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
고린도후서10:1-18
교회 안에 자랑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사람이 어떤 경우에 자랑을 하게 됩니까?
자신이 가진 것을 남과 비교할 때 자랑이라는 것이 튀어 나옵니다.
또한 자신이 노력하여 얻은 것이 있을 경우 자랑할 것이 있겠지요.
어떤 사람은 돈 많은 것을 자랑합니다.
아니면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자랑합니다.
이런 사람의 경우엔 돈 없는 사람을 무시하기 일쑤입니다.
자랑을 하는 사람은 항상 육신에 속하여서 육신의 싸움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별론 놀라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성도의 출발이 어디입니까?
바울이 고린도 전서1장에서 분명히 말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출발해서 십자가로 끝을 맺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십자가로 출발해서 자기 자랑으로 나아가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자기 자랑이 나옵니까?
남과 비교해 보니 자랑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한번 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어떤 사람들이 바울을 비방합니다.
그 비방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떠나 있으면 너무나 담대하게 글로 편지를 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굴을 대면하면 너무나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 어떻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말입니다.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지, 얼굴을 안보면 담대하고, 얼굴을 보면 겸손한 모습을 보인다면 누가 이런 사람을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고린도 교회에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심하게 비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이야 말로 어떤 싸움을 하는 자들인가를 분명히 밝힙니다.
그것은 육체대로 싸우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들이 싸우는 싸움은 비록 육체에 거하여 살고 있지만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육체대로 싸움을 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지금 고린도 교인들 중에 이런 자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흔히 이런 판단을 많이 합니다.
육신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육신대로 판단하는 것이 너무 쉽고,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육체대로 싸움을 하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도한 육체대로 싸움을 하는 자들의 모습은 많은 이론, 견고한 이론을 갖고 있습니다.
너무나 논리적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긍할 만한 논리를 갖고 다가옵니다.
하기야 그럴 것이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론이야 그렇지 않겠습니까?
인간 이성에 가장 부합한 것들로 짜 집어 만들어 놓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학교에서는 아니면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인간들의 이론들을 한번 보시면, 모든 것이 수긍할 만한 논리가 아닙니까?
물론 이 이론들이 다 통일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이론들이 공통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이런 이론들은 자신들을 굉장히 높입니다. 즉 자랑할 것이 많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복음은 이런 것들을 완전히 부수어 버립니다.
자랑할 것이 없도록 만들이 버립니다.
결국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게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위력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다양하게 이론을 꺼집어내고, 그것을 주장한다 할지라도 복음 앞에서는 모든 것인 산산이 부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부수어 집니까?
바로 성도들입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이런 고집과 세상의 이론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복음을 통해 이런 것들은 박살나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께 복종하는 일만 남게 됩니다.
성도들이 가장 갖기 쉬운 문제가 무엇인고 하면, 바로 7절입니다.
자기만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십자가 복음이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삶, 즉 믿음으로 사는 삶이 기준이 되어 남을 판단하게 되니 자신만이 참 복음을 믿는 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하나의 현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을 향해 강하게 질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하게 질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망하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편지를 쓸 때 이미 주님의 영을 받은 자들만이 자신이 말에 복종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편지의 목적이 영생과 관련 있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당연히 세우는,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영생과 관련 없는 자는 어떻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글을 읽으면서 망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무리 일관성이 없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는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
즉 주님의 영을 받은 ,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항상 십자가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랑을 하는 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관련 없는 것을 보고 비교하며, 자랑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15절을 보면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복음이 위대해 져야 하는 데, 바울 일행이 위대해 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나 이 말은 바울을 섬기고 높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인 것이 높이 알려지면 얼마나 널리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관심은 오직 하나, 복음이 전파되어지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주안에서 자랑하는 자의 제대로 된 모습이 아닙니까?
이제 18절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아무리 좋은 이론을 갖고 있고, 올바른 행동을 한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인정치 않으시면 헛빵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자기를 칭찬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옳다고 인정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야 말로 어리석은 자의 전형적이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복음에 복종하는 자, 십자가만 증거하는 자입니다.
환상과 계시
고린도후서12:1-10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환상을 좋아하고, 하늘로부터 직접 내려오는 직통계시를 좋아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계시야 엉뚱한 것입니다.
