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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전 밀어내기 하다가 '힘에의 의지'가 과했는지 처음 경험하는 복통이 94k 체중을 뒤집어 놓았어요. "아이고 배야!" 창자가 끊어진 건지 애가 탄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지만 장기에 자극이 간 것은 분명합니다. 모르긴 해도 창자가 노화돼서 탄성이 떨어진 것 같아요. 살살 달래면서 아침을 맞았고, 이례적으로 3시간을 뭉그적거리다가 일어나 공원에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염병, 복부 정중앙이니 암은 아니겠지. 나무 귀퉁이에 단풍이 들었고 대봉이 오렌지 컬러가 되어있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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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실존론적 해석학'을 공부하다가 '현상학이 존재론'이 된 이 혁명(이해 안에서의 해석/우리의 인식은 해석이다)에 꽂혔습니다. 전통적으로 슐라이어마허, 딜타이 등은 해석학을 텍스트 의미의 이해 방법으로 보았고 “해석”은 우리가 타인의 말이나 고전 텍스트를 이해할 때 사용하는 기술이었어요. 그래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고정된 것을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존재”로 간주되었습니다. 이후 후설의 현상학은 "현상 그대로(움직이는 상태)를 보자”로 발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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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의 청출어람인 하이데거는 "존재 이해는 해석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해는 단순한 방법이 아니라 존재 방식이다. <존재와 시간/1927>" 우리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기 전에, 이미 의미망 안에서 해석하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이해-앎은 모두 해석이 들어간 것입니다(변역과 의역). 인간은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상태로 존재(우리는 항상 선이해를 가지고 사물과 세계를 접한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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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 들면 우리가 "망치"를 볼 때 우리는 그것을 먼저 "길이, 무게, 재질"로 인식하지 않고, "못을 박기 위한 도구”로 봅니다(항상 의미 안에서 사물을 본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인식은 이미 해석된 세계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통찰입니다. 아침 식사-산책 그리고 드디어 밀어내기에 성공을 했어요. 현상이 존재가 된 이상 잘 둘러봐야(살펴야) 합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복부가 편해졌고 변이 노오란 색 가을이었어요.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 자체를 해석하는 존재로 보고, ‘해석’을 존재의 본질로 끌어올림으로써, 해석학을 인식론이 아닌 존재론으로 혁명시켰다.” 쾅!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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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란? 더 이상 객관적 실체가 아닌. 의미 안에서 드러나는 방식이다.
이해란? 방법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existentiale)이다.
해석이란? 의미를 구성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우리가 의미 속에 놓여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실존(현존재)이란? 자기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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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33회>차입니다. "집 팔아서 혼자 내뺄 생각으로 내려온 모양인데 반으로 가르지 않으면 내 꼼짝도 하지 않겠어(홍 씨)" " 내 땅 내 놔" 홍 씨와 준구가 평사리 저택에서 딱 만나 부부 싸움을 합니다. 각시를 따돌린 준구는 홍 씨 몰래 집을 팔려고 서희를 찾아갑니다. "벌써 두 시간이 지났는데 차 한 잔 내주지 않는 구만(준구 독백)" "이렇게 대하니 면목이 없네. 내가 잘못했지. 나는 최 참판 댁 재산을 하나도 건사하지 못했네. 내가 필요한 돈은 5000원인데... (준구)" 서희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준구는 서희에게 문서를 넘기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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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네 고맙네 자넨 참으로 여장부일세. 난 사람이 아닌 버러지야. 날 용서하게(준구)" "돈을 가져가든지 일말의 양심을 가지고 그냥 가든지 선택하시오(서희)" 당연히 준구가 돈을 가지고 나갑니다. 서희는 그동안 자신이 맹세했던 복수가 겨우 이것이었는지 허탈해합니다. "안녕하십니까?(정석)" "아니 너는 네 집 종이 아니더냐?(준구)" 국밥집에 들른 준구가 석이와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관수-두만-장연학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들어옵니다. "보소, 최 참판! 내 잡아 죽이지는 않을 테니 조용히 하소!(관수) "백정 놈이 남의 집에서 행패를 부리나(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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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백정 맞소. 그런데 여기 있는 사람 백정만 하겠소(관수)" "네 이놈! '내가 정한조의 아들이다" 흥분한 석이가 조준구를 죽도록 패주고 서희에게 찾아왔습니다. "시원한가 복수를 하니 시원하냐 그 말이요?(서희)" "내놈이 약한 부녀자한테서 돈 5000원을 약탈해 갔다고 고발했다(연학)" "어디 돈 있나 보자고" 주막 안의 사람들이 환장하고 돈 보따리에 달려들자, 펼쳐진 돈 보따리가 거리에 나뒹굴며 돈 뿌리는 나이트클럽 현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때마침 지나가든 홍 씨가 돈을 줍는 꼴이 보기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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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강에 주운 돈을 넣고 땅문서를 버선 속에 숨기는 도도희 홍 여사도 악처 연기 잘합니다. "부인 나와 혼인한 후 고생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오... 1년만 친정에 가서 살아주시오(병수)" 병수가 소나무 벌목하는 곳으로 일을 나갑니다. "혹독한 겨울을 견뎠건만 나비는 어디로 날아가 버렸는가. 