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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형집행인의 탄생
악인왕국 천금제황축 안에는 천년흑강석(千年黑剛石)으로 축조된
거대한 흑궁(黑宮)이 버티고 서 있었다.
제왕석국(帝王石宮)!
바로 악인왕국의 대마왕 천금삼황을 위시한 그 수하들.
이름하여 삼천의 악마군단이 거처하는 곳이다.
일명 악마의 검은 성전(聖殿)!
흑사대전(黑蛇大殿).
제왕석궁 내에서도 가장 깊숙이 위치한 절대금역.
주위는 울창한 침엽수로 빽빽이 뒤덮여 있고 대전 자체는 전체가
흑금(黑金=검은 금)으로 지어져 있다.
그야말로 철의 장막, 악마의 검은 성전다운 음악사이(陰惡邪異)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이곳은 바로 천금삼황(天禁三皇) 중의 우두머리 격인 십광마성(十
狂魔聖) 초류백(楚流栢)의 집무실이다.
띵―! 띠이잉―!
때아닌 조잡한 금음(琴音) 소리가 철의 장막, 흑사대전에 가득 울
려 퍼지고 있었다.
흑사대전은 화려하고 눈부셨다.
그야말로 황금대전(黃金大殿)!
벽과 천장은 물론 바닥까지도 온통 황금으로 뒤덮인 황금대전이
다.
설사 칸의 침전이라 한들 이보다 화려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흡사
천하제일 거부가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이 대전 하나에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놓은 것 같은 대전이었다.
그 대전 정중앙에 한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세상에 이보다 화려한 의상이 있을 수 있을까?
황금용포(黃金龍袍).
수천 개의 진주와 황금 구슬로 꿰어 만든 눈부신 황금용포에, 머리
에는 칠채(七彩) 보석관(寶石冠), 자룡옥대(紫龍玉帶)…….
실로 어이가 없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의관이었다.
그런데 진실로 어이가 없는 것은 그 화려한 의관을 걸친 인물의
모습이다.
오척단구(五尺短軀)에 볼품없이 왜소한 체구.
그러나… 그러나 가장 결정적으로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것은 바
로 그의 얼굴이었다.
놀란 토끼같이 똥그란 눈, 염소 똥을 콕 찍어놓은 듯한 조그만 코,
거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당나귀 귀.
진정 제멋대로 생긴 얼굴의 표본을 보는 듯했다.
지금 이런 인물이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시
(詩)를 읊조리고 있으니……!
아아……!
태양의 햇살 아래 십만 대군(十萬大軍)이 움직이매, 질타하는 말발
굽 소리 천둥과 같고 번쩍이는 창칼의 눈부심에 천지가 눈이 멀도다.
그 앞에 금빛 갑주(甲胄)를 걸치고 장도(長刀) 비껴 차고 백마(白
馬) 위에서 나는 십만대군을 노려본다.
아아……!
그 위세에 십만대군이 숨죽이고 산천초목(山川草木)이 떠는도다.
일성(一聲)을 발하매, 십만대군 썰물처럼 물러서고 일도(一刀)에
십만대군이 사막의 모래알처럼 흩어지도다.
아아……!
영웅(英雄)이여…….
나!
천고에 빛날 영웅이여…….
대충 그런 내용인데, 일단 내용의 진위 여부를 떠나 수백 명의 목
을 한꺼번에 베는 듯한 무지한 성량만은 도저히 용서하기가 힘들다.
이 우스꽝스러운 인물이 바로 악인왕국의 총수, 악마의 시인 십광
마성 초류백이었다.
지극히 어울리지 않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의 말도 되지 않는 시가 막 절정에 이르고 있을 때였다.
돌연 한 사나이가 황급히 대전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마마… 마마! 크… 큰일났습니다!"
채두변발(採頭辨髮)에 하얀 털모자를 눌러쓴 환관(宦官) 차림의 사
나이였다.
고개는 약간 삐딱하게 좌측으로 꺾어져 있고 눈은 사팔에다가 완
벽한 들창코의 소유자.
그래서 그런지 걸음조차도 비스듬히 걷는 게걸음을 걷고 있다.
실로 그 주인에 그 수하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십광마성 초류백은 그야말로 삼천 장까지 팔팔 뛰
어올랐다.
