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5
제가 어렸을 때 그 때가 17~8에 그 때 유성판이 있었는데 유성판에 박춘재 선생님이 소리 한 것을 제가 알고 소리 한 것을 박춘재 선생이 했습니다.
0116 박춘재 선생의 소리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이 시골까지 왔을 땐 상당히 명창으로 유명하다는 걸 알았죠. 제가 서울로 왔다갈 때 할 때 서울 오니까 소리 선생님들이 일제 말 적인데 사랑방 같은데서 모인데가 있었습니다. 그 때 소리 선생들이 이름도 모르지만 얘기들을 했었는데... 박춘재 선생님이 오신다고 그래요. 거기 오셔요. 보니까
0208 그 땐 사진도 없고 레코드판에 사진도 안나오니까 이름만 박춘재 선생이 노래를 불렀다는 걸 아는데 내가 동경하고 정말 존경하던 그 분이 나타났는데.. 처음엔 의아합디다. 시골에선 대단했거든요.
0232 박춘재 재담이 소리책에도 있고 하니까 그 땐 오셔서 말씀을 하고 하는데 옛날 식으로 절하고 인사하고 했는데 그러고나서 그 분하고 무대 같이 서게 됐어요.
0303 그 양반이 연세가 60이 넘었을거에요. 그 땐 상당히 할아버지거든요. 그 분이 그 때 소리도 소리지만 발탈을 무대에서 많이 했어요. 발탈.,. 발에 탈을 씌워가지고... 지금은 문화재로 돼있습니다.
0352
시공관이라고 옛날 국회의사당 자리에 있는 곳에서 공연을 많이 했어요. 조선 때거든... 거기가 제일 큰 극장이었습니다. 문화행사도 하고.. 그 분이 거기서 발탈을 하시다가 그 때 포장을 치구서 발을 이렇게 내고 하는 거야. 근데 (공연중에) 이빨이 이렇게 빠져가지고...야, 이거 야단났다, 그래서 그게 기억이 나요.
0440 일제 때, 난 그 때 전문적으로 소리를 배우러 다닌 게 아니고, 공연같은 거 따라다니고 그랬는데, 근데 해방이 됐어, 그래가지고 자주 만났습니다, 박춘재씨를.
Q. 제 기억에는 48년인가, 한 50년대에 돌아가신 걸로 알고있거든요...해방 후 한 5년정도 있다가...
0520 그렇죠, 그렇게 됐습니다. 저도 몰르고 있다가 얘기만 들었죠. 그것뿐이죠.
Q. 소리책은 글로 펜으로 쓴 건가요, 아니면 그 유성기 나오기 전이니까
0543 요즘처럼, 붓으로 쓴 게 아니고 찍는 거, 인쇄물처럼 가사만 했었지요.
Q. 박춘재 선생님은 경서도 창인가요?
0600 서울 소리죠, 전문은 서울전문, 서울 무당 굿하는 거.
Q. 이선생님의 배뱅이굿은...?
0610 난 저 황해도 이북 쪽이거든요, 이북 소리에요, 그게. 그 분한테는 제가 같이 모시고 따라다니고 그랬지, 뭐 소리는... 그 분이 이북 소리는 잘 하셨죠, 근데 배뱅이굿은 안하시고.
Q. 배뱅이굿을 잘 하시게 된 동기 같은 게 있습니까?
0642 일제 때 제가 서울와서 전전하다가 제가 소리 배운 것은 이북 고향이 아니고, 우리집이죠, 우리 고향이 강원도 이천, 이북땅입니다. 황해도 황주에 가서 소리를 배웠어요. 이인숙씨라고 그 분하고 배뱅이굿 빼고 황주소리 다 배우고,
0709 그때가 일제 땐데요, 서울 올라와서 박춘재 선생님도 그 때 만나고, 신불출씨가 그 때 한창 인기있을 땝니다. 연예인이 아니라 예술가였죠. 그 때 그 분이 1인극이지만, 혼자하는 거죠, 요즘말로 원맨쇼죠. 혼자 만담하고 그랬는데 그 양반의 인기는 대단하고, 보통 코메디하는 사람들처럼 그냥 막 웃기는 게 아니고, 유식하고 아는 거 많고 아주 정말, 요즘 지위같으면 한문학자처럼 아는 것도 많고 그런데 웃기는 만담을 하고 그러니깐 레코드 판이 많이 팔리고 그래서 유명해졌습니다.
