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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재 구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고문
금강산을 다녀왔습니다.
▲구룡폭포 가는 길에서 젊은 기행단과 함께
나의 금강산 기행에 대해서 당국의 제한은 당연한 절차(?)이기도 하겠지만 우리 ‘범민련’ 실무자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이루어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매불망 못내 그리워하던 조국의 이북 땅을 극히 제한된 지역과 조건이기는 하지만 내 발로 딛게 되었고 내 손바닥으로 조국의 이북 땅 흙을 어루만져 보았으며 조국의 이북 동포, 더구나 혈기방자한 청년들을 만나 쉬는 품에 목소리도 듣고 손도 잡아보기도 했습니다. 정말 눈물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잡는 나도 눈물이 그렁, 잡히는 북녘 청년의 눈망울에서도 그렁, 얼굴은 웃으며 “반갑습니다.”라는 말로 가슴에 찬 그리움의 소이를 말없이 주고받기만 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 조선 사람이 손님을 만나면 언제나 했던 말이 당장 서로 나올 듯 했습니다. “저의 집에서 하룻밤 묵어가시죠.” “그렇게 할까요.”라는 소리, 그 소리를 차마 못하는 안타까움. 이것이 분단의 현실인가 봅니다.
아무튼 금강산 기행은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정말 벅찬 가슴으로 다녀왔습니다.
설레는 밤을 새우고
아내도 조국의 이북 땅을 밟게 된다는 사실이 벅차서 그런지 5시 30분으로 맞추어 놓은 자명소리도 나기 전에 깨서 짐을 다시 챙겼습니다. 그리고 간단한 요기를 하고 나섰습니다. 우리는 수원에 살기 때문에 서울 동국대학교 집합소에 가려면 2시간 전에 출발해야 합니다. 거기 학생회관에는 지방에서 전날 저녁에 올라온 여러 동지들이 숙박을 하고 있었습니다. 6시에 좌석버스를 타고 양재동으로, 거기에서 택시를 타고 동국대학교로, 집합소에 도착했더니 7시 반이 좀 못되었습니다.
8시에 소강당에 모여 여행 예정을 설명 받고 대학교 후문으로 나가 차를 탔는데 발차시간이 약간 지체되어 9시 반 쯤에 출발했습니다.
대관령을 넘어 속초를 거쳐 거진, 대진을 지나가는 동안 동해의 쪽빛 바다는 분단을 모르는 듯 남북으로 아득히 멀리 수평선을 긋고 누어있는데 평화로운 바닷가에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철조망이 쳐있고 총구를 드러낼 초소를 촘촘히 두고 있어서 분단의 아픔이 가슴에 파고들었습니다.
차는 아주 순조로이 잘 갔습니다. 중간에 두어 군데 휴게소에서 쉬고 도시락을 먹고 오후 3시 좀 넘어서 남측출입사무소에 도착하여 남방한계선 통과검사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는 중형 경내버스에 갈아탔습니다. 거기에는 현대아산에서 나온 인상 좋고 친절한 젊은 청년 안내원이 있어서 주변 경관을 해설해주었습니다. 특히 이곳은 서로 군사시설을 두고 대치하고 있는 곳이라서 차량 이동하는 중 카메라 사용을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할 때 지금 우리가 예민한 지역에 들어왔음을 피부로 느끼게 했습니다.
이윽고 비무장지대에 들어갔습니다. 말이 비무장지대이지 서로의 관할지역은 곳곳에 무장되어있고 정전협정은 빈문서로 된지 오래인 것 같습니다. 북은 안 있어 보아서 모르지만 이남의 미제는 국제협정을 깨뜨리기에 이골이 난 자들이라 제 놈들 마음대로입니다. 핵무기를 비롯한 신식무기를 이남 땅에 들여놓는 것을 금지한 정전협정은 미제는 당장 정전 바로 그 해로 파탄내고 각 종 미사일과 핵탄두를 잔뜩 들여놓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내 나라 땅을 갈라놓고 서로 총대를 겨누고 대치하고 있는 현실, 그것도 미제의 작전통수권에 따라, 그래서 미제의 침략군의 지휘에 따라 휴전선 남쪽에서 이북 동포들의 가슴을 겨냥하고 있는 한심한 우리 이남의 군대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힙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주변 경관을 볼 틈도 없이 북측 한계선에 도달하고 북측출입사무소에 이르러 짐을 가지고 제 나라 땅에서 입국수속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북 당국도 ‘범민련’ 남측본부 성원이라는 것을 알아선지 간단히 끝내고 이미 이북 지경으로 넘어가 있는 경내버스에 짐을 다시 싣고 올라탔습니다.
