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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요약분 2024.05.07 : 컵은 외면에 있나, 내면에 있나? | 두 개를 하나로 만들 때,
내면을 외면과 같이 만들 때, 천국에 들어갈 것 | 두 개를 하나로 만드는 방법!! |
도마복음 40 (제22절)
https://www.youtube.com/watch?v=8laxyIRwb_s
강독 텍스트 요약분:
1. 공지사항
가) 10분 컷 영상을 추천 요망.
- 시청하신 영상 중에 인상에 남는 부분을 선택(選擇)해서 10분 정도 길이로
나) 다음 카페에서 네이버 카페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 중
- 네이버 카페에 미리 가입 요망
2. 도마복음 22절 현대적 강독
가) 22절 말씀: “예수께서 유아들이 젖을 빨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가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젖을 빨고 있는 유아들은 마치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과 같다".
- 현재형 시제로 이야기.
- 유아들은 천국에 언제나 지금 들어가는 사람들과 같다.
나) 22절 말씀: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도 유아들처럼 천국에 들어가게 될까요?"
- 미래형 시제로 묻고 있슴.
- 항상 지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예수께서 말씀하고 있는데도,
제자들은 미래에 들어가게 되나?를 물음
다) 22절 말씀: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두 개를 하나로 만들 때 내면을 외면과 같이,
그리고 외면을 내면과 같이 만들 때, 위를 아래와 같이 만들 때,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같이 만들 때, 그래서 남자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는 여자가 아닐 때, 즉 눈이 즉 눈의 자리에 눈을, 손의 자리의 손을,
발의 자리에 발을, 같은 것을 같은 자리에 일치시킬 때,
그런 연후에야 너희는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 젖을 빨고 있는 유아들은 이미 지금 현재 두 개가 아니다,
- 내면과 외면이 갈라져 있는 것이 아님,
위와 아래가 다른 것이 아님, 남자와 여자가 같고,
눈이 있을 자리에 눈이 있고, 손의 자리에 손이 있고, 발의 자리에 발이 있고,
같은 것을 같은 자리에 일치시킨 상태다.
젖먹이 유아들은 이미 그런 상태로, 항상 지금 천국에 있다.
- 제자들의 천국에 어떻게 들어가냐는 질문에 유아들처럼 되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음.
- 공관 복음(마가 마태 누가복음)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간다” 라고
추상적으로 불분명하게 언급함.
- 제 1분기 지혜 문서에서는 분명하게 선명하게 말씀을 하고 계심.
- 우리도 유아처럼 천국에 들어가려면 개인 자아의 매뉴얼에 따라서, 개인자리의 이해와 기능을
확실히 하고 알아야 함.
- 개인과 개인적 동기를 앞세우게 된다면, 본래 하나인 것이 두 개처럼 여겨지게 됨,
라) 신약 정경의 병행 구절(마가 마태 누가) 말씀: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 어린아이와 같이 될 때에 천국에 있는 것이다.
- 어린아이는 어리석고 유치하고 자아 도취적이고 한, 그럼 어린아이가 아니며,
이원성의 존재를 확인하게 보고, 역할과 기능을 분명히 하게 될 때 이것을 젖먹이라 함.
- 신약의 공관 복음에는 그저 어린아이도 무시하지 말고 존중하라.
어린아이는 천국에 들어가 순수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
너희들도 어린아이처럼 순수해 져라고만 함
- 이것은 제 1분기 지혜를 2분기 개인적 시각으로 완전히 바꿔 놓아 실낙원을 연상시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일이 매순간 벌어짐.
- 공간 복음서는 여러 가지가 혼합되어 있음,
특히 역사적 예수 전승과 바울 신학의 전승이 하이브리드 되어 있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매우 많은 곳에서 서로 모순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들이 많음
마) 22절 말씀: “너희들이 두 개를 하나로 만들 때,
내면을 외면과 같이 그리고 외면을 내면과 같이 만들 때"
- 이원성의 정체가 선명하게 보일 때.