드라마 장길산이라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 여환스님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미륵사상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미륵의 세계는 결국 인간이 임금을 갈아 치우고 완전한 새 세상을 연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을 이룬다는 것이지요. 그 세계는 용화세계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미륵사상은 기독교의 메시야 사상과 거의 비슷합니다.
미륵님이 오셔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미륵은 우리들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드라마에서는 실패로 끝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곳에서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미륵님의 계시입니다.
징조이지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좋아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환상을 보아야 하고 계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눈을 부릅뜨고 본문을 탐색하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신비한 내용이 들어 있을까?
그래서 본문을 읽어 보지만 무슨 우리가 기대하는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낙원으로 이끌려 갔다는 말 외에는 그 낙원이 어떻더라 어떻더라라는 내용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분명 환상과 계시를 말한다고 해 놓고 하는 말이 알맹이나 다 빼놓고, 낙원 갔다 왔다는 내용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본문을 통해 무엇인가 호기심이 발동한 사람들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 본문을 통해 추론해 들어갑니다. 낙원이 어떨까?
그래서 계시록을 뒤적이면서 참으로 낙원다운 천국을 꾸며 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꾸며본 낙원은 결국 미륵님이 오시는 나라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인간들이 주인되는 참 세상 자유와 평등의 나라, 자신의 탐욕을 마음껏 이룰 수 있는 나라, 자신들의 평소 바램의 욕망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 땅에서 미리 이런 나라를 꾸며 보려 합니다.
우리들이 그들이 꾸민 나라를 이렇게 들여다보면, 어떤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들어 있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탐욕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곳에는 인간들의 탐심만 가득하게 담겨 있습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하면 높은 자리 차지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자리를 계속 고수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존경을 받을까? 인정을 받을까?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든 내 편으로 끌어 당겨볼까하는 것들이 가득 가득 들어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보게 되면 엘리야와 대결하면 바알의 선지자들이 나옵니다.
이들이 어떤 행동을 합니까?
25-28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한 송아지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놓지 말라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어야 할 것인지..
하매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딸 피가 흐리기 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놀랍지 않습니다. 신을 섬겨도 얼마나 제대로 섬기고 있습니까?
자신의 몸을 전혀 아끼지 않습니다.
모든 정성과 희생을 다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말입니까?
자신들의 기도의 응답을 위해서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신의 신들의 능력입니다.
이들은 왜 이것을 필요로 합니까?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유지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어떻습니까?
심판하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를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인간들의 탐욕을 위해 환상도 만들어 내고, 계시도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환상과 계시는 인간들이 너무너무 할만하고 좋아할 만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새벽기도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어, 새벽기도를 통해 자신들의 탐욕을 이룬다고 떠들어 댑니다.
어떤 곳에서는 제자훈련이라는 것을 가지고 나오고, 어떤 곳에서는 공동체를 가지고 나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가지고 나옵니다.
십일조를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가득 가득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주장하는 것 가운데 성경에 없는 것들을 거의 없습니다.
성경에 있는 것을 인용해서 환상과 계시라고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런데 이런 환상과 계시의 특징은 모두가 다 인간의 탐욕을 자극하여, 인간의 욕망을 마음껏 발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고상하게 말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환상과 계시를 말한다고 해 놓고 환상과 계시에 대한 우리의 기대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셋째 하늘에 간 것, 즉 낙원으로 들어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이제 그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셋째 하늘이 어떻더라. 즉 천국이 어떻더라, 아니면 말할 수 없는 말이 어떠어떠하더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갑자기 말 꼬리를 돌립니다.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라고 말입니다.
이 말을 보게되면 바울을 향해 대적하는 자들이 무엇을 자랑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틀림없이 천국이 어떠니 저떠니, 하나님의 환상이 어떠니 계시가 어떠니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런 것들을 간단히 언급하고는 곧바로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거리로 내세웁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생각에도 바울에게 이런 요구를 하고 싶을 것입니다.
좀더 이야기 해 주세요. 낙원이 어떠했습니까?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는데 그 내용을 좀 말해 주세요 라고 말입니다.
인간의 호기심과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 낙원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말이 무엇인지도 알수 없지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약한 것들을 자랑하는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들의 탐욕을 환상과 계시로 채우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야 말로 천국의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러 있는 자가 곧 하나님의 백성이요 천국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바울도 여전히 육신에 매여 육신의 연약함이 없어으면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죄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합니다.
주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진다는 사실 말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언제 발휘될 수 있습니까?
