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실록 1권, 숙종 24년 대왕의 시호를 순정 안장 경순 돈효로 추상하다
숙종 24년 대왕의 시호를 순정 안장 경순 돈효로 추상하다
무인년033) 에 신규(申奎)가 상소하여 청하였으므로 추복(追復)이 있었는데, 임금이 이미 대신(大臣)과 유신(儒臣)들에게 묻고, 또 종친(宗親)과 문무(文武)의 대소 관리 4백 90여 인을 소집하여 정의(庭議)하게 하였더니, 그 의논에 이동(異同)이 없지도 않았지만, 성상이 그 구련(拘攣)034) 을 초월한 식견으로 단행하여 의심치 않으매, 여러 신하들이 공경함을 명명(明命)같이 하여 감히 어기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대왕의 시호를 추상(追上)하여 ‘순정 안장 경순 돈효(純定安莊景順敦孝)’라 하고,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이라 하며,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왕후의 시호는 ‘정순(定順)’이라하고 휘호(徽號)를 단량 제경(端良齊敬)이라 하며,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하였다. 대체로 청시(請諡)와 상시(上諡)하는 예절은 한결같이 이장(彝章)을 따랐으며, 12월 25일에 임금이 친림한 가운데 신주를 쓰고, 이튿날 새 신주를 명정전(明政殿)에서부터 노부(鹵簿)035) 와 의위(儀衛)를 갖추어 가 종묘로 나아가 뵈임을 예법과 같이 하였다. 이어서 신주를 받들고 영녕전(永寧殿)의 악차(幄次)로 나아갔다가 27일에 이르러 서익(西翼)의 제 3실(第三室)에다 제부(躋祔)하니 위차는 문종 대왕의 아래이었다.
임금이 친히 향사를 행하였다. 처음에 대왕은 영월(寧越)에 장사지내었고, 왕후는 양주(楊州)에 장사지냈더니, 이때에 이르러 모조리 그전대로 증수(增修)하고, 모조리 인산(因山)의 제도에 따랐다. 이듬해 3월 초1일에 대왕의 능을 봉(封)하고, 2월 20일에 왕후의 능을 봉하였다. 그전의 신주(神主)는 일찍이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의 후손 집 사묘(私廟)에다 모셨었으나, 대례(大禮)가 이미 정해짐에 따라, 명하여 방제(旁題)를 쓰게 한 다음 권도로 시민당(時敏堂)에 옮겼더니, 부묘(祔廟)의 예가 끝나자 사릉(思陵)에 매안하였고, 그리고 장릉(莊陵)의 옛 사당에도 또한 두 개의 위판(位版)이 있었던 것을 본릉에 매안하게 하고, 아울러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일에 임하게 하니, 대체로 수백 년의 광전(曠典)이 일조에 처음으로 거행되었다. 정성과 문채를 둘 다 극진하게 하니, 유울(幽鬱)함을 잘 씻어 참으로 종묘에 빛이 더하여지고, 그리고 백세에 할 말이 있을 만하게 되었다.
그 뒤 6년 만인 갑신년036) 에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그전의 사기인 《단종 기서(端宗紀書)》에 있어서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라 하였습니다. 당시에 사실에 의거하여 쓴 글을 비록 감히 의논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책면(冊面)의 표제(標題)만은 이제 그대로 함이 옳지 못하오니, 청하건대 《단종대왕실록(端宗大王實錄)》이라 고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추복(追復)한 사실을 모아 따로 한 기록을 만들어 열성 실록(列聖實錄) 부록(附錄)의 예를 본받으소서."
하니, 임금이 또한 옳게 여기어 바로 청(廳)을 설치하고 편찬하기를 명하였다. 대신으로 그 일을 영솔하게 하니, 이렇게 되어 삼가 중종조[中廟朝] 이후로 모든 숭식(崇飾)한 것은 먼저 위에다 실어서 임금이 오늘의 거사가 실로 계술(繼述)의 뜻에서 나왔고, 전적으로 일개 소신(小臣)의 말에 말미암지 아니하였음을 나타내었다. 또 복위(復位) 때의 상소와 의논과 시책(諡冊)·축(祝)·고유(告由)·반교(頒敎) 등의 글을 유별(類別)로 차례로 편입하여 그 시종을 나타내고, 합쳐서 이름하기를, 《단종대왕실록부록(端宗大王實錄附錄)》이라 하였다. 실록이 이미 이루어지니, 명하여 여러 사각(史閣)에 나누어 간직하게 하니, 임금께서 융숭을 부르고 공렬을 표양한 뜻이 여기에 이르러 더 남은 유감이 없다 하겠다. 신이 마침 외람하게도 태사(太史)에 있었으므로 그 일을 뒤에다 기록하게 하므로, 신이 명을 받고 조심조심 그 대강을 모아 삼가 위와 같이 썼고, 그리고 녹중(錄中)의 서차(序次)와 범례(凡例)는 모두 품의하여 재가를 받고 취지(取旨)를 거친 것이므로 한 마디도 그 사이에 덧붙임이 감히 없다고 하겠다.
【갑신년 11월 계묘(癸卯)에 대제학(大提學) 신(臣) 송상기(宋相琦)가 삼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