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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울주사(知蔚州事) 양오복(楊五福)·-- 태종 9년 기축(1409,영락 7)
7월24일 (갑오)
경차관 보고로 평민을 관둔전에 역사시킨 성주 목사 이백지 등을 자원 부처시키다
성주 목사(星州牧事) 이백지(李伯持)·영해 부사(寧海府使) 권만(權蔓)·지울주사(知蔚州事) 양오복(楊五福)·지영주사(“평민(平民)을 역사시켜 관둔전(官屯田)을 경작하였습니다.”
○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정포(鄭鋪)가 원 나라에서 졸하였다. 정포는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을 잘 지었다. 충혜왕 때에 좌사의가 되어 왕에게 글을 올려 정부의 시책을 많이 논박하였으므로, 집정자들의 미움을 받아 울주(蔚州)의 수령으로 나가 있었다. 비록 벽지 생활을 하는 중에도 시를 읊으면서 태연히 지냈다. 상국에 가서 벼슬할 뜻이 있어 일찍이 개연히 말하기를, “대장부가 어찌 답답하게 일방(一方)에만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원 나라에 가서 별가불화 승상(別哥不花丞相)을 보았는데, 그는 정포를 한 번 보고 유별나게 여기어 천자에게 천거하려 하였는데 마침 그때 병으로 죽었다. --고려사절요 제25권 원
충목왕(忠穆王)
을유 원년(1345), 원 지정 5년 ------
수원(水原) 이사군(李使君)이 나의 우사(寓舍)로 찾아와서 〈동행록(東行錄)〉을 보여 주기에 나는 자세히 보았다. 을해년 5월에 이군(李君)이 유일(遺逸)로서 조정의 등용을 입어 울주 지사(蔚州知事)가 되어 그 고을에 부임하자, 농사를 장려하고 군대를 훈련하며 성곽과 요새를 수리하고 만일에 대비하게 하였더니---동문선기록
경주 사람들이 좋은 나무를 북돋워 심었다. 이런 사실은 공이 지은 〈성묘중건상량문(聖廟重建上樑文)〉에 의거하여 상고할 수 있고, 내용이 《동경지(東京誌)》에 실려 있다. 또 이듬해에 울주 판관(蔚州判官)에 제수되었고, 〈얼안당기(枿岸堂記)〉를 지어 뜻을 보였는데, 게판(揭板)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손기양 울주판관-1600년에
경상감영계록(慶尙監營啓錄)○헌종(憲宗)
헌종(憲宗) 8년(1842) --울산 부사(蔚山府使) 김교근(金喬根),
6월 초6일
철종(哲宗) 14년(1863)
7월 22일 --도부(到付)한 울산 부사(蔚山府使) 김준근(金俊根)의 첩정에
고종(高宗) 9년(1872)
9월 초10일 --울산 부사(蔚山府使) 이희성(李羲性
고종(高宗) 9년(1872)
3월 13일 ---울산 부사(蔚山府使) 송인옥(宋寅玉)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이공(李公) 묘갈명
공은 휘는 행원(行源)이고 자는 백초(百初)이며 한산군(韓山郡) 사람이다--정유년(1657)에 서용되어 황해 도사(黃海都事)가 되었다. 기해년(1659)에 울산 군수(蔚山郡守)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임진년 상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14일. 왜적이 동래(東萊)를 함락하였는데 부사(府使) 문과(文科) 출신의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평화시의 예에 따라 파견되었다. 송상현(宋象賢)은 죽고, 좌위장(左衛將)인 울산 군수(蔚山郡守) 이언성(李彦誠)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에게 항복하다
김호는 자는 여습(汝習), 호는 심락재(尋樂齋), 본관은 연안(延安), 김수오(金粹五)의 아들로, 작자보다 1년 연상이다--1694-농암집
그러나 그는 결국 이로 인해 이듬해 2월에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좌천되어 1개월 만에 병들어 죽었다. 《丈巖集 -1695 사망
부친을 모시고 소내로 돌아오며[陪家君還苕川] 4월이었다. 이때 나는 갑과(甲科) 급제자로서 각과초계(閣課抄啓)에 뽑혀 역마를 타고 충주(忠州)에 갔는데, 부친께서 울산부사(蔚山府使)가 되었으므로 그 행차를 충주까지 모시고 갔었다-정약용 부친 울산부사
청대(淸臺) :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의 호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태중(台仲)이다. 1710년(숙종36)에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만경 현령(萬頃縣令), 울산 부사, 우부승지,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청대집(淸臺集)》이 있다.
우계공(尤溪公) : 박수서(朴守緖, 1567~1627)로, 본관은 함양, 자는 경승(景承), 호는 우계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며 항전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우승지, 분병조 참의, 울산 부사(蔚山府使) 등을 지냈다. 조우인(曺友仁)과 함께 입직하면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를 비판하는 글을 지어 의금부에 하옥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났다. 저서로는 《우계일고(尤溪逸稿)》가 있다.
