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극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MBC에서 월요일과 화요일에 방영하는 <이산>이라는 사극에 푹 빠져 있다.
이산은 정조 대왕의 본명이다.
몇 년 전 문화유적에 대한 글을 쓰면서 정조 대왕에 대한 연구를 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의 효심과 백성을 사랑함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 후부터 나는 정조 대왕을 좋아하게 되었다.
어제도 "아띠 중주단" 연습 때문에 저녁에 나갔다가
드라마 "이산" 을 방영할 시간이라 부지런히 집으로 왔다.
드라마를 보면서 한 가지 아쉬운 건
멋진 배우 이서진이 정조의 내면 연기에 조금 못 미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서진을 우리 아들 같이 생겨서 좋아한다. ㅋㅋ)
정조대왕은 다산 정약용과 각별한 사이였는데
드라마 이산을 보면서 정조 대왕 이산과 다산 정약용의 글이 있어 올려 본다.
정조대왕(본명 이산)과 다산 정약용!
정조대왕과 다산을 얘기하자면 수원성과 화성곽의 축조를 빼놓을 수 없다.
장자의 ‘화규삼축’ 고사를 인용해 ‘효'를 통해 덕을 펼치는 도시가 되라’는
뜻으로 지은 화성!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자랑스러운 화성은 정조가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을 보내던
다산의 감독 하에 축성된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토록 유서 깊은 화성의 이름이 수원성으로 바뀐 것이 일제 소행이라니 생각사록
안타까운 일이다.
성곽건설의 책임을 맡은 31세의 젊은 다산은 석재운반용 장비인 거중기를 고안, 최대한
활용함으로 축성에 동원된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고 건설비용도 크게 절감하며
단기간에 완벽하고 아름다운 성곽을 건설, 성군의 지극한 신뢰에 보답한다.
그 외에도 서양의 학문과 과학문물을 받아들여 과학은 물론 농법 의학에까지 연구하고
장려하여 근대화에 크게 기여한 그의 행적과 뛰어난 재능은 실로 놀랍고도 눈부시다.
“너를 오래 보지 못해 못 견디게 그립다...”
친구 같은 학문의 반려 다산 정약용에게 정조가 악성 종기로 죽기 보름 전
한 얘기이다.
지극한 신하사랑의 인간적 고뇌가 보이는 듯한 어심이라 할 만 하다.
오늘날까지 독살설로 논란이 되고 있는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의 미스터리는 필자로서 알
수 없는 일이나 개혁 군주로서 공존의 미학을 갖춘 훌륭한 지도자의 사후 조선은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
실학의 대가이며 ‘목민심서’의 저자 다산은 암행어사 시절 과감한 탐관오리 징치와
농민참상 고발 등 많은 선정을 베풀고 형조 참의까지 지냈으나 각별한 사랑을 주던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것이 마지막 벼슬이 될 줄은 자신도 몰랐으며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인고의 세월을 살게 된다.
‘목민심서’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1819년 강진유배 18년째인 57세의 저서로
목민관 곧 고을 수령이 지켜야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술로 고을
수령이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과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를 부임赴任에서부터 떠나기까지
조목조목 적고 있다.
모두 48권 16책이며 책의 체제는 수령이 지켜야 할 덕목을 먼저 제시한 다음 그것에 관련된
실례를 광범위한 문헌을 들어 예시하는 이른바 강목체의 기술 방식을 취했다.
지방수령을 지낸 아버지를 따라가서 본 것과 암행어사 곡산부사 등을 지내면서
백성들의 고된 삶을 목격했던 다산의 생생한 체험이 녹아 들어있으며 조선후기 지방사회의
부패상과 인생문제가 소상하게 적혀 있다.
그러나 이는 수령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백성의 편에서 수령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어 다산의 애민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목민심서는 그야말로 조선후기 지방행정의 실태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책으로
다산 사후 수많은 필사본이 유통될 정도로 널리 읽혀졌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교양인들이 찾고 있는 우리시대의 고전적인 경전이라 할만하다.
