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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협교류대회 강연 원고 2011.11.4 인천 파라다이스호텔 본문 200자 44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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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문학의 실체, 인천문학의 현실
이원규/소설가 전 동국대 문예창작과 교수
인천문학의 실체
19세기 후반에 인천은 전국의 다른 대도시들과 선명한 차별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수도 서울의 관문으로서 안아야 하는 숙명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883년의 강제개항 이후 한국 근대사의 격랑을 한 몸에 받아 안고 영욕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수동과 피동의 역사 현장이라는 어두운 일면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구문물 유입의 관문으로서 온갖 새롭고 진기한 문물을 처음 접하는 전시장 구실을 톡톡히 하는 이점도 갖게 되었습니다. ‘국내 최초’란 수식어가 많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다보니 텃세가 없어지고 모든 이들을 받아들이는 포용의 시민정신도 생겨났습니다.
지금은 서울의 종속성과 주변성 때문에 문화 예술이 위축되어 있지만 찬란한 융성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구한말 최후의 어진(御眞) 화가 김은호, 불세출의 서예가인 검여(劍如) 류희강, 미술사의 개척자인 고유섭, 그리고 월북하여 북한 최고의 화가가 된 조규봉 등이 배출되었으며, 서울 정동에 문을 연 협률사(協律社)보다 7년 앞서 문을 연 동명의 극단 협률사(協律舍)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대표적인 것을 열거해 놓고 보면 문학이 약소했던 것 같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삶의 다양성이 선명한 도시였으므로 문학의 제재가 풍부했습니다. 영욕이 교차한 근대사가 있고, 부두의 서정이 있고, 도시민들의 애환 어린 삶이 있고, 노동자들의 신산에 찬 삶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인천인들의 집단경험인데 한국 현대문학에 고스란히 녹아 들어갔습니다.
조선의 서편 항구 제물포 부두/세관의 기는 바닷바람에 퍼덕거린다/잿빛 하늘 푸른 물 결 조수 내음새/오오, 잊을 수 없는 이 항구의 정경이여//상해로 가는 배가 떠난다/저음 의 기적 그 여운을 길게 남기고/유랑과 낭만과 망명의/많은 목숨을 싣고 떠나는 배다/어 제는 홍콩 오늘은 제물포 또 내일은 요코하마로/세계를 유랑하는 코스모폴리탄/모자 삐딱 하게 쓰고 이 부두에 발을 내릴제(박팔양, <인천항>, 1932 『습작시대』)
위의 시가 실린 『습작시대』는 1927년 인천에서 결성된 동인지입니다. 인천 문인들 외에 주요한 ‧ 김동환 ‧ 박팔양 등이 서울에서 내려와 함께 활동했습니다.
그밖에 이상 ‧ 정지용 ‧ 김기림 ‧ 박인환 ‧ 이태준 ‧ 현덕 등이 인천에 머물며 모더니즘 시와 사실주의 소설을 썼습니다.
호두형으로 조그만 항구 한쪽 끝을 향해 머리를 틀고 앉은 언덕, 그 서남면 일 대는 물 미가 밋밋한 비탈을 감아내리며, 거적문 토담집이 악착스럽게 닥지닥지 붙었다. 거의 방 하나에 부엌이 한 간, 마당이랄 것이 곧 길이 되고 대문이자 방문이다. 개미집 같은 길이 이리 굽고 저리 굽은 군데군데 꺼먼 재더미가 쌓이고, 무시로 매캐한 가루를 날린다. 깨 어진 사기요강이 굴러 있는 토담 양지짝에 누더기가 널려 한종일 퍼덕인다.(현덕, <남생 이>)
8‧15 광복 뒤에는 조병화 ‧ 한하운 등이 인천에 머물며 시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런 문학 전통은 후배들이 의해 면면히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나도 몸 속에 가시를 가지고 싶다. /스스로 제 살을 쿡쿡 쑤시며 산/가시 투성이 준치 처럼/온몸 가득 가시를 가지고 싶다./속으로 속으로 아파하며 살고 싶다./사랑하지 않고/ 눈물 흘리지 않고/생각날 때마다/속으로 뜨끔뜨끔 깨어 놀라며 살게/나도 살 속 깊이 무 수한 화살이 박히고 싶다./준치처럼 살고 싶다.(김윤식 <준치가시>)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거의/막막한, 개흙같이 막막한/바람속을 헤매던 저/봉두난발의 사 내들/땅을 파도 마음을 파도/어디서나 개흙이 쏟아진다/질척질척이는 생애처럼/이물과 고 물에서 휘도는 안개처럼(조우성 <인천>)