죄인에게서 발휘될 수 있지 의인에게 발휘될 수 있겠습니까?
인간에게 능력도 있고 힘도 있고, 부족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의 능력이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죄인들은 자꾸자꾸 힘을, 능력을 원합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려고 합니다.
교인들이 왜 기도를 합니까?
자꾸 채워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바울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응답은 전혀 뜻밖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 말씀에 수긍하겠습니까?
아마 교회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잘 알고 있는 본문이 오늘 본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자기 위로를 하기 위해 본문을 해석합니다.
즉 이런 본문을 보면서도 자신의 탐욕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10절 말씀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여러분, 십자가의 능력을 나타나게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무엇을 구하려고 합니까?
힘, 능력 등, 환상과 계시를 구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가 약한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약하다는 말은 돈이 없어야 된다. 아니면 병이 들어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은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구함은 오직 십자가의 긍휼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자는 십자가의 능력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힘이 되는 돈이요, 권세가 될 수 있는 환상과 계시입니다.
여러분, 환상과 계시를 구하지 마시고,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 온 몸을 통해 증거되도록 기도하는 주님의 참된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광명의 천사
고린도후서11:1-15
하박국 3:16-19절을 봅시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석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이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우리들이 이런 말씀을 보면 너무나 황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주의 백성을 구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주의 백성조차도 큰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괜히 기분이 나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하시려면 곱게 구하시지 왜 큰 환난 속으로 집어 넣어십니까?
하박국2:4절을 보면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의 눈에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바벨론이 쳐들어오고, 나라가 망하고, 기근이 들고,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 일은 믿음으로 사는 자도, 그렇지 않는다고 다 당하는 일입니다.
이럴 경우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이것은 정말 미친짓이다라고 생각지 않겠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미친 짓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옛적부터 그래 왔듯이 잘도 돌아가고 있는데, 무슨 주님의 심판이 어떻고,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냐고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믿고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주님의 오심에 함께 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야 모를까 믿음이라는 것을 주셔놓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 고난을 당한다. 죽음에 넘기운다. 왜냐하면 십자가 복음 때문이다. 그러나 의인은 오직 이 십자가 복음 하나만을 믿고 살아간다고 하시니 이거야 말로 미치고 환장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믿고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아 장수하고, 자식이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어려움이 없고, 고통이 없고, 고난이 없고,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이런 인생을 산다고 하면이야 모를까 이거야 있는 것 까지 빼앗아 가는 만유를 다스리시는 주님이라니 이런 분을 믿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니 여러분 믿음이 없는 자, 즉 십자가 지신 주님의 영을 받지 않는 자야 말로 참으로 이 세상에서 정신이 온전한 자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제대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너무나 정상적이지요.
이런 사람들을 우리들은 교회라는 곳에서 많이 볼 수 있지요.
믿어 열심히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전도하고 헌금 많이 하여 이 땅에서 복을 누리고 죽어서는 천국가려고 하는 자들 말입니다.
물론 이런 마음을 가진 자들은 교회에 나온 순진한 자들이 그렇지요.
그러나 교회전문가들이 되어버리면 천국은 없습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곳은 없습니다.
수십 년을 믿어 보았자 말짱 돈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돈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냐? 건강이 최고지.
말이야 그렇지요. 돈이 많아도 아프면 별수 없지요.
그런지 세상은 어떻습니까?
이런 말이 통합니까?
아닙니다.
돈이 많아야 병원에 가고, 값비싼 약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건강이 최고야 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자기 위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데, 매일의 생활이 밥 먹고 살기도 힘들다고 했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변에서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게을러서 그렇게 가난하지. 아니면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않아서 그렇게 가난하게, 갈 곳도 없이 목회생할을 하지.
세상을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지. 등등의 말을 듣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복음이라는 것,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매력적인 것이 아니라 참으로 죄인들을 아주 기분 나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처음 제대로 된 복음을 들었다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복음을 왜곡되게, 자기 편한 위주로 해석해 버리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그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4절을 보세요.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이들이 복음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시간이 잠시 흘렀는데, 이들의 마음이 미혹을 받고 있습니다.
그 미혹이란 다름이 아니라 너무나 인간적인 생각으로서의 미혹입니다.
창세기에 뱀이 이와를 미혹할 때 한 말이 우리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 아닙니까?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 말입니다.
우리도 할 수 만 있다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목회를 해도, 직장을 다녀도, 사회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님과 같이 된다면야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요.
