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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량 朴寅亮 (한국, ? ~ 1096) 박인량[朴寅亮, ?∼1096(숙종 1)]은 고려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대천(代天). 호는 소화(小華). 고려 개국공신 수경(守卿)의 현손(玄孫, 高孫子)이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해 문한(文翰)의 여러 벼슬을 거쳤다. 1075년 요(遼)나라와 고려가 국경 문제로 다툴 때 요나라는 고려가 차지하고 있던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강점하고는 압록강을 국경으로 하자는 제의를 했다. 이에 박인량이 진정표(陳情表)를 지어 요의 황제에게 보내자, 요 황제가 그의 문장에 감탄해 그 후 고려와의 국경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고 하니 가히 박인량의 글재주를 알 만하다 하겠다. 우부승선(右副承宣)을 거쳐 1080년(문종 34)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있을 때 송나라 황제가 풍비(風痺)에 쓸 약재를 보내준 데 대해 사례하기 위해 호부상서(戶部上書) 유홍(柳洪)과 함께 송나라에 방물(方物)을 바치는 사은사로 갔는데, 저장(浙江)에 이르러 태풍을 만나 대부분의 방물(方物)을 잃은 죄로 귀국하여 죄를 받을 뻔하기도 했다. 문장이 아담하고 화려하다는 평가를 받아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주로 담당했다. 송나라 신종(神宗) 때는 김근(金覲)과 함께 사신으로 갔는데, 그가 저술한 척독(尺牘)·표(表)·장(狀)·시(詩)를 송나라 사람들이 매우 칭찬했다고 한다. 이에 두 사람의 시와 문을 엮어 ≪소화집(小華集)≫이라는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 1089년(선종 6)에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오르고, 이어 우복야(右僕射)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저서로는 책을 지은 뒤 비의(秘意)가 담겨 있어, 은밀한 곳에 간직했다는 ≪고금록(古今錄)≫ 10권과 ≪해동고승전 (海東高僧傳)≫에서 작자를 박인량이라고 밝힌 ≪수이전(殊異傳)≫이 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수이전≫의 작자를 최치원 또는 김척명(金陟明)으로 보기도 하나 최치원을 원편저자(原編著者)로, 박인량을 증보자(增補者)로, 김척명을 개찬자(改撰者)로 보는 견해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동문선(東文選)≫에 <사송과사주구산사(使宋過泗州龜山寺)>·<오자서묘(伍子胥廟)>란 제목의 시 2편 외에, <문왕애책(文王哀冊)>·<순덕왕후애책(順德王后哀冊)>이란 제목의 책(冊) 2편, <상대료황제고주표(上大遼皇帝告奏表)>란 제목의 표전(表箋) 1편 및 <입료걸파각장장(入遼乞罷榷長狀)>이란 제목의 장(狀) 1편이 실려 있다. 세 아들 경인(景仁)·경백(景伯)·경산(景山)이 모두 과거에 급제해 높은 관직에 오름으로써 고려 전기 명가(名家)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다.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 해설 ≪수이전≫은 현전하지 않습니다. 다만 ≪해동고승전≫, ≪삼국유사≫, ≪태평통재≫, ≪필원잡기≫, ≪삼국사절요≫, ≪대동운부군옥≫, ≪해동잡록≫ 등에 ≪수이전≫에서 옮겨 싣는다고 언급한 19편의 작품이 전합니다. 이 책은 산재해 있는 작품[일문(逸文)]을 모은 것입니다. 이 작품은 원전의 분량이 많지 않으므로 발췌하지 않고 모두 번역했습니다. ≪수이전≫은 ‘기이한 것을 전달한다’는 뜻처럼 문학을 인식하고 쓰인 한국 최초의 고대서사자료집이라는 점에서 국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 문헌이다. 