계미년(1643)에 또 호조 정랑에 배수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울산 부사(蔚山府使)에 제수되었다. 한번은 정승이 편지를 보내 무엇을 부탁한 일이 있었는데, 공이 사절하면서 “합하(閤下)께서 도균(陶勻)의 지위에 계시면서, 치민(治民)의 도를 가르쳐 주시지 않고 이와 같이 자잘한 일을 말씀하시니, 이것은 성상의 밝음을 해치는 일입니다.”라고 하니, 그 정승이 부끄러워하며 사과하였다. 5년 동안 울산 부사로 있으면서, 잘못된 정사(政事)를 혁파하고 농사를 권면하고 학문을 흥기시켜 치적이 크게 드러났다. 방백(方伯)이 이것을 보고하니 임금께서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여 표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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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암 도신수--도 울산(都蔚山) : 도신수(都愼修, 1598~1651)로,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영숙(永叔), 호는 지암(止巖)이다. 1624년(인조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7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성균관 학정ㆍ박사 등을 역임하고, 참례도 찰방(參禮道察訪)에 옮겼다가 임기가 만료되었다. 호조 정랑ㆍ함흥 판관ㆍ울산 부사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1월큼
23일(계유)
흐림. 대덕사에서 머물렀다. 부산 훈도(訓導) 최의길(崔義吉)이 박대근에게 부치는 서신을 대마도 사람이 와서 전하는데, 10월 29일에 부친 것이었다. ‘홍득일(洪得一)은 동래 부사, 민여검(閔汝儉)은 울산 부사,
---동사록
9월큼
13일(갑자) --동사록--. 울산(蔚山) 부사(府使) 송극인(宋克訒)
매호유고 발문〔梅湖遺稿跋〕
선조(先祖) 매호공(梅湖公)의 시집이 인멸되지 아니하고 다시 유행하게 된 것은 아마도 하늘의 뜻일 것이다. 과거에 《매호집(梅湖集)》이 세상에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세대가 멀어질수록 전함이 끊어지고 망실되었다. 이 때문에 돌아가신 아버님 정랑공(正郞公)이 《동문선(東文選)》 및 다른 곳에서 보고 들은 것 약간 편을 취하여 삼가 기록하여 집안에 보관하셨다. 영조(英祖) 기축년(1769, 영조45)에 함양(咸陽) 종친(宗親)이 마침내 그 기록을 가지고 보첩(譜牒) 끄트머리에 새겨 첨부하였고, 임진년(1772)에는 울산 부사(蔚山府使) 남태보(南泰普)가 마침내 그것을 쪼개어 나누고,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
[주D-015]민여검(閔汝儉) : 1564~1627. 자는 종례(宗禮), 호는 운촌(雲村)ㆍ운곡(雲谷),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정자(正字)ㆍ전적(典籍)을 거쳐 곽산 군수(郭山郡守)로 있을 때 이괄(李适)의 난에 공을 세우고, 이어 울산 부사(蔚山府使)를 역임했다.
자는 종례(宗禮), 호는 운촌(雲村),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벼슬은 정자(正字)ㆍ전적(典籍)ㆍ곽산 군수(郭山郡守)ㆍ울산 부사(蔚山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곽산 군수로 있을 때 이괄(李适)의 난을 만나 선두에 나서 공을 세웠으나 도리어 지체했던 자의 탄핵으로 파직되기까지 하였다.
주D-022]재원(載遠) : 1730~1792. 조선 문신. 자는 기백(器伯),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벼슬은 형조 좌랑(刑曹佐郞)ㆍ울산 부사(蔚山府使)ㆍ진주 목사(晉州牧使) 등을 지냈다. 인용문 ‘군(君)이……같았다’는 《번암집(樊巖集)》 권53 〈묘갈(墓碣)〉에서 인용하였다.
[주D-001]장경(長卿) : 자가 장경인 김하량(金厦樑, 1605~?)을 가리킨다. 그의 본관은 선산으로 1630년(인조8) 식년시에 등과하여 울산ㆍ봉산ㆍ흥해ㆍ영월 군수를 거쳐 우윤(右尹)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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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간(松磵) : 송광정(宋光廷, 1556~1607)의 호인데, 송간(松澗)으로도 쓴다. 자는 찬재(贊哉)로 1585년(선조18)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9년(선조32) 전라도 도사, 1601년(선조34) 정선 현감, 1606년(선조39) 울산 부사가 되었다.
공은 휘는 안국(安國)이고 자는 정경(定卿)이며 성은 윤씨(尹氏)이고 자호(自號)는 설초(雪樵)이다. 선대는 양주(楊州) 사람이다. 9대조 숭(崇)은 고려 말엽에 중대광(重大匡)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고, 5대를 내려와 장(璋)에 이르러서는 중종(中宗)을 섬겨 공조 판서를 지냈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좌통례 휘 계훈(繼勳)이고, 조부 휘 시우(時雨)는 재덕(才德)을 감추고 벼슬하지 않았다. 부친 우수운 판관(右水運判官) 휘 응상(應商)은 어려서부터 동배(同輩)들에게 추앙을 받았는데, 우계(牛溪 성혼(成渾)) 성 선생(成先生)이 한 번 보고 인정하였다. 모친 이씨(李氏)는 양녕(讓寧)의 후손인 교하 현감(交河縣監) 원우(元友)의 따님인데, 온화하고 인자하며 선량하고 근신하여 일찍이 급박한 말투나 서두르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공은 선조(宣祖) 2년 기사년(1569) 2월 4일에 경도(京都)에서 태어났다. 총명하고 조숙하였는데, 글에 대해 들으면 곧바로 이해하고 한 번 보면 잊지 않을 정도였다. 기축년(1589)에 태학(太學)에 들어갔고, 선조 24년 신묘년(1591)에 명경과(明經科)에 뽑혔다. 그 당시 사대부들의 의논이 동서로 갈렸었는데, 공이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었으나 담당자가 공을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당이라고 하여 배척하는 바람에 선임되지 못하였다.
임진년(1592)에 모친상을 당하고, 계사년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을미년에 상복을 벗었으나, 도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서원(西原 청주(淸州))에 거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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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10월에 또다시 병조 정랑에 배수되었다. 기자헌(奇自獻)의 거처가 공과 가까웠는데도 공은 기자헌을 만나 보지 아니하니, 기자헌이 이에 대해 깊이 앙심을 품었다. 공이 경사에 조회하고 돌아오자, 강류(姜籕)가 어사(御史)가 되어 행장을 검사하였는데, 기자헌의 지시를 받들어 하찮은 일로 모함한 나머지 하마터면 죄를 얻을 뻔하였다.
이듬해 계묘년(1603) 가을에 결국 공을 몰아내어 울산 판관(蔚山判官)으로 삼았다.
