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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연구를 위한 새로운 제언
장미자
들어가는 말
그동안 신명기 연구에 대한 개관은 구약서론에서나 많은 학적인 글에서 다루어졌다. 앞으로 본 저널에 연재되는 신명기 주석 시리즈에서 필자는 먼저 신명기 연구를 위한 새로운 제언을 제시하고자 한다.
신명기가 그 자체가 묘사하는 그 시대의 작품이 아니라고 간주된 것은 16세기이다. 드베트(W. M. L. de Wette)가 신명기 법전이(12-26) 요시아왕 때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서였다는 것을 처음으로 제안했다. 벨하후젠은 그라프의 진화론적인 개념을 전수받아 법전의 전승과 이스라엘 종교의 점진적 발달사가 하나로 묶어진 것을 포로기로 보며, 신명기 법전을 요시아왕 시대의 것으로 보았다.1) 이 견해는 신명기 연대를 BC 7세기로 설정하는 데 공헌이 되었으며,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의 신명기 연구의 기초가 된 19세기의 분위기는 계몽주의로 말미암아 진취적인 학문적 발전과 진화론의 영향력에 젖어 있었다. 구약연구도 이 분위기에 젖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신명기의 독특한 문체와 내용에 대한 연구도 이스라엘 종교에 대한 진화론적인 이해와 맞물려서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신명기 연구의 주춧돌이 되었던 19세기는 고대근동의 고고학적 연구에 있어서는 "암흑기"였다. 20세기 초기부터 폐허에 묻혀있던 고대 근동의 문헌들이 고고학자들과 고대 언어학자들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헌신 덕분에 빛을 보게 되었다. 아직도 수많은 토판들이 소장되어있는 박물관에서 "재발굴"되길 기다리고 있고, 해독과 번역진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는 구약연구에 중요한 고대 문헌을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 있게 되어 구약 학도들에겐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신명기의 배경이 신명기 연구의 주요한 방법론인 역사적 비평이 그 기초를 세우게된 19세기 유럽이 아니라 고대 근동이기 때문이다. 고대 근동의 문헌이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20세기 중엽부터 구약연구에 고대 근동의 문맥이 부각되는 새로운 방향이 제시되기 시작했다(예는, 아래의 "신명기 형식"을 보라). 그러나, 오늘날의 대부분의 신명기 연구와 고대 문헌의 비교 연구는 역사비평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신명기의 문맥이 고대 근동이면, 그것을 고대의 문헌의 하나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비교연구는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신명기 연구의 대표되는 학설을 고대근동 문헌의 문맥에서 평가함으로서, 신명기 연구에 대한 학적인 대안(a scholarly alternative)을 제시하려고 한다.2)
신명기 편집설
단수와 복수의 교체
1894년에 쉬텍(W. Staerk)과 슈토이어나겔(C. Steuernagel)이 신명기 편집의 과정에 대한 이론을 세우는 데 사용했던 단수와 복수의 교차는 오늘날 여전히 학자들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다.3) 예를 들면, 베이욜라(T. Veijola)는 이 견해를 수용하여, 복수 어법이 쓰여진 부분에도 시대가 다른 몇 개의 편집적 확장이 있다고 주장했다.4) 그러나, 2인칭 단수와 복수의 교체를 문학비평적 기준으로 완전히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5) 로핑크(Lohfink)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Eine Untersuchung literarischer Einleitungsfragen zu Dtn 5-11)에서 단수에서 복수로의 변화는 일반적으로 동사에 보편적이고, 복수에서 단수의 변화는 통상적으로 접미사에 나타난다고 하며, 내러티브에서는 문맥이 단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상 정상적으로 복수가 나온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숫자의 믹싱은 형태(form)에 의해서 좌우되는 듯 하다.6) 로핑크의 견해를 수용하여, 톰슨(J. A. Thompson)은 2인칭 단수와 복수의 교체가 나타나는 단락(sections)은 반드시 다른 저자들을 반영한다기보다는 강조의 차이를 둔다고 보았다.7)
크리스텐센(D. Chrestensen)은 문자사용 이전 시기에는 음악과 시가 문화 전승을 위한 통상적 매개체였다는 견해를 수용하여, 맛소라의 악센트 체계에 근거해서 음률의 구조 분석을 12장에 적용했다. 그는 아마도 신명기가 히브리어 성경 중에 가장 제의식적이며 음악과 함께 저작되었을 것이며,8) 단수와 복수 교차는 받아들여진 본문 전승의 한 면(as an aspect of the received textual tradition)이라 주장했다.9) 맛소라의 악센트 체계가 그의 연구에 기준이 되었으며, 회당의 전승이 제 2성전 시대동안 혹은 그 이전의 텍스트의 원래적 사용을 보존한다는 것이다.10)
크리스텐센의 이 견해는 신명기의 후대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일반적 인류학을 근거로 해서 크리스텐센이 제시한 복수와 단수 교체의 스타일에 대한 이해가 편집설보다 더 설득력이 있으나 신명기를 고대 근동의 문맥에서 올바르게 이해했는지 의문이다. 이유는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한 악센트 체계가, 제 2성전 시대 때 사용된 악센트 체계를 반영하는 데에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고대 근동의 고고학적 문맥에서 볼 때, BC 3000년기에서부터 발굴된 토판들이 가르치는 것은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후세에게 중요하다고 간주되었던 것은 무엇이든지 기록으로 보관하였다는 사실이다.11) 그러므로 신명기에 나타난 단수와 복수의 교체가 고대근동의 문학적 문맥에서 연구되어야 하는 것은, 오늘날 고고학적 발굴이 제공하는 바와 같이 고대 근동의 세계는 고대 그리스나 현대의 어느 세계보다 훨씬 더 문어적이기 때문이다(아래의 "청동기 후기시대의 문어적 활동"을 보라).12) 고대근동의 문헌의 배경에서 보면, 2 인칭 복수-단수 동사 교차는 신명기서의 유일한 특징이 아니다. 이런 교차의 문체는 힛타이트 조약에 나온다. 예를 들면, 힛타이트의 슈피루리우마는 미타니의 샤티와자(Shattiwaza)와 하리의 아들들(the sons of Harri)과의 조약에서, 만일 이들이 조약을 어길 경우에 신들이 "너"(단수)와 "너희 나라"(복수)를 제거하기를(cut down) 기원한다.13)