그러나 그것이 원형대로 전문이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일문(逸文) 형식으로 전해진다는 데 아쉬움이 있다. ≪수이전≫에 대한 기존 연구는 몇몇 작품 위주로 연구되어 왔고, 또한 실제 이상으로 평가절상 되어온 점이 있다. 이에 필자는 현전하는 일문 전체를 대상으로 기술방법의 측면에서 각 작품의 갈래를 언급해 보고자 한다. ≪수이전≫에 대하여 서사작품집·문헌설화집·지괴 전기집·개별전·유별전 등의 해석이 있어 왔는데, 구체적 내용분석에 따르면 문체적 개념이 아니라 단순히 기이한 이야기를 후대에 전한 서사작품집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생각된다. ≪수이전≫ 일문은 모두 21편인데, 중복되는 것을 제외하면 앞에서 제시한 ‘수이전 수록문헌’에서 보다시피 <아도>∼<호원>에 이르는 12편이다. 이들을 기술방법의 측면에서 분석을 해보면, <선덕여왕>·<수삽석남>·<보개>·<지귀>는 일화로, <탈해>는 신화로, <영오세오>는 일월전설로, <호원>·<죽통미녀>·<노옹화구>는 민담으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최치원>은 창작설화로, <아도>·<원광>은 고승전으로 볼 수 있다. ≪수이전≫에 대하여 일부 논자들은 매우 기이한 내용을 다룬 전, 일정한 유형을 가진 ‘유별전(類別傳)’ 등으로 해석하려고 했다. 그러나 ≪수이전≫에는 전 작품 이외에 일화·설화·창작설화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때 ≪수이전≫에서 ‘전’이란 음절의 의미는 전 양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기이한 내용을 단순히 전달한다는 의미를 나타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이전≫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다양하게 내려질 수 있지만, 당시 전하던 기이한 이야기들을 전한다는 문학의식을 가지고 채록하여, 한국 고대서사문학의 원형을 정리한 순수 서사자료집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일부 작품을 소설의 효시로 볼 수 있다거나, 고도의 문학성을 지닌 것처럼 과대평가하는 태도도 경계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옮긴이 이동근(李東根)은 충북 제천에서 출생했다. 아호는 갈현(葛峴)이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문학박사)했다. 수필가이며 육군제3사관학교 국어과 부교수에 이어 현재 대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논문으로는 <임란 전쟁문학 연구>, <조선후기 실존인물의 사전 연구>, <수이전의 장르적 성격>, <삼국유사의 한문문체적 연구> 등이 있다. 대표 저서로는 ≪조선후기 전문학 연구≫, ≪경산의 임란 의병항쟁≫(공저), ≪인간의 마을로 가는 길≫(산문집), ≪에세이 인생독본≫(산문집), ≪문학기행의 이론과 현장≫, ≪삼국유사의 종합적 연구≫(공저), ≪한국문학의 풍자와 해학≫(공저), ≪삼국시대 한문학연구≫ 등이 있다. 본문 중에서 此花妖艶富貴 雖號花王 畫無蜂蝶 必不香 帝遺此 乞朕以女人爲王耶 亦有微意 “이 꽃은 요염하고 귀티가 있어 비록 꽃의 왕이라고 불리우나,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 당 황제가 이것을 보낸 것은 짐이 여자로서 왕이 된 것을 빗댄 것이 아니겠는가? 풍자의 뜻이 있도다.” * 동정호(洞庭湖) = 중국 호남성있는데 중국 최대의 호수로 남북 100키로, 동서 30∼100키로나 된다. 여기에는 두보의 악양루시의 소재가 되어 유명해진 岳陽樓가 있다 ,지귀설화(志鬼說話) ◇志鬼, 太平通載 券七十三 志鬼條 亦引新羅殊異傳曰 志鬼新羅活里馹人. *馹일:驛馬.*馹일:驛馬. 지귀는 신라 활리역 사람이다. 慕善德王之端嚴美麗 憂愁涕泣 形容憔悴. 선덕여왕의 단아하고 미려함을 사모하여 시름에 차서 눈물을 흘려 얼굴이 초췌했다. 王聞之 召見曰 왕이 듣고서 불렀다. “朕明日行靈廟寺行香 汝於其寺待朕.” “짐이 내일 영묘사에 가서 분향하려 한다. 