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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못 성지의 순교 성인들의 행적과 순교 터 고증
<차기진 / 양업교회사연구소>
1. 머 리 말
‘갈매못 성지’(현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는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1818~1866) 주교, 위앵(M. L. Huin, 閔, 1836~1866) 신부, 오메트르(P. Aumaitre, 吳, 1837~1866) 신부, 張周基(요셉, 1803~1866) 회장, 黃錫斗(루카, 1813~1866) 회장 등 5명의 성인이 군문효수형을 당한 순교 터로, 이에 대한 내용들은 새로운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여러 기록들을 통해 자세히 알려져 왔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이해하기 쉽게 샤를르 달레(Ch. Dallet) 신부의 한국 천주교회사 하권(안응렬․최석우 역주, 분도출판사, 1980)과 성인들의 문초 기록을 중심으로 우선 그들의 순교 행적을 정리해 보았다. 그런 다음 무엇보다도 중요한 갈매못의 순교 터를 정확히 고증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2. 순교 성인들의 행적
1) 생애와 선교 활동
① 다블뤼 주교 ①-1. 한국 천주교회사(하, 76~81쪽)
안토니오 다블뤼(Marie-Nicolas-Antoine Daveluy)는 (프랑스) 아미앵에서 1818년 3월 16일(양) 성 월요일(예수부활대축일 전 주간 월요일)에 태어났다. 1827년에 소년은 생-타쉘(Saint-Acheul) 소속 블라몽(Blamont) 소신학교 1학년에 입학했고, 이듬해 예수회 신부들의 학교가 법령으로 폐쇄되자 생-리키에(Saint-Riquier)의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계속했다. …1836년에 철학 공부를 마친 후 신학 강의를 듣기 위해 생-쉴피스(Saint-Sulpice)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1841년 12월 18일(양)에 사제품을 받았고, 며칠 후 제3 보좌 신부로 루아(Roye)에 보내졌다. 그는 거기에 20개월 동안을 머물렀다. 그러던 중 1843년 10월 4일 모든 조치가 취해져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갔다.
몇 달 동안의 수련을 거친 다블뤼 신부는 다른 신부들과 함께 브레스트(Brest)에서 아르쉬메드(Archimede) 호에 올랐는데, 이 배는 프랑스 대사관 서기관을 중국에 데리고 가는 길이었다. 다블 신부는 임시로 마카오에 파견되어 거기서 최종적인 목적지를 지정 받기로 되어 있었다. …그 후 1845년 7월 하순에 그는 페레올(J. Ferrél, 高) 주교와 함께 상해(上海)를 행하여 출발하였다.
페레올 주교와 그의 동행은 마카오에서 상해로 가는데 12일이 걸렸다. 그들이 도착한 뒤 며칠 후에 상해에서 20~30리 떨어진 곳에 있는 교우촌인 김가항(金家巷) 성당에서 매우 감격적인 의식이 행하여졌다. 1845년 8월 17일 주일에 페레올 주교는 용감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에게 조선인 최초의 사제품을 주었다. 이 서품식에 참석하려고 신자들이 떼를 지어 왔고, 중국인 신부 1명과 서양인 신부 4명이 참석하였다. 축제는 다음 주일 24일에 보충되었으니,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다블뤼 신부의 보좌를 받으며 횡당(橫堂) 소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1주일 후에 새로 서품된 신부는 다시 자기 배(즉 라파엘호)를 타고 그의 주교(페레올)와 주교를 따라오는 선교사(다블뤼)를 몰래 그 배에 모시고 새로운 용기를 가득 안은 채 조선을 향하여 돛을 올렸다.
①-2. 우포도청등록(병인 2월 3일 : 양력 1866년 3월 19일)
죄인 안돈이(安敦伊), 49세, 사호(邪號) 다블뤼(多佛里)
아뢰옵니다.
“너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연유에서 체포되었는지, 민(閔, 즉 위앵 신부)․오(吳, 즉 오메트르 신부) 두 사람이 너와 함께 체포되었으니 범죄 사실을 감히 (숨기지 말고) 사실대로 고하라”고 추문하였더니, 다음과 같이 자백했습니다.
“저는 을사년(1845년)에 중국으로부터 해로를 따라 배를 타고 고(高) 주교(즉 페레올 주교)와 함께 왔고, 임자년(1852년) 12월에는 서울서 생활했습니다. 이미 죽은목숨이 되어 사방을 돌아다니고 먼 지방으로 피신했다가 이제 체포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민․오 두 사람은 비록 거처하는 곳을 몰랐을지라도 포교들이 억지로 유혹하여 (그들에게) 내방하라는 뜻의 서신을 교우 한 사람에게 주었는데, 전해졌는지의 여부는 알지 못합니다. 이제 이미 체포되어 마땅히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다른 사람을 지목하여 말할 것이 없습니다. 헤아려 처분하소서.”
①-3. 우포도청등록(병인 2월 3일)
죄인 안돈이
다시 추문한 것을 아뢰옵니다.
“서양인으로 함께 온 사람이 반드시 한두 명이 아닐 것인데, 다만 이미 죽은 고(高)라는 사람만 말하고 다른 사람은 주뢰형을 받아도 실토하지 않겠다고 하니, 이 주뢰형을 네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 내통한 사람이 누구이고, 주인과 손은 몇 명인지를 하나 하나 사실대로 고하라”고 추문하였더니, 다음과 같이 자백했습니다.
“저는 정사년(1857년)에 부주교(副主敎)의 자리를 받았으니, 서양 교황의 문서가 장(張) 주교(즉 베르뇌 주교)에게 보내지고 (이것이) 저에게 보내진 것입니다. 서양인․동양인을 막론하고 혹 입밖에 낸다면 크게 믿음을 잃는 것이 됩니다. 모진 형벌로 비록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차라리 내 몸이 화를 입을지언정 남에게 해를 미치게 할 수는 없으며, 이 다리가 잘라지면 그만입니다. 다시 할 말은 없습니다. 헤아려 처분하소서.”
② 위앵 신부
②-1. 한국 천주교회사(하, 373쪽)
(프랑스) 랑그르(Langres) 교구의 기용벨(Guyonvelle) 출신인 루카 위앵(Martin-Luc Huin) 신부는 1863년 8월 20일(양)에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1864년경에 사제로 서품된 후 믈레(Melay)와 부아제(Voisey) 본당에서 보좌 신부 직분을 열심으로 하였다. 그는 다른 동료 신부 3명과 함께 1864년 7월 15일에 파리를 떠나 9월 중순경에 홍콩에 도착하여 상해로 보내졌다가 거기서 요동(遼東)으로 가서 조선교구장과 연락을 취하기로 하였다.
②-2. 우포도청등록(병인 2월 3일)
죄인 민 유아눅가, 29세
아뢰옵니다.
“너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연유에서 체포되었는지 범죄 사실을 감히 숨기지 말고 사실대로 고하라”고 추문하였더니, 다음과 같이 자백했습니다.
“저는 작년 5월에 중국으로부터 배를 타고 왔으니, 이제 10개월이 됩니다. 서(徐, 즉 볼리외) 신부, 백(白, 즉 브르트니에르) 신부, 김(金, 즉 도리) 신부 등 4명이 함께 배를 타고 왔는데, 내린 곳은 새로 조선에 도착했으므로 지명을 알지 못하며, 거처한 곳은 말하려 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이제 비록 엄히 문초를 받는다 해도 조선 말을 익히지 않아 알고 있는 것이 없으며, 어릴 때부터 배운 것 이외에는 아뢸 것이 없습니다. 헤아려 처분하소서.”
