓은 대오리나 갈대를 엮어 만든 쓰개로,
비나 햇볕을 가리기 위해 쓰는 농립(農笠), 비 올 때 쓰는 우립(雨笠),
승려들이 쓰는 대삿갓, 서민층의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쓰는 부녀(婦女) 삿갓,
여승이 쓰는 가는 대살로 만든 세대(細竹)삿갓 등이 있다.
삿갓은 먼저 쓰는 사람의 얼굴을 가릴 정도의 길이로 대오리를 끊어
8mm정도로 쪼개고 다듬은 후 꼭지부터 엮기 시작해 끝으로 갈수록 점점 넓은 원추형으로
길게 엮어 제작한다. 가장자리가 육각형을 이루도록 곱게 도련을 하고
안에는 미사리를 넣어 머리에 고정되도록 한다,
(15) 승려(僧侶)의 모자
굴갓, 고깔, 대삿갓. 송낙
왼쪽부터 굴갓. 고깔, 대삿갓, 송낙
굴갓
굴갓은 예전에 벼슬을 가진 중이 쓰는 갓을 이르던 말이다.
대로 만들었으며 위가 둥글게 되어 있다.
조영석-노승휴장(老僧携杖)
제목 그대로 노승이 지팡이를 짚고 간다.
고깔
김홍도-기려문승(騎驢問僧)
나귀 탄 선비가 승려에게 길을 묻는 장면으로
"시(詩)를 들으러 동쪽으로 멀리 가다"라는 제시가 붙어 있다.
김득신-[송하기승松下棋僧]
옷매무새를 흐트린 채 장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은 스님들의 본연의 자세와는
어울리진 않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삭발한 머리 모양은 훈수라도 함직한 뒤쪽 인물의
머리 위에 씌워진 고깔모자와 강한 대조를 이루는데, 바로 이러한 요소는
김득신의 풍속화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해학적인 뜻이라 할 만하다.
오명현-[점괘도]1780년작
수직으로 우뚝 선 두 그루의 소나무 아래에 고깔을 쓴 스님이
요령을 흔들며 점을 치고 있고, 쭈그리고 앉은 소년은 돈주머니를 꺼내고 있다.
이매방의 승무
고깔은 원래 불교의식에서 유래한 것인데 조선시대 불교의 쇠퇴와 더불어
절걸립패가 빈약한 사원의 재정을 모으려고 마을에 내려올 때 쓰던 것이 그 원형이다.
'곳'은 첨각(尖角), '갈'은 관모(冠帽'를 말한다. 절의 상좌(上佐)들이나
무당, 풍물꾼, 나장(羅將-죄인에게 매질을 하는 일이나, 귀양가는 죄인을 압송하는 일을 맡던 관리),
급창(及唱-수령의 명령을 간접으로 받아 큰 소리로 전달하는 일을 맡던 사내종) 등의 하급관리들도 썼다.
대삿갓
가늘게 쪼갠 속대를 엮어
보통 삿갓보다 훨씬 작게 만든 것으로 중이 쓰던 삿갓이다
신윤복-[尼僧迎妓]
송낙(松蘿) 또는 송라립(松蘿笠)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1850년경 제작된 것)
'송라(松蘿) 즉 '소나무겨우살이'를 엮어 만든 모자로
'송라립(松蘿笠)'이라고도 불렀다. 모양새는 위쪽을 촘촘히 엮고
아래는 15cm쯤 엮지 않고 그대로 퍼지게 두었다. 위는 뾰족한 삼각형이나
정수리 부분이 뚫려 있어 바람이 소통한다.
김홍도-[점괘]
고깔과 송낙을 쓴 스님들이 점을 봐주고 있다
신윤복-[기다림]
화사한 봄날, 여인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드리워진 버드나무가 고개 돌린 여인의 애타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뒤로 하고 있는 여인의 손에는 스님들의 모자인 '송낙'이 들려있습니다.
여인은 스님을 기다리는 모양입니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드립니다. ^^
역시 이민혜선생님 이십니다. 그 많은 종류의 모자를 자세하고도 알기 쉽게 정리해 주셨네요. 감사드립니다. 차근차른 넘기면서 마치 조선시대를 여행한 듯한 느낌에 빠져들었습니다. 방갓은 가리개 구실을 했다지만... 그렇게까지 큰 모자는 처음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