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라도 한바탕 쏟아지려는 걸까. 하늘이 낮게 내려 앉아있다. 하얀 눈발이 날리는 계절이 되면 노루꼬리처럼 짧은 겨울해가 아까울세라 눈밭에서 뛰어 놀던 아련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순백의 눈은, 무한경쟁 시대를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삭막해진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묘한 마력이 있다. 눈이 없는 겨울. 생각만 해도 삭막하다. 겨울 나들이의 참맛은 아마 그런 눈꽃을 보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떠오른 고을이 강원도 땅에 있는 평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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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석생가와 메밀꽃. 2002년 9월 효석문화제 기간에 촬영했다. |
평창으로 가기 위해서 영동고속도로를 타면 제일 먼저 봉평이 손짓한다. 봉평!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가 아닌가.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영동고속도로 장평 나들목에서 빠져나와 평창강 상류의 흥정천을 거슬러오르면 길은 산허리를 돌아 봉평에 닿는다. 가을이라면 봉평은 눈 닿는 곳마다 새하얀 메밀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나그네를 반길 테지만, 지금은 온통 ‘메밀꽃 핀 듯’한 눈밭이다. 길목에 세워진 ‘메밀꽃 필 무렵’ 표석을 지나니 소설의 무대였던 봉평 장터. 애시당초 겨울 장이란 게 다 그렇지만 오늘의 봉평장은 좀 썰렁하다. 아마 장날이 아닌 탓이리라.
봉평장은 이런저런 옷감을 파는 드팀전 장돌뱅이를 시작한 지 이십 년이나 된 허생원이 한번도 빼놓지 않고 들렀던 곳이다. 봉평장을 찾은 장돌뱅이들이 노곤한 육신을 달래기 위해 목을 적시고, 허생원의 얼굴도 붉어지게 만들던 충줏집터를 알리는 표석이 반갑다. 충줏집과 수작하던 동이를 후려친 허생원의 한숨소리와 늙은 나귀를 괴롭히던 장터 아이들의 짓궂은 웃음소리가 차가운 바람에 실려온다.
이곳에 오면 늘 막국수집을 찾아들어가곤 했는데, 계절 탓인가. 오늘은 좀 따뜻한 게 생각난다. 국밥으로 요기를 한 뒤 이효석 흉상과 문학비가 있는 가산공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허생원 일행이 건너던 흥정천 너머는 온통 눈밭이다. 개울을 건너면, 목욕하려던 허생원이 메밀밭 위로 쏟아지는 하얀 달빛을 피해 들어섰다가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쳐 무섭고도 기막힌 하룻밤 인연을 맺은 물레방앗간이다. 물레방아는 꽁꽁 얼어붙어 빙폭처럼 변했다.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잠겨 울고 있던 처녀가 갑자기 나타난 허생원을 보곤 흠칫 놀라던 광경이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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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평 가산공원에는 한국 단편서설의 백미로 꼽히는 '메밀꽃 필 무렵'을 지은 이효석 흉상이 있다. |
이효석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생가는 물레방앗간에서 1.5km쯤 떨어져 있다. 이 호젓한 시골길은 걷기도 좋다. 언제나 이곳에 올 때면 채 20분도 안 걸리는 이 길을 타박타박 걸으며 효석을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칼바람이 부는 계절. 자신이 없다.
차를 타고 효석의 생가로 달린다. 펑퍼짐한 들판에 덩그마니 서있는 효석 생가는 강원도 산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집이다. 효석 생가임을 알려주는 표석만으로 이곳에서 당대 최고 문장가의 흔적을 되짚어 보기란 쉽지 않다. 효석이 어린시절을 보낸 이곳은 지금은 홍씨 일가가 살고 있다. 1913년 당시 봉평면장이었던 효석의 부친이 이 집을 넘기고 도회지로 떠났던 것이다.
허생원은 분명 하룻밤 풋사랑으로 운명적인 인연을 맺은 성처녀를 메밀꽃 질 무렵에 다시 만나 봉평 어디선가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봉평의 메밀꽃밭을 배경으로 원시적 자연을 꿈꾸는 작품을 써낸 이효석의 말년은 불행했다. 1940년 부인과 어린 자식을 잃고 실의에 빠져 만주를 유랑하던 효석은 1942년 결핵성 뇌막염에 걸려 요절했으니 그의 나이 겨우 36세였다.
