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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호반(湖畔)의 살육전(殺戮戰) [1] 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밤. 세 남녀가 파양호를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었다. 사십대 중반의 남 자는 비대한 체구였으며, 삼십대 초반으로 조이는 여인들은 동그란 계란형의 얼굴에 체형이 날씬하여 제법 미모를 갖춘 편이었다. 하지만 여인들은 초췌한 얼굴을 감추려고 짙은 화장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자주 눈웃음을 자주 쳐 어딘지 경망스러워 보였다. 이들 두 여인은 요극초의 소실인 국진과 매향이었다. 매향이 불만 섞인 음성을 토해냈다. "이봐요, 원개 아저씨! 우리가 꼭 보화리(寶花里)로 가야해요?" 보화리는 남창(南昌) 뒷골목에 있는 유명한 창녀촌이었다. 국진과 매향도 기생 출신이라 그곳의 여인들이 짐승보다 못한 취급 을 받는 사실을 익히 아는 터였다. 그래서 그녀들은 버티는 중이었다 . 국진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쳐댔다. "맞아요. 춤추며 점잖게 노는 곳으로 가면 얼마나 좋을까? 아저씨 랑 가끔 즐길 수도 있을 텐데......." 기왕 말이 나온 김에 그녀는 좀 더 고급한 곳으로 팔려가고 싶었다 . 원개는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창피하다 이건가?" 매향은 참담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이 나이에 팔자에 없는 창녀 노릇이나 하게 생겼으니...... ." 국진도 분하다는 듯 억양을 높였다. "대체 누가 우리를 팔아 넘겼죠?" 원개는 능청맞게 둘러댔다. "확실히는 모르나 요극초가 생전에 빚을 진 모양이더군." "결국 살루문이 돈을 받기 위해 우리를 정해단에 넘겼군요. 나쁜 놈들, 그 분의 재산이 얼만데 그걸 몽땅 빼앗고도 모자라......." 매향은 소매를 걷어 붙이며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지독한 놈들, 외딴집에서 번갈아 우리를 능욕하더니......." 그녀들은 창피함도 잊은 채 겪었던 경험을 다투어 늘어놓았다. "큰 보자기를 씌워서 우리를 납치한 자들은 정해단이었군요! 한 달 내내 달려들어......." "잠도 안 재우고 온갖 자세를 요구하면서......." 사실 그녀들을 팔아 넘기라고 의뢰한 자는 죽은 요극초였다. 당시 그는 미리 조화산장의 식솔들을 팔아 넘긴 후 장원에 스스로 불을 지른 것이었다. 원개는 여인들의 투정이 지겨운지 냉정하게 말을 잘랐다. "어이, 이제 좀 조용히 가자. 엉!" 비록 그는 여인들을 팔러 다니면서 주절대는 습성이 생겼을망정 끊 을 때는 딱 끊는 자였다. 그가 딱부리 눈을 부릅뜨자 여인들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어언 호반에는 청승맞은 안개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세 사 람은 축축한 습기를 맞으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국진은 얼마 못 가서 또다시 툴툴거렸다. "다른 곳은 없나요? 하필... 그런 생활을......." 원개는 아예 정곡을 찔러 버렸다. "사내 맛을 참고 지내는 것보다야 백 배 낫지 뭘 그래." 국진은 은근히 원개의 의중을 떠보았다. "다른 사람들로 대치할 수도 있잖아요." 그녀는 원개의 소매를 슬쩍 잡아 당겼다. 결국 참다못한 원개는 짜증 섞인 음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나 참, 고급 술집은 전부 싱싱한 소녀들만 찾는다니까." 매향은 도저히 안 되겠다는 판단을 했는지 얼른 대책을 말했다. "으응, 저... 아저씨. 천락무예단은 안 되나요?" 국진은 벌써 들뜬 나머지 두 손을 휘저었다. "아저씨, 저도 파라문곡(婆羅門曲)을 익혔거든요." 그녀의 음성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원개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주제를 알아라. 그래도 양귀비는 당시 스물 둘이었어." 파라문곡은 당나라 때부터 널리 유행한 음악으로 공작(孔雀)을 연 상케 하는 초록색 옷을 입고 추어 일명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이라 고도 불린다. 일설에 의하면 당현종이 파라문곡을 개작하여 그런 이 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흔히 양귀비라 부르는 양옥환(楊玉環)은 바로 이 곡을 춤으로 표현 하여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매향은 당당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칫, 우리 만한 여자가 어디 흔한 줄 아세요?" 국진도 못마땅한 안색으로 반주를 맞추었다. "그러게 말이야." 눈짓을 주고받던 두 여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치마가 바닥의 습기에 젖어들건만 완전히 날 잡아 잡수시오 하는 태도였다. 