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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장 혈륜(血輪) 1 "커억!" 화산파(華山派) 장문인 화천도인(華天道人)은 시뻘건 핏덩어리를 토하면서 허리를 꺾었다. 그의 뒤로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으나 누구도 감히 앞으로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앞에 서있는 상대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장문인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십여 명에 불과한 흰 궁장 차림의 여인들이 서있을 뿐이었고 그 선두에 바로 빙요화가 비스듬히 서서 고개를 모로 꼬고 화천도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화산파는 명문정파 중에서도 손꼽히는 정대문파였다. 그런 화산파에서 이렇듯 불과 십여 명에 불과한 여인들과 어렵게 대치하고 있는 중이었다. 빙요화가 나약하고 아름답게만 보이는 손을 들어 화천도인을 가리켰다. "네 결정에 맡기겠다. 화산파라는 문파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 것을 바란다면 네가 바라는 대로 해도 무방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라면 이제 그만 무릎을 꿇거라." 화천도인은 입가의 피를 닦으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는 아직도 빛이 시퍼런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형형한 안광으로 빙요화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말했지 않느냐? 내가 이 자리에서 네게 져서 죽으면 우리 화산파는 너희와 손을 잡을 것이라고." "사부님!" 뒤에 몰려있던 제자들이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들고 달려들 자세로 화천도인에게 소리쳤다. "함께 싸우게 해주십시오! 빙궁 따위에게 무릎을 꿇을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싸우다 죽겠습니다!" "오호호호!" 빙요화가 허리를 뒤틀며 교소를 터뜨렸다. 그녀 뒤에 있던 십여 명의 여인들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화산의 제자들은 저마다 분기를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화천도인은 노갈을 터뜨렸다. 그의 사자후(獅子吼)와도 같은 일갈은 산 속의 공자묘(孔子廟)를 무너뜨릴 듯 뒤흔들었다. "너희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이미 장로님들의 의중이 결정된 이상 반역은 나 하나로 족하다. 너희는 내 제자이기 이전에 화산의 제자다. 화산의 제자들답게 처신하라!" 화천도인의 피를 토하는 듯한 일갈에 화산의 제자들은 이를 악물면서 저마다 손에 들었던 장검을 도로 거두었다. 화천도인은 빙요화를 노려보며 제자들에게 다시 말했다. "잘 보아두거라. 살아서 돌아가면 빙요화의 모든 것을 본대로 기억하고 세상에 알리거라." 제자들이 뒤로 물러나면서 빙요화를 노려보았다. 빙요화는 화천도인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이젠 준비가 다 되었느냐?" 화천도인은 제자들이 충분히 물러선 것을 본 후 빙요화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 발을 떼면서 장검을 어깨 뒤로 돌려 얹었다. 휙! 칼바람이 일면서 그의 장검이 어깨에서 뒤로 넘어가서 수평을 이루며 멈췄다. 천화화일천검(天花火一千劍). 일찍이 화산파가 명문정파의 반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검법을 창안해내고 연마해왔지만 그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치는 검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천화화일천검일 것이다. 불꽃이 사방에서 일어나는 듯 피어오르는 천화화식(天火花式)과 그 후에 몰아닥치는 마치 붉은 꽃잎들이 난비하는 듯한 검기(劍氣) 천화화식(天花火式). 이 두 가지 검식으로 화산파는 현 무림을 일백 구십 년에 걸쳐 일곱 번이나 제패했다. 영웅대회 때마다 화산파의 이 검법을 파해하기 위해서 다른 명문정파에서는 항상 골머리를 싸맨다. 화천도인은 마지막으로 바로 그 화산 최고의 검법을 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쑤앗-! 그의 발이 흙을 파고들면서 빠르게 움직였다. 이어서 그의 검은 어깨에서 굉음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렸다. 우우우웅. 그의 검은 점점 더 심하게 떨리면서 검 끝이 빙요화를 향하더니 곧이어 그의 손을 떠나면서 어깨 위로부터 한 자 가량을 수평을 유지한 채 떠올랐다. 그러나 빙요화는 화천도인의 그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비웃는 듯한 모습으로 화천도인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을 떼어놓으며 춤추듯 허리를 비틀었다. 