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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게시판 스크랩 5. 한국통일의 날 - 북미대결의 최종 결산작업!!!
최용호 추천 0 조회 0 15.06.02 10: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2부 제2차 한국전쟁

Ⅰ김정일의 군사사상

북한의 군사력은?


 

세계의 초대국 미국을 매혹시킨 북한의 섹스 어필은

문화전통적 가치관에 바탕을 둔 것이며

돈이나 물건에 환산되지 않는다.

그것을 표현하고있는것이 "이리"의 미학이며

그것을 물질적으로 안받침하는것이 북한의 군사력이다.

 

 

 

북한의 군사력과 경제력, 기술력은

미국의 그것들과 단순히 비교한다고 하여

옳게 이해되어지지는 않는다. 수자상에

나타나는 것도 중요하기는 하나 전쟁 자체를

옳은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면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전쟁이란 일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북한의 정치목적은 전수방위(專守防衛)이다.

즉 영토, 영공, 영해, 국민, 국가,

정치사회체제를 방위하고 국가, 민족의

존엄을 지키며 자유의사를 보장하는것이 기본이다.

 

 

 

희생이 동반되는지 어떤지에 상관없이

그 목적이 달성되면 북한으로서는 충분한것이다.

김정일은 북한에 대국의 눈치를 보거나

대국에 의존하지 않아도 살아갈수 있게,

때로는 대국에 대해 강한 반격을 가할 수

있을만한 충분한 군사력을 구축해놓았다.

 

 

 

김정일은 전수방위(專守防衛)를 원칙으로 하면서도

적이 선제공격을 준비하고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공격이 최대의 방위가 됨을 잘 알고 있다.

현재 김정일이 최고사령관인 조선인민군의 장비는

일본이나 미국의 수준으로 볼때 낡은

구식무기들이 적지 않을것이며 하이테크와는

거리가 먼 것 들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군사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기의 대형화, 장거리화, 하이테크화가

그리 중요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이 재한미군을 ,

한반도에 인접하는 해외미군기지를 또한

미본토의 일부도시를 섬멸할만한

군사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지난 한국전쟁때 북한은 해외에 있는

미군의 발진기지에 대한 보복공격을

가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조선인민군은 지구상의 어떤 곳에 있는

적에 대해서도 괴멸적 타격을 가할수 있다.

 

 

 

상대방이 선제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면,

예컨데 미국이 한반도주변에서 1991년의

걸프전 수준까지 병력을 증가한다면

그것을 가만히 보고 만 있는것이 아니라

선수를 써 "외과수술적 공격"을 가할수도 있는것이다.

 

 

 

소국(小國)북한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음으로 하여 대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뒤엉켜있는 북동아시아에서

세계초대국인 미국과 당당히 

맞서올 수 있었던것이다.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미국에 강력한 주먹을 날릴수 있는것이다.

북한의 군사력이 강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물리적 요인보다도 그 배후에 있는

군운영을 결정하는 독특한 군사사상에 있다.

그 군사사상의 창시자는 고 김일성이며

그것을 계승, 발전시킨것이 조선노동당 총비서이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인 김정일이다.

 

 

 

김일성도 김정일도 사관학교에서 정규의

군사교육을 받은적이 없으며 소련이나

중국에서 군사훈련을 받은적이 있는것도 아니다.

그러나 둘은 구미(歐美)최고봉의 군사교육을 받은

장군들이 이끄는 사상최강의 전쟁기계들과

대등하게 맞선것 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수세에 몰아놓고 있다. 구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실전을 통하여 입증된 독특한

군사사상에 의하여 김정일은

미국과의 군사대결이 일어난 경우에도

현재 북한이 보유하는 무기만을 가지고

충분히 대응할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애초부터 미국과의 군비경쟁을 할

필요도 없으며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군사사상의 배경에는

항일무장투쟁과 한국전쟁을 비롯한

역사적체험이 있으며 제2차세계대전후

세계에서 벌어진 140여차례에 걸치는

군사충돌 및 유사이래 1만4천여차례 벌어진

전쟁에 대한 독자적인 분석이 있다.

 

 

그 결과에 기초하여 김정일은 서양군사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결론을 이끌었고

그것을 한민족의 이익에 맞추어

실천에 옮기고 있는것이다.

 



 

국민부재의 서양군사사상


 

이제까지의 서양군사사상에서 전쟁이란

영토확대의 침략전쟁이며 국민의 이익을

지키는 전쟁이 아니라 일부의 계층,

즉 지배계급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다. 전쟁결정은 국민의

의사가 아니라 지배계급의 의사이며

전쟁을 계속하는냐 어떠냐도

지배계급의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

 

 

 

 

전쟁당사국의 일방의 지배계급이

패배를 인정하면 그것으로 승패는 결정되는 것이다.

