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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극대도] 2권 제3장 만천검결(滿天劍訣)을 얻다 ① 이 비에… 이 꼭두새벽에……! 젠장! 돈이 뭔지? 쏴쏴아아! 폭우가 쏟아지는 이른 새벽. 아무도 나다니지 않은 질퍽한 길을 혼자서 흙탕물을 퉁기며 걸어 가는 섬서성(陝西省) 여래객점(如來客店)의 점소이인 황영(黃永) 은 쉬지 않고 쫑알거렸다. 그가 여래객점의 바로 코앞에 있는 의류점을 놔두고 성문(城門) 가까이에 있는 천하만물상(天下萬物商)으로 가는 이유는 하나뿐이 었다. 바로 귀신도 부린다는 돈이라는 놈 때문이다. 다른 상점과 달리 천하만물상의 주인인 호(豪)노인은 물건값 중 이 할을 소개비 명목으로 지불하였다. 모르긴 몰라도 눈치를 보니 섬서성의 모든 주루 및 객잔의 점소이들에게 손을 뻗친 것 같았 다. 그렇다고 물건의 질이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어느 상점보다 더 고급스런 물건들을 판매하였고, 점소이에게 돌 아가는 이문(利文)을 합하더라도 값이 쌌다. 이런 기상천외한 판매 방법으로 불과 십 년 만에 섬서성 상권(商 圈)의 절반이나 되는 판매망을 구축하였다. 한데, 더욱 신기한 일 은 상권을 빼앗긴 여타의 상점에서 별반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는 다는 데에 있었다. "병신 새끼들! 나 같으면, 벌써 칼부림을 했어도 골백번은 했겠 다. 어떻게 제 밥그릇을 빼앗기고도 가만있어? 안되면 살청막에 청부라도 하지." 우의(雨衣)를 뚫고 들어온 빗물 때문인지 황영은 평상시 보다 더 말이 많았다. 허나,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람. 제놈들이 논 팔아 똥을 사먹든 말든. 그래도 나보다야 훨씬 나은걸. 에이, 쓰팔! 나야, 굿이나 보고 떡 이나 먹는 게 장땡이지, 뭐." 그랬다. 어쨌거나 똥줄 빠지게 일해도 겨우 하루 세 끼 찾아 먹기도 힘든 자신에 비한다면 그들은 그래도 이곳에서 기침 깨나 하며 사는 사 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걱정한다는 것은 주제 넘는 짓이었다. 그러는 동안 문제의 천하만물상이 있는 골목길에 접어든 그는 우 뚝 발을 멈추어야만 했다. 역시 예상대로 조용했다. 하긴, 어느 미친놈이 삼경(三更)까지 장사를 한 것도 모자란 두어 시간 자고 문을 열겠는가. 황영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어떻게 하지? 그냥 돌아가?" 그러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비를 맞고 여기까지 온 것도 억울한 노릇이지만, 그보다 이 새벽 에 여래객점을 찾아온 두 손님이 옷과 우장(雨裝)을 사달라며 준 은자 열 냥이 던지는 유혹이 더 컸다. 그의 고심은 금방 끝이 났다. "에라…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황영은 천하만물상 문도 두드려 보지 못하고 쫓겨날까 봐 뒤꿈치를 들고 도둑고양이 걸음으로 걸어갔다. 사실 천하만물상이 있는 이 골목길은 섬서성에서 가장 많은 상점 들이 집결된 상가 밀집지대이다. 하루 이십사 시간 중 열아홉 시간 이상 장사를 하다 이제야 문을 닫고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 사람들을 깨운다는 것은 바로 염라대 왕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럴 때 천둥번개라도 쳐주면 좀 나으련만 빌어먹을 비만 쏟아졌 다. 기어코 천하만물상에 간 황영은 주위를 잠시 살핀 후, 두 눈을 질 끈 감고 문을 두드렸다. 꽝! 빗소리에 섞여 그리 큰소리도 아니건만 황영의 귀에는 천둥소리보 다 더 크게 들려 두 번째로 두드리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제풀에 놀란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못 들었는 지 조용하였다. "휴!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 내린 그는 잠시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자신에게 천둥 보다 크게 들렸으니 능히 호노인이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한데 충분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깜깜 무소식이 아닌가. 은근히 성질이 났지만, 그래도 좀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속으로 숫자 백을 헤아리기 전에 나오리라. 