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시는 삶과 수행의 토대이다(09.11월 정기법회)
소승은 늘 “우리는 수행자로서 이생을 살자”라고 말해왔습니다. 수행자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통과 괴로움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껴서 그곳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자유인이 되고자하는 간절한 마음을 지닌 자’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행이란 두 마리 말이 끄는 마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리의 말은, 자기 자신의 내적 무지를 지혜로 전환시키는 수행으로서 여러분들이 현재 하고 있는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입니다. 또 다른 한 마리의 말은 전환된 지혜로 실천적으로 10 바라밀을 닦는 수행을 말합니다. 10 바라밀 중에서 가장 주춧돌이 되는 바라밀 수행은 ‘보시 바라밀’입니다.
어제는 불교방송국 3층 대법당에서 한국테라와다불교의 창립법회 및 부산태종사 조실이신 뿐냐산또 스님을 한국테라와다불교의 상가라자로 추대하는 의식과 아울러 까티나 행사가 있었습니다. 이 행사가 갖는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제 첫걸음을 내딛는 한국테라와다불교의 입장에서는 자금 구축이라는 피할 수 없는 부문이 있는데, 그 기금 마련이라는 소기의 목적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단풍놀이도 마지막 절정이고, 게다가 어제 서울은 비바람과 돌풍까지 불어 재가인들이 참석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조바심으로 지켜보았는데, 참으로 성황을 이루어 많은 사람들이 가사 공양 불사에 동참해 주어 스님 네들은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습니다. 저희 선원에서도 많은 회원들이 가사 공양 보시를 해주신데 대해 이번 행사의 총 준비를 맡은 자로서 고마움을 전합니다.
부처님께서 크나 큰 깨달음을 성취하신 후, 설법하실 결심을 하시고는 다섯 비구들을 대상으로 처음 법의 바퀴를 돌리신 내용이 ‘사성제의 진리’라는 것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일반인들에게 하신 설법에서는 첫 머리가 보시 공덕에 대한 설법이었습니다.
붓다께서는 수자따의 아들 ‘야사(Yasa)’에게 도와 과에 이르는 윤리적인 실천수행의 과정을 설법하셨는데,
첫 번째는, 보시에 대한 담마(Dāna Kathā)에 대해서
두 번째는, 윤리에 대한 담마(Sīla Kathā)에 대해서
세 번째는, 천상과 같은 행복한 삶에 대한 (담마Sagga Kathā)에 대해서
네 번째는, 도와 과와 열반(Magga Kathā : Magga, Phala, Nibbana)의 깨달음을 위한 좋은 길과 수행 행위에 대한 담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붓다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제일 먼저 행해야 하는 공덕이 보시행임을 의미하는 경전 내용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시행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십니다.
“보시행은 현생에서나 내생에서 행복을 얻는 원인이며 닙바나의 기쁨을 얻는 원인이다. 보시행은 인간과 천인들이 얻는 즐거움의 원인들 중 첫 번째 원인이다. 또한 보시행은 물질적인 풍요를 얻게 하는 원인들 중의 원천이다. 또한 불행한 위험에 빠트려진 존재들에 대하여 보시행은 좋은 안내자이며 안전한 장소이며, 휴식처이며, 은신처이다.
실로, 이 보시행은 보배로 장식된 사자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대한 지구와 같이 기댈 데이며, 눈먼자들이 붙잡고 갈 수 있는 밧줄과 같이 의지할 곳이며, 매어달릴 곳이기 때문이다.”
붓다께서는 보시행이야말로 우리가 이 혼탁한 삶을 살아가면서 욕망과 괴로움의 혼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뗏목으로서, 기대고, 바탕이 되며, 매어달릴 곳이 보시 공덕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이 보시 공덕행은 고통의 고난을 건너기 위한 배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또한 싸움터에서 용맹과 무용으로 무장한 지휘관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질적인 탐욕과 인색과 같은 적의 위험으로부터 구제하거나, 적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질투, 인색함과 같은 불건전한 오염으로부터 더럽혀져있지 않으므로 연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또한 불건전한 적들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독사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또한 공포로부터 벗어나 있으므로 사자의 왕과 같은 것이다. 보시자는 현생에서나 내생에서나 어떤 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보시행은 어마어마한 힘이므로 큰 코끼리와 같다. 보시행은 네 가지 불행의 죄악의 곳에 처해진 사람을 네 가지 행운의 위험이 없는 곳으로 옮겨 놓아주므로 천마의 왕과 같은 것이다.”