실제로 전쟁의 승패는 전장에서의

군대간의 싸움으로 거의 결정된다.

시대나 정권의 변화나 국토의 확대,

축소는 국민의 이이고간계와는 무관하게 결정되었다.

 

 

 

 

일본에서 뿐만이 아니라 중국에서도 내전,

내란은 역사에서 흔한 일이었다. 따라서

지배계급이 바뀌어져도 정부가 변해도

일반대중, 국민들에게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것이다.

전쟁의 귀추(歸趨)를 기본적으로 결정하는것은

1. 국력, 2. 장비나 무기, 3. 병력이며

이 세가지 요소를 어떻게 배합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국력에 의해 장비나

무기의 양과 질, 병사들의 수가 결정된다.

국력이란 경제력, 인구, 기술력을 말한다.

이것은 어띠까지난 물질중심의

관점이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국력이 크면

장비나 무기의 양과 질, 병력에서

앞설것이며 전쟁에서 승리할것이다.

 

 

 

 

이 군사사상에 기초하여 서양에서는

상대방의 물리적 계전능력(繼戰能力)을

갉아내는것이 중요시 되어왔다.

전략상의 중점은 다음과 같다.

1. 적측의 후방전략거점, 중요생산시설,

군수공장, 발전송전시설, 수송수단, 연료 및

탄약 등의 물자를 저장하는

병참(兵站)기지나 통신지휘계통을

혼란시켜 파괴하는것.

 

 

 

2. 적측보다 고성능, 화력있는 무기로

전선의 적기지나 전투부대를 괴멸시키는것.

 

 

3. 적측에 대한 역선전 등을 배합시켜

적측의 계전의욕을 상실시키는것.

 

 

 

태평양전쟁에서의 일본군의 패전원인

 

서양군사사상의 견지에서 보면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둔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국토, 인구, 경제력의

모든 면에서 미국은 나치스 독일이나 일본을

압도하고 있었으므로 일본군의 패망은

애당초 명백한것이었다. 일본에는

대미전쟁 자체를 무모한 일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병참능력면에서가 아니라

전쟁수행상의 전략전술적 측면,

병력의 운영면에서도 일본군에는

문제점이 적지 않았다.

이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일본군의 전쟁수행 방법은 비근대전적이며

자기들의 전국시대로 부터 거의

발전하지 않고있었던것 같다.

 

 

 

 

예컨데 1543년에 포르투갈에서

총이 전해진 이래 1868년의 명치유신까지의

약 320년간 총은 화승총(火繩銃)이 었으며

그 이상 발전하지 않았다. 또한 오다노부나가

(織田信長)가 1575년의 전쟁에서 화승총부대의

위력을 발휘하여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도요도미(豊臣), 도쿠가와(德川)의 시대에도

여전히 칼을 휘두르는 사무라이가 중심이었고

화승총부대는 병법의 주력으로 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사무라이의 이권이 침해되어

신분제도유지가 못하기 때문이었다.

명치시대에 들어와서도 새형의 총이

발명되기는 하였으나 기본정신은 전통적인

사무라이전법, 즉 자기과시적인 일대일

(一對一)전법이었으며 해군이 눈을 끄는

함대결전을 중시한데에 그 전형을 볼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은 서양의 근대전사상의

추세를 따라가지 못했고 근대전의 본질을

이해할수 없었기 때문에 실전에

응용하지도 못한것이다.

태평양전쟁시기에는 근대전용의

대형장비들을 갖추고 있었으나

서양의 근대군사사상의 요구조건을 채우지 못하였다.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에서 조우한 상대는

미육군부대가 아니라 주로 미해군과 해병대였다.

마지막에는 미군기의 공습을 받았다.

미육군은 주로 독일군과의 전투에 투하되었다.

(일본에 상륙한것은 미육군부대이며

총사령관은 맥아더원수였다.

이것은 일본점유가 목적이었기때문에

육군이 담당했을 뿐이다.)

 

 

 

즉 해군이 기본전투부대였다.

해군과의 싸움이라면 조선소파괴가

가장 효과적인 손해를 줄수 있다.

미서해안의 길이는 일본열도의 동쪽과

거의 같으며 위도적으로도 거의 동일,

일본군이 마음만 먹으면 미군의

서해안의 전략거점, 특히 조선소를

파괴하는것은 충분히 가능하였다.