북측출입사무소에 도착하고부터는 얼굴이 볕에 까맣게 탄 인민군 병사가 전사복을 입고 빵빵한 독특한 군모를 쓰고 손에 자그마한 신호용 붉은 기를 들고 부동자세로 서서 날카로운 눈초리로 경계하고 있는 모습은 조금도 틈을 주지 않는 이북의 자위의 모습이라고 생각나게 했습니다.
이남의 호남평야쯤은 못되지만 그래도 산이 저 멀리 보이는 고성평야, 이남의 고성평야와 연이어 있다고 하는 이 평야는 상당히 넓었습니다. 좀 낮은 곳은 논이고 좀 높은 곳은 옥수수, 수수 그리고 여러 가지 남새가 자라고 있어서 정말로 평화로워서 방금 지나온 살벌한 지대를 잊게 해주었습니다. 농사란 참 평화롭지요. 이런 평화를 깨뜨리는 것이 전쟁이지요. 그래서 농민은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자를 증오합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침략자와 착취자를 몰아내는 싸움에서 평화의 농민이 평화를 위해 목숨을 내대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이가 봉건조선 말엽에 일어난 평서농민전쟁(이른바 홍경래란)이 그렇고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고 봉건제도를 타도하기 위해 궐기한 갑오농민전쟁(이른바 동학란)이 그렇습니다.
군사지역이라서 사진을 못 찍어서 유감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상념 속에서 차는 순조롭게 달려서 안내원의 해설을 들으면서 지내다가 차는 목적지 온정리 금강산특구 내의 주차장에 도달했습니다.
온정리 ?금강산특구?의 첫날 밤
주차장에 내려 북편 일대를 바라보았더니 거기에 거연히 서 있는 바위바람벽으로 된 거대한 산이 나를 압도했습니다. 금강산이었습니다. 휴전선을 넘어 내내 오는 동안 도로주변에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바위산, 사암질의 자그마한 산이 이곳에서는 마치 땅을 밀고 우뚝 키대로 선 것 같았습니다.
헐뜯기 좋아하는 남녘 사람들이 사암질 산의 버럭바위를 보고 산이 헐벗었다는 둥, 이북은 연료가 없어서 산의 나무를 베어 때다보니 산이 벌거숭이가 되었다는 둥 입에 침이 마를 사이가 없지요.
아무튼 주차장에서 내려 조별로 모여 조장이 정해주는 구룡마을 야영컨테이너를 배정받고 짐을 풀고 다시 나와 조별로 집합했습니다.
▲천선대
식당에서 식사가 늦으면 다음 계획인 예술공연을 볼 수 없게 된다는 안내원의 소리를 듣고 그때서야 우르르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뷔페식당인데 가지가지 찬이 맛깔스럽게 차려져 있어서 주로 나물반찬으로 해서 조금씩 들어서 한 접시 담아 아내와 더불어 식탁으로 왔습니다. 그리곤 호박전을 먼저 입에 넣고 씹었더니 이남 땅에서는 이미 잊어버린 풍미가 혀와 코로 옛날 할머니와 어머니의 냄새로 되어 그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습니다. 좀체 눈물이 없는 내가 떠오르는 할머니 어머니의 모습으로 해서 음식을 앞에 놓고 목이 막혔습니다.
“아! 바로 할머니와 어머니가 내 조국이구나.”
배가 많이 고팠습니다. 차타고 오는 여행도 힘이 든 것 같습니다. 다음 계획을 위하여 열심히 먹고 여기저기 돌아보았습니다.
식당과 현관 그리고 선물매장의 여성 봉사원, 남성 봉사원 모두 심장 위에는 김일성 주석님의 휘장을 붙이고 있었습니다. 실내의 배경음악은 이북 공화국 노래로 ‘반갑습니다.’의 노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감격에 차서 노래 소리도 귀에 잘 들리지 않다가 이북 동포가 서있고 ‘반갑습니다.’는 노래를 듣고서야 안내원 동포들을 새삼 바라다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하면서,
“이북 동포 젊은이, 반갑습니다.”
그리곤 와락 잡아당겨 끌어안았습니다. 그 사람도 나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아! 동포는 누구나 이처럼 끌어안고 끌어안기고 하는구나. 마치 내 피가 그 젊은이에 흘러가고 그 젊은이의 피가 내게 흘러드는 것 같았습니다.