"전팔(田八), 이 미친놈아! 비로소 지금 막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시상(詩想)이 떠올랐는데 무슨 방해를……."
십광마성 초류백은 그 풍부한 성량을 최대로 높여 고래고래 악을
썼다.
"이놈아! 이 나쁜 놈아! 위대한 시(詩), 물어내, 물어내란 말이야!"
순간 사팔뜨기 환관, 전팔의 안색은 코푼 휴지 조각처럼 구겨졌다.
이내 전팔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말했다.
"마마, 흑! 워낙 급한 일이라서… 흑! 마마, 이 불충한 전팔을 죽여
주십시오."
그러자 십광마성 초류백은 눈을 끔벅이며 금방 슬픈 표정을 지었
다.
"전팔아… 네가 울면 나도 슬퍼진다. 그만 울거라."
그야말로 난리 중의 난리였다. 가만히 보고 있자면 보고 있는 사람
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마마!"
"그래, 무슨 급한 일이냐?"
"마마! 진짜로 무시무시한 놈들이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세 놈씩이
나……."
"진짜로 무시무시한 놈들? 얼마나 무서운데?"
"서궁장청이란 젊은 놈과 지저분하게 생긴 두 늙은이인데… 그놈
들은 한 죄수를 낙타 통구이로 만들고, 또 혈사를 개 패듯 하고
……."
순간 십광마성은 더 이상 듣지 못하고 발작적인 고함을 터뜨렸다.
"그― 만!"
"전팔! 그런 일이라면 네놈이 알아서 할 것이지."
순간 십광마성은 두 손을 바들바들 떨더니 돌연 눈물을 뚝뚝 떨구
었다.
"흐윽! 나는 시도 짓고 음도 타고 서예(書藝)도 해야 되고… 얼마
나 바쁜데… 그런 일까지 신경을 쓰란 말이냐?"
"으음……."
"흑흑… 전팔, 나는 피곤하단 말이다."
전팔은 금방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그 젊은 놈과 나타난 두 늙은이가 사흑련의 총련주(總聯
主) 좌명붕(左明崩)의 좌우 양팔인 은타와 까마귀 귀신인지라……."
순간 십광마성은 갑자기 숨이 끊어진 듯 인체의 모든 행동을 멈추
었다.
시간과 공간마저 정지되어 이 세상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무서운
정적이 실내를 뒤덮었다.
문득 십광마성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게… 사실이냐?"
"그… 그렇습니다."
순간 십광마성의 두 눈에 엄청난 광기(狂氣)가 번뜩이더니 미친
듯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전팔! 그런 일이라면 진작 말할 것이지! 왜 이제야 말을 하는 것
이냐?"
"그… 그게……."
전팔은 잔뜩 겁에 질린 채 우물쭈물했다.
십광마성의 입에서는 그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악다구니가 쏟아져
나왔다.
"전팔! 뭐해 이놈아! 빨리 가서 비상령을 내리지 않고! 어서 이 호
랑말코 같은 놈아!"
"예, 옛… 마마……."
전팔은 게걸음으로 비호같이 사라졌다.
십광마성은 여전히 폴짝폴짝 이리저리 날뛰었다.
"우헤헤헤… 좌명붕! 역시 그놈이 어떻게 됐어."
좋아서 못 견디겠다는 듯 통통하게 살찐 고사리 같은 두 손을 마
구 흔들며 손뼉까지 쳤다.
"우헤헤헤… 좌명붕! 그놈은 아마 죽었을 거야, 우헤헤헤……."
그런데 돌연 그의 웃음이 뚝 그쳤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서릿발
같은 살광(殺光)이 줄기줄기 폭사되었다.
"좌명붕! 그놈이 죽었다면 관(棺)을 뜯어 그놈의 뼈를 씹어 먹어야
겠다."
돌연 그는 다시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흐윽―! 그놈 때문에 삼십 년 동안 이곳에서 고생을 한 생각을 하
면… 흑흑! 그놈의 뼈를 통째로 씹어 먹어도 하늘이 용서해 줄 거
야."
그러다 문득 허공을 향했다.
"하지만 그놈의 뼈는 더럽게 쓰고 질길 거야. 그렇지 적하(赤霞)?"