 

 

 

 

그러나 1941년 12월 8일의 하와이 진주만공격시

일본의 특별공격대는 항만내에 정박중인

미군함선 공격에 중점을 두었고 하와이에 있는

미군의 연료기지, 탄약저장고, 물자집적소에는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일본군은 또한 미본토나 하와이에 수많은

일본인이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정보수집활동이나 파괴활동에 동원하지 않았다.

어학의 전문가를 육성하거나 암호해독활동도 경시하였다.

그러기에 진주만공격시에 미항공모함이 없는것을

확인하지 못한채 공격을 감행하여야 했다.

 

 

 

"야마토"나 "무사시" 등의 대형 전투함선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태평양의 섬들에

전개하는 일본군을 원호하는데 동원하지 않았다.

미군진지나 상륙을 시도하는 미군에 대하여

전투함선의 주포로 괴멸적인 함포사격을

가할수 있었으나 그러한 작전에 "야마토"나

"무사시"를 동원하지 않았다.

 

 

 

우수한 잠수함을 수많이 보유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무기탄약이나 식량을 수송하는

미군 수송선단에 대한 보급로차단목적의

공격작전에 동원하지 않았다. 잠수함을

총동원하여 미군의 수송선단 괴멸에 투입하면

전국은 크게 달라졌을것이 예견되는데 말이다.

 

 

 

또한 일본은 미군 함선이나 수송선단의 공격에

기뢰를 쓰지 않았으며 어뢰정도 동원하지 않았다.

일본은 본토방공, 방위체제를 구축하지 않고

미국과의 전쟁에 돌입하였다. 일본의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의 보급로를 미 잠수함대로 부터

지키는 대 잠수함작전체제를 정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그렇지 않았다.

미국은 반대로 근대전의 요구에 맞게

작전을 전개하였다. 먼저 일본의

전쟁수행에 불가결한 석유나 광물자원을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으로 수송하는

수송선단의 괴멸에 잠수함대와 기뢰를

최대한 활용하였다.

 

 

 

그 결과 태평양전쟁 시작시에는

600만톤이라고 불리웠던 일본의 수송선단은

패전시에는 200만톤까지 격감하여

일본군의 계전능력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또한 미군은 일본군의 암호해독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일본어 전문가를 재빨리 양성하여

일본군의 정보, 암호전보도 거의 해독해내었다.

전후 일본점령정책을 성공시킨 요인의 하나로 된

일본문제 전문가들은 이 해군에 의한

일본어양성학교, 일본어 해독으로

부터 태어난것이다. 미국은 일본에 대한

교묘한 심리작전을 전개했으며 B29에 의한

일본본토공습을감행한것이다.

 

 

 

도쿄, 오사카 등의 대도시를 연 3만기가

공습하였으며 일본사람에게서

전쟁의욕을 앗아버렸다.

태평양전쟁의 승패는 처음부터

결판이 나고 있었던것이다. 일본은

국력에서 뿐이 아니라 두뇌전에서도

전쟁운영에서도 애초부터

미국을 이기지 못했던것이다.

 


 


 

서양군사사상의 문제점


 

서양군사사상에 기초한 현재 미국과

세계각국의 군사면에서의 공통적 경향은

병사의 인원수는 삭감해도 최신예 장비를

도입하는 것으로 대치하고 있으며 육군보다도

해군, 공군을 더 중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원가는 적게 들이고

효율이 좋은 타격, 효율이 높고 아군의

피해를 최소한 적게 하는 전법을 중시하고 있다.

 

 

 

이 군사사상으로부터 본다면 국방비나

장비성능 점에서는 발전도상나라들이나

작은 나라는 대국들인 구미열강나라들과

결코 대항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전차나 미사일이라는 병기를 국내에서

생산 보장한다 해도 성능이 높은

기술발전정도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에

결국 작은 나라는 구미제국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군비가 보잘 것 없는 나라는

전쟁에서 패배를 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 원리로서는 독일과 일본을

압도적으로 타승한 미국이 한국전쟁에서는

독일과 일본에 비해 훨씬 작고 힘이 약한

북한에게 왜 이길 수 없었는가 하는 것은

설명할 수가 없다. 북한에 항공모함이나

잠수함, 전투함, 비-29와 같은

전략폭격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또한 미국이 월남에서 이지 못했던

문제도 설명할 수 없다. 프랑스가

알제리전쟁에서 패배한 것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과 체첸 게릴라에게

이기지 못했던 것도 설명할 수가 없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해군이나

해병대뿐 아니라 육군 정예부대와

전략공군을 투입했다. 전쟁구역도

태평양이나 아시아태평양지역이 아니라

한반도라고 하는 대단히 제한된 지역이었다.