세피르 석비(Sefire Stelae)에도 동일한 교차가 나타난다.14) 그러므로, 2인칭 단수와 2인칭 복수 교차는 반드시 점차적으로 불어난 편집과정이라 할 수 없으며, 이러한 교차는 신명기의 하나의 문학적 특징으로서 오히려 신명기의 고대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1 인칭과 3 인칭의 교체
앗시리안 왕들의 연보에는 1인칭과 3인칭이 자연스럽게 교차된다. 티글랏필레저 1세(Tiglath-pileser I)는 신들의 소개 후 자신의 소개는 3인칭으로, 자신의 군사적 공적은 1인칭으로 소개한다.15) 티글랏필레저 1세의 군사원정 일람(summary)에 반항을 고집한 속국의 영토(the vassal lands) 합병과 그들의 국민 수송은 1인칭, 그리고 신들이 동행했던 그의 원정은 3인칭으로 기록되어 있다.16) 아닫나라리 2세(Adad-n r ri II)의 연보에는 그의 소개와 군사적 공적의 요약을 1인칭으로 한 후,17) 그 자신의 간단한 소개와 함께 그의 동부 원정은 3인칭(the valiant man who marched with the support of the god A
ur, . . .)으로 기록하였고 다시 1인칭으로 동남부의 원정과 승리를 기록한다.18) 아슈르나시르팔(Ashurnasirpal)의 투무(the land Tummu)원정 기록은 1인칭으로 시작해서, 험악한 산 속으로 도망한 투무 국가의 군사들을 포로하기 위한 그의 탐색과 도망병들의 거처의 파괴는 3인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어서 도망병들의 형벌은 1인칭으로 기록되어 있다.19)
슈피루리우마 1세와 샤티와자와의 조약에 보면 전자의 공적은 3인칭, 자신의 소개는 1인칭으로 나타나 있다.20) 동일한 교체가 봉헌의 비문(dedicatory inscriptions)에도 BC 2000년기부터 나온다.21) 뿐만 아니라, 1인칭과 2인칭 그리고 3인칭의 교차도 힛타이트 조약과 힛타이트 서신에 아주 자주 나타나는 문체의 특징이다.22)
이와같이 한 문맥에서 1인칭과 3인칭의 교차와 1인칭과 2인칭 그리고 3인칭의 교차는 고대 문체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인칭변화의 교차는 반드시 편집 과정을 나타낸다고 할 수 없다. 더우기, 이러한 교차는 조약에도 나오며, 신명기에 보면 야훼가 1인칭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명칭과 함께 3인칭으로 나타나는 단락은 고대 근동의 문어체와 일치한다.23)
여하간에, 이 문체의 특징 자체가 신명기 연대를 정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복수와 단수 그리고 1인칭과 3인칭의 교차가 기록 당시의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전자와 후자가 긴 시간적 간격을 두고 기록된 것이 아니다. 바로, 이 고대근동의 문헌의 특징에 비추어서 신명기의 문체가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문체
와인펠드(M. Weinfeld)에 따르면, 신명기의 문체(phraseology)는 BC 7세기 이전의 역사적 전승이나 예언적 전승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BC 7세기 부터는 보급되었다고 한다.24) 그는 이 현상이 신명기의 연대를 BC 7세기로 지지한다고 간주했다. 그러나, 동일한 또는 유사한 표현은 신명기의 유일무이한 문체가 아니다. 앗시리안 문헌에보면, 동일한 표현이 티글랏필레저 1세(약 BC 1114-1076)에서부터 아슈르바니팔(약 BC 668-627)연보까지, 거의 600년 간 두루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앗시리안 왕들과 그들의 봉신들(vassals) 사이에 맺어진 조약(vassal treaties)의 결과이다: "나는 그들에게 조공과 부과금을 부과했었다"(I imposed upon them tribute and impost).25)
무엇보다도, 고대 바빌로니안(Old Babylonian)은 문어체로서 2000년 간 지속되었다. 고대 이집트 문헌의 경우, 고대 중앙 이집트어(middle Egyptian)는 BC 2200년에서부터 AD 200년까지 문어체로 사용되었다.26) 다시 말하자면, 거의 2000년간 동일한 문어체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문맥에서 보면, 신명기의 문체가 BC 7세기 이후의 텍스트에 나타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시대의 작품인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동일하거나 유사한 표현은 저작연대 설정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명기적 사관
여기서 신명기적 역사에 대한 여러 학설들을 논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므로 "신명기적 역사(Deuteronomistic History)"연구에 "머릿돌"이 된 노트(M. Noth)의 이론을 요약해 보기로 하자.27)
노트는 Dt 1:1-4:43이 신명기적 역사의 법(deuteronomic law)과 공통적인 면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면서, 신명기 1장에서 3(4)장까지를 신명기 법전의 서론이 아니라 신명기적 역사(deuteronomistic history)의 머리말(prelude)로 간주했다.28) 노트는 여호수아에서 열왕기상까지 자주 반복되는 동일한 관용구(phrases), 어휘(vocabulary), 어법(diction)과 문장 구조(sentence structure)에 기초해서 신명기적 사관의 저자(deuteronomic author)의 문체를 확인했다.29) 신명기적 역사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기에 주어진 중요 인물들의 연설이며, 이것은 사건들의 과정을 해석하기 위하여 앞과 뒤를 바라보며 사람들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 것에 대해 적절한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신명기적 사관의 저자의 의도는 이스라엘 역사를 범국민적인 불행(national disaster)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노트의 신명기적 역사에 관한 학설은 이스라엘 역사를 너무 비관적으로 평가한다고 학자들의 반박을 받았으나 - 예를 들면, 폰 라드(G. von Rad), 볼프(H. W. Wolff) - 많은 학자들에게 신명기적 사관에 관한 연구에 끊임없이 영감을 주고 있는 실정이다.30)
그러나 노트의 신명기적 역사의 저자의 편집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문체와 특징은 제평가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노트가 자신의 학설을 세운 데 기초한 모든 요소들이 고대근동의 문헌 속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들이 신명기적 사관의 저자의 고유한 문체(위의 "문체"를 참고하라)나 저술의 특징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31) 게다가, 1-3(4)장이 신명기 법전과 다르다고 해서 신명기에서 분리해서 이해될 필요는 없다.