길은 대화로 이어진다. 봉평장서 재미 못본 허생원 일행이 기대를 갖고 가다 저 흥정천 물에 빠지는 바람에 동이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게 되지 않던가. 흥정천 물가 팔석정(八石亭)에서 조선 전기 문인으로 조선 4대 명필로 꼽히는 봉래 양사언(1517~1584)의 흔적을 더듬고 길을 재촉하는데, 율곡 이이가 옷소매를 붙든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고향이던 강릉도 아닌 봉평서 율곡을? 그 이유는 율곡의 부친이 조선 중종 때 이곳에서 거주할 때 조선의 대학자 율곡을 잉태했기 때문이다. 지방 선비들이 이 사실을 후세에 전하고 기리기 위하여 율곡의 부친이 머물던 판관대(判官臺)를 중심으로 한 사방 오리의 땅을 나라에서 하사받아 1906년에 봉산서재(蓬山書齋)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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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평에서 대화로 가는 길목에 있는 금당계곡의 겨울 풍경. |
대화 지나 금당계곡으로 향한다. 31번 국도를 벗어나자 길은 이내 하얗게 바뀐다. 기왕에 평창을 들렀으니 겨울산과 겨울강을 실컷 보고 느끼게 될 테지만, 평창강 상류의 금당계곡에서 겨울 강의 숨소리를 듣고 싶은 조바심이 인다. 기어를 사륜구동으로 바꾸고 조심스레 가던 중에 중년 부부를 태운다. 지금은 부산서 살고 있다는 부부의 고향은 금당계곡의 안쪽 마을인데, 이른 성묘를 하러 왔다고 한다. 오 리도 안 되는 짧은 거리를 가면서 남자는 많은 정보를 알려준다. 금당계곡에서 어릴 적 추억을 긷던 남자는 “근처에 김대중 대통령 별장이 있다”고 속삭인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전 경치 좋은 이곳을 자주 찾았고, 대통령이 되고나서도 가끔 다녀간다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과문한 탓인지 대통령 별장이 이곳에 있다는 얘기는 처음이다.
부부를 내려주고 얼마쯤 들어가니 과연 후광정(後廣亭)이란 팻말이 보인다. ‘후광’이라면 DJ의 호가 아닌가. 장독대 사이를 기웃거리는 나그네의 정체를 살피러 나왔던 남자에게 이곳에서 ‘후광문학상’ 수상식을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상은 계간 <우리문학>을 발행하는 우리문학사에서 1992년 당시 김대중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의 호를 따서 제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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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강 주나루에는 다리가 생기기 전에 이곳에 나루터였음을 알리는 비석이 서있다. |
금당계곡을 빠져나와 계속 남진하며 평창읍으로 향한다. 평창군은 남북으로 길게 생겼는데, 남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평창읍은 북쪽의 영동고속도로변 마을들에 비해 외지인의 발길이 많지 않다. 나루터였음을 알리는 ‘주나루’란 푯돌을 보며 주진교 건너면 읍내로 들어서게 된다. 읍내에는 노성산성이 있는 평창공원, 송학루가 있는 남산, 그리고 남쪽의 유동리5층석탑과 아양정(娥洋亭) 등의 볼거리가 있다. 봉평 진부 횡계 같은 마을들이 외지인들의 휴식처라면, 이곳은 현지 주민들을 위한 안식처라 할 수 있다. 솔향이 온몸에 휘감겨오는 송학루에 올라 바라보는 평창읍 풍경이 좋았고, 평창강 벼랑에 세워진 아양정의 전망도 그런대로 볼 만하다.
갑자기 동강을 보고픈 마음이 굴뚝 같다. 아양정에서 벌떡 일어나 서둘러 동강으로 방향을 잡는다. 어느새 해가 많이 기울었다. 멧둔재 터널을 지나니 동강가에 자리한 ‘문희마을’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잘 세워져있다. 문희 마을로 들어서는 지방도로 들어선다. 역시 얼어붙은 눈길이다. 무주의 나제통문과 닮은 석문은 동강이 흐르는 신비의 세계로 나그네를 인도하는 비밀의 문처럼 느껴진다.
