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 (이음전)
아버지의 누나 혹은 여동생인 여자들,
한 가문의 딸들이지만 나보다 한 대(一代)먼저 세상에 온 분들이다.
혈통 중심으로 생각해도 고모들과 나는 가장 가까운 직계 육친이다.
그러기에 품고 있는 사랑 또한 부모와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일까?
아직 결혼의 의미도 미처 모르던 어린 나는 더없이 다정한 그녀들과 영원히 한 지붕 아래에서 살뜰한 보살핌을 받기만 하며 살줄 믿었다. 그런데 고모들이 혼인을 하므로 집을 떠나면서 아! 이렇게 해서 식구들도 헤어지는구나, 나만 외톨이가 되어 남겨지는 구나라는 걸 알았다. 고모들의 혼인은 곧 나와의 결별이기도 하지만 태산처럼 든든한 빽이 사라지는 일이었다. 고모없는 집안은 얼마나 망망하고 아득했던지.
발목까지 졸졸 물이 흐르던 도랑가에서 큰물 때 떠밀려온 예쁜 조약돌을 줍거나 고무줄놀이에 빠졌다가도 어스름 해질녘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면 고모의 부재가 실감되었다. 어둑한 빈 방 구석에서 외로움이 이제 무엇인지를 안다는 듯 어린 계집아이는 눈가를 적시곤 했다.
나이 차이가 많으니 고모들과 내가 뒹굴며 보낸 추억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조건 없는 내리사랑으로 살뜰하게 보살펴 주고 아무것도 아닌 작은 나의 몸짓 하나, 말 한 마디에도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 빙그레 웃고 사랑가득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는것,
삶에 찌든 거친 말이 아닌 옛날 처녀들이 사용하던 고운 언어로 상냥하고 조용히 훈계 한다거나 공부를 봐주고 조금도 예쁘지 않은 나를 꾸며주는 일에 주로 공을 들였다. 작은 고모가 깎은 단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다시 막내고모는 의자에 지루하도록 나를 앉혀놓고 컷트로 기교를 부렸다. 면도칼로 삐죽한 잔머리를 마지막으로 정리하다가 뒷목을 푹 베어 감당할 수도 없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나는 고모가 도리어 어떻하냐며 울부짖는 바람에 아프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때 너무 아팠지?” 라며 놀랐던 심정을 두고두고 회상하며 막내고모는 눈물을 글썽였다. 양재학원에서 배운 솜씨로 원피스를 뚝딱 만들어서 내 몸을 감싸는가 하면 그 시절에는 귀했던 주름치마까지 입혀주었다. 문학적인 소질이 다분했던 고모들은 늘 책을 읽고 포대 종이를 반듯하게 잘라서 무언가를 메모했다. 童詩를 많이 읽어야 예쁜 마음을 할머니가 될 때까지 유지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내 손을 꼭 잡고 지금은 고향의 어디쯤인가도 기억나지 않는 오솔길을 걸으며 작은 고모가 무슨 詩를 은율까지 섞어서 술술 외웠다. 눈으로 보지 않고 머릿속에 그렇게나 긴 문장을 담고 있는 고모가 나는 신기하면서 경이로웠다. 문학을 사랑하는 작은 씨앗이 내안에도 자리한다면 외가 쪽보다 틀림없이 고모들을 닮았을거라며 확신하곤 했다.
세 분 고모 중에 큰 고모는 출가한지 오래고 작은고모도 훌륭한 가문으로 시집갔다.
막내고모가 성질 고약한 남편을 만나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한다는 사실을 철들면서 자연스럽게 감지할 수 있었다. 전쟁 통에 피난처를 고향으로 삼고 살던 때이니 고모들은 흡족하게 공부를 하지는 못했다. 그 정도의 인품이라면 그러나 어떤 남자에게도 밑질 게 없다는 나의 생각은 팔이 안으로 굽는 것과 같은 이치인지.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못하는 나는 고모의 위태위태한 결혼 생활을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학창시절이나 그 이후에도 나는 고모들에게 자주 편지를 썼다. 대개 잔 소리쟁이 할머니의 흉이나 집안 소식이었지만 그맘 때의 젊은이가 가질 수 있는 번민을 하소연하는 글이었다. 본인의 자녀들도 있고 주부가 할 일이 오죽 많았을까만 고모들은 변함없이 긴긴 답장을 보내주었다. 토닥토닥 달래고 어루만져주는 따스한 문장들, 세상에 완벽한 내 편이 있다는 데에 다시 한 번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눈에 선한 작은 고모나 막내 고모의 개성 있는 글씨체도 불현 듯 나는 그리워지는 때가 있다.