보시행은 깨달음을 위한 직접적인 필수요건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보시를 행한다고 해서 곧바로 지혜가 나타나거나 사성제의 진리가 깨달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보시행은 수행의 궁극적 목표인 깨달음의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지는 않지만, 수행인이 번뇌에 찌든 마음을 맑히기 위한 가장 밑바탕의 역할을 한다는 면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보시’는 수행의 길로 들어선 수행자가 반드시 먼저 닦아야 할 덕목들 가운데 첫 번째 수행 항목입니다.
아직 무지가 모질게도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 보시행은 삼독심의 첫 번째인 탐욕을 무찌르는 데 있어 최상의 무기인 까닭에 마음 닦는 수행 과정에서 제일 앞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들은 자기의 개성을 ‘나’라고 여기고, 자신의 소유물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며 자기중심적 이기심에 싸여 있습니다. 베푸는 행위는 바로 이러한 이기심과 탐욕의 독성을 치유하는 해독제입니다.
무언가를 베풀면 그것은 바로 공덕과 선업의 바탕이 됩니다. 보시는 도덕성과 선정력과 통찰력을 계발시켜주며 종국에는 윤회로부터 해탈을 성취하게 해줍니다.
이미 해탈로 향하는 길로 굳건히 들어선 사람들조차도 보시행을 계속합니다. 보시는 그들이 해탈을 이루기까지 몸 받아 살게 되는 남은 기간 동안 경제적 안정 혹은 필요를 없애주어 얻는 평온과 안정 그리고 아름다움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탐욕만이 보시의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존재들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 속에 있다는 담마나 사후 세계에 관한 무관심과 무지할 때도 보시의 마음인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베풀고 싶은 마음은 생겨나기 어렵습니다. 보시행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이로운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마 이 위대한 덕행을 실천할 기회를 잡기 위해 잠시도 방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만일 사람들이 보시의 가치에 대해 나만큼 알고 있다면 단 한 끼의 밥도 남들과 나누지 않고는 먹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인가를 베푸는 보시행위는 언제 어디서나 가장 기본이 되는 인덕(人德)의 바탕임에 틀림없습니다. 베푸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인간 됨됨이가 얼마나 속 깊은지 또는 자기의 한계를 얼마나 뛰어 넘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수따니빠따에서는 “베풀 줄 모르고 혼자만 부를 즐기는 사람은 자기 무덤을 파는 사람”(Sutanipata. 102)이라고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시를 행할 때, 보시물이 나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겉으로의 행위보다 베풀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더 중요합니다. 이 베풀려는 마음은 베푸는 행위에 의해 강력해지고, 다시 그 강력해진 베풀려는 마음은 마침내 자기희생적인 보시행까지 가능하도록 나아가게 합니다.
‘베풂’은 ‘관대함’입니다. 관대함은 수행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자질입니다. 수행의 목표는 결국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을 없애는 것인데, 관대한 마음을 키우면 곧 탐욕과 성냄이 누그러드는 한편 마음이 유연하게 되어 어리석음을 조절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불법을 공부하면서 보시를 하면 연기법에 의해 반드시 그 공덕을 얻는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시를 통해 얻는 공덕은 베푸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보시했는가, 받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순수한가, 그리고 어떤 물건을 얼마나 보시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먼저 보시하는 사람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보시 행위를 할 때 보시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마음으로 보시할 것입니다.