언뜻 보면 그녀의 모습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남자를 향해 애교를 떨며 다가가는 철없는 소녀의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두 손 끝에서는 시퍼런 섬광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 마침내 화천도인의 입에서 사자후가 터지고 그의 검이 허공을 찢듯이 날으며 빙요화를 향해 쏘아져갔다. 그 기세에 빙요화의 머리칼이 허공에서 춤을 추듯 휘날렸다. 또한 뜨거운 열풍이 그녀의 전신을 휘몰아쳤다. 천화화일천검은 화염검법이기도 했기 때문에 뜨거운 폭풍과 함께 검화가 불꽃처럼 솟구쳐서 그녀의 전신을 향해 밀려나갔다. 무려 일천 송이의 검화가 그녀를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는 무시무시한 검초였다. 그러나 빙요화는 가볍게 두 손을 모으고 자신의 얼굴 앞에서 마치 꽃봉오리를 두 손으로 받쳐들 듯했고 그 동작에 따라 검화들이 그녀의 두 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실상 빨려 들어가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인간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그리고 다시 그녀가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 화천도인은 드디어 일천식의 검초를 펼쳐내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파! 그의 장검이 허공에서 춤을 추며 검기를 폭풍처럼 일으키고 열기가 줄기줄기 불검이 되어 그녀의 전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빙요화는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두 손은 이미 새파랗게 변했고 그 손 끝에서 한 송이 꽃이 환상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세차게 불어닥치는 검풍 안에서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고 곧장 화천도인의 안면을 향해 날아갔다. 쉬이익! 꽃 한 송이가 날아가는 듯한 환상.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화산의 제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빙요화의 움직임을 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과 똑같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들의 눈에 들어 온 것은 전신이 희다 못해 푸른 빛을 띤 서리에 휩싸여서 얼어 붙어 서있는 모습이었다. "사부님!" 화산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부를 향해 달려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빙요화는 태연히 손을 거두어들였다. 어느새 그녀의 손 끝은 원래의 그 나약하고 섬세해 보이는 아름다운 흰 손으로 변해있었다. 2 사이룡은 황당한 얼굴로 정룡현과 모숭을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 무림의 반이 이미 그들의 손에서 놀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오?" 모숭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사화가 실토한 내용으로 보자면 틀림없이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역모는 오랜 세월동안 치밀하게 계획된 것으로 일시적으로 군사를 일으키는 방법이 아니라 서서히 황제폐하의 심복들을 제거하고 황제의 목을 조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이 가능하겠소?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않는 일이오. 나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소. 역모는 단시간에 기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패하기 마련인데 어찌 그런 방식으로 역모를 일으키려 한단 말이오?" "당연한 이치인 줄은 압니다만, 이번 경우에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하여튼 곤륜왕은 지금 무림인들을 손아귀에 넣은 후 황제폐하의 심복들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사이룡이 검미를 찌푸리며 생각에 빠졌다. 왜 이러는가. 왜 기습적인 역모가 아닌 늘어질 대로 늘어진 방법을 쓰는가. 흔히 역모라는 것은 도모하는 성격상 신속하고 정확하게 가장 짧은 시일 안에 계획하고 실행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비밀은 누설되게 마련이고 연판장 하나면 모두가 구족이 죽고 산산조각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다르다. 사이룡은 이제야 그들이 무엇을 노리는지 알 것 같았다. 모든 그림이 한눈에 들어왔다. 먼저 재력과 무력을 얻는다. 어디에 그것이 있는가. 