 

 

 

경제력, 기술력, 장비, 인구의 면에서 본다면

북한은 미국에 비하여 갓난아기와 같은 정도였다.

그러나 구미열강의 군사전략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한국민중의 견지에서 본다면 조국방위전쟁이었고

조국해방전쟁이었으며 민족문화를 지키는

전쟁이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탁월한

지도자가 선두에서 지휘한다는 것을

구미열강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종전의 정규군들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전체 민중을 총동원해서 싸우는 쪽이

이긴다는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은 단순히 정규군끼리의

전쟁이었던 것이 아니라 미군이

한국국토를 침략하여 유린하는 것을 본

북한 전체국민이 북한인민군과 함께

싸움에 참전한 전국민적 조국방위전쟁이었던것이다.

 

 

 

 

한국전쟁은 미군 대 한민족의 전쟁,

미군 대 한국문화와의 전쟁으로 진행된 것이다.

험한 산발이 많은 한반도는 북한 군대와

국민들에게는 자기 집 마당처럼

구석구석까지 잘 파악이 된 전쟁터였다.

그런 곳에 미군을 처박고 습격하고는

곧 산악지대로 후퇴한 것이다.

 

 

 

즉 지형조건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군에게 있어서 적은 정규군만이 아니라

전한국인이 적으로 되었던 것이다.

미군은 한반도 어디에 있어도 낮에도

밤에도 순간도 숨쉴 틈을 가지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상공을

제 얼굴처럼 날아 치던 비-29가

조선상공에서는 산산이 조각나 격추되고

격추를 면하고 살아남은 비행기는 겨우

기타큐슈의 이다쓰키비행장까지

도망쳐 와서는 착륙도 못하고 바다 속에

처박힌 것만도 수없이 많다.

 

 

 

북한은 공중전에서도 지상전에서도

해상전에서도 가차없이 된 매를 안기었다.

당시를 회상하여 "아사히신붕

" 논설위원 이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타즈키공항으로부터 대부분의

비행기무리들이 쓰시마해협을 날아 넘어갔다.

 

 

 

상처투성이로 된 미군비행기들이 착륙 전에

후쿠오카시의 여기저기에 떨어졌다.

낙하산이 펼쳐지지 않아 미군조종사가

민가의 지붕에 떨어져 기와를 깨뜨리고

지붕에 걸려 발버둥치는 것도 보았다.

어느 병원 지하실에는 미군병사들의 시체가

가득 넘쳐나고 부패방지가공대책까지

취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나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꽃카펫 위와 같은 데를 유유히 날아들어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일본열도를

맴돌아 치던 미군기, 덥칠 듯 질주하며

위세를 부리던 미군이 한반도 전쟁터에서

고생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불패의

강군 이라고 보였던 미군이 왜 그런가."

(1992년 7월 23일 부 "아사히신붕")

 

 

 

북한군의 어뢰정은 미군순양함

"볼티모어"호를 격침시켰고

구축함을 대파시켰고 기뢰전으로

미군함정을 수많이 침몰시켰다. 북한군은

지상에서도 포격전, 전차전, 백병전을 벌였는 데

한발자국도 양보하지 않았다.

 

 

 

 

몇 백만이 희생된다고 해도 국토가

폐허로 되고 서있는 건물은 하나도

없을 정도인데도 미군에게 끝까지

달려들어 본때를 보여준 인민군대와

유격대들, 한국전선은 미군병사들에게

있어서 말 그대로 지옥과 같았다.

 

 

 

 

미국은 처음으로 괴멸적인 패배의

쓴맛을 보고 물질적 우세도, 핵위협도,

최신기술로 장비된 무기로도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는 것을 통감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 소련이 4만 명의 지원부대를

한국전쟁에 참전시켰다는 기사가

화제거리로 되었다. 그 보도를 잘 읽으면

대공부대, 고사포부대가

중국 측에 배치된 것뿐이고

북한 안에는 배치되지도 않았다.

격추된 미군기의 70-80퍼센트가

대공포화력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북한군에서는 벌써 오래 전에

소련군 비행사가 참전했던 사실을 인정하고

그에 상응한 평가를 하였다. 그러나 주력군은

어디까지나 북한인민군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소련이나 중국의 참전이나 지원을

과대평가 하여도 그것은 미국 측이 진 것이

분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3년간의 전쟁에서 미군병사의 사상자수는

미군발표에 의하면 5만 4천 2백 46명이고

10년간의 월남전쟁에서 죽은 수는

5만 8천 1백 35명으로서 거의 같은 수이다.