0816 내가 그 분 이래 내가 들어가게 됐죠. 신불출씨하고. 해방전에 한 6년 동안 같이 생활했습니다. 서울와서 나는 하숙하고 있고, 그 분하고 같이 지방 다니면서 공연 많이 하고 그랬죠.
Q. 공연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0867 요즘이야 TV도 있고 영화관도 있고, 지금은 안방에서 다 구경하지 않습니까? 그 때는 그게 아니거든요, 대개 구경거리는 극장에 가야 있었단 말씀이야, 그 땐 듣는 건, 청취하는 건 경성방송국이라고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가정마다 있는 게 아니라 가정에 그 필요할 때 라디오나 있고, 못 살면 그것두 없을 땐데, 그 때는 극장밖에 구경할 데가 없었습니다. 또 그 땐 단체가 엄청 많았습니다. 뭐 만담단체, 창극단 단체, 연극단체, 가악극 단체 아주 신협이라고 고상한 단체도 있고 그 때 만담 단체는 적게는 두 사람씩도 다니고 그랬는데, 보통은 대 여섯 사람이 한 그룹입니다.
1011 제일 먼저 제가 신불출 선생하고 같이 서게 된 것은 종로 4가에 제일 극장이라고 있었습니다. 없어진지 오래하지 않았어요, 이제? 일제 때 거기서 제 첫무대가 거깁니다. 신불출 선생이 주최를 해가지고서 거기다가 공연을 부쳤는데, 저하고 박천복씨라고 있었습니다. 만담 잘하고 장님 타령 잘하고 재담을 잘하는. 그리고 선우옹란이라고 있었고 신불출 선생님 계셨고 김광산씨라고 아리랑, 혼자하는 아리랑이 있어요, 칼 들고 하는 영화에서 많이 하는 거 있지 않습니까? 그걸 무대에서 많이 했습니다.
1107 네사람 다섯사람 하면 그때 순서를 어떻게 했냐면 내가 혼자하는 거 제일 먼저 나가서요, 한 30분하고요. 첨이니깐, 제일 먼저... 요즘은 스타가 먼저 하기도 했지만,,, 그 때는 유명한 사람은 끝에 나가야 되요, 그거 가지고 무척 다퉜습니다. 그 다음에 만담 단체의 박천복 형님하고 선우옹란하고 둘이 나가서 웃기는 것이 한 30분, 김광산이라고 제일극장 얘기에요, 또 나가서 아리랑, 독백, 원맨쇼죠, 그것도 한 10분 이렇게 하고 신불출 선생이 보통 한 50분하고. 그것뿐이 아니라 신정원 선생이랑 유추광 선생하면 옛날분들 다 아시지만 한문학자죠, 야담도 나가서 했습니다. 손님 모아놓고 돈 받구요, 흥행이죠. 그런 단체도 있었습니다. 야담. 신정원씨라든가, 유명하거든요, 학자들. 그럼 극장에다가 얼마씩 받고 흥행, 말하자면 장삿속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뭐 시대가 달라져가지고 안빠지고 다보고 하니깐 극장에 잘 가지도 않고, 또 극장에 왠만한 건 다 공짜로도 하지 않습니까? 거기다 쇼단체, 바깥에서 공개방송이고 하니깐, 극장에 갈 일도 없고 그때는 그런형식으로 했습니다.
Q. 그 때 극장에서 공연할 때 라디오 방송국에서 녹음하기도 하고 그랬는지...?
1314 그 때는 방송할려면 방송국 가야돼요. 일본 사람들인데요, 경성방송국이라던가? 다 돈 내고 들어와서 보는 사람들이고, 일제 땐데, 제가 서울 첨에 올라왔을 때도 해방되기 한 6,7년전인가 그래요, 방송국에서 차가 와서 모셔갔습니다. 연예인, 거기 출연자들. 요즘엔 거의다 없어졌지만요. 그리구 요즘처럼 무슨 녹음 그런거 없죠, 그때는. 생방송하구 그냥. 그런 기계가 없으니깐, 그때는.
