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고향길에
2019.11.1. 아침 물안개가 자욱한 버스 종점은 부산한 움직임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곳까지 호텔 ‘발코니’ 사장 큐피가 픽업해 주었는데, 2주 가까이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마주친 젊은 사장이 고맙다. 물론, 다시 오면 찾아 달라고 그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네팔 1,000루피(10,000원)에 그렇게 편안하고 깨끗했던 숙소는 귀국 때까지 다시 경험할 수 없었다. 포카라에서 외곽 사방으로 흩어지는 버스와 승합차들이 시동을 켜기 시작했다. 어떤 차 지붕 위에는 이미 짐들이 올려지고 주전자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짜이’를 외치고 있었다. 이곳을 떠난다니 감회가 새롭다. 오스트레일리아 캠프에서 바라보는 히말라야 산군.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로 향하는 길에 만났던 아래가 까마득한 구름다리는 이제 사진으로 들어갔다.
바라히 힌두 사원의 시바 신 그리고 페와호수 위를 날던 패러 글라이딩 군무. 피스 사원 아래 카페에서 먹었던 루프톱 토스트와 홍차는 잊을 수 없다. 사원을 내려오는 길에 만났던 세 악동 뮤지션. 레쌈삐리리 한 소절을 빠르게 기타를 치며 노래하다 'Money'를 외친 나쁜 꼬마 녀석들! 20년째 나룻배를 몬다는 35살 여자 뱃사공. 그녀는 지금 내가 가고 있는 룸비니까지 자신이 안내하면 어떠냐고 물었었다. 그리고 350루피에 김치찌개를 먹던 소비따나 식당. 축제로 시끌벅적한 거리의 밤 풍경, 노랗고 붉게 색칠한 차들과 거리. 은은한 물빛에 흔들리던 호숫가 카페들. 이제 모두 기억의 한자리가 되었다.
에고, 나는 다시 12시간을 흔들리며 가야 하기에 서둘러 눈을 감았다.
몇 시간을 달렸을까. 옆좌석에는 다른 네팔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영어로 물었다. 한국인이냐고. 수긍하자 그는 바로 익숙한 한국말로 말했다. 안산, 수원 공장에서 일했다고 했다. 나와 그는 금방 친해지고 수다를 떨었다. 강을 건너고 길가에 교통사고로 쓰러진 오토바이 사고자를 지나치고 그렇게 버스는 비포장도로를 이리저리 피하고 덜컹거리며 달려갔다. 해가 넘어갈 즈음에 룸비니로 들어가는 입구인 소나울리에서 그는 내렸다. 2년 전에 돌아와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한다는 그가 행운을 빌어주며 내렸다. 아쉬운 마음이 다시 왈칵 솟았다. 그 청년과 함께 실컷 맥주를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룸비니 대성석가사로 가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의 도움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해가 완전히 넘어간 저녁에 버스는 종점에 닿았다. 거리는 조용하고 짙은 안개에 가려서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나는 길가에 서 있는 툭툭이를 무작정 탔다. 그는 단번에 1,000루피를 불렀다. 500루피. 나의 흥정도 많이 늘었다. 무표정하게 단호하며 여의치 않으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되는 그런 방식은 인도나 이곳이나 통했다. 그런데 거리에 사람은 거의 없고 개들만 도로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 오토바이를 개조한 차는 내가 왔던 비포장도로를 역으로 달리다가 숲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주위는 더욱 캄캄하고 내가 탄 툭툭이만 툭툭거리며 밤 속으로 달려갔다. 꺾고 가로지르고 담 있는 건물들을 지나 반 시간 정도를 달려 어느 긴 대문 앞에 섰다. 이곳이란다. 나는 선뜩 내리기가 주저되었다. 이곳이 아니라면 낭패스럽게 밤을 헤매야 했다. 그때 대문에 나 있는 쪽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나왔다.
”한국인 이세요?”
그 말이 얼마나 반가운지 긴장이 확 풀렸다. 그 인도인은 나를 자신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잠시 자리를 비운 그가 다시 나타나자 나는 성명 등을 적었다. 그의 어눌한 한국말이 얼마나 고마운지 나는 예만 반복해도 좋았다. 저녁 식사는 끝났는데 네팔 라면은 어떻냐고 물어 뛸 듯이 기뻤다. 안내된 2층 13호 숙소는 나무문에 작은 창이 복도와 접해 있었다. 방안에는 책상과 의자 하나씩 있고 벽에 모기장이 쳐진 나무 침대가 구석에 놓여 있었다. 수용소가 이러했겠다 싶었다. 씻고 바르고 치장하는 나의 습관보다 더 오랜 세월에 찌들었을 이상한 체취는 묘한 흥분과 충격을 가져왔다. 희미하지만 그래도 빛이 있는 곳에서 밤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작은 안도감이 생겼다. 그날 네팔 라면을 국물까지 다 마셨다. 모기장 안에는 가지고 간 슬리핑 백을 펼쳤다.
뿌연 안개에 깔린 아침이 되자 사위가 점점 눈에 들어왔다. 주위에는 온통 절과 사원 건물들로 가득했으며 한국 절 마당에는 커다란 건물이 마지막 단청 작업 중에 있었다. 열린 문을 나오자 넓은 도로는 자욱한 안개로 방향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바로 앞에는 중국 절이 한국 절과 비슷한 규모로 서 있었다. 나는 가진 지도를 읽어가며 걷기 시작했다. 몇 블록을 지나자 반듯한 수로가 나타났고 배 한 척이 물살을 가르며 북쪽으로 올라갔다. 바로 Maya Devi Temple까지 이어지는 수로다. 걸어가는 나무 위에서 한 떼의 원숭이들이 무리를 지어 땅으로 내려왔다.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워 먹으며 녀석들은 내가 전혀 안중에 없다는 듯이 앞뒤로 어슬렁거렸다.