저 유명한 코로쉑(V. Korosec)의 힛타이트 조약에 대한 연구에32) 기초해서 발쩌(K. Baltzer),33) 키친(K. Kitchen)과 크라인(M. G. Klein)은 신명기 1-3을 역사적 서문(historical prologue)으로 보았다. 모란(W. L. Moran)은 1-3장에 나타나는 "우리 문체"(we-style)에 근거해서 반박을 했지만,34) 그의 반박은 설득력이 없다.
하티의 슈피루리우마 1세(Suppiluliuma I)와 미타니의 샤티와자(Shattiwaza)와의 조약은 하티(Hatti)와 미타니(Mitanni)의 외교관계를 나타내는 봉신조약이며 두 도큐멘트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그 중 하나는 전자의 관점에서 다른 하나는 후자의 관점에서 쓰여졌는데, 후자의 경우 역사적 서론에서 샤티와자는 "나"문체(I-form)로 슈피루리우마 1세로부터 받은 은덕을 서술한다.35) 이 문맥 속에서 보면, 모세가 1-3장에서 광야생활에서 겪은 하나님의 은덕을 "우리-문체"로 서술하는 것은 자신을 여호와의 은덕을 받은 이스라엘백성에 포함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신명기 1-3(4)장이 "우리 문체"로 기록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역사적 서문이 아니라는 타당한 이유가 없다고 본다(역사적 서문에 대해서 아래의 "신명기 형식"을 보라).
신명기와 에살하돈 조약(VTE)과의 관계36)
와이스만(D. J. Wiseman)이 VTE의 역사적 배경과 그것의 음역 및 번역을 1958년에 출판한 이래, 신명기와 VTE의 비교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발표된 연구들은 거의 대부분 신명기의 후대성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 연구들은 고대 근동의 문헌을 충분히 폭 넓게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편협되고, 정당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결점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비평적인 분석이 요구된다.
신명기와 VTE에 관한 이해
와인펠드(Weinfeld)는 그의 에세이(The Loyalty Oath in the Ancient Near East)에서, 신명기와 VTE는 종주국과 봉신국 양편 사이에 체결된 언약이 아니라 종주(the suzereign)에 의해서 그의 봉신(his vassal)에게 부과된 충성서약(loyalty oaths)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사랑은 충성 서약을 의미하는 점과 종주를 사랑하라는 신명기와 VTE에 동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37)
와인펠드는 그런 충성 서약은 BC 15세기와 14세기 힛타이트 제국 시대부터 널리 퍼져 있었다고 주장했으며, 그의 에세이(The Loyalty Oath . . .)에서 4개의 힛타이트 조약과38) 힛타이트 고위 관리를 위해 지켜야 할 교훈(the instructions for Hittite high officials)을 참고했다. 그러나 와인펠트의 고대 근동 문헌에 대한 이해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처음 3 개의 조약은(각주 38을 보라) 단순히 충성조약이 아니다. 종주와 봉신은 정치적 위기 때는 상호간의 지원(support)을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VTE에서 봉신을 위한 종주의 약속(promise)이 결여 되어있다고 해서 VTE가 충성 조약이라는 것을 반드시 가르키지 않는다. 이런 약속이 모두 BC 1000년 시대의 봉신 조약(vassal treaties)에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시대의 봉신 조약의 한 중요한 특징이다. 힛타이트 고위 관리들이 그들의 직무를 위해 지켜야 할 교훈(Hethitische Dienstanweisungen)에 신들에게 그것을 어기는 자를 파멸시기를 기원하는 것은 봉신 조약에 나오는 조약의 신들에게 조약을 어기는 자들을 벌 하길 기원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유사점은 비슷한 처지에서 비롯되었는데, 말하자면 힛타이트 고위 관리들과 봉신들은 힛타이트왕들에게 충성스러워야 했었다. 그러나, 이 도큐멘트들은 두 개의 다른 쟝르이다.
왜냐하면, 전자가 지켜야할 교훈에는 후자의 조약에 나타나는 요소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필요한 경우 봉신을 원조한다는 종주의 약속이다). 게다가, 봉신조약 경우에 처럼, 지켜야할 가르침(introductions)을 세우기 위해서 신들이 증인들로 나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신명기와 VTE에 나타난 "종주를 사랑"하라는 내용은 종주에 대한 충성을 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와인필드가 주장한 것 처럼 충성 조약과 조약 개념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서, 전자와 후자는 동전의 양면이다.39) 이 분석에 비추어 보면 와인펠드의 충성 서약에 관한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신명기 28장
와이즈만(D. J. Wiseman)이 VTE와 신명기 28:23과의 유사점을 아무런 주해없이 처음으로 제시했다.40) 보르거(Borger)는 이 언급을 수용하면서, 신명기 28:23의 이미지는 한 앗시리안 출처에서 따왔다고 역설했다.41) 프랑케나(Frankena)는 보르거의 견해를 수용하여, VTE의 저주와 신명기 28을 비교한 연구에서 이 두 텍스트가 똑같게 평행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신명기 28:20-57의 편집자는 틀림없이 VTE의 첫 번째 저주 부분과 비슷한 저주 텍스트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42)
와인펠드(Weinfeld)는 신명기 28:23이 VTE에 의존한다고 보았으며, 신명기 28:26-35과 VTE 419-30의 비교에서 신명기는 VTE를 제외하고는, 그런 저주의 시리즈가 고대근동의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으므로 전자는 후자에서 바로 차용했다고 했으며,43) 또한 신명기 28장의 긴 리스트의 저주는 짧은 그것이 나오는 힛티이트 조약보다는 BC 1000년기의 신 앗시리안 조약과 아라메안 조약의 모형을 따른다고 주장했다.44) 최근에 슈테이만스(Steymans)는 신명기 28장과 VTE의 저주와 비교한 그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프랑케나와 와인펠드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신명기 28장이 VTE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45)