하나, 둘, 셋… 아홉, 열. 숫자 열을 센 후였다. 울컥! 오기가 솟구쳤다. '빌어먹을! 장사 못하면 제 손해지, 내 손핸감?' 기세 좋게 침을 뱉고 돌아서던 그의 몸이 멈추었다. 뇌리 한가운데에서 꼬물꼬물한 자식새끼 다섯이 밥 달라고 아우성 이다. '내가 더 손해군.'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벼락같이 다시 돌아선 그는 사정없이 문을 두드렸다. 꽝꽝꽝! 천둥이 아니라, 지구 전체가 들썩거렸다. 하긴 문짝이 부서져라고 발로 걷어찼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이 굉음은 시체가 아니 다음에 야 모두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순간, "어떤 시러베 잡놈이!" "오냐! 요놈의 새끼 잘 걸렸다. 그렇잖아도 장사가 안돼서 죽을 판인데. 야, 이 새끼야! 도망가지 말고 그 자리에 가만있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주위 일대가 온갖 욕설로 가득했다. 살아야 자식새끼고, 마누라고 있는 법이다. 뜨악한 황영이 줄행랑을 놓기 위해 번개처럼 몸을 돌리려 할 때였 다. "거… 뉘시오?" ② 욕설과 함께 분주하게 움직이던 발소리가 사라지자, 문에 기대고 있던 황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이 빗속에 먼지가 안 나도록 두드려 맞아 죽을 뻔했네." 두루뭉실한 얼굴에, 항상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잃지 않은 호 노인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잠귀가 어두워서. 허허허, 미안하네." "미안하면 다요? 사람이 죽을 뻔했는데." 호노인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서로가 좋은 일에, 싫으면 안해도 되는 일에 이렇게 쌍심지를 켜 는 이유는 뭐겠는가. "허허허, 자네의 성의를 봐서 이번에는 특별히 들어오는 원가(原 價)로 주겠네." 황영의 눈빛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원가라면, 소인에게 얼마나……?" "물건값에 따라 다르지만. 아마 못돼도 삼 할 가까이는 될 걸세." '에게… 겨우!' 기대에 차 있던 황영은 적이 실망했다. 이렇게 하지 않고도 이 할인데, 원가로 준다는 것이 삼 할이라 하 니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이 순간, 그가 미처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무릇 장사치들이란 반타작이 아니면 밑지는 장사라고들 한다는 점 이다. 또 그게 사실이고 보면, 호노인이 원가랍시고 거짓말을 하 지 않은 이상, 호노인에게는 장사가 목적이 아닌 그 무엇이 있다 는 말일 것이다. "좋습니다. 오늘 새벽에 온 사람들은……." 일 할이라도 하늘에서 그저 떨어지지 않는다. 아쉽지만 크게 고개 를 끄덕여 승낙한 황영은 이어 손짓, 발짓을 동원해 손님들의 인 상착의를 설명했다. 하나는 남자같이 생긴 사람으로 이따만 하고, 하나는 미인보다 어 여쁜 사내로 요따만 하니 그들이 입을 옷과 우장을 달라고. 쏴아아! 황영이 돌아가면서 열어 놓은 문으로 굵은 비가 사정없이 들이친 다. 그 비를 바라보던 호노인의 눈이 돌연 날카롭게 빛났다. 이어 무 심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환사(幻死), 확인토록." 대답도 없다. 허나, 공기의 흐름은 느껴졌다. 이는 대들보 위에 몸을 숨기고 있 던 환사가 이미 사라졌다는 뜻이다. 삐이익! 습기가 찼는지 요란한 소리를 내는 문을 닫던 호노인은 혼자말처 럼 중얼거렸다. "의외로 빨리 걸려들었다." 아무리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객점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잠을 자지 않을 수는 없다. 모두가 자는 꼭두새벽에 객점을 찾아 왔건만 구운 오리 한 마리와 속을 데울 수 있는 백건아(白乾兒) 한 병이 어디인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단호삼은 피식 웃었다. "훗! 정말 전설 따라 십팔만리군그래." 황보영우의 수려한 미간이 찡그려졌다. "꼭 그렇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오." "그럼, 그 말을 믿으란 말이오?" "믿지 않을 수 없지 않소. 직접 목격했으니." 단호삼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도저히 신빙성이 없소. ……그렇다면 하나 물어봅시다. 삼천갑자 를 살았다는 동방석(東方錫)은 실존 인물이오? 