남동생의 자녀들이 생기면서 나도 고모가 되었다.
소중한 걸 다 주어도 아깝지 않고 바라보기만 해도 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따로 살고 있으니 고모들이 내게 퍼부어주던 사랑과 견주지 못하지만 그 마음 알 것 같다. 쌀쌀해지면 감기는 걸리지 않았는지, 여식들이니 험한 세상에 여러 가지 조심할 사항을 제대로 숙지하고 다니는 걸까? 여드름 때문에 고민하던데 유명한 피부과에 다녀보라고 돈을 좀 보낼까? 그들을 향한 나의 짝사랑은 걱정으로까지 변하여 끝이 없다. 하지만 조카들도 과연 내게 내가 고모들을 평생 사모하고 생각만으로도 코끝이 찡하며 수채화 같은 감정일까? 뗄래야 뗄 수 없는 혈육의 정이야 있겠지만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 옛날처럼 숙질간이지만 부대끼며 한 집에 살지 않은 까닭도 있으려니와 생활 패턴이 지금은 복잡하고 시간에 쫒기기에 그렇다. 공부때문에 그나마 몇 되지 않는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사니 정을 쌓아가는 어떤 행위도 절대 부족하다. 방학이나 명절 때도 가족을 볼 수 없는 상황이나 구조로 되어있는 이유같다.
우리 집에 드디어 고모들이 온단다.
집안의 대소사에서 잠깐씩 얼굴 마주한적 있기는 하지만 친정과 결혼식장 같은 곳이었다. 내 집에 오려고 서로 날짜를 진작부터 맞추어 시간을 냈다니 나는 고맙고 감격해서 잠까지 설쳤다. 귀하다고 생각되는 음식 몇 가지를 준비해 놓고 아직도 도착 시간은 멀었는데 대문간에서 서성이며 고모들을 기다리는 마음이 설레어서 차라리 초조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를 제외하면 나의 집에 친정에서 오는 손님 가운데 고모들이 가장 고령이며 어른이다. 그녀들을 만나면 엄마와 해후한 심정이나 무엇이 다르리. 나이 지긋한 고모들이 찾아오기에는 교통 불편한 한적한 산골에 산다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차에서 먼저 내리는 작은 고모는 지팡이를 의지했다. 순간 가슴 안의 가장 크고 중요한 덩어리 같은 게 쿵! 하며 떨어졌지만 눈물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고모들의 보살핌을 받기만 하던 나도 중년의 대열에 들어선지 오래인데 고모 연배에 다리가 불편한 것쯤이야 라며 내 눈 안에 유독 크게 들어왔던 지팡이를 피하고 한 편으로는 합리화하고 말았다. 놀라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고모는 괜찮다는 말을 연신했다.
실로 몇 년 만인가?
거치적거리는 이 없이 고모들과 나란히 평화롭게 한 방에서 누워본지가 언제적인지.
애초에는 한 집에 모여 산 가족이었지만 장구한 세월동안 저마다의 터전을 일구느라 정신을 쏟던 사람들.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고난의 패자부활전을 통과한 후 다시 만나는 영광을 이룬 기분 이다. 그토록 고모들과 이런 오붓한 시간을 꿈꾸었건만 웬일인지 한 편 가슴은 자꾸만 서늘하고 눈물이 고이는 듯하다, 근원을 따라가니 그것은 나이와 함께 오는 부정할 수 없는 고모들의 쇠잔함이었다. 원활한 소화가 어려워서 음식을 가리고 다리 통증이 심하니 나지막한 동산에도 산책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사람의 일생이 이런 것인가? 라는 허탈한 물음이 수없이 고개를 처 들기도 했다.
휘영청 달은 순한 얼굴로, 눈빛으로 우리 셋이 누운 방을 부드럽게 응시했다.
일부러 추억 같은 걸 들추어내지 않아도 이야기만 시작했다 하면 저절로 그 모든 걸 공유하는 아주 편한 관계, 막내고모가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 작은 고모와 나는 막 웃고 동화되었다. 고모들은 여전히 감성이 풍부한 모습으로 詩를 천천히 낭송하거나 ‘옛날의 금잔디’ 같은 그리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특히 내가 문학과 손잡고 있다는 것을 기뻐했다. 내 나이가 몇 인데 철부지 시절의 나를 본인들에게 가두고 아까 먹은 소박한 밥상에도 칭찬 일색이다, 그러다가 산골 살이에 혹 내가 고단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도 빼놓지 않는다.