그런데 희한한 것은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한자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사도이지요.
주님을 만났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정도의 사람이라면 왜 고생고생하면서 복음을 전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 도와 주시든지 아니면, 성도들의 섬김을 당당하게 확실히 받든지 하면 될 터인데 말입니다.
이 말이 이해가 됩니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춘향전이 있는데, 이 도령이 거지행세를 하고 나타났을 때 누가 이 도령이 암행어사라고 인정하겠습니까?
장원급제를 했으면 그 모습을 보여 주어야 사람들에 믿어 줄 텐데, 그 꼴이 거지 꼴이면 누가 그를 암행어사라고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모습이 사람들 눈에는 너무나 이상한 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예 이런 모습, 당당하게 헌금을 요구하고, 당당하게 성도들에게 명을 내리면 아예 사도다운 모습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잘 살아야 된다고 드러내 놓고 말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해도 청산유수같이 해야 합니다.
남에서 해를 끼칠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주님의 은혜로 사는 자들이니 말입니다.
위풍당당한 성도요, 위풍당당한 목사가 되어버립니다.
이런 자들을 향해 오늘 본문에서는 거짓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모습은 곧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단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인간들이 이런 모습을 좋아할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없으면 자신이 밀어주는 자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해 보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있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게 말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러니 나타난 현상을 두고 믿음이 어떻고 저떻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여전히 이런 모습이 툭툭 튀어 나옵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통장에 돈이 일원도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염려하지요.
그러나 염려하면서 사는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회개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의지할 분은 십자가 지신 주님되신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앞서 언급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이들은 이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힘과 용기와 돈과 지혜를 주시면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들도 기도를 합니다.
도와만 주세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기도를 하지요.
이들은 주님의 긍휼을 필요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참으로 위풍당당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거지처럼 살아갑니다.
구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들이지요.
약한 것을 자랑함
고린도후서11:16-33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것 중 하나가 자랑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보통 무엇을 자랑합니까?
가진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이 되었든지, 아니면 정신적인 것이 되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보면 항상 자랑이라는 것이 툭툭 튀어나옵니다.
언제 자신의 차례가 될지를 기다려서 자랑합니다.
그러면 그 자랑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가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많은 것을 자랑합니다.
아니면 권세가 있는 것을 자랑합니다.
아니면 자신이 얼마나 선한 사람인가를 내세우면서 자랑합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릴 때부터 잘 지킨 관원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 앞에 너무나 당당하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렇게 질문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자신이 무엇을 행해야 얻을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이와 동시에 이 사람은 무엇을 행하는 것 같으면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얼마든지 다 지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당신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든지 나는 영생 얻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내가 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첫째 율법을 지키고, 둘째는 자신이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셋째는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겠습니까?
어쩌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셨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며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랑이라는 것이 예수님 앞에서는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그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예수님을 따르면 자랑할 것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만일 이런 인간이 이 땅에 있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영생이라는 것이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시면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인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자랑이라는 것으로 돌아가 생각해 봅시다.
이렇듯 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자신이 자랑할 거리를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와 똑같은 자들이 등장합니다.
자신의 혈통을 자랑합니다.
자신들이 선민임을 자랑합니다.
그러면서 저들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은 너무나 고상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니 자랑할 만 하겠지요. 그리고 그래야만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갈 것이 아닙니까?
이들의 자랑이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을 받아 놓고 하는 말이 자신들의 현 모습을 자라났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길을 가는데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지가 너무 너무 불쌍해서 데려다가 먹을 것을 주고 새 옷도 주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거지가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나 얼마나 잘난 사람인가?
이게 제 이야기가 아니라 에스겔 16장을 보면 나옵니다.
함께 봅시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여 예루살렘으로 그 자증한 일을 알게 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사람이라 너의 난 것을 말하건데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너를 돌아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긍휼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꺼린 바 되어 네가 들에 버리웠느니라 내가 네 곁으로 지나 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가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 내가 너로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칼이 자랐으니 네가 오히려 벌거벗은 적신이이더라”
들에 버린 자를 살려 주고, 적신인 자에게 고운 옷과 패물을 주었습니다.
14절을 봅시다.
“네 화려함을 인하여 네 명상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15절을 보세요.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인하여 행음하되 무릇 지나가는 자면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본래 어떤 자였던 지를 생각지도 않습니다.