조선이 낳은 위대한 사상가인 정약용은 1762년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제거하고 왕권
강화를 마무리하던 시기에 지금의 남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뒷날 진주목사를 지낸
부친의 막내로 태어났다.
지난 7월 29일이 그의 탄생 245주년이 되는 날이다.
열 살 때 생모를 여의었으나 서모의 따뜻한 사랑으로 성장하여 뒷날 이를 잊지 못하여
서모의 묘비명을 남기기도 했다.
어릴 적에 부친으로부터 문자를 배우고 글을 익혔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학문을 사사받은
적 없이 형들의 집에 출입하는 손위 누이 남편 이승훈과 형의 스승인 성호 이익
등을 통해 학문을 접하고 익히며 명민한 재질을 바탕으로 큰 꿈을 갖기에 이르른다.
22세에 과거에 들어 벼슬살이를 하면서 정조의 남다른 총애를 받게 되어 순탄한
관운을 개척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한때 천주교 사건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루었으나 곧 정조의
부름을 받아 규장각 일을 보기도 했다.
정약용 그의 집안은 일찍이 서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시의 서학 천주교!
인간과 세상에 대한 끝없는 사랑. 천주교의 이데올로기는 봉건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와는
확실히 다른 신선한 것이었다.
특히 변혁에의 갈증이 심한 양반 지식인 그룹에서 이 이데올로기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무서운 속도로 전파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한 가능성으로 서학을 주의 깊게 응시한 것이다.
그러나 지배 권력의 입장에서 보자면 새로운 사조의 등장은 두렵고도 불안한 것이다.
정조가 죽자 11살의 미성년인 순조가 즉위하여 당시 왕실의 가장 어른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으로 섭정을 하게 된다.
그동안 기를 펴지 못하던 그의 친정과 노론은 국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으니 조선왕조의 망국의 서곡이나 다름 아니다.
15세의 어린나이로 66세의 영조에게 시집 온 정순왕후는 정조의 할머니가 되는
집안이지만 사도세자 사건이후 정조가 즉위하자 활개를 치던 친정 세력이 일시에 날개가
꺾이면서 조손간에 정치적 원수로 절치부심하던 사이가 아닌가.
예나 지금이나 소모적인 당쟁은 유능한 인재와 정적 제거기회의 방편이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대로 이어 온 유교이념을 배척한 서학의 단호한 근절을 위해 당시의 지배세력은
정조와 군신이라기보다 가족처럼 아껴주고 신뢰하던 정약용의 제거가 우선이었을 게다.
정조 사후 기세등등하던 노론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서는 유능한 정적
제거가 우선되어야겠는데 그에 따른 명분을 천주교 박해에서 찾았던 것이다.
힉문의 반려자이자 존경하던 학자 군주인 정조가 죽자 고향으로 돌아 온 다산은
‘조심하고 두려워하라’는 뜻으로 당호를 여유당이라 하고 근신하게 되나
순조가 즉위하여 천주교에 대한 신유박해 등 대 탄압을 가하자 그의 가정은 끝내
문자 그대로 풍비박산 사방으로 흩어지고 만다.
그 유명한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부터 시작한 가문의 몰락은 정조의 죽음으로
급속히 기울기 시작하였다.
다산의 큰 이복형님 사위인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전말을 북경에 있던 서양주교에게
비밀리에 알리려다 발각된 사건이 백서사건이 아니던가.
형과 조카가 맞아 죽고 또 다른 형 약전과 그는 귀양길에 오르고 스승처럼 모시던
매형 이승훈 등도 참혹한 죽음을 면치 못했다.
형은 흑산도로 그는 강진 땅에서 18년간의 유배생활을 시작했으니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너무도 가혹한 시련의 연속이었다.
다산은 강진 유배 18년 동안 모두 이백 삼십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집필하였다.