또 동방석의 수염 이 삼천 자라는 것도 사실이오?" 과장법이 심한 중화인(中華人)의 속성을 꼬집는 말이다. '고집도…….' 내심 한숨을 쉰 황보영우는 그것과는 경우가 다르다고. 직접 보 고, 듣지 않았느냐고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왜냐 하면, 단호삼과 더 이상 무의미한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 문이다. 해서 그는 쐐기를 박듯 물었다. "소생도 하나 묻겠소. 그럼, 무정신니께서 거짓말을 했다는 겁니 까?" "!" 순간 단호삼의 손안에서 빙빙 돌려지던 술잔이 멈추어졌다. 일시 간 대꾸할 말을 잃은 그는 천천히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황보영 우가 들려준 사령마황에 대해 생각했다. ③ 대충 팔백 년 전. 칠 일 밤낮 동안 어둠이 계속되던 때가 있었다. 전대미문(前代未 聞)의 기상 이변에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공포에 떨었 고, 그러다 마침내 칠 일이 되던 날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어둠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그 아이는 살 무사가 그렇듯이 제 부모를 죽였다 한다. 그 후, 십팔 년이 흘러 청년이 된 아이는 돌연 사악한 악마의 화 신(化神)으로 변해 천하를 죽음과 공포로 물들였다. 눈으로 혼을 빼앗고, 산 자의 생혈(生血)을 마시는……. '그러다 홀연히 사라졌단 말이지.' 꿀꺽! 단호삼의 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제자리를 찾았다. 과연 백건아는 천하에 악명 높은 독주라 목구멍이 타는 듯 화끈했다. 그러나 지 금 단호삼은 이를 느낄 기분이 아니었다. '그게 사실이라 치자. 하면, 수련암에 나타난 놈은 왜 여인의 음 기를 흡수하고… 심장을 먹었을까? 방법이 달라. 방법이…….' 마음이 납덩이를 단 것처럼 무거워졌다. 믿자니 자신이 우습고, 안 믿자니 무정신니의 말이 목구멍에 생선 가시 걸린 듯하다. 그러나 자신의 꼴이야 어떻든 미리 알고 대처 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순간, "좋아!" 술잔을 소리나게 탁자에 내린 단호삼은 황보영우의 아름다운 눈을 똑바로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사령마황에 대한 전설이 사실이든, 아니든지 간에 무정신니 의 말씀대로 그 녹색 괴인이 사혈경을 익혔다고 합시다! 하면, 이 사실을 무림공적으로 쫓기는 내가 무림맹에 알린다면 그들이 믿어 주겠소? 황보형 말마따나 오히려 덤태기를 쓰기 십상이지." 문득 황보영우는 빙그레 웃었다. "소문이라는 좋은 매개체가 있지요." 단호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아! 내가 왜 그 좋은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지!" 그때다. 돌연 단호삼의 미간이 찌푸려지나 싶더니 그의 손이 탁자 위를 스 치듯 지나갔다. 피융! 무언가 알 수 없는 물체가 그의 손을 떠나 창을 뚫었다. 그 순간, "누구냐?" 침착한 음성과 함께 단호삼은 이미 창문을 열어 젖히고 있었다. 쏴아아……. 굵은 빗방울이 얼굴을 때릴 뿐, 주위에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단호삼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 '분명 숨소리를 들었는데… 이상하군.' 단호삼이 허공섭물로 탁자 위의 오리 뼈를 끌어당긴 순간에 뼈다 귀는 허공을 갈랐고, 또 거의 동시에 창문을 열어 젖혔다. 이 일 련의 일은 숨 한번 들이키기도 전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누가 있습니까, 단형?" 그제야 사태를 깨달은 황보영우는 긴장된 눈빛으로 다가오며 물었 다. 사방을 다시 유심히 살핀 단호삼은 창문을 닫으면서 대답했다. "아무도 없소." 이어 그는 황보영우의 눈에 떠오르는 의아함을 읽고 쓸쓸하게 웃 으며 다시 말했다. "아마… 정신없이 쫓기다 보니 너무 신경이 예민해져서 착각을 한 듯하오." "!" 순간 황보영우의 몸이 움찔했다. 정신없이 쫓긴다? 저렇게 선량한 눈빛에, 우직하나 성실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 '왕도연, 대체 속셈이 뭐요? 별다른 말썽도 없는 천하에 무림맹을 만든 것도 모자라 저런 분을 무림공적으로 몰아붙이는 속셈이… …?'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울컥하니 울분이 치솟는 것을 느낀 황보영우 는 고개를 돌리며 짐짓 명랑한 음성으로 주절거렸다. "이거, 옷 사러 보낸 사람이 왜 이렇게 오지 않는 거야? 