“동포 젊은이, 또 만납시다.”
“예, 건강하게 사십시오.”
다정히 손잡고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싶지만 예술단 공연장으로 가는 시간이 나의 등을 밀어 주차장으로 나오게 했습니다.
△금강산예술단가야금독주
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얼싸 안고 좋아 웃음이요,
절사 안고 좋아 눈물일세.
………
예술단 성원들의 전체 합창이 꼭지를 열었습니다.
노래는 그 뒤로 갈수록 관객들의 합쳐지는 목소리로 점점 장내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정다운 그 손목 잡아 봅시다.
조국 위한 마음 뜨거우니
통일잔치날도 멀지 않네
………
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애국의 더운피 합쳐 갑시다.
해와 별이 좋아 행복이요,
어허허 어허허허 늴리리야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나중에는 전원이 일어나 반가움의 마음이 목소리와 더불어 합창으로 되어 금강산 하늘에 울려 퍼졌습니다. 예술단 공연은 공연을 하는 배우와 무대 아래에 있는 관객이 하나로 된 마당으로 화하고 말았습니다. 일이 이 지경으로 되자 공연하는 배우들의 눈물이 조명에 비쳐 빤짝였고 곳곳에서 눈물을 훔치는 손길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정말로 감동적인 공연과 관람이었습니다.
금강산의 으스름달밤 공연을 마치고 경내버스 를 타고 야영장인 구룡마을로 돌아와 취침시간까지 자유시간을 받았습니다. 배정받은 컨테이너숙소에 들어가 가벼운 복장으로 고쳐 입고 다시 나왔습니다. 이규재 의장 동지와 류금숙 동지의 부군이신 소 선생님과 한 방을 쓰게 되었는데 두 분은 이미 술을 받아놓고 방에서 일을 벌일 작정이었습니다. 의장 동지는 전체의 책임이라 정 위치에 있어야 할 것이고 소 선생님은 술을 좋아하시고 연로하셔서 그냥 방에 계실 것 같애 나만 혼자 나왔습니다.
그래서 두리번거리다가 이튿날 아침 식사장으로 정해진 ‘온정각’ 식당 쪽으로 어슬렁거리며 다가갔더니 북측에서 경영하는 술과 안주를 파는 매점이 있고 이미 잘 알고 있는 술꾼들이 바깥식탁에 가득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함께 온 신인식 선생도 있고 해서 자연스레 동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인식 선생은 70년대 초 경북대학교 의예과 학생일 때 나에게 통계학을 배웠고 유신체제 때 이를 반대해서 의과대학에서 동기동창인 고 현승효와 함께 지하 동아리를 조직하여 활동했던 천금 같은 나의 제자입니다. 현승효는 지하운동을 하다가 노출되어 강제입영을 당하여 군대에서 갖은 학대를 받다가 제대 무렵에 독살로 보아지는 의문사를 당했습니다.
마침 신 선생이 있어서 주변의 젊은 동지들과 어울려 술자리 한 자리가 좋이 이루어졌습니다.
몇 순배 돌다가 어떤 중로의 신사가 술이 거나한 모습으로 왔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몇 번 본 현대아산의 사장인 김운규 사장님이었습니다. 김운규 선생의 의미 있는 말이 관심을 끌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나 여러 선생님들이 하는 일이나 다 하나의 길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들은 민족적으로 하는 운동이고 우리는 경제적으로 하는 운동이지만 조국통일에서는 같은 길을 가고 있지요.”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북측 여성 봉사대원들의 날렵하고 마음으로부터 울어나는 가식 없는 친절은 자본주의사회의 배금사상으로부터 나오는 친절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습니다. 마치 손님으로 방문한 집에서 그 집 딸들이 손님을 보살피는 것과 같다고 할까, 그래서 어느 집 규수의 범절 괜찮더라고 하는 말이 나올 듯 한 자본주의 공해가 전혀 없는 무공해 산소 같은 아가씨들이었습니다. 사람이 돈을 알게 되면 비굴해지고 그래서 가식이 생겨 빤히 속보이는 짓이 나올 수 있습니다. 당당한 마음으로 제 집에 찾아온 손님으로 마음을 열고 하는 접대, 이것이야 말로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밤은 깊어갔습니다. 매점은 11시에 폐점이지만 봉사대의 우리에 대한 헌신성으로 노동을 연장하고 자정까지 열어주었습니다. 자정이 되자 우리 술꾼들은 조용히 그리고 기분 좋게 숙소로 향했습니다. 상현의 반달은 서쪽으로 훨씬 기울었습니다. 하늘에는 엷은 구름과 안개가 끼어 달은 붉은 빛을 띠고 희미했습니다.