그 뿐이 아니었다. 두 여인은 비소(砒素)를 입에 물고 죽 기 살기로 버티는 것이었다. 원개는 비로소 그녀들에게 속은 사실을 알았다. '약은 계집들, 멀미가 난다며 마차와 배를 마다하더니.......’ 실상 그가 두 여인을 데려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나중에 도망을 치거나 엉뚱한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 차라리 그럴 바에야 국진의 말대로 다른 사람으로 대치하는 편이 신용을 위해 나을 것 같았다.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너희들 원하는 대로 해주마. 그 대신 가서 잘해라. 거기에 는 내가 아는 사람도 있으니......." 예상대로 매향은 즉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가 누구죠?" 두 여인이 벌떡 일어나자 원개는 습관처럼 주절대기 시작했다. "가면 알 게야. 그는 주역이거든. 무려 삼 년 만에 온갖 기술을 배 운 천재지. 너희들도 춤에는 자신이 있다며......?" 그가 국진과 매향의 부탁을 수락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잘 됐어. 청풍이 말하면 모염정도 거절하지 못할 테니까.’ 그는 자신을 괴롭혀 온 월백분침을 이 기회에 뽑아내려고 마음먹었 다. 월백분침은 모염정이 귀답령에서 그의 등에 박아 놓은 독침이었 다. 그러한 모염정도 유청풍의 한 마디면 순순히 응하지 않겠는가? 국진과 매향은 천재 주역을 안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 "배경이 든든한데 누가 우리를 건드리겠어. 호호......." 웃음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 전이었다. "분위기 좋군." 돌연 느끼한 음성이 세 사람의 발길을 가로막았다. 순간 원개는 흠칫하며 멈추었다. '엇! 갈곤태와 쌍곰보 형제......?’ 방금 시비조로 말한 자는 와호장의 총관 갈곤태였다. 그의 옆에는 팽고와 팽소가 살기를 띤 채 버티고 서 있었다. 국진과 매향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원개의 뒤로 숨었다. "아이, 깜짝이야!" 그때 살벌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계집들은 이리 와라." 어느새 탈명색혼대 무사들이 장검을 번뜩이며 뒤를 차단하고 있었 다. 탈명색혼대는 살루문의 해결사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조장인 듯싶 은 자가 국진과 매향의 팔을 잡아당겼다. 여인들은 몸이 굳어져 찍 소리도 못한 채 개 끌리듯 딸려갔다. 조장은 다짜고짜 여인들의 목에 섬뜩한 장검을 들이댔다. "건방진 계집들, 조금 전 본 대를 모독했겠다?" 국진과 매향은 바들바들 떨었다. "아아... 사... 살려주세요." "시...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지 할께요." 일순 조장의 칼이 무자비하게 허공을 갈랐다. "본문을 무시하면 모두 이렇게 된다!" 사악!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이 밤 공기를 찢었다. "아아악!" 두 여인이 목전에서 죽었지만 강적에게 포위 당한 원개는 살아날 방도를 찾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2] 유청풍은 천락무예단을 향해 남쪽으로 달렸다. 구강에 있는 춘추고서점에서 남창으로 가는 육로는 파양호가 가로 막고 있어 오직 이 길 뿐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호반에는 청승맞은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어느 순간 그는 흠칫 놀라 멈추었다. '탈명색혼대......?’ 오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장검을 번뜩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에 섬뜩한 백골이 그려진 무리들은 바로 탈명색혼대였다. 그들 가운데 낭아곤(狼牙棍)을 든 자가 다가왔다. "흐흐흐, 유청풍! 기다렸다." 유청풍은 그 자를 쏘아보았다. '혈랑곤(血狼棍) 탕구추( 趨) 아닌가? 그러고 보니 살루문에서 진작부터 나를 노렸구나.’ 그는 천락무예단에서 지내는 동안 웬만한 무림인의 인적사항과 특 징을 대략 알고 있었다. 혈랑곤 탕구추는 목에 힘을 잔뜩 주고 거만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본 부대장(副隊長)께서 업무 방해죄를 묻겠다." 유청풍은 주위를 날카롭게 둘러보았다. 가장 약한 곳을 고르기 위 함이었다. "뚱딴지같은 소리! 난 빚지거나 보증을 선 일이 없다." "흐흐! 위대한 문주의 사업을 방해한 죄다." "살루문주는 쥐새끼로군. 몰래 살인교사(殺人敎唆)나 하다니...... ." 탕구추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건방진 놈, 말조심해라!" 그는 두려운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유청풍은 조심스러워 하는 그를 비웃었다. "도대체 문주가 누군데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냐?" 