한국전쟁이 얼마나 치열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수자이다.

 

 

 

게다가 미군순양함 "볼티모어"와

 제7함대 기함 "미즈어리"가 격침, 대파 당했다.

미군장성 브래들리는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 선택한 적과 싸운

잘못된 전쟁이었다"고 후회하였다.

이런 교훈은 월남에서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재확인되었다.

 

 

 


 

국민의 화(和), 지역적 이점의 중시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조선의 실정에 맞는

독특한 군사사상, 전략전술을

창시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역사적 체험과

그들 자신이 조직, 전개, 지휘해 온

조선독립해방운동과 관계되고 있다.

 

 

 

 

조선의 역사적 체험에 의하면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외국과의 싸움이며 국민을 단결시키고

한국의 유리한 자연 지리적 조건을

활용하는 이외에 외국침략군을 물리치는

방법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

 

 

 

역대 왕조는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이조로 셀 수 있는데 주로 외세와의 싸움이었고

내전이나 내란은 극히 드물었다. 전쟁이라고 하면

외래침략군과의 싸움이었다. 옛날에는 주로

중국이나 일본의 해적과 침략군이 있었고

근세에는 구미열강과 일본이었고 제일

마감이 미국과의 싸움이었다.

 

 

 

한국에서는 정규군만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국토방위 전에 참가하는 것이

역사적 전통으로 되어있고 정규군과

국민이 한데 뭉치어 전쟁을 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에서는 전쟁에서

정규군이 졌다고 해도, 국토가

침략군에 의해 유린당했다고 하여도

항복은 하지 않는다.

 

 

 

 

죄없는 수많은 국민이 학살당했다고 해서,

성이 함락되었다고 해서, 수도가

함락되었다고 해서 승패가 결코

결정된다고 보지 않는다. 당시 정권이

항복한다고 해도 국민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한민족은 최후의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항복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전쟁이라는 것은 외래침략군을

막기 위한 국토방위전이었기 때문에

전장은 언제나 한국의 국토에서 진행되었고

한국의 영해에서 진행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적들을 자국 내로

깊이 유인하여 소멸하는 싸움이었다.

"살을 떼어주면서 뼈를 부신다"는

말처럼 아주 치열한 싸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에 쳐들어간

중국의 역대 왕조는 거듭되는 조선원정에서

국력을 소모하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도요토미의 한국침략군도 바로 그렇게 되어

결국 망하고 일본천하를 도쿠카와정권에게

내어주게 된 것이다.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한 일본군국주의는

결국 한국에서 패배했다. 바로 미국도

그런 신세가 되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은

승리를 믿고 접어들었으나 그들을 기다린 것은

지옥의 전쟁마당이었고 대참패였다.

 

 

 

일본에 점령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온

맥아더 원수는 북한군에 의해

패배의 쓴맛을 보고 마지막에는

해임 당하고 말았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은 전쟁에서 승리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월남전에서도 패배, 걸프전에서도 패했에도

불구하고 매스컴 작전으로 전승을

위조하였고 소말리아로부터도

볼꼴 없이 철수하고 말았다.

 

 

 

20세의 젊은 김일성이 1932년에

수십명으로 항일무장투쟁을

개시하였을 때에는 임시정부라는

간판도 없었다. 조선의 그 어디에도

해방구란 없었고 외국으로부터의

지원도 없었다.

 

 

 

누군가 부호가 있어서 군자금을

보장해준 것도 없었다. 기독교의

미국인선교사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찬동해서 군사훈련이나 자금을

제공해준 것도 아니다.

 

 

 

김일성이 의거한 것은 외국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조국을 빼앗기고 신음하는

조선의 백성들이었다. 민중을 조직화하고

눈에 익힌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무기는

적들의 것을 빼앗아 가지고 전쟁을 한 것이다.

 

 

 

 

해방후 5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된 지 3년째 되는 해인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북한에게 있어서는

국가와 민족의 존망을 좌우하는

심각한 시련의 시기였다. 일시 북한

인민군은 미군과 이승만 국군을

부산구석으로 몰아넣었지만

보급로가 늘어나고 무장과 탄약이 부족하였다.

 

 

 

북한이 소련에 탄약류를 긴급지원해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소련은 신속히 응해주지 않았다.

그때 소련이 북한의 요구에 응해 탄약과

무기를 주었더라면 북한인민군은 미군과

국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나라의 통일을 이룩하였을 것이다.