②-3. 우포도청등록(병인 2월 3일)
죄인 민 유아눅가
다시 추문한 것을 아뢰옵니다.
“너의 혈육(신체)은 곧 네 부모의 혈육이다. 이제 이 모진 형벌로 장차 죽을 지경에 이른다면 능히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견딜 수 있겠는가? 이제 주뢰형을 받으면서 확연히 깨달아 서양인과 조선인이 서로 화응한 자를 말하면 마땅히 즉시 백방할 것이니, 다시 사실대로 고하라”고 추문하였더니, 다음과 같이 자백했습니다.
“저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말할 수 없으며, 죽는 것이 흔쾌할 것이니 하늘에 오르기 때문입니다. 죽음 또한 죽음일 뿐이니 비록 오늘 죽더라도 무방하며, 내일 죽어도 또 무방합니다. 헤아려 처분하소서.”
③ 오메트르 신부
③-1. 한국 천주교회사(하, 342쪽)
베드로 오메트르(Pierre Aumaitre) 신부는 1837년 4월 8일(양) (프랑스) 앵굴렘(Angoulème) 교구의 에젝(Aizecq) 마을에서 태어났고, 1859년 8월 18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했었다. 거기서 3년 동안을 있으면서 신학 공부를 마쳤고, 1862년 6월 14일에 사제로 서품되어 조선 포교지로 임명되고, 그 해 8월 18일 프랑스를 떠나 임지로 향하였다.
③-2. 우포도청등록(병인 2월 3일)
죄인 오 베드로, 30세
아뢰옵니다.
“너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연유에서 체포되었는지 범죄한 사실을 감히 숨기지 말고 사실대로 고하라”고 추문하였더니, 다음과 같이 자백했습니다.
“저는 계해년(1863년) 여름에 프랑스로부터 배를 타고 혼자 왔는데 상륙한 곳은 말할 수 없으며, 뱃사람의 성명 또한 말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내 몸이 욕을 당할지언정 감히 다른 사람에게 해를 미치게 할 수 없습니다. 장(張) 주교는 과연 누차 상견하였으며, 이 밖의 일은 아뢸 것이 없습니다. 헤아려 처분하소서”(우포도청등록, 병인 2월 3일).
③-3. 우포도청등록(병인 2월 3일)
죄인 오 베드로
다시 추문한 것을 아뢰옵니다.
“네가 입국한 후에 내왕하고 머문 일들은 안(安) 주교가 이미 일일이 대답하였다. 반드시 모진 형벌을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사실대로 고하겠느냐? 이제 주뢰형을 받고 다시 사실대로 고하여 생명이 손상되지 않도록 하라”고 추문하였더니, 다음과 같이 자백했습니다.
“저는 프랑스로부터 12명의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왔는데, 6명은 다른 나라의 생가초(生可草, 싱가포르인 듯)라 하는 곳으로 가고, 5명은 중국으로 갔으며, 저는 혼자 조선에 입국했습니다. 비록 형벌을 받아 죽는다고 해도 다른 사람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벌을 받으면 후세에 상을 받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벌을 입으면 후세에 만인의 덕을 얻을 것입니다. 이는 곧 1866년 전에 천주께서 강생하여 가르쳐 주신 것으로, 이는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아 뼈에 새긴 것입니다. 서양인이 몇 사람이고 천주교를 전파한 사람이 누구라는 것은 비록 알고는 있지만, 남의 일을 어찌 사실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형벌을 받아도 좋습니다. 지금 이 모진 형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것은 후세에 마땅히 덕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다시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헤아려 처분하소서.”
④ 장주기(일명 장낙소) 회장
④-1. 한국 천주교회사(하, 432~434쪽)
수원(水源) 고을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마을 태생인 장(張)낙소 요셉은 1826년에 세례를 받고 거의 모든 집안 식구를 개종 시켰었다. 그는 학식 있고 슬기롭고 드물게 볼 수 있는 신심을 가진 신자였으며, 모방(P. Maubant, 羅) 신부가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그를 회장에 임명하였고, 그는 일생동안 이 직분을 다하였다. 네 번이나 박해로 인해 산골로 피신하고 멀리 떨어진 고을로 거처를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가 배론(현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의 舟論)에 자리를 잡은 지 12년이 되는 1855년에 메스트르(J. A. Maistre, 李) 신부가 그리로 와서 신학교(神學校)를 세웠고, 다음해 연말에 푸르티에(C. A. Pourthié, 申妖案) 신부가 도착할 때까지 처음에는 혼자서 학생 3명을 맡아보았다. 그때부터 장(張) 요셉은 신학교의 경리를 맡아보고, 동시에 그 주위에 있는 공소(公所)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이 두 가지 직책을 일체의 찬사를 초월하는 열성과 인내와 열심으로 수행하였다. 푸르티에 신부는 요셉이 그의 오른팔이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 비록 곤궁에 가까운 처지에 이르렀으면서도 그는 자기 봉사에 대한 보수를 결코 받으려 하지 않았고, 여가를 이용하여 자기와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손으로 하는 일을 하였다.
푸르티에 신부가 포졸들에게 돈을 주어 그와 동시에 잡혔던 요셉을 풀어주게 하였다는 말을 (푸르티에 신부 체포 때에)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요셉은 집을 떠나지 않고 있다가 이튿날 선교사들이 떠날 때 소를 타고 그들을 따라갔다. 5리를 갔을 때에 푸르티에 신부가 머리를 돌리니 요셉이 보였다. 신부가 포졸들을 꾸짖자 그들은 요셉에게 돌아가라고 강요하였고, 요셉은 울면서 복종하였다. 닷새 동안을 집에 있다가, 포졸들이 모두 약탈해 갔기 때문에 먹을 것이 떨어졌으므로, 배론에서 30리 떨어진 노럴골(혹은 너레골) 마을의 어떤 교우집으로 식량을 좀 얻으러 갔다. 포졸들이 그 마을들을 점거하고 있었는데, 그 중 몇 사람이 요셉을 알아보고 즉시 체포하였다.
제천(堤川) 관장(官長)은 요셉에 대하여 그에게 제출된 비난들을 듣고 서울에 품위하였다. 서울에서는 “그 사람이 정말 서양인 신부들의 집주인이면 서울로 올려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배교하게 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대답을 보냈다. 관장이 하는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고 선교사들의 집주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라고 단언하였다. 요셉의 점잖은 외모에 감동하여 그를 죽음에서 구하고 싶어진 그 관장은 여러 차례에 걸쳐 직접, 또 부하 아전들을 통하여 요셉의 언명에서 단 한마디를 바꾸게 하려고 해보았으나 헛일이었으니, 요셉은 자기의 언명을 고수하였다.
관장은 다시 조정에 공문을 보냈고, 서울에서는 증거자를 데려오라고 포졸 4명을 보냈다. 요셉은 구류간에 갇혀 관례에 따른 신문과 고문을 거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다블뤼) 주교와 그의 동료들과 함께 형장에 보내 달라고 청하여 그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④-2. 우포도청등록(병인 1월 30일 : 양력 1866년 3월 16일)
죄인 장주기, 64세. 제천현에서 취초한 문목
․신문 : 너는 이경주(李景周)와 같은 무리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진술 : 서양인이 체포되던 날 곧바로 도피했으므로 있는 곳을 알지 못합니다.
