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는 아주 달리 오늘의 날씨는 파란하늘이고 또 억수 같이 퍼붓던 비가 공기를 맑게 해줘 멀리 있는 섬들도 아주 잘 보이는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 팽목항을 달려가 어제의 충충했던 때 본 이미지를 지워 버리고 오늘은 상큼한 바다를 보았다. 서망을 지나 진도의 명물 남도 석성에 도착해 성둘레를 한 바퀴 돌아보고 성 안쪽 마을도 둘러보았다. 이어 남도 석성 앞 쪽 바닷가로 들어가 학익 연안 같은 해안선을 갖은 작은 선착장을 둘러보았으나 그 뒤쪽으로 개설되어 있는 시멘트 길은 갯바위 끝에서 멈추고 말았다.
이곳에서 차창을 열어놓고 어제 차안에 들어 찬 습기를 말끔히 말려 버렸다. 잠시 여유를 부리고 있는동안 시간이 많이 흘러 벌써 오전 11시가 되어 간다. 선착장에서 돌려 나와 남도 석성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여 해안도로를 달린다. 길은 내륙끝을 달리는 것 같지만 시야가 좋아 밑으로 해안이 보이는 그런 시원한 길들의 연속이다. 바닷가 중턱 길 중간에 동령개 소공원도 만나고 또 굴포리로 들어서 끝에 있는 선착장도 볼 수 있었다. 굴포리에서 나오며 배중손 장군 사당도 둘러보고 해변길로 해 상만리 국립 남도 국악원도 잠시 들러 보았다.
[해안 도로를 달리며 만난 동령개 소공원에서 본 동령포 선착장 끝엔 송죽도가...]
[동령개 소공원에서 내려다 본 사자도와 뒤로 조도 쪽이...]
[동령개 소공원에서 내려다 본 동령포 선착장뒤 우측 끝이 진도의 최남단 이고...]
[동령개 소공원에는 나무도 많이 심어 쉴 만한 공간을 제공하고 있어...]
[동령개 소공원 안내 팻말이 멀리서 보니, 주차비 2,000원이라 써 있는줄 잘못 보기도...]
남도 석성을 출발해 언덕을 넘으면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멋진 해안이 보이고 그곳 돌아가는 코너 공터에 마련된 소공원이 있어 그곳에 차를 세우고 밑으로 내려서 바다를 본다. 정말 맑고 깨끗한 하늘 아래 수평선이 아득히 보이는 곳에 많은 섬들이 둥둥 떠있는 것 같아 한참을 내려다 보았다. 그길로 내려가 굴포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굴포 2리 안쪽으로 들어서니 자그마한 조선소를 지나 방파제 끝까지 들어가 보았으나 이곳도 역시 해안으로 가는 길은 갯바위 앞에서 멈추고 만다. 다시 돌려 나오는 길 건너편에 배중손 사당이 아담하게 보인다.
[굴포리 냉동창고 앞 넓은 공간에서 잠시...]
[끝까지 들어가 보았으나 이곳도 갯바위가 길목을 막고 있어...]
[방파제 건너편으로 몇 개의 수산들이 보이고...]
[방파제에서 보니 날이 맑은 까닭에 삼십리나 떨어져 있는 구자도가 보이고...]
[넓게 만들어진 선착장 뒤로 건너편 마을도 아름답게 보이고...]
요즘엔 시골로 가도 리 단위가 분리된 곳이 많아졌다. 심지어는 5구, 6구 이렇게 된곳도 있을 정도이다. 이곳도 그냥 굴포리 하는게 더 느낌이 좋은데 입구는 굴포 1리 이고 안쪽엔 굴포 2리 라고 한다. 굴포리엔 크지는 않지만 굴포 조선소도 있어 선박을 만들고 있는 것을 물끄럼히 보기도 했다. 이제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돌려서 나가야 한다. 물론 들어오면서도 보았지만 다시 나가며 건너편 마을을 보니 그곳에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와 기와가 보이는 배중손 사당이 바닷가에 예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인다.
[굴포 마을 돌아나오는 길목에서 건너다 보이는 배중손 사당 소나무가 일품...]
[배중손 사당 정문옆에 차를 세우고...]
[배중손장군 사당인 정충사(精忠祠)...]
1270년(원종 11) 5월 15일 임유무의 무인정권이 정변에 의하여 붕괴되고 5월 23일 개경에의 환도가 결정되자 삼별초를 중심으로 한 반몽 집단은 크게 동요하였다. 개경정부는 이들을 회유하는 한편 5월 29일 삼별초를 혁파하는 강경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6월 1일 배중손은 삼별초를 움직여 왕족 승화후 온(溫)을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하고 아울러 대장군 유존혁(劉存奕)과 상서좌승 이신손(李信孫)을 좌, 우 승선(承宣)에 임명함으로써 몽고에 복속한 개경정부를 배격하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다. ▶▷≫
[배중손장군 동상...]
