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정터
맑은 하늘 동녘에서 달이 떠오르며 비추는 한강의 감색은 유달리 아름다워서 일찍부터 한성 십영 가운데 제천완월(濟川翫月)'로 손꼽혔다. 그만큼 제천정에서 바라다보는 달구경은 뛰어났다.
제천정은 한강 북쪽 언덕 지금의 한남동 537번지에 있었다. 한강정은 고려시대의 명사들 시문에도 시제로 오르내렸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원년 5월조에 상왕과 세종 임금이 대마도 정벌군의 삼군 도총수 유정현 이하 그 일행을 한강정에서 환송연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해에 명나라 사신 왕현, 황엄을 맞이하여 한강정에서 잔치를 베푼 기록도 보인다. 이렇듯 고려시대와 조선조 초기에는 이곳의 정자를 한강정이라고 하였다.
세조 2년(1456)과 3년 6월에 각각 명나라 사신 윤봉과 진감을 맞아 한강 제천정에서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 기록으로 미루어서 아마도 이때부터 한강정을 제천정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조선조에 와서 명나라 사신이 오면 으레 한강정 곧 제천정에서 잔치를 베풀어 이곳의 경치를 구경시키고 술 마시며 놀게 하였다. 명나라 사신들은 한강루 곧 제천정 놀이 때마다 으레 우리나라 접반관(接伴官)들과 어울려서 술 마시고 시를 읊었다. 일찍부터 명나라 사신이 오면 제천정으로 나가서 술 마시고 놀다가 호화로운 배 곧 화방 (畫舫)을 강물에 띄우고 저 서쪽 서강 잠두봉 아래 망원정까지 뱃놀이하는 것이 당시의 정규코스였다.
『궁궐지』에 의하면 명종 임금도 13년에 제천정에 올라 이곳 한강에서 펼쳐진 수전 훈련을 관람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인조 2년 갑자(1624)에 이괄이 서울을 침범하자 임금께서 대왕대비와 종묘 및 사직단의 신주를 받들고 공주로 피난길을 떠나던 날 밤, 한강을 건널 때 제천정 건물에 불을 질러 그 불빛을 의지하고서야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라고 하였다. 제천정이 이때 불탄 후로 다시는 복원되지 않은 듯싶다.
인조 14년(1636)의 병자호란 이후로 청나라 사신들이 우리나라를 왕래하였지만 그들이 제천정을 찾아 놀았다거나 시문을 남긴 기록이 전혀 없다. 돌이켜 생각하면 한강정, 제천정은 명나라 사신들을 맞아 술 마시고 시를 읊던 국제무대로 이름을 떨쳤지만 그보다도 한강정은 태종, 세종 두 임금께서 친히 이곳 정자까지 납시어 대마도 동정군을 환송하며 전함을 떠나보내던 감격의 장소였다. 제천정은 선조 2년(1569)에 69세로 벼슬을 내놓고 시골 도산서원으로 낙향하는 퇴계 이황 선생을 온 장안 선비들이 이 정자까지 따라 나와서 참되고 맑은 마음으로 만류하다가 석별의 정을 나누던 감회어린 정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