․신문 : 이(경주)는 친족이나 아내가 있느냐?
․진술 : 그의 처는 기해년(1839년)에 천주교인들을 체포할 때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습니다. 따라서 처자가 없으며, 또 형제나 지친도 없습니다.
․신문 : 원션시호(원선시오, 즉 빈첸시오)는 누구의 호이냐?
․진술 : 이경주의 호입니다.
․신문 : 서양인의 접주(接主)는 본래 이경주가 아니냐?
․진술 : 친족이나 아내가 없는 자여서 도리어 서양인에게 의탁한 것이니, 어찌 접주가 될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함께 거처한 것을 가지고 접주라고 한다면 불가하지는 않겠습니다.
․신문 : 그러면 네가 바로 접주가 아니냐? 너는 서양인과 산 것이 몇 해나 되느냐?
․진술 : 10여 년이 됩니다. 저를 접주라고 한다면 저 역시 접주가 됩니다. (깊이 생각하다가 잠시 후에 말하기를) 제가 실로 접주에 해당되며, 스스로 이를 맡은 것입니다.
․신문 : 너는 배교할 수 있느냐?
․진술 : 죽더라도 배교할 수 없습니다.
좌우포도청에서 아뢰었다.
“서양인 접주 이경주를 체포하러 포교를 제천현으로 보냈습니다. 제천현감 유남규(柳南珪)의 보고서 안에 ‘이경주는 도망을 했고, 제천현에 사는 장주기라고 하는 사람을 체포해 가둔 뒤에 엄히 문초했더니, 그가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서양인의 접주는 본래 이경주가 아니며, 그는 원래 친속이 없어서 도리어 서양인에게 의탁하였으니 어찌 접주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제가 서양인과 10여 년을 함께 살았으니 접주에 해당되며 스스로 맡은 것이라 했고, 또 배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올려보냅니다. 자세히 조사한다는 뜻에 있어서는 서울 포도청에서 다시 조사하는 것이 옥사의 순서 같습니다’ 했습니다.”
④-3. 우포도청등록(병인 2월 7일 : 양력 1866년 3월 24일)
죄인 장주기, 64세. 사호 요셉[妖習]
아뢰옵니다.
“네가 사학을 배운 사정은 이미 제천현에서 있은 문초 가운데 있으므로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근본과 줄거리, 그리고 화응한 사정을 어찌 아껴서 바른대로 고하지 않겠느냐?” 했더니, 다음과 같이 자백했습니다.
“본래 근본과 줄거리도 없고, 또 화응한 사실도 없으니, 죽어도 바른대로 고할 것이 없습니다. 헤아려 처분하소서.”
④-4. 우포도청등록(병인 2월 7일)
죄인 장주기
다시 추문한 것을 아뢰옵니다.
“너 또한 생명을 지닌 하나의 사람인데, 기왕에 미혹되어 잠시 생명을 버린 것이다. 이제 만약 한마디라도 이를 배척하고 생업으로 돌아간다면, 이는 이른바 마음을 고쳐 귀하게 된다는 것으로 스스로 마땅히 성군(聖君)이 다스리는 세상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했더니, 다음과 같이 자백했습니다.
“저는 본래 수원 태생으로, 을사년(1845년)에 제천으로 이주하여 수학 강습한 것은 큰 임금[大君]과 큰 아비[大父]의 성교(聖敎)였습니다. 비록 형벌 아래서 만 번을 죽더라도 배척할 리 만무합니다. 지만(遲晩 : 늦게 자복하여 미안하다는 상투어로 사형 선고 이전에 진술함)을 감수하겠으니 헤아려 처분하소서.”
⑤ 황석두 회장
⑤-1. 한국 천주교회사(하, 429~430쪽)
황(黃) 루카는 (연풍의) 꽤 부유한 외교인 집안에 태어났는데, 집의 재산을 물려주어 보존케 하려고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던 아버지가 온갖 정성을 기울여 길렀었다. 루카 자신이 이야기한 바에 의하면, 그 때 자기의 희망을 보통 관직과 바꾸지는 않았을 것이라 한다. 그는 그보다 나은 일을 하였으니, 그의 한문 선생의 권고를 따라 천주교로 개종하고 식구 몇 사람도 개종시켰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파산의 위협을 당하는 데 겁이 나서 아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확대를 하였다. 루카는 그것을 훌륭한 인내심으로 참아 받다가 입을 열기만 하면 아버지가 모독적인 언사를 하게 되는 것을 보고는 아버지의 개종을 얻기 전에는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2년 동안 벙어리 노릇을 하였다. 집안에서는 그가 병이 든 것으로 생각하고 별의별 약을 다 써서 그 때문에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는 꿋꿋이 견디어 나갔고,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그가 청하는 은혜를 내려 주셨다. 아버지가 천주교인이 되고 그가 개종하니, 온 집안이 개종하게 되었다. 때는 1839년(기해년)의 박해 후였다.
(1845년에) 페레올 주교가 도착하자 루카는 포교지의 일에 전심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그를 신부(神父)로 만들 생각을 하였으니, 그의 아내가 그와 헤어져서 절제 생활을 하기로 동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정식으로 세워진 수녀원(修女院)이 없으므로 교황청(敎皇廳)에서는 신청된 허락을 주는 것이 적당치 않다고 판단하였다. 루카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루카의 형이 서투른 관리로 오래지 않아 집의 재산을 탕진하여 가족이 곤궁에 빠지고 말았다. 루카는 우선 자기 몫으로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집안 식구들에게 준 다음 좀더 효과적으로 그들을 도와 주려고 신자들의 신용말고는 다른 자본도 없이 여러 가지 불행한 투기를 하였으나, 그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들을 파산시키는 일밖에 성공한 일이 없었다. 선교사들은 그들이 황 루카와 맺고 있던 관계가 그에게 어느 정도의 신용을 마련하여 주지 않을까 염려하고, 또 돈을 꾸어 쓰는 사람들에게 함정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에게 출입을 금하였다. 이 일종의 추방이 10년 동안 지속되었다.
1858년에 페롱(S. Féron, 權) 신부는 루카에게 그의 모든 사업을 포기하도록 결심시키고, 한문 선생으로 채용하였다. 그런 다음 황 루카는 차례로 조안노(P. M. Joanno, 吳) 신부와 베르뇌(S. Breneux, 張敬一) 주교의 회장이 되었다가 마침내 다블뤼 주교의 책 저술과 교정을 도우라고 주교에게 소속되었었다. 그는 매우 검소하게 살았고, 선교사들에게서나 신자들에게서 받는 모든 것은 빚을 갚는 데 쓰였다. 이리하여 모든 이의 신용을 회복하였고, 그의 채권자들조차도 그에게 많은 존경과 애착을 보여주었다. 그는 다블뤼 주교를 떠나고자 하지 않았는데, 과연 그를 죽음에까지 따라 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52세(54세의 잘못)였다.
⑤-2. 우포도청등록(병인 2월 3일)
죄인 황석두, 54세. 사호 뉘가(루카)
아뢰옵니다.