혹시 가 다 물귀신을… 엉?" 농스런 말을 하던 황보영우는 하던 말을 멈추고 단호삼을 돌아보 며 어깨를 으쓱 치켜올렸다. "단형, 점소이가 양반은 아닌 게 확실한 모양이오?" 점소이라고 다 상놈이라는 법도 없다. 괜히 웃자고 하는 소리일 것이다. 허나 단호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빙그레 웃음을 던진 뒤, 방 문으로 다가갔다. 허나 좀 전에 단호삼이 미처 발견 못하고 지나친 것이 있었다. 창문 바로 밑. 채 한 자도 안되게 튀어나와 있는 작은 공간에서부터 일층 벽면을 타고 떨어지는 빗물의 색깔이 그리 투명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다. 자세히 보면 피가 섞인 듯 약간은 붉은빛이 감돌았다. 어쩌면 그가 조금만 더 강호 경험이 풍부했더라면, 아니 황보영우 가 조금만 더 늦게 다가왔더라도……. ④ '나 왔소.' 하고 광고라도 하듯 힘찬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문을 두드리려 던 황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방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어, 어떻게 아시고……."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황영이 두 손으로 안고 있는 물건을 보는 순간 한마디 안 할 수 없었다. 그는 벙긋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못 구할 줄 알았는데… 용케 구했소." 기회다. 묻지 않아도 자신의 고생담을, 아무도 하지 않을 이 엄청난 일에 대해 말할 참이었지 않은가. 그런데 저렇게 다정하게 대해 주니. 황영은 사가져 온 의복이랑, 비올 때 입는 우장을 건네는 대신 입 술을 빠르게 놀렸다. 침이 튀는 것도 모르고. "아… 글쎄, 말씀도 마십시오. 까딱했으면 이 불쌍한 목숨이 저승 으로 갈 뻔……." 열변을 토하던 황영의 혓바닥이 굳어졌다. 대신 뱁새처럼 작은 눈 이 커졌다. 족히 다섯 냥은 나갈 은덩이가 올려져 있는 손바닥은 무슨 날이면 연등제(練燈祭)니, 뭐니 하면서 불쌍한 중생들의 호주머니를 우려 내는 불타(佛陀)의 손보다 더욱 자비롭게 보였다. "수고 많았소. 이것은 작은 성의이니… 가져가시오." 작다니? 이 큰돈이. 별로 부유한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알부자인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황영의 허리뼈가 죽은 새우 마냥 구부러졌다. 의복과 은자 닷 냥이 바꿔졌다. 희희낙락하며 사라지는 황영의 등 을 곱지 않은 눈으로 노려보던 황보영우는 기어코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은자 열 냥이면, 제일 좋은 우피(牛皮)를 사고도 남을 텐데, 겨 우 사리나무로 만든 우의를 사 가지고 오고서도 뻔뻔하게 돈을 요 구하다니." 단호삼은 등으로 문을 닫으며 빙긋 웃었다. "그만두시오. 얼마나 살기 고달프면 저러겠소." 황보영우의 눈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찢어졌다. "흥! 그 말씀을 듣고 보니, 소생은 인정도 없는 냉심한(冷心漢)이 고, 단형은 자비로운 불존 같구려. 그렇게 돈이 많으면 내게도 좀 주시오." 거세게 쏘아붙인 그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보는 단호삼은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실언을 했다면 용서하시오. 그리고 가진 것이 있으면 다 드 리고 싶지만, 불행히도 좀 전의 은자가 모두 다외다." 어떻게 나오나 싶어 짐짓 화를 냈던 황보영우는 일순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돈도 없이 앞으로 어떻게 중경(中京)까지 가려 하오?" 중경은 바로 강남의 건업(建業), 즉 현 남경(南京)과 후일 북경 (北京)이라 불릴 강북의 연경(蓮京)을 잇는 고도(古都)로, 바로 그곳에서 녹산영웅문도들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매사에 의심보다는 믿는 성격을 가진 단호삼은 황보영우의 표정에 적이 안심하며 능청스럽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황보형이 있잖소." "뭐요?"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한 황보영우는 코방귀를 날렸다. "흥! 혼자서 있는 선심 다 써놓고, 이제 와서 소생보고 여비를 대 라고요?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못하겠소이다." 