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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소리 우리가락 원문보기 글쓴이: 소리사랑
안숙선 명창,
그만큼 전 국민의 한결같은 사랑을 받은 예인도 드물 것입니다. 대중의 사랑과 관심을
먹고 산다는 정치인들은 권력이 다하면 추풍낙엽처럼 시들고, 연예인들은 각종 스캔들과
캐스팅 여하에 따라 인기가 들쭉날쭉하지만 안숙선 선생은 판소리와 가야금병창으로 50년
동안 변함없는 인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오롯이 한길을 걸어온 우리 시대의 명인인
그가 같은 길을 가는
이은관(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배뱅이굿 예능보유자),
강정숙(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보유자),
양승희(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보유자),
이생강(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오정숙(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
정인삼(한국농악보존회 이사장),
김덕수(한울림 단장),
이현자(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보유자후보),
정명숙(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 춤 보유자후보),
채상묵(우봉전통춤회장) 등
그동안 음악적 교감을 나눠온 총 300여명의 국악계 지인, 제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안숙선의 소리길 50년 아름다운 동행’ 무대를 마련한다.
특히 마지막 무대에서 안숙선 명창의 김덕수 명인과 교감을 나누는 설장구놀이는
다시보기 힘든 무대이다
공연 순서와 출연진
1. 가. 가야금 병창 - 강정숙, 안숙선 명창 문하생 100여명 출연
나. 대금산조 - 이생강
다. 가야금 산조 - 양승희
라. 판소리 - 안숙선 (쑥대머리), 박송희(흥보가), 김일구(적벽가)
마. 남도민요 - 안숙선 외 10명
2. 가. 대한민국의 혼 - 손베추춤 무용단. 뫄한뭐루 무예단
나. 배뱅이굿 - 이은관, 박성현, 전준희, 박준영, 김경배
다. 서도민요 - 한명순, 유지숙
마. 경기민요 - 이춘희, 임정란, 김혜란, 김금숙, 박순금, 임춘희, 김선란
3. 가. 한량무 - 임이조
나. 소고춤 - 정인삼
다. 태평무 - 이현자
라. 살풀이 - 정명숙
마. 승 무 - 채상묵
4. 가. 창극 - 심청가 “눈뜨는 대목” 심봉사 - 김일구, 심청이 - 안숙선
나. 판굿 - 안숙선, 김덕수 외 한울림 예술단
국악을 잘 모르는 분들도 이 사람은 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악인, 올해로 소리인생 50년째를 맞은 안숙선 명창! “국악계의 프리마돈나”라는 별칭은 50년 전 '남원의 애기 명창' 에서부터 시작됐다.
또한 김소희 명창을 비롯해 박귀희, 박봉술 등 내로라하는 스승들이 서로 탐낼 정도로 최고의 제자였지만 정작 본인은 스스로 만족한 공연이 없었다고 말하는 ‘안숙선 명창의 ‘아주 특별한 소리여행 동행(同行)’이 오는 12월11일 오후7시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성대히 열린다. 음악의 길을 열어준 스승의 모습을 뒤돌아보고, 그 길을 함께 가고 있는 국악계 중요무형문화재, 가족, 제자들과 더불어「국악 대축전」을 열고 소리인생 50년을 돌아본다.
안숙선 명창, 그만큼 전 국민의 한결같은 사랑을 받은 예인도 드물 것이다. 대중의 사랑과 관심을 먹고 산다는 정치인들은 권력이 다하면 추풍낙엽처럼 시들고, 연예인들은 각종 스캔들과 캐스팅 여하에 따라 인기가 들쭉날쭉하지만 안숙선 선생은 판소리와 가야금 산조와 병창으로 50년 동안 변함없는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오롯이 한길을 걸어온 우리시대의 명인인 그녀가 같은 길을 가는 강정숙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보유자), 양승희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보유자), 이생강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오정숙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 정인삼 (한국농악보존회 이사장), 김덕수 (한울림 예술단 단장), 이현자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예능보유자 후보), 정명숙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 춤 예능보유자 후보), 채상묵 (우봉 이매방 전통춤 회장), 유창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전수조교) 등 그동안 음악적 교감을 나눠온 총 300여명의 국악계 지인, 제자들과 함께 “소리인생 50년 안숙선 명창과 함께 떠나는 아주 특별한 소리여행 동행(同行)” 무대를 마련한다.