그 당시는 왜란이 끝난 지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는데, 울산은 바닷가 변방으로 왜구가 침범하는 길목이라서 가장 먼저 공격을 받는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계획적으로 공을 사지(死地)에 버려둔 것이었다. 공은 부임하여 전란의 상처를 무마시키면서 온화하게 백성들을 다독이고 엄격하게 자신을 단속하였다. 갑진년(1604)에 명나라 유격장군(游擊將軍) 동정의(董正誼)가 바닷가에 이르렀는데, 왜구를 탐문하면서 몹시 위세를 부려 대소 관리들이 모두 치욕을 당하였다. 그러나 공을 보자 유독 몹시 예우하여 공이 말을 하면 항상 자신의 뜻을 굽히고 순종하였다. 공에게 어떤 관직에 있다가 외직으로 나왔는지를 묻고는, 곧 탄식하기를, “공과 같이 덕이 있는 이를 외딴 변방에 버려두니, 정국을 알 만하다.” 하였다. 그 뒤 변방의 일을 진술하여 상주(上奏)할 적에 동국(東國)의 장수와 관리들을 대부분 하찮게 평가하였으나, 오직 “울산 통판은 문무(文武)의 재주를 겸비하고 있으니, 한 지역을 담당할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9월에 해직하고 돌아오니,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울산 부사 안공 묘갈명 병서〔蔚山府使安公墓碣銘 幷序〕
선친에게 벗이 계셨으니, 대학사(大學士) 하계(霞溪) 권공(權公)은 실로 당세의 문운(文運)을 주관한 분이셨다. 그 문하에서 나온 사람을 또한 두 분 알고 있으니, 부사(府使) 안공(安公)과 대부 박이문(朴履文)이다. 안공은 울산 부사(蔚山府使)의 부절(符節)을 버린 뒤로 더 이상은 서울 길을 나서지 않았으니, 무주(茂朱)의 빼어난 산수를 사랑하여 상악(裳岳) 아래에 집을 짓고 살다가 끝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공은 휘(諱)는 서우(瑞羽), 자는 봉거(鳳擧)이다.
사성 정공 묘지명 병서〔司成鄭公墓誌銘 幷序〕
공의 휘는 광운(廣運)이요, 자는 덕이(德而)이다---임술년(1742) 봄에 울산 부사(蔚山府使)에 제수되었다. 그때 한씨(韓氏) 성을 가진 사인(士人)이 있었는데 조정의 권귀(權貴)와 결탁하여 세력을 믿고 머물러 있으면서 열읍(列邑)에 해독을 끼치니 열읍의 백성들이 그 그림자만 보고도 달아났다. 공이 관부에 이르러 명령을 내려 체포하게 하자 한씨 성을 가진 자가 도망쳐 숨어 버렸다. 이에 그와 함께 악행을 저지르던 자를 붙잡아다가 그 죄목을 열거하고서 장(杖)을 쳐서 죽였다. 이에 열읍의 백성들이 모여 구경하면서 통쾌하다고 하였는데, 도신(道臣)은 이에 대해 불만을 품고 고과를 하등(下等)으로 매겼으므로 공은 인수(印綬)를 던지고 곧바로 돌아왔다.
영종대왕(英宗大王) 원년 을사(1725), 선생의 나이 14세.
○ 7월에 참의공을 따라 울산(蔚山)의 임소(任所)로 가다.--순암 선생 연보(順菴先生年譜)
가선대부 병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임하당 신공 묘지명(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林下堂申公墓誌銘) 병서. 신해년
공의 휘는 후명(厚命), 자는 천휴(天休), 호는 임하당(林下堂)이다---신유년(1681, 숙종 7)에 어사 김두명(金斗明)의 무고로 체직되었는데, 주상이 무고임을 살펴서 특명으로 방면하고 이윽고 울산 부사에 임명되고
또 빈객으로 놀러 오는 이들을 이곳에서 따뜻하게 하고 시원하게 해주기 위해 다시 정자 오른편에 당(堂)을 지어 냉방과 난방을 갖추기도 했다. 바르고 꾸미는 것이 끝나자 나한테 기문을 써 달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내 일찍이 울산(蔚山)에 부임하여 군사를 사열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현에 이르러서 소위 의운정에 올랐는데, 고을 사람들 말에, 이것은 옛날 이사군(李使君) 지명(知命)이 세운 것이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행
《晉書 卷62 祖逖列傳》
[상국(相國) : 고경명(髙敬命, 1533~1592).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ㆍ태헌(苔軒),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아버지는 대사간 맹영(孟英)이다. 1552년(명종7) 진사가 되었으며, 1558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563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 이조 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할 때 교리(校理)로서 이에 참여하였다가 그 경위를 이량에게 알려준 사실이 발각되어, 울산 군수로 좌천된 뒤 파면되었다
○ 교리 고이순(高而順 경명(敬命)의 자)은 유생으로 있을 때 꿈에 시를 얻었다.---이제신 청강선생
젊은 시절 풍류는 유독 뛰어났는데 / 少日風流獨不群
만년의 강호생활 병마저 나누어 가졌네 / 暮年江海病兼分
주저되기는 상강의 병이라도 앓아야 할까 / 趑趄肯作湘中病
호걸은 응당 영외의 글을 짓는다지 / 豪健應脩嶺外文
조수가 해문에 드니 하늘은 물을 치고 / 潮入海門天拍水
해가 포구에 지니 장기가 구름같이 이네 / 日沈漁浦瘴如雲
강남인지라 역마의 소식이 없기에 / 江南驛使無消息
매화를 꺾어 그대에게 주지 못하네 / 折得梅花未贈君
계해년에 인순의 아버지 및 그 장인이 모두 벼슬이 떨어져 호남으로 돌아갔었고, 이순 또한 울산 군수에 제배되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 시는 예언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순이 부임하지도 아니하여 논핵을 받아 파직되므로 또한 호남으로 돌아갔으니, 이시의 응험이 과연 적실하였는지 알 수 없다. 뒤에 고공(高公)이 동래 부사가 되었었는데, 문득 의연히 꿈속에 본 것과 같았다고 한다.
합포(合浦) : 울산(蔚山)의 고호(古號)로, 김복일은 선조 20년(1587)에 울산 군수가 되었다.
회산(檜山) : 창원(昌原)의 고호이다. 김복일은 울산 군수를 거친 다음 창원 부사에 제수되었다.
병자년(1636, 인조 14) -해사록-울산 부사(蔚山府使) 오섬(吳暹)도 와서 기다렸고, 좌병사(左兵使) 허완(許完)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였는데, 곧 나의 외당숙이다.
9월
3일(갑진)
해사일기(海槎日記) 1
계미년(1763, 영조 39) 8월
21일(을사)
맑음. 동래에 머물렀다.