“너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연유에서 체포되었는지, 이제 이 옥의 규칙은 배교하면 살고 배교하지 않으면 죽는 것이니, 전후의 사정과 오늘의 깨달은 단서를 사실대로 말하라”고 추문하였더니, 다음과 같이 자백했습니다.
“저는 본래 연풍(延豊) 태생으로 유업(儒業)에 종사했습니다. 책을 읽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성교(聖敎)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구름이 거치고 하늘을 보는 것 같아 이를 배워 영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영세라는 것은 곧 성교에서 그 덕(德)에 들어가는 문인 것입니다. 창황이 얻음이 있었으니, 어찌 박학 다문한 동료 학자들로 하여금 함께 그 확연함을 담론하도록 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나라에서 이를 엄하게 금하고 형벌과 죽임이 연이어 일어났음에도 이 학문은 계속 번져 경향에 확대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깨닫는 사람은 반드시 깨닫는 바가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안(다블뤼) 주교는 곧 교화황(敎化皇, 즉 교황) 다음인데, 그를 만난 지 이제 18년이 됩니다. 그를 섬기기를 스승처럼 하지만, 단지 스승만으로 주교를 대하는 것은 불가한 것입니다. 그는 본래 정한 곳이 없이 동서로 다녔고, 저는 가는 곳마다 그를 따라 공경하고 모셨습니다. 이제 배교하라는 지시는 영감께서 잘못하신 것입니다. 천주는 큰 임금[大君]이고 또 큰 아비[大父]입니다. 내 몸을 낳아준 부모와 (임금)도 천주와 비교하면 그보다 아래의 임금이나 아래의 부모인 것입니다. 비록 만 번 죽더라도 천주를 배반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어려서부터 충․효 두 자를 깨달아 익히고 생활화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충․효를 행하지 아니함이 없다면, 천하를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는 손바닥을 보는 것 같이 쉬운 일입니다. 배반하라는 한마디는 다시 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밖에는 아뢸 말이 없습니다. 헤아려 처분하소서.”
⑤-3. 우포도청등록(병인 2월 3일)
죄인 황석두
다시 추문한 것을 아뢰옵니다.
“네가 말한 성교는 곧 사교(邪敎)로 인륜을 파괴하는 것이다. 네가 이미 충․효를 말했는데, 어찌 충․효를 지키는 사람이 나라의 법을 범했느냐? 나라의 법을 범하는 것은 불충한 것이고, 신체에 형벌을 받는 것은 불효한 것이다. 깨달았다 하고 얻었다 하니 가히 하늘이 그 혼백을 빼앗았다고 할 것이다. 다시 불충․불효했다는 사실을 지만(遲晩)했다고 공술을 들임으로써 주뢰형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고 추문하였더니, 다음과 같이 자백했습니다.
“제가 받아들인 성교는 1866년 전에 천주께서 강생하여 전한 것입니다. 천하로 하여금 이 학문을 행하도록 하였으니 교화의 지극한 다스림이 가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스스로 깨달음이 깊으면 자연스럽게 얻음이 드러난다는 것은, 비록 도거(刀鋸) 아래 죽더라도 미혹되거나 변함이 전혀 없는 도리인 것입니다. 이제 만일 나라의 법을 범하여 신체가 형벌을 받게 됨을 불충․불효라 한다면, 다만 지만했다고 공술하겠습니다. 헤아려 처분하소서.”
2) 체포와 압송
① 한국 천주교회사(하, 424~429쪽)
며칠 동안에 선교사 6명이 처형되었으나 박해자들의 격노는 가라앉지 않아서 그들은 계속해서 서양인 신부들의 일을 결말짓고자 하였다. 이선이(李先伊)의 밀고로 그들은 서양인 선교사가 적어도 9명이 조선에 있음을 알았었고, 배반자가 신부들이 일상 거처하는 곳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였으므로 서울의 포졸들이 사방으로 파견되었었다.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M. A. Petitnicolas, 朴德老) 신부가 새남터에서 처형되던 바로 그 날(3월 11일, 음력 1월 25일), 이번에는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었다.
대원군(大院君)에게 쓸데없이 불려 왔던 서울을 떠나 다블뤼 주교는 공소 순회를 계속하려고 내포(內浦)로 돌아갔었다. 아직 그 일을 하고 있던 중에 브르트니에르(S. M. A. J. Breteniere, 白) 신부의 쪽지가 교구장이 체포된 사실을 알려 왔다. 맨 처음에 주교는 맹렬한 박해를 믿을 수가 없었고, 조정이 러시아인들과의 정치적인 복잡한 사정에서 더 잘 벗어나기 위하여, 또는 아직 설명되지 않은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하여 주교들과 선교사들을 가까이에 두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서양인들을 추적하라고 보내진 포졸들이 천주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부들을 밀고하게 하려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그들을 때리고 고문하고 죽음과 배교 중 양자 택일을 하게 하는 따위로 가증스러운 폭력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보고 잠시 동안 자수할 생각을 하였다. 그는 자기의 생각을 알리기 위하여 페롱 신부와 리델(F. Ridel, 李福明) 신부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자기를 본받으라고 권유하지도 않고 그러지 말라고 금하지도 않았다. “천주께서 주시는 영감(靈感)에 따르시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베르뇌 주교가 사형 선고를 받게 되리라는 소식을 듣고 다블뤼 주교는 배를 한 척 준비하라고 명령하고 급히 사태에 대한 설명을 써서 몇몇 신자 뱃사공에게 주며 그들이 처음 만날 수 있을 서양 배나 중국 배에 그 편지를 전하기 위하여 난바다로 나가라고 시켰다. 심부름꾼들이 아직 떠나지 않았었는데, 그는 교구장과 그의 세 동료가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블뤼 주교는 또 편지 한 장을 써서 (조선) 포교지가 처하여 있는 급박한 위험에 대하여 더 자세한 내용을 적었다. 그 날 밤으로 배가 떠났으나 아무 배도 만나지 못하였고, 보름 동안을 쓸데없이 이리저리 헤매다가 해안으로 다시 돌아오려는 참인데, 중국인 밀수업자들의 작은 배를 하나 만났으며, 이들이 편지를 받기로 동의하였다. 둘째 편지는 도중에서 없어졌고, 첫째 편지는 만주(滿洲)의 베롤(Verrolles) 주교에게 전해졌는데, 사건이 있은 지 오랜 뒤였다.
그때 오메트르 신부는 수원(水原) 고을 샘골에서 성사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박해 소문이 신자들 가운데 동요를 불러일으켰으므로 일을 중단할 수밖에 없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다블뤼 주교에게 가서 그의 의견과 명령을 청하기로 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그 곳에서 20리 되는 세거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대합덕리) 마을에 있던 위앵 신부를 불러오게 하여, 셋이서 함께 온 하루를 보냈다. 헤어지면서 그들은 믿을 만한 신자들에게 자기들의 존재가 너무 알려졌기 때문에도 그렇고, 더구나 내포 같은 평야 지대에서는 도주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도 그렇고,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그들이 모였던 거더리에 남았고, 오메르트 신부는 15리 떨어진 소덜(현 당진군 합덕읍 점원리의 서더리인 듯)로 갔으며, 위앵 신부는 세거리로 돌아갔다. 그 후 이틀 동안 거더리와 소덜 마을에는 포졸 떼가 침입하여 일곱 차례까지 탐색하였다.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신부는 밤에 바다로 나가려고 식량도 도무지 가지지 않은 채 배를 탔다. 그러나 역풍이 일어 이틀 동안 해안을 떠날 수가 없었고, 마침내 집에 있는 것보다 그 배에 있는 것이 포졸들의 수색을 당할 위험을 훨씬 더 무릅쓰는 것임을 알고 떠났던 마을로 돌아갔다.