너는 그 절에서 짐을 기다려라.” 志鬼翌日歸靈廟寺塔下 待駕行. 忽然睡酣 지귀는 이튿날 영묘사 탑 아래 가서 왕의 행차를 기다리다가 홀연 깊은 잠에 빠졌다. 王到寺 行香. 見志鬼方睡著. 왕은 절에 이르러 분향하고는 지귀가 방금 잠든 것을 보았다. 王脫臂環 置諸胸 卽還宮. 왕은 팔찌를 빼어 지귀의 가슴에 두고 곧 환궁했다. 然後乃□(睡覺?) 御環在胸 그러한 후에 지귀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왕의 팔찌가 가슴에 있었다. 恨不得待御. 悶絶良久 그는 왕을 기다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오랜 동안 민망(憫惘)해 했다. 心火出燒其□(身). 마음 속에서 불이 나와 그의 몸을 불살랐다. 지귀는 志鬼則變爲火鬼. 곧 불귀신으로 변했다. 於是王命術士 作呪詞曰 志鬼心中火 지귀의 마음 속 불길이 燒身變火神 자신의 몸울 불사르고 불귀신이 변했네. 流移滄海外 창해 밖으로 흘러가 不見不相親 만나지도 친하지도 말지어다. 時俗 帖此詞於門壁 以鎭火災. 당시 풍속에 이 주문을 출임문이 있는 바람벽에 붙여 화재를 막았다. ◇志鬼說話[龍樹의 大智度論] 龍樹의 大智度論(B.C.150-250년경) 권14 初品 24,고려대장경 제14(後秦 鳩滅什譯) 如說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國王有女 名曰 拘牟頭. 국왕에게 딸이 있었는데 이름은 구모두였다. 有捕魚師 名曰術派伽 隨道而行 遙見王女在高樓上. 고기잡이 이름은 술파가였는데 그가 길을 따라 가다가 멀리서 공주가 높은 누각 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 窓中見而想像染着 心不暫捨 창으로 보고서 공주 생각이 머리에 달라붙어 마음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彌歷日月 不能飮食. 세월이 지나 그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母問其故 以情答母 어미가 그 까닭을 물으니 실정을 어미에게 말했다. “我見王女 心不能忘.” “내가 공주를 보고나서 마음에서 잊을 수 없습니다.” 母喩兒言“汝是小人 王女尊貴 不可得也.” 어미가 아들을 타일렀다. “너는 소인이고 공주는 존귀하시니 이룰 수 없다.” 兒言“我心願樂 不能暫忘 若不如意 不能活也.” 아이가 말했다. “내 마음이 즐거움을 원하여 잠시도 잊을 수 없으니 만약 뜻과 같지 아니하면 살 수 없습니다. 母爲子故 入王宮中 常送肥魚鳥肉以遣王女 而不値價 어미는 아들의 연고를 위하여 궁중에 들어가 언제나 살진 물고기 새 고기를 보내어 공주에게 주되 값을 따지지 않았다. 王女怪而問之 “欲求何願? ” 공주가 괴이히 여겨 물었다. “무슨 소원을 구하느냐?” 母白王女 顧却左右 當以情告 어미가 공중에게 아뢰어 좌우를 물리치고 응당 실정을 아뢰었다. “我有一子 敬慕王女 情結成病 命不云遠 願垂愍念 賜其生命” “내게 아들 하나가 있는데 공주님을 공경하고 사모하여 연정(戀情)이 맺혀 병이 되었으니 목숨이 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딱하게 여기는 마음을 드리워 그에게 생명을 주소서.” 王女言“汝去. 至月十五日 於某甲天祠中 住天像後.” 공주가 말했다. “너는 돌아가라. 이 달 보름에 이르러 모 천갑사에서 사천왕상 뒤에서 기다려라.” 母還語子 “汝願已得.” 어미가 돌아와 아들에게 말했다. “너의 소원은 이미 이루었다.” 告之如上. “沐浴新衣 在天像後住.” 알리기를 위와 같이 했다.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사천왕상 뒤에 머물러라.” 王女至時 白其父王“我有不吉 須至天祠 以求吉福.” 공주는 그때에 이르러 부왕에게 아뢰었다. “저에게 불길함이 있어 모름지기 천사에 이르러 길한 복을 구하고자 합니다.” 王言“大善.” 왕이 말했다. “아주 착하다.” 卽嚴車五白乘 出至天祠 旣到. 勅諸從者 齊門而至 獨入天祠. 곧 수레 오백 대를 엄숙히 하여 길을 나서 천사에 이르렀다. 이미 이르러 여러 시종(侍從)을 명하여 일주문에 가지런히 하여 이르게 하고 공주는 홀로 천사에 들어갔다. 天神思惟 此不應爾. 王爲施主 不可令此小人毁辱王女 卽壓此人 令睡不覺. 천신(天神)이 생각하기를, 이것은 호응할 수 없을 따름이다. 왕이 시주이니 이 소인으로 하여금 공주를 헐어 욕되게 할 수 없다. 