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
-최석영-
6부 소리 13회
추구가 오영감 등을 떠민다. 이런 일은 서둘러 마무리 짓는 것이 편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병든 어미를 두고 떠나는 딸년의 마음이 오죽하고 핏덩이서부터 친딸로 여기고 정붙이며 살아온 애비의 마음이 어떠할까를 헤아려 보지만 떠나보내야 하고 떠나야 하는 마당에 그것들이 또 무슨 소용인가. 그저 가슴팍에 시퍼런 멍만 들 뿐이다.
옥선이는 할아버지를 따라 광한루 천변 난전에 뒤 광한루 후문이 있는 동네 어귀 어딘가에 있는 아담한 집으로 들었다. 어미에게 듣기에는 해남서 무일뿐으로 떠나와 입 하나 덜자는 심정으로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하더니 허름하여도 깔끔한 집 한 채라도 장만해 있는 것이 용하다 싶은데 옥선이의 할아버지 오대성 영감이 동학에서 하는 일은 집사 격으로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는 동학교도들이 낸 헌물 헌금을 현금으로 관리 하면서 천변 가에 늘어선 난전의 점포를 얻어 세를 불린다거나 섬진강을 타고 삼천포에서 올라 온 소금 배며 생선 배에서 물건을 받아 함양과 무주에 있는 사람들(옥선이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미루어 짐작 하건데 그들 역시 동학도 일 것이다.)에게 물건 대 주는 일을 관장 하는 듯하였다. 하지만 오영감이 직접 나서지는 않고 밤이면 찾아 드는 몇몇 사람들에게 일을 주고 일을 받았다. 또 오영감은 달포에 한 두 번씩 출타를 하였는데 아마도 그간의 재정 관리를 또 누군가에게 보고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래서 운봉 나졸이나 아전들이 오영감의 행방을 몰랐던 모양이다.
“네 에미 걱정은 말거라. 내가 아는 포수를 시켜 애비에게 총질이나 가르쳐 주라 시켰으니 호구책은 찾을게다.”
“그도 동학이요?”
“아전과 토호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네 애비를 감시하고 있을 텐데 동학을 붙일 수야 있나. 제 깐 놈들이 아무리 들고 파도 똥꾸멍 밖에는 못 볼 테니 그런 염려들이랑 말고 너는 여기 드나드는 젊은이들 중에서 똘똘한 놈 하나를 골라봐라. 할애비도 점찍어 둔 놈이 있다만 네 사람 보는 눈도 좀 보자.”
옥선이 볼이 발그스레해졌다. 성질이 당찬데다 제 어미를 따라 주막 일을 거들어서 인지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않던 아이지만 시집 이라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방망이질을 친다. 오영감과 옥선이가 고른 신랑감은 소금 배에서 소금을 받아 임실 장에 대는 박가였다.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대원군이 며느리에게 밀려 청나라로 끌려간 이후 동학은 더 이상 지하에 숨어있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고 자유롭게 동학입네 어쩝네! 떠들고 다닐 처지는 아니었지만 제 집에 들어갈 때 도둑처럼 숨어들지 않아도 되었고 대낮에 모임을 가질 수도 있게 되었다.
옥선이는 박평돌 이라는 이에게 시집을 갔다. 대원군이 청나라로 끌려 간 해였는데 박평돌은 장수 장개 지역 포교를 맡아 가족이 장개 월평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곳에서 상연이 어미 유선이를 낳았다. 그 때 까지만 하여도 장수 장개는 운봉현 관할이라 장개방이라 불렀는데 다행히 운봉현 관원들이 오대성 영감이나 옥선이에 대한 추적이 없었음으로 평온한 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때가 옥선이 일생에 가장 평온한 시기였고 인생에서 행복을 맛본 때였다.
[동학 이야기]
고선배의 차는 오거리 주유소에서 우회전을 하여 향교동 다리를 지났다. 꿈속에서 보았던 P씨의 집이 보고 그리고 P를 감시하던 심부름센터 직원이 세 들어 살던 구멍가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고선배에게 그런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고선배는 기자였고 수사본부와 남원경찰서에서 고급 정보들을 접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선배의 차는 남고 앞을 지나 한국콘도 뒤를 돌아 교룡산성이 안으로 들어갔다. 산성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도 건재했던 탓일까? 잘 정돈된 잔디공원과 위락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아마도 학생들이 수학여행이나 소풍을 오는 용도로 쓰이는 모양이다.