VTE 528-32a는 신명기 28:23과 두드러지게 유사하며, 다른 스메로-바빌로니안(Sumero-Babylonian) 텍스트에 평행되는 저주가 없다. 이것은 앗시리안 조약형식이 신명기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 통상적인 결론을 다시 고려해야 할 필요성을 우리로 하여금 인식 시켜준다. 이 평행 저주의 톡특한 표현은 청동과 철이 은유적으로 사용된 BC 2000년기 문헌에서 폭 넓은 문맥을 찾아 보아야 할 필요성을 요구한다. 이것은 BC 1000년기에 청동과 철이 은유적으로 사용된 문헌이 VTE보다 후대의 것이므로 우리의 비교 연구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46) 중기와 후기 청동기 시대에 이집트 문헌은 이 금속들을 바로왕의 비범한 능력을 묘사하는 데 사용했다.47) 힛타이트 문헌에도 BC 17세기 중엽부터 힛타이트왕들의 철회할 수 없는 말들을 (unbreakable words) 철과 비교하였다.48) 두로의 아비밀쿠(Abi-milku)는 바로왕의 보호를 하나의 청동 장벽(a bronze wall)이라고 찬양했다.49)
이 문헌적 증거들은 철과 청동의 견고함이 BC 2000년기 시대에 두루 알려졌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이 금속들을 작열하는 햇빛으로 가득 찬 하늘과 단단하게 굳어진 땅은 농경작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것으로서, 이 상태는 초생달 반달 지대에 올 수 있는 가뭄을 가리킨다. 여기서 두 가지 관찰이 주목된다. 첫째, 청동과 철의 은유적인 사용은 오직 레반트와 아나토리아의 문헌(in the literature of the Levant and Anatolia)에만 증명되었으며, 그외의 스메로-바빌로니아 문헌에는 나오지 않는다. 둘째, 모든 관련 자료가 BC 2000년기(the second millennium) 시대의 것이다. 이것은 VTE 저자는 BC 1000년기(the first millennium) 시대로 전승된 웨스트-세미틱(West-Semitic)자료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50) 신명기 저자도 동일한-문학적 유산을 기초해서 신명기 28:23을 썼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명기 28장 23절이 VTE 528-32a를 따른다기보다, 이 두 텍스트(레 26:19b-20도 포함)는 하나의 공통적 전통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51) 신명기 28장이 VTE의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
지금까지 입수할 수 있는 고대근동의 저주 리스트를 VTE의 그것과 비교 분석한 결과 후자가 적어도 BC 15세기 이후부터 사용되어 온 공통적 전통을 사용했을 것이다.52) 그러므로 신명기 28장과 VTE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점은 서로 간의 의존을 제시하기보다 하나의 공통적 문학적 전통을 반영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신명기 28장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뿐만 아니라, 신명기 28장과 VTE는 비교적 긴 리스트의 저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전자와 후자만 나타나는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다. 축복의 리스트보다 훨씬 긴 리스트의 저주는 BC 2000년기의 문헌에 흔히 나타나는데, 초기 법전의 예로는 리피트-이쉬타르 법전(Laws of Lipit-Ishtar, 약 BC 1930)과53) 함무라비 법전(Laws of Hammurabi, 약 BC 1750)이 있다.54) 게다가, 짧은 리스트의 축복과 이것보다 긴 그것의 저주는 힛타이트 조약의 거의 하나의 공통된 양식이다.55)
이 분석에 비추어 볼 때, 신명기 28장에 나타난 축복의 리스트보다 긴 저주의 그것은 저주 리스트만 나오는 BC 1000년기의 문헌보다는 BC 2000년기의 그것에 가깝다.
신명기의 형식56)
신명기의 형식이 조약의 형식을 따른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이다. 1931년에 코로쉑이 힛타이트 조약에 대한 연구를 출판한 이래(Hethitische Vertraege), 성경의 언약의 형식과 그것이 비교되는 연구가 많이 발표되었다. 멘덴할(G. E. Mendenhall)은 언약(the covenant)이 BC 8세기나 7세기에 선지자적 설교(prophetic preaching)로부터 기인했다는 학자들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모세언약은 BC 2000년기 후반의 힛타이트 봉신조약(the Hittite vassal treaties)과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멕카티(D. J. McCarthy)는 출 19:3b-8, 수 24:1-28 그리고 삼상 12를 신명기적 언약 이전 텍스트들(pre-deuteronomic covenant texts)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언약의 텍스트들이 언약의 형식에 따라 쓰여졌다는 점을 부인했으며, 신학적 반영의 소산(the products of theological reflection)으로 간주했다.57) 그렇지만, 그는 텍스트들 안에 부분적으로 나타난 언약 개념(the covenant concept)은 조약적 유추의 영향(the influence of the treaty analogy)에 의해서 완전히 발전되었다고 주장했다.58) 멕카티는 분명하게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인 BC 3000년기 후반기에서부터 BC 1000년기 까지 조약의 오랜 전승이 고대근동과 팔레스타인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있었다.59)
멕카티에 의하면, 적어도 히브리인들이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과 관계를 규제하기 위해서 본래의 조약의 형식에서 언약을 맺은 몇 개의 증거를, 이를테면 기브온 사람들의 경우, 인정하였으나,60) 조약을 맺는 것이 오직 다윗시대부터 남아있다고 했다.6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약형식에 의한 언약은 정치적 경험과 신학적 반영이 조약 장르에 따라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명료하게 표현한 것은 BC 7세기 후라고 주장하였다.62)
키친(K. Kitchen)은 40개가 넘는 고대근동의 조약과 출애굽기에서 레위기까지, 신명기 그리고 여호수아서 24장을 비교한 연구에서 언약 형식은 BC 2000년기 후반의 힛타이트 조약과 일치한다고 결론 지었으며, 신명기와 여호수아 24장은 시내산 언약의 갱신이라고 하였다.