탕구추는 긴장된 표정으로 으르렁댔다. "네놈은 존엄하신 분의 신상을 물어 볼 자격이 없다." 그는 우수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것이 신호인 듯 탈명색혼대는 탕구추를 축으로 재빨리 이중의 원 진을 구성했다. 진 속에서 탕구추의 음성이 들려왔다. "탈명회원진은 소림사의 백팔나한진보다 무섭다는 사실을 알게될 것이다!" 유청풍은 번개처럼 신형을 날렸다. "흥! 마음대로 안 될걸?" 쐐애액! 네 자루의 단검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그는 위맹한 장력을 쏟아냈 다. 이때 날아오는 단검을 막 쳐내려던 네 명이 긴 비명을 터트렸다. "끄아악......!" 유청풍은 유유히 허공을 통과하여 반대편 쪽으로 날아갔다. 탕구추는 내심 깜짝 놀랐다. "저... 저 놈이 다양한 무공을 구사하는구나." 하지만 수십 년 동안 불패의 진을 구성해 온 탈명색혼대는 어느새 빈 공간을 메우고 다시 에워쌌다. 유청풍은 그들의 신속한 대응에 놀 라고 말았다. '으음, 반응 속도가 상당히 빠르군. 단검으로 해치우는 것은 불가 능하다. 일단 저 봉우리로 피하면서 약점을 노려야겠구나.’ 원래 단검은 호신용이나 암기 대용으로 고안된 무기여서 다수의 적 을 상대로 접근전을 펼치기에는 부적절한 무기였다. 하지만 진을 펼친 상대방도 분산과 이동에 약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유청풍은 나무와 바위 등 장애물 지역을 택해 달아나려는 것이었다. 그는 앞에서 솟구치는 자의 이마를 징검다리 밟듯 걷어찼 다. "비켜라!" "컥!" 유청풍의 신형이 허공을 날 때마다 탈명색혼대원은 갈대처럼 우수 수 쓰러졌다. 중원에서 손가락 꼽힐 정도로 큰 담수호이자 천혜의 명승지인 파양 호반이었으나 지금은 쫓고 쫓기는 살육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사사삭! 하는 음산한 소리와 함께 예리한 칼날들이 밤비 속에 번뜩거렸다. 유청풍은 고목과 바위를 은폐물로 이용하여 순간적으로 위치를 이 리저리 이동시켰다. 그의 손에서 단검이 빛을 발하면 여지없이 비명 소리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탈명색혼대는 사방을 포위한 채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적 을 죽이며 도주하는 유청풍도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헉헉... 지독한 놈들, 완전히 개미떼구나." 찬바람이 귓바퀴를 때리며 빠르게 지나갔다. 능선 중간 지점으로 접어들 즈음 탕구추의 혈랑곤이 불쑥 튀어나왔 다. "죽어라!" 예리한 혈랑곤은 유청풍의 허리어림을 뭉턱 잘라냈다. "크윽......." 유청풍은 잠깐 비틀거렸을 뿐 다시 다리에 힘을 주었다. 불과 십여 장 뒤에서 탈명색혼대가 새카맣게 쫓아오고 있었다. "신속히 포위하라!"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릴 찰나 유청풍은 풀 위를 구르며 우수를 뿌 렸다. 동시에 단검 네 자루가 매서운 파공음을 일으켰다. "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조차 유청풍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땀으로 변한 소금기를 뱉어내며 단검을 회수했다. 갑자기 시 야가 뿌옇게 보이는 순간 탕구추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혈랑참살(血狼斬殺)을 피할 것 같으냐?" 유청풍은 목 뒤에서 불어오는 강풍을 느끼며 자세를 낮추었다. 일순 예리한 혈랑곤의 가시가 그의 어깨를 긋고 지나갔다. '으욱, 탕구추... 이 자는 갈상태보다 확실히 강하구나.’ 탕구추는 직책상으로도 갈상태보다 상급서열에 있는 만큼 무공수위 가 훨씬 높았다. 그는 이리처럼 사납게 달려들었다. "흐흐....... 이제 끝장을 내 주마." 유청풍은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었다. 앞을 가로막은 탈명색혼대의 그림자가 빠르게 겹쳐지고 있었다. 위 기를 느낀 유청풍은 갑자기 신형을 뒤로 돌리며 단검을 날렸다. "이얏!" 미처 예상하지 못한 탈명색혼대원 세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꺼어억!" 유청풍은 능선을 가로질러 도주 방향을 역으로 바꾸었다. 포위망을 피해 지친 그가 도주할 곳은 오직 저 넓은 파양호 뿐이었 다. 이때 호숫가에서 불빛이 번쩍이며 눈길을 빼앗았다. 부슬비가 내리는 밤, 자정이 넘은 시각에 민가는 아닐 테고 뭔가 도움이 될 것만 같았다. 뒤에서 소리치는 탕구추의 음성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놈을 절대 놓치지 마라!" 유청풍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는 나무와 바위를 내딛는가 하면 그 사이로 빠져나가 탈명색혼대 의 공격효과를 최대한 줄였다. 흐릿하던 불빛이 드디어 명확하게 보였다. 오 장 앞, 풀밭에서 한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 긴 강관을 입에 문 채 정신없이 불고 있었다. 