 

 

 

뒤늦게 나마 보내온 무기들도

한국사람의 체격이나 한국의

지형조건에 맞는 것이 아니었다.

병법 역사가 오랜 중국이나 소련은

제멋대로 자기들의 전법이나

훈련 방법을 북한에 강요하려 했으나

김일성은 그것을 거절하고

조선식을 강조하였다.

 

 

 

민족이 생사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김일성을 도와 나선 것은 다름 아닌

평범한 민중이었다. 미군비행기를

격추하는 데 대 활약한 것은 소련제

최신식 고사포가 아니라 여러 자루의

구식 총을 소달구지바퀴에 붙여놓은

조선식 대공기관포였고 산꼭대기와

나무에 올라서 적기 급강하를

대기하고 있던 대공저격병들이었다.

 

 

 

 

미군의 대형함선을 격침시킨 것은

소형함선인 어뢰정이였다. 소련 해군함선이나

중국의 함정이 지원한 것도 아니었다.

미공군기의 무차별 폭격이나

포격으로부터 북한인민군과 국민을

지켜준 것은 소련제 무기가 아니라

집마당에 파놓은 방공호나 지하동굴 즉

 한국사람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한국의 대지였다.

 

 

 

김정일의 전쟁관


 

김정일이 동서고금의 전략가나

장군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장비나

무기의 현대화를 중요시하지만

그것을 절대시하지 않은데 있다.

 

 

 

그는 군대는 로봇 병사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으로

구성됐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행동을 규정하는

정치사상교양과 군사지휘능력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는 것이다.

 

 

 

무장장비, 무기를 다루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은 적이나 아군이나

공통하고 있는 점이므로 전쟁은

심리전측면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김정일의 전쟁관에서 가장 큰 특징이다.

 

 

김정일은 유사이래 일어나는 전쟁과

모든 분쟁사건들을 총화하고 전쟁승패를

결정하는 요인을 독자적으로 분석

판단하시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① 거의 모든 전쟁에서는 경제력이나

나라의 대소, 병사의 훈련정도, 무기나

장비의 발전정도가 승패를 결정한다.

이런 도식의 전쟁은 물질대 물질의

전쟁이기 때문에 승리의 필수적 조건은

물질의 대소, 발전정도에 달려있다.

 

 

 

이 방정식을 도입하면, 전쟁에서 이기자면

물량적, 기술적 우세가 전제조건으로 되고

적병력의 10분의 1-3의 1을 상실시키던가 또는

적의 병참지점을 파괴하여 전쟁능력을

없애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② 외국으로부터의 침략자를 격퇴하는 전쟁이나

민족 해방전쟁에서는 국가나 민족의 영웅,

탁월한 지도자의 존재가 국력, 병사의 준비,

기계장비의 격차를 충분히 보충한다.

바꾸어 말하면 물질과 사상정신, 물질과

문화간의 전쟁으로 되기 때문에 승패의 조건은

정치 사상적, 문화적 우수성에 달려있다.

 

 

 

즉 사람을 얼마나 많이 묶어 세워 준비하는가가

승패의 요인으로 된다. 지도자는 국민을

한 데 묶어 세울 수 있도록 정치 사상적,

문화적 목표를 제시하고 정치사상전,

문화전으로 바꿔 자연 지리적 조건을

잘 활용하면 승리할 수 있다.

 

 

 

③ 공군력이나 해군력만으로는

전쟁의 승패를 반드시 결정할 수는 없다.

미군은 압도적인 해공군력을 가지고 있으나

한반도전쟁에서도, 월남전쟁에서도

참패를 당하였으며 걸프전쟁시에도

후쎄인력량을 완전히 타승하지는 못했다.

 

 

 

승패는 어디까지나 지상전에서 결정된다.

공군이나 해군은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화려하게 멋있게 보이지만 결정적 요인이 못된다.

 

 

④ 일정한 정도의 무장장비를 갖추고 있으면

소국이라도 대국과의 전쟁에서 지지 않는다.

이것이 한국전쟁, 월남전쟁, 중동전쟁,

포클랜드분쟁, 아프가니스탄전쟁,

걸프전쟁의 중요한 교훈이다.

 

 

 

공중전에서는

최종적으로 기술장비나 속도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전투기,

폭격기가 동원되는가 하는 것과 그것을

조종하는 사람, 비행사의

사상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초대국에게 원자력항공모함, 이지스함,

원자력잠수함 등이 있어도 전투가 벌어지면

수중탐지기나 레이저탐지기도 무의미하게 되고

오히려 디젤기관으로 된 소형잠수함이나

고속미사일정을 가지고도 큰 전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⑤ 핵무기는 무용지물로 된다.