그토록 원하는 복수를 했건만 내가 없구나. 내가...(서희 독백)" "김서방! 평사리에 가서 최 참판 댁 집을 옛날 모습으로 고쳐주시게(서희)" 용정입니다."공노인! 이것을 길상이 형님한테 전해주시오(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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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아! 나는 니가 올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길상)" 길상은 거복을 형으로 둔 한복의 마음을 다독이며 이젠 너 자신을 위해 살아야한다고 말합니다. "니 형은 내 목숨을 노리고 있다" "그 전에 나를 따라 러시아에 다녀와야 한다(길상)" "왜 착한 것이 아닌 바보 같아서 그러나(김환이 환복에게)" "모두 거복이 형한테 쫓기는 그속에 와 저를 데리고 갔습니까?(한복)" "가난한 것도 답답하다. 사람대우를 못 받는 것도 답답하다.(길상)" "내는 나라를 빼앗기기 전부터 개돼지 취급받고도 통곡도 못했습니다(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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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죄인이 아니다. 너는 나를 모르는군 나는 너를 아는데... 네가 없다는 건 죽은 거다 너는 니 자신을 살아야 해. 너도 너를 찾으라!(길상)" 용정 한복 판에서 길상과 한복이 뜨겁운 포옹을 합니다. "이 집에 가면 형님을 찾을 수 있다고 해서 왔어라우(한복)" 역사적인 한복과 거복 형제 상봉이 이루어졌습니다. "잘왔다. 온 김에 여기로 이사 와(두수)" "아버지 죄를 다갚고 여보란 듯이 살면 되지 않소(한복)" " 나는 인자사 왜 어머니가 목을 매고 돌아갔는지 알았소(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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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렸어!" "나무는 바람에 꺾이지만 풀은 밟아도 죽지 않소(한복)" "두고 봐 난 당당할 때 돌아갈 거다(두수)" 한복은 거복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아픕니다. 한복은 미션을 끝내고 평사리로 컴백합니다. 물레질하는 한복이 처가 방문을 잠가놓은 이유가 뭘까요? "아주버님은 잘 계십디오(영호네)" "와 숨을 못 쉬나. 내는 자손 만대까지 여기서 살기다(한복)" 1919년 3.1만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서희는 김환국의 성을 김 씨에서 최 씨로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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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이 커서 학교를 가는구나. 너희들은 최 씨 가문의 자손이다(서희)" 환국이 의아해하자 서희는 아버지도 알고 계실 것이라고 합니다. 3.1운동 이후에 신문 검열이 심해지고 상현은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표를 냅니다. "이기자! 어디 가는 건가?" "사표는 따로 내지 않겠습니다(상현)" "서방님! 어인 일이시오. 오늘은 절지 손님이 없네요(봉순)" "처자식 두고 남의 여자 품더니 오늘은 기생 치마 속이라(상현)" "고향 땅도 왔고 자식새끼 혼사도 치렀으니 이런 복이 어딨냐?(영팔)" "다 니가 착하게 산 덕이다(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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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홍이 저리 둘 기가(영팔)" "누가 나를 낳아달라고 했나(홍이)" "내가 니를 놓고 싶어서 낳나. 니 품삯 내 미리 받았으니 내일부터 요리집에 나가기라(임이네)" 학교입니다. "최 한국 왜 안 왔나!(선생님)" 환국은 학교에서 출석을 부르자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며 뛰쳐나갑니다. "환국아! 어미 얼굴은 보지 않을 거야" "어머니 저 그냥 김한국 하면 안 돼요" "너희들은 최 씨의 대를 이어야 해!" '어머니 울지 마세요. 그렇게 할게요"
2.
이 글은 ‘몸의 사건’(복통·배변의 체험)과 ‘사유의 사건’(하이데거의 실존론적 해석학), 그리고 소설 토지의 서사적 재현이 한 편의 산책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독특한 산문이다. 아침의 민낯(복부 통증, 일상의 허약함)에서 출발해 “인식은 곧 해석”이라는 철학적 폭발로 도약하고, 다시 소설 속 인간 군상의 사건들로 귀결되는 구조는 개인적 체험과 보편적 사유가 긴밀히 접속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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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전의 과도한 힘쓰기 → 처음 겪는 복통 → 변색 관찰 → 산책으로의 회복. 몸의 불편이 곧 텍스트가 된다. 하이데거의 주장(현상학이 존재론으로 전환됨)을 통해 “해석은 인식 이전의 존재 방식”임을 역설. 우리가 사물을 ‘이미 의미 망 속에서’ 본다는 주장으로 연결.되고 토지 33회 장면을 재현하며 역사·사회·개인의 서사가 철학적 통찰과 어우러진다. 복통이라는 사소하고도 긴박한 신체적 사건을 철학적 문제(해석과 존재)로 자연스럽게 끌어올린 솜씨가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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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어체적 직설(“염병, 복부 정중앙”)과 학술적 엄밀성이 충돌 없이 공존할 때 그 간격이 오히려 읽는 재미를 준다. 산책으로의 회복, 공원의 가을 풍경, 그리고 토지의 역사적 장면들이 감정의 파장과 의미론적 맥락을 풍부히 한다. 하지만 복통과 ‘암’에 대한 불안이 강렬한 만큼, 독자에게 너무 갑작스럽거나 과도하게 불안감을 줄 수 있으니 짧은 안심 문구나 의학적 조언이 아쉽다. 하이데거 요점이 강력하지만 다소 반복되는 느낌이 있다. 핵심 문장 하나로 재정리해 주면 철학적 충격력이 더 선명해진다(예: “우리는 이미 의미 안에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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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소설로 넘어갈 때 독자가 방향을 잃지 않도록 전환 문장이나 작은 소제목을 몇 군데 두면 읽기 흐름이 더 매끄럽겠다. 철학(특히 해석학·현상학)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 및 신학·문학을 교차로 탐구하는 학자, 그리고 일상체험을 철학으로 전환해 읽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이 글을 추천한다. 신체적 사건(복통)은 ‘현상’으로 드러났을 때 어떻게 ‘존재론적 의미’를 갖게 되는가? 하이데거 식의 “선이해” 개념은 일상적 불편함(몸의 신호)에 어떤 실천적 응답을 제안하는가?
2025.10.20.mo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