당연히 무림에 있다. 강호무림은 돈과 무력과 각계각층에 스며든 수많은 세력들이 있다. 표국이 그렇고 금군이나 사병이 그렇다. 하다못해 동창 내부에도 무림인들이 꽤나 많이 등용되어 있다. 그 무림을 먼저 손에 넣는다. 그 다음에 하나씩 황제 주변의 심복들을 제거해 간다. 황제는 허수아비니까 그 주변 세력을 물리치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이미 쓸만한 인물들은 모두 궁 내에서 배척되었고 간도 쓸개도 없이 동창에 고개를 숙이고 겨우 관직을 연명해가는 쥐새끼들만 궁 내에 존재한다. 그 쥐새끼들이야 겁날 게 없다. 이기면 이긴 쪽에 다시 간과 쓸개를 팔 놈들이기 때문이다. 사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우리는 역모라고 입밖에 내놓을 게 없구나." "그렇습니다." 정룡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비사대에서 모은 정보를 가지고는 절대 곤륜왕을 역적으로 몰 방도가 없습니다. 곤륜왕은 무림인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지 황제폐하께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모숭이 콩알같은 눈을 반짝였다. "사사화의 말대로라면 이제 곧 동창의 주요 인물들이나 오도인의 세력들에게도 암살의 위험이 따른다는 것인데……." "……!" 사이룡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이렇게 되면 동창과도 손을 잡아야만 한다. 그래야 모든 일들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동창에 이 모든 정보를 준다면 동창에서는 이 기회에 아예 곤륜왕을 제거하려고 황제에게 한 걸음에 달려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황제는 무림을 아예 없애려고 들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인가. 고민하는 가운데 비사대원 하나가 쏜살같이 들어와 부복했다. "어사대장 위장군께서 방금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사이룡이 멈칫 대원을 바라보았다. "위장군께서?" 어사대장 위천모(衛泉模). 나이는 삼십에 불과한 어리디 어린 장군이다. 물론 사이룡에 비하면 그다지 빠른 진급도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달랐다. 사이룡은 급제하여 판관이 되었고 판관으로 명성을 날린 탓에 갑자기 유명해진 경우였지만 위천모는 불과 삼 년 전까지만 해도 떠돌아 다니는 떠돌이 칼잡이에 불과했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황궁에서 일하게 되었던 것은 순전히 동창의 수장 곽영명의 눈에 들어서였고 곽영명은 그의 충성심과 뛰어난 무공을 높이 사서 중직에 앉혔던 것이다. 물론 곽영명은 그에게서 또 다른 면을 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야심, 야욕, 시기심, 성욕과 식욕.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좋지않은 모든 점을 위천모는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곽영명은 그를 가장 충실한 개로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 워낙 인간이 못된 관계로 불과 삼 년 만에 황제의 친위대인 어사대의 대장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어사대장이 되는 데에는 오도인의 협력이 컸다. 동창의 힘만으로는 절대 그가 어사대장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도인은 쾌히 곽영명의 천거를 받아들였고 위천모를 어사대장에 임명토록 도와주었다. 일견에서는 그의 멍청함이 오도인의 마음에 들었다고도 했고, 또 다른 시각에서는 위천모가 오도인의 눈과 귀가 되어줄 것을 기대했다는 말도 있다. 아무튼 그는 사상 전례없는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여 어사대장이 되었고 곽영명이 바라던 그대로 유감없이 악행을 일삼았다. 그에게 있어서 두려운 것은 오직 두 사람, 가령공주와 곤륜왕 뿐이었다. 황제는 안무서우냐고 묻고 싶겠지만 황제는 이제 궁 내에서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 된 지 오래다. 황제는 후궁들에 둘러싸여서 나오는 법이 없는데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위천모의 밀사가 사이룡 앞에 부복하며 말했다. "저희 장군님께서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사이룡이 모숭을 돌아보았다. 모숭이 말없이 사이룡을 마주보았다. 정룡현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오도인 밑에서 일을 배우고 커왔기 때문에 심지가 깊고 굳었다. 그들의 눈빛은 이제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어디서 보자시더냐?" 사이룡은 밀사를 내려다 보며 차갑게 물었다. "작약루(芍藥樓)에서 오늘 밤 만찬을 준비하고 기다리신다 하였습니다." "작약루?" 작약루는 기루다. 