지금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자들의 모습이 똑 같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어서 자신들의 혈통과 조상과 과거 역사를 자랑합니까?
오늘날도 이런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교회라고 이름을 붙인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설립 몇 주년이니, 목사 임직 몇 십 주년 기념이니 등등 자신들의 현 모습을 자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곳에서는 십자가는 무시당하고 멸시당합니다.
만일 그런 교회가 만일 성도들의 숫자가 두 명 밖에 없다면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목사가 박사학위 받았다고 축하예배니 하고, 참으로 어찌 그리 죄인들은 시대가 바뀌어도 똑 같은 모습을 하는 지 말입니다.
이런 모습은 죄인들의 본능적이 모습니다.
죄인들은 내세울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들고 자신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그 긍휼만을 자랑합니다.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 후서 11장에서 하는 자랑은 무엇이라 말입니까?
여러분 자신의 연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지금이야 성도들은 이런 생각을 같습니다.
바울처럼 고생고생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야 말로 참으로 칭찬받을 만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이런 것이 깔려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상해 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사실 고난은 반기지 않습니다.
거부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내가 왜 굳이 걸어가야 하는 가입니다.
이런 것은 사실 이 땅에서 자랑거리로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멸시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지금 하는 자랑은 세상의 것을, 땅의 것을 갖고 자랑하는 자들을 공격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을 들추어내는 것이지요.
그러니 바울은 지금 저들을 향해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주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으로 인해 자신이 고상해 진 것도 아니요,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것도 아닙니다.
재물이 많아진 것도 아닙니다. 건강해 진 것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합니다.
여러분 성도는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입니다.
왜 성도가 십자가만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날마다 매일 매 순간 확인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자가 성도입니다.
이런 사실을 잊어버리고 십자가의 긍휼을 무시하며, 땅의 것을 가지고 자랑하려고 덤벼더는 자는 다 마귀의 종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사도의 표된 것
고린도후서12:11-21
바울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자신이 어리석은 자, 즉 자신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자들의 말과 같은 말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러면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아주 비꼬는 듯한 말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왜 바울이 칭찬을 받아야 마땅합니까?
지금 고린도 교인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환상과 계시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해 바울이 말을 했으니 당연히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칭찬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2천년 전에나 지금이나 죄인들의 성향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얼마나 가까운 시대에 살고 있었는가?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존경하는 사도바울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들었다 하더라고 이런 것들은 다 부질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과 표적을 보여 주셨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친히 증거하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오직 택한 자만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다 들었고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과 동일한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1-4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에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오늘 본문 12:11-12절을 다시 한번 읽어 봅시다.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 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여러분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의 표된 것이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라면 고린도 교인들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불신합니까?
그 이유는 바로 참음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헌금을 자신이 받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15절을 보세요.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위하여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재물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전했으니 너희는 헌금을 내 놓아라는 식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부모된 심정으로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지, 아이가 부모를 위해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을 위해 재물을 허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시비거리가 된 것입니다.
어찌 그리 예수님 당시와 별 차이가 없을까요?
물론 차이는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상하다고요
그러나 이것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8장 이후를 보게 되면 교회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상세히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용서를 모르는 자가 교회 안에 있을 수 있고, 용서받지 못할 강퍅한 마음을 가진 자가 있을 수 있고,
19장에서는 먼저된 자로서 나중될 자가 있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0장에서는 은혜를 전혀 모르는 용서함을 받은 자가 나옵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22장에서는 잔치에 청함은 받았는데 예복이 없는 자는 지옥에 던지우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앞으로 교회 안에서 핍박하는 자와 핍박 받는 자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미리 다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비록 복음을 전했다 하더라도 바울을 향해 대적하는 자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가룟유다처럼 말입니다.
제가 너무 심한 말을 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재물을 허비하면서 까지 복음을 전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여기까지 인정하는 자들은 있습니까?
그런데 이제 다른 것을 갖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16절을 봅시다.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 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이것이 말이 됩니까 되지 않습니까?
말이 됩니다.
그 이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고린도 후서를 계속 보고 있으면서 어떤 마음이 듭니까?
바울의 말을 반드시 들어야 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바울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결국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하는 일이란 자신의 종을 만드는 일 밖에 없지 않습니까?
결국 자기 종을 만들려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렇게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바울의 관심은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아느냐고요.
바울의 삶을 보세요. 그리고 그가 전하는 내용, 말하는 내용을 보세요.