유청풍은 전신이 굳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윽! 엎친 데 덮친 격이군. 하필 혁련달이 금괴(金塊)를 만드는 곳 으로 오다니.......’ 강관을 부는 사람은 바로 공절 혁련달이었다. 그의 주위에는 온통 누런 금빛으로 번쩍거렸다. 두어 가마 정도 됨 직한 금빛 모래가 쌓여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는 육면체 금괴와 형 (型)을 뜰 금박(金箔)이 널려 있었다. 아마 그는 파양호에서 채취한 사금(砂金)을 정련하는 모양이었다. 강관을 불어대던 혁련달은 모아 놓은 금괴에 태연히 왕수(王水)를 뿌려 녹여버렸다. 그는 강관으로 사금이 섞인 모래를 헤쳐 엎어놓았 다. 그는 벌떡 일어서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흥! 그렇지 않아도 네 녀석을 처치하기 위해 여기서 기회를 엿보 고 있었다!' 천락무예단은 남창에 있으므로 북쪽에 위치한 파양호에서 엎드리면 코 닿는 거리였다. 그는 여차하면 유청풍을 죽이려고 부근에서 틈을 노리던 중이었다. 피할 곳이 없게된 유청풍은 난감했다. '이런... 글자 그대로 사면초가(四面楚歌)로구나!’ 전면은 혁련달이 버티고 있으며, 뒤에는 탕구추가 바짝 추격해 오 는데 또한 좌측은 높은 산이요 우측은 탈명색혼대가 벌써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모면하기 어려운 위기를 맞이한 셈이었다. 혁련달은 상황을 파악한 후 내심 쾌재를 불렀다. '탕구추라... 문주가 지시한 게로군.’ 어느새 그의 손에는 만능의 망치 사타공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탕구추는 그의 신분을 모르는지 긴장한 눈초리로 주시했다. 유청풍은 문득 통쾌하게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아니, 이게 누구요? 당신이 설마 밤에도 금을 가공하는 줄 몰랐소!" 순간 탕구추는 부지불식간 주위를 돌아보았다. '뭐, 금? 한데 맨손으로 모래를 가공한단 말인가? 대체 무슨 소리 지?' 그는 바닥에 번쩍이는 모래가 깔린 곳을 바라보며 의아히 여겼다. 혁련달은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혈랑곤, 정말 애쓰는구먼." 탕구추는 반 배분 높은 혁련달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선배께서 저 녀석과 원한을 맺으셨군요." 그가 혁련달에게 공손히 대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공연히 손속 있는 늙은이와 시시콜콜 따지느니 비위를 맞춰 임무를 쉽게 마칠 속셈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혁련달은 언성을 높였다. "원한이라니? 저 놈처럼 기고만장한......." 그는 여기서 말을 중단하고 말았다. 자꾸 떠벌리면 자신의 비밀이 탄로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두 부류는 유청풍을 처치할 기회를 잡았는지라 안색이 밝았 다. 탕구추는 대뜸 소리쳤다. "이놈아, 너는 반드시 죽어야겠구나. 마음을 비우신 선배를 저토록 분노하시게 만들다니......." 여덟 자루의 단검을 모두 빼든 유청풍은 이를 악물었다. "찌든 인간끼리 잘 통하는군. 좋아, 여기서 장례식을 치를까?" 슈슈슉! 그는 달려드는 혁련달을 향해 네 자루의 단검을 집어 던졌다. 혁련달은 일갈과 함께 사타공을 가차없이 휘둘렀다. "놈, 어디서 잔재주를 부리느냐?" 타타타탕! 단검들이 퉁겨져 나가는 순간 유청풍은 등판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 꼈다. "으윽!" 그는 시뻘건 피 분수를 내뿜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이미 춘추고서 점에서부터 진기를 많이 소모한 그인지라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 그 는 나머지 단검 네 자루마저 들고 있기 힘들어 그만 바닥에 떨어뜨렸 다. 이제 혁련달은 손가락 하나만 퉁겨도 그를 죽일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탈명색혼대를 의식했다. '가만! 저 가운데 누군가 입방아를 찧어대면......?’ 아마 그때는 숱한 소문이 떠돌 것이다. 지금까지 마음을 비운 고인 으로 알려진 그가 살인을 했다는 둥, 금제련에 관한 소문도 금세 중 원 전역에 퍼지고 말 것이다. 이럴 때는 탕구추가 처치하도록 유도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한편 탕구추는 그가 머뭇거리자 앞으로 나섰다. '흐흐... 이 놈을 처지하면 문주가 날 새로운 눈으로 보겠지?' 그는 유청풍의 머리를 겨눈 채 혈랑곤을 번쩍 치켜들었다. 탈명색 혼대의 시선이 일제히 혈랑곤 끝에 모아졌다. 이것은 탕구추가 바라던 바였다. 한데 막 혈랑곤을 내리치려던 그는 동작을 멈추었다. 중인들은 넋 나간 사람 마냥 우두커니 서있는 그의 시선을 따라 가 다가 그만 기겁을 하고 놀랐다. "앗!" 삼 장 앞, 시퍼런 광채가 오싹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살기의 근원은 분명히 사람이었다. 