이어 배중손은 삼별초 반몽세력을 규합하여 6월 3일 강화도를 출발하여 전라도 서남해안의 진도를 새로운 거점으로 정하고 고려의 정통정부를 자임하면서 반몽고 항전을 지속하였다. 제주도를 그 배후 기지로 확보하는 한편 진도와 남해 연안이 갖는 전략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차원에서 일본과의 반몽고 연합을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듬해인 1271년(원종 12) 4월 고려·몽고 연합군의 대규모 공격에 의하여 진도가 함락됨으로써 삼별초 정권은 붕괴하였는데 이때 배중손은 많은 군사들과 함께 최후를 마친 것으로 보인다. ▶▷≫
[배중손장군 동상...]
당시 삼별초 반몽세력의 일부는 제주도로 탈출하여 1273년(원종 14)까지 반몽 항전을 지속하였다. 진도의 배중손이 몽고군 공격군 사령관 아해(阿海)에게 진도에 오도록 초청하면서 몽고에 복속하겠다는 제안을 한 점을 들어 그가 몽고와 타협하려 하였다거나, 진도 공함시 배중손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여 배중손이 1271년 4월 이전에 이미 숙청된 상태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를 신빙하기는 어렵다.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 남도성 부근에 그의 사당 안쪽에 동상이 세워져 있고, 옆에는 한동의 사당이 지어져 있다.
[고산 윤공선도선생 사적비(孤山 尹公善道先生 史蹟碑)...]
이 비(碑)의 전문을 보면 - 고산 윤선도 선생(孤山 尹善道先生)은 조선 시대 중엽 시조문학의 대가로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강직한 선비였을 뿐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도 남다른 행적을 남기셨다고 한다. 선생은 이곳 굴포에 백정보 가량의 바다를 막아 논을 만들어 이곳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셨다. 나라의 힘이 미치기 어려웠을 때 의진 이곳에 이일을 이루어 오늘날까지 그 땅을 부려온 것은 길이 전할 만한 일이다. 여기 사람들은 선생에게 대한 감사한 마음과 이바다의 둑이 탈이 없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매년 음력 정월 보름이면 제전을 올리고 굿을 해왔다. 이사연을 영원히 남기고자 정성을 모아 여기 비를 세운다. 백계씀 측면에 - 서기 1991년 4월 6일 건립
[사당 끝쪽엔 배중손 장군 사당 안내판이 서있고...]
[사당 뒤뜰엔 수만은 풀들이 가득...]
[해송인 보호수는 220년생으로 높이 13m 이고 둘레가 310cm 라고...]
[나가기 싫어지는 발걸음을 떼어 보며...]
[사당 입구 둑방에서 건너편 굴포마을을 보면...]
[사당앞 둑방에서 내려다 본 배중손장군 사당...]
[사당앞 둑방에서 내려다 본 배중손장군 사당...]
[다시 소나무 앞에서 넘어다 본 배중손장군 사당...]
이곳 배중손장군 사당을 생각한 것은 삼별초를 생각해본 것과 같고 또 많은 학자들이 생각이 다르듯 우리의 생각도 다를 수 있다. 지금의 현실도 그러하듯이 세월이 지나야 그일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그리고 또 그인물이 세월이 지나봐야 충신이었는지 아니면 역도였는지 그런 것들이 밝혀지고 만다. 역시 이 일도 그런 뜻과 세월이 담겨 있길래 내 뜻은 기술 하지 않고 자료 들로만 채워 보았다.
- 배종손 사당에 대하여 자세히 보시려면 이곳을- : http://blog.empas.com/city3000/28684406
[국립 남도 국악원을 감싸고 있는 여귀산 능선...]
굴포리에서 돌려 나와 신동 삼거리에 이르니 낯익은 곳이다. 어제 오늘 두 번이나 지나간 길이다. 이곳에서 조금 가니 또 우리가 가야할 길과 임회면가는 길이 나선다. 진도의 길은 알 수가 없다. 이리가도 18번 도로이고 저쪽으로 가도 18번 도로이다. 지도를 가만히 보면 진도 외곽을 도는 길이 18번 도로인데 이곳에서 서망항까지 돌아 나오는 길도 18번이라 농원 삼거리에서 보면 길이 전부 18번 도로로 가는 방향이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부터 죽림리 까지는 또 해안도로가 없다. 산중턱을 달리는 맛도 괜찬은 기분이기에 바다를 내려다 보며 달려간다.
