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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마 7:13-15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2004년 2월 7일 토요일 밤, 저는 춤을 추며 밤 12시가 넘도록 찬송을 불렀습니다. 저는 '나도 다윗 왕처럼 성도들 앞에서 체면을 차리지 말고 춤을 추며 주님을 찬양하는 목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전날 다른 교회에서 설교할 때 주님이 내게 주신 메시지들이 생각났습니다. 그것은 거짓 선지자에 대한 메시지를 일부 포함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거짓 선지자에 대한 보다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계시가 저에게 임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을 설교로 준비하라.'는 감동이 왔습니다. 그래서 서재로 가서 새벽 1시가 넘도록 정리한 것이 이것입니다.
그리고 2004년 6월 13일 이날은 주일이었는데, 주일 낮예배 후 사역 팀들과 함께 이 책의 출판을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 책에 관한 여러 가지 환상들을 보여 주셨는데 사역 팀의 부팀장 김효경 집사님은 다음과 같은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로부터 굉장한 빛들이 내려오는데 그 빛 속으로 앞으로 낼 책으로 보이는 한 권의 책이 하늘 가까이로 들려 올라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주님께서 '이 책은 세례요한의 영성으로 쓰여진 책이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될 것이다.'라고 하시며 이 책이 계시적인 책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이 책의 한 부분인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라는 메시지에 대해 주님께서 굉장히 강력하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책에서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라는 부분이 펼쳐진 모습이 보이며 큰 기름 항아리에 가득한 기름이 계속적으로 부어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주님은 특히 이 메시지를 통해 강하게 일하실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이 환상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압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 나오는 메시지들은 대부분 하나님께서 저에게 계시적으로 부어준 것들입니다. 계시로 임한 것들만 모은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이 말씀처럼 저에게 강력하게 임한 말씀도 없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강하게 임했는지 이 말씀은 저의 온 영혼을 뒤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환상을 신뢰합니다. 이 환상에 의해서도 입증되듯이 이 메시지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이 시대를 향한 지극히 중요한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편견을 버리고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 그리고 이 부분을 진지하게 읽고 꼭 소화하시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1. 누가 거짓 선지자인가?
많은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 하면 '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의교회'를 설립한 조셉 스미스나 '제칠일예수재림안식일교회'의 엘렌 지 화이트 여사 같은 사람을 떠올립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1992년 10월 28일 자정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주장했던 다미선교회의 이장림 같은 사람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들도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거짓 선지자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사람들에게 거짓 선지자로 쉽게 인식되는 자들입니다. 그마만큼 이들은 덜 위험합니다. 그런데 마치 물속에 잠긴 빙산처럼 사람들의 눈에 감추어져 있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 수가 많고,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에 치명적으로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 관하여 알아야만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에 관하여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7:13-15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서 자기가 이리라는 것을 철저하게 숨깁니다. 양의 가죽은 예수님 당시 양치는 목자들이 즐겨 입던 옷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목자(목사)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행 20:29-30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를 '이리'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흉악한 이리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이리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양 떼를 아끼지 않습니다. 즉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좇게 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즉 자기 교회 성도로 만드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타협하고 "어그러진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자의 모습을 한 자들이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딤후 6:3)에 착념하는가? 아니면 "다른 교훈" 즉 "어그러진 말"을 하는가? 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여기서 "바른 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즉 사복음서에 천명된 말씀으로 특히 산상수훈이 그 중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복음서입니다. 결코 바울 서신이 아닙니다. 사복음서가 기독교 교리의 기초요, 바울 서신은 그 위에 건물을 세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회자의 메시지는 단순히 바울 서신과 일치해서는 안 됩니다. 사복음서와 산상수훈에 나오는 주님의 가르침과 일치해야 합니다.