숙소에 돌아오니 마당에는 이 밤이 아까운지 곳곳에서 또레또레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작은 소리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공기는 그야말로 청량하고 으스름 달빛에 드러내고 있는 바위산의 모습은 마치 우리들을 지켜주는 사천왕과 그 졸개인 듯 보였습니다. 이들이 조국을 지키는 천병(天兵)이라면 남과 북의 전 민족과 더불어 미제 침략군을 박살내고 통일의 문을 활짝 열 수 있을 것을…… 그날은 그리 멀지 않을 것입니다.
구룡폭포로 가면서
2박3일 중 가운데 날입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났습니다. 양치를 하고 구룡마을 마당에 모였습니다.
▲구룡폭포 가는 길에서 바라본 절경
오늘 행정의 설명을 듣고 어제 저녁 술 마시던 매점 바로 옆 큰 건물 ‘온정각’ 식당으로 갔습니다. 어제 ‘금강산호텔’ 식당에서 맛을 안지라 이번에는 채소를 주로 하여 들어서 한 접시 가득히 가지고 왔는데 그 조리가 역시 남쪽 사람들이 했는지 어제와 같은 맛은 덜 하고 다만 무공해 화학비료를 쓰지 안해선지 신선한 맛으로 식사를 잘 했습니다.
다시 숙소로 가서 간단한 산행의 차비를 하고 자기에게 차례진 경내버스를 탔습니다.
이제부터 산 안으로 들어갑니다. 온정리 금강산특구에서 그 한가운데에 있는 건물의 규모는 상당한데 공사를 완성하지 않고 그냥 시커멓게 방치하고 있는 건물이 있었습니다. 현대아산 측의 안내원의 설명으로는 그 건물이 ‘김정숙휴양소’라고 했습니다. 일본이 오래전에 금강산에 관광투자를 한다면서 호텔을 짓게 되었는데 공사를 하다가 조ㆍ일 사이에 외교문제가 심각해지자 (왜놈다운 근성이 발휘했는지-이것은 내 말입니다.) 공사를 중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정숙휴양소’라는 좋은 이름을 가진 호텔을 그대로 시커멓게 방치할 수 없어 이북 공화국에서
이를 맡기로 했고 곧 공사를 계속하기로 했답니다.‘김정숙휴양소’라는 이름의 ‘김정숙’은 17살의 여성으로 항일빨치산에 들어와 수많은 격전과 정치공작을 겪어내고 전공을 세워 빨치산의 여장군으로 되었고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에서 친위전사로 활동하시고 김일성 장군을 온갖 정성을 다해 모신 항일의 여성 영웅이시며, 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어머니이시고 이북 인민들은 김정숙 장군이라 부르며 앙모하고 있습니다.
△구룡폭포
금강산의 소나무는 거의가 적송입니다. 백두대간의 소나무는 적송이 대부분인데 이남에는 하도 벌목을 많이 해서 거의 없고 아주 깊은 산에만 있답니다. 그러나 금강산에는 보이는 소나무가 모두 적송이었습니다.
금강산의 소나무는 잔가지가 없답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쌓이기에 그 무게로 너무 잔가지가 울창하면 가지는 부러지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죽죽 곧은 잔가지가 없는 금강산 소나무를 설송(雪松)이라고도 한답니다.
이러한 말은 이북 청년들의 봉사대원이 해설하는 데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길은 계곡에 따라 오른편에 나 있는데 계곡물과는 좀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길가에 좌판을 벌이고 간단한 음료수와 선물용품을 매대에 올려놓고 있는 여성 봉사대원이 있고 곁에는 날렵하게 생긴 청년이 있습니다. 둘은 물건 파는 데에 그리 애달아하는 모양은 아니지만 고객에게는 아주 친절했습니다. 이들은 이남 땅에서 통일운동을 하는 단체인 ‘범민련’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지 유달리 반가운 눈을 하고,
“선생님들, 반갑습니다.”
“예, 수고합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자연 걸음을 잠시 머물고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통일운동하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통일운동한다고 금강산 오는 것도 어려워 못 오다가 이제야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고생은 하지만 투쟁해서 얻는 보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 동안 세월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 6.15공동선언 덕입니다.”
“예, 그렇지요.”
“그럼 많이 파세요. 올라가겠습니다.”