다음날 미명의 새벽빛이 수평선 저끝에서 번져 나오기 시작할 무렵, 어제의 일로 놀란 가슴을 달래고 간신히 잠들었거나, 가족이 죽고 다친 불행 때문에 새벽녘까지 눈을 못붙 이고 있던 덕적도 사람들은 귀를 곤두세우고 일어났다. 넓고 넓은 바다 전체가 웅웅거리 며 큰소리로 우는 듯한 소리 때문이었다. 집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새벽바다를 가득 덮고 지나가는 수백 척의 군함을 보고 얼이 빠져 입을 열지 못했다. 육중하게 큰 군함들은 불 을 끈 채로 떼를 지어서 바다 위를 가득히 메우고 인천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천지개벽 이래로 이 황해를 밟고 지나가는, 아니 이후 황해가 다 말라 없어질 때까지도 다시는 없을 것 같은 어머어마한 규모의 군단이었다. 군함들은 유일한 안전항로인 비어수 로의 입구를 향해 질서정연하게 전진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인천에서 대규모 상륙작전 이 벌어질 것이라는 짐작과 함께 어제 새벽 이 섬을 탈환한 것이 이 작전을 위한 예비조 치였음을 깨닫게 되었다.(이원규 <황해>)
퇴근시간이 지난 공단을 가로질러 온 버스는 텅텅 비어 있었다. 잔업이 끝나는 9시 반 까지 16번 버스는 늘 그랬다. 성만이 앉은 차창의 틈새로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듬성듬성 빈 좌석은 가뜩이나 난방이 부실한 버스 안을 더욱 스산하게 만들었다. 도화동 고갯길에 서 몇 안 되는 손님들마저 내려 버리자 버스에 남은 사람은 서넛뿐이었다. 천장에 매달린 손잡이는 버스가 흔들리는 대로 나란히 물결쳤다.
송림동에 이르렀을 때는 8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아무도 내리려는 사람이 없었다. 성만은 일어서 천장에 붙은 벨을 눌렀다. 울컥 요동을 치며 멈춰선 16번 버스는 성만을 시장 앞에 떨어뜨려 놓고 멀어져 갔다.(중략)
성만은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건너려던 횡단보도 너머 언덕 배기는 작은 불빛들로 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 성 어딘가에 불 꺼진 그의 방 한 칸도 있 을 것이다.(방현석 <내일을 여는 집>)
이들의 뒤는 시인 장석남, 소설가 구효서와 김애란 등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다에 가는 길이 아니었는데도/우리들 발걸음은 결국 바다에 닿는 것이 아닌가.//바다 에 가는 길이 아니었는데도/우리들 넋은 결국 바닷가에 머물며 물 빠진 해변을 밤새 걷지 않던가.//내가 밟고 다녔던 바닷길들/때로 저녁 밀물 위에 음악처럼 노을로 떠서 출렁이고 /그 노을 빛을 딛고 오라 하는 이가 있어서/수평선 너머의 바다는 가장 간절한 망설임의 표정으로/지금 내 속으로 오고 있는 것이 아닌고.//바다는 매번 너무 젊어서 지금 바다에 비가 온다.//그런데 저것은 비 以外의 또 무엇인고.//바다는 매번 너무나 젊어서 저것은 파도 以外의 또 무엇인가.//바다에서 거두어 오는 발걸음은 늘 발걸음 하나만은 아니어서/ 바다 또한 더 멀리 아주 가지 않고 돌아오기를/아직도 너무 젊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 가.(장석남 <바다는 매번 너무 젊어서>)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집, 그곳에 언제라도 갈 수 있다면 그걸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갈 때마다 그 집 그 방까지 들어가 볼 수 있다면 어떨까.
행운이기 전에, 마흔일곱 해, 아니 형님과 누님들도 그곳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적어도 육십 년은 족히 됐을 그 집이 퇴락했을망정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거기 남아 있다면 가 히 기적이랄 수 있는 것 아닐까. 도시와 농촌 할 것 없이 개발의 시류를 타고 집 한 채쯤 은 하루아침에 뚝딱 부수고 새로 짓는 시절에, 게다가 서울의 어느 돈 많은 사람에게 명 의가 넘어가 적적한 매입자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라면 어둑 기이한 일이 아닐까.(구효서 <시계가 걸렸던 자리>)
열차는 눈먼 물고기처럼 인천을 빠져나와 서울의 북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열차 안의 노선도를 올려다보며, 역사의 수를 꼽아보았다. 인천에서 의정부까지 50여 개의 역이 있 고 영등포에서 신길, 종로를 지나면 서울 북쪽 어딘가에 내 방이 있다. 자동문 위 노선표 의 불빛이 깜박거렸다. 자그마한 플라스틱 전구 위로, 종착역까지는 녹색불이. 이미 지나
간 역 위로는 빨간불이 켜지는 노선표였다. (중략) 열차 안으로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 들었다. 의정부 ‘북부행’ 말 때문이었는지 몰라도--어쩐지 나는 우리 모두가 아주 멀고 추운 나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김애란 <베타별이 자오선을 지날 때, 내게>)
1920년대 이후 인천문학은 대략 세 가지 특징을 갖습니다.