태백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 물줄기는 정선에서 조양강이란 이름을 얻고 가수리에서 동남천을 만나면서 동강이라 불리면서 영월 읍내에서 서강을 만나기까지 51km를 굽이쳐 흐른다. 산 많은 강원도에서도 오지의 대명사로 손꼽혀온 정선, 평창, 영월 땅을 적시고 흐르는 동강은 험한 석회암 절벽을 끼고 굽돌아 흐르는 전형적인 사행천(蛇行川)이다. 그래서 일부 구간을 제외하곤 여태 인적이 거의 없었다. 만약 90년대 후반 동강댐 건설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다면 동강은 아직도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을 것이다. 이젠 난개발과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접근이 까다로운 중류의 평창 땅에 속한 물줄기엔 옛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진탄나루엔 줄배 혼자 외롭고, 강 건너 진탄 마을은 지난 여름 수해 흔적이 역력하다. 수직의 뼝대가 드리워진 구절양장 물줄기를 이어주는 줄배에서는 생활의 절박함이 뚝뚝 묻어 나온다. 줄배는 척박한 골짜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의 표현이었다. 지나던 나그네가 배를 한 번 타본다고 해서 동강 사람들의 애환을 실어 날랐던 사연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으리라. 강물소리가 들려올 만한 민박집을 구해 짐을 부린 뒤 다시 강으로 나간다.
강 가장 안쪽의 문희 마을. 뒤로는 수억 년의 세월로 이루어진 신비한 석주들과 기묘한 석화밭 등 아름다운 석회동굴인 백룡동굴(영구보존 비공개동굴)을 품은 백운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솔 그늘 드리워진 강가에는 사내 하나가 강에서 물수제비를 뜨고 있다. 사내가 팔매질을 할 때마다 겨울강에 예쁜 물동그라미가 생겨난다. 그 참에 겨울강에 떠있던 오리 몇 마리 물을 차고 오른다. 동강은 이 겨울에도 잠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추위도 잊은 채 겨울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주민들도 보인다. 그들이 지렛대를 이용해 돌을 들썩이자 겨울잠을 자던 물고기들이 족대에 걸려든다. 굼뜬 동작으로 헤엄치던 물고기는 맨손으로도 낚아챌 수 있다. 주로 살진 피라미들이다.
강마을에서의 하룻밤. 여울을 지나는 강물소린지 빈 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린지 분간이 안 되는 소리에 밤새 뒤척이다 눈뜬 새벽녘. 겨울 동강은 자욱한 물안개에 잠겨있다. 하얀 물안개를 헤쳐나가며 동강과 아쉬운 작별을 한다.
비행기재 터널을 지나면 정선아라리로 유명한 정선 땅이다. 들러보고 싶은 곳이 많지만 발길을 재촉한다. 42번 국도를 타고 정선읍내를 지나 가리왕산(1,561m)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돌면 오대천. 얼어붙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물줄기를 훔쳐보며 10분쯤 달리면 곧 평창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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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심대 사당에 그려진 벽화. 떠난 임을 그리는 애틋한 정이 느껴진다. |
청심대(淸心臺). 차를 대기가 마땅치 않지만 오대천 지날 때면 일부로라도 꼭 들렀다가는 곳이다. 여기서 바라보는 오대천 풍경도 좋거니와, 사랑을 떠나 보내고 슬픔을 못 이겨 목숨을 버린 한 여인의 순정은 늘 가슴을 찡하게 한다. 나그네가 남자라서가 아니다. 그토록 애절한 사랑을 경험한 청심이란 기생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이리라. 이 겨울에도 그 서늘한 단심을 찾는 사람이 적지 않은 듯 눈 덮인 청심대 오솔길엔 발자국이 가득하다. 그런데 왜 사랑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대부분 여자일까?
진부로 들어서니 벌써 향긋한 산채 내음이 나는 듯하다. 늦은 아침 메뉴는 향긋한 산채백반이다. 잘 차려낸 상에는 각종 취나물과 더덕, 두릅, 표고버섯 등이 입맛을 돋운다. 동강서 일부러 아침을 거르고 와 허기진 탓도 있을 테지만, 이곳의 산채백반은 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식당을 나서면서 잠시 갈등을 한다. 눈꽃축제가 한창인 동쪽의 횡계로 갈까. 오대천을 계속 거슬러 올라 북쪽의 월정사 전나무숲을 거닐까. 아니면 서쪽의 운두령을 오를까. 그래 운두령을 먼저 들르자.