[국립 남도 국악원에서 내려다 본 귀성 마을과 선착장...]
[국립 남도 국악원 건물들이 현대식으로 지어져 있고...]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 373번지에 위치한 국립 남도 국악원은 우리나라 국악의 원형을 보존하고 또 창조적인 문화자원을 발굴하고 이 지역의 특성을 살려 공연과 교육의 장을 이룩하기 위하여 진도에 설립을 하게 되었다. 지난 2001년 11월 착공, 2004년 7월에 개원하였다. 전면적 11만 여㎡에 600여석의 진악당, 그리고 야외음악당인 달빛마당, 사랑채 옆의 작은 공간 별빛마당, 160명을 수용하는 사랑채 등이 있고, 사무 연습 동과 계단폭포, 분수대, 카페테리아와 작은 연못도 있고 계단폭포도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마을 좌측으로 오봉산, 그리고 앞 쪽엔 아리랑 마을 조성하느라 온 동네를 다 파헤쳐 놓아...]
[국립 남도 국악원 제일 꼭대기 건물인 기숙사에서 내려다 보니...]
귀성 마을 선착장까지 내려가 보고 싶었지만 마을 전체가 아리랑 마을로 변신을 하느라 파헤쳐져 가보기가 싫기도 하지만 언젠가 아리랑 마을이 완공이 되면 다시 찾아 오리라는 마음만 먹고 발길을 돌려 산허리를 돌아서니 커다란 돌탑들이 보인다. 이제까지 돌탑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그 크기가 높아야 3~4m 정도인데 비해 이곳의 탑은 꼭 마이산 탑사에서 본 것처럼 대단히 크다. 어림잡아 7`~8m는 되는 것 같아 보였다. 이곳을 찍고 조금더 이동을 하니 그곳에도 커다란 규모의 삼층 돌탑이 조성되어 있다. 이때까지도 이곳이 탑 마을인줄 몰랐다.
[진안 마이산내 탑사의 꼭대가 탑을 연상 시켜주는 멋진탑들이 ...]
[차를 돌려 가기 위해 기다리며 본 멋진 산복도로 좌측은 탑립 선착장 가는길...]
[탑을 조성중인 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다엔 좌측에 접도가 보이고 앞엔 구자도가...]
무심코 지나며 찍어본 탑들이 너무 멋져 보여서 궁금증을 풀기 위해 차를 돌려 다시 들어가 보기로 하고 조금 길 위 휜 위험 구간이기에 좌우측에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을 때 잽싸게 차를 돌려 먼저 본 탑이 있는 공사장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일하시는 분께 물어보니 자기는 그냥 일만 할 뿐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며 여긴 왜 들어 왔냐는 원망스런 모습으로 말씀을 해 차를 빼니 바로 차단기를 내려 버린다. 아마도 진도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을 하며 다음 구간으로 또 옮겨 보았다. 이곳에도 굉장히 커다란 돌탑을 만들어 놓았다.
[커다란 규모의 넓은 곳에 조성을 하고 있는 돌탑들...]
[버섯 모양을 한 커다란 돌탑도 보이고...]
두 번째 탑공원을 조성하고 있는 넓은 공간에 차를 놓고 좌우를 살펴 보았다. 이곳은 아직 터만 닦아놓고 공원은 아직 만들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이곳의 탑이 제일 크기도 하고 또 멋지기도 해서 하나뿐인 이곳에 오래 머물고 있었다. 갑자기 출발을 하려고 뒤를 보니 성산이 보이지를 않는다. 이친구도 얼빠진 듯 이리 저리 찍으로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큰소리로 불러도 못듣는 것 같아 다시 차를 한 바퀴 돌려 첫 번째 탑공원으로 들어가 태우고 또 언제 시간 여유가 있었냐는 듯 급한 척 도로를 달려 본다.
[두 번째로 만난 커다란 돌탑 조성지에...]
[사람이 옆에 서 있으면 크기가 대비가 될 터인데 하는 생각이...]
온통 이동네 주위엔 이곳 저곳 탑들이 들어서 있다. 누가 무슨 이유에 이렇게 많은 탑을 만들어 놓았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 된다. 물론 요즘 들어 많은 곳에 이런 탑을 만들어 놓은 곳이 많지만 그런 탑들하고 크기면에서 다르기에 의문은 더욱 깊어 진다. 그 이유는 조금 달려가 죽림마을로 내려서면서 의문이 풀리고 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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