대개 이런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산을 우러러보니 그 경관은 새로웠습니다. 아하! 감탄사가 저절로 나옵니다. 어느 사이 걸음은 산으로 깊이 들었고 길도 가풀막 길에 들어섰습니다. 보이는 경관이 아름다워 놀라 절로 나오는 감탄이었습니다. 이러한 감탄은 점점 잦아졌고 놀라움은 더해 나갔습니다.
나도 산을 많이 다녔습니다. 이남 땅의 아름답다고 하는 산은 거의 다 다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계절마다 다녀서 몇 번을 다녔는지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경관도 많아 보았습니다.
그래서 금강산이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고 그냥 경관이 빼어나게 좋은 데가 있어서 그렇겠지 라고만 생각하곤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곳 금강산을 와서 보고는 그 떳떳 미적지근한 생각이 그만 다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이건 산길을 가려면 발밑의 길을 봅니다. 그러다가 산을 우러러봅니다. 그러면 대개 좀 전에 본 경관이 연장되어 나옵니다. 골짝의 굽이를 돌거나 가파르게 오르거나 또는 내리거나 했을 때 새로운 경관이 펼쳐져, 아! 아름답구나! 라고 감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강산은 그 차원을 넘는 것입니다. 발밑을 보면서 산길을 가다가 고개를 들 때마다 새로운 경관의 아름다움으로 아하! 라고 탄식을 내쏟아야 했습니다.
산천경계의 아름다움으로 금강산을 제일로 친다고 하는데 세상에서 이런 아름다움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금강산 이상으로 아름다운 산은 남녘땅에선 없다고 이미 알고 있지만
북녘 땅에서도 있다는 말을 들어본 즉은 없습니다. 아마 세계에서도 이처럼 아름다운 산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나라 밖에 산은 나가보지 못해서 단정해서 말은 못하지만 정말 있다는 말은 듣진 못했습니다.이러한 산이 우리나라에게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나는 이번 금강산 기행으로 애국심이 곱절로 생기게 되었습니다.
보존의 아름다움 아무리 아름다운 산이라도 잘 보존하지 못하고 훼손한다면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산의 아름다움은 산세, 지세의 아름다움에다가 숲의 아름다움과 물의 아름다움 그리고 환경의 아름다움, 이 4가지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이 중에서 지세 또는 산세는 어쩌지는 못하지만 나머지 3가지, 즉 숲, 물, 환경은 사람들 손에 달렸습니다. 산세가 아무리 빼어나도 도로를 마구 내어 산허리를 마구 자르거나 골프장 같은 것을 멋대로 닦아 산세를 파괴한다면 이것도 사람에게 달려 있을 수 있습니다. 숲과 물 그리고 환경은 전적으로 사람의 작은 부주의에서 또는 무관심, 도덕심 결손에 따라 훼손될 수 있습니다.
자본을 산에 투자해서 이윤을 챙기는 데만 생각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자기 땅에서 기업을 하는 데에 국가가 마구 간섭을 못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에 땅 가진 자들이 위락시설이나 골프장을 마구 내고 숲을 해치고 물을 해칩니다. 그래서 공해가 심각하고 산의 경관은 근본적으로 파괴되고 맙니다.
그리고 내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도덕심을 상실한 행동을 마구 합니다. 계곡에 쓰레기를 마구 버리고 대소변을 마구 보고 가래침을 뱉고 하면 산은 더러워지고 냄새가 등천을 하며 파리가 들끓습니다.
금강산은 철광석을 비롯한 비철금속자원의 보고라고 합니다. 질 좋은 방사성물질도 풍부하게 부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들 광물질을 채광한다고 개발하면 금강산의 산세는 달라지고 그 결과 아름다운 경관은 파괴됩니다. 금강산에는 어떤 광산도 없답니다. 일제 때 왜놈들이 금을 그리고 중석을 캐내기 위해 개발한 광산도 김일성 주석님의 금강산 보존정책으로 모두 없앴답니다.
숲도 금강산의 동식물도 모두 천연기념물로 하여 철저히 보호되고 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보다시피 금강산 전체를 금연지구로 만들어 산불예방을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쓰레기통을 아예
두지 않고 모든 쓰레기는 가지고 내려가기, 가래침도 뱉지 않기, 화장실(북측 말로 위생실)도 지극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있는 위생실도 유료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정리 마을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냇물을 그대로 마시고 있답니다. 보다시피 길바닥에는 오물 하나도 없고 계곡에는 병 또는 유리조각 하나 없는 청결한 산이었습니다.아무리 단속을 하고 엄한 벌로 다스려도 사람들 모두가 지키려는 마음이 없으면 그 단속은 소용없게 됩니다. 그것은 단속이 아니라 교양으로, 나아가서 사상의식이 확립됨으로써 실천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북 공화국은 사회주의나라이고 더구나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원리로 철저히 관철되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구호를 실천하는 집단주의가 관철되고 있는 나라입니다.