특히 마지막 무대에서 안숙선 명창과, 세계적인 사물놀이 명인 김덕수가 교감을 나누는 설장구놀이는 다시 보기 힘든 무대이다.
“누님은 무대 위에서 혼자 우주를 창조해 내는 분입니다. 평소 흠모하며 존경해 왔습니다. 이승에서 이런 좋은 인연은 다신 없을 겁니다.”
“아우님은 1년에 300∼400번이나 무대에 오르는 초인입니다. 국악을 세계 만방에 알린 선구자죠. 천생이 후배 가르치는 걸 좋아하고 즐기는 진정한 예인입니다.”
칭찬을 주고받는 게 예사롭지가 않다. 둘 다 올해 데뷔 5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 대표 예인이다.
명창 중의 명창으로 불리는 안숙선(58) 명창과, 사물놀이를 창안해 세계에 울려 퍼지게한 사단법인 한울림의 김덕수(55) 단장. 두 사람이 나란히 음악인생 50주년을 맞았다. 올 한해 기념공연을 많이 했지만 “프리마돈나 안숙선 명창의 국악대향연” 공연에 출연하는 김덕수 단장, 한국전쟁을 전후로 태어난 두 사람은 각각 7세, 5세 때인 1957년 예인의 길에 들어섰다.
1959년, 당시 유일한 전국 규모 전통예술축제인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처음 만난 이들은 이후 오누이 같은 정을 나누며 소리와 타악이라는 각기 다른 분야를 개척해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 공연순서
첫 무대를 여는 가야금병창은 안숙선 명창과 현재 같은 종목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강정숙 명창이 여는 축하무대로 안숙선 명창 제자 및 강정숙 명창 제자 100여명이 출연한다.
이어 안숙선 명창의 소리로 쑥대머리를 한다.
『쑥대머리 鬼神形容(구신형용) 寂寞獄房(적막옥방)으 찬 자리에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漢陽郎君(한양낭군) 보고지고…』목이 메어 작은 몸을 비틀어 짜는 소리에 관객들은 그저 감탄하고, 탄식할 뿐이다.
바늘이 가면 실이 가는 법... 그가 신명을 목으로 풀어내니... 지인들의 무대로 이생강 명인의 대금산조와 양승희 명인의 김죽파류 가야금 산조로 신명을 이야기 하고, 이어 안숙선 명창과 10 여명의 남도명창들이 신명나고, 흥겨운 남도민요로 화답한다.
이어 동행 두번째 무대, 2007년...... 우리 국민들은 참으로 고난하고 힘든 한해를 보냈다. 2008년 새해에는 새로운 소망과 힘찬 희망의 길을 모색하고, 대한민국의 혼을 약속하는 무용극으로 손베추춤 무용단과 뫄한뭐루 무예단이 함께한다.
또, 이은관 명인의 배뱅이굿에 이어 신명나고 맛깔스런 경기민요를 경기명창 박순금 외 15 여명이 출연하여 흥겨움을 더한다.
동행 셋째 무대로 소리에 몸짓을 얹으니 춤이 되었네... 어찌 신명을 귀로만 듣것오 ... 그네들이 그 소리의 신명과 한을 관객들에게 눈으로 보여주는 무대로 최고의 춤꾼들이 김청만 명인이 이끄는 시나위 반주에 얹어 춤을 춘다.
소고춤 / 정인삼, 태평무 / 이현자, 살풀이 춤 / 정명숙, 승무 / 채상묵
넷째 무대,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79년. 창극과의 아련한 사랑이 시작되었고 극예술의 완성을 이룰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아끼는 춘향가 대목을 아름다운 시나위 선율과 함께 한다.
특히 심청가 중 ‘심봉사 눈 뜨는’ 대목으로 이번 여행에 동반한 모든 사람들의 뜨거운 가슴에 영원히 추억 할 수 있는 감동이라는 선물을 한 아름 안겨 줄 것이다.
심봉사 - 김일구, 심청이 - 안숙선고법 - 정화영, 김청만
대금 - 이철주, 피리- 이철주, 아쟁- 최종관, 해금- 김무경, 가야금- 김귀자
같은 넷째, 2008년 새로운 희망을...