그는 수중에 거 대한 도를 움켜쥔 채 눈을 부릅뜨고 탕구추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편 유청풍은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겨우 그를 볼 수 있었다. '도절이......?’ 갑자기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도절 위강이었다. 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만들었다. 섬뜩한 안광, 수중에 들고 있는 구령은배도, 머리의 뒷부분에만 남 은 허연 머리카락이 온통 꼿꼿하게 치솟아 있어 마치 귀신의 형상이 었다. 위강은 묵직한 도를 치켜든 채 다가오며 올빼미 음성으로 말했다. "탕구추! 너의 악업(惡業)도 오늘로 끝이다." 언뜻 그는 일 보를 내디디는 것 같은데 무려 이 장을 날아갔다. 놀란 탕구추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으으, 하필......." 그의 실력으로는 위강을 도저히 대적할 수가 없었다. 물론 수하들과 합세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혁련달에게 구조해 달 라는 눈길을 보냈다. 혁련달은 위강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염병! 저 인간은 녀석을 죽일 만하면 꼭 나타나는군.......’ 그가 위강과 겨룬다면 승부는 예측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만일 탕 구추가 유청풍을 죽인 후 그와 합세한다면 승산이 있었다. 혁련달은 잠시 위강을 원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더니 이내 유청풍 쪽 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그는 다시 망설였다. 탕구추는 그의 그런 모습에 느껴지는 게 있었다. '오라! 내가 위강을 상대할 동안 청풍을 손 볼 심산이군.’ 그는 위강을 건방진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적대감을 가져 당신에게 득 될 것은 하나도 없을 거요." 갑자기 위강은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한 가지만 묻자."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탕구추도 입술을 달싹댔다. "좋소. 물어보시오." "당시 내 식솔을 죽이라고 부탁한 자가 누구냐?" "그건... 비등원주요." 그들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대화가 끝난 순간 위강의 눈에서 독 기 어린 섬광이 이글거렸다. 그는 끓어오르는 살기를 억지로 참느라 구령은배도를 꽉 말아 쥐었 다. 한데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 흥분은 금물이었다. 탕구추는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순순히 응대한 것이다. 그는 혁련달의 눈치를 살폈다. 이때 혁련달은 열심히 주판알을 퉁겼다. '승률은 반반인데.......’ 하지만 만일 또 다른 자가 나타나면 만사휴의(萬事休矣)다. 한편 탕구추는 그의 석연치 않은 행동에 불만이었다. 그는 혁련달 이 눈치를 차리도록 위강을 향해 억양을 높였다. "한철파류를 한번 견식해 보리다!"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탈명색혼대는 쇄도해 왔다. "받아랏!" 위강의 구령은배도가 찬란한 은빛을 뿌렸다. "타아앗......!" 고함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캐애액......!" 구령은배도가 막 십자를 긋고 하향한 바로 그 순간 허공에 뜬 탕구 추는 혈랑곤으로 위강의 목을 찔러 들어갔다. "으흐흐, 네가 졌다!" 위강은 어느새 상체를 뒤로 젖히며 구령은배도로 직선을 그어댔다. 돌연 탕구추의 숨막히는 비명이 들려왔다. "큭!" 땅에 떨어진 탕구추의 시신은 네 조각이 나서 뒹굴었다. 부슬비에 젖은 풀밭이 금세 시뻘건 피로 물들었다. 위강은 뿌연 암 공을 응시했다. '여보......! 원수를 꼭 갚을 테니 눈을 감구려. 호(浩)야, 너도 들었지?’ 이상하게 혁련달은 그런 광경을 보며 흉소를 흘렸다. '멍청한 탕구추가 골로 갔으니 안심이다. 세상만사 서둘러서 좋을 게 뭐 있나? 저 위강이야 어차피 문주가 손볼 텐데. 그 후 청풍이란 아이 하나 처치하는 것 쯤이야.......’ 바로 그때였다. "여기서 뭘 하는 거죠?" 코를 자극하는 향긋한 지분(脂粉) 냄새와 함께 한 가닥 비음이 밤 공기를 흔들었다. 붉은 경장을 바람에 나풀거리며 나타난 여인은 바로 색절 모염정이 었다. 혁련달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 계집이 드디어 나타났군.' 조금 전 혁련달은 상황이 돌변하자 도리어 탕구추가 죽기를 바랬다 . 이렇듯 그는 무공만큼이나 눈치가 빨라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유리 한 길을 택하는 자였다. 상대적으로 공력이 약한 탕구추는 이를 모르고 서둘러 죽음을 자초 한 셈이었다. 모염정은 널려진 시신을 무시한 채 유청풍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 다. "아휴, 온통 상처 뿐이네. 동생은 가는 곳마다 혈전을 치르고 있군 ?" 