기루에서 만나자고 하는 것은 그쪽도 황궁 내에서 이런 일로 마주치기는 싫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작약루에서 만나자는 것은 이쪽의 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이룡은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대며 두 참모들을 바라보았다. "가서 전해드려라. 호의는 감사하나 갈 형편이 못된다고 말이다." 흠칫. 밀사가 몸을 떨었다. 사이룡이 더는 말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고 두 참모는 그런 사이룡의 태도에 만족한 듯 미소를 띄웠다. 밀사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비사대원에게 이끌려 나가버렸다. 모숭이 입꼬리를 말며 사이룡을 바라보았다. "동창에서 화를 내지 않겠습니까?" 사이룡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런 건 신경 쓸 것도 없소. 우리가 그들의 눈치나 보면서 어찌 임무를 다할 수 있겠소? 화가 나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오. 앞으로 내가 이곳에 없어도 마찬가지요. 절대 남의 눈치를 보지 마시오. 모든 책임은 나에게 미루시오." 두 참모는 고개를 숙였다. "이제부터 나는 무림으로 돌아갈 것이오. 그래야만 할 것 같소." 사이룡의 말에 두 참모가 퍼뜩 놀랐다. "무림으로 돌아 가신다면?" "그러면 이곳의 일은 어찌 되는 겁니까?" 사이룡이 침착하게 말했다. "이곳은 두 분께서 지켜주시오. 가장 역점을 둘 것은 이 궁내에 자객들이 난입하는 것이오. 그 점에 유의하시고 특히 무림인들이 성 내에 나타나거든 철저히 그들의 행동을 파악하시오." "하지만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우리 비사대에서 대장님을 보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룡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모숭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시기에 대장님께서 혹 위험에 빠지시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낭패가 아닙니까? 그러니 절대 혼자 가셔서는 안됩니다." 사이룡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렇지가 않소. 무림이라는 곳이 묘한 곳이어서 내가 단신으로 우리 중원신검가의 식솔들만 데리고 활동하면 어느 정도 뭉칠 수가 있으나 그렇지 않고 관군을 끌어 들이면 반발하게 마련이오. 그러니 혼자 가는 게 더욱 안전한 것이오." "……." 두 참모는 더 말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불안한 기색들이었기에 사이룡은 이유를 덧붙였다. "게다가 비사대 인원으로는 이곳을 지키기에도 벅찰 것이니 맡은 일에만 충실해주시오." 3 그때쯤에 강호무림은 벌집을 쑤신 듯이 시끄러웠다. 명문정파의 거두라 일컫는 화산파가 멸문지화 일보직전에 화산지보(華山之寶)인 태상태을검(太上太乙劍)을 빙요화에게 바치고 산문(山門)을 폐하는 것을 겨우 면했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 온 무림을 강타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그 누구도 헛소문이라고 일축하였다. 아무리 반인반귀의 빙요화라 하지만 이백 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화산파가 그녀에게 멸문지화를 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었고, 또한 경악스러운 일은 사천당가가 빙요화를 앞세워서 천하무림의 질서를 재편하겠다는 황당한 기치를 세운 일이었다. 사천당가의 배후에 다른 세력이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 내막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있다면 개방과 소림사 정도였으며, 두 개 방파라고 해서 아는대로 함부로 입 밖에 내뱉을만한 일도 아니었다. 어쨌든 아직은 역모가 밖으로 드러나지도 않았고 곤륜왕이 군사를 일으킨 것도 아니다. 무림에서 피바람이 분다고 해서 왕의 이복 동생을 역모로 모는 것은 나중에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에 직면할 수도 있기에 모두가 노심초사할 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무림 내에서 모든 피바람을 잠재우고 곤륜왕의 기세를 꺾는 길 뿐이다. 그러나 무림은 이제 그럴 힘도 없었다. 무림맹의 맹주인 사독패가 죽고 난 중원무림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수많은 정사무림 각 방파가 이합집산을 하며 서로들 촉수를 세우고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화산파 다음으로 혈겁에 휩싸인 곳은 바로 아미파였다. 복호사(伏虎寺). 사명(寺名)이 다분히 도교적이다. 하기는 도교의 명인 순양자(純陽子)가 사람을 해치는 호랑이를 법력으로 굴복시키고 그 터에 도관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 뒤 불교세력들이 도교사원을 헐어버리고 불교사원을 지은 것이 바로 복호사인 것이다. 