또 바른 말은 "경건에 관한 교훈"입니다. 사람을 지적이고 교리적으로 만들고 경건하게 만들지 않는 교훈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을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으로 이끌어 참으로 경건하게 만드는 교훈이라야 바른 말입니다. 이에 반하는 것은 "어그러진 말"입니다. 어그러진 말은 사복음서에 나오는 주님의 가르침이 결여되어 있고, 경건에 관한 교훈을 결하고 있습니다. 특히 산상수훈에 나오는 가르침을 심각하게 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그러진 말은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대한 가르침이 빠진 메시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주의 종들이 진리를 전하되 부분만을 전하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즉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대해 침묵합니다. 예수님이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대해 말씀하신 직후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경계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참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길을 걸으라."고 외칩니다. 반면에 거짓 선지자는 자기를 좇게 하려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가도록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거짓 선지자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의 대사가 마귀의 대사로 변하여, 하늘로 가는 길을 가르치라고 명령받은 자기 실상은 지옥의 길을 가르치고 있다. ... 그들은 영원한 죽음의 길을 영생의 길이라고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자기들을 따라 좁은 길로 가지 말고 넓은 길로 가라고 한다. ... 거짓 선지자의 가장 뚜렷한 표준은 많은 사람이 가고 있는 넓은 길을 가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하늘로 가는 참된 길은 산상수훈 전체가 지적한 그 길이다. 그러므로 여기 지적한 그 길을 가도록 가르치지 않는 자는 거짓 선지자이다. 산상수훈의 전체 설교가 지적한 하늘 가는 길이란 곧 겸손, 애통, 온유, 거룩한 의욕,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선행, 그리스도를 위한 수난 등이다. 그러므로 이 밖의 다른 것을 하늘 가는 길이라고 가르치는자는 거짓 선지자이다."
로이드 존즈 역시 웨슬리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그는 "거짓 선지자는 그의 복음에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 거짓 선지자는 좁은 문을 들어가며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할 절대 필연성을 강조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나아가서 그는 거짓 선지자들이 설교 시에 침묵하는 진리들이 무엇인지를 폭로하였는데 그것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로이드 존즈는 대전제로 "거짓 선지자는 교리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어떤 모양으로 정체를 드러내는가?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에는 교리가 거의 없다. 그의 메시지는 항상 모호하고 일반적인 성격을 띤다. 그의 메시지는 교리를 특수화하여 하나하나 상세하게 열거하지 않는다. 그는 교리적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설교는 항상 매우 모호하다."
"성경 말씀은 귀에 걸면 귀걸이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된 이유는 거짓 선지자들의 일관성이 없고 모호한 설교 덕분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설혹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성경을 조화 있게 그리고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하늘의 빛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뱀의 혀가 둘로 갈라져 있는 것처럼 한 입으로 두 말을 합니다. 어떤 때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설교하다가 어떤 때는 "행함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혼란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의 설교의 특징입니다. 이와 같은 전제를 말한 후 로이드 존즈는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꼽았습니다.
(1)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결과 의와 공의와 진노에 대해서는 매우 드물게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말하나 그 밖의 것들은 말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들이 모두 관계를 맺고 있는 이 거룩하고 존귀한 분에 대해 설교할 때 그 아무도 두려워 떨게 하는 일이 없다. ... 그는 대체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 하나만을 강조하는데 곧 사랑이다."
(2) 거짓 선지자는 심판과 지옥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가 결코 강조하지 않는 또 다른 교리는 최후 심판과 버림받은 자들의 영원한운명이다. 유감스럽게도 지난 반세기 동안 최후 심판에 대한 설교는 많지 않았다. 그렇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와 같은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는다."
(3) 거짓 선지자는 죄의 사악성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죄의 사악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리고 죄가 그리 중대한 문제가 아니라고 암시한다. 그는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4) 거짓 선지자는 회개의 필요성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회개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의 교훈에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매우 큰 문과 천국으로 인도하는 매우 넓은 길이 있다. 여러분은 자신의 죄성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다. 여러분의 마음이 검은 것을 심각하게 여길 필요가 없어진다. 여러분은 그저 믿는다고 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청교도나 웨슬리나 조지 휫필드나 기타 위인들의 전도는 전혀 달랐다. 그들의 전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심판을 두려워하게 했고, 가끔 영혼들로 하여금 며칠, 몇 주, 몇 개월 간이나 고뇌하게 했다."
(5) 거짓 선지자는 성결한 생활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산상수훈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해 주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산상설교를 실천하지 않고 이 설교에 귀만 기울인다면 우리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 거짓된 가르침은 참된 성결, 성경적 성결에 관심이 없다."
(6) 거짓 선지자는 자기 기만의 위험성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안이한 구원과 안이한 생활 유형을 항상 제안한다. 그들은 자기 검토를 방해한다. ...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검토해 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항상 '예수를 바라봐야' 하고 여러분의 죄를 찾기 위해 자신을 보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을 검토하고 '자신을 시험해 보고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라!'(고후 13:5)고 한 산상설교의 이 마지막 대목을 똑바로 보라는 권면을 훼방 놓는다.
그들은 청교도들과 18세기의 위대한 지도자들 곧 웨슬리나 휫필드나 조나단 에드워즈 ... 같은 사람들이 가르친 자기 검토와 죄의 억제 과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 그들은 안이한 구원과 안이한 기독교 생활을 추천한다."