Q. 그 때 제일극장 무대에 올라갈 때, 이선생님은 주로 배뱅이굿으로...?
1410 그 배뱅이굿을 혼자서 한 30분하면은 내가 그때 한 절반밖에 안하는거죠. 한복입구 하는 것도 아닙니다. 양복입구 하는 겁니다. 만담식으로, 일제때니깐.
Q. 배뱅이굿도 그 날 온 손님이라든가 그 날 분위기에 따라서 즉흥적인 대사도 많이 넣으시죠?
1434 네, 조금 달라집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무대에 설 때는 좀 재밌게 하기 위해서 대사도 달라지고.
Q. 신불출 선생님이 하신 얘기 중에 기억나는 짧은 줄거리 같은 거는 혹시 생각안나세요?
1500 생각이 잘 안나는데요, 그 때가 일제때라서 반일적인 얘기를 조금씩 했었습니다. 그러면 순사가 요즘말로 "COME!" 합니다! (순사 눈치보면서 하다가) 그래가지고 경찰서에 불려가면 몇 시간 있지 않고 나옵니다. 그렇게 큰 죄가 아니니깐. 그 때는 반일 사상이라는 게 다 있지만 그 사람들 앞에서 이래가지고 먹고사니까, 더 그 쪽에 딱 붙어가지고 그런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한 번 그런데 들어갔다나오면은요, 인기가 더 올라갑니다. 아, 저 신불출 선생 경찰서 들어갔다 나왔다구, 아무래도 일본놈들 좋아안하지 않습니까? 한국사람이니까. 겉으론 뭐 이러지만 속으론 반일적인 얘기들은 환영하니깐 신불출 선생이 위치가 더 높아지고 그렇게해서 아마 그 땐 뭐 어리니깐 나도 잘 몰랐지만 그런 뜻에서 아마 만담을 재밌게 하면서 반일적인 사상이 있는 것처럼 얘기하고 많이 들어갔다 나오고 그랬는데 그게 자기 인기의 전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648 그리고 요즘 드라마에 나온다던데 보진 못했는데요, 그 양반이 명동에 그 전에 극장 하나 있었습니다, 거기서 만담하다가 해방운동 하는 학생들에게 구타당하고 얼마있다가 이북으로 넘어갔거든요. 태극기 가지고. 가보진 못했지만요, 그 양반의 만담전술이란 게 그렇습니다. 그 얘길 조금만 더 들으면 이해가 됩니다. 태극기를 보더라도 위에가 빨갛고 아래가 까맣지 않느냐? 위에가 세상을 누르면 아래가 죽여지지 않느냐? 그렇지만 아랫것이 기운이 세면 쓰러진다해도 넘어진다해도 벌컥 뒤집어지는 수가 있다. 그런 만담을 할려고 한거예요, 사실은 그 양반이. 근데 그전에 학생들이 그 땐 한창 해방 후에 좌우익 사상이 떠들고 할 때여서 그런 만담을 하고 그랬는데, 결국 구타당하고 하니깐 더 반감이 있어가지고 아마 월북했을거예요, 그래서 넘어갔죠. 뒤집으면 우리나라가 이긴다 이런 얘기였는데 그걸 끝까지 안들었다 이말이야. 병원까지 갔었죠,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 때. 조금 어딜 조금 다친 모양이에요, 많이는 안다쳤습니다.
1830 해방후에는 내가 신불출 선생을 한 5, 6,7년 같이 있다가 해방 후에 그 때 우리나라 국악이다 이래가지고 난 소리 계통으로 나오고, 그 분 이따금씩 만나고 그 양반 따라다녔죠. 그러다가 넘어갈 땐 매맞은 얘기만 들었는데.
1856 요즘 드라마에 빨갱이 대장으로 나온답디다, 다 재밌게 하기위해서 작가가 그렇게 썼겠지만 근데 내가 생각하기엔 그 양반이 그렇게 빨갱이도 아니라고 봅니다. 그저 순수한 사람인데, 그렇게 인기도 올라가고 사람이 먹고 살아야되니깐, 돈벌어야 되니깐...