다블뤼 주교는 송(손의 잘못) 니콜라오 회장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송 회장의 친척으로 꽤 냉담한 신자가 확실한 소식을 알아보러 서울에 가고자 하여 주교에게서 떠날 허락과 노비를 어렵게 받아냈다. 그것이 3월 10일이었다. (3월) 11일(음력 1월 25일) 아침에 그 사람이 돌아와서 서양 사람들을 잡으러 오는 포졸들을 만났다고 말하였다. 그를 신용하지 않던 다블뤼 주교는 그를 보기를 거절하였다. 그 사람이 배신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도착한 지 몇 시간 후에 포졸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배론 신학교의 신학과 학생 박(만억) 필립보가 그의 앞장을 서고 있었는데, 신자들이 즉시 그를 알아보았다. 군아(郡衙)에서 고문을 당하고 옥에 갇히고 한 것이 며칠 안 되는 그 불행한 젊은이가 과연 유다스의 역할을 하던 것인가. 다블뤼 주교를 위시하여 모든 사람이 그 때에는 그렇게 믿었다. 2~3개월 후 박 필립보는 포졸들이 거더리로 가는 길을 모르기 때문에 그를 억지로 옥에서 끌어내어 강제로 말에 태워 길잡이를 시켰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어떻든 간에, 포졸들이 마을에 침입하였을 때 다블뤼 주교는 신자들의 간청을 들어 나뭇더미 속에 제의류(祭衣類)를 담은 바구니 곁에 숨었다. 포졸들은 모든 집을 뒤지면서 송 니콜라오의 집에 이르렀고, 그 중 한사람이 나뭇더미를 발로 걷어차서 바구니를 발견하였다. 이 첫 번째 성공에 힘을 얻어 좀더 멀리 발길질을 한 번 더 하여 주교의 머리를 찾아냈다. 그가 놀라서 한 발 뒤로 물러섰으나 다블뤼 주교는 일어나면서 말하였다. “무서워하지 마라. 누구를 찾느냐.” “서양 사람들을 찾소” 하고 포졸이 대답하였다. “그러면 나를 잡아라. 나도 서양 사람이다.” 다른 포졸들이 달려와서 주교를 묶지는 않고 그의 방에 가두고 감시만 하였다. 그러나 집주인 송 니콜라오는 결박하였다.
그러는 동안 포졸들은, 그들이 잡도록 책임을 맡은 다른 선교사들의 숨은 곳을 말하라고 다블뤼 주교를 재촉하였다. 주교는 여러 번의 배신으로 도주의 기회가 일체 사라졌다고 확신하고, 또 신자들에게 쓸데없이 약탈과 고문을 당하고 어쩌면 배교를 할 위험을 무릅쓰지 않게 하려고, 그가 편지를 써서 줄 심부름꾼을 아무도 따라가지 않는다는 명백한 조건을 붙여 위앵 신부를 불러오기로 동의하였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세거리의 신자들을 구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포졸들은 주교가 원하는 것을 모두 엄숙하게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 약속은 곧 깨졌으니, 주교는 포졸들이 그가 보내는 두 신자와 함께 떠나는 것을 방문 틈으로 해서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포졸들은 그의 질책과 항의를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신부를 만나본 후, 위앵 신부는 그의 신자 집단으로 돌아가 이튿날 성사 집행을 계속하여 몇 사람의 고해를 들었었다. 성체를 나누어주기 위하여 미사 성제까지 지내기를 원하였었으나, 가장 슬기로운 신자들이 다른 마을로 피신하라고 간청하였다. 밤사이에 그는 높은뫼(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로 갔고, 신 바오로라는 그 곳 양반 신자가 숨을 곳을 제공하여 주었다. 거기도 포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오로가 서양인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은 하면서도 감히 그의 집에 강제로 침입하여 그의 양반 특권을 침해하지는 못하고, 하루 종일 집 주위에서 무서운 소란을 피웠다. 바오로의 친구인 외교인 양반이 그를 곤경에서 구해 주었으니, 포졸들을 위협하고 그 우두머리의 손에 돈을 약간 쥐어주어 마침내 그들이 떠나가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동안 위앵 신부는 벽 속에 만들어 놓은 조그마한 벽장으로 피신하였었는데, 그 속으로 겨우 들어갔었다. 거기 쪼그리고 앉아 숨도 잘 쉬지 못하면서 한 시간 이상을 보냈다. 밤이 되어 위앵 신부는 20리 떨어진 쇠재(현 예산군 봉산면 금티리)라는 마을로 갔었는데, 몇 시간 후에 포졸 5명을 동반한 두 신자가 그의 방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들은 다블뤼 주교가 보낸 심부름꾼이었다. 위앵 신부는 편지를 훑어보고 저들에게 말하였다. “주교님이 오늘 아침 체포되셨는데, 나더러 그분 있는 데로 오라고 하시니, 그 말씀으로 충분하다.” 포졸들은 그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그 중에서도 다른 신부들을 본 지가 오래 되었느냐고 물었다. 위앵 신부는 오메트르 신부가 이미 체포된 줄로 확신하고 “오(吳) 신부를 보았소” 하고 대답하였다. “오 신부!” 하고 포졸들이 말을 이었다. “저런! 이 근처에 서양 사람이 또 한 사람이 있는 모양이구먼.” 위앵 신부는 입을 다물었다. 이 모든 사정을 일러주었던 위앵 신부의 하인이 그 때 포졸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우리가 있는 집의 주인은 천주교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날이 밝을 때까지 남아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사람들이 알 것이고 집주인에게 큰 해가 미칠 겁니다. 곧 떠나갑시다.” 포졸들이 거기에 동의하여 3월 12일 아침나절에 선교사는 다블뤼 주교가 있는 곳으로 끌려갔다.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메트르 신부는 근처 마을들을 샅샅이 뒤지는 수색을 모면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만 그의 일을 보아주던 신자 중 아무도 위태롭게 하지 않으려는 생각만을 하였다. 따라서 거더리로 가는 길을 잘 물은 다음, 모든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혼자서 길을 떠났다. 마을에 도착하여 어떤 교우집으로 들어가 다블뤼 주교가 부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 날 아침 주교는 위앵 신부가 말한 오 신부를 포졸들이 요구한다는 말을 듣고 자수하라고 말하기 위해 편지를 보냈었다. 그러나 편지를 지닌 사람들이 다른 길로 해서 갔기 때문에 그를 만나지 못하였었다. 그들이 돌아오니 세 선교사가 그들의 감방 노릇을 하는 방에 모여 있었다. 자기들의 원정과 서양인들이 순순히 굴복한 데서 만족을 얻은 포졸들은 그들에게 매우 정중한 대우를 하였다. 그들은 결박하지도 않고 마을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으며, 또 그들의 청을 들어 잡았던 신자들을 놓아주었다. 풀려난 신자들은 위앵 신부의 하인 외에 송 니콜라오, 신학생 박 필립보, 다블뤼 주교의 복사 황 루카였다. 그러나 황 루카는 떠나기를 거절하고, 자기의 스승인 동시에 아버지인 분을 따라가겠노라고 선언하였다.