- 주관과 객관, 정신과 물질, 나와 세계, 의식 주체와 의식 대상 등으로 나누는 일이
상식의 영역이 되어버림.
- 고대의 그리스철학에서 부터 시작된 이원성은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를 거쳐
임마누엘 칸트까지 왔지만 임계치에서 끝선에서 아슬아슬하게 포기하지 못함
- 그래서 이원성은 조금씩 모양을 달리하며 지금도 여전히 엄청난 위력을 보임
- 칸트의 절대 객관으로의 물 자체는 순수이성으로서 절대로 접근할 수도 알 수도 없는
그러한 신비한 영역으로 남겨지게 됨
- 제 1분기 지혜 전승에서는 이원성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음
- 그래서 “두 개를 하나로 만든다”는 말은 다른 2개를 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같은 것이라는 것을 보기만 하면 됨을 의미.
- 이것이 이 진리의 지혜의 요체로 선현선각들의 말씀
바) 처음부터 같은 하나의 예
- 조견 오온 개공/ 약견제상비상/ 색불이공 공불이색/
- 나와 세계가 하나의 의식임을 봄이 정견(正見), 전체를 똑바로 본다.
- 모든 것이 이 마음의 출현
- 이원성의 모든 출현이 전부 의식의 자기표현
- 처음부터 같은 것이 같은 것
- 제 1분기 지혜는 늘 본다.
-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은,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에 우리가 있었음을 비로소 보게 된다.
- 모든 것이 의식의 생명축제의 장이었음을 보게 됨.
- 공포라는 모습은 있을지언정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자기표현이었구나 하면서,
무유공포 원리 전도 몽상 구경열반이 된다.
- 이렇듯 낙원을 회복하게 됨
사) 두 개가 하나임을 보고 이해할 때 두 개를 하나로 보는 방법
- 두 개가 하나임을 듣고 이해하고 보게 될 때, 두 개를 하나로 보는 방법은
이것과 이것이 두 개로 서로 다른 줄 알았는데, 하나의 의식 안에서
의식의 자기 자각이 있다라는 것을 이해하고 보게 되는 것임.
- 그 후 전체를 살펴보면, 깊은 내면 안에 진실, 이데아의 세계, 본질의 세계가 있다.
- 진실의 세계가 있다 해서 깊은 내면, 몸속에 어딘가의 영혼 정신 마음 의식 안으로 들어가서
깊은 명상 등으로 멸진정에 다다르면 비상비비상처정 멸진정에 이르러
깨달음이 일어나는 것 아님, 혹시 엇비슷한 연극 해프닝이 일어나도 금방 사라짐
-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무이한 조건은 일심 단일의식 유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일심 단일의식 유식의 자기 깨달음, 자기 체험, 자기 경험이이라는 것을
우리가 듣고 이해하고 보는 것.
- 본다함은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 벼락을 치듯 이렇게 보여 주는 게 아니고,
각자가 의식을 선택(選擇)해서 그렇게 보면 되는 것.
- 보는 방법은 그저 just seeing, 그냥 보라, 그렇게 보라.
- 여태까지 보던 그 마인드 셋을 잠시 유보하고, 선현선각의 가리킴을 그대로 보라.
보는 방법은 없다, 그냥 선택(選擇)만 하면 됨. 알기만 하면 됨(正知=正解=正見)
- 이것은 너무 쉬워 못 찾는다.
- 아직도 두 개로 보인다면, 하나로 보는 방법은 정견(正見)
- 하나로 보는 방법은 그저 지금 당장 하나로 보면 된다.
지금 당장 하나로 보면 된다. 그저 선택(選擇)만 하면 된다.
아) 기존방식과 비교해 보는 방법
- 용기를 내서 여태까지의 보는 방식을 잠시 밀어 놓고 어느 것이 옳은지 한번 비교를 해 보면 됨
- 여태까지 보는 방식은 유용하니 없애지 말기, 연극이 계속 이어지려면 이원성 설정이 필요하니까.