그녀는 어느새 유청풍을 슬그머니 동생이라고 불렀다. 이런 노골적인 애정 표현은 위강과 혁련달에게 어서 자리를 비켜달 라는 재촉이나 다름없었다. 혁련달은 시치미를 뚝 떼고 모염정과 위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실 누가 와서 저 아이를 치료해 주길 바라던 참이었소. 그럼 나 중에 또 봅시다." 그는 얼른 혁낭을 들춰 멘 후 북쪽으로 휑하니 사라졌다. 위강도 떠날 의사를 비쳤다. "나보다 의술에 정통하니 수고 좀 하시구려." 그는 신형을 솟구치며 유청풍에게 전음을 남겼다. "색절을 조심하게......." 모염정은 그가 사라진 쪽을 향해 무섭게 눈을 흘겼다. '어째서 저 늙은이는 한 마디 할 때마다 사람 속을 팍팍 긁는 거야 ? 뭐, 의술이 어쨌다고? 내가 홍오간과 친한 게 배 아픈가 보지?’ 그것도 잠시 그녀는 유청풍을 바라보며 농염하게 웃었다. "동생, 오랜만이야. 그새 신수가 아주 훤해졌네. 호호호......." [3] 원개는 호수를 뒤로 한 채 자세를 잡았다. '심상치 않구나. 전적을 감추기 위해 좀처럼 탈명색혼대와 어울리 지 않는 자가.......’ 위기 속에서 그는 갈곤태의 심중을 탐지하려고 애썼다. 좌측에는 갈곤태 일행이, 우측에는 탈명색혼대가 그를 에워싼 형태 였다. 원개는 긴장감을 누른 채 다정스럽게 물었다. "오랜만이군. 호미취골, 별일 없었는가?" 갈곤태는 대뜸 말을 놓았다. "흥, 별일? 전대 덕분에 다 죽을 판이야." 원개는 비로소 그가 나타난 이유를 깨달았다. '제길, 늘 불안하더니만... 청풍을 살려 준 보복이구나.’ 그는 색절 모염정을 핑계 대고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열 일곱 번째 척추 뼈인 비수혈(脾兪穴)에 그녀가 월백분침을 박아 놓았기 때문이었다. 갈곤태는 그의 불안한 심리를 부추겼다. "흐흐, 아쉽군. 청풍이 저 세상으로 가서......." 그는 자신의 형 지서귀 갈상태와 형의 정부인 양장수미 노야봉이 지금쯤은 유청풍을 죽였으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원개는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랐다. '뭐야, 그가 죽었어......?’ 일순 그의 뇌리에는 모염정의 잔혹한 모습과 얼음처럼 차가운 고혜 원의 영상이 연속해서 떠올랐다. 갈곤태는 슬며시 그를 떠보았다. "왜 놀래나? 무슨 관계가 있나?" 그는 잠시 뜸을 들이며 원개의 눈치를 살폈다. 상대방의 의중을 알아차린 원개는 일부러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 다. "이자까지 채워서 전대를 반납하겠네." 전대란 삼 년 전 갈곤태가 유청풍을 죽여달라고 부탁할 때 원개에 게 준 돈주머니였다. 당시 이 전대는 원개가 모염정의 발에 차이는 순간 귀답령 아래로 날아가고 말았다. 따라서 원개도 그 전대를 언제 잊어버렸는지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 갈곤태는 냉랭히 대꾸했다. "이젠 늦었어." "달리 원하는 것이 있는가?" "청풍을 살려준 이유를 말하면 고려하지." 그는 연계된 인물들을 파악해서 모두 죽일 작정이었다. 하지만 원 개는 그리 호락호락하게 응하지 않았다. "이미 죽은 사람에 관한 일을 왜 묻나?" 그는 다소 벅차지만 어떻게 하든지 현재 위기를 벗어날 각오였다. 갈곤태는 의심이 잔뜩 담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확실한 원인규명만이 재발을 방지하니까." 원개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젠장! 모염정 그 독한 계집년의 짓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와호장을 등졌다가는 또 성치 않을 테고.......’ 둘 다 그에게는 도저히 상대 못할 무서운 강적들이었다. 궁리 끝에 그는 특유의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사실은 나도 그 일로 자네를 만나려던 참이었네. 부탁을 이행하려 던 순간 무서운 고수가 나타나는 바람에... 아마 귀답령에 가면 부러 진 내 장상봉을 찾을 수가 있을 걸세." 갈곤태는 그의 성정을 잘 아는지라 소리를 꽥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누가 속을 줄 알아!" 노련한 원개는 거짓말로 적당히 둘러댔다. "워낙 엉겁결에 당한 터라... 마치 귀신처럼 끔찍한 모습이었거든. 시커먼 옷을 입고 머리를 산발한 괴인이 번개같은 솜씨로......." 그는 말을 중단한 채 으스스 치를 떨었다. 언뜻 사실 같기도 하여 갈곤태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가만, 그런 고수가 있었나?’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원개가 말한 고수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 았다. 속았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싸늘한 음성을 토해냈다. "급장수답지 않군. 생로를 찾는 편이 쉬울걸?" 그는 탈명색혼대를 힐끗 바라보았다. 원개는 두 손을 다급히 내저었다. "호미취골, 이거 왜 이러나? 야혼승만 하더라도 검은 옷을 입고 다 니는 터에......." 