더우기, 시내산 언약의 형식과 내용은 봉신 조약과는 달리 BC 3000년기와 2000년기 초반의 법 형식과 BC 2000년기 후반의 조약 형식의 분명한 합류를 나타내고 있다고 피력했다.63) 키친에 따르면, 이 차이는 이스라엘의 종주(the sovereign)는 한 인간적인 종주가 아니라 신(deity)이기 때문이며, 순전한 정치적인 국가 조약에는 결여되어 있는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 요소들이 시내산 언약에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법과 조약은 함께 언약의 근원(the seed-bed of covenant)이 되었다는 것이다.64)
신명기에 나타난 법 형식과 조약 형식의 합류는, 멕콘빌(J. G. McConville)에 따르면, 신명기가 어떤 고대근동의 정치적 조약과 간단하게 동일시 할 수 없다고 했다.65) 그러나, 멕콘빌은 두 가지 요소들을 간과하고 있다. 첫째로, 고대근동의 문헌은 저자들의 자유로운 창작 기법을 반영한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문학형식의 틀을 유지하면서 창조적으로 작품을 썼다. 이러한 현상은 BC 3000년기 후반에서 1000년기 중엽까지의 저주 문헌과66) 신앗시리안 조약에 나타날 뿐만 아니라, 힛타이트 조약에도 나온다.67)
힛타이트 조약을 내용적으로 보면, 슈피루리우마 1세(Suppiluliuma I)는 그의 봉신인 하야사의 훜카나와(Huqqana of Hayasa)에게 그의 여동생을 아내로 주고 봉신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에 다른 어떤 힛타이트 조약에 나오지 않는 성적인 품행(sexual conduct)68)과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을 금하며, 이미 아내로 맞이한 여자를 첩으로 등급하라는 규칙이 언급되어 있다.69) 그러므로, 시내산 언약에 대한 키친의 견해는 고대 근동의 문헌의 문맥에 비추어 설득력이 있다. 둘째로, 키친이 주장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종주(the suzereign)는 사람이 아닌 신이므로 종주국과 봉신국 사이의 정치적 조약의 계약 조건의 내용과 다른 것은, 인간적인 관계가 아닌,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나타내는 법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언약과 고대 근동의 조약에 나타난 종주와 봉신관계의 원리는 동일하다.70)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관계되는 규정도 조약(vassal treaties)에 나오는 봉신들 사이의 규정의 원리와 같다. 예를 들면, 야훼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각 개인은 서로 동료 봉신(co-vassal)이므로, 이웃의 소유를 탐내는 것을 금하는 것은(출 20:17; 신 5:21) 봉신조약에서 봉신(vassal)에게 다른 봉신국의 침입을 금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명기와 고대근동의 봉신조약에 나타나 있는 종주와 봉신과의 관계는 원리적으로 같은 것이다.71) 그렇다면, 신명기는 BC 2000년기와 1000년기의 조약 형식 중에서 어느 것과 일치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형식적인 요소와 내용적인 요소가 있다. 전자는 역사적 서문과 축복-저주 리스트와 관련이 있고, 후자는 종주의 약속과 관계된다.
키친은 역사적 서문의 결여가 BC 1000년기 조약의 특징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72) 그러나, 멕카티는 역사적 서문이 BC 1000년기의 조약에 결여된 점을 BC 2000년기의 조약과 1000년기의 조약의 형식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사용하기를 꺼렸다.73) 사실은 BC 7세기에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은 아랍인 케다 지파의 반란 후 봉신 조약을 갱신하는데, 여기에 역사적 서문이 신 앗시리안 조약 중에서 처음으로 나온다.74) 이 일회적인 증거가 키친의 견해를 뒤집을 수는 없다고 본다.75)
그 이유는 이러한 아주 드문 현상이 역사적 서문뿐만 아니라 신 앗시리안 조약 형식에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동일하거나 유사한 형식을 보여주는 BC 1000년기의 조약인 신 앗시리안 조약(Neo-Assyrian treaties)과 아라메안 조약(Aramean treaties) 중에서, 유일하게도 BC 8세기의 아슈르나라리 5세(A
ur-n
r
ri V)와 아르팓의 마티일루(Mati'-ilu of Arpad)의 조약은 저주와 의식(ceremony)이 교차하는 형식을76)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이 슈메리안 조약인 라가쉬(Lagash)와 우마(Umma)사이의 조약형식을77) 반영하는 것은 하나의 예외이다. 다시 말해서, 공통된 형식에 예외적인 요소가 있다고 해서, 공통성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며, 거의 모든 BC 1000년기의 조약에 역사적 서문이 결여 되어있는 것은 이 시대의 조약의 특징으로 보아야 한다. 게다가, 축복-저주 리스트와 내용적으로, 예를 들면, 봉신을 원조한다는 종주의 약속이 나타나 있는 BC 2000년기 후반의 조약 형식은, 축복 리스트와 종주의 약속이 결여되어있는 BC 1000년기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르다(위의 "신명기와 에살하돈 조약과의 관계"를 보라). 이 분석이 제시하는 것은, BC 2000년기의 조약 형식의 모든 요소들이 나타나 있는 신명기는 이 시대의 형식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언약의 이해
신명기 저작의 후대설은 언약에 대한 이해와 맞물려 있다. 벨하우젠에 따르면, 언약의 개념(the concept of covenant)은 BC 9세기와 8세기에 인접국가들이 이스라엘에게 위협으로 다가왔을 때 비롯된 신학적 답변이며, 이 정치적 위기에 엘리야, 아모스 같은 선지자들은 야훼에 대한 이스라엘의 관계를 도덕적 특성의 조건(conditions of a moral character)에 종속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벨하우젠은 요시아왕 개혁의 결과로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을 세운다는 개념은 종교적 사상에 중심이 되었으며 언약에 대한 범국민적 이해는 두 개의 국가적 불행(two national disasters)후에 생겼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개념은 서서히 발전되었으며, 그것의 완전한 신학적 발전은 바빌론 포로 시대 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약의 개념은 BC 3000년기 후반기부터 고대 근동의 문헌에 증명이 되어 있다.78) 키친에 따르면, 언약(covenant, 신 29:11, 13)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brt/'lt(bond/oath)는 정확하게 의미론적으로 BC 2000년기의 후반 조약에 두루 사용된 아카디어 riksu(bond)/ m
m
/tu(oath)와 평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언약의 개념은 이스라엘의 특유의 것이 아니다.
는 특히 히브리인의 것도 아니고, 특별히 신명기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오직 웨스트-세미틱(West-Semitic)조차 아니며, 근본적으로 공통 세미틱의 일부(part of Common Semitic)이다. 그러므로 BC 3000년 후반기부터 사용된 언약의 공통 세미틱 성격에 비추어 볼 때 BC 9-7세기에 발생한 언약 개념에 대한 견해는 지지 받을 수 없다고 본다.
내용적인 요소들
많은 학자들은 신명기의 내용이 그것의 후기성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몇 가지 대표적인 견해를 살펴보기로 하자.