6년 동안에 산천과 풍물(風物)이 옛날과 한결같으니, 자못 연연하여 잊혀지지 않는 옛정[三宿之舊戀]이 느껴진다. 크게 무사들을 모아 활쏘기를 시험하여 상을 주고, 간략하게 떡과 과일을 장만하고 풍악을 베풀어 대접하다가 해가 다 되어서야 파하였다.
울산 부사 홍익대(洪益大)와 기장 현감(機張縣監) 하명상(河命祥)이 보러 왔다.
휘 예(藝)는 …… 돌아왔으며 : 이예(李藝, 1373~1445)의 호는 학파(鶴坡),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원래 울산군의 아전이었는데, 1396년(태조5) 울산군 지사(蔚山郡知事) 이은(李殷)과 함께 일본에 잡혀갔다가 그곳에서 이은을 잘 시종한 공으로 조선으로 돌아온 뒤 아전의 역을 면제받고 벼슬에 올랐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2 慶尙道 蔚山郡 人物》
인산영당(仁山影堂)을 철거했다가 : 인산영당은 송시열(宋時烈)을 모신 서원으로 경주에 있었다. 1722년(경종2) 경주 부윤 권세항(權世恒)과 울산 부사 홍상빈(洪常賓)이 경주권 남인(南人) 유생 100여 명을 동원하여 송시열의 영당을 훼철하였다. 이후 1725년(영조1) 경주의 노론계 유생인 채명보(蔡命寶) 등이 상소하여 조정에 알려졌고, 권세항과 홍상빈 등이 삭출당하였다. 《英祖實錄 1年 5月 17日》
蔚山府使宜寧南泰普
인조 1년 계해(1623, 천계3)
7월 17일(을사) 흐리고 비 옴
좌목
사간원이 남포 현감 조현경 등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사간원이 “남포 현감(藍浦縣監) 조현경(趙玄慶)은 사람됨이 용렬하여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니 파직하소서.”라는 일과, “울산 부사(蔚山府使) 박사제(朴思齊)는 사람됨이 어리석어 평소 정사를 행한 것이 기록할 만한 잘한 일이 한 가지도 없으니 파직하소서. 창평 현감(昌平縣監) 유적(柳)은 사람됨이 오활하고 망녕되니 파직하소서.”라는
인조 1년 계해(1623, 천계3)
7월 20일(무신) 밤에 비 오고 우레와 번개가 치다가 낮에 잠시 갬
좌목
] 정사가 있었다
정사가 있었다. 박동선(朴東善)을 대사간으로, 정광경(鄭廣敬)을 부응교로, 김시언(金時言)을 부수찬으로, 목서흠(睦敍欽)을 병조 정랑으로, 서성(徐渻)을 대사헌으로, 이시발(李時發)을 형조 판서로, 이행원(李行遠)을 봉교로, 박수서(朴守緖)를 울산 부사(蔚山府使
인조 1년 계해(1623, 천계3)
8월 12일(경오) 맑음
좌목
함경 감사 권반 등을 인견하겠다는 전교
□□□에게 전교하기를,
“함경 감사 권반(權盼), 울산 부사(蔚山府使) 이극신(李克信), 남원 부사(南原府使) 정온(鄭蘊), 철산 부사(鐵山府使) 안경원(安景源)을 인견하겠다.”
인조 1년 계해(1623, 천계3)
10월 8일(을축) 흐림
좌목
사간원이 이속관을 보내지 말라는 일 등을 청하였다
사간원이, 이속관(移粟官)을 보내지 말라는 일과, “울산 부사(蔚山府使) 이극신(李克信)은 역적 이유림(李有林)의 삼촌 숙부로서 연좌(緣坐)의 율(律)에 따라 처분을 받아야 하니, 관작(官爵)을 삭탈하소서.”라는 일과, “이유림에게 술과 밥을 넣어주는 것을 엄금하지 않은 의금부(義禁府)의 해당 낭청을 나추(拿推)하소서.”라는 일과, “박전(朴橏)과 안우길(安遇吉) 등은 역적의 공초에 나왔는데도 국청(鞫廳)에서는 출신지로 보아 역모에 동참한 것 같지 않다는 말을 하며 나국(拿鞫)할 것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이 두 사람은 역적들과 절친하였고 그동안의 행적이 뒤얽혀 있으니, 나국하소서.”라는 일로 아뢰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파방하는 일과 시관을 파출하는 일과 이속관의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 모두 고 판서 박정현 집안의 일기에 등사된 조보에 의거함 -
인조 1년 계해(1623, 천계3)
10월 9일(병인) 맑음
좌목 정사가 있었다
정사가 있었다. 박정현(朴鼎賢)을 공조 참판으로, 이덕온(李德溫)을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이현영(李顯英)을 부총관(副摠管)으로, 남궁경(南宮㯳)을 대동도 찰방(大同道察訪)으로 삼았다.
- 모두 고 판서 박정현 집안의 일기에 등사된 조보에 의거함 -
인조 1년 계해(1623, 천계3)
0월 13일(경오) 맑음
좌목
정사가 있었다
정사가 있었다. 한명련(韓明璉)을 구성 부사(龜城府使)로, 송극인(宋克訒)을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이언척(李言惕)을 덕원 부사(德源府使)로, 김확(金矱)을 병조 좌랑으로, 김희(金熹)를 황해도 시관(黃海道試官)으로 삼았다.
인조 5년 정묘(1627, 천계7)
7월 21일(을유) 맑음
좌목
정사가 있었다
정사가 있었다. 헌납에 이소한(李昭漢), 부제학에 정경세(鄭經世), 병조 참의에 정백창(鄭百昌), 형조 참의에 이여황(李如璜), 사서에 이경(李坰), 설서에 윤효립(尹孝立), 평양 서윤(平壤庶尹)에 이영식(李永式), 울산 부사(蔚山府使)에 박경업(朴慶業), 회양 부사(淮陽府使)에 이포(李怉), 함경 도사에 조길(曺佶), 수찬에 권도(權濤), 총관(摠管) 두 자리에 심기원(沈器遠), 이시방(李時昉)을 차하하였다.