- 가만 두고, 하나로 보라.
- 이 몸과 컵과 이 공간과 시간을 하나로 보라 하나의 의식으로 보라.
- 하나로 보는 방법,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은 하나로 보는 것을 선택(選擇)하라
하나로 보는 것을 지금 당장 언제나 지금 선택(選擇)하라
- 선택(選擇)하라 특히 마지막 잠드는 날, 혹은 매일매일 잠들기 직전에,
혹은 매일 아침 깨어난 직후에 선택(選擇)하라.
- 하나로 보는 것을 그저 선택(選擇)하는 것, 이것이 비밀로 전해오는 방법 중 방법이고, 왕(王) 중의 왕(王)이다.
자) 도마복음 22절은 이스트 제 1분기 지혜 등과 정확히 일치 확인
- 이스트 제 1분기 지혜, 수심결, 유식 30송의 지혜와 정확히 일치
-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는 말이 경전의 그럴듯한 이야기가 아님
- 우리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 이야기임을 절감
-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 함은 물질세계와 비물질 세계라는
삼계(물질세계/아스트랄세계/멘탈세계 = 욕계/색계/무색계)가 오직 마음(의식)이다.
- 만법유식(萬法唯識)이람 함은 만법 나와 세계, 물질 비물질 모든 세상 만물,
시공간 전체가 의식이다.
차) ‘컵’으로 고찰해 보기
- 우리가 보고 있는 컵은 외면에 있을까? 내면에 있을까?
우리가 각자 보는 컵이 아니고, 동시에 하나의 컵을 보고 있다
- 각자의 의식이 몸 안에서 이 컵을 본다면 컵은 각자 안에 들어 있어서
컵이 많아야 되는데, 왜 각자의 영혼이 있다는 이 몸 밖에 하나의 컵으로 이렇게 존재하고 있을까?
- 이것만 봐도, 개인 개인이 의식 주체 즉 인식 주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 하나의 인식주체가 수많은 생물과 비생물체를 통해 컵을 의식하고,
또 이 하나의 의식이 이 컵을 통해서 수많은 생물체와 비생물체를 의식하는 거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는 것임
- 의식이 무수한 자기표현으로 나툰 다음에 서로가 서로를 의식한다
이 말은 의식이 자기 스스로를 의식한다는 것.
카) ‘컵’의 내면과 외면이 따로 있다고 보고 고찰해 보기
- 외면과 내면이 따로 있다면 사람 안에 영혼이 있어서 연결돼 있을 수도 있다.
심장과 뇌에 영혼이 있고 의식이 있다고 함
- 여태까지 두 개가 있다 할 때,
몸 안에 영혼 혹은 의식을 가진 인간이 있고, 컵이 각각 있다.
- 내면은 몸 속 어딘가 이고, 외면에는 컵이 있다.
- 의식된 혹은 인식된 내면의 컵은 어디 있나? 요런 생각 풍선에 있다고들 함.
- 이것은 말이 안 된다, 이렇게 되려면 생각 풍선 안에 나도 들어가 있어야 되니까.
- 그러면, 지금 그림 그려진 요 사람은 사실 요렇게 생겼는지 여부가 모르게 됨
이미 지금 생각 풍선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과 컵은 이미 내면이니까.
- 그러면 이미 몸과 컵은 의식 속에 들어 들어와 버렸다.
- 그러면 이미 컵은 내면 컵이고, 지금 시공간 전체가 지금 일단 의식이란 게 밝혀진 것.
- 그러면 외면 객관 컵은 어디 있느냐 할 때, 찾을 수가 없음.
외면 객관 컵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 어떻게 생겼는지 자체도 모르게 됨(칸트의 물자체가 되어 버림)
- 내면과 외면이 따로 있다는 가정이 엉터리 이므로 이해 못할 일이 벌어짐.
타) 제 1분기 문서에 따르면 문제가 해결 됨
-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 마음, 의식이다 하면 한방에 해결.