예배 처소 중앙화
신명기 법전이 요시왕 시대 때 성전에서 발견됐다는 학설은 신명기 12장에 언급된 중앙예배 처소의 이해에 영향을 준다. 드베트(de Wette), 벨하우젠(J. Wellhausen)은 신명기를 요시아왕의 개혁과 연관을 지었으며, 이 때 예루살렘 중앙성소가 합법화되었고, "하나님이 선택하실 그 장소"[hammaqôm (12:5, 11)]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며 요시아왕의 시대 때 쓰여졌다고 주장했다. 다소 차이는 있으나 이 견해가 오늘날까지 많은 학자들 사이에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 반면에 "하나님이 선택하실 그 장소"가 단 하나의 성소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로부터 공인된 성소의 그룹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79) 웬함(G. Wenham)은 12장 5절과 11절의 "그 장소"가 단 하나의 성소를, 아니면 다수의 성소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고 한다.80)
그러나 hammaqôm은 [16장 6절(16) 포함] 바로 뒤따라 오는 종속절("하나님이 선택하실")에 의해서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숫자보다는 하나님의 선택에 강조를 두어야 한다. 더우기 만일 "그 장소"에서 멀리 사는 이스라엘인이 고기를 먹고 싶을 때 "그 장소"까지 가지 않고 자기의 성에서 짐승을 잡아도 되는 허락(신 12:21)이나, 16장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선택하실 hammaqôm에서 거행해야 하는 3가지 축제인 유월절, 칠칠절 및 초막절은 애굽에서의 종살이와 연관있는 국가적 축제이므로,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hammaqôm에서 거행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며, 반드시 요시아왕이 행한 개혁의 결과로 이루어진 규정이라고 할 수는 없다.81)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실 그 장소"는 전 국민적인 중앙의 성소(the national sanctuary)이지만, 신명기는 그 선택된 장소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며, 그것이 예루살렘이어야 함도 암시하지 않는다.82) 게다가 요시아왕 이전에도 중앙성소의 집결의 경향은 있었다: 사사기 시대, 벧엘(삿 20:27) & 실로(삼상 1:21); 다윗 시대부터 예루살렘.83) 그러므로 신명기의 예배 처소 중앙화를 요시아왕 개혁과 관련지어 신명기의 후대성을 주장하는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
천체 숭배84)
학자들은 신명기 4:19; 17:3-7의 천체 숭배 금령이 BC 8세기 때에 앗시리안 영향 아래 유다에 소개된 천체 숭배와 관련되었다고 추정한다. 천체 숭배가 앗시리안인들에 의해서 유다 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견해는 코간(M. Cogan)과85) 멕케이(J. McKay)에86) 의해서 반박을 받았으나 다시 슈피커만(H. Spiekermann)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87)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슈피커만이 앗시리안 영향으로 인해 유다에 소개되었을 앗시리안 종교를 증명하기 위해서 사용한 앗시리안 문헌은 그의 명제(thesis)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 중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 티그랏필레저 3세는 반란을 시도한 그의 봉신 하누누(Hanunu)가 다스리는 가자(Gaza)를 원정한 후, 하누누를 포용해서 다시 그의 지위를 회복시켰다. 그리고 티글랏필레저 3세는 전자는 앗시리안 신들과 자신의 화상(image)이 새겨진 상(statue)을 하누누의 궁전에 세워, 자기의 봉신국가 신들에 포함시켰다.88) 이 경우는 티글랏필레저 3세의 연보에 나타나는 종주가 그의 봉신의 궁전에 그러한 상을 세운 유일한 사례이다. 게다가, 가자는 티글랏필레저 3세가 앗시리안 시장(emporium)으로 변경시킨 유일한 도시이기도 하다.
앗시리아 제국과 이집트 사이의 경계에 세워진 이 시장은 이집트와의 무역과 관계가 있다. 코간(M. Cogan)에 따르면, 이것은 영구적인 앗시리아 근거지(a permanent Assyrian presence)가 주둔되었다는 것이다.89) 아마도, 타글랏필레저 3세는 가자에 앗시리안인들을 주둔시켰으므로, 그는 앗시리아 신들의 형상을 세웠을 것이다. 때로는, 앗시리안 왕들은 정복된 국가나 봉신국가에 신들의 상징이 새겨진 상들을 세우곤 했었다. 더우기 BC 12세기에서 BC 7세기 앗시리안 연보에 의하면 앗시리안 왕들은 그들의 봉신국가에 앗시리안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다. 타글랏필레저 3세가 자신과 앗시리안 신들의 화상이 새겨진 상을 가자에 세워 가자의 신들 중의 하나로 본 것은 앗시리안 제식(cult)의 부과도 또한 가자의 제식(cult)을 중단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티글랏필레저 3세의 가자에 대한 조치는 앗시리안 봉신에게 앗시리안 종교를 부과시켰다는 어떤 일반화를 지지하지 않는다.90) 게다가, 천체 숭배는 일찍부터 고대근동 세계에 고루 퍼져있던 종교 예식 중 하나였으며,91) 고고학적 발굴물이 보여주는 것은 유다의 앗시리안 봉신 신분 이전부터 이미 천체가 팔레스타인에서 숭배되고 있었다.92) 이러므로 신명기에 나타난 천체 숭배를 봉신국에 대한 앗시리안 정책과 연관짓는 것은 타당하지가 않다.
포로의 개념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28장의 나라의 파괴(the destruction of the land)와 포로(deportation)에 관한 내용을 포로기에 썼다고 본다-예를 들면, 슈토이어나겔(C. Steuernagel), 세이츠(G. Seitz), 멕카티(D. J. McCarthy) 등이 그렇다.93)
그러나, 포로의 개념과 그것의 경험은 BC 2000년기와 1000년기에 히브리인들과 다른 소수 민족들에게 항상 가능한 위협이었다. 키친은 고대 문헌에 나타난 포로와 재식민(resettlement)증거를 BC 1800년부터 BC 879년까지 나열한 후, 북왕국의 이스라엘인들(약 BC 734, 722)과 남왕국 사람들의 포로경험(BC 597, 586/7 등)은 고대근동에서 일어나는 포로 경험의 긴 시리즈 중 몇 개에 불과하다고 했다.94) 그리고, 이런 위협이 고대 바빌론에서 신 앗시리안 저주문헌에 이르기까지 잘 반영되어 있다.95) 예를 들면, 함무라비 법전에 보면, 함무라비의 후계자는 누구든지 석비에 새겨진 법을 지키지 않거나, 변경하거나, 또는 함무라비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거나 아니면, 어떤이를 고용해서 동일한 행위를 하게 되는 자에게 신들의 저주를 기원한 리스트에 포로의 저주가 나타나있다.