그 순간 허공에서 지극히 음산냉혹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지난 삼십 년의 한(恨)을 생각한다면 분명히 맛이 있을 겁
니다."
스스스……!
먹물 같은 흑의(黑衣).
새하얀 피부, 싸늘한 눈매, 쭉 빠진 날씬한 몸매.
적하.
기가 막히게 잘 생긴 흑의 미소년(美少年)이었다.
십 오륙 세쯤이나 되었을까?
뽀얀 볼에 패인 볼우물과 기다란 속눈썹이 가히 퇴폐적인 아름다
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섬칫하도록 사요(邪妖)한 광채를 발하는 두 눈.
천하제일 미녀(天下第一美女)라 한들 이보다 아름답지는 못할 듯
싶다.
순간 십광마성의 안색이 봄날의 햇살처럼 활짝 펴졌다.
"오! 내 사랑 적하, 너만은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적하, 이리
오너라."
분노하다 울고… 울다가 웃고…….
악마 같은 표정을 짓다가는 금방 또 자애스러운 표정을 떠올리
고…….
실로 종잡을 수 없는 인간 십광마성 초류백!
과연 그의 진실한 면모는 무엇이란 말인가?
십광마성은 적하의 손을 다정히 잡았다.
"적하! 내가 어찌해야 하느냐?"
"천금옥쇄령의 기한은 아직 십 일(十日)이 남아 있습니다. 우선은
정중히 그들을 맞이하십시오."
"그렇지! 우선 만나봐야 하겠지."
"그 다음의 일은 그놈들을 만나본 후에 결정하셔도 늦지 않을 것
입니다."
십광마성의 두 눈에 감격의 빛이 회오리쳤다.
"고맙다. 적하! 역시 넌 나의 귀중한 보물이고… 또… 그래! 태양
이다!"
그는 감격해서 적하의 손을 마구 흔들고 볼에 입까지 맞춰가며 한
없이 칭찬을 늘어놓았다.
십광마성 초류백!
역시 그는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청객사(請客舍)!
천금제황축에 들어서는 악인들을 위한 접객사(接客舍).
즉, 일종의 대기소와 같다.
악인들은 천금삼황(天禁三皇)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이곳에서 기
다려야 한다.
일년(一年)이고… 이년이고…….
삼인(三人).
서궁장청을 위시한 세 사람도 절차에 따라 이곳에 묵고 있었다.
청객사에 밤이 깊을 때, 서궁장청의 처소로 은타가 은밀히 찾아왔
다.
"웬일이시오, 은타?"
"천금삼황(天禁三皇)을 만나기 전에 먼저 갈 곳이 있네."
은타의 안색은 왠지 침중해 보였다.
"갈 곳?"
"바로 우리들의 소주께서 계신 곳, 사흑련이네."
순간 서궁장청의 놀람에 찬 시선이 은타에게 화살처럼 날아가 박
혔다.
"사흑련?"
은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우리들의 소주께서는 바로 사흑련의 총련주(總聯主) 신분
이시네."
"으음……."
무거운 신음이 그의 입술을 헤집고 뱉어졌다.
사흑련(死黑聯)!
누가 그 이름을 모르랴?
신비라는 장막 속에서 전설처럼 천하의 목을 죄고 있는 그 가공함
을 누가 모르랴!
공포의 범죄 조직. 무적의 철옹성!
천하를 정복하는 일 따위는 하찮은 일이라 여기는, 선(善)과 악(惡)
으로 대변되는 두 집단 중의 하나.
범죄 조직!
어둠 속의 검은 제국(帝國).
세인들은 그 실체가 너무도 아련하여 범죄 조직이라 여기나, 엄밀
히 말해 역사의 그늘 속에 숨어 천하사를 장악해 온 역사의 집권자
가 바로 사흑련이었다.
그 영원한 신비. 어둠 속의 실체가 드디어 서궁장청에게 접근하고
있음이었다.
"총련주께서 기다리고 계시네."
서궁장청은 묵묵히 일어섰다.
"앞장서시오."
그의 음성에는 이미 일체의 감정이 배제되어 있었다.
밤(夜)!