어디에 관심이 있습니까?
십자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중심성을 저들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과 똑같은 자들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탐욕을 위해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니 다른 자들도 다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다 보니 오늘날도 이런 일들이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을 비판하는 저같은 비판을 하게 되면 결국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고 하면 절대 진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 진리는 없고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니까 대충 서로를 인정하고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자신이나 자신에 보낸 사람들이 성도들의 이익을 취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바울이 말하니 , 또 어떤 인간들이 등장할까요?
보아라. 바울은 헌금도 받지 않았고, 그와 함께 한 자들도 그렇지 않느냐?
당신들도 바울을 본받아라.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사례를 받고 복음 전하는 것을 비판하는 자들이 있는데, 참으로 할 말이 없습니다.
고린도후서11:9절을 보게 되면 바울이 마케도냐로부터 온 형제들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무엇이든지 시비를 걸어 십자가의 복음을 헛되게 만들어 버리려고 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처음에는 환상과 계시를 갖고 시비를 걸더니 이제는 별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이들 눈에는 십자가의 복음이 너무너무 싫습니다.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자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을 때 이들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면 믿겠다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부정하고 들어간 것입니다.
지금 바울의 대적자들도 이와 흡사합니다.
그런데 19절에서 21절을 보면 제가 지금까지 말한 것과 다르지 않느냐라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대적자들은 완전하게 대적자의 모습으로 드러났지만 이들을 확실하게 그렇지 않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19절 끝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이렇게 말하면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도 바울의 사랑의 대상이요 진정한 성도로 여기는 자들이 아닌가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지금까지 바울이 한 말, 아니 오늘 본문만 가지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본문을 보면서 이런 말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무 매정하시다. 좀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울같이 오늘 본문 19절에서 하는 말과 같이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십자가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니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철저히 버리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 뜻을 준행하는 자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좀더 온화하고, 예수님은 너무 심하시더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마귀의 사고방식이지요.
그러니 오늘 본문을 이해할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비추어서 말씀을 보아야 제대로 본문이 보이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 구원 위주로 오늘 본문을 보신다면, 마치 바울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해 안달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저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충만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인간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능력은 좋아합니다. 표적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능력과 표적을 좋아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거해 보려고 그런 것들을 바랍니다.
그러나 자신이 죽은 자임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산자라는 사실은 그렇게도 싫어한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 보았습니다.
이 땅에서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은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탐욕에 맞추어 살아가는 자가 있다면 그런 자들을 사람들은 아주 좋아합니다.
여러분들은 십자가가 좋습니까? 싫습니까?
약한 증인
고린도후서13:1-13
사람들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제가 요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종종 만나게 되는데, 그들의 교회에 대한 생각은 굉장히 적대적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교회 다니는 자신의 친구들이나, 아니면 목사가 된 자신들의 친구를 보면 예수님을 믿을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럴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눈에 비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보면, 개판이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는 짓을 그 사람들이 그대로 다 한다는 것입니다.
술도 잘 마시고, 심지어 룸살롱 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여자를 왜 그렇게 밝히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이뿐만 아닙니다.
외부에서 보는 교회는 탐욕덩어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너무 충격적입니까?
물론 제가 지금 몇 사람의 말을 들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마는 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듣기에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 자신도 일전에 교회에 나갔다는 것입니다.
정말 순전한 마음으로 나갔는데, 헌금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이름을 일일이 거론해 가면서 헌금확인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은 충실한 유교집안에서 태어 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교회에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는 순전한 마음으로 새벽기도도 열심히 나가게 되었고, 예배도 열심히 참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 연말에 자신을 갑자기 교사로 임명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사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알면 알수록 이것이 믿음의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거의 교회는 가지 않고, 혼자 신앙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물론 가끔 교회에 나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고린도 후서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듭니까?
오늘날 교회와 비교해 볼 때 어떻습니까?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아니 똑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고린도 교회가 그래도 더 낫다라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오늘날 교회가 더 낫지 않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아니면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바울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13장 1절을 봅시다.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갈 터이니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왜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까?
이 말은 마태복음18장에 나오는 예수님을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마태복음18장을 봅시다.15-20절을 보겠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형제가 죄를 범함에 대해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가를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분명 그 대상은 형제입니다.
형제라고 여겨지는 자요 함께 형제자매로 불리든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은혜를 안다고 하는 자가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바울은 두 번이나 참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가면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이 너무 심하게 들립니까?