평균 한 달에 한 권 이상의 저술을 한 셈이니 고달픈 삶을 초월한 그의 저술 열정은 가히
초인적인 것으로 대학자다운 학문의 뜻을 꽃피운 셈이다.
강진의 다산초당!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을 그 인고의 세월 18년 유배생활 중 10여년을 그 곳에 살면서
목민심서 등 500여권의 저술을 남겼다.
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끊임없는 다산초당 그 곳에 떠도는 듯한 대학자의 강인한 의지와
정신세계의 궤적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값진 삶의 지혜와 깨우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정조 사후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여유당을 짓고 유유자적하던 시절 집필한
기록과 유배시절 목민심서를 비롯한 500여권의 방대한 자서전적 기록을 정리하니 그것이
그 유명한 ‘여유당전서’이다.
여유당이라..
노자의 ‘여혜약동보천(與兮若冬步川) 유혜약외사린(猶兮若畏四隣)’이라는 구절에서
따 온 말이다.
즉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같이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당호로
삼은 것은 정조 없는 세상을 그가 얼마나 노심초사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의 가훈을 보자.
1. 선악을 가려 몸을 수양하라.
2. 책을 지을 때 조심하라.
3. 효도하고 공경하라.
4. 재물의 씀씀이를 조심하라.
5. 양심을 가지고 조심하라.
6. 당파를 조심하라.
7. 근면하고 검소하라.
8. 정성스럽고 참되게 살라.
9. 비밀을 삼가라.
10. 몸을 조심하라.
11. 가정을 잘 보전하라
당시 그의 가훈에서 나타나듯이 삼가고 조심하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서학의 무차별 탄압으로 화를 비껴가기 위해서는 말은 물론 글도 조심해야 되고
사소한 언행도 가려가며 신중히 처신하라는 당부가 여실하다
벼슬에 있는 동안 수많은 선정을 베풀고 형조에 있을 때는 엄정한 국법집행으로
무고한 백성의 누명을 벗게 하는 등 오로지 무지하고 힘없는 민초의 편에서
힘이 되어 준 그가 왜 그렇게 정조 사후의 세상을 두려워했을까?
그의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일찍이 알아 본 정조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그의 제거
기회만을 노리던 노론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었으나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은 피바람을
몰고 올 전주나 다름없음이다.
그가 형조에 몸담고 있을 때 벽촌의 무지랭이 백성이 돈 2전 때문에 다투다가 상대를 밀어
붙이고 지게작대기로 찌른다는 것이 그만 항문을 찔러 상대가 죽고 말은 사건이 있었다.
이를테면 조선왕조 판 똥 침인 셈인데 사람이 죽기까지 한 위력을 발휘한 엄청난 침이다.
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정약용은 정조에게 이렇게 보고를 한다.
"이번 일은 살의를 가지고 죽인 게 아니라 우발적으로 일어 난 일이니 용서하는 것이
마땅한 줄 아뢰옵니다."
이에 따른 정조의 판결이 걸작이다.
“지극히 조그만 것이 항문이고 지극히 뾰족한 것이 지게작대기 끝이다.
지극히 조그만 구멍을 지극히 뾰족한 것으로 찌른 일은 천하에 일어나기 어려운
지극히 우연한 일이다.“
이렇게 정조는 정약용을 지극히 신뢰하여 관대한 처분을 내림으로 한 생명을 구함은 물론
조선왕조에서 찾아보기 힘든 지극한 신하 사랑과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준다.
이토록 각별한 정조의 사랑을 차지하는 데는 정약용의 해박한 지식과 민심을 헤아리고
항상 대의를 앞세운 그의 변함없는 충정과 나라사랑이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힘없는 민초들을 가족같이 자식같이 아끼고 염려하던 대학자의 파란만장한 삶은 고향에
돌아와 박살난 가정을 돌보다 75세의 일기로 수를 다하게 된다.
그 때가 결혼 60주년인 회혼일 아침의 일이다.
보수와 진보세력간의 알력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유능한 지도자와 대 학자의 죽음을
재촉한 듯해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