Q. 월북한 예술인 중에서 무용가 최승희 선생님과 신불출 선생님, 두 사람만 연구실을 만들어줬다고 하던데...
1936 그랬을지도 모르죠, 내가 들은 얘기니까, 그 예술단 넘어왔을 적에요, 제가 공연은 같이 못했어두요, 파티석에선 뽑혔잖습니까, 나라에서 시켜주는 파티, 거기서 그 사람들하고 얘기를 해봤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얘기가, 거기에 여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조명암씨라고 있었거든요, 얘기 많이 들었을겁니다. 작사가요, 이북가서 인제 2,3년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양반이 연극 창작하고 가요 작사 많이 썼거든요, 그래서 한 때는 다 작사를 외국사람 이름으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 알 수 있는 얘기가 바니하우스 같은 거 지금은 괜찮으니깐 나라에서 돈 많이 물어줬습니다, 작사, 저작권 빌려서 나온 거. 그 분(조명암씨)의 안내라 그럽디다. 그런데 신불출 얘기를 잘 압디다.
2046 신불출이가 거기 넘어가서 부인하나 얻어가지고 딸 하나를 낳았대요, 그런 다음에 술장사(비아홀)를 국가에서 시켜서 해줬대요, 그것이 뭐냐, 정보수집하는 데야. 저녁에 대학생들 나와서 옷 갈아입고 술 이렇게 하는데, 그것이 정부기관이 해요, 그걸 시켰데요. 뭐, 저런 얘기까지 하나 했는데, 근데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신 지 오래에요. 부인은 돌아가셨단 말 못들었는데. 딸 하나 있다구 그러더라구요.
Q. 이선생님이 같이 신불출 선생님하고 같이 활동하시고 그럴때, 옆에서 혹시 보면 만담재담을 본인이 직접 생각합니까? 누가 써줍니까?
2145 아니요, 그 사람 다 창작입니다. 레코드판에 있는 것두 다 창작입니다. 요즘 만담하는 분들이 더러 이거든요, 요즘 다 돌아가시고 장소팔 씨도 돌아가시고 김영운씨라고 있지만, 지금 창작이라는 것은 얼마 없습니다. 그 때 옛날꺼 흘러 내려오는 것을 분칠해가지고 재미있게 만들어서 하는데요, 신불출씨는, 첫째 시골 가면 여관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처럼 좋은 여관이 없을땝니다. 조그만한 데서 일제때 전쟁때 더군다가 시골에서 삼류여관이니깐, 일류여관이라고 그래요, 밥상하나 달라고 그래요, 거기다 원고지 내놓고 뭘 씁니다. 밤낮 연구하고 그런 분이에요,
2254 내가 기억나는 것은 하도 많이 들었지만 완전히 기억나는 것은 한가지, 이런 만담이 있었습니다. 아주 느린 사람이 있는데, 얼마나 느리냐면 게으르냐면, 음식을 이렇게 많이 갖다 놓잖아요, 얼마나 게으른지 집에 가기 싫어서 안먹었다는 그런 만담도 했구요, 아무것도 아닌건데, 그 양반은 재밌게 해요, 그리고 그 양반 무대에 나가서 그건 안했습니다. 번대머리라는 게 있어요, 레코드판에. 번대머린가? 번대머리 영감? 그게 항의한다 말은 거에요, 일본말로. 그것이 레코드판에 제일 많이 팔렸어요, 무대에서 하는 거는 한번도 못봤는데. 만담 레코드판에 여자아이가 그래,
2358 영감님! 왜그러냐? 영감님은 참 좋겠어요! 왜 좋아야? 영감님은 번대머리가 돼서 참 좋겠어요. 기가막힌 얘기 하지마라, 내 머리가 번대머리가 돼서 모자쓰구 운동장에 못간다. 왜못가요? 야, 내가 모자 벗구 운동장에 갔다가 내 머릴 후덕볼인줄 알고 발길로 찰테니까, 발길로 차는게 무슨 망이야, 으하하하하 - 이런 만담이 있었어요. 무척 많죠, 만담.
후덕볼은 축구공이란 얘기죠, 그렇죠, 서양말이니까. 머리가 번대머리니까, 또 많아요, 두세가지 되는데,
2459 밤에 나 모자 벗구는 잠 못잔다. 왜 잠 못자요? 야, 내 머리가 오강인 줄 알고 얘들이 오줌을 쌀테니까, 으하하하 영감님 대가리는 후덕볼 대가리~ - 이렇게 여자가 창하고. 그런 만담이 있었습니다. 그 판이 제일 많이 나갔어, 그래서 신불출씨가 그 때 유명했었습니다.