아름다운 금강산이 이처럼 철저히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은 김일성 주석님이 영도하는 조선로동당의 사람중심의 정책의 구현이며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구호 아래 인민의 집단주의적 도덕의 실천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봉사대원들과의 대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것을 더욱 빛내고 있는 이북 동포의 집단주의적 도덕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면서 금수다리를 지나 또 만경다리를 건너 금강산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금강문’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는 조그마한 매대를 놓고 기념품과 사탕과 과자, 음료수를 팔고 있는 남녀 한 조로된 봉사대원을 만났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봉사대 선생, 참으로 반갑습니다. 우리는 남과 북 그리고 해외의 조선민족이 민족대단결을 토대로 해서 3자 연합으로 이루어진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의 남측본부 성원들입니다. 우리 ‘범민련’을 알고 있습니까.”
△금강산의 비경
이렇게 인사를 텄고 나와 내 곁에 있는 우리 일행들과 한참 경관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 저 멀리 보이는 세존봉에서 흘러내려오는 연봉을 배경으로 해서 사진도 찍고 음료수도 사 마시고 땀을 식혔습니다.
바위가 포개어져 마름모꼴의 트인 바위굴이 나타났습니다. ‘금강문’이랍니다. 이곳을 지나야 금강산이랍니다. 그 굴을 지나자 바로 아래에 흔들다리가 있었습니다. 거기부터 발아래에 연두색 유리와 같은 물결과 그것이 한 곳에 잠깐 머물러 옥색 담수가 된 ‘청’ 하고 소리가 날 듯 한데 그 맑은 물에 훨떡 벗고 그냥 물속에 들어가고픈 생각을 주저앉히고 앞으로 나아갔더니 계곡 한가운데 평지바위가 가로 놓여 있고 거기에는 청년봉사대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우리 성원 중 몇 사람이 그들과 담소를 하고 있으면서 그들이 나를 보자 불렀습니다.
나는 그들 곁으로 갔습니다.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나를 소개했습니다.
“이 선생님은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교수였습니다. 그러다가 ‘남민전’ 사건으로 사형을 받았는데 세계가 알아주는 유명한 수학자라 세계 수학자들이 연판장을 만들어 항의해서 감형되어 무기징역을 살았습니다. 10년을 살고 가석방되었는데 ‘구국전위’사건으로 또 무기징역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5년 살고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쌍무기를 가지고 있는 통일운동의 지도자입니다.”
라고 장황하게 소개했습니다.
두 봉사대원 중 한 사람은 나이가 좀 들어보였는데 아마 이 구룡폭코스의 책임자인 듯 했습니다. 서로 반갑다는 인사를 마음으로부터 울어나게 했지만 예민한 말은 서로 삼갔으며 말없는 가운데 동포로서의 이해와 우리민족끼리 통일이라는 데서 서로 꼭 틈이 맞는 느낌을 주고받기만 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번 우리들은 금강산의 경관을 관광하는 것도 목적이지만 그밖에 60년이나 갈라져 서로 만나보지도 못했던 이북 동포들이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남과 북 그리고 해외동포가 모두 힘을 합쳐 통일운동을 열심히 해서 마음대로 오고가고 하는 하나의 조국을 이루어냅시다.”
“그럼요.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치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선생님 말씀대로 열심히 통일운동을 하겠습니다.”
제법 시간을 지내면서 대화하는 사이에 그의 말투는 어르신으로 되고 나는 잘 아는 동내 청년으로 착각하게 만들 지경이 되었습니다.
나는 다시 목적지 구룡폭포로 향해 일어나면서 말했습니다.
“옛날 내가 소년 때, 남조선단독선거를 반대하여 궐기한 2.7구국투쟁 후, 남조선인민유격대의 전신인 지방 야산대에 있을 때 우리 동지들은 서로 ‘동무’라고 불렀지. 이제 봉사대원인 청년을 만나니 그때 우리들이 불렀고 지금 여러분 사이에서 부르는 그 ‘동무’라는 호칭을 부르고 싶소. 어디 그렇게 불러봅시다.”