이것이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정통 교단에 속해 있고 아무리 큰 교회를 목회한다 할지라도 이와 같은 것을 빠트리고 설교하는 자는 누구든 거짓 선지자입니다.
한편, 위의 것들은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그러면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할까요?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와 같이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생명" 바꾸어 말해서 영생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넓은 문과 넓은 길은 "멸망" 즉 지옥으로 인도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이에 관한 메시지가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사람들은 사활적으로 중요한 이 좁은 문과 넓은 문에 대하여 착각해 왔습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넓은 문"은 불교, 유교, 힌두교, 회교, 무신론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들도 기독교를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면 당연히 자신이 좁은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자신들의 회중이 대부분 천국에 갈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문맥으로 보아야 합니다. 좁은 문에 대한 말씀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산상수훈이라는 예수님의 대표적인 설교의 결론의 시작 부분입니다. 산상수훈은 하나의 설교인데, 설교에 서론 본론 결론이 있는 것처럼 산상수훈에도 이 세 가지가 모두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서론은 팔복입니다. 팔복은 뭐냐?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즈가 잘 지적한 대로 그리스도인은 팔복의 사람입니다. 만약 팔복의 특징이 그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팔복을 뒤로 좁은 문을 언급하기 직전까지의 모든 내용이 바로 산상수훈의 본론입니다. 본론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부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기독교 교리에 동의하고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회개와 중생을 통해 변화된 팔복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소금이요, 빛인 것입니다.
곧이어 예수님은 "율법이 폐해지지 않았으며 율법을 완전케 하러" 즉 율법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러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율법의 완전한 의미를 몰랐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갖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리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면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는 것을 들었으나, 간음치 말라는 것을 들었으나 ...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을 들었으나"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율법에는 이런 말이 없습니다(마지막 조항에 주의하라).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히 십계명을 말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십계명에 대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불완전한 이해와 가르침을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이렇게 표면적으로 즉 문자적으로만 이해했기 때문에 회칠한 담과 평토장한 무덤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속은 닦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고 정죄하신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율법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를 다루면서 동시에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형제를 대하여 노하지 말고, 라가라 하지 말고 미련한 놈이라 하지 말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말라." "맹세가 필요 없을 정도로 진실한 자가 되라." "이웃뿐 아니라 원수와 핍박자까지도 사랑하라."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것이 단순히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하나의 덕목이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가늠하는 결정적인 요인 중의 하나임을 지적합니다. 즉 예수님은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했다.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한눈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합니다. 이 외에도 맹세가 필요 없는 진실 역시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한다."는 말씀이 있고, 원수 사랑 역시 요한일서 3장 14-15절이나 마태복음 18장 34-35절 말씀과 연결지어 볼 때 그것을 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기도, 금식,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되지 말 것을 경고하시며, 또 재물과 하나님 사이에서 누구를 섬길 것인지 선택해야 하며, 염려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셨는데 시간 관계상 다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모두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요인들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마 23장, 마13:22, 눅21:34-36, 고후7:10).
그러므로 좁은 문과 넓은 길은 불신과 믿음 혹은 타종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나타낸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들 중의 일부는 산상수훈 전체에 묘사된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을 걸어갈 것이지만, 상당수는 예수는 믿지만 산상수훈을 따라 살지 않고 자기 편한 대로 사는 넓은 길로 걸어가게 되리라는 것을 뜻합니다.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가는 사람도,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행하는 사람도 모두 기독교인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그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도 구원받는 자가 많을까요? 아니면 적을까요?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다시 확인되는 것처럼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설교도 잘하고 다른 것은 잘 가르치는데 그의 설교에 좁은 문과 좁은 길이 빠져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가르침을 받는 영혼들에게는 얼마나 치명적이며, 위험한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단순한 영양 결핍이 아니고 영혼들을 멸망으로 이끌 수 있는 매우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아무리 강해 설교를 잘하고 제자훈련을 잘 시키고 교회가 커도 심지어 각종 성령의 은사가 있어도 그의 설교에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대한 명백한 가르침이 없으면 그는 거짓 선지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이라는 설교를 할 때에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대한 언급으로 결론을 시작하면서 결국 다음과 같은 말로 매듭을 지으신 것입니다.
마 7:15-27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울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이제 왜 설교에 좁은 문과 좁은 길이 빠진 설교자들이 거짓 선지자인지 그 이유를 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주의 종들은 자신이 거짓 선지자인지 아닌지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도 알았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