Q. 같이 생활하실 때 얘기...?
2535 그 양반의 얘기만 들었지, 그 양반의 내력은 모르죠, 내가. 어느 학교 다니고, 어떻게 자랐고 그런건 모르고요, 하여튼 나하고 다닐적엔 무대에 나가서 그거하고 밤낮 쉬지 않고 뭘 만들고 그건 사실이에요, 안놀았답니다. 그러니까 나보고도 하는 말이, 지금이야 나이먹고 뭘 알려고 하는데, 그때만해도 그런 생각이 있어요? 어떻해든지 내가 무대에 나가서 잘해가지고 그거나 생각하지, 야, 자네 공부 좀 하게, 그래 내 생각에 지금 나이에 무슨 공부를 하나, 그 땐 어릴땐데두, 근데 그 양반은 참 노력가야, 노력가,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 땐 몰랐죠. 그리고 그 양반은, 저 뻐꾹이라고 있어, 뻐꾹이 사무실에 가믄 저 박춘재 선생님 사진도 있고, 신불출 선생님 사진도 있고 다 걸어놨어. 벽걸이에, 옛날 사람들.
Q. 재담에 관해 더 알고 싶은데요...
2707 그렇죠, 그래서 그 양반이 그 전부터 박춘재씨를 상당히 숭배했습니다. 재담을 잘하신다고 해서, 재담이 조금 시대가 말하자면 발전해가지고 만담이라고 그렇게 만들었다고 볼수있거든요, 혹은 재담인데, 재담. '재주 재'자, 재담 아닙니까? 그게 이제 발전해가지고 일본사람들이 그 때 만담을 많이 했고, 만사이. 지금도 많이 합니다, 만담이라는 것이 일본에는 만담이라는 말이 없고 라꿍우라 그래요, 일본말로. 그것을 방송도 많이 해요, 텔레비전도 많이 하고 그러는데, 그것을 쭉 하는데 만사이도 많이 하고. 어느 정도 국가에서 장려를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NHK에서 일년인가 몇 년에 한 번씩 경연 그런 걸 해요, 신인 뽑고 그럽니다. 근데 우리나라는 어떻게 된 것이 그런 고유한 건 뭐 도무지 장사가 안되니까, 요즘 이름 다 고쳐가지고 코믹 무슨 이런 서양말로 하는 거 그걸로 됐지만, 그게 사실은 재담이거든, 원칙으론. 재담에서 흘러나온 거 거든요, 그래서 신불출 선생이, 그 때부턴 난 얘기만 들었지, 재담가 박춘재 선생을 숭배한다. 그런 얘기만 듣고...
2833 그러니깐 그 양반은 재담이 아니고 만담이에요, 현대화한거죠, 일제 때. 재담은 고유한 얘기고, (만담은) 시대에 따라서 발전한거죠, 그리고 요즘은 우리것을 찾자 뭐 그런 게 많이 나와서 그렇지 재담이라고 하면 천한 걸로 다 되어있지 않았습니까, 그때만해도. 재담광대들이나 하는거지, 지금 광대를 존경할 때가 되었지만 그 때에 광대, 재담하면 광대 그렇게 부르기보다는 소리쟁이 하면서, 소리도 국악이라고 해가지고 요즘 조금 나라에서 등도 좀 쳐주고 하니까 그렇지, 소리도 옛날엔 다 광대 아닙니까? 광대 아니라 그래도 소리하면 저 광대다, 그럴 때거든요. 그러니깐 재담이라는 건 그 때 별로 존경을 안 했습니다. 재담이라는 건 천시했으니깐, 재담은 아주 없어졌죠. 그러다가 요즘 또 인제 재담이다 해가지고 문학적으로 대접을 받고 그렇게 됐지만, 그 양반은 재담이 아니에요, 만담이에요, 만담. 순전히 만담이라구.