곧 이 소인을 눌러 잠들어 깨닫지 못하게 했다. 王女旣入 見其睡重 推之不寤 卽以瓔珞直十萬兩金 遺之而去. 공주가 이미 들어가 그가 깊은 잠에 빠진 것을 보고 흔들어도 개어나지 않았다. 곧 값이 십만 량금인 목걸이를 주고서 더났다. 後此人得覺 見有瓔珞 又問衆人 知王女來 후에 이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 목걸이가 있는 것을 보고 또 여러 사람들에게 묻고서 공주가 왔던 것을 알았다. 情願不遂 憂恨懊惱 婬火內發 自燒而死. 사랑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여 시름하고 고뇌하다가 사랑의 불꽃이 안에서 일어나 자신을 불살라 죽었다. 以是證知 女人之心 不擇貴賤 唯欲是從. 이로써 여인의 마음이 귀천을 가림이 없이 중생의 욕구에 따랐음을 증거 삼아 알겠다. <卷 14> ⃟釋道世의 法苑珠林 (권21 士女篇12 姦僞部2, 670년)에 이 설화가 원문 그대로 인용됨. '고전문학남녀의 사랑 [민화] 야담(설화)의 발생은 상고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으나 오랫동안 구두로 전해왔기 때문에 그 발생 연대를 알 수 없다. 문헌상으로는 최고의 문헌 중 하나로 알려진 ≪구삼국사 舊三國史≫가 망실되어 없기때문에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고하며,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후대 문헌들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정사(正史) 외에도 서민들사이에 떠돌아다니던 이야기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은 한다. 이어 8세기 초 신라의 김대문(金大問)에 의해 화랑이나 승려, 또는 민간에 구전되는 일사기문(逸事奇聞)들을 모은 것으로 생각되는 ≪화랑세기 花郎世紀≫· ≪고승전 高僧傳≫·≪계림잡전 鷄林雜傳≫ 등이 저술되었다고 하나 이 역시 불행히도 준실되었다고 한다. 현전하는 야담집류 중 최초의 것은 ≪수이전 殊異傳≫으로 추정되는네 이 책의 편자 및 편찬연대에 관하여는 여러 이설이 있어 단정짓기 어렵지만, 승려인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 海東高僧傳≫의 기록인 ‘약안박인량수이전(若按朴寅亮殊異傳)’ 을 따른다면, 이 책은 박인량의 생몰연대(1047?∼1096)로 미루어 대략 11세기 후반의 문헌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책 역시 망실되어 그 내용을 거의 알 길이 없고, 다만 여러 책에 흩어져 전하는 일문(佚文)들을 참고하여 볼 때 민간 야담을 바탕으로 상당히 문학성 있는 작품들이 수록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우리가 확실히 참고할 수 있는 옛 문헌으로는 ≪삼국사기≫· ≪해동고승전≫·≪삼국유사≫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삼국유사≫와 같은 문헌은 ‘유사(遺事)’라는 명칭이 시사하는 의미나, 책머리의 저자 자술(自述), 즉 기이편(紀異篇)에서도 분명히 나타나는 바와 같이 야담적 사실들을 의도적으로 채록해 놓고 있어 야담집으로 간주할 만하다. 13세기나 14세기에도 아직 야담집다운 문헌은 찾아볼 수 없었으나, 현전하는 약간의 문집이나 이른바 패관문학서(稗官文學書)들에서 다소나마 야담적 자료들이 산견(散見)된다. 가령 최자(崔滋)의 ≪보한집≫과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이 그러한 예이다. 또한 이 무렵에는 민간설화를 바탕으로 하여 씌어진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 東明王篇〉도 나왔다.