원리 미국은 원자탄을 투하하지

않고서도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대한 투하는

실험목적 이외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또한 독일전선에서도 사용가능성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독일전선은

백인들끼리 맞선 주로 지상전쟁이었고

여기에 투하하면 아군에게도 굉장한

피해를 주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과의 태평양전쟁에서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상대는 백인이 아니라

황색인종이었고 주로 태평양의 섬들을

가지고 쟁탈전을 하고 있었기에 원자탄을

투하해도 아군의 피해에 대해서는

걱정 안해도 되었던 것이다.

 

 

 

 

히로시마형 원자탄은

"건 바렐형(Gun Barel)"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사전에 실험 성공한 나가사키형

"폭축형(Implosion)"과는 달리 히로시마에로의

투하자체가 최초의 실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한국전쟁, 월남전쟁 등

모든 전쟁에서 핵무기를 쓰는 것이 훨씬

좋았을 테지만 결코 원자탄을 다시 쓸 수 없었다.

 

 

 

구미제국이나 소련이 대량의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전쟁을 억제하는 데는 작용하지 못했다.

 

 

 

⑥ 전쟁은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

핵전쟁이나 전쟁에 대한 만단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면 심리전, 외교전만으로도

싸움하지 않고 이길 수 있다. 이것은

한국전쟁이후 한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위기로부터 찾은 중요한 교훈이다.

 

 

현명한 장군은 필요 없는 희생이나 싸움은

 피하고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것을

본령으로 여기고 있다. 공포에 질린 장군은

지고 그 어떤 대적에 대해서도 지략과

담력으로 싸우는 장군이 언제나

이길 수 있는 장군이다. 즉

백전백승의 장군이라고 할 수 있다.


 

Ⅱ 북한은 하늘을 나는

 "고슴도치"

김정일은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며

일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강력한

군대의 존재는 국가방위상 불가결의 것이며

적에게 정치적 타협을 강요할 수 있는

대단히 위력한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국문제의 본질은 대미정치군사문제로

보는 관점으로부터 만난을 극복하고서라도

일반 민중들의 생활에 적지 않은 희생을

강요한다고 해도 국방을 강화하는 것이

민족과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된다는 것이다.

 

 

 

한국이 주위의 군사대국들로 둘러싸여

있는데다가 분단된 상황에서 더욱이

군사적대결의 직접적인 상대가 사상

초대강국으로 자처하는 미국인 이상

국방력 강화가 최우선 과제로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무리 경제가 거대해지고 번성하여

부자가 된다고 하여도 김정일은 강력한

자위국방력이 없으면 그것은 한갓

모래 위의 누각에 불과하며 사라져가는

운명에 처하여 결국 무의미하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남한은 미국의 "개"가 되어

피둥피둥 살쪘었지만 "한강의 기적"은

벌써 옛날 이야기로 되고 경제적 주권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통화기금

(IMF)에 넘어가고 말았다.

 

 

지금 "기생관광"이나 월남파병으로

외화벌이를 하기 위해 희생당한

남한의 여성들과 병사들은 일생 원망할 것이다.

 

 

 

일시적으로 유족 하다고 생각하게 된 순간

"한국"국방에는 전혀 필요 없는 비싼

미국제 무기를 대량 사들이게 강요당했던 것이다.

이러한 예는 사우디아라비아에도 있다.

이 나라에서는 이라크로부터 공격을

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또한 이라크가

사우디아라비아를 공격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는 걸프전쟁에서

전쟁비용을 부담하게 됐다. 미군의 이 나라

주둔을 허용하고 살 필요도 없는 최첨단 무기를

사고 그것을 조종할 줄 아는 인원이 없어

전 미군장교들을 비싼 인건비를 주고 고용해야 했다.

 

 

 

일시적으로 기름달러로 국고를 채워놓고 있다가

이런 놀음에 걸려들어 금고가 텅 비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미국정부는 다시 후불로

미국제 무기를 구입할 것을 강요하였다.

 

 

 

김정일이 건설한 북한의 국방체제는

전략미사일로 무장한 하늘을 나는

"고슴도치"와 같은 것이다. 북한이 지금처럼

 철벽의 방위력을 보유하고 있는 배경에는

김일성과 국민의 고통스러운 결단이 있었다.

 

 

 

그것은 끝까지 "이리"의 미학을

관철하려는 기개였던 것이다.