2952 재담이라는 건 일제 때 말하자면 고중성씨라고 하는 사람이 재담이라고 했는데, 그 때부터 이제 만담이라고 이름을 고쳐가지고, 일제 때 재담하믄 유치하니깐 그 땐 시대가 시대가 좀 다를 때거든. 그러니 해방 후에도 재담은 참 무시했죠. 이게 우리 고유한 걸 찾자고 우리 나라에 문화재 생기고 그 담부터는 소리도 창부타령을 한다던가 그랬지, 해방 후 사변 후에도 문화재 생기기전엔 방송국에서 창부타령이나 이런 거 잘 안했습니다. 내가 그 때 방송 많이 다닐 때요, 노들강변, 난분가래든가 밀양 아리랑 타령 이런 건 했지만, 창부타령은 못했습니다. 술집냄새 난다고, 그래서 지금 시대가 완전히 달라졌으니까 재담 어쩌고 그러죠, 재담 그러면 가뜩이나 일제 때죠, 재담 그러면 완전 촌놈들입니다, 촌놈!
Q. 장소팔, 고춘자씨와는 공연하신 얘기 좀...
3125 (같이 공연 많이 했습니다) 그 두 분은 해방 후에 만담가가 된 겁니다. 일제 말기에 조금 했습니다 장소팔이도, 그 땐 이름도 없을 적이고 서울서 해방 후에도 별반 이름 없다가 사변 후에 우리 6.25후에 인제, 원체 그 장소팔씨가 재간둥이거든요, 말재주가 아주 좋은 사람인데, KBS에서 민요만담이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하고 같이 장소팔, 고춘자, 이을관, 고백화... 그 때 제일 많이 방송할 적인데, 데리러 왔을 적입니다. 그 때 장소팔씨가 만담을 했는데, 장소팔씨가 돌아가셨지만서두 있는 얘기 그대로 해주면, 창작이란 없습니다, 솔직히. 그 옛날 꺼 다 신불출씨 하던거 무슨 이쁘게 만들어 가지고 시대에 맞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듣는 사람들은 모르거든, 옛날 꺼를 모르니까. 재미있거든. 그 때 인기가 올랐습니다. 그래서 인제 나하구 지방 많이 다니고 우리가 유랑단체, 삼류단체죠, 그 때 일류단체는 청춘이라든가 연극단체, 그리고 신협, 오큐아키단, 이런 것은 다 큰 극장이고 일류로 알았지만,우리는 조그만 극장으로 댕기거든... 한 십년 했나요..그런데 그 양반이..하여튼 그때는 왜그랬냐면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텔레비전이 없을때니까, 방송듣다가 아이구 장소팔이 왔다~! 그러면 극장이..말하자면..나하고 이제..나는 그 때.. 내가 장소팔이 보다 내가 먼저 이름이 났죠. 솔직히 얘기해가지구.배비굿(배뱅이굿?) 영화가 나오고..아..저..배비굿(배뱅이굿) 음반이 나오구. 동시에. 그래 장소팔이는 그 때 이름없이 나하고 한 십년같이 다녔어.이름없을적에.
그래가지구 이제 그 사람이 또 이름이 올라 나하고 동등한 스타가 됐어요 (웃음)건방진 얘기가 아니라..(웃음) 그래 둘이 올려가지구 댕기는데..고춘자씨하구요.
고춘자씨는 그 때 잘 못나갔어요. 여기 서울에 일이 바쁘고 그래서. 그때는 '고백화'하고 많이 댕겼어요. 고백화 지금 살아있습니다. 소리잘하고 그렇거든요. 댕기는데..지방에 가면 아주 대단했죠 인기가. 극장이 만원될 적이 많고. 이은관, 장소팔이 돈 많이 벌었다고 소문났죠. 근데 알고보면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얼마 안되죠..(웃음)소문났습니다. 그때.
근데 그렇게하다가, 전전하다가 몇해댕기다 보니까 만담이고 가요고 소리고 할 때 아닙니까.
근데..쪼금 인기가 떨어지고..그래서 나중엔 전전해가지구..나하군 헤어졌어요.
같이 댕기다가 난 이제 소리쪽으로 완전히..허구.
그래서 만담하면서 지방많이 댕기구. 그러다가 이제 돌아왔었죠.
Q. 배뱅이 재밌는 부분 한소절.
배뱅이굿이라는건 대략 그저 여러가지 재담이 많지만서두 마지막에 "왔구나~"하는데 그것이 제일 중요하거든요. 요샌말로 하이라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