②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정리 번호 192번, 367~368쪽)
치명일기 721 안 주교, 722 민 신부, 723 오 신부, 724 황 루카 함께 잡힌 사정
본래 홍주 신리 본 공소에 계시다가 군난을 당하여 수원으로 피신하였고, 도로 본 공소로 오셔서 모든 교우들을 깨우치셨으며, ‘다른 곳으로 가셨다’ 하고 본동 다른 집에 숨어 계시더라. 신품 공부하던 박 필립보가 경포를 몰고 앞장서서 동네를 가르키니 포졸이 들어와 모든 교우에게 묻기를 안 주교와 민 신부를 찾되, 모든 교우들이 대답하길 ‘이곳에 계시지 아니한다’ 하니, 포졸들이 집집 찾다가 마침 조그마한 집 부엌 나무 속에서 잡히시고, 민 신부와 오 신부는 주교 명령 없이 자원으로 오셔서 그 이튿날 잡히시니, 포졸이 말하기를 민 신부와 오 신부는 스스로 찾아온다고 박장대소하며, 안 주교와 민 신부와 오 신부 함께 잡아 가지고 홍주 아문으로 가시고, 또 황 루카는 본디 안 주교 복사로서 포졸이 한사코 만류하되 주교․신부 모시고 포졸 앞에서 성교의 밝은 도리를 입이 그칠 새 없이 강론하시며, 자원으로 주교와 두 분 신부와 함께 홍주 아문으로 가시니라. 지금까지 이 일을 아는 이는 해미 마새(현 당진군 대호지면 마중리의 마사) 사는 강 가롤로요, 친히 보았노라.
③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정리 번호 192번, 366~367쪽)
치명일기 721 안 주교, 722 민 신부, 723 오 신부, 724 황 루카 함께 잡힌 사정
홍주 아문에서 떠나 서울로 가실 즈음에 신창읍에서 숙소 정하고 안 주교께서 강론하신 말씀이 신창 관속(官屬)더러 “내가 죽어도 후세에 내 말을 전할 것이요, 내가 살아도 이후 내 말을 하리라” 하시고, 황 루카는 본국(조선) 사람인고로 성교의 밝은 도리를 다 말씀하시니, 관민이 다 듣고 말씀 정대함을 찬송하지 않는 이 없더라. 이곳에서 떠나 서울로 가신 후 4일 후에 도로 내려오실 때 다시 보니, 올라가신 네 분 외에 725 장(주기) 요셉 회장이라 하는 이와 다섯 분을 신창 연봉정이서 다시 보았노라. 내용 일을 아는 사람은 해미 마새 사는 김 요한․김 안드레아 형제더라.
3) 순교 사적
① 한국 천주교회사(하, 434~436쪽)
포졸들은 서울 길을 떠나기 전에 거더리에서 이틀을 묵었다. 그들은 잡힌 사람들에 대해 정중하고 친절한 태도를 취하였고, 여러 차례 그들에게 행하여진 권고를 기꺼이 듣는 것 같았다. 다블뤼 주교는 그들의 태도에 만족하여 집에 가지고 있던 엽전 몇 백 닢을 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자 베르뇌 주교를 체포할 때에 거기 있어서 나중에 대원군(大院君)이 탈취하게 한 꽤 많은 값진 물건을 보았던 2~3명의 포졸이 다블뤼 주교에게 그 자신의 재산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주교는 대답하였다. “내가 가졌던 것은 방아사골(Panga-sa-kol)에서 불과 몇 달 전에 내 집이 탈 때 모두 타버렸소.” “그렇지, 주교의 집이 그 안에 들어 있는 책과 물건들과 함께 타버렸다는 말을 들었어” 하고 다른 몇몇 포졸들이 말하였다. 그리고 처음에 말을 꺼냈던 포졸들이 불평을 하자, 포졸 우두머리 중의 하나가 소리질렀다. “입 닥쳐, 너희는 천주교인들의 주교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길을 떠날 때, 선교사들을 체포하러 거더리로 왔던 포졸들은 그 마을 주민들을 다른 도당들에게서 보호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정식 통행증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써 주지 않고 떠나면서 공주(公州)의 포졸들에게 그 일을 맡겼었는데, 이들도 전혀 그것을 해주지 않았다. 이리하여 조선의 가장 중요한 천주교 교우촌 중의 하나였던 이 마을은 그 뒤 점령된 도시 같은 취급을 받아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증거자들을 서울로 압송할 때에 결박은 하지 않고 오라를 어깨에 걸고 전 넓은 모자를 씌웠었다. 거룩한 기쁨이 그들의 얼굴에 나타나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려고 모여든 모든 외교인이 매우 이상히 여겼다. 평택(平澤) 읍내에서 포졸들은 선교사들에게 고기가 들어있는 훌륭한 점심 식사를 대접하였다. 그러나 그 날은 소재(小齋)날이었으므로 선교사들은 식사를 들려 하지 않았다. 포졸들은 이상히 여겨 그 이유를 묻고는, 천주교 법규를 지키기 위하여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자기들이 알지 못한 것에 대하여 양해를 구하고 급히 다른 음식을 준비하게 하였다.
(3월 19일, 음력 2월 3일) 서울에 도착하여 증거자들은 구류간에 갇혔다. 그들이 당해야 하였던 신문과 고문에 대한 정확한 사항은 하나도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그들이 선배들처럼 금부(禁府)로 이송되지 않았다는 것과 조선말을 완전히 알고 있던 다블뤼 주교가 관장들 앞에서 자주 오랫동안 천주교의 변호를 폈다는 사실만이 알려졌을 뿐이다. 아마 이 이유 때문에, 그리고 특히 그가 천주교의 가장 높은 스승의 하나였기 때문에 그가 다른 동료들보다 더 자주 더 심하게 다리에 몽둥이질을 당하고 곤장과 몽둥이로 찌르는 형벌을 당해야 했다.
나흘 째 되는 날(3월 23일, 음력 2월 7일) 그들의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그러나 그 때 왕이 병중이어서 수많은 무당과 점장이들이 대궐에 모여 왕의 병을 고치려고 천만 가지 마귀 노름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왕은 오래지 않아 혼인을 치르게 되어 있었다. 서양인들을 처형하면 복술의 효력에 해가 미치지 않을까, 또 서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은 국혼(國婚)에 좋지 못한 징조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사형수들을 서울에서 250리 떨어진 보령(保寧) 고을에 수영(水營)이 있는 반도(半島)로 데리고 가서 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들은 즉시 그곳으로 압송되었는데, 다른 증거자인 배론의 회장이며 푸르티에 신부의 집주인이던 장 요셉이 그들에게 첨가되었다(한국 천주교회사 하, 431~432쪽).