다시 말해서, 법을 지키지 않는 것과 비문을 변경시키는 것을 예상해서, 그러한 행동을 금지하며, 그런 행위를 저지른 자를 벌하고, 비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포로의 저주(벌)를 기원한 것이다. 이러한 저주의 예상적이고, 금지적-보호적(anticipatory, prohibitive-protective) 역할은 문서와 중요한 물건과 건물 등을 보호하기 위하여 BC 3000년기 후기부터 BC 1000년기 까지 두루 나타나 있다.96) 이 분석에 비추어,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나라의 파괴와 재식민 그리고 포로와 관련된 내용이 반드시 이스라엘의 경험을 반영한다고는 할 수 없다. 고대 근동의 저주 기능과 동일하게, 이 세가지 내용은 예상적이며, 언약을 어기는 것을 금지하고, 언약을 지킴으로 그것의 관계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언약 저주의 기능의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97)
법
그린구스(S. Greengus)의 구약에 나타난 법과 고대근동의 법의 비교에 따르면, 신명기에 포함된 재료들은 고대근동의 법과 비교하면, 후기 미들 앗시리안 법(the later Middle Assyrian laws)이나 신 바빌로니안 법(Neo-Babylonian laws)보다 BC 3000년기 후기에서 BC 2000년기 초기의 법과 유사하다.98) 이 유사점 자체가 물론 신명기 연대 측정에 도움을 주지는 않지만, 신명기 형식(위를 보라)을 고려할 때 신명기 후기의 연대보다 초기의 그것을 지지한다고 볼 수 있다.99)
모세 : 야훼의 대리인(Representative)
많은 학자들은 모세의 스피치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근동의 문맥에서, 대리인은 보낸 자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앗시리안 왕들은 군사 원정에서의 자기들의 승리는 신들의 공덕이며 자기들에게 반항하는 나라들을 신들을 적대시한다고 이해했다.100) 그리고, 앗시리아의 적국을 앗수르 신의 적이라 칭했으며,101) 앗시리아의 봉신(vassal)을 아슈르신(A
ur)의 봉신이라 칭했으며,102) 갈수록 커지는 앗시리아의 통치권을 아슈르신의 승리와 지배로 이해했다.103) 보내심을 받은 자는 그를 보낸 자의 권위를 가지고있다는 아이디어는 힛타이트 봉신 조약에도 나타난다.
힛타이트 봉신(his vassal)이 그의 아들이나 메신저를 그의 종주(the suzereign)에게 보내면 그들은 힛타이트 봉신 대우를 받았다.104) 동일한 대우를 봉신도 그의 종주에게 하듯 그의 종주의 메신저를 대해야 했다.105) 구약 성경에도 왕이 보낸 메신저는 왕의 권위로 그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나타나있다(열하 18:17-28). 이 아이디어는 현대사회에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외국에 파견된 대사는 지신을 파견한 대통령의 권한을 가지고 직무를 수행하므로, 그것을 행하는 데 있어서 대통령을 대리하므로 그와 같은 권위를 가지고있다. 이러한 대리인의 역할과 그의 권위의 문맥에서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 언약을 갱신하는 그의 스피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고대근동의 문화적 교류106)
이스라엘 나라는 지리적 위치 덕분에 앗시리아와 접촉이 있기 오래 전부터 고대 근동의 여러 문화의 영향을 누리고 있었다.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문화의 유물들이 고대 근동 세계의 무역 관계를 드러내며, 히브리어 성경이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아간이 여리고 성에서 약탈한 품목 중에 포함된 외투의 출처는 시날인데(수 7:21), 이것은 BC 2000년기 때 상부 메소포타미아(Upper Mesopotamia)와 아나톨리아(Anatolia)에 통용하고 있었던 바빌론을 위한 이름이었다.107) 밀라드(A. Millard)에 따르면, 모직 천과 의복은 일찍(early times)부터 바빌로니안 무역의 주요 산물 중 하나였다.
BC 2000년 직후, 직물 산업은 아마도 바빌론에서 가장 컸으며, 상업 측면에서 가장 중요했다. BC 19세기에는 앗시리안 무역 상인들은 직물과 주석을 규칙적이며, 대규모적으로 아나톨리아(Anatolia)로 수송했었다.108) 고대 근동 국가들은 문화적으로 서로 밀접한 교류가 있었음은 지리적으로 서로 근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태학적, 사회학적, 문화적 환경이 유사하여 문화적으로 공통된 점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다른 고대 국가와의 관계를 BC 8-7세기로 좁혀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청동기 후기시대(the Late Bronze Age)의 문어적 활동
신명기의 형식이 BC 2000년기의 조약 형식을 따른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위의 "신명기 형식"을 보라), 신명기의 시대적 배경은 청동기 후기가 된다. 청동기 후기는 문학적 활동이 활발한 시대였으며, 특히 레반트(the Levant)가 아카디어 설형문자보다 훨씬 간단한 설형문자의 탄생과 가나안어 알파벳의 표준화를 보게 되었던 시대이기도 하다.