화강암 다리를 건너자 많은 학생이 줄지어 앞으로 가고 있었다. 입구에서 표를 사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안개가 수로 사이를 스치며 수풀을 에워 쌓는 조용한 아침이었다. 그때 하얀 건물이 안개 속에서 나타났다. 사각형의 작은 건물이 동그마니 눈에 들어왔다. 저곳이 마야 부인이 태기를 느꼈다던 호수인가. 보리수나무 아래에 각국에서 온 승려들이 예불하고 있었다. 줄지어 나도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으로부터 2,642년(BC623년)에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오랜 벽돌로 만들어진 지하에 작은 방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좁은 통로를 장방형으로 도는 사람들이 숙연했다. 일본 국기를 옆에 놓고 명상에 젖은 여성도 보였다. 인류 역사에 남을 한 위대한 인물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한 달 전에 보았던 인도 바라나시 녹야원의 원형 탑과 폐사지는 웅장했다. 그런데 여기는 그저 작은 방 몇 개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곳까지 오게 됨에 감사했다. 우리나라 산과 들 그리고 책과 강연에서 수없이 마주치고 들은 저 불교의 시작이 바로 이 작은 공간이라는 목격은 묵직한 감동을 일으켰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위대한 당신이 29세에 성 밖으로 나온 뒤 지금까지도 세상에는 가난과 질병과 시기와 싸움이 끊임이 없으니 그건 무엇 때문입니까.
신라 시대 승려 혜초(704-787) 승려가 계셨다. 그분은 16세에 중국 광저우를 거쳐 인도네시아 해상(실크로드)을 돌아 인도 콜카타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 후 스님은 바라나시와 인도 중북부를 주유하며 페르시아와 간다라, 즉 파키스탄 지역과 톈산산맥을 넘어 인도 북부의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 둔황 석굴에 도착하여 거기서 몇 년을 머물렀다. 그곳에서 당시 인도의 생활상과 문물 등을 기록한 저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고 전한다(프랑스 박물관). 스님은 결국 고향 땅을 다시는 못 밟고 780년 4월 중국 오대산 건원보리사에서 입적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분이 이곳 룸비니를 거쳐 갔을 텐데 그 흔적이 남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스님이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고향 땅을 그리워하는 시라도 한 수 걸어놨으면 읽는 나그네 여독도 한결 덜 수 있으련만. 오늘 석가사 지붕 위에는 초승달이 뿌옇다.
달밤에 고향길이 그립구나
내 나라는 북쪽 하늘 끝에 있고
나는 남의 나라 땅 서쪽 끝에 있는데
따뜻한 남쪽에서 기러기는 안 올라오니
누가 고향의 숲 계림으로 날아갈거나
(혜초)
나는 새벽에 일어나 난생처음으로 108배를 했다. 스님 한 분, 보살 한 분, 네팔 스님 한 분 그리고 나. 대성석가사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언제나 반대되는 일이 생기는 법인가. 이른 아침에 카트만두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예약한 툭툭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가서 보고 또 봐도 경운기 엔진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적막한 안개가 시야를 두껍게 가리고 있었다. 혹시, 어제 자신의 차로 관광을 안 해서 보복인지. 그때마다 인도인 처사는 내게 다가와 걱정하지 말라고 타이른다. 남이 속 타는 줄 모르고 태평했다. 툭툭이는 끝내 오지 않았고 20여 분 남기고 어디선가 그 처사는 오토바이를 끌고 나타났다. 나는 커다란 배낭을 등에 지고 오토바이 뒤에 얼른 올라탔다. 그러자 바로 인도인 처사는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을 익숙하게 달렸다. 나는 뒤에서 출렁거리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그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는 지름길을 찾아 버스 정거장에 나를 용케 안착시켜 주었다. 감사 보답으로 500루피에 그는 보살님에게는 절대 비밀이라고 했다(의무는 아니고, 보살이 받으라 했다며 나는 이틀 밤을 머문 값으로 2,000루피를 오늘 새벽에 냈고),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헐레벌떡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웬걸 좌석이 없으니 운전석 옆 엔진 뚜껑 위에 앉으라고 한다. 정식 좌석 칸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운전사와 조수, 그리고 나와 같은 승객 둘이 엔진 좌석에 끼어 앉았다. 어제 예약한 버스표는 오버 북킹이었어!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가는 길에 네 명이 더 그 비좁은 앞 공간으로 밀려 들어왔다. 불편해도 좋았던 시야는 금방 사라지고 더군다나 숨 막히고 좁아터진 그곳에서 눈도 제대로 못 돌린 채 12시간을 참아야 했다. 그렇게 카트만두 그 산길을 굽이져 지나고 넘고 오를 때까지 12시간을 물 몇 모금과 초콜릿 두 개로 견뎌내야 했다. 정말로 그 길은 고행의 길이었다. 밤에 들어간 타멜 숙소에서 그만 쓰러져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첫댓글 미둔! 인도로 가는 길은 인내심과의 싸움이죠!
네필에선 톡톡이가 인도에서는 오토릭샤이던가?
인도 찬디가르에서 탄 사이클릭샤와 오토릭샤가
생각나네! 네팔이나 인도여행은 비록 그 과정이 힘들지만
신비롭고 성스러운 여행이 아닐까?
네. 우리들의 가난했던 시절이 언뜻 떠올랐던 인도와 네팔 여행이 벌써 3년이 되고 있습니다. 힘들고 불편하여 괜한 여행을 하고 있지는 않나라고 한때는 생각했지요. 돌아보면 아련히 떠오르는, 다시 가고픈 곳입니다. 여름의 폭염이 거세군요. 건강에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명구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