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설화집의 편찬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서거정(徐居正)의 ≪태평한화골계전 太平閑話滑稽傳≫,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弁齋叢話≫, 강희맹(姜希孟)의 ≪촌담해이 村談解蓬≫를 비롯하여, 서거정의 ≪필원잡기 筆苑雜記≫, 남효온(南孝溫)의 ≪추강냉화 秋江冷話≫, 이육(李陸)의 ≪청파극담 靑坡劇談≫, 조신(曺伸)의 ≪소문쇄록 瑄聞磨錄≫과 같은 문헌들이 나타났다. 16세기에는 송세림(宋世琳)의 ≪어면순 禦眠楯≫, 그 밖에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 稗官雜記≫, 정미수(鄭眉壽)의 ≪한중계치 閑中啓齒≫, 김안로(金安老)의 ≪용천담적기 龍泉談寂記≫가 있었고, 17세기 전반에는 유몽인의 ≪어우야담≫이 나왔다. 이 책은 ‘야담’이라는 명칭을 표제에 붙인 최초의 책이었다. 이 무렵에 이루어진 성여학(成汝學)의 ≪속어면순 續禦眠楯≫,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 五山說林≫, 이수광(李邈光)의 ≪지봉유설 芝峯類說≫, 김시양(金時讓)의 ≪하담파적록 荷潭破寂錄≫ 등에도 다수의 야담적 자료가 들어 있다. 17세기 후반에는 홍만종(洪萬宗)의 ≪명엽지해 蓂葉志諧≫가 나왔고, 그의 ≪순오지 旬五志≫·≪해동이적 海東異積≫ 등도 야담 연구에 유용하다. 18세기 전반에는 신돈복(辛敦復)의 ≪학산한언 鶴山閑言≫, 이희겸(李喜謙)의 ≪청야만집 靑野亶輯≫, 정재륜(鄭載崙)의 ≪공사견문록 公私見聞錄≫ 등이 등장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친 시기는 전 시대에 꽃을 피우기 시작했던 산문정신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시기였다. 문학사상 두드러진 산문화의 경향은 판소리·소설·잡가·장편가사·사설시조와 같은 문학 장르를 완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야담의 집대성도 이루었다. 이 시기에 편찬된 대표적인 야담집으로는 ≪동패낙송 東稗洛誦≫· ≪선언편 選諺篇≫·≪해동야서 海東野書≫·≪기문총화 記聞叢話≫·≪계서야담≫· ≪청구야담 靑丘野談≫·≪동야휘집 東野彙輯≫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마지막 세 문헌은 각각 312편, 293편, 260편의 자료를 담고 있어 우리 나라 ‘3대 야담집’이라 부를 만하다. 이들 중 편찬자가 알려져 있는 것은 ≪계서야담≫과 ≪동야휘집≫뿐이다. 20세기 들어 본격적인 근대문학이 시작된 이후에도 야담은 여전히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러 출판사들이 꾸준히 ‘야담’이니 ‘사화’니 하는 부류의 책들을 출판하였다. 1926년에 한양서원(漢陽書院)에서 간행된 강효석(姜斅錫)의 ≪대동기문≫도 그러한 책 중의 하나이다. 야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점차 문단에는 야담을 전문으로 집필하는 작가군까지 생겨났다. 이들의 작품은 종전의 야사·야담집의 자료들을 윤색하거나 재창작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창작소설 못지않은 대우를 받으며 신문·잡지의 지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령 1934년 10월에 창간되어 통권 55호를 기록한 ≪월간야담 月刊野談≫이나, 1935년 12월에 창간되어 통권 110호를 기록한 ≪야담 野談≫과 같은 월간지들의 장수(長壽)는 당시 대중들의 야담취향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 할 것이다. 광복 후 지금까지도 야담관계 서적은 끊임없이 간행되고 있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야담≫·≪야담과 실화≫ 등 수종의 월간잡지가 나온 바 있으며, 상당한 권책(卷冊)으로 이루어진 야담 전집류도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1960년대 초에는 ≪한국야담사화전집≫(1960, 동국문화사), ≪한국야담전집≫(1961, 신태양사), ≪정통한국야사전집≫(1961, 청운사) 같은 것들이 거의 동시에 경쟁적으로 출간되었던 것이다. |
첫댓글 중영님 수고 많으십니다~^^ 시간내어 천천히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