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마취제 발견의 영예를 둘러싼 투쟁
프리스트리가 산소를 발견(제7장)하기 2년 전인 1772년, 그가 자신의 '공기연구장치'로 발 견하여 조사한 기체 중 하나가 이산화 질소(N2O)이다. 이 기체는 무독성이지만 기묘한 효 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흡입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거나 싸움을 하거나 웃거 나하는 등 광태를 보이는 것이었다. 이 웃는다는 데서 아산화 질소를 속칭 '웃음가스'라고 도 한다. 1798년 20세인 험프리 데이비스 토마스 베도우즈에 의해 영국의 브리스톨에 설립된 기체 연구소에서 여러 가지 기체의 의학적 응용에 관한 연구를 담당하고 있었다. 다음 해 초에 데이비는 아산화질소를 좀더 오래 흡입하면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는다는 사실 을 발견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테스트를 해보고자 이 기체를 7분간 15리터를 흡입했더니 '완전히 취했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자기 자신의 경험을 꽤 화려하게 보고했기 때문에 그와 연구소는 대단히 주목을 받게 되었고, 데이비는 1801년 런던으로 초대되어 왕립연구소에 일 자리를 얻어 바로 그곳의 교수로 승격했다. 데이비가 유명해진 것은 주로 여러 가지 원소를 발견하여 그것들의 성질을 확인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는 전기학의 천재 미첼 파라데이를 자기의 조수로 맞이하였으며 파라데이는 그의 뒤를 이어 왕립연구소의 교수가 되었다. 데이 비는 34세로 나이트 작위를 받았다. 데이비는 아산화질소를 외과수술에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시사했으나 그의 제언은 그 이상 진척되지 않았고 19세기 초엽의 아산화질소의 유일한 용도는 오락을 위한 것이었 다. 1844년 코넥티카트 주 하트포드에서 오락용의 공개실험 장소에서 수술시 필요한 마취제 를 발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콜톤이라는 실험자가 이 가스의 흡입을 원하는 희망자를 모집한 결과 여러 명이 응모했는데 그 중에 치과의사 호레스 웰즈와 함께 왔던 사무엘 쿨리라 청년이 있었다. 가스를 흡입하 자 쿨리는 날뛰기 시작하여 아무나 붙들고 난동하다가 비실대면서 쓰러졌다. 이 소동이 있 은 후 그는 관객석으로 돌아가서 웰즈의 옆자리에 얌전하게 앉았다. 그런데 그의 주변 사람 들이 쿨리의 의자 밑에 피가 고여있는 것을 보고 그의 다리에 심한 상처가 나 있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쿨리 자신은 이런 상처가 났는데도 통증을 느끼지 않았으며 후에 가스의 기운이 다 빠지고 난 후에야 통증을 느꼈다. 웰즈는 치과의사였으므로 이 사건의 중요성을 인식하 였다. 그 당시 발치는 대단한 고통이었다. 만일 이 가스가 사람의 의식을 읽게 하고 쿨리의 경우처럼 심한 통증을 모르고 있을 수 있다면 무통 발치가 가능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웰즈는 바로 이 가능성을 시도해 보았다. 친구인 치과의사를 불러서 아산화질소를 흡입한 후 자신의 충치를 뽑도록 부탁했다. 이 실험적 발치는 몇 사람의 증인 앞에서 이루 어졌다. 후에 이들 증인들은 웰즈가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에 수술이 진행된 것을 보았다는 것과 웰즈가 의식을 회복했을 때 통증을 느끼지 않았다고 그가 언급한 것을 증언했다. 그 후에 웰즈는 보스톤에 있는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의 계단식 수술 견학용 교실에서 실연을 공개했다. 가스를 흡입하여 그것이 효력이 있는 동안에 발치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환자가 있었다. 그런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웰즈는 마취제의 약효가 돌기 전에 발치하도록 명령했 다. 그 때문에 환자는 극도의 통증으로 절규했다. 비난 당하며 계단교실을 쫓겨난 웰즈는 곧 치과를 페업하게 되었다. 웰즈가 실패를 한 2년 후, 1846년에 웰즈의 제자이자 후에 협력자이기도 한 윌리암 T.G. 모 톤은 자기의 환자에게 아산화질소를 사용할 것을 결심했다. 그는 웰즈가 불운한 실패를 한 후에도 환자에게 아산화질소를 사용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다. 모톤이 말 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당시 그의 협력자인 찰스 T. 잭슨에게 아산화질소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물어보았다. 잭슨은 아산화질소 대신에 에테르를 사용하도록 모톤에게 말했다. 잭슨에 의하면 그보다 이전에 마취제로 에테르를 사용한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1846년 9월 30일, 대성공적으로 모톤은 에테르 마취약을 사용해서 무통으로 환자의 치아를 뽑았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웰즈가 실패했던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다시 한번 실연을 공개할 허가를 얻었다. 이때 모톤은 에테르를 마취제로 사용하면서 환자 목에 나 있 는 종양을 제거했다. 