밀라드(A. Millard)에 따르면, 필경자들의 훈련(the scribal training)은 메소포타마안 모형을 따랐는데, 처음에는 표준이 되는 설형 문자와 단어 리스트로 시작해서, 다음으로 고전적인 수메르-아카다안 문헌을 베끼는 것으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이 동일한 과정의 교육적 모형은 설형문자가 퍼졌던 어느 곳에서든지 볼 수 있었고, 청동기 후기에 최서단의 유브라데스 강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에마(Emar)에서 지중해 연안과 가나안을 지나서 이집트까지 잘 증명이 되어 있다.109) 필사경 교육과 함께, 수메르어와 아카다어 문학이 레반트에 보급되었다.110)
더우기, 아카다안 설형문자보다 훨씬 간단한 우가릿어 설형문자 알파벳은 우가릿 문학적 창작(신화와 전설)과111) 함께 아카다안 텍스트의 번역을 촉진했었다. 또한, 우가릿어 텍스트는 후리안(Hurrian)과 이집트어와 힛타이트어로 번역되기도 했으며,112) 아카디어 문학은 후리안과 힛타이트어로 번역이 되었다.113) 고대 근동의 왕들이 이집트 바로왕에게 보낸 엘-아마르나 서신(the El-Amarna letters)이 보여주는 바는 청동기 후기의 국제 외교관계는 문서로 이루어졌으며, 문서 기록은 왕실의 행정에 통상적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엘-아마르나 서신에 이집트 시가 인용된 것을 볼 때, 가나안 필사경들은 이집트 문학에 대해서 익히 알고있었던 것 같다.114) 더우기, 청동기 후기에 이집트와 레반트의 외교적 관계로 인한 행정은 레반트에 문어적 활동을 조성했으며,115) 청동기 후기의 말에는 가나안어 알파벳(the Canaanite Linear alphabet)이 전 레반트에 두루 표준적으로 사용되었다.116)
밀라드에 따르면, 청동기 후기에 속한 문학적 유형의 레파토리는 다음과 같다. 가장 분명한 유형은 오랜 전통의 일부인 조약 텍스트이다. 힛타이트 기록 보관소(Hittite archives)와 우가리트(Ugarit) 그리고 아라라크(Alalakh)에서 발굴된 문헌이 예증하듯이, 조약 문헌은 BC 2000년기에 두루 사용이 되었으며, 그 형식의 변화는 1000년기에 나타났다(위의 "신명기 형식"을 보라). 전체 사회 또는 특정한 그룹의 사람들을 위해서(for the whole of society or for special groups of people), 법률과 법규의 수집(collections of laws and regulations)이 바빌로니안과 앗시리안 그리고 힛타이트 궁전에서 편집이 되었다. 여행 안내서와 리포트 그리고 여행 중 일어난 사건들, 때로는 왕들의 군사원정과 칙허의 임무에 관한 것과, 이집트어 풍자적인 서신(the Egyptian Satirical Letter) 그리고 웬아문(Wen-amun)의 상세한 가나안 여행 리포트의 기록들이 있다. 초생달 반달 지대의 설형문자를 썼던 문화는 다양한 종교적인 의식에 대한 텍스트를 유산으로 남겼었다. 다소의 텍스트는 우가리트에서 나온 그것 처럼 상당히 짧지만, 긴 것도 있다. 한 바빌론 토판(tablet)에 포함되어 있는 줄 수(line)가 630이 넘고, 에마르(Emar)의 제의법 텍스트들(rituals)의 길이는 200줄이다. 에마르의 한 제의법 테스트는 일 주일동안 거행되는 여 제사장의 임명식(installation)에 관한 예식으로서, 레위기와 관계되는 다수의 비교되는 요소들을 제공한다. 설형문자 토판(cuneiform tablets) 수집의 중요한 예는 아슈르(Ashur)에서 발굴이 되었는데, 이 토판들은 티글랏필레져 1세 (약 1114-1076)시대 때 앗수르 왕국의 관할 구역(provinces)의 지도자들이 앗수르 신에게 보내었던 규칙적인 제물(the regular offerings)을 기록하고 있다.117) 이와같이 청동기 후기는 문학적 활동이 활발했었고, 문어적 시대였다.
이러한 청동기 후기의 문어적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신명기가 그 시대의 작품임을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118)
나오는 말
신명기의 문체와 형식 그리고 그것의 내용은 신명기의 고대 문맥에 합당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이 점을 배제한 신명기 편집설과 BC 7세기의 신명기 연대설을 지지하고 있는 견해는 고대근동의 문헌에 비추어 보면 그 설득력이 없다. 신명기 편집의 과정을 반영한다고 주장되어 온 신명기의 문체는 유일무이한 것은 아니다. 신명기의 문체는 BC 2000년기에서 BC 1000년기의 고대 근동의 문헌에 나타나는 문체와 동일하다. 이 동일한 문맥에서 신명기 28장(23절)과 VTE에 나오는 유사한 문학적 표현과 신명기 28장과 VTE의 저주 형식과 그것의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 아울러, 신명기를 구성하 고 있는 언약의 개념과 모세와 야훼의 관계도 고대 근동의 문화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신명기는 BC 2000년기에서 BC 1000년기의 문헌의 특징과 문화적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신명기 형식은 신명기를 BC 2000년기와 BC 1000년 사이에서 좀 더 분명하게 좁혀 볼 수 있는 기준으로 볼 수 있겠다. 모든 BC 2000년 후반의 조약은 역사적 서문이 나타나는데, BC 1000년기 조약의 특징은 역사적 서문이 거의 결여되어 있다. 전자의 경우, 저주 리스트가 축복의 그것보다 길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모든 조약에 축복 리스트가 결여되어 있으며, 오직 긴 저주 리스트만 나타나 있다. 그리고, 신명기에 나오는 토라(torah)의 내용은 BC 2000년기의 법과 유사하다.
게다가, 청동기 후기시대의 문학적 활동에 비추어 보면, 신명기가 그 시대의 산출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명기 그 자체가 묘사하는 시대는 이스라엘이 그 약속의 땅(the Promised Land)으로 들어가기 전인데, 그러면 그 시대는 언제인가? 이스라엘이 언급된 가장 오래된 증거는 이집트의 바로 메렌프타(Merenptah)가 약 BC 1220년에 가나안 원정에서의 그의 승리를 기록한 그의 석비이다. 이 사실은, 이스라엘이 BC 1220년 이전에 가나안에 정착했다는 것을 제시한다. 좀 더 분명한 연대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연대와 연관되어 좀더 좁혀질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분석에 비추어볼 때, 분명한 것은 신명기의 연대는 BC 2000년기 후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119)
_______________
<Abbreviations>
ABD - Anchor Bible Dictionary
BAR - Biblical Archaeology Review
Bib - Biblica
CBQ - The Catholic Biblical Quarterly
ETL - Ephemerides Theologicae Lovanienses
HDT - G. Beckman, Hittite Diplomatic Texts
JBL -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LMAM - M. T. Roth, Law Collections from Mesopotamia and Asia Minor
NBD - New Bible Dictio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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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리버풀(Liverpool) 대학교 Ph.D, 영남신학대학 강사
출처: 성서사랑방/ http://www.iktinos.org/srb/8/99-8-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