다섯 순교자는 말을 타고 수영으로 압송되었다. 몽둥이질로 부수어진 그들의 다리는 유지(油紙)로 싸서 헝겊 몇 조각으로 잡아맸었다. 머리에는 노란 모자(즉 몽두)를 쓰고, 목에는 오라가 걸려 있었다.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넘쳤고, 여러 번 포졸들과 구경꾼들이 놀라는 가운데 성영(聖詠)을 읊고 성가(聖歌)를 부르며 열렬한 감사의 기도를 하느님께 드렸다. 건립성체대례(建立聖體大禮, 성 목요일, 3월 29일) 저녁에 그들은 형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렀다. 다블뤼 주교는 포졸들이 이튿날 길을 꽤 많이 돌아 이웃 읍내에 가서 사형수들을 구경시킬 계획을 서로 짜는 것을 들었다. 그는 즉시 그들의 말을 중단하며 외쳤다. “안되오. 당신들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불가능하오. 내일 형장으로 곧바로 가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내일 죽어야 하기 때문이요.” 당신의 종이 구세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신 바로 그 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를 흘리고자 하는 그 경건한 소원을 인정하신 하느님께서 그의 말에 얼마나 위엄 있는 어조를 띠게 해주셨든지 포졸들의 우두머리와 포졸들과 군사들 모두가 한 마디 대답도 못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어김없이 시행하게 되었다.
형장으로 택한 곳은 바닷가의 모래사장(즉 갈매못)이었다. 일반적인 준비 외에 관장의 천막 곁에 장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증거자들에게 발사할 수 있게 된 총으로 무장한 군사 9명을 배치하였었고, 다른 군사 2백 명은 죽 늘어서서 사방에서 몰려오는 구경꾼 무리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신자 몇 명이 구경꾼들 틈에 끼어 들었는데, 그들이 이야기한 바에 의하면 최후 순간에 관장이 서양 신부들에게 땅에 엎디어 절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한다. 다블뤼 주교는 그에게 서양식으로 인사하겠다고 말하며 그렇게 하였다. 그러나 관장은 자존심이 상하여 그들을 자기 앞에, 땅에 엎드리게 하였다.
(3월 30일, 음력 2월 14일) 다블뤼 주교가 맨 처음에 참수되었다. 한 가지 비통한 상황이 일어나 그의 임종을 연장시켜 고통을 받으시는 구세주와의 일치를 더하여 주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일격을 가한 후 망나니는 일을 중단하였다. 그것은 그 비열한 자의 계산에서 온 것이었다. 그는 피 흘리는 일에 대한 보수를 정하지 아니하였는데, 돈을 많이 주지 않으면 계속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관속들이 그 문제를 의논해야 했는데, 이것은 더 오래 걸렸다. 인색한 마귀가 양쪽을 하도 꽉 붙잡고 있어서 사지가 경련을 일으키며 뒤틀리는 그들의 희생물에 주의를 기울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흥정이 이루어지고 칼질을 두 번 더하여 순교자에게 영광을 안겨주었다. 오메트르 신부가 뒤를 따라 칼질 두 번을 받았고, 다른 증거자들은 각기 한 번으로 충분하였다. 처형에 앞서 비열한 잔인을 극도로 발휘하여 다블뤼 주교의 옷을 완전히 벗겼다. 다른 증거자들에게는 바지를 남겨 두었다. 그러나 밤에 몸쓸 놈들이 와서 벗겨갔다.
시체들은 4일간을 그대로 버려진 채 있었는데 그동안 그 지방에 많이 있는 개나 까마귀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사흘 째 되는 날 저녁에 그 근처에 사는 외교인들이 바로 형장에 모래를 파고 시체들을 묻었다. 몇 주일 후 황 루카의 배교한 가족들이 와서 그의 시체를 파갔다. 6월 초(양력) 박해가 약간 뜸해졌을 때 몇몇 신자들이 다른 네 순교자의 시체를 거두러 갔는데, 모두가 온전하고 위앵 신부의 시체만이 약간 부패한 흔적이 있었다. 그들은 그 귀중한 유해들을 해안에서 30리 떨어진 홍산(鴻山) 고을의 어떤 마을 근처로 옮겼고, 관을 따로 따로 살 돈이 없으므로 매우 넓은 구덩이 하나만을 파고, 각 시체 밑에 두꺼운 널판지를 놓은 다음 모두 함께 묻었다.
다블뤼 주교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들어온 지 21년이 되었고, 베르뇌 주교에 의하여 주교로 성성(成聖)된 것이 9년 전이었다. 베르뇌 주교가 3월 8일(양력) 사형을 당했으므로, 다블뤼 주교는 승계권(承繼權)이 있는 보좌 주교의 자격에 의하여 그 날로 승계하여 22일 동안 교구장이 되었다. 그는 조선의 다섯 번째 주교였다. 이 존경할 만한 주교에 대해 말하고, 그분의 편지들을 인용하고, 그분이 순교자들의 전기와 조선말로 된 신심 서적의 저술과 교정을 위해 한 일들에 언급할 기회가 하도 많았으므로, 그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이 무익할 정도이다.……
오메트르 신부는 포교지에 온 지가 2년 반밖에 되지 않았고, 위앵 신부는 8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이 짧은 기간에 그들은 진정한 신심과 덕행과 일에 대한 정열로 신자들의 사랑을 받고 동료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사람들의 마음 속을 헤아리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착한 뜻에 만족하셨고 천국을 차지하기에 성숙한 자로 생각하셨다. 위앵 신부는 형장으로 가며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젊어서 죽는 것도, 칼을 받아 죽는 것도 고통스럽지 않다. 그러나 저 불쌍한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괴롭다.”
② 우포도청등록(병인 2월 7일 ; 일성록․승정원일기, 고종 3년 2월 7일)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좌․우포도청의 계목을 본 즉 ‘서양인 안돈이․오 베드로․민 유아눅가, 사학인 황석두 등은 모두 아뢰는 것을 지만하여 거처한 곳과 내통한 자들을 죽음에 이르러서도 굳게 숨기니 묘당(廟堂, 즉 의정부)에 명하여 의논 처리토록 하십시오’라 했습니다. 이들은 교화하기 어려운 성품을 지녔으니 곧 하급의 무리요, 특이한 풍속이 내외에 가득 차 있어 사람의 마음을 그르치는 것이 가히 죽음을 당할 만하니, 단지 월경죄(越境罪)만을 범한 것만이 아닙니다. 황(석두)를 문초한 것에 이르러는 교활하고 흉악함이 만 번 죽여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이들을 모두 데려다 군무효수(軍門梟首)하여 경계시키심이 어떠하신지”라고 했더니,
전하여 이르기를 “포도청으로 하여금 모두 공충 수영(公忠水營)으로 압송케 하여 효수 경중함이 가하다” 하였다.
③ 우포도청등록(병인 2월 7일)
좌․우포도청에서 아뢰기를,
“삼가 본청의 계목에 의거하여 비답을 내리시길 ‘죄인과 여러 무리들을 함께 공충 수영으로 압송하여 효수 경중함이 가할 일’이라고 명하셨습니다. 우포도청에 있는 죄인 안돈이․오 베드로․민 유아눅가․황석두․장주기 등 5명을 포교를 정하여 공충 수영으로 압송할 뜻을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니,
전하여 이르기를 “알았다”고 하였다.
④ 우포도청등록(병인 2월)
좌․우포도청에서 공충 수영에 보낸 공문.