흐느끼는 듯 쏟아지는 월파가 음침한 천금제황축을 청철색으로 물
들이고 있었다.
그 월파 아래, 기이한 빛을 뿌리는 하나의 흑정(黑井=검은 우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흑정(黑井)!
이 우물은 아주 오래 전에 폐정(廢井)된 우물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철저한 신비에 가려져 있는 검은 제국 사흑련이
바로 이 흑정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죽음 같은 정적 속에 세 개의 그림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서궁장청과 은타, 그리고 흑오상천응이었다.
은타가 먼저가 입을 열었다.
"이 흑정이 본련의 입구이네. 들어가면 공자를 안내해 줄 사람이
있을 것이네."
"그럼… 두 분은?"
"우리 두 사람은 이곳에 남아 공자를 기다릴 것이네."
서궁장청은 잠시 말없이 그들을 응시하다가 흑정으로 사뿐히 몸을
던졌다.
사흑련!
그 신비의 실체에 드디어 서궁장청이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사흑련!
모든 것이 신비와 어둠에 쌓인 역사의 큰 손(手).
그들 세력이 사흑련이라 불려지는 것조차 신비로 알려진 검은 제
국.
그 사흑련은 놀랍게도 범죄자들을 수감하는 죽음의 감옥, 천금등
혈옥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르르릉―!
수만 근의 석문(石門)이 열렸다.
사흑련의 입구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
었다.
그리고 어둠의 제국답게 온통 암흑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무거운 어둠과 정적을 헤치며 서궁장청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
다.
회랑의 벽 쪽에는 수백 명의 흑의인들이 양옆으로 쭈욱 가부좌를
튼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흑의(黑衣). 흑검(黑劍). 흑건(黑巾).
모두가 까맣다.
그리고 어둠의 일부처럼 늘어선 흑의인들의 기도는 완벽한 살인
전문가의 기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저 스쳐가는 바람처럼 아무런 형체도 느낌도 가질 수 없는 바람
같은 흑의인들.
이것은 실로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만약 서궁장청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결코 그들을 감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저벅… 저벅!
공기마저 앙금처럼 가라앉은 회랑.
그 속을 서궁장청은 걸었다.
서궁장청이 흑벽 앞에 서자 흑벽이 허공으로 빨려들 듯 올라갔다.
촤르륵―!
동시에 언제 나타났는지 두 명의 백의몽면인(白衣蒙面人)이 문 옆
에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두 백의몽면인은 서궁장청과는 일체의 관련도 없다는 듯, 아니 아
예 보지도 않은 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서궁장청 역시 묵묵히 그들 옆을 스쳐갔다.
또 하나의 흑벽이 나타났다.
촤르― 륵!
서궁장청이 다가서자 흑벽은 다시 허공을 빨려들었다.
그리고 두 백의몽면인이 무릎 꿇고 두 손을 바닥에 댄 채 역시 석
상처럼 앉아 있었다.
이러한 상태는 끝없이 되풀이되었다.
촤르륵― 착! 촤르륵― 착―!
서궁장청이 다가서면 무서운 속도로 흑벽이 올라가고 어김없이 두
백의몽면인이 좌정해 있었다.
이윽고 구십구 번째의 흑벽이 올라간 순간이었다.
촤르― 륵!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백색대전(白色大殿)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
냈다.
백색의 대전(大殿)!
로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백색의 의자들이 놓여져 있었다.
그 전면에 병색이 완연한 한 사나이가 태사의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사십대의 중년인(中年人).
밀납처럼 창백한 안색, 시커멓게 죽은 입술.
한눈에도 완연한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그의 풍모는 서궁장청이 압도될 만큼 기이
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검미성목(劍眉星目)의 귀족적(貴族的)인 용모에, 무정하고 냉철한
야성이 그 준수한 용모 뒤에 안개처럼 깔려 있다. 그러나 그 날카로
움 역시 위엄과 관록의 무게로 부드럽게 감싸여져 있었다.
신주팔황을 압도하는 만승지존의 풍도가 이러할까?
한마디로, 완벽한 제왕의 풍도를 지닌 사나이였다.
그는 서궁장청을 깊은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쿨룩! 어서 오시게. 몸이 이러하여 제대로 영접치 못함을 용서하
시게."
