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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위주가 되어 간혹
다른 선생님이 수업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두세 달 만에 자연스럽게 끝났다.
그 뒤에도 습관처럼 도서관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도서관 사서가
" 저기 저 모임(시모임)에 가면 좋은데 "하고 권했다.
그래서 가 보았더니 그동안 '시 교육 '같이 받은 사람들이 모임을 시작하려고 모여 있다.
나는 왜 몰랐는지 모르겠다.
수업은 빠짐없이 왔지만 나는 몰랐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매주 시모임을 하였다.
시는 남들에게 나와 내 가족 사생활이 드러나고 , 내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기도 하다.
그것을 규칙에 맞춰서 나타내기는 더욱 쉽지 않았다.
머리에 쥐가 났다.
어떻게 시 소재가 생각나도 시로 쓰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였다
숙제로 매주 시 한 편을 쓰고 열 다섯 장정도 복사해서 도서관에 도착했어야 했다.
나는 숙제를 못하고 도서관에 가거나 아니면
가는 도중 택시 속에서 연필로 적어 도서관에 가서 급하게 복사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럴 때는 다른 사람들이 컴퓨터로 정성껏 적어서 복사한 것과 차이가 났다.
선생님은 열두세 명이 숙제로 해온 시를 교재로 즉석에서 교정하고, 문제를 풀어냈다.
내가 글자도 잘 못 알아볼 정도로 날려 끼적거려 온 숙제를 잘도 풀어냈다.
지금 생각하니까
내가 기(氣) 죽지 않고 계속 다닐 수 있는 것도, 선생님이 그 문제에 대해 지적하거나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 일 것이다.
이년을 넘게 이어졌다.
그 뒤에도 전시회 출판기념낭송회 특별강의 등으로 시세계를 배우고 익히고 느끼며 이어졌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 배려가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 주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래서 그 결과 시집(ISBN 979-11 -89130 -23-7)을
한 권 출간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허름한 소형차가 있지만 , 걷는 것을 주로 많이 하셨다.
같이 걸을 때가 있었다.
어느 날 길 가다가 빵가게에 들어가더니 빵 한 개를 사 주셨다.
이게 뭐지?
선생님은 이 빵집에 빵이 맛있으니까 먹어보라고 알려 주려고 한 것 같다.
이런 식의 선생님의 지도는 나에게 스펀지처럼 잘 스며들었다.
선생님께 조금 믿음이 생기고, 스스럼없이 잘 지냈다.
한 번은 선생님이 내가 계속 동시를 하면 좋겠다고 권하셨다.
난 단칼에 잘랐다.
'손녀 손자가 크면 안 씁니다. '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지금 그 선생님은 2022년 11월 돌어가시고 안 계신다.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