“이제 서울 포교들이 체포한 서양인 3명과 우리나라 사람 1명이 여러 해 동안 내포 지역에 거처하면서 동서로 분주히 다니며 사악한 천주교를 전한 것이 어지럽기 이를 데 없다고 할 것이오. 허다한 교우와 집주인으로 서로 내통한 자가 분명 황석두 한 명만이 아닐 것이라 하니, 각별히 염탐하여 실효를 거두기를 기약하는 뜻에서 공문을 보내는 것이오. 공문이 도착하는 즉시 속읍(屬邑)과 각 진(鎭)에 명하여 체포하는 즉시 엄히 가둔 후에 빨리 보고함이 마땅할 일.”
3. 갈매못 순교 터 고증
다섯 성인이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한 갈매못 순교 터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한국 천주교회사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즉 서울에서 1866년 3월 23일(음력 2월 7일)에 사형 선고를 받고 보령에 있는 공충(충청) 수영으로 이송되어 1866년 3월 30일(음력 2월 14일) 수영 근처의 “바닷가 모래사장”(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한 것이다. 훗날 신자들은 이 순교 터에 대해 ‘고마 수영’ 혹은 ‘수영 인근의 모래사장’이라고 한결같이 증언하였다. 이 중에서 수영은 충청도 수군절도사영을 말하는데, 지금의 보령시 오천면 소재지에 일부 유적이 남아 있다. 또 ‘고마’란 이름은 ‘곰내’[熊川] 즉 보령의 웅천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수영이 있는 바닷가의 모래사장은 정확히 지금의 어디쯤일까?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증언들을 찾아볼 수 있다.
A-① 법장의 이름은 보령 갈매못이라 하는데, 수사가 있던 수영에서 한 10리가 되고 또 강가입니다.
A-② 안 주교와 황 루카가 치명하러 나가실 때에 따라가 보았는데, 그 때 고마 수영 방갓 동네에 살았습니다. 방갓 동네에서 안 주교께서 치명하시던 자리까지 5리도 안됩니다.
A-③ 참소(讒訴)에 나갈 때 거리가 거의 10리 상거가 되는지라. 짚둥우리를 타고 나가다가 중로에서 술재라 하는 고개에서 민 신부가 슬픈 모양으로 머리를 숙이고 흥흥 소리를 내며 우시고, 참소에 이르러 주교께서 먼저 치명하시므로……
위의 증언들에서 보면, 순교 터는 공충 수영에서 약 10리 정도 떨어진 모래사장이고, A-②에서 보는 것과 같이 ‘방갓’ 즉 영보리의 ‘밤까시’[栗邊]로 추정되는 마을에서 5리도 안되는 가까운 곳으로, 강가 즉 지금의 보령호 천수만변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A-③의 증언에서 볼 때, 순교자들은 지금과 같이 수영에서 해변 도로를 거쳐 순교 터로 압송된 것이 아니라 ‘술재’라는 고개를 넘어 순교 터로 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술재는 영보리의 ‘소재’[牛峙]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무진년(1868년)에 독일 상인 오페르트(Ernst J. Oppert, 載拔)가 덕산군 현내면 가야동(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흥선 대원군의 부친 南延君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德山掘冢事件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 때 체포된 孫京老(일명 치양)․金良吉이 같은 해 5월에, 李永中이 같은 해 6월에 도굴단과 내통하거나 그들을 도와준 혐의로 수원부에 체포되어 문초를 받고 의정부의 판결에 따라 보령의 갈매못으로 이송 처형되었다. 이때 수군절도사 張厚植은 이들을 군문효수형에 처하고 다음과 같이 조정에 장계하였다.
B-① 九萬浦에 서양 선박이 정박하였을 때 먼저 소리쳐 부르고 그 이양선에 오른 뒤 야만인들의 모자를 쓰고 춤을 추었던 孫敬老와 적들이 하선하여 물 기를 곳을 찾자 물그릇을 받아 대신 물을 길어다 준 金良吉이 수원부에서 압송되어 왔으므로, 동 죄인 손경노와 김양길 두 놈을 같은 날 신시에 신의 수영 서문 밖에 있는 渴馬津頭에서 많은 군민을 모아놓고 효수하여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갖도록 했습니다.
B-② 사학도의 우두머리로 추악한 무리들과 내통한 李永仲이 수원부에서 압송되어 왔으므로 동 죄인 이영중을 같은 날 신시에 신의 수영 서문 밖에 있는 渴馬津頭에서 많은 군민을 모아놓고 효수하여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갖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수영에서는 죄인들을 끌고 나가 서문 밖에 있는 渴馬津頭에서 처형하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제작된 <1872년 지방도>(규장각 소장)에 보면 渴馬淵은 수영의 서문 밖 남쪽(즉 남문 밖)에 그려져 있으며, 本府(즉 보령부)에서의 거리는 수영과 같이 20리(渴馬淵 : 自本府二十里)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갈마진두’나 ‘갈마연’은 ‘목마른 말에게 물을 먹이는 나루나 못’이라는 의미로, 풍수지리설에서는 명당 자리로 손꼽히는 장소에 ‘갈마음수형’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장계에 나오는 ‘갈마진두’는 지도에 나오는 ‘갈마연’이고, 거리상으로나 조선 후기의 지도에서 볼 때 갈마진두․갈마연은 지금의 갈매못 성지가 있는 해변가(모래사장) 일대임이 분명하다.
갈마진두에서 순교한 다섯 성인들의 시신은 일단 그 근처 사장에 묻혀 있었는데, 그 중에서 황석두 성인의 시신은 그의 조카요 양자인 황 요한이 즉시 거두어 홍산 삽티(현 충남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회장 등 4명의 시신은 1866년 4월에 남포 서짓골(현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서리골 혹은 석죽골)에 살던 이치서(이냐시오)․이치문(힐라리오) 형제 가족과 장 회장의 아들 장노첨 등이 갈마진두 사장에서 찾아내 10리쯤 되는 곳에 감장하였다. 그러나 훼손될 우려가 있자 같은 해 7월에 그 유해들을 발굴하여 여러 날 만에 서짓골로 옮겨가 안장하였다.
박해가 끝난 뒤 갈마연 순교 터를 처음 답사한 사람은 부여 소양리 본당(현 금사리 본당의 전신) 주임 丁圭良(레오) 신부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에 성인들의 시신을 거두어 안장하는 데 참여했던 이치문의 아들을 앞세우고 우선 서짓골의 옛 무덤 자리를 확인하였다. 그런 다음 7월 8일에는 갈마연을 찾아가 누대로 그곳에 살아온 사람들의 생생한 고증 아래 순교 터와 將基臺가 섰던 자리, 임시 매장지 등을 확인했으며, 1927년에는 다시 한 번 공주 본당의 崔鍾哲(마르코) 신부, 괴산군 높은사랑(일명 叩馬里) 본당의 尹義炳(바오로) 신부와 함께 이곳을 답사하고 사진을 남겨두었다.
이후 정규량 신부는 1926년 9월 14일 자신의 명의로 순교 터 인근의 부지를 매입한 뒤, 1929년 1월 서울교구 천주교 유지재단으로 등기 이전하였다. 그리고 1975년 9월에는 대천 본당 주임 정용택(사도 요한) 신부와 신자들에 의해 위의 부지 위에 순교 복자비가 건립되었고, 이것이 오늘의 갈매못 성지로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성지 위치(오천면 영보리 산 9-53번지)는 앞에서 고증한 다섯 성인들의 순교 터인 갈마진두(갈마연)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된다.
<차기진 / 양업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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