갈곤태는 막연산에서 본 광경을 떠올리며 목에 힘을 주었다. "노방? 그 새까만 놈은 절대 혼자 다니지 않아. 계속 거짓말만 늘 어 놓을......." 일순 그의 말을 끊는 괴소가 숲 속에서 튀어나왔다. "키익! 여우같은 갈곤태! 저승이 그리우냐?" 휘리리릭! 파공성과 함께 시커먼 두 갈래 검은 밧줄이 죽 뻗어왔다. 동시에 다섯 명의 탈명색혼대가 허공으로 붕 떠오르며 처절한 비명을 발했다 . "크아아악!" 그들은 한 사람이 내지르는 듯한 단말마와 함께 허공에서 곤두박질 쳤다. 순간 갈곤태는 머리칼이 일제히 치솟는 것을 느꼈다. "헛, 너는 노방!" 노방은 두 가닥 밧줄을 휘두르며 다음 희생자를 물색했다. "이 야혼승을 욕하고 살아 갈 생각 마라. 키익!" 음산한 여운이 소름끼칠 정도로 오랫동안 울려 퍼졌다. 갈곤태는 주위 인물들을 의식하여 전의를 불태웠다. "함부로 나서면 성하지 못할 걸?" 노방은 가소롭다는 듯 세모꼴 눈을 부릅떴다. "오, 그래서 자신 있게 내 구역을 침범했단 말이지?" 갈곤태는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숲 속 여기저기에 아름드리 목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것 은 노방이 야혼승이라는 괴이한 밧줄로 잘라 놓은 것들이었다. 갈곤태는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젖어 들었다. '제길, 여기가 저 놈의 산판(山坂)일 줄이야. 언제 비사금환이 나 타날지 모르겠구나.’ 산판은 재목용 나무를 잘라 임시로 야적(野積)하는 보관소였다. 문제는 비사금환 엄희채가 나타날 경우 갈곤태를 비롯하여 쌍곰보 형제 팽고와 팽소, 그리고 탈명색혼대는 고스란히 뼈를 묻어야할 판 국이었다. 갈곤태는 내심을 감추고 슬며시 와호장을 들먹거렸다. "본장을 우습게 여긴단 말이냐?" 노방의 세모꼴 눈에서 섬뜩한 살기가 뻗어 나왔다. "바보로군. 내가 와호장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모르다니? 키익..... .." 부슬비 내리는 어두운 밤, 시커먼 인간이 검은 밧줄을 휘두르며 살 기를 내뿜자 오싹한 전율이 주위를 맴돌았다. 갈곤태는 즉각 명을 내렸다. "쳐라!" 이미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십여 명의 탈명색혼대가 벼락같이 달 려들었다. 그러자 검광이 어둠 속에 무시무시하게 작렬했다. 쉬이이이익! 소름끼치는 파공성이 일었다. 흑명승이 무서운 소용돌이를 일으킨 것이다. 탈명색혼대의 장검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뒤이어 폐부를 쥐어뜯 는 듯한 비명이 터졌다. "......!" 갈곤태를 비롯하여 쌍곰보 형제는 모두 넋을 잃고 말았다. 더구나 그들은 원개를 견제하느라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 다. 원개도 무시할 수 없는 고수였기 때문이었다. 노방은 새하얀 이를 드러낸 채 귀신같이 성큼 다가섰다. "갈곤태, 이번엔 네놈을 상대해 주마." 그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번져 나왔다. 겁에 질린 갈곤태 는 부지불식간 뒤로 물러났다. '이크......!’ 쌍곰보 형제 팽고와 팽소도 덩달아 뒷걸음질을 쳤다. 이때였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교음이 밤 공기를 갈랐다. "너희가 여기 웬일이냐?" 음성과 함께 사뿐히 착지한 인영은 뜻밖에도 여인이었다. 차가운 미모로 음산한 밤공기를 갈라놓은 여인, 그녀는 바로 냉영괴화 고혜 원이었다. 그녀는 주위에 무참하게 흩어져 있는 시신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갈곤태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야혼승 노방은 잠시 침묵했다. 도대체 같은 와호장 인물들끼리 무 슨 수작을 꾸미려는지 두고 보자는 눈치인 것 같았다. 갈곤태와 쌍곰보 형제는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아... 아가씨께서 오셨군요." "이, 인사 올립니다. 아가씨!" 그들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큰일이다. 들켰으니.......’ '염병! 장주도 저 매서운 성질을 어쩌지 못하는데.......’ 그들 세 명은 고개를 숙인 채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한편 원개는 유청풍이 한때 고혜원의 요리사부였음을 상기하고 은 밀히 전음을 날렸다. "냉영괴화 아가씨, 호미취골이 청풍에게 해를 가한 모양입니다." 불현듯 고혜원은 갈곤태가 유청풍을 팔아 넘겼던 일을 되새겼다. 상황을 대략 눈치챈 그녀는 갈곤태를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았다. "너, 천락무예단에 갔다 왔지?" 갈곤태는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안절부절 못하며 떠듬거렸다. "예? 아, 아가씨 저, 실은......." 그 사항은 누설할 수 없는 비밀이라 그는 난감한 기색을 띄웠다. 화가 난 고혜원은 살기 등등한 눈빛을 발하며 쌍륜화극을 쳐들었다 . "어디서 머뭇거려! 네놈의 목을 파양호 고기밥으로 만들어 주마." 혼비백산한 갈곤태는 다급히 둘러댔다. "어이쿠, 아가씨. 