- 그렇지 않으면 2분기 전승(傳承)에 자기도 모르게 끌려가기 쉽다.
- 내면과 외면으로 나눠 버리면 내면 컵이 나타나면서 외면은 없어져 버린다.
사실상 외면을 도무지 알 수 없게 되고, 우리에게 알려지는 건 내면 밖에 없다
- 현대과학의 첨단 장비를 동원해 두뇌에 영상을 찍는 등 어떤 방법을 써도,
심지어 오컬트의 모든 방법 동원으로 추적해 들어가도, 우리가 당연하게 여긴
내면과 외면, 외면과 내면의 구분이 지금 현재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 그러니까 하나밖에 없다. 내면과 외면이 있는 게 아님.
내면이 있다 치면 내면 밖에 없고, 외면만 있다 치면 외면 밖에 없게 된다.
- 외면 밖에 없다는 말은 내면이 없다는 뜻이고, 내면 밖에 없다는 말은 외면이 없다는 뜻이다.
- 결국 말만 내면이고 외면이지, 이게 다 의식이라는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 말만 내면이고 외면이지, 이게 다 의식이다.
파) 이런 일인다역의 연극을 펼치는 이유
- 장난 같이 보이는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표현 연극, 일인 다역의 연극이었다.
- 왜 이런 연극을 펼치냐 하면, 이런 설정 이외에는 사랑의 자기 체험을 할 수 없기 때문
하)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
- A가 B를 사랑하는 이유를 대라면 이유를 댈 수 없다. 이유가 없으니까.
-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 여러 가지 것들: 사랑/ 가슴 설램/ 용기/ 진실(생명)/
존재(유무 전체를 포괄하는 존재).
- 유무 전체를 포괄하는 존재는 그 자체로 지금 완결되기 때문에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원성 안에서는 이유가 물어질 수 있다
- 이원성도 그 전체를 하나로 보면 이원성이 아닌 게 된다.
하-1) 의식의 위치와 개수
- 이유가 있는 것들은 왜 그런 걸까?
- 이 컵은 내면이냐? 외면이냐? 로 늘 생각해 왔기 때문
- 컵은 지금 외부 객관이고, 머릿속 의식이 컵을 의식하는데, 컵이 지금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음.
- 머리가 오히려 공간 안에, 하나의 의식 안에 들어 있다.
- 그러니까 의식의 위치와 개수 이게 가장 핵심 키 포인트다.
- 의식이 몸 안에 있다면 영혼, 윤회도 있게 되고, 의식 정화도 해야 되고,
지구별에 와서 진화도 해야 되는데.
- 내면과 외면이 다른 것이 아니라면 의식은 몸 밖의 공간에 있을 수밖에 없다.
- 의식의 위치가 몸 밖이라면 의식의 개수도 하나일 수 밖에 없다.
- 무변허공(無邊虛空), 가없는 허공이 곧 각소현발(覺所顯發) 즉 ‘의식의 자기 나타남이다’라고 함.
- 이것이 늘 깜짝 놀랄 만큼 신비한 것.
-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지혜의 핵심이다.
하-2) 22절 말씀: “눈의 자리에 눈을, 손의 자리에 손을, 발의 자리에 발을,
같은 것을 같은 자리에 일치시킬 때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 여여(如如)/ 타타타 / 같고 같다 / 如來如去(오고감이 없다)
- 일심 단일 의식이라 같고 같다
- 내면 외면/ 주관 객관이 있는 줄 알았는데, 하나의 의식으로 같고 같아, 여여(如如)하다.
- 출생과 죽음이/ 탄생과 죽음이 의식의 자기 자각으로서 같다.
- 오고감이 없는 가운데에 오고가는 모습이 있고, 나고 죽음이 없는 가운데 나고 죽는 모습이 있다.
이렇게만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 간다 혹은 천국을 만들어 낸다.
혹은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일임을 본다.
정견(正見)한다 혹은 견성(見性)한다. 이것이 도(道)고 불퇴전(不退轉)의 깨달음이다.