연신 쫑알거리는 황보영우를 보던 단호삼은 무슨 사내가 저리 말 이 많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허나, 또 거시기를 보이겠 다고 할까 봐 그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알았소. 알았으니까 그만하시고, 어서 옷이나 갈아입고 떠납시 다. 은검보에서 곧 이곳을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말이오." 이어 그는 얼마나 우리가 급한 몸인가를 보여주듯 웃옷을 훌러덩 벗었다. 아니, 비에 젖어 몸에 착 들러붙어 있는 관계로 찢듯이 하였다. '윽!' 내심 비명을 지르는 황보영우의 볼이 잘 익은 능금처럼 붉어졌다. 사내의 벌거벗은 몸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다. 연무장에서 무술 수련을 한 뒤에 사내들은 윗통을 벗어 던지고 찬 물을 끼얹었다. 그리고 가끔 별난 사람들은 바지를 벗어 속옷만 입은 채로 하기도 했다. 허나, 그때 몰래 숨어서 본 것과 지금 단호삼의 몸은 엄청 차이가 있었다. 우선 우람했다. 군더더기 하나 붙어 있지 않은 상체는 부드러운 털로 감싸 있었지 만, 마치 이름난 명공이 온갖 정성을 들여 다듬은 듯 적당한 근육 으로 꿈틀거렸다. 허나 다음 순간, "흉, 흉측하오!" 별안간 고함을 치며 몸을 돌리는 황보영우 때문에 바지를 끌어내 리던 단호삼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멈추었다. 흉측하다니, 이 멋진 몸매가? 녹산영웅문도의 사내들이 침을 아끼 지 않고 칭찬하던, 유부녀조차 몰래 숨어 보던 이 몸이……. ⑤ 황당한 표정을 짓은 단호삼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훑어보았 다. 그 말을 들어서인지 아닌게 아니라, 시커먼 털로 덮여 있어 좀 흉 해 보이기도 했다. 마치 진화(進化)가 덜된 원시인처럼. '아무리 그렇다고 몸을 돌릴 것까지야.' 이럴 때는 그저 녹산영웅문의 사내들처럼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이 최고다. "그렇게 말하는 황보형의 몸은 얼마나 멋진지 구경 좀 합시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으라는 말이다. 놀란 심장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것을 간신히 제자리로 돌려 보낸 황보영우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나, 나중에… 혼, 혼자서……." 단호삼은 황영이 사온 새옷으로 갈아입으며 말했다. "무슨 사내가… 쫀쫀하게. 알았소. 내 등을 돌리고 보지 않을 테 니 어서 갈아입으시오." 이어 그가 진짜로 몸을 빙글 돌리는 소리가 들리자, 조심스레 고 개를 돌려 확인을 하던 황보영우의 눈이 돌연 흠칫 놀란 빛을 띠 었다. 단호삼이 찢다시피 벗어 던진 상의 사이로 삐쭉이 나와 있는 빛바 랜 누런 양피지 하나. 올챙이 같은 글씨가 바로 오래 전에 실전된 과두문자( 紗文字)임 을 알아본 그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만천검결… 저것이 어떻게……?" 오래 전 이야기였다. 시기를 언급하자면, 대략 오백 하고도 칠팔 십 년 전에 황건적의 힘을 이어받은 마교가 대당군(大唐軍)에 의해 멸망될 당시에 가장 용맹을 떨친 장수 하나가 있었다. 후일, 팔십만 대군을 거느린 천룡대장군인 된 그는 춘추시대의 조 운(趙雲), 즉 조자룡(趙紫龍)의 후예인 조익룡(趙翊龍)으로, 그가 마교주와 대결 시에 사용했던 무공이 바로 만천검결이었다. 단호삼은 실소를 머금었다. "또 전설 따라요?" 황보영우는 그같이 충실한 사람이 왜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지 모 르겠다고 내심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이것은 실화외다." 좋은 것만 보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을 어렵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약간은 비틀어진 성격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중후한 성 품 뒤에 사물을 보는 시각이 좁아져 있던 단호삼은 이런 나쁜 성 격을 고쳐야겠다고 작심(作心)하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오. 그럼, 황보형은 당연히 만천검결을 해석할 수가 있 겠구려. 난, 당최 꼭 지렁이가 기어가다 쓴 글처럼 보이니, 원… …." 자신의 실수든, 잘못이든 곧바로 인정하는 사람은 드물다. 