70평 정도의 절터가 보였다. 기와장도 보였고 대나무와 습기 찬 샘터도 있었고 외쪽에 산신지위(山神之位)라고 음각된 암벽도 있었다.
“원래는 덕밀암 이었는데 수은 최제우 선사가 은적암이라고 고쳐 불렀다더군. 여기서 수덕문과 몽중노소문답가를 지으셨다는군.”
“그런 거 말고 그분의 행적 같은 거 아는 거 없어요? 난, 그런 게 궁금한데.”
“통유라는 책이 있지. 그곳에 쓴 글을 보면 이곳에 온 동기가 나오는데 빗나가는 세상 도리를 살피고 관의 지목이 있었다는 말로 봐 지금 말로 하면 지명 수배를 받았던 모양이야. 1861년 11월 그러니까 양력으로는 12월 쯤 되었을 때 제자 최중희를 대동 하고 광한루 오작교 밑에 사는 서형칠의 집에서 10여 일간 머물다가 서형칠의 생질 공윤창의 집으로 옮겨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지.”
서형칠? 꿈속에서는 최모씨라고 하였는데 역사적인 기록과 인물이 다르다. 왜일까? 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오씨 영감이 가명을 사용한 것일까?
“남원에 동학이 들어온 것을 그때가 시초로 보는 경향이 커. 기록도 뚜렷하고. 그때부터 양형숙, 양국삼, 서공서, 이경구, 양득삼 등이 제자가 되고 전주에서 신모라는 사람도 들어 왔다고 되어 있더군. 그러다가 서형칠이 수은 선생을 자기 집에 모시고 있기에는 사람들 이목도 있고 분주하여 수은을 덕밀암(德密庵)으로 옮겼고 대선생주문집에는 그 때가 섣달그믐 이라고 돼있어.”
고선배가 말하는 부분에 대해 아는바가 없다. 그 부분은 꿈으로 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가지 불일치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꿈속에서 옥선이 할아버지는 수은 선생이 운봉을 지나가기 십 여 년 전부터 동학 사상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에 심취하여 있었는데 고선배가 말하는 기록대로라면 그 십 수 년이 연대적으로 착오가 있다. 아마 기록에 오기가 있거나 꿈이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은적암 건물이 접주 심노환(沈魯煥)의 도소였다는 이유로 관병이 불살라 태워서 없앴는데 이나마 이렇게 복원하여 놓은 것은1990년에 일본 도예가 심수관이 라는 사람이 저기 채화대에서 채화를 해 갈 때라는군. 어리석게도 남원으로서는 감추고 싶었던 역사였던 모양이야.”
먼 조상 오대성 영감에 대한 기록은 없는 듯 했다. 재정을 담당 했던 것으로 봐 남원지역 동학 내에서도 그렇게 작은 지위는 아니었을 텐데 왜 이름이 없을까? 어쩌면 할아버지도 가명을 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팽배한 유교관습에서 조상과 같은 자기 성을 버리고 가명을 쓸 수 있었을까? 고선배가 은적암과 수은 선생과의 관계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하였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누가 언제 이 성곽을 짓기 시작하였을까?
“고선배 혹시 용성국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
고선배가 수첩을 꺼냈다. 기억력 좋은 그가 수첩을 꺼냈다는 것은 그만큼 데이터가 많다는 얘기라 나의 관심을 끌었다.
“용성국은 마한의 제후국 가운데 하나였고 여기 남원에서 560여년을 이어온 유서 깊은 나라였다는 게 요즘 학계에서 받아들이는 정설이라는군.”
용성국이 560년이라는 세월을 유지했다? 그렇다면 운봉에 있었다던 대방국은 용성국의 제후국이었을까?
“백제가 기름진 호남평야를 포기할리 없었고 때문에 점점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자 마한의 옛 거수국들의 자유도 위협받았지. 이들 가운데 일부는 백제와 싸우는 서나벌에 투항했고, 일부는 백제에 항복했으며 나머지는 고향에 남아 그대로 백제와 맞섰지.”
고선배가 건넨 파일에는 용성국에 관련된 기사들 이었는데 사학에 관심이 없는 일반 사람들로서는 처음 듣는 내용들이었지만 꿈속에서 보았던 일들과 결부지어 보면 일부 맞는 내용도 있었고 틀린 부분도 있었다.