제, 제가 알기로는... 청풍이 지서귀를 암살한다 기에... 혹시 죽은 게 아닌가 추정한 겁니다." 고혜원은 재빨리 감을 잡았다. '지서귀는 갈곤태의 배다른 형인데? 아마 아버지나 일두가 시켰을 테지.’ 그녀는 주위 사람들 앞에서 차마 집안 일을 거론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냉갈이 터져 나왔다. "썩 사라지지 못해?" 그녀의 부릅뜬 눈과 마주친 순간 갈곤태는 힘없이 대답했다. "예, 아가씨......." 세 사람은 꽁지 빠진 닭 마냥 후다닥 달아났다. 이들의 대화를 듣던 노방은 돌연 안색이 변하더니 지체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청풍이 지서귀를? 한데 사매가 오지 않는 것을 보면 문제가 생겼 군. 그걸 모르고 계속 기다렸으니.......’ 원개는 고혜원과 둘만 남자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도 청풍을 찾아가시는 길이었군요?" 고혜원은 그를 아예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상관 말아요." 그녀의 뇌리에는 그가 유청풍과 함께 귀답령을 넘던 광경이 떠올랐 다. 그렇지 않아도 유청풍과 소원해진 판국에 그녀가 좋게 대할 리 만무했다. 하지만 원개는 더욱 공손한 자세를 갖추었다. "아가씨, 현장으로 가시지요. 제가 춘추고서점을 잘 압니다." 고혜원은 상대할 의사가 없다는 듯 비웃는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흥, 뻔뻔스럽긴......." 원개는 두 손을 맞잡고 난처한 입장을 설명해 주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청풍과 저는 그때 일로 오히려 친해 졌습니다. 더구나 여자들이 죽어서 저도 엄단주에게 해명해야될 처지 입니다." 그는 국진과 매향의 시신을 가리키며 곤란한 사정을 알려 주었다. 이제 그는 고혜원과 동반함으로써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는 한편 모염 정에게 보고할 답변자료를 만들 심산이었다. '모염정 그 계집이 청풍에 관해서 물으면 조리 있게 대답해야..... ..’ 그가 한창 머리를 굴릴 때 돌연 고혜원이 매서운 안광을 쏘아 보냈 다. "엄단주가 누구죠?" 잡아먹을 듯한 직사광선은 여인만이 지닌 본능적인 감각의 반사였 다. 정신이 번쩍 든 원개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탁 때렸다. '어이쿠, 요즈음 무서운 계집들만 만나다보니.......’ 그는 엉겁결에 실수를 저지른 나머지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정해단은 거래하는 상대방 신분을 극비로 유지해왔으며 이러한 철 칙을 어길 시에는 가차없이 처단해왔다. 원개는 지난 수십여 년 동안 이를 잘 지켜 나름대로 이 바닥에서 신용을 쌓아 온 권위자였다. 그 런데 하필 귀신도 두려워한다는 음양야혼귀의 정체를 덜컥 누설했으 니 누구의 손에 죽든 필사(必死)의 등록증을 받아 놓은 셈이었다. 가급적 비중 있는 인물을 대야 고혜원이 동행할 것 같아서 말한 게 최대의 실수였다. 그가 이런 실수를 범하게 된 근본적인 동기는 모 염정이 가한 월백분침으로 말미암아 늘 고통 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 걸음을 멈춘 채 무섭게 흘기는 고혜원의 저 험악한 시선을 그로서 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무림에서 가장 꺼리는 여인들을 강적으로 만들 경우 그는 송장이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마냥 침묵만 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한 마디가 아쉬운 난감한 형편이었다. 원개는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한숨을 내 쉬었다. '휴우, 별 수 있나? 청풍이 살아 있기를 바래야지 .......’ 유청풍만 살아있다면 여인들을 설득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위로한 후 고혜원에게 다짐을 요구했다. "저... 이 비밀이 누설되는 순간 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습니다. 하니 제발 꼭......." "염려 말고 어서 말해봐요." 원개는 도리 없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말았다. "저 여인들을 팔러 가던 도중에 그만......." 그는 얘기를 끝낸 후 조심스럽게 고혜원의 눈치를 살폈다. 고혜원은 충격적인 사실을 접한 순간 숨이 콱 막혔다. '미인으로 소문난 여살수 엄희채가 그와 함께 있을 줄이야. 설마.. . 청풍의 연인이 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남녀가 함께 일하면서 매일 얼굴을 마주 대할 경우 어떻게 발전될 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녀는 전신을 파르르 떨며 차가운 음성을 토해냈다. "앞장서요." "예, 아가씨." 결과는 뜻대로 됐지만 원개는 매우 불안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