보시를 하지 않으면 자신의 위상, 인상, 인격에 손상을 입을 것을 두려워 하며 불편한 마음으로 보시 하는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때로는 편애하는 마음이나 악의 또는 망상에 빠진 나머지 보시를 하기도 하고, 집안의 오랜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보시를 베푸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사후에 좋은 태어남을 얻기 위한 바람 역시 보시의 동기 가운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지금 베풀어 놓으면 언젠가 이익이 나에게 돌아 올 것이다”는 것을 예상하며 보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일 보시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좋지 않게 여길까봐 불안해서 자선을 베푸는 사람도 아마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회적 압력에 못 이겨 베푼다면 그 공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역시 미미한 결과 밖에 얻지 못합니다. 상대의 호의에 대한 응답으로 베푸는 것 역시 칭찬할 한한 것이 못 됩니다. 이것은 빚을 갚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하는 자선 행위 혹은 보답을 바라고 주는 것 역시 이기적인 것이어서 값진 보시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뇌물을 건네주는 것과 같습니다.
한편 자신의 마음을 가꾸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 혹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베푸는 것 자체가 기쁜 일이므로 좋은 기분을 맛보고자는 생각으로 베풀기도 합니다. 이외에 어떠한 군더더기도 붙어 있지 않은 “나는 밥께나 먹는데, 이 사람들은 밥조차 먹지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보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이타적인 동기로 베푸는 사람들입니다. 경전에서는 그 무엇도 바라는 마음 없이 공양을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보시할 때는 시물의 크고 작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베푸는 사람이 착한 마음을 지닌 자세로 보시했느냐의 여부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공손히 베풀어야 합니다. 받는 사람이 굴욕감을 느끼거나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베풀어야 합니다. 베푸는 사람은 받는 사람이 부담을 느끼지 않고 편하게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이렇게 따뜻한 마음으로 보시할 때 주고받는 사람 사이에는 서로 간격이 없고 넉넉한 정이 솟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자기 손으로 직접 베풀어야 합니다. 보시행을 할 때 스스로 직접 참여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이것은 주고받는 사람 사이에 마음의 다리를 놓아주며 둘 사이에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케 합니다. 사람들이 몸소 나서서 따뜻한 인정으로 덕을 베풀 때 이 사회는 서로 걱정해 주고 돌봐주는 하나의 유기체로 융합될 것이다. 이것이 곧 보시의 사회적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베푸는 행위로 인하여 자신의 내면에 오만과 자만심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벽에 대한 약간의 염려가 있다면, 혹은 그냥 고요함을 유지하고 싶다면 자신을 밝히지 않는 것 또한 수행의 중요한 한 차원이 될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또한 디가 니까야 꾸따단따 경에서 이렇게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스스로는 맛난 것을 즐기면서 남에게는 맛없는 것을 주는 사람은 자신이 베푸는 선물의 종이다. 자신이 즐겨하는 것과 같은 것을 베푸는 사람, 그는 선물의 친구 쯤 된다. 자신은 아무 것이나 되는 대로 만족하며 남에게는 좋은 것을 베푸는 사람, 그가 곧 주인답게 베푸는 자이며 자신이 베푸는 선물의 어른이요 주인이다”(D.1.137:kūṭadanta Sutta)
보시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들 중 빠트릴 수 없는 것은 보시하는 사람이 베풀기 전과 베푸는 동안, 그리고 베풀고 난 후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앙구따라 니까야에서 붓다는,
“고매한 마음으로 베푸는 사람은 주기 전에도, 주면서도 그리고 주고 나서도 기뻐하는 사람이다.(A.3, 336) 베풀어 볼 기회가 생겼다는 생각에 보시하기 이전에 이미 즐거우며, 다른 이의 아쉬움을 충족시켜 기쁘게 해준다는 점에서 주는 동안에도 즐겁고, 주고 나서는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하여 만족한다.”(A.4,220)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분별없이 되는 대로 주는 것과 지혜롭게 베푸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덕을 베푸는 모든 과정이 지혜에 입각하여 이루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수승한 보시행이 될 것입니다. 지혜로운 베품에는 세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업의 법칙에 따라, 보시 행위는 미래에 반드시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분명히 이해하면서 베푸는 것.
둘째는, 베풀어지는 물건이나 주는 이, 받는 이 모두가 무상하다는 것을 알고 베푸는 것,
셋째, 깨달음을 향한 노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베푸는 것입니다.