인조 5년 정묘(1627, 천계7)
7월 27일(신묘) 맑음
좌목
정사가 있었다
정사가 있었다. 병조 정랑에 조빈(趙贇), 좌랑에 유경집(柳景緝), 대사성에 홍서봉(洪瑞鳳), 겸필선에 이기조(李基祚), 주서에 윤강(尹絳), 장령에 권도(權濤), 수찬에 이경석(李景奭), 예조 좌랑에 김덕승(金德承), 형조 정랑에 윤지복(尹之復), 공조 정랑에 김수남(金秀南), 울산 부사에 홍명형(洪命亨
인조 9년 신미(1631, 숭정4)
9월 24일(을미) 맑음
좌목
09-09-24[08] 정사가 있었다
정사가 있었다. 이비가 김기종(金起宗)을 좌참찬으로, 오윤겸(吳允謙)을 영돈녕부사로, 이시방(李時昉)을 해주 판관(海州判官)으로, 정립(鄭雴)을 사예로, 이윤우(李潤雨)를 첨지로, 안시현(安時賢)을 병조 좌랑으로, 이필달(李必達)을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유비(柳斐)를 총관으로, 유대화(柳大華)를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김원(金瑗)을 공조 정랑으로, 권심(權淰)을 상례(相禮)로, 남이웅(南以雄)을 춘성군(春城君)으로 삼았다.
- 고 판서 박정현의 일기에 의거함 -
인조 14년 병자(1636, 숭정9)
11월 7일(정미) 아침에 비 오고 해 질 녘에 맑음
울산 부사 이후천이 하직하였다
울산 부사(蔚山府使) 이후천(李後天)이 하직하였다.
인조 16년 무인(1638, 숭정11) 10월 21일(경술) 맑음
김광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김광혁(金光爀)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맹세충(孟世衝)을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인조 19년 신사(1641, 숭정14)
11월 12일(갑신) 맑음
정사가 있었다. 이비가 이대기(李大奇)를 예빈시 별제로, 김광현(金光炫)을 부제학으로, 신익량(申翊亮)을 예조 참의로, 홍우량(洪宇亮)을 무장 현감(茂長縣監)으로, 이진(李溍)을 의성 현령(義城縣令)으로, 김응윤(金應胤)을 울산 부사(蔚山府使)
울산 부사(蔚山府使)를 가려 차임하는 일로 일찍이 비국에서 계사를 올렸던 것은 우연한 뜻에서 나온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강명(剛明)하며 청렴하고 근후한 자를 선발해야 적임자를 얻었다고 할 수 있는데, 신임 부사 박계영(朴啓榮)은 성품이 느릿하고 능력이 부족하여 쇠잔해진 고을을 진무하고 소생시키는 책임은, 결코 이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 일찍이 대시(臺侍)의 직임을 지냈다는 이유로 아무렇게나 차출하여 보낼 수 있겠습니까? 박계영을 체차하고 그 후임을 각별히 가려 차임하소서.”
인조 19년 신사(1641, 숭정14)
12월 1일(임인) 맑음
정사(政事)가 있었다. 이비(吏批)에, 판서 남이웅(南以雄)은 식가이고, 참판 김영조(金榮祖)는 나왔고, 참의 이덕수(李德洙)는 나왔고, 우부승지 남선(南銑)은 나왔다. 병비(兵批)에, 판서 심기원(沈器遠)은 나왔고, 참판 심연(沈演)은 비국에 나갔고, 참의 김휼(金霱)은 나왔고, 참지 이후원(李厚源)은 - 원문 빠짐 - 우승지 한흥일(韓興一)은 나왔다.
이비가 정치화(鄭致和)를 사인으로, 조수익(趙壽益)을 집의로, 박장원(朴長遠)을 정언으로, 황익청(黃益淸)을 직강으로, 이여택(李汝澤)과 이완(李)을 승문원 박사로, 김삼락(金三樂)을 승문원 저작으로, 이유창(李有淐)을 주서로, 이래(李崍)를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인조 26년 무자(1648, 순치5) 3월 19일(갑인) 맑음
정사가 있었다. 이비가 양만용(梁曼容)을 교리로 삼았다. 황해도 검률(黃海道檢律)에 김익상(金益祥)을, 경상도 심약(慶尙道審藥)에 김시일(金時鎰)을 단부하였다. 안정(安鋌)을 함종 현령(咸從縣令)으로, 홍흥지(洪興祉)를 용강 현령(龍岡縣令)으로, 유진삼(柳晉三)을 예조 정랑으로, 김식(金鉽)을 부수찬으로, 이상혐(李尙馦)을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삼았다
인조 26년 무자(1648, 순치5)
10월 13일(갑진) 맑음
] 이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재(李梓)를 장령으로, 정유(鄭攸)를 헌납(獻納)으로, 황준구(黃儁耉)를 정언으로, 장선징(張善澂)을 김화 현감(金化縣監)으로, 유충걸(柳忠傑)을 정산 현감(定山縣監)으로, 이건(李騫)을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조휴(趙休)를 용궁 현감(龍宮縣監)으로, 송사호(宋士豪)를 희천 군수(熙川郡守)로, 김인(金仁)을 철산 부사(鐵山府使)로, 노준명(盧峻命)을 울산 부사(蔚山府使)
인조 26년 무자(1648, 순치5)
11월 16일(병자) 맑음
울산 부사 노준명 등이 하직하였다
울산 부사(蔚山府使) 노준명(盧峻命)과 철산 부사(鐵山府使) 김인(金仁)이 하직하였다.
영조 1년 을사(1725, 옹정3)
5월 6일(계묘) 맑음
이비와 병비의 관원 현황과 관직 제수 내용
정사가 있었다.