그는 몹시 송구한 듯 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봉사원 동무, 그럼 또 만납시다. 김정일 장군님을 잘 받드시고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통일의 그날을 보시도록 건강하게 오래 사십시오.”
나는 악수를 청하면서 그를 바라보았으나 그의 얼굴이 희미했습니다. 내 눈망울에 눈물이 그득하게 고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좀 속도를 내었습니다. 다리를 하나 건너 담수가 연달은 연주담을 보면서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금강산을 보호하고 부정의를 징벌하기 위해 이 구룡연에 9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함. 또 하나의 다리를 건너자 길 앞에 ‘관폭정’이라는 정자가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우리 일행이 있었고 사진을 찍고 찍어주곤 하면서 금강산의 경관에 흠뻑 취하고 있었습니다.
가맣게 높은 곳에서 수천년을 조금도 쉬지 않고 연주담으로 내려꽂히는 폭포가 시원한 물소리를 내면서 여전히 물기둥이 되어 아래 담수에 발을 담고 서 있었습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그래서 등정은 여기에서 마쳐야 했습니다. 구룡폭포 위에 있는 폭포의 수원인 상팔담에 가보는 일은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급히 사진을 몇 장 찍고 내려왔습니다. 원래 오후 1시까지는 ‘목란관’에서 점심을 마쳐야 하는데 ‘목란관’에 도착하니 1시 반이 다 되었습니다. 오후에는 온천욕이나 삼일포ㆍ해금강 코스의 관광인데 너무 늦어 아예 포기하고 ‘목란관’에서 냉면을 시켜 먹곤 퍼져 예쁘장한 여성 봉사원과 나의 아내 사이에 재미있는 대화가 있었습니다.
나의 감옥살이 때 우리 가족이 친지, 일가친척 모든 사람으로부터 소외되어 살던 때를 이야기하자 그 봉사원은 눈에 눈물을 그렁하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아내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겼습니다. 그런 고난 속에서도 우리 가족은 건강하게 지냈고 아이들 모두 대학까지 졸업하고 모두 다 사회에서 당당하게 일하면서 살고 있으며 막내는 ??민족 21??이라는 통일운동 잡지의 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소녀 봉사대원은 말했습니다.
“선생님의 소망은 우리민족 전체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우리민족 전체가 선생님의 소망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아무쪼록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기 바랍니다. 통일은 바로 눈앞에 왔습니다. 건강하신 몸으로 통일의 그날을 맞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이 ‘목란관’의 여성 봉사원과 하직의 악수를 나누고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마지막 버스를 탔는데 신계사 앞에서 차를 세워 신계사를 방문했습니다.
신계사는 6.25전쟁 때 미군이 불 질러 태웠는데 이북의 불교단체와 이남의 조계종불교단체가 합의하여 사찰을 복원하기로 했습니다. 지금 대웅전을 지어 부처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아직 단청도 되지 않았지만 부속건물 14동도 연이어 복원한다고 했습니다.
대웅전을 보고 절을 경비하는 봉사대원들이 있는 숙소에 가서 그들과 잠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통일운동을 서로 열심히 하자는 다짐을 하는 등 환담을 나눈 다음 시간이 없어 더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을 안고 버스를 타고 ‘온정각’ 주차장으로 내려왔습니다. 온천욕도 삼일포ㆍ해금강도 다 떠난 뒤였습니다.
그래서 ‘온정각’ 선물매점에서 이것저것 돌아보다가 간단히 땀을 씻고 4시 반부터 시작하는 ‘평양모란봉교예단’ 공연을 기다렸습니다.
평양모란봉교예단 공연 오후 2시 반 정각에 평양교예단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웅장한 ‘김정일 장군의 노래’ 반주를 배경음악으로 해서 교예단 전원이 나와 인사를 했습니다.
이북의 교예는 일제 때 곡마단의 곡예가 아닌 곡예를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켜 인간의 능력을 예술적 재능과 그 훈련과 더불어 새로이 이북에서 창조한 하나의 예술적 장르인 것입니다.
일제 때 가난한 농민이 자식을 키울 힘이 없어 이리저리 자식을 남의 집이나 곡마단에 주어 보냈습니다. 그 어린 것이 굶주림과 학대를 받으면서 재주를 익혀 곡예를 배웠습니다. 때로는 관객들의 눈을 속이는 요술도 한 목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곡예를 옛날 봉건시대의 사당들의 재주와 비견했고 곡예를 천한 재주로 멸시했습니다.