항상 힘들고 새로움에 도전 할 때, 든든한 힘이 되 주었고 판을 흐드러지게 만들어 주었던 우리의 신명 판굿 ... 무대에서 객석에서 하나 되어 모든 것을 풀어 놓자구요 ...
특히 안숙선 명인의 아주 특별한 여행, 설장구놀이와 김덕수 명인의 신들리는 어울림... 힘들었던 2007년 한해 떠내어 버리고 우리같이 하나 되어 신명으로 한 바탕 풀어내며, 희망의 새해 2008년 다시 만납시다...... 그려 얼쑤 ~
장구춤 / 안숙선, 판 굿 / 김덕수 외 한울림 예술단
◈ 국악계의 프리마돈나
소리꾼의 길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영원한 춘향이 안숙선 명창,
인간문화재란 말은 중요무형문화재를 지정된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70년대 한국일보에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명인들을 연재하면서 쓰게 된 표현이다. 당시 이 연재물의 제목이 [인간문화재]였고, 이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명인들을 일러 통칭 [인간문화재]라고 불리게 되었고 오늘날은 명인들을 다른 말로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중요무형문화재 제도가 생긴 것은 60년대 중반이다. 당시에 문화공보부는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를 되살리고 전통을 이어가자는 의미에서 이 제도를 도입하고 각계의 주요 명인들을 문화재로 지정하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불합리한 모순도 발생하기도 했지만, [인간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는 독보적인 능력과 연륜, 그리고 명인으로써의 자질을 인정받어야 얻어지는 칭호인 것만은 틀림없다.
지난 97년, 신문의 문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제호의 기사가 실렸다.
“40대의 젊은 국악인 인간문화재 등극" 그 화제의 주인공은 바로 명창이며, 국악계의 프리마돈나라는 별명을 가진 소리꾼 안숙선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중요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보유자」로 선정된 것이었다. 그녀는 노쇠한 우리 국악계에 젊은 바람을 일으키며 판소리의 나이를 젊게 끌어내린 주인공으로 평가받고 있는 명창이다.
■ 소리꾼의 운명을 타고난 여류명창
안숙선 명창은 출생부터 소리꾼의 길을 걸어야하는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소리의 고장인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난 그녀는 이미 아홉 살 때부터 소리 길로 들어섰다.
그녀의 이모는 가야금의 명인인 강순영이다. 그리고 그녀의 외당숙은 동편제 판소리의 명인이며 큰 산맥이었던 명창 강도근(판소리 인간문화재 : 94년 작고)이다.
국악인 집안에서 출생한 그녀는 명창 주광덕 선생에게서 소리의 기초를 닦았고 외당숙인 강도근 명창에게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등 동편제 소리를 익힘으로써 일찌감치 소리꾼으로써의 행보를 남보다 빨리 했다.
이미 열 살 안팎의 나이에 전국에서 열리는 학생 명창대회를 휩쓸고 다녔고, 국악계에서는 이미 어린 안숙선의 재능과 앞날을 점치고 있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서울생활을 하면서 소리공부를 하게 된 것은 19세 때, 명창 김소희(1917~1995)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공부하면서다. 김소희 선생은 이미 안숙선의 어린 시절을 눈여겨보았고,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게 하면서 소리공부를 가르쳤다. 안숙선은 이 무렵부터 김소희 선생에게서 [춘향가], [흥보가]를 배웠고, 뒤에 명창 정광수 선생에게 [수궁가]를, 박봉술 명창에게 [적벽가]를, 성우향 명창에게 [강산제 심청가]를 배우는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창급 명창들에게 진수만을 각각 넘겨받았다. 그래서 안숙선은 여러 스승들의 바디를 고루 익혀 시김새가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다.
몇 번만 들으면 금세 따라하는 천부적 자질은 그녀에게 [녹음기]라는 별명을 붙게 할 만큼 뛰어난 음악적 감각과 재주가 있었고, 거기에 어렸을 때부터 스승 복까지 겹쳐 뛰어난 여늬 소리꾼이 누리기 힘든 행운까지 누렸다.