유(洪晉猷)를 공조 좌랑으로, 이경훈(李景薰)을 감찰로, 강택(姜澤)을 인의(引儀)로, 서종섭(徐宗燮)을 헌납으로, 김우경(金遇慶)을 장릉 참봉(長陵參奉)으로, 이완(李浣)을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영조 1년 을사(1725, 옹정3)
7월 4일(기해) 아침에는 맑고 저녁에는 비가 옴
] 울산 부사(蔚山府使) 안서우(安瑞羽) 등이 하직하였다
울산 부사(蔚山府使) 안서우(安瑞羽), 영광 군수(靈光郡守) 김담(金墰), 양구 현감(楊口縣監) 이엽(李燁), 대동 찰방(大同察訪) 임익빈(林益彬)이 하직하였다
영조 1년 을사(1725, 옹정3)
7월 18일(계축) 맑음
군향(軍餉)을 거두어들인 실적이 꼴찌인 수령 등을 의금부로 잡아다 신문하고, 나머지는 논죄(論罪)하지 말 것을 청하는 비변사의 계
또 비변사의 말로 아뢰기를,
“군향(軍餉)을 아직 거두지 못한 각 도의 수령과 변장(邊將) 중 꼴찌인 자는 의금부로 잡아다 신문하고, 꼴찌에서 두 번째나 세 번째인 자는 장(杖)을 치며, 원래의 환자(還上)를 아직 거두지 못한 변장과 수령 중 꼴찌인 자는 장을 치고 꼴찌에서 두 번째인 자는 추고하도록 전에 결정하였습니다.
여러 도의 장계를 가져다 살펴보니, 군향을 거두지 못한 것은, 경상도에서는 남촌 별장(南村別將) 이인익(李仁益)이 꼴찌, 전 울산 부사(蔚山府使) 경성회(慶聖會)가 꼴찌에서 두 번째이고,
영조 2년 병오(1726, 옹정4)
4월 5일(정묘) 맑음
정택하(鄭宅河)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정택하(鄭宅河)를 집의로, 이의현(李宜顯)을 좌참찬으로, 김취로(金取魯)를 호조 참판으로, 김상원(金相元)을 공조 참판으로, 이집(李潗)을 예조 참의로, 김상석(金相奭)을 부교리로, 황일하(黃一夏)를 공조 판서로, 유복명(柳復明)을 강원 감사로, 김도협(金道浹)을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이만유(李萬維)를 울산 부사(蔚山府使)
영조 2년 병오(1726, 옹정4)
5월 16일(정미) 맑음
울산 부사(蔚山府使) 이만유(李萬維)가 하직하였다
울산 부사(蔚山府使) 이만유(李萬維)가 하직하였다.
고종 1년 갑자(1864, 동치3)
8월 4일(임신) 비
이비가 2차 정사에서 김상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이비가 2차 정사를 하였다. 김상현(金商鉉)을 돈녕부 주부(敦寧府主簿)로, 최국진(崔國鎭)ㆍ조재형(趙在衡)을 전적으로, 정현석(鄭顯奭)을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삼았다.
고종 2년 을축(1865, 동치4)
6월 22일(을묘) 비
이선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이선호(李善浩)를 의금부 도사로, 조인승(曺寅承)을 울산 부사로
고종 4년 정묘(1867, 동치6)
12월 25일(갑진) 맑음
04-12-25[26] 이재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이재영(李載英)을 장악원 주부로, 이경로(李景魯)를 형조 정랑으로, 이교덕(李敎德)을 군위 현감(軍威縣監)으로, 이헌기(李獻耆)를 사근 찰방(沙斤察訪)으로, 박능세(朴菱世)를 제원 찰방(濟原察訪)으로, 홍순긍(洪淳肯)을 상의원 직장으로, 김병기(金炳耆)를 인의(引儀)로, 강영수(姜穎秀)를 형조 좌랑으로, 이용하(李鏞夏)를 혜릉 영(惠陵令)으로, 조연승(曺演承)을 봉화 현감(奉化縣監)으로, 민영학(閔泳學)을 종묘서 직장으로, 김계원(金桂元)을 사옹원 봉사로, 조장섭(趙璋燮)을 상의원 별제로, 이헌문(李憲文)을 광릉 영(光陵令)으로, 조단호(趙端鎬)를 울산 부사(蔚山府使)
고종 5년 무진(1868, 동치7)
1월 29일(무인) 비
봉산 군수 이명응과 성천 부사 채동술 등을 서로 바꾸라는 전교
○ 전교하기를,
“봉산 군수(鳳山郡守) 이명응(李明應), 성천 부사(成川府使) 채동술(蔡東述), 과천 현감(果川縣監) 이태응(李泰應), 송화 현감(松禾縣監) 송병찬(宋秉瓚), 토산 현감(兎山縣監) 고석현(高奭鉉), 울산 부사(蔚山府使)
고종 6년 기사(1869, 동치8)
12월 3일(경자) 맑 름
아비의 병이 위급한 울산 도호부사 김구현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이조의 계
고종 6년 기사(1869, 동치8)
12월 11일(무신) 맑음
이비의 관원 현황
○ 정사가 있었다. ,()로, 윤경진(尹庚鎭)을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이석신(李奭信)을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조강하(趙康夏)를 안악 군수(安岳郡守)로 삼았다. 함경 감사 이흥민(李興敏)을 1년 더 잉임시키라는 전지를 받들었고, 행 호군 정규응(鄭圭應)에게 지금 가의대부(嘉義大夫)를 가자하였는데, 제수하라는 전지를 받들었고, 행 부호군 신숙(申橚)에게 지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서제(書題)에 조영순(趙永純)을 단부하였다.
고종 11년 갑술(1874, 동치13) 7월 12일(임자) 맑음 이학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이학년(李鶴年)을 사재감 봉사로, 임병익(林炳翼)을 사옹원 봉사로, 정기대(鄭基大)를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86 고종 12년 을해(1875, 광서1) 5월 18일(갑인) 맑음 울산 부사의 후임에 부호군 장석룡을 제수하라는 전교
○ 전교하기를,“울산 부사의 대임을 부호군 장석룡(張錫龍)으로 제수한 다음, 며칠 내로 내려보내도록 하라.”하였다.
87 고종 12년 을해(1875, 광서1) 5월 18일(갑인) 맑음 이조가 울산 부사에 장석룡을 단부하였다
○ 이조가 울산 부사에 장석룡(張錫龍)을 단부하였는데, 제수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100 고종 14년 정축(1877, 광서3) 5월 25일(기묘) 비 이희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이희준(李羲俊)을 공조 참판으로,(李昌鎬)를 선천 부사(宣川府使)로, 박제문(朴齊文)을 양성 현감(陽城縣監)으로, 한규직(韓圭稷)을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박제만(朴齊萬)을 울산 부사로 삼았...