처음의 만남이었지만 서궁장청은 중년인에게 강한 연민을 느꼈다.
그것은 그의 풍모가 돌아가신 부친 송백일태성 서궁백과 너무도
흡사하였기 때문이었다.
"괘념치 마십시오."
서궁장청 역시 깊은 눈으로 그의 시선을 받았다.
"고맙네. 나는 사흑련의 총련주(總聯主) 좌명붕(左明崩)이라는 사
람일세."
"좌명붕……."
일순 서궁장청의 두 눈에 기이한 열기가 이글거렸다.
거대한 신비가 그 첫번째 껍질을 벗는 순간이었다.
사흑련주 천세백작(千歲白爵) 좌명붕(左明崩)!
세상엔 천재(天才)도 많다.
그러나 세상에 그보다 더 뛰어나고 불운한 천재는 없을 것이다.
이미 십 세 때, 금기서화(琴碁書畵) 등 이 세상의 모든 학문에 달
통한 십기대작(十技大爵)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십팔 세 때, 모든 무
예 방면에도 극첨(極尖)의 경지에 도달했다.
약관의 무신(武神)!
그의 능력은 하늘조차 뒤덮고도 남음이 있었다.
단연코 그의 능력은 고금최대의 천재라는 신릉군을 삼 배 능가하
고, 서궁장청보다도 뛰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천재박명(天才薄命)인가?
하늘이 그의 능력을 시기함인가?
그는 내장이 썩어 문드러지는 고금 미증유의 희귀한 괴질(怪疾)로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서궁장청은 묵묵히 그를 응시하다가 짤막히 내뱉었다.
"서궁장청이외다."
"서궁장청! 이미 알고 있었네."
순간 서궁장청의 두 눈이 강렬한 의혹의 빛을 내뿜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고?'
좌명붕은 조용히 미소했다.
중년사내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지극히 매혹적인 미소였
다.
"나는 천기(天氣)에 대해 약간 배운 적이 있네. 운명이란 단어를
좋아하진 않으나… 미련이 많다 보니 내 앞날을 좀 알고 싶어서 배
웠다네."
"으음……."
"그런데 천기를 살펴보던 중 우연히 그대의 천기를 보게 되었네.
한 십년(十年)쯤 되었을까?"
십년 전부터 서궁장청의 천기를 살피고 있었다.
결국 십년 전부터 서궁장청을 알고 있었단 말이 아닌가!
서궁장청의 입가로 모호한 미소가 스쳤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 나를 알고 있다.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구
려."
"후후… 그럴 것이네. 하지만 그대와 나의 천기는 숙명적인 끈으로
이어져 있어. 나의 천기를 보면 자연히 자네의 천기를 알 수가 있
지."
"숙명의 끈이라… 어떤 끈인지 궁금하구려."
좌명붕은 티없이 맑게 웃었다.
"형제(兄弟)의 끈일세!"
"형제의 끈?"
"천공(天空)의 성좌 중 가장 위대한 성좌 제황군림좌(帝皇君臨座)!
자네와 나는 똑같은 제황군림좌이네."
"으음……."
"한 가지 다르다면 자네가 위대한 성기(星氣)를 뿌릴 때 나의 별은
낙성(落星)이 되어 사라진다는 것이지."
좌명붕에게서 스러져가는 황혼의 노을처럼 쓸쓸한 여운이 풍겨졌
다.
"으음……."
"그러나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은 그대가 이루어 줄 것인
즉… 난 유한이 없… 우욱―!"
돌연 좌명붕의 안색이 일그러지며 아미에 시퍼런 힘줄이 돋아났
다.
그리고 전신을 뒤틀며 격렬한 기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쿨룩… 쿨룩……."
기침과 함께 그의 입에서는 검붉은 선혈이 흘러 나오고 그 선혈
속에는 도막난 내장 부스러기가 뒤섞여 있었다.
서궁장청은 빠르게 다가섰다.
그러나 좌명붕이 애써 손을 내저었다.
"괘… 괜찮네!"
서궁장청은 멈칫했다.
그 순간 이미 그는 좌명붕의 병세를 꿰뚫고 있었다.