■ 40대 인간 문화재가 된 국악계 스타
97년 그녀가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고 하니, 판소리를 전공한 소리꾼이 [판소리 인간문화재]가 아닌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라니 하면서 궁금들 했다. 사실 여기에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깊은 사연이 있다. 그녀가 김소희 선생에게서 소리 공부를 하고 있던 73년, 어느 날 가야금 병창의 명인 박귀희 선생이 김소희 선생의 교습소를 찾아왔다가 소리 잘하고, 똑똑한 안숙선을 발견하고, 그녀의 재주가 욕심이 났던 것이다. 유달리 제자 욕심이 많았던 박귀희 선생은 김소희 선생과 형님 아우하며 평생을 형제처럼 친구처럼 살아온 터였기에 그 자리에서 주저 없이 "저 녀석 나 다오"라고 말했고, 김소희 선생은 "그 녀석 욕심나며 데려가 공부 좀 원없이 시켜라"며 흔쾌히 승낙 했다고 한다.
이 일을 두고 말하기 좋아하는 국악계 참새들은 박귀희가 김소희의 애제자인 안숙선을 [뺐어갔다.]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안숙선의 표현을 빌리면, 당시에 그녀는 무척이나 가야금을 배우고 싶어 했고, 이에 김소희 선생을 졸라, 박귀희 선생에게서 가야금 병창을 배우게 되었다고 말한다.
안숙선의 국악 인생은 이렇게 해서 또 다른 행보를 걷게 되었고, 박귀희 문하생으로 들어간 그녀는 가야금 병창을 전수 받게 된다. 이미 어린 시절, 그녀의 이모이자 가야금의 명인 강순영에게서 가야금을 배웠던 그녀에게 가야금 병창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나 보다. 더군다나 그녀의 천재적인 음악적 감각은 남들보다 빨리 가야금 병창을 이수하게 되었고, 스승도 놀랄만큼 일취월장하게 된다. 이렇게 박귀희 명창 문하에서 가야금병창을 배우면서 스승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그녀는 주위로부터 부러움과 질시를 받기도 하면서 스승의 가야금 병창과 산조를 사사 받게 되었고, 지난 93년 박귀희 명인이 세상을 뜨자, 문화재 관리국은 그녀를 박귀희의 뒤를 인간문화재로 지정하게 된 것이다.
안숙선은 20대 시절인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했고, 예술감독을 거쳐 현재는 원로단원이며, 전주소리축제 조직위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교수로 활동 중이다. 안숙선 명창은 25여년을 창극단의 단원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창극의 주인공을 도맡았을 정도 광대 기질 또한 천부적이었다. [수궁가]에서 토생원역, [심청가]의 심청역 등에서 보여준 애원성 깃든 소리와 재치있고 자연스러운 연기는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받았고, [국악계의 프리마돈나]라는 새로운 닉네임이 그녀의 이름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없는 국립창극단은 상상할 수 없게 되었고 많은 단원들이 그녀와 경쟁이라도 하듯이 창극에 몰입했다.
1986년‘남원춘향제’명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87년 KBS국악대상 수상 등으로 명성을 얻은 그녀는 일본 등 아시아권 12개국, 미국 캐나다 콜롬비아 등 북남미, 유럽 12개 도시의 순회공연 등 세계 속에 우리소리를 전파하기도 했다.
가냘픈 몸매에서 솟구쳐 나오는 우조의 힘찬 소리는 청중의 마음을 휘저어 놓았고, 유럽공연 당시 프랑스 한 신문에서는 안숙선의 소리를 [천상의 소리]라고 격찬했을 정도였다.
이미 다섯 마당 완창무대를 가진 그녀는 열 살 소녀시절부터 인기를 누렸지만 결코 자만하지 않는 노력파이다. 어린 시절 자신의 가야금 연주의 초석이 된 이모 강순영과, 단단한 우조의 성음을 가르켜 준 동편소리의 명인인 외당숙 강도근 명창, 그리고 시대의 전설 같은 여류 명창 김소희에게서 배운 판소리, 또 가야금 병창의 참맛과 국악인으로써의 자세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 당대의 스승 박귀희, 이 모든 스승들을 만난 것은 어찌 보면 그녀에게 행운이었다. 이젠 안숙선 명창은 단순한 소리꾼에서 국악계를 이끄는 위치에 올라섰다.
◈ 안숙선 명창의 말말말 들...
“천 사람이 너를 좋다고 할지라도 정말 음악의 깊이를 아는 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는 이 말을 무섭게 알아들으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역시 음악인 것 같아요. 살아오면서 제가 하고싶었던 것들을 음악에 담아서 표현하고 그것들을 또 들어주시는 분들이 감동을 하고...”