109 고종 18년 신사(1881, 광서7) 윤7월 11일(신축) 맑음 울산 부사에 제수된 이태진의 연한이 이미 지났으므로 대책을 묻는 이조의 계
○ 또 아뢰기를,“울산 부사(蔚山府使)에 이태진(李泰鎭)을 제수하라고 명하셨는데, 연한이 이미 지났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하니, 구애받지 말라고 전교하였다
조단호(趙端鎬)가 앞으로 나와서 직책과 성명을 아뢰고, 이어 아뢰기를,
“신의 이력은, 기유년 식년시의 진사로, 경신년 6월의 정사에서 남부 도사(南部都事)에 제수되었고, 임술년 12월의 정사에서 사과(司果)에 부직(付職)되었고, 계해년 2월의 정사에서 조지서 별제에 제수되었고, 같은 해 3월의 정사에서 공조 좌랑에 제수되었고, 같은 해 8월의 정사에서 영희전 영(永禧殿令)에 제수되었고, 갑자년 5월의 정사에서 고산 현감(高山縣監)에 제수되었고, 병인년 12월의 정사에서 배천 군수(白川郡守)에 제수되었고, 정묘년 12월의 도목 정사에서 울산 부사(蔚山府使)에 제수되었고
○ 병조 참판 정해륜(鄭海崙)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나라의 외대(外臺)는 감사의 직책이 이것인데 이전의 습관에 빠져서 법도에 해를 끼쳤으니, 어찌 잘못됨을 바로잡고 사실을 살피는 의리이겠습니까.신은 본래 보잘것없는데 한갓 널리 이루어 주심을 입어 3, 4년 전에는 관찰사로 임명되었습니다. 봉산(鳳山) 수령 이태현(李泰鉉)은 울산 부사가 되어 떠난 지 수 개월이었고
115 고종 19년 임오(1882, 광서8) 3월 23일(기유) 맑음 이비가 2차 정사에서 조경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이비가 2차 정사를 하였다. 조경호(趙慶鎬)를 예조 판서로, 김낙균(金樂均)을 울산 부사로 삼았다
121 고종 21년 갑신(1884, 광서10) 3월 15일(경인) 낮에는 맑고 밤에는 비 옴 유진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유진규(兪鎭奎)를 교리로, 심상한(沈相漢)을 예조 참의로, 정기상(鄭璣相)을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126 고종 23년 병술(1886, 광서12) 6월 14일(을해) 맑음 신병이 있는 청송 부사 이계하를 파출할 것을 청하는 이조의 계
○ 또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청송 부사(靑松府使) 이계하(李啓夏)의 정장에, ‘제가 말미를 받아 상경하였는데 신병이 갑자기 위중해져 관소로 돌아갈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파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울산 부사(蔚山府使) 박세병(朴世秉)과
132 고종 25년 무자(1888, 광서14) 2월 4일(병술) 맑음 수령을 천거하는 단자를 잘못 쓴 상주 목사 민종렬 등을 엄하게 추고할 것을 청하는 정원의 계
○ 또 아뢰기를,“방금 경상도에서 올린 수령을 천거하는 단자가 본원에 도착한 것을 보니, 상주 목사(尙州牧使) 민종렬(閔種烈)과 울산 부사(蔚山府使) 김헌수(金瀗秀)는 능호(陵號)를 평행으로 썼고
137 고종 27년 경인(1890, 광서16) 6월 25일(계해) 흐림 이비가 2차 정사에서 김영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이비가 2차 정사를 하였다. 김영직(金永稷)을 울산 부사(蔚山府使
140 고종 29년 임진(1892, 광서18) 1월 27일(정해) 맑음 남계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남계술(南啓述)을 휘경원 영(徽慶園令)으로, 김영순(金永順)을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142 고종 30년 계사(1893, 광서19) 10월 28일(병자) 낮에는 맑고 밤에는 비 옴 3차 정사에서 천운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3차 정사를 하였다. 천운정(千運亭)을 감찰로, 오승로(吳升魯)를 기기국 사사로, 황긍연(黃兢淵)을 가감역관으로, 이시용(李時容)을 의녕원 수봉관으로, 한우석(韓禹錫)을 순강원 수봉관으로, 한응주(韓應周)를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이경익(李敬翼)을 평양 서윤(平壤庶尹)으로, 김택수(金澤秀)를 함흥 판관(咸興判官)으로 삼았다.
144 고종 31년 갑오(1894, 개국503) 9월 13일(병술) 신병이 있는 울산 부사 한응주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내무아문의 계
○ 또 내무아문의 말로 아뢰기를,“울산 부사(蔚山府使) 한응주(韓應周)와
145 고종 31년 갑오(1894, 개국503) 9월 14일(정해) 의정부가 정인섭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의정부가 정인섭(鄭寅燮)을 인천 부사(仁川府使)로, 안종덕(安鍾悳)을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순종 4년 경술(1910, 융희4)
3월 23일(정묘, 양력 5월 2일 월요일) 맑음
이규정 등에 대한 인사를 행하였다
○ 내부 번역관(內部飜譯官) 이규정(李圭正), 덕천 군수(德川郡守) 유기영(柳基泳), 성천 군수(成川郡守) 천상하(千象河), 탁지부 주사 금강미성(今岡美成)은 자원에 의하여 본관을 해면하였다. 경시청 경부(警視廳警部) 곡천금일랑(谷川金一郎)을 경시(警視)에 임명하였고, 양산 군수(梁山郡守) 이원호(李元鎬)를 거제 군수(巨濟郡守)에, 전(前) 교원(敎員) 심의승(沈宜昇)을 삼척 군수(三陟郡守)에, 고성 군수(固城郡守) 윤명은(尹命殷)을 울산 군수(蔚山郡守)에
. 울산 군수 윤명은에게 공립 울산보통학교장을 겸임시켰고
일성록-----
정조즉위년 병신(1776,건륭 41)
12월3일(경자)
채홍리(蔡弘履)를 봉산 군수(鳳山郡守) 로, 황간(黃榦)을 장흥 부사(長興府使) 로, 유항주(兪恒柱)를 영암 군수(靈巖郡守) 로, 김우(金愚)를 울산 부사(蔚山府使) 로,
정조 4년(1780) 6월 22일(기사 -○ 이비(吏批)에, 이성호(李成祜)를 울산 부사(蔚山府使)로--홍익철(洪益喆)을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8 정조 5년(1781) 7월 15일(을묘) 울산 부사(蔚山府使) 홍익철(洪益喆)을 나처(拿處)하도록 한 것을 용서하라고 명하였다.