평창과 홍천을 잇는 31번 국도가 지나는 운두령은 통행량이 많지 않은 고개지만, 두 가지를 생각나게 한다. 하나는 <산경표>로 알려진 우리 전통산줄기요, 나머지는 동족상잔의 아픔을 간직한 한국의 현대사다.
강원도 땅은 백두대간 산줄기를 기준으로 영동과 영서로 나뉘고, 영서지방은 다시 오대산에서 갈라져 나와 양평 용문산까지 이어지는 ‘한중지맥’을 기준으로 남한강 수계의 남부지방과 북한강 수계의 북부지방으로 구분한다. 이는 강원도의 문화와 언어, 관습 등을 나누는 근간도 된다. 아마 강원도 행정구역이 남도와 북도로 나뉜다면, 당연히 이 산줄기를 기본으로 해야할 것이다.
운두령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한중지맥’이 처음으로 숨을 고르는 높은 고개다. 그러니까 이 고개 정상에 떨어진 빗물이 평창 쪽으로 떨어지면 남한강으로, 홍천쪽으로 떨어지면 북한강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물론 이 둘은 양평 양수리에서 다시 만나 한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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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두령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한 이승복기념관. 한민족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일깨워주는 곳이다. |
또 하나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는 소년 이승복의 흔적. 운두령 기슭에 살던 그는 1968년 12월9일 북에서 내려온 무장공비에 의해 피살당했으며 그의 어머니도 칼에 찔려 숨졌다. 남과 북의 정치적 이념이 빚은 갈등에 희생당한 소년의 슬픈 눈망울이 운두령 기슭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한중지맥’으로 갈렸던 남한강과 북한강이 양수리에서 만나 한 몸이 되듯, 우리 민족의 통일도 기원하게 되는 운두령인 것이다.
운두령을 올랐다 다시 되짚어 내려와 방아다리약수로 가는 지방도를 탄다. 역시 길엔 눈이 가득 쌓여있다. 4륜구동으로 고개를 넘어 약수터에 도착한다. 전나무숲을 스치는 바람은 차갑지만 상쾌하다. 삼림욕 후 마시는 톡 쏘는 물맛! 참 좋다. 몇 년 전 여름에 맛본 약수막걸리 생각에 입에선 군침이 돌지만, 이 짧은 겨울 해가 다 지기 전에 오대산 깊숙이 들어가고 싶다.
평창 오대산(1,563m)은 산 자체가 하나의 신앙이다. 특징 없이 부드러운 산세 때문에 베테랑 사진작가들도 부담스러워하지만, 곳곳에 부처의 숭고한 뜻이 깃들어 있는 오대산은 언제나 삶에 지친 영혼들을 품어주며 위로해주는 미덕이 있다. 오대산이 바로 부처인 것이다.
전나무 숲길을 걷는다. 겨울 햇살에 푸른 물감이 뚝뚝 묻어날 것만 같은 이 길. 일주문에서 월정사까지 400~500년생 전나무로 이루어진 이 숲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숲의 전나무들 중 나무 사이의 폭이 20m쯤 이르는 거목 아홉 그루를 일컬어 ‘아홉수’라 부르는데, 오대산을 뒤덮은 전나무는 모두 이 아홉수에서 종자가 퍼져서 성장한 것이라고 한다.
동대산에 있는 만월대에 떠오르는 보름날의 달빛 유난히 밝고 좋다고 하여 월정사(月精寺)라 했다던가. 그러나 한국전쟁 때 월정사의 피해는 참혹할 정도였다. 국보급 전각은 모두 불타고 신라 범종도 녹아 영원히 사라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돌로 만든 것들은 남았는데, 바로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과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이다.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팔각으로 다듬었다는 구층탑은 그 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흔적을 살필 수 있으려니와, 왼쪽 무릎을 세우고 오른쪽 무릎은 꿇은 채 탑을 우러르고 있는 석조보살좌상은 얼굴과 가슴이 균형이 잡히지 않았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절집을 찾는 이들의 눈길을 붙잡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우러르는 여인의 눈길인지,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인지, 아니면 문수보살을 기다리는 자장율사의 모습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전문가들은 법화경의 약왕보살이라는 설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엔 석조보살좌상을 만날 수 없었다. 보수공사를 위해 잠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방문객들이 있음에도 월정사가 썰렁하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었던가 보다.