다음은 북한이 얼마나 철벽의 방위력을

가지기 위하여 간고분투하였는가를

한국전쟁이후 걸어온 노정을

시기를 구분하여 돌이켜 보면서

그 방위력의 위력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천리마비약의 시대 (1953-1960)


 

물량적인 우세로 독일과 일본을

압도적으로 타승한 미국에 사상

처음으로 패배의 쓴맛을 보여준

북한은 전후 부흥의 기세를

한국의 전설에서 나오는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고 하는 "천리마"의

이름을 달고 "천리마질주"로 부르면서

경제를 복구 재건하였다.

 

 

 

 

북한 각지에서는 건설과 기적의

북소리가 울리고 경제건설의

마치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리마"는 세계에 널리 알려져

북한의 상징으로 되었다.

 

 

 

전후복구건설의

곤란한 상황에서도 김일성은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자녀들을 위하여 거액의

장학금을 보내주었다. 이 시점에서도

북한경제가 "한국"경제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1959년 12월에 시작된 재일 동포들의

북한귀국운동은 당시의

형편에서도 정당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경제나 국방의 모든 면에서도 정치의

안정도도 매우 좋았다.

아무 것도 걱정할 것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이승만이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북진통일을 외치며 재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김일성은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김일성은

이 천리마의 비약이 60년대에도

계속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고

국민소득은 2배로 증가하여 조만간에는

구미선진국수준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 미군이 계속

주둔해도, "한미군사동맹"이 체결되어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북한은 그때에 중국지원군을 오히려

철수시켰던 것이다.

 

 

 

소련군의 주둔도

요청하지 않았고 중국이나 소련과의

군사동맹도 필요하다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북한"이리"는 만족하고 있었고 사기도 높았다.



 

 

시베리아"곰"과 중국"용"과의 동맹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일변하게 되었다.

"천리마"도 속도를 멈추지 않을 수

없게 된 심각한 정세가 조성되었다.

전쟁재발의 위험이 닥쳐왔고

북한"이리"는 긴장하게 경계를 강화해야 했다.

 

 

 

 

1960년 4월 19일에 일어난

학생운동에 의하여 이승만"정권"이

무너지고 남한에서는

평화통일기운이 높아졌다.

하지만 학생운동은 단순한 계기를

조성한데 불과했고 이승만

"정권"붕괴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월남전쟁이 한창일 때

완고한 반일주의자였던

이승만"정권"은 극동지역에서

신군사동맹을 구축하는 데서도

장애로 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해인

1961년 5월 16일 서울에서는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여 전 일본군 장교였던

박정희가 군사독재"정권"을 세우고

평화통일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해 나섰다.

 

 

 

 

북한에서 보면 사태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5개월 전에 있은 1950년 1월 26일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이 체결되고

1951년 9월 8일 "일미안전보호조약"이

맺어졌던 것과 같은 분위기를

연상시켰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1960년 1월 19일에 새로 "일미안보조약"이

맺어져 일미군사동맹, 한미군사동맹이라고 하는

형태로 사실상 극동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미, 일, "한"

3각군사동맹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1961년 1월에 케네디가

미국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미국의 배후조종으로

"한일회담"이 재개되었다.

그야말로 전쟁전야를 방불케 하였다.

 

 

김일성은 커다란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월남전쟁이 확대되는데 따라서

미, 일, "한"이 북한을 공격할 위험성을

절박하게 느끼게 된 것이다.

 

 

 

북한"이리"는 남한의 "개"가 일본의

"원숭이"와 미국"사자"의 후원으로

북쪽 산으로 쳐들어올 수 있다는

우려를 느끼게 되었다. 할 수 없이

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곰"과

1961년 7월 6일에 동맹을 맺고

7월 11일에는 베이징에서

중국의 "용"과 동맹을 맺었다.

 

 

 

이렇게 되어 미국"사자", 일본"원숭이",

남한"개"의 동맹에 대항하여 북한"이리",

시베리아"곰", 중국"용"의

동맹이 결성되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인구 2천만인 북한도 인구

4천만인 남한이나 인구 1억인 일본과

인구 2억인 미국련합군에 인구 10억인

중국과 2억의 소련과 동맹하는 것으로

대항할 수 있기 때문에 "천리마"를

계속 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정세는 김일성이 기대한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김일성은 대국이란 것들은 결코

기대할 수 없는 것들이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애국심이 불타는 한민족과 한국의 대지밖에

없다는 것을 재삼 통감하게 되었다.

 

 

 

그는 "이리"는 죽을 때까지 "이리"로 남아있을 것이며

"곰"이나 "용"에 기대를 걸었다가는 운명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재인식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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