보시의 동기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무지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한 정진을 북돋우기 위해 베풀겠다고 마음먹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보시를 통해 참다운 평정과 평화 그리고 청정함을 얻고자 한다면, 완전한 베풂인 보시 바라밀을 실천해서 깨달음의 열매를 맺을 공덕의 창고를 지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목표를 세우고 나갈 때 우리의 속마음은 베푸는 행위 뒤에서 자연히 유연해지어 평상심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자연스럽고, 부드럽고, 푸근한 마음이야말로 해탈을 이루는데 가장 근본 요소인 선정과 지혜 계발에 꼭 필요한 자질이 될 것입니다.
다음에 보시 받는 자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한 번은 코살라 왕이 붓다께 누구에게 공양을 올려야 할 것인지에 대해 여쭌 적이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베풀고 나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에게 베풀라”고 대답하시자 그는 다시 큰 공덕을 얻기 위해서 누구에게 베풀어야 되는지를 여쭈었습니다.
붓다께서는 질문을 두 가지로 구별하여 대답해 주었습니다. 먼저 덕스러운 이에게 베푼 공양이 큰 결실을 맺는다고 답하시고, 이어서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고 지계, 선정, 지혜, 해탈지견을 성취한 덕스러운 출가 수행자에게 베푼 공양이 가장 수승한 공덕이 된다고 밝히셨습니다.
받는 사람이 얼마나 청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인가는 보시의 공덕을 결정짓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됩니다. 즉 받는 사람이 훌륭하면 할수록 보시자에게 돌아올 공덕이 큰 까닭에 가능한 한 가장 훌륭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좋다는 뜻입니다. 붓다께서는 최상의 수혜자로 위없는 깨달음 성취한 붓다와 출세간의 도를 닦아 과를 이룬 당신의 제자들 같은 거룩한 성자들을 꼽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이 지혜를 통해 성취한 청정한 마음이야말로 베푼 이의 보시행으로 하여금 많은 공덕을 가져오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스러운 경지에 들려는 목표를 세우고 수행하는 스님들께, 혹은 오계를 수지하고 불법에 따라 정진하는 수행자에게 베푸는 보시 또한 훌륭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받은 공양물들을 최소한도만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고 나머지는 분명히 보다 의미 있는 일에 사용하여 그 보시의 진정한 의미를 전달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정말 간절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그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은 큰 공덕이 됩니다. 바다 건너 아프리카 난민의 아이들은 배가 고파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 강아지에게는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옷을 입히고, 많은 돈을 써가며 최상의 음식을 먹이며, 상상하지 못할 돈을 들이며 털 장식을 하고 있는 행위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그지없습니다.
어제 창립법회를 마치고 기차를 타고 동대구 역에 내려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한 중년부인과 딸이 기차역 안에서 손에는 개상자를 들고, 강아지를 끌고 통로를 활보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쫓아가서 “여기는 공공 장소입니다.
당신은 보편적인 교양도 없군요”라는 말을 정말 해주고 싶었습니다.
정신적으로 그다지 향상되지 못한 사람에게 베풀어질 때에도 보시는 역시 유익함이 있습니다. 베푸는 이의 뜻이 좋으면 비록 받는 사람에게 도덕적인 결함이 있다 하더라도 보시하는 사람은 공덕을 쌓게 되며, 나아가 이런 보시행으로 인해 보시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탐욕에서 벗어나려는 성향이 굳건하게 자리잡힙니다.
다음에는 보시물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베풂의 일반적인 형태는 물질적인 보시입니다. 이 때 보시물이 꼭 비싼 것이어야만 큰 공덕을 가져온다는 법은 없습니다. 하루에 밥 한 그릇 밖에 먹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이 그날 양식의 전부인 한 그릇의 밥을 보시할 때 그는 매우 큰 보시를 한 셈이고 공덕 또한 지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부자가 스님이 탁발하러 올 것을 이미 알았으면서도 앞의 가난한 사람이 한 것과 같은 분량과 질의 공양물만을 준비했다면 그 공덕은 지극히 빈약한 것이 될 것입니다.