'오늘을 넘기기 힘들다. 이미 내장이 완전히 썩어 기침할 때마다
튀어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이 오히려 기적일 정도다.'
격렬한 기침을 멈춘 좌명붕은 복잡한 눈빛으로 서궁장청을 응시했
다.
내장 부스러기가 바스러지는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그의 얼굴
에는 여전히 기품 있는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그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
네."
서궁장청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습니다."
좌명붕은 쓸쓸하게 웃었다.
"일생을 기다려온 만남이거늘… 애석한 일일세."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
처음의 만남이었지만 두 사람은 난생 처음 서로에게서 어떤 운명
의 이끌림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라는 사실 또
한 알고 있었다.
이윽고 좌명붕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그대를 형제처럼 여기고 있네. 그러니 나의 모든 것을 받아
주게."
"나 역시 당신을 믿습니다. 받겠습니다."
사흑련의 총련주 좌명붕과 서궁장청!
두 사람의 뜨거운 시선은 허공에서 하나로 얽혀졌다.
그들에게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았다.
믿는다!
그 말 한마디면 족했다.
"고맙네."
서궁장청은 빙긋 웃었다.
"우정(友情)은 고맙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일순 좌명붕의 눈에 찰나적으로 진한 감동이 물결쳤다.
예의 티없이 맑은, 그러면서도 극히 기품 있는 미소가 입가로 번져
갔다.
"사람으로 태어나 한 사람의 지기(知己)를 얻을 수 있다면 훌륭한
인생. 내 무의미한 일생이 자네로 인하여 의미 있는 일생이 되었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손과 손이 내밀어지고 두 사람은 굳게 손을 마주잡았다.
불운한 천재와 떠오르는 군림좌(君臨座)의 만남!
그것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늘의 이 만남으로 인하여 후일 천하의 운명이 결정되
고 가공할 정(情)의 폭풍이 대륙 십팔만 리를 휘몰아치게 된다.
격동의 시간이 흐른 뒤, 좌명붕이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자네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은… 바로 사흑련의 역사일
세."
"사흑련의 역사……?"
좌명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흑련은 춘추전국시대 중 가장 뛰어난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
중의 일인인 신릉군이 세운 것일세."
"신릉군이?"
'신릉군을 따르던 구십구 인의 율사(律士), 유랑구구종횡천이 사흑
련을 세운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는 솟구치는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럼 상국 여불위의 음모에 의해 이곳 천금등혈옥에 갇힌 구십구
인의 율사 유랑구구종횡천은 어찌 되었습니까?"
좌명붕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대꾸했다.
"그들은 갇힌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곳에 들어온 것이네. 어둠 속
에 영원히 안주하기 위하여……."
"어둠 속에 영원히 안주하기 위하여 스스로 천금등혈옥에 들어왔
다니요?"
서궁장청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납득이 안 가는 일이었다.
좌명붕이 말을 이었다.
"맹상군(孟嘗君), 평원군(平原君), 춘신군(春申君)과 함께 전국시대
를 이끈 신릉군! 그분은 고금 최대의 천재였으나 나처럼 단명의 운명
을 가지고 태어나셨다네."
"으음……."
"만약 신릉군 그분께 십년이란 세월만 더 주어졌다면… 춘추전국
시대는 상국 여불위와 대폭군 진시황의 손에 의해 통일되는 것이 아
니라 신릉군, 그분에 의해 통일되었을 것이네."
"으음……."
"정의를 숭상하는 임협(任俠) 신릉군! 그분이 천하를 통일하였다면
역사는 많이 바뀌었을 것이네. 실로 그분의 단명은 역사의 불운이었
지."
서궁장청의 안색은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나 신릉군께서는 임종 직전 천하 안녕을 위해 거대한 천년대
계를 세우셨네."
"천년대계?"
"바로 어둠 속에 숨어 역사를 감시하는… 역사의 초병(哨兵) 사흑
련을 세우신 것일세."
서궁장청은 진실로 경악하고 말았다.
어둠 속에 역사를 감시하는 역사의 초병 사흑련!
한마디로 사흑련이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훌륭한 단체라는 말이 아
닌가!
좌명붕은 안색을 신중히 굳혔다.
"물론 지상에서 가장 거대한 조직을 가지고 있는 사흑련의 하부
조직 대부분이 범죄 조직인 것은 사실이네."