“나이가 들어 시간이 생기고 보니 음악만을 위해 너무 이기적인 삶을 산 것 같아 가족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음악은 따뜻한 봄빛 같아요. 언 것을 녹이고, 닫힌 것을 열어주거든요. 손녀가 넷인데 하나쯤은 또 음악을 했으면 싶어요. 어떤 놈이 잘할까 지켜보고 있습니다.”
딸 최영훈씨 역시 특별히 가르치거나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뒤를 따랐다. 다만, 판소리를 하겠다고 하는 딸에게 어머니는 “너는 손이 곧으니 거문고를 해보라”고 권유했다. 판소리가 얼마나 힘든 길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최씨는 “어릴 때는 엄마가 집에 있는 다른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이제는 안숙선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느낀다”고 말했다. “집에서도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몸 관리를 하시고, 연습량도 다른 사람이 따라가기 힘들어요.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물으면 서슴없이 안숙선이라고 대답해요.”
“시간이 흐를수록 선생님들이 많이 생각납니다. 선생님들은 사재를 털어 후학을 양성하면서 국악계의 앞날을 늘 걱정하셨지요. 제가 예전의 선생님들 같은 입장이 됐지만 그릇이 부족하다 보니 잘하지 못해서 죄송스러워요.”
■ 소리인생 50년의 소회 말...
“제가 아홉 살 때부터 어른들한테 가야금도 배우고 소리도 배우고 한 것이 벌써 50년이나 되었네요. 그동안 공부를 너무 못했어. 한참 전성기 때는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매일 소리만 했는데….”
“소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데 벌써 50년이에요. 하지만 아직도 공부가 모자랍니다.”
“별 의미 없습니다. 숫자에 불과하지요. 국악이라는 것이 그만큼 지키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되구요. 그저 앞에서 끌어주고, 옆에서 도와주고, 뒤에서 밀어줘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니까 했지, 너무 힘들어요. 사실 소리가 힘든 게 아니에요. 의지대로 빠지지 않는 것이 힘이 듭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사랑받은 소리꾼이기 때문에 소리를 잘했으면 좋겠다. 저를 아껴주는 많은 분들이 제 소리를 듣고 걱정 근심을 풀게끔 소리를 잘했으면 좋겠어요”
“50년이 보람 있다기보다는 아쉬움이 더 많습니다. 이것저것 쫓아다니다가 제대로 축적을 못한 것 같습니다. 제 속에 담을 것만 담아서 나왔으면 좋겠는데 이것저것 다른 게 많이 들어 있게 됐습니다. 이제 있는 것 다 덜어내고 담을 것만 담으려 합니다.”
“인간관계라는 게 서로가 만나서 쌓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노래만 잘 부르고, 자기 할 일 하면 되는 것인 줄 알았어요. 이런 과정에서 생긴 오해가 참 풀기 힘들었습니다. 또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욕심껏 소리를 내지 못할 때 왜 내게 감당하기 어려운 이 일을 시키셨나 하고 한탄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말도 모르는 외국 예술 감독 앞에서 판소리 다섯 바탕을 했는데 모두 놀랐습니다. 우리 전통음악의 우수성과 철학에 대해 감탄했습니다. 우리는 좀 나쁘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외국에서는 안 그렇더군요.”
“항상 옆에 있어서 좋은 것을 잘 모른다는 뜻으로 좋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나이 들면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지요. 특히 해외 공연 갈 때마다 이를 확인합니다.”
“시대의 변화를 무시할 수는 없지요. 전통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음악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창극이 그것을 종합적으로 담을 수 있는 형식이지요. 더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정체성을 확보하면서 어떻게 다듬어 나가느냐가 숙제지요.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다른 것이 들어오고 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봐주시는 것 같아 기쁩니다.”
“판소리는 단순한 음악이 아닙니다. 드라마 속 수많은 인물을 표현해야 하므로 맑고 탁한 소리를 모두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또 그 흐름을 음악적으로 이해해야 하고 깊은 맛이 있어야 합니다. 예술적 감각이 없으면 절대 할 수 없습니다. 풍부한 성량과 둥글둥글 구성진 목소리가 판소리에 적합합니다”
“김소희 선생님과 박귀희 선생님은 소리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저를 국악계의 스타로 키워내려고 했던 것같아요. 예술로 고급스럽게 승화시키려고 했는지 음악뿐만 아니라 인격, 무대에 섰을 때 예절 등도 가르치셨어요. 거의 어머니 아버지 노릇을 다 하셨어요.”