그러자 8.15해방을 맞아 봉건적 잔재가 청산되고 사람이 사람을 직업이나 신분에 따라 천시하는 일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직업을 차별해서 어떤 직업을 천시한다는 것을 금지한다고 해서 그냥 그 직업이 존중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직업이 존중되려면 그 직업이 인민들에게 고상한 풍모로 보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평양모란봉교예단
이들의 곡예는 체육과 결합되어 이론화되었으며 음악과 연극 등 주변 예술과 결합되면서 그것은 마침내 일제 때 우리들이 보던 곡예하고는 전혀 다른 교예라는 예술로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지 높은 교예를 보고 다른 나라의 서커스단은 모두 이를 배워 그들도 곡예를 예술적 경지로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지금은 러시아에서도, 중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동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도 교예단이 조직되고 모두 다 예술로 승화시켜 예술의 새로운 장르로 창조되고 있습니다.
조선은 사람을 가장 중히 하는 나라입니다. 과거의 인명을 경시하던 곡예가 아니라 교예는 철저한 안전시설과 안전성의 확보가 최우선시되고 있습니다.
김일성 주석님의 지도로 창조된 교예의 예술을 보고 조선의 젊은이들의 교예의 지경을 텔레비전이나 영화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손에 잡힐 듯 한 거리에 관람하게 되어 이것만으로도 이번 관광은 온 값을 톡톡히 받는 셈입니다. 교예 자체에 대해서는 영화나 텔레비전으로 본 사람이 많고 내가 그것을 평가할 인식의 양도 모자라고 해서 말할 바가 아닌 것 같습니다.
교예공연을 관람하는 동안 내내 박수와 탄성으로 장내를 긴장시켰습니다. 보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모두 마음이 하나로 묶여 있는 듯 했습니다. 막간에 익살배우가 나와 관람자 중에서 한 사람을 이끌어내어 함께한 익살은 ‘빈민련’의 성원이라서 그런지 포장마차 주인답게 재치가 넘쳤습니다.
공연이 끝나도 공연을 하는 교예배우도 관람자도 서로 손을 잡고 떠나기가 아쉬운 듯 눈물을 글썽이면서 손을 놓을 줄 몰랐습니다.
“우리 다시 만나요.”
참으로 서로 목 매이는 모습이었습니다.
금강산 통일의 밤 교예공연 관람을 마치고 ‘온정각’의 식사를 끝낸 다음 오후 8시 반부터 구룡마을 가까이를 산책하다가 ‘정몽헌회장추모비’를 발견했습니다. 정몽헌 회장은 선친 정주영 회장의 그의 고향 이북 공화국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따라 조국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하는 일의 내용은 우리완 달라도 통일로 나아가는 목표는 같습니다. 민족적 정치적으로 하는 우리들의 통일운동이 피나는 탄압을 맞받아하는 일과 남과 북의 경제교류라는 방식으로 겨레를 아우르는 일을 하는 이들 두 부자의 일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통일대로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정주영 회장과 그 아들 정몽헌 회장의 남북경제교류의 운동을 무슨 ‘퍼주기’라면서 그리고 ‘외화불법유출’이라면서 ‘한나라당’과 통일운동을 적대시하고 법률조문을 글자로만 해석하는 소견 좁은 반동검사들의 구박은 정몽헌 회장으로 하여금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금강산특구일망정 이북 동포의 땅을 밟게 된 것은 이들의 노력의 대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경건하게 옷깃을 여미고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여 명복을 빌었습니다. 우리는 조국의 이남 땅을 강점하고 있는 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기어이 우리 대에 조국통일을 이룩할 것을 다짐하고 이때까지 두 부자분이 이룬 공적에 대해 기리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금강산 통일의 밤
특히 이규재 의장님의 “오늘은 범민련 15년의 역사를 새로 쓰는 날입니다.”라는 연설은 합법화가 되던 안 되던 이미 ‘범민련’은 명실 공히 존재함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하겠지요.
이어서
………
하나된 조국의 영광 기필코 이뤄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땅의 미국 놈 몰아내는 것
………
이라는 ‘범민련 찬가’, 우리의 의지를 금강산 하늘에서 미국 놈의 워싱턴으로 향해 외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본 행사를 마치고 뒤풀이 잔치로 모두 열심히 뛰고 굴렸습니다. 이어 ‘통일열차놀이’와 ‘대동놀이 한마당’으로 이어 갔습니다. ‘조국통일 만세! 범민련 만세’를 연호하면서 ‘금강산 통일의 밤’의 행사를 마쳤습니다. 범민련의 깃발은 시종일관 금강산의 밤하늘에 나부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