첫째는 식민지 지배와 한국전쟁의 중심무대로서 피압박 수탈과 분단 문제 등 역사적 사실을 내용으로 하는 것, 둘째는 워터프론트의 낭만과 이별의 비애를 담은 것, 셋째는 근대화 이후 부의 재분배와 노동자의 애환을 담은 것, 수도 서울의 주변으로서 주변적 삶을 담은 것 등입니다.
이것들은 부산, 대구, 광주, 울산, 대전 등 다른 광역시들과 선명한 차별성을 갖는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천인들의 기질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인천문단의 현실
이 모임이 6대 광역시와 제주도 문협 교류대회이고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이 문단 지도자들이시므로 이제부터 인천 문단의 현실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수년 동안 오늘과 같은 문협 교류대회는 정례적으로 열려 왔고 문화예술의 지나친 서울 집중으로 인한 폐해와 부작용을 극복하고자 고심하는 토론이 이어져 온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천은 서울 집중화의 폐해를 가장 심각하게 안고 있는 도시입니다. 서울에서 먼 지방에 있는 문인들은, 인천은 서울과 다름없는 수도권이므로 이른바 중앙문학, 중심예술에 포함되는 것처럼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천을 사랑하는 인천 문인 ‧ 예술인들은 인천적인 특성과 인천적인 전통, 인천정신을 잃지 않으려 고심하고 있습니다.
인천은 다른 5대 광역시와 같고도 다릅니다. 같은 점이란 서울 편중으로 인하여 문화예술이 주변적인 것, 종속적인 것으로 떠밀리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점이란 수도권의 일부로서 적당히 혜택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천은 급작스런 개항으로 인해 인구가 팽창했고, 토박이는 한 줌밖에 안 되고 외지인들이 몇 배 더 많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애향심이나 소속감이 없어서 마치 모래 알갱이처럼 흩어진다고 비판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인천은 텃세가 없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도시입니다. 다른 지역 출신이 어렵지 않게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시장에 당선되고, 야구장에 가면 인천 팀보다는 원정팀 응원단 목소리가 큰 도시, 그런 것에 분개하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하며 받아들이는 도시입니다.
지난했던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을 헤쳐 나오면서 형성된 것이 해불양수(海不讓水)라는 인천정신입니다. 인천 사람들은 해불양수를 인천정신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뜻 그대로 바다는 어떤 물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인천문단의 현실을 규정하기에도 적절한 단어입니다. 문인 예술인들도 그렇습니다. 텃세가 없는 터라 쉽게 인천에 자리잡고 자기 목소리를 내다가 저절로 해불양수가 되어 인천문학의 일부로 녹아버립니다. 그런가 하면 인천에 녹아들기를 거부하며 따로 노는 문인 예술인들도 많습니다. 인천 문단, 예술단체에 속하지 않고 인천의 동업자들과 교유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학의 경우를 보면 인천 거주 문인은 많으나 인천 문단에 소속된 사람은 적습니다. 인천광역시 인구는 2010년 말 현재 278만 명, 금년 말에 280만을 넘어설 걸로 보이는데 문인들은 1천 명 정더로 추정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타지에서 유입된 인구가 많아서 문인들도 인천 출생 문인들보다 타지 출신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문인단체 인천지회 가입자는 많지 않습니다.
먼저 한국문인협회를 보면 지난해 말 등록 문인은 문협 기관지인『월간문학』수록 주소록에 11,062명으로 나와 있는데 인천광역시지회에 가입된 사람은 150명입니다. 한국문협 전체의 0.014%입니다.
작가회의 쪽을 보면 비공식적으로 파악한 전체회원이 1,506명인데 인천지회 가입 문인은 76명입니다. 작가회의 전체의 0.05%입니다.