-석탈해는 배에 보물과 백성, 노비들을 싣고 백제군을 피해 달아나 한 해 전에 세워진 가야(伽倻)로 쳐들어가 뇌실청예 왕(김수로왕)을 쳐들어갔다. 김해가 용성국보다 더 동쪽에 있어 훨씬 안전해 보였고 (백제군과는 달리) 가야군은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하면 뇌실청예 왕을 무찌르고 김해에 정착해 새 나라를 세울 수도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야는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고 김해 토착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어 용성국 군사는 있는 김수로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은 쫓겨 나 경주 동북쪽에 있는 하서지촌(下西知村) 바닷가(지금의 포항 앞 영일만)도착했다. 이때가 서기 43년이다. 석탈해는 아진포 사람들에게 자기 일행의 사정을 설명했고, 가져간 보물을 나눠 주며 함께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아진의선은 석탈해 일행을 받아들였고 마을 사람들에게 품질 좋은 쇠로 만든 농기구와 어구, 생활용품을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하서지촌 사람들과 용성국 사람들 사이에 쌓인 친밀감은 석탈해가 아진의선의 '양자'가 되면서 더욱 굳어졌고, 석탈해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일에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석탈해는 하서지촌의 남쪽에 있는 토함산을 차지한 뒤 꼭대기에 작은 요새를 만든 뒤 오래전 왜(倭)열도에서 건너와 정착한 고을나라를 쳤는데, 그 나라의 군주( : 그곳 백성은 군주를 '호공'이라고 불렀다)는 토함산에서 나타난 침입자에게 무릎을 꿇었고 율포국(경주 양남면, 양북면)과 모화국(경주 외동읍 일대)도 석탈해에게 점령당하였다. 그후 석탈해는 호공의 땅에 성을 쌓고 나라를 세웠다. 그 뒤 거서간 사람들이 쳐들어와 빼앗겼다가 다시 되찾은 석탈해는 250여년전 진(秦)나라의 초원지대에서 고조선으로 달아난 유목민의 후손을 정복하여 수하로 둔 일이 큰 힘이 되었다. 이 족장은 신라의 장수가 되어 우시산국(于尸山國 : 지금의 울산·양산시, 울주군 일대)과 거칠산국(:지금의 경상남도 동래군 일대)을 쳐 승전하였다. 결국 석탈해는 진한 땅에 정착한지 15년(서기 57년)에 새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나라 이름은 신라(新羅)였고 군주를 부르는 말은 이사금이었다.-
“꿈대로라면 나의 조상은 대방국 사람이었고 교룡국왕 석타래는 우리 조상을 배신하고 김해로 탈출해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반대로 나의 조상 대방국은 삼백년 가량 잔존하다가 신라 기림왕에게 항복을 했다.”
“글세- 야사에 전해지는 몇 가지 자료들로 역사를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런 것들이 중요할까? 그 오래전 역사를 현재와 결부 짓는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그야말로 소설이 될 수도 있을 거야.”
“알아. 하지만 석타래가 우리 조상을 바람 막이로 이용한 이후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아….”
고선배는 아직 내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면 영원히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두보(杜甫)의 시에, ‘방장산은 바다 건너 삼한에 있네’라는 구절이 있지요. 그리고 그 및 주석에다가 ‘방장산은 대방국(帶方國) 남쪽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방장산은 두류산이고 두류산은 지리산입니다. 그러니 대방국이 역사적으로 실존할 뿐만 아니라 오백년 혹은 천년동안 명맥을 이어온 나라였을 지도 모릅니다. 저기 보이는 저 산이 지리산(노고단)을 보며 수은은 또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P였다. 그는 언제부터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것일까? 표정이나 음정이 가파르지 않는 것으로 봐 한참동안 우리 곁에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말을 어디까지 들었을까? 혹시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 적은 없는지 고선배와 나눴던 말들을 되짚어 본다. 내가 과거를 꿈꾼다는 사실을 P가 알았을까? 안다고 해도 별반 달라질건 없지만 P가 내편이라는 확신이 없는 이상, 아니 P는 분명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하수인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나를 다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도대체 P는 어디까지 나를 알고 있는 것일까? P는 범인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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