"으음……."
"그러나 만약 그들을 사흑련이 관장하지 않고 다른 세력이 관장하
였다면, 천하는 수십 번도 더더욱 지독한 난세가 되었을 것이네."
"그렇다면 사흑련은 범죄 조직을 키워온 것이 아니라… 난세를 방
비하기 위해 그들을 다스려 왔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네. 사흑련은 범죄 조직으로 인한 난세를 막기 위해 그들을
지배하는 것일세."
범죄 조직으로 인한 난세를 막기 위해 그들을 지배하였다!
실로 그 누구도 상상치 못한 말이 아닌가!
서궁장청이 다시 의혹의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천금등혈옥에 갇힌 구십구 인의 율사 유랑구구종횡천은
어찌 되었습니까?"
"원래 신릉군께서는 이곳 천금등혈옥의 지하에 사흑련의 총본영
(總本營)을 세우셨네. 그것은 훗날 유랑구구종횡천이 이곳에 갇힐 것
을 예견했기 때문일세.
"결국 유랑구구종횡천은 이곳에 갇힌 게 아니라 안배에 의해 스스
로 이곳에 들어온 것이군요."
"그렇다네. 이러한 것은 모두 신릉군의 완벽한 천년대계의 일환이
었네."
"으음……."
"기실 드러난 힘은 오래 가지 않는 법일세. 그러나 보이지 않는 힘
은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네. 신릉군의 천년대계란 바로 천하의 영원
한 지배자가 되기 위해 어둠 속에 숨은 것일세."
어둠 속의 검은 제국 사흑련!
드디어 그 탄생 동기가 밝혀지고 신비의 껍질은 더욱 얇아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사흑련은 백팔십 년 전, 대송제국의 멸망과 함께 무
너지고 말았네."
"사흑련이 무너졌다구요?"
이게 무슨 말인가?
"기실 사흑련은 한 잔의 술(酒)과 한 잔의 의혈(義血)로 이루어
진… 이른바 백탁(白卓)의 맹세로 탄생된 연합체(聯合體)이네."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어두운 과거가 흘러 나왔다.
"백탁의 맹세!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서 신릉군과 구십구 인의 율
사 유랑구구종횡천이 모여… 한 잔의 술과 한 잔의 의혈을 나누며
형제의 의(義)를 맹세한 성결한 의식을 치렀었네."
"으음……."
"한마디로 사흑련 백탁의 맹세로 한 형제를 이루어졌지. 하여 우리
들은 사흑련을 백탁의 가족이라 부르네."
백탁의 가족(家族)!
서궁장청은 가슴속에서 무언가 뭉클한 감정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
꼈다.
"그러나 백팔십 년 전에 백탁의 맹세는 깨지고 말았네. 구십구 인
의 율사! 그들이 일제히 탈퇴를 선언한 것일세."
"아니… 왜 그런 일이?"
서궁장청은 놀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좌명붕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당시 중원은 대초원의 표범 철목진(鐵木眞=징기스칸)이 일으킨
송제국을 도와 대원제국을 쳐부수기로 결정하였네. 그것은 사흑련의
운명을 건 결정이었네."
"으음… 그래서요?"
"그러나 구십구 인의 율사는 그 결정에 반대하고 결국 대송제국이
멸망함으로써 사흑련 역시 무너진 것일세."
"허어… 그런 일이……."
서궁장청은 침중한 신음을 흘려냈다.
그러나 이어지는 좌명붕의 말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대송제국의 멸망과 사흑련의 몰락!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한 인
물의 힘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네. 결국 그 힘에 의해 몰락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한 인물의 힘으로 대송제국과 사흑련이 몰락했다!
서궁장청은 경악했다.
"그럴 리가… 그 인물이 누구이기에?"
좌명붕은 한자 한자 끊어 또렷하게 내뱉었다.
"만세대상(萬歲大商)일세!"
"만세대상?"
― 천하를 사고 파는 상인(商人)들이 있다.
그들을 가리켜 만세대상이라 부른다.
신화처럼 전설처럼 스쳐가는 이름.
천하라는 거대한 땅덩어리를 판돈 삼아 한판의 승부를 벌이는 지상
최고의 도박사.