우리 소리의 매력을 “누구나가 공감하는 것이 소리에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판소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과 사랑, 이별 같은 거. 춘향이가 옥중에서 나와서 이 도령과 만나서 품는 희망, 또 고통에 대한 공감대 등. 그런 것을 한사람의 창자가 많은 등장인물과 상황변화를 오페라처럼 다 하는 것을 외국 사람이 보고 듣고 놀라요. 그러면서 판소리에는 품격이 있지요.”
“한 번 득음을 했다고 해서 놔두면 녹이 슬어 버려요. 다시 그 소리를 찾기 위해 힘을 올려붙여 한꺼번에 쏟아 내도 안 됩니다. 소리꾼은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과 싸워야 돼요. 일생 동안 「소리 멍에」를 지고 먼 길을 가야 하는 법이지요. 前生(전생)의 業(업)을 지고 가는 거죠. 편하게 살아선 안 되는 게 바로 소리라니까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지 몰라요. ‘그냥 노래를 부르면 되지’ 하고. 하지만 그게 단순한 노래가 아니잖아요.”
“제가 생각하는 득음은 좀 달라요. 소리만 나온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소리에 대한 공력을 쌓지 않으면 안돼요. 살아가면서 의미를 깨닫게 되고, 하면 할수록 느껴지고 자꾸만 소리에 대한 갈증이 생겨나게 돼요. 마치 그릇이 채워지듯이…”
“소리하는 삶을 후회한 적도 있었죠.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요. 또 제 음악을 들려 드렸을 때 행복해하시는 분이 있다는 것,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던 관객들이 조금씩 풀어지는 것을 볼 때 음악이 대단하다고 느낍니다.”
“판소리 맛은 소리만 잘하고 발림 (소리의 가락이나 사설의 내용에 따라 손.발을 움직여 감정을 표현하는 몸짓)을 못 하면 어릿광대죠. 천군만마가 뛰어가듯, 천길 벼랑에서 물이 떨어지듯, 훔치고 잡아떼어 관객을 울고 웃게 만드는 게 판소리입니다.”
“명창의 조건은 申在孝(신재효) 선생 말씀이 ‘광대는 첫째가 인물치레, 둘째는 사설치레, 그 직차 득음이요, 그 직차 너름새라’며 인물치레를 첫머리로 꼽았습니다. 얼굴이 잘나기도 해야 하지만, 단순히 용모의 준수함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갖춰야 할 인격, 올바른 인생관까지를 인물치레라고 봐요.”
“판소리는 삶에 지친 사람에게 괴로움을 씻어주고, 기쁨을 나눠 줍니다. 판소리 속에는 한국 사람의 심성이 담겨 있어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무엇을 중시했으며, 어떻게 살고자 했는지 전부 소리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소리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하겠어요.”
판소리는 절제된 1인칭 오페라다. 서양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한 사람이 노래하고 울고 웃으며 연기도 하고, 심지어 개 짖는 소리, 바람 소리도 낸다. 소품은 부채 하나, 북이 전부다.
“판소리는 악보가 없어요. 음계가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오히려 5선보대로 하면 맛이 안 납니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음역이 다양해질 수 있죠. 영감이나 느낌을 그대로 말하듯 음악적으로 표현해야지 악보를 보듯 눈에 보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명창들은 하나같이 엄청 옥타브가 높아요. 음의 변화나 기복이 심하지만 음계는 정확하답니다. 판소리를 해부하면 그 음 속에 과학적인 엄격함이 있다고 해요. 음을 어디서 떨어야 하고, 어디서 졸라 떼야 되며, 어디서 밀어야 하는지, 특정 음에 딱 꽂히는 게 아니라 밀어 올려서 그 음까지 가야 하거나, 혹은 위에서 떨어뜨려서 내려가는, 그 과정이 판소리입니다.”
“소리라는 어렵고 무거운 짐을 언제까지 짊어져야 할지, 늘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 게을리 할 수 없는 수련의 고통, 무대 뒤에서 나를 짓누르는 팽팽한 긴장감을 언제까지 감당해야 할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멍에를 지고 소리를 하는 수밖에요. 그게 제 삶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