월정사를 벗어나면 산길은 짙푸른 천연림을 적시는 계류로서 수달과 열목어가 산다는 금강연을 끼고 이어진다. 온통 눈길이라 지나는 드물게 오가는 차들도 거북이 운행이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범종으로 유명한 상원사(上院寺). 세조를 생각하며 돌계단을 오르는데, 뎅그렁 뎅그렁 울리는 풍경소리가 먼저 나그네를 반긴다. 상원사를 찾는 참배객들이 가장 정성을 들이는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도 상원사를 유명하게 한 나라의 보물이다. 역시 세조와 인연이 깊다.
전신에 종창이 생기는 괴질을 앓아 물 좋다는 데는 다 찾아다니던 세조가 오대산에 이르러 월정사에서 참배하고 상원사로 가던 중 상원사 아래 ‘관대거리’에서 옷을 벗고 목욕을 하다 동자승으로 변한 문수보살을 만나게 된다. 문수동자좌상은 그 때 세조가 본 인상착의를 바탕으로 조각된 것이라고 전한다.
이 상원사가 월정사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데, 월정사와는 달리 나무와 철로 만든 유물들이 멀쩡하게 남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월정사가 파괴될 당시 상원사 조실이던 한암 스님이 앉은 채 죽음을 맞이하는 좌탈입망(坐脫入亡)의 자세로 절을 지켰기 때문이다.
상원사까지 오면 늘 우통수(于筒水) 생각을 떨칠 수 없다. 한때 한강의 발원지라 하여 이 나라 최고의 물로 쳐주던 샘물. 그 그윽하고 무거운 듯한 물맛을 보고 너와로 지붕을 얹은 아담한 서대 염불암에서 눈 맑은 스님과 차 한 잔 나누고 싶다. 염불암 툇마루에 가만히 앉아 연꽃 닮은 오대산 줄기를 감상하던 기억이 새롭다. 하지만 오늘 염불암 오르는 길은 눈으로 뒤덮여 있다. 골바람에 떠밀리듯 오대산을 벗어난다.
백두대간 진고개 정상을 다녀오니 이미 깜깜한 밤중이다. 어제는 강마을에서 등을 기댔으니 오늘은 산마을에서 묵어보자. 가끔 들르던 사하촌 민박집을 찾아들어간다. 오늘도 역시 바람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든다.
오대산 자락에서 맞이하는 아침.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을 뿌리려는 듯 잔뜩 찌푸리고 있다. 하지만 사흘간 애타게 기다려온 눈발은 오늘도 날리지 않는다. 오늘은 대관령 설경과 황태덕장을 감상할 수 있는 횡계다. 지금 그곳은 눈꽃축제도 한창이리라.
한반도의 등뼈인 백두대간의 대관령 부근은 우리나라에서 눈이 많이 내리는 곳에 속한다. 특히 고원 구릉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한국의 지붕 마을’이라고 불리는 횡계 일대는 겨울이면 1~3m에 이르는 많은 눈이 내려 마을이 고립되기 일쑤였다. 한겨울 동해에서 북동풍이 불어오면 이곳은 어김없이 대설주의보가 발령되고 마을은 고요한 적막 속에 잠기게 된다. 그리고 밤사이 황홀한 설국(雪國)이 세워진다.
대관령 고원목장의 눈 덮인 능선과 파란 하늘이 만든 조화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린다. 얄망얄망한 언덕으로 이루어진 하얀 고원목장에 흰 눈 뒤집어쓰고 외롭게 서있는 소나무들…. 이런 풍경은 도시에선 쉽게 경험하기 힘든 설경임이 틀림없다. 오늘을 위해 미리 준비해온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 시디를 넣고 볼륨을 높인다. 사랑했던 임은 떠나고 아련한 추억을 그리는 그 애잔한 사랑을 위해. ‘눈 속에서 그녀의 발자국을 찾아다녔네 / 그녀가 나의 팔에 기대어 푸른 초원을 거닐었던 그 곳 / 나는 눈 속에 헛되어 찾아 헤맨다네…’ 역시 언제나 네번째 곡 ‘동결’의 가사가 더 가슴에 와 닿는 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눈 덮인 목장 풍경 때문이리라. 이곳도 지난 계절엔 푸른 초원이 아니었던가.