많은 사람이 이 역사에 남을 실연을 목격했으며 그 덕분에 이번에는 웰즈와 모톤과 잭슨 사이에 대단한 분쟁이 시작되었다(모톤이 사용한 휘발성 액체의 정식 화학명은 디에틸에테르이다. 이는 분류상 에테르로 알려져 있는 일군의 동족 화합물 중에서 는 매우 흔한 것으로서 화학자가 아닌 사람이 '에테르'라고 말했을 때는 디에틸 에테르를 지칭하는 것이 보통이다). 잭슨은 아주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는 휠씬 이전에 에테르의 마취작용을 자기 자신 이 경험했기 때문에 모톤에게 에테르를 사용하도록 실제로 설득했다고 주장했다. 1841년에 서 1842년에 걸친 겨울에 그가 어떤 실험에서 염소를 사용하다가 그것을 넣어둔 용기가 깨 져서 그 유독한 냄새 때문에 무척 혼이 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에테르와 암모니아를 번갈아 흡입하면 무척 편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좀더 에테르를 흡입하자 목의 고통이 더욱 치유되어 거의 통증을 느끼지 않게 되면서 의식이 몽롱해졌다. 잭슨은 "나중에 이런 현상들을 곰곰히 생각해 보니 감각신경을 일시적으로 마비시켜 공통을 트끼지 않고 외과수술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 드디어 오랫동안 추구해 오던 발견을 했구나 하 는 생각이 내머리에서 번뜩였다"라고 말해다. 잭슨은 모톤뿐만 아니라 웰즈와 데이비도 비난했다. 그는 이것을 발견한 것은 자기라고 주 장했다. 잭슨, 웰즈, 모톤 간의 분쟁은 이어졌다. 논쟁의 해결을 위해 드디어 미국 연방의회 까지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때 마취제 발견의 명예를 다투는 또 한사람의 경쟁자 가 나타났다. 네 번째인 이 경쟁자는 조지아 주 제퍼슨에 사는 크로우퍼드 W.롱 박사였다. 1840년대 초 미국 남부에서는 웰즈가 코넥티카트 주 하이포드에서 목격된 실연과 비슷한 아산화질소를 흡입하여 '붕 뜬 기분'이 되는 파티가 유행했다. 롱의 친구 몇 사람이 그에게 아산화질소를 요구했다. 롱은 그것은 없지만 에테르는 가지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 자신의 경험에도 에테르는 '기분을 들뜨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이다. 친구들은 에테르를 가지고 자신들이 즐기고 나서 급사일을 하고 있는 노예에게 시험해 보 면 재미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을 싫어하는 노예와 실랑이를 하는 동안 실수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바람에 에테르를 대량으로 흡입한 노예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설쳐대던 무리는 그 노예가 죽은 줄 알고 당황하면서 급히 롱 박사를 불렀다. 조 사해보니 호흡도 맥박도 규칙적으로 정상이었으나 정신이 깨어나지 않았다. 몇 시간 후, 그 의 정신이 깨어 정상으로 되돌아왔으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웰즈와 마찬가지로 롱도 마취제(이 경우는 아산화질소가 아니고 에테르) 효력이 있는 동안 에 환자를 수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롱 박사가 이 아아디어를 시험하 는 기회는 1842년 3월 30일에 생겼는데 그는 에테르를 흡입시킨 환자의 목에서 두 개의 종 양을 무통으로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모톤이 보스턴에서 에테르 마취로 환자를 수술 하기 4년 전이었다. 그 후, 롱은 그의 환자를 마취시키는 데 언제나 에테르를 사용했으나 소 극적이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어서 그의 발견을 선전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잭슨, 모톤, 웰즈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자 롱의 친구들은 그의 선취권을 의회에 호 소했다. 그러나 의회는 공식적인 판정을 거절했다. 웰즈는 사후이가는 하지만 1864년에 미국 치과학회로부터, 또 1870년에는 미국 의학학회로부터 미국에서 마취제를 발견한 사람이라는 결의를 얻었다. 모톤과 롱은 자기들의 수술에 에테르를 계속 사용했다. 에테르 마취 중 사고 는 흔히 있었으므로 치과의사 의사들 중, 초 보수파들은 그 사용을 반대하여 실제로 모톤은 그 직을 그만둘 때까지 매우 성가신 괴로움을 받았다. 그는 1868년 뉴욕의 센트럴파크에서 의식불명인 채 발견되었으며, 누군가의 습격으로 여겨지는 부상으로 사망했다. 잭슨은 프로 시아 보라매훈장을 받은 것 외에 별로 인정받은 것 없이 1880년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크 로우퍼드 롱은 1878년 자연사했다. 조지아 주는 워싱톤 DC의 영예의 전당에 그의 조상을 세웠으며 그 비문에는 "1842년 3월 30일 미국 조지아주 잭슨카운티의 제퍼슨 시에서 수술용 마취제로 황산체테르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크로우포드 W. 롱에게 조지아 주에 서 바치다"라고 쓰여있다.(실은 이 황산에테르란 기술적으로 디에틸에테르였다.) 마취제로서 의 아산화질소나 에테르의 발견은 세렌디피티적이라고 할 수 있는 발견의 하나이며, 이것처 럼 인류에게 중요한 것도 흔치않다. 또한 명예나 공적의 판정이 어려운 것도 달리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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