게다가 지금 단호삼처럼 솔직하게 모른다고 표현하기는 더더욱 힘든 법이 다. '역시 마음이 큰 분이야!' 적이 감탄한 황보영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물론, 시간은 걸리겠지만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 도 이것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외다." 뜻밖의 말에 단호삼은 재빨리 물었다. "왜 그렇소?" "잘 아시다시피, 모든 무공에는 형(形)이 있지요. 형은 곧, 식 (式)이며, 기(技)외다. 그것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호흡법 및 운공법이 필요한 법이외다. 그렇지 않은 무공이 란 바로 흉내내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 만 천검결에는 그 운공법이 빠졌으니. 쯔쯧! 안타까운 일이오. 이런 절세검예가 아무 짝에도 쓸모 없이 되어버렸으니……." 자상도 했다. 거듭되는 질의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싫은 기색 없이 상세하게 일 러주는 황보영우를 보는 단호삼은 왠지 가슴이 푸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이었다. 물론 팽후를 비롯한 녹산영웅문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모두 잘 대해 주지만, 그들에게는 사람을 이렇게 따뜻하게 만드는 재주가 없었다. 무지(無智)하니까. 허나, 그들에게도 좋은 점은 있었다. 투박한 말씨와 대책 없는 행동 속에는 거친 사내들의 열정이 숨쉬 고 있었다. 이때 문득 단호삼의 뇌리로 하나의 의혹이 스쳤다. 그 자신은 어떤 무공이라도 형(形)을 익히면 시전할 수 있는 데에 반해, 녹산영웅문도들은 형을 가르쳐 주어도 제대로 된 위력을 발 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제야 그 의혹을 풀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이 그를 가만히 있게 만들지 못했다. "황보형, 좋은 말씀 잘 들었소. 한데 말이오, 나는 왜 어떤 무공 초식이라도 다 소화해 낼 수가 있지요?" 대답 대신 황보영우는 되물었다. "단형의 사부가 누군지 알려주실 수 있소?" "그건……." 곤란한 일이었다. 단호삼, 자신도 근자에 들어서야 겨우 사 아저씨가 천하제일검이 라는 무면탈혼검 사하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다. 허나, 그 것은 어디까지나 확인되지 않은 추측일 뿐이다. ⑥ 단호삼이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못하자, 황보영우는 환하 게 웃었다. "무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시오. 하하,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고 충이 있는 법이니, 없던 말로 해주시오. 기실 소생은 이미 짐작 가는 바가 있소이다." "……?" "아마 단형이 익힌 내공심법이 조화선공이 아닌가 하고 말이오." 단호삼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쩌면 사 아저씨가 과연 사하립인지 확인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급히 물었다. "조화선공! 확실하오? 그럼, 조화선공은 누가 익히고 있소?" 하지만 이내 그는 실망하고 말았다. 황보영우가 고개를 저으며 하는 말 때문이었다. 자신도 우연히 천하에서 가장 기이한 무공에 대해 설명한 기무서 (奇武書)라는 고서(古書)에서 읽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 무서의 첫 장에 기록된 조화선공을 단호삼에게 전수해 준 사람이 누군가 싶어 사부에 대해 물었다는 것이다. 사 아저씨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해 아쉽지만, 천고의 무공이라 는 조화선공을 자신이 익히고 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내심 크게 실망했지만 단호삼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하게 어 조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럼 황보형은 이 만천검결을 익힐 수가 없겠구려." "당연하지요. 아시면서 왜……?" 황보영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자, 단호삼은 입맛을 다시며 아 쉬운 듯 대답했다. "사실 본문의 문규 중 으뜸은 좋은 것은 서로 나눠 가지자 입니 다. 