또 다른 추억 하나. 몇 년 전 겨울 황병산에서 대관령으로 이어지는 깊은 눈속에서 스키투어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 유럽의 알프스에 뒤지지 않는 눈꽃을 마음껏 즐겼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기만 하다. 요즘은 그곳이 해병대원들의 스키기동훈련장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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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관령눈꽃축제 중 농악대가 황병산 사냥놀이를 재현하고 있다. |
횡계는 눈꽃축제가 한창이다. 부모의 손을 잡고 축제 행사장에 들른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이벤트는 단연 소발구와 타기. 눈 많은 산간마을에서 한겨울 땔감 같이 무거운 물건을 나를 때 소를 이용해 끌게 하는 소발구는 30대 후반 이상이라면 누구나 기억해 낼 추억의 소달구지와 비슷하다. 스르륵 눈밭을 미끄러지는 소발구를 타면 부모들은 덜커덩거리던 소달구지를 추억하느라 미소를 머금게 된다. 생전 처음 신기한 경험을 한 아이들은 놀이동산에서 바이킹이나 청룡열차 타는 것 못지않게 즐거운 표정이다. 사람이 끄는 인발구 역시 밤이 이슥하도록 인기있는 놀이 도구.
이런 수많은 볼거리와 이벤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황병산 사냥놀이’다. 이 마을 장정들은 몇 십 년 전만 해도 눈이 처마 밑까지 쌓여있는 깊은 겨울이면 사냥도구인 창과 설피, 전통스키인 썰매 등을 준비해 황병산으로 사냥을 나갔다.
썰매를 타고 눈 덮인 산속을 뒤지다가 멧돼지를 발견하면 몰이꾼은 멧돼지를 몰고 창수(槍手)들은 길목을 지킨다. 멧돼지가 눈속에서 이러저리 몰리다가 창수쪽으로 도망하면 창수 중에서 가장 날랜 사람이 ‘선창이요’ 하며 멧돼지를 찌른다. 곧 ‘재창’과 ‘삼창’이 이어지고 멧돼지는 더운 피를 흘리며 눈밭에 쓰러진다. 사냥에서 잡은 멧돼지를 둘러메고 마을로 내려온 장정들은 서낭당에 멧돼지 머리를 올려놓고 주민들과 함께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제사가 끝나면 주민들이 한데 어울려 잡아온 멧돼지 고기와 술을 마련해 흥겹게 노는데, 이때 ‘사냥노래’도 곁들여진다.
‘눈이 많이 내렸으니 산짐승이나 잡으러 가세 에헤야 얼럴럴 상사디야 / 너도 가고 나도 가세 손에 손에 창을 들고 에헤야 얼럴럴 상사디야 / 이 산 저 산 살피면서 황병산에 올라가세 에헤야 얼럴럴 상사디야’
대관령 가는 길의 황태덕장은 눈꽃마을의 꿈과 낭만이 익어가는 곳이다. 횡계 마을 일대와 대관령 가는 길목의 20여 개의 덕장에서는 오늘도 줄줄이 매달린 명태가 대관령 눈보라 속에서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이곳은 고도가 높고 기온차가 심해 남한에서 최초로 황태덕장이 형성된 곳이다. 한국전쟁 직후 함경도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고향의 기후조건과 비슷한 대관령에 덕장을 세워 황태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통 연간 200만 마리의 황태를 생산해왔지만 수년간 명태 어획량이 급감해 요즘엔 신통치 않다고 한다. 최근 판매된 명태가격이 20마리 한 상자에 5만 원을 넘는다니 금 1돈쭝 가격보다 비싼 실정이다. 그래서 덕장에 거는 명태는 주로 오호츠크해와 베링해 등에서 잡히는 원양태를 쓴다.
평창 겨울 여행의 마무리인 대관령 고갯마루. 몸을 날려버릴 듯한 강풍을 등지니 한달음에 해발 832m의 정상까지 밀려 올라간다. 동쪽을 바라본다. 날이 맑으면 유서 깊은 고을 강릉 시가지와 푸른 동해를 한꺼번에 볼 수 있으련만. 흐린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바람도 갈수록 세차게 분다. 사위는 이내 깜깜해 진다.
서울로 돌아온 다음날, 영동지방에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흘간 흐리기만 하고 한 번도 눈발을 뿌리지 않더니…. 떠나온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또 그리워진다. 그 하얀 설국이.
글·사진 민병준 mbjbud@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