좌명붕은 놀람에 찬 서궁장청의 눈을 직시했다.
"기실 신릉군과 함께 대치했던 상국 여불위의 진정한 얼굴은 만세
대상! 그들의 후예가 아니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사흑련을 붕괴시킬
수 없다네."
"으음… 결국 만세대상이 천하를 대원제국에게 판 셈이군요."
"그렇다네."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대중원이 몽고제국의 말발굽 아래 짓밟힌 역사의 그늘.
그 속에 만세대상이란 거대한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었을 줄이야
그 누가 짐작이나 하였겠는가?
만세대상!
과연 그들의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우욱! 쿨룩… 쿨룩… 크윽!"
그 날의 비통함을 떠올린 까닭일까?
좌명붕!
이 불운의 천재는 또다시 내장 부스러기가 뒤섞인 한 덩이의 검붉
은 선혈을 토해내며 고통에 몸을 틀었다.
"으… 으으……."
대번에 시퍼런 힘줄이 돋아나고, 온 사지가 무섭게 경련 했다.
내장이 썩어 문드러지는 고통.
그 처절한 고통을 무어라 필설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좌명붕은 인내 하나로 그 참혹한 고통을 이겨내고 있었다.
"어… 어찌 이따위 육체적인 고통이 마음의 고통에 비할 수 있겠
는가!"
"으음……."
"이따위 육체의 고통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으나, 형제에게 배신당
한 고통은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이네."
"이해합니다."
좌명붕은 뜨거운 시선으로 서궁장청을 직시했다.
"나를 대신하여 사흑련을 이끌어 주게. 사흑련의 형제들에게 백탁
의 맹세가 얼마나 준엄한 것인가를 보여주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천하를 한낱 판돈으로 생각하는 만세대상을 없애주게!"
"물론입니다. 형님!"
서궁장청의 입에서는 실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형님……?"
과 감동의 해일은 눈에서 시작하여 그의 전신과 영혼으로 치달렸다.
"그래… 이 우형은 아우님만 믿네."
좌명붕은 목이 메었다.
"믿어도 될 것입니다."
"물론일세."
이때 한 사나이가 무릎걸음으로 서궁장청에게 다가섰다.
그는 하나의 소반(小盤)을 두 손으로 정중하게 받쳐들고 있었다.
소반 위에는 한 자루의 비수(匕首)와 하나의 술잔, 하나의 술병이
놓여 있었다.
순간 좌명붕이 엄숙히 신색을 굳혔다.
"술잔을 올려라!"
"존명―!"
사나이는 백옥 잔에 술을 따랐다.
쪼르르르륵…….
맑은 음향과 함께 그윽한 주향(酒香)이 진동했다.
그리고 벽록색 술이 백옥 잔에 가득 찬 순간, 사나이의 모습은 이
미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것은 아우님께서 사흑련의 형제가 됨을 맹세하는 백탁의 의식
일세."
"백탁의 의식!"
"술잔을 들게. 그리고 그 술잔에 아우님의 마음을 담은 의혈(義血)
을 담게."
서궁장청은 묵묵히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비수로 약지(藥指)를 베어 흘러내리는 피를 술잔에 담았다.
술잔은 좌명붕의 손에 건네지고, 좌명붕은 두 손으로 엄숙히 그 피
를 마셨다.
백탁의 의식!
그것은 숨막힐 듯한 정적 속에서 조용히 진행되고 서궁장청은 그
엄숙한 의식 속에서 맹세했다.
― 나 서궁장청은 사흑련의 총련주로 백탁의 맹세를 배신한
형제들에게 죽음의 칼을 내릴 것이다.
백탁의 사형집행인의 이름으로……!
아울러 대원제국과 피의 전쟁(戰爭)을 벌이는 백탁의 맹세는 이루어
질 것이다.
대원제국이 지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앞으로 이 모든 결정을 가리켜 백탁의 투쟁(鬪爭)이라 명명하고 모든
것은 백탁의 사형집행인의 이름으로 실행될 것이다!
이른바 백탁의 결정!
훗날 대원제국을 공포에 잠기게 할 백탁의 사형집행인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첫댓글 굿,,,,
즐독 ㄳ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