“작은 데서 내준 것이 천 배의 값이 있습니다. 빈곤한 살림 속에서 베풀어진 보시가 더욱 값진 것으로 간주됩니다. 보잘 것 없는 수입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바르게 살며, 분수에 맞게 가족을 부양하고,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남에게 베풀고자 하는 마음을 낼 때 그의 보시는 천 번의 제사를 올리는 것보다 더한 가치를 지닌다”고 붓다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깊은 신심으로 베풀 때 보시는 복된 미래를 맞게 됩니다. 또한 무엇이든지 유용한 것이면 다 보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음식물을 베푸는 것은 실상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과 아름다움과 행복과 활력과 지성을 주는 것입니다. 목이 바짝 마른 여행자에게 시원한 물을 한 잔 줄 때, 그것은 단순한 물 한컵이 아니라 생명수를 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남에게 그와 같은 것을 베푸는 것은 실은 자기에게 베푸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어서 붓다께서는 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시하는 사람이 덕스러울 때 보시물은 베푸는 사람에 의하여 청정해진다. 받는 사람이 덕이 있으면 받는 이에 의해서, 양쪽이 모두 덕스러울 때는 주는 이와 받는 이 모두에 의해 청정한 시물이 되며 만일 양쪽 모두 순수하지 못하다면 부정한 보시가 된다.”(Dakkhina vibhanga sutta:중아함 180)
베풀기 전이나 베푸는 동안이나 그 후까지 욕심의 흔적이 조금도 없이 베풀 때 그 고결한 마음에 의해 행해진 보시물이야말로 실로 위대한 것이 됩니다.
보시 중의 보시가 있습니다. 보디삿타가 하는 보시 바라밀이 있습니다. 보시행 가운데는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지, 베푼 결과가 어떤 세속적 이득을 가져올 것인지를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그런 보시가 보시 바라밀입니다. 그러한 보시는 자기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없애겠다는 생각, 즉 탐욕에서 벗어나겠다는 깊은 뜻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이나 가장 주기 어려운 것을 베풀고자 애씁니다. 이처럼 보살들은 언제라도 기회만 오면 오로지 최상의 완전한 보시 바라밀을 실현하기 위해 베풉니다. 우리들의 보시의 최선의 목표는 이러한 보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보시는 사회 구성원들을 융합시키고 단결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보시는 가진 자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 사이에 놓인 물질적, 경제적 격차를 메꾸어 준다는 의미를 넘어서 소외감이라는 심리적 단절을 이어주는 최고로 착한 삶의 양식입니다. 보시가 자리 잡을 때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은 어느 새 사라져 버립니다.
마음이 너그러운 이는 남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친한 사람이 많습니다. 앙구따라 니까야에서 붓다께서는 보시를 베푼 결과 누리게 되는 세간적인 복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색하지 않고 후덕한 사람은 남들의 호감을 얻는다. 아라한들이 그에게 다가와 그의 공양을 받고 그에게 제일 먼저 법을 가르쳐 준다. 그에 대한 좋은 평판이 퍼진다. 그는 어떠한 모임에도 자신감과 위엄을 가지고 참석할 수 있다. 사후에 좋은 곳에 태어난다.”는 점을 꼽고 있습니다.
지난해에 우리 회원들께 미얀마 재해 성금에 동참하도록 권선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미얀마의 농촌 학교 어린이들에게 도움을 주자고 실천자비회를 설립한 적이 있습니다. 적지 않은 회원들께서 동참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경이로운 것은 구호 성금 내지는 자비 실천의 권선에 동참하는 분들을 보면 반드시 넉넉한 사람들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행의 모든 면에서의 문제는 ‘지속적으로 행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착한 행위를 권할 때 그 자리에서는 동요하여 응하였는데 그것이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보시는 수행 중의 수행입니다. 보시는 나의 내적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토대가 되는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보시로 시작하여 통찰 수행으로 나아가서 통찰수행과 보시하는 마음을 화합하여 지닐 때. 우리의 수행은 더욱 진전이 있을 것이며, 우리의 삶은 더욱 조용하고 유연하고 평상심의 환희가 깃든 그런 의미 깊은 삶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