그래서……." 순간 황보영우의 입이 딱 벌어졌다. 세상에 그런 문규를 가진 방파가 있다는 것은 머리털 나고 처음이 었다. 이는 독문무공(獨門武功)이란 말에 정식으로 도전하는 말이 아닌 가. 어느 방파든지간에 자파(自派)의 무공이 외부로 새나가는 것 을 제일 두려워한다. 왜냐면, 익힐 수는 없을지라도 장단점을 파 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독문무공이 적대 관계에 있는 개인이나 단체의 손에 들어간 다면 그 결과는 명약관화(明若觀火)! 사람이 너무 황당한 일을 당하면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나지 않 는 법이다. 지금 황보영우가 그런 상태인데, 돌연 단호삼의 눈이 반짝 빛났다 싶은 느낌이 든 순간, "이러면 어떻소. 내가 조화선공을 가르쳐 주면… 아차차! 그것도 안되겠네. 지금까지 연마했던 내공을 모두 버려야 하니까……." 충격에 충격이 더해지자 황보영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억상 실증에 걸린 사람이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고 제정신을 차린 경우 처럼.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호… 혹시… 녹산영웅문에서는 부인도 바꿔가며 잠자리를 합니 까?" 단호삼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본문에 미녀가 없어 아직 그런 경우는 못 봤는데……." 어떠한 일에도 웃음을 잃지 않던 호노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 졌다. 환사. 천하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자부해도 좋을 추종술(追 術)과 움직이 지 않으면 누구도 존재를 알 수 없는 은신술(隱身術)을 지닌 환사 가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 지혈은 시켰지만 구멍이 뚫린 환사의 왼쪽 어깨를 보던 호노인은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진정 우연이 아니라, 네 존재를 놈이 눈치를 챘더냐?" 묻고 보니 자신이 생각해도 어리석었다. 눈치를 채지 않았다면 어 떤 미친놈이 내공이 실린 뼈다귀를 던지겠는가. 부복을 한 환사의 고개가 더욱 숙여졌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속하는 벌써 왔을 겁니다, 막주." 단호삼과 황보영우가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이제야 겨우 도착한 것 을 말함이다. 순간 호노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떨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환사의 음성이 심하게 갈라져 흘 러 나오고 있었다. 오늘, 한꺼번에 눈과 귀를 의심하게 된 호노인의 얼굴이 납덩이처 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잠시 깊은 생각을 하던 그의 입에서 무심한, 인간의 온기라고는 전혀 엿볼 수 없는 음성이 흘러 나왔다. "놈이 그렇게 강하다면 계획을 변경해야 한다. 담사(曇死)! 흑매 (黑魅)! 혈우(血雨)!" "예." 동시다발적으로 들린 음성처럼 어느덧 환사 옆에 세 사람이 부복 하고 있었다. 한결같이 어둠 같은 색깔을 지닌 옷을 입고 있었다. "담사, 환사, 흑매는 초계(超計)를 시행하라." 일순간 고개 숙인 세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초계라니, 실패 시에는 기반이 흔들릴 그것을……. 그러나 막주의 말에 토를 달 수는 없다. 그들은 그렇게 길들여져 온 것이다. "봉행!" 소리 없이 세 사람이 실내를 빠져 나간 후, 호노인의 무심한 눈은 혈우의 뒷덜미에 박혔다. "놈과 동향(同鄕)이라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친구 사이가 아니라, 원수지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지?" 혈우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놈의 형이 속하의 손에 크게 다쳤습니다. 아마도 죽지 않았으면 병신이 되었을 겁니다." 잠시 물끄러미 혈우를 보던 호노인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떠올랐 다. "좋아! 혈우는 본좌와 함께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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