그러나 복호사가 유명한 것은 절이 아니라 화엄세계를 재현해 놓은 화엄동탑(華嚴銅塔)이라는 탑파다. 높이 이십 장으로 된 14층의 이 동탑엔 화엄경을 설하는 부처와 그를 따르는 존자상(尊者像)과 함께 19만5천48자의 화엄경 전문이 봉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탑파엔 불아(佛牙), 패엽경(貝葉經), 어인(御印) 등 세 가지의 유물이 있다는 것이다. 헌데 오늘, 인간임을 거부하는 빙요화가 복호사에 와서 세 가지의 유물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말이 세 가지 유물 운운하는 것이지 빙요화의 속셈은 뻔한 것이었다. 아미파가 문파지보인 그 세 가지 유물을 내놓을 리가 없으니 결국은 산문을 닫기 싫으면 자신과 싸워서 이기라는 것이다. 화산파 24대 장문인인 매화노방(梅花老芳)은 분기탱천한 얼굴로 빙요화를 노려보았다. "빙요화, 그대의 무공신위가 아무리 높다고는 하지만 본산 아미파는 그대의 흰소리가 통하는 곳이 아니다." 빙요화는 배시시 웃었다. 아니, 말이 웃었다는 것이지 그 미소에서 뿜어나오는 냉기는 뭇 인간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호호. 그래? 내가 흰소리를 한다고?" 빙요화는 치마를 팔랑이며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럼 증명을 해야겠지?" 파앗! 찰나간 파쇄성과 함께 빙요화의 팔랑이는 치마에서 한풍이 세차게 몰아쳤고 그녀는 이미 태을진인의 지척간에 다다르고 있었다. 매화노방은 대경실색하며 검을 뽑으며 아미의 일곱 여제자들을 향하여 악성을 터트렸다. "칠앵검진(七鶯劍陣)을 펼쳐라!" 아미의 칠앵여검수들이 일제히 검을 뽑으며 매화노방을 육박하는 빙요화에게 짓쳐갔다. "죽어라!" 칠앵여검수들은 앙칼진 폭갈을 터트리며 송이송이 검화를 뿌려댔다. "호호호호호!" 빙요화는 가소롭다는 듯이 교소를 터트리며 매화노방에게 짓쳐가던 신형을 위로 뽑으며 마치 한 마리 제비처럼 길게 회전을 했다. 그리고 칠앵의 맨 우측의 여검수에서부터 전광석화처럼 휘돌아갔다. "아- 아- 아- 아- 악-!" 찢어지는 처참하고도 긴 비명이 맨 우측의 여검수의 입에서부터 터져나왔고, 이어서 칠앵의 여검수들이 일제히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젖가슴은 순식간에 온통 피로 물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빙요화가 여검수들에게 상처를 입혔는지 그 상황을 똑바로 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그 누가 볼 수 있었다면 여검수도 빙요화의 손속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매화노방은 놀람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다. 빙요화의 손속의 빠름보다도 그녀의 손속의 악랄함에 넋을 잃은 것이다. 칠앵의 여검수들의 젖가슴이 달아난 것이다. "이것들아, 내가 너희들과 같은 여자라 목숨은 봐준거야. 알았느냐?" 빙요화는 여검수들의 뜯겨진 젖가슴의 일부분을 손아귀에 쥔 채 꽤나 인정을 베푼 것처럼 말을 했다. 하기는 그녀로서는 봐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매화노방은 공포와 분노에 온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그리고 잔인스런 빙요화의 손속에 눈물을 흘렸다. 칠앵여검수. 그녀들은 매화노방의 분신같은 애제자이자 아미의 꽃이였다. 게다가 이제 이십세 전후의 미모의 여인들이 아닌가 말인가. 비록 남자를 멀리하는 비구니이지만. 매화노방은 피범벅이 된 젖가슴을 쥔 빙요화의 손아귀를 노려보며 검을 꼬나쥐었다. "짐승같은 년. 찢어 죽일테다." "오호호호호. 날 찢어 죽이겠다고? 그래, 그래라. 그럴 수만 있다면 그래야지." 매화노방은 이를 갈며 검을 휘두르며 짓쳐갔다. 그녀의 독문절기인 매화토염(梅花吐艶)을 전개한 것이다. 수많은 꽃봉오리에서 꽃잎파리가 터져나가며 허공을 비산하듯 그녀의 검에서 뿜어내는 강철의 편린이 일제히 빙요화를 향하여 쏘아져 갔다. 그 편린 하나하나가 치명적이어서 그것을 막을 그 어느 강력한 방어벽도 불가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빙요화는 피식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치마 끝을 잡고 한바퀴 삥돌았다. 따따따땅! 매화노방이 펼친 검화의 편린 하나하나가 마치 강철 벽에 부딪친 것 같이 금속성을 내며 빙요화의 치맛자락에 부딪쳤다. 그리고 매화노방은 그 반탄력에 의해 일 장 밖까지 주르르 밀려나갔다. 순간이었다. 매화노방이 끓어오르는 기혈을 누르며 검을 다시금 움켜쥐었을 때 이미 그녀의 눈 앞에는 신비한 빛을 머금고 영롱한 꽃 한 송이가 떠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자신의 위기를 느끼기 보다는 환성을 발하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 서서히 그녀는 자신의 전신이 얼어붙어 가는 것을 느끼고 힘없이 뒤로 서너 걸음을 물러섰다. 이럴 수가 있는가. 그녀는 차디차게 식어가는 자신의 몸을 허물어뜨리며 빙그르르 주저앉고 말았다. 몸과 함께 돌아가는 그녀 주변의 풍경은 자신과 같이 전신이 얼어서 쓰러지는 제자들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