중년의 나를 연세든 고모들이 끊임없이 관심가져주고 걱정하는것, 한 줌의 보잘것없는 일에 한 아름의 칭찬을 쏟아놓는 일. 혈연의 정은 바로 그런 것인가 보다. 내가 조카들을 예뻐하고 어느 순간 필요 이상의 걱정으로 잠 못 들듯이 情도 대를 이은 순환으로 이어지는가보다. 고모는 나를, 나는 조카들에게, 그들은 또 그들의 조카들에게 저절로 솟구쳐 나누는 정의 순환-- -.
한 때는 언니가 있는 친구들을 무지 부러워했지만 나는 복이 많아 언니 못지않은 고모들과 가족으로 만나서 가난하지만 어린시절 내내 정신세계나 상황이 윤택했다는 생각 지울 수 없다. 오랜 시간의 강을 지나서 나의 집에 온 고모들을 위해 획기적인 계획을 짜지도 않았다. 물이 흐르듯 고모들이 원하는 대로 허락된 사흘을 재미있게 보내고만 싶었다.
왜 그리 시간은 빨리 가는지.
나와 고모들이 사흘 동안 먹고 자면서 서로 주고 받은 다정한 눈길들, 믿음의 대화들을 나는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서 지금도 자주 그 사흘을 생각한다.
끝
(2010 8 9)
첫댓글 선배의 문학적 사고의 샘물이 되었던 고모들이시구나, 세월이 많이 흘러 그래도 중년의 조카집을 찾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하고 행복해져요. 여름 진한 추억을 쌓고 또 쌓은 선배의 행복에 나의 가슴도 뭔지 모를 뜨거움이 울컥합니다. 건강하세요
ㅎㅎㅎ글 쓸 일이 많지만 시간이 부족해요.들일도 너무 많고요.마음이 동해 밤을 꼬박 새웠어요.졸작 읽어줘서 고맙습니다.
친구야?.
인복 무지 많다....고모들의 시적인 부문에서도 ... 노모같은 고모님들의 품이 얼마나 포근 햇을까나~
맞아,우리 고모들은 참 내게 특별해.그래서 늘 감사하고 살아.
오랜만에 훌륭한 수필 한 편 읽고 갑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어느곳에 투고하셔도 손색없는 글입니다 선배님 일취월장 이라 말씀드린다면 실례일련지요 존경합니다
ㅎㅎㅎ 좋게 봐주니 고마워요.시간없음을 핑게로 그동안 글다운 글을 너무나 못쓰고 살았어요.글이 땡겨서(?)태풍오는 바람에 한 편 마쳤네요.인형네 태풍, 괜찮찮았지요?
참 애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좋은 수필이네요. 고모, 이모가 없는 저로서는 부러울 뿐입니다. 대신 가끔 단 둘이 놀러다니는 조카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요. 며칠 전에는 이 조카랑 큰딸내미와 통영에 다녀왔어요. 참, 좀전에 곰이 송금했을 겁니다. 맛난 오미자 액기스값요. ㅋㅋ 사실 그 말 하려고 들어왔다가 횡재한 듯 좋은 글 읽고 갑니다.
ㅎㅎㅎ 고맙습니다.휴가를 통영으로 다녀오셨군요.비오는 바람에 글 한 편 쓸 수 있었어요.글쟁이라며 너무 글쓰기에 소원했어요.
저도 요즘 글을 대여섯 편은 써야 하는데, 이렇게 게으름만 피우고 있습니다.
따뜻하고 잔잔한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이 밤, 우리 고모님들이 보고싶습니다.
세 분 모두 먼 나라에 계시는 그 분들이.........
아,인삼님이 들러주셨네요.다음 모임 때 만나면 특별히 더 반가울 거예요.그런 경우 종종 경험 하잖아요?좋은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반숙자 선생님이 계시는 음성은 축복받은분들이 사는 고장같아요.고맙습니다.
6.25로 아빠가 행방불명 되어서 고모 두 분이 무척이나 아껴주시던 어린시절이 생각나서 코 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네요. 음전님의 따스하고 넉넉한 마음은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하셨기 때문임을 알것같네요. 고운 글 잘읽었습니다.
안개성님!고모들이란 어느 가정에서건 참 다정한 사람들이지요?그런 고모들을 두어서 행복해요.안개성님도 고모를 두신 분이였군요.살아 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역시 관록이 있으시군요 글 재미 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