문협 본부와 작가회의 본부에 가입하고 지회에는 중복으로 가입하지 않은 문인들이 있긴 하지만 0.014%라는 통계가 말해주듯 문협 지회 회원은 매우 적은 편입니다. 작가회의는 조금 낫지만 역시 0.05%로 매우 낮습니다. 대구광역시 인구수를 초과하여 서울, 부산 다음인 ‘한국 3대 도시’의 위상에 비해 매우 적습니다.
두 단체는 성향이 달라 양쪽에 들어간 중복 가입자는 없다고 봅니다. PEN 한국본부 지역위원회가 있는데 위의 두 단체에 중복되지 않은 가입자는 30명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대략 인천 단체 등록 문인은 250명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천에서 사는 문인들이 많은데 지회 등록회원이 이처럼 적은 것은 강력한 자석이 가까운 것을 쉽게 끌어당기듯 서울문단이 강력한 힘으로 빨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현대문학』주소록을 보면 그게 드러납니다.『현대문학』은 1955년 창간연대부터 작년 1월호까지 문인주소록을 게재해 왔습니다. 물론 자기들이 인정하는 저명한 문인들 중심입니다. 금년 1월호 주소록에 수록된 인천 거주 문인은 61명인데 30명은 문협이나 작가회의에 가입해 있고 31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서울문단이 가까우니까 인천지회 등록이 아쉽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분들입니다. 다른 지역 같으면 왜 따로 노냐고 질타도 하고 그럴 텐데 인천은 그러지 않습니다. 인천문단은 인천문단대로 돌아가고 교유하지 않는 문인들은 그렇게 지내다가 언젠가는 녹아들듯이 인천문단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면 그냥 받아줍니다. 저는 그 이유를 위에서 말씀드린 해불양수의 인천정신에 둡니다.
양대 문인단체인 문협 지회와 작가회의 지회도 그렇게 돌아갑니다. 위의 통계에 나온 대로 문협지회는 150명, 작가회의 지회는 그 절반인 76명입니다. 장르별로 보면 문협지회는 시인 80명, 소설가 14명, 희곡 작가 1명, 평론가 6명, 수필가 43명, 아동문학가 9명 등입니다. 수필가가 의외로 많습니다. 작가회의 지회는 시인 45명, 소설가 15명, 평론가 12명, 아동문학가 4명 등입니다. 문협 쪽은 수필가가 많고 작가회의 쪽은 평론가가 많습니다.
한국문단의 양대 산맥인 문협과 작가회의는 전통을 지키려는 온건한 보수와 변화를 원하는 진보로 성향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인천도 대체로 그런 편입니다. 물론 6대광역시 다른 도시에서도 두 단체의 지회가 반목하고 갈등하지는 않는 걸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만 인천은 참 사이좋게 잘 지냅니다.
예를 들면『월간문학』으로 등단해 처음부터 문인협회 소속이었던 제가 십여 년 전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대회에서 강연을 했고, 7~8년 전 인천 영종도에서 작가대회를 열 때 공동회장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존경하는 이가림 교수님은 한국 작가회의의 핵심멤버이시고 인천지회의 간판 격인 분인데 문협의 골수인 정승렬 회장이 초청하셨고 이 교수님도 기꺼이 오늘 강연에 와 주셨습니다.
선의의 경쟁도 있습니다. 문협 쪽은『학산문학』이라는 문예지를 내고 작가회의 쪽은『작가들』이라는 문예지를 내는데 상승효과가 있습니다. 몇 해 전 일입니다.『학산문학』을 문협지회의 이름으로 내다보니까 필진에서 소외된 회원들이 왜 인천문인들은 외면하고 타지 문인들에게 청탁을 보내냐고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회장을 맡고 있던 김윤식 시인이 딱 잘라 거부했습니다.『작가들』을 보세요, 함량 높은 작품이 아니면 안 실어줍니다, 우리는 전통이 더 깊으니까 그 이상 수준이 돼야 실을 수 있어요, 하고 말입니다.『학산문학』은 지방에서 발간하는 문예지 중 최고 수평에 올라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작가들』과 경쟁해 상승된 건 아니지만 선의의 경쟁으로 상승된 효과는 분명 있습니다.
인천문학의 미래
오늘날 인천문학은 순수문학의 위축 그리고 지역 문화 예술의 위축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IT산업, 스마트폰, 그리고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 속에서 문자언어를 매개로 하는 문학은 한없이 위축되어 가고 있고, 서울이 마치 블랙홀처럼 빨아당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어둡지 않습니다. 타지방의 것, 외래의 것, 그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용광로처럼 녹이고 변용시켜서 인천의 것을 만들어 내는 데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해불양수라는 인천정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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