11 정조 7년(1783) 9월 1일(기축) 정사(政事)가 있었다. 이조 참판 심풍지(沈豐之), 참의 조정진(趙鼎鎭), 병조 판서 이갑(李U212A0)이 나왔다.
○ 엄숙(嚴璹)을 대사헌으로, 김화중(金和中)을 집의로, 이창한(李昌漢)을 사간으로, 유익지(柳翼之)ㆍ권평(權坪)을 장령으로, 조석목(趙錫穆)을 헌납으로, 최수로(崔守魯)를 정언으로, 강세황(姜世晃)을 판윤으로, 홍양호(洪良浩)를 병조 참판으로, 이주국(李柱國)을 좌윤으로, 김이소(金履素)를 동지경연사로, 이재형(李在亨)을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정조 7년(1783) 11월 22일(기유) 정사가 있었다. 이조 참판 조시준(趙時俊)이 나왔다.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정동협(鄭東協)
정조 8년(1784) 12월 25일(병오 --○ 이동빈(李東賓)을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정조 9년(1785) 6월 24일(신축) --심공예(沈公藝)를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정조 11년(1787) 7월 25일(경인) --이정회(李廷恢)를 울산 부사로
정조 11년(1787) 7월 27일(임진) 유한위(兪漢緯)를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정조 11년(1787) 8월 2일(정유) --울산 부사(蔚山府使) 유한위(兪漢緯)가 입시(入侍)하였다.
정조13년 기유(1789,건륭 54)
4월1일(정해)
정사가 있었다. 이조 판서 이갑(李)이 나왔다.
○ 이원채(李元采)를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정재원(丁載遠)을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삼았다.
정조 14년(1790) 9월 7일(갑신) 정사가 있었다. 이조 판서 홍양호(洪良浩), 참판 홍병찬(洪秉纘)이 나왔다.
○ 이철모(李喆模)를 대사간으로, 송전(宋銓)을 사간으로, 김희채(金熙采)를 헌납으로, 이언호(李彦祜)ㆍ성종인(成種仁)을 부교리로, 박종래(朴宗來)를 부수찬으로, 오재순(吳載純)을 판의금부사로, 김상기(金相虁)를 가감역(假監役)으로, 서탁수(徐琢修)를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53 정조 14년(1790) 11월 10일(병술) 정사가 있었다. 이조 판서 오재순(吳載純), 참판 김광묵(金光默), 참의 이홍재(李洪載)가 나왔다.
○ 이경일(李敬一)을 대사간으로, 권회(權恢)를 헌납으로, 성종인(成種仁)을 교리로, 박기정(朴基正)을 부교리로, 박규순(朴奎淳)을 수찬으로, 민종현(閔鍾顯)을 예조 참판으로, 정재원(丁載遠)을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송재위(宋載緯)송재위(宋載緯)원문은 ‘宋載偉’인데, 《승정원일기》 및 《정조실록》 이날 기사에 의거하여 ‘偉’를 ‘緯’로 바로잡았다.를 청양 현감(靑陽縣監)으로, 홍술원(洪述遠)을 장기 현감(長鬐縣監)으로, 이민형(李敏亨)을 울산 부사(蔚山府使)
57 정조 16년(1792) 2월 21일(경신) 울진 현령(蔚珍縣令) 이병정(李秉鼎), 예안 현감(禮安縣監) 김이규(金履珪), 함경 중군(咸鏡中軍) 이원식(李元植), 평안 중군(平安中軍) 홍용건(洪龍健)을 파직하였다.
○ 의금부가 아뢰기를,“지난번 영남에서 봉진(封進)한 김이 엉겨 붙은 일로 인하여 도신을 엄히 추고하고 수령의 이름을 지적하여 장계로 보고하게 한 뒤 의금부로 잡아다 신문하여 감처(勘處)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방금 경상 감사 정대용(鄭大容)이 올린 장계를 보니, 전 경주 부윤(慶州府尹) 이병정, 전 진주 목사(晉州牧使) 김이규, 울산 현감(蔚山縣監)을 겸임하던 전 언양 현감(彦陽縣監) 이원식
68 정조 17년(1793) 6월 14일(을해) 울산 부사 임성운을 풍덕 부사(豐德府使) 정동협(鄭東協)과 서로 자리를 바꾸게 하였다
71 정조 18년(1794) 2월 22일(경진) 2차 정사를 하였다.
○ 윤사국(尹師國)을 대사헌으로, 홍응진(洪應辰)을 지돈녕부사로, 정창기(鄭昌期)를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삼았다.
73 정조 18년(1794) 2월 22일(경진) 이의일(李義逸)을 울산 부사로
“울산 부사(蔚山府使) 이의일(李義逸)은 ‘정사를 잘 수행하기에 충분한 자질을 지니고 있으나, 술을 삼가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恢乎游刃 勉哉節觴]’이고
91 정조 19년(1795) 12월 20일(정유 -- 이비(吏批)가 이성중(李性重)을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정조 20년(1796) 8월 30일(임인) 울산 부사(蔚山府使) 이성중(李性重),
정조 20년(1796) 8월 30일(임인) 정사가 있었다. 이조 판서 김재찬(金載瓚), 병조 판서 정호인(鄭好仁)이 나왔다.
〇 박재순(朴載淳)을 교리로, 이정인(李廷仁)을 울산 부사로
정조 20년(1796) 12월 15일(병술) 울산 부사(蔚山府使) 이정인(李廷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