- 시시한 무슨 체험이나 멸진정,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같은 시시한 것과는 비교 할 수 없는
참으로 불퇴전(不退轉)의 깨달음이 여여(如如) 혹은 여래(如來)고 의식이다.
- 이렇게 하나로 보는 것을 선택(選擇)하라.
하-3) 22절 말씀: “육체 눈을 의식 눈으로, 육체 손을 의식 손으로,
육체 발을 의식 발로. 이때 정견(正見) 올바른 접촉, 올바른 방향이 저절로 나타난다".
- 즉 이것을 육체가 주체가 되어서, 혹은 육체 안에 있는 영혼이 주체가 되어서
눈을 사용하면 방황하게 돼서, 어디를 가야 될지 모른다.
무엇을 봐야 될지 무엇을 똑바로 봐야 될지 모른다.
- 눈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이다.
눈은 지금 분명히 의식으로 있는데, 우리가 이것을 물질 눈으로 보면 똑바로 볼 수가 없게 된다.
- 똑바로 보고 보려면 눈을 눈의 자리에, 즉 의식 눈으로 가져가야 된다.
- 똑바로 만지려면 손을 의식 손으로 가져가야 되고,
똑바른 길로 걸어가기 위해서는 발을 의식 발에 갖다 놔야 된다.
- 개인 영혼의 눈이 되어 버리면 우리가 보지 못하고,
개인 영혼의 손이 돼 버리면 우리가 만지는 것마다 고통과 공포가 되고.
개인 영혼의 발이 되면 우리는 어디로 갈지 방황할 수밖에 없다.
- 그 어디에 도달 도달한 것 같지만 도달하지 않았고, 아무리 가도 가도 끝이 없다.
- 마치 바로 앞에 무지개가 보이는데, 그 무지개를 만지기 위해
아무리 가도 바로 앞에 있는 무지개가 늘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도무지 도달 할 수 없음과 같다.
- 무지개에 도달하는 방법은 무지개가 바로 여기 있음을 알아.
육체 눈과 육체 손으로 육체 발로 무지개를 향해갈 필요가 없이,
바로 무지개와 내가 하나로 같다고 보기만 한다면, 이미 무지개는 여기 있던 것.
언제든지 심지어 이 몸이 무지개고, 무지개가 몸.
- 선문답 식으로 얘기하면 ‘내가 저 무지개고, 무지개가 나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음
- 왜냐하면 하나의 의식이므로, 개인 영혼이 눈을 사용하는 주체다라고 한다면
정견(正見)을 할 수 없다.
- 그런데 눈을 의식으로 갖다 놓으면, 즉 같은 자리에 일치시키면
그런 연후에 너희는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 그럼 어떻게 될까?
건전지 한개 파워에서 핵발전소 전체를 사용할 수 있는 파워로 업그레이드된다.
업그레이드 권을 늘 호주머니 안에 들고 있으면서 사용을 못 했다.
그래서 바보처럼 자꾸만 업그레이드 권을보여주면서, 어떻게 하면 업그레이드됩니까? 라고 묻기만 했다.
자기 권리다, 업그레이드 권을 보는 즉시 사용만 하면 된다.
- 이미 핵발전소와 연결이 돼 있어서, 스위치만 탁 켜면 된다
스위치를 Off에서 On으로 옮기기만 하면 된다.
- 컵이 바깥의 객관 물체다 라는 생각을 잠시 유보하고 이것이 하나의 의식이다.
하나의 의식 안에 모든 것이 이렇게 자기 자각으로서 자기 깨달음으로써 들어 있다고 함으로써,
만법유식(萬法唯識)이 경전에 쓰여 있는 이론이 아니게 된다.
- 이렇게 될 때에 모든 것이 있어야 될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고,
만법귀일 일귀하처 그런 연후에야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서, 자유롭게 살고 유쾌하게 죽는다.
- 이것이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고, 바로 우리의 일이 될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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