바울이 무엇인데 다시 가면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울의 권위가 아닙니다.
3절을 보세요.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주님의 권위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울이 약한 모습을 보이니까 우습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이들은 바울을 향해, 이렇게 말했던 모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보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바울 꼴을 보아하니 별것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의 모습 같으면 우리가 수긍할 만한데, 당신은 항상 약한 모습, 사람들이 보기에 멸시당할 만한 모양으로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서 말씀하시는 말씀을 보여 보라는 것이지요.
보여 보았자 별 것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바울은 의외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희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고린도 교인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능력으로 살아나시어 주가 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약한 자 이지만 너희를 향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님의 능력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참 성도의 모습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약한 자의 모습으로 이 땅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참으로 볼품없이 살아갑니다.
아무런 힘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약한 자로써 주님의 능력을 행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 능력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18장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신들의 삶 속에서 그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약한 바울을 통해 두 쪽으로 갈라집니다.
한 쪽은 용서받은 자로, 한 쪽은 용서받지 못한 자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5절을 말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주를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이 말씀은 마태복음18장의 말씀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죄에 대해 지적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저들 마음에 계시지 않는 것이지요. 이것은 곧 버리운 자의 전형적이 모습니다.
마음이 강퍅한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기에 나오는 바로 왕과 같은 모습입니다.
바로왕은 여호와의 능력을 눈으로 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강퍅하여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 놓고, 그 십자가를 경험해 놓고, 그것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참으로 날마다 주님의 긍휼을 구하며 그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버리운 자가 아닌 증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계신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계신 증거가 무엇입니까?
방금 말씀드린 바로 그것입니다.
마음을 낮추는 자, 겸손한 자, 강퍅하지 않는 자의 모습이지요.
6절을 봅시다.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현재 바울 일행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약한 자의 모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버림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 성도라면 이런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약한 자로서 이 땅을 살아갑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이렇게 극단적인 표현을 합니까?
고린도 교인들이 미워서 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7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우리가 버리운 자 같을 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그러면서 8절을 말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이 말씀은 다시 마태복음18장으로 가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1-35절을 보게 되면 용서 받은 자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말합니다.
지금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위해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면 이해가 될 법도 한데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화가 나지요.
그래서 용서할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저주만 퍼붓고 싶지요.
이게 우리의 심정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런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용서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자입니다.
이렇게 말하게 되면 우리는 또한 이런 의문을 갖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한발 후퇴한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심판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심판주이심을 증거하는 증인입니다.
증인으로서 그 긍휼을 마음껏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자신의 입장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이제 다시 가게 되면 완전히 갈라 놓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갈라놓음이 철저하게 용서받은 자로써 그 긍휼을 보여주는 모습으로 갈라놓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10절에 나오는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의 의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제가 처음에 몇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오늘날 교회의 문제와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교회를 향해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합니까?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약한 자의 모습을 보이며 주님의 긍휼을 받은 자답게 그 긍휼을 마음껏 보여 주면서 편지를 끝냅니다.
이것은 바울이 주님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증인입니다.
주님의 증인은 긍휼을 마음껏 보여주는 자입니다. 약한 자로써 말입니다. 그 죄악을 지적하면서 말입니다.
십자가 은혜 안에 사는 삶
고린도후서13:11-13
바울은 편지를 끝내면서 십자가 은혜 안에 있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삶이란 도대체 어떤 삶일까요?
첫째로는 기뻐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언제 기쁩니까?
사업하든 일이 잘 되었을 때 기뻐합니까?
아니면 자녀가 태어 났을 때 입니까? 자녀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할 때입니까?
아니면 남편이, 아내가 잘 대해 줄때 입니까?
물론 이런 일들로 우리들은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지금 말하는 기쁨은 이런 유의 기쁨이 아닙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기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고린도 후서를 보았듯이,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성도들을 책망하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단호하게 죄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충분히 드러났습니다.
이런 글 끝에 하는 말이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겠습니다.
여러분의 죄를 일일이 지적하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 권면 한 후, 여러분 기뻐하세요 하면 기뻐하겠습니까?
아마 이 땅을 살아가는 어떤 인간도 기분 나빠 할 것입니다.
이것은 병 주고 약주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지금 바울은 성도들의 삶은 기쁨의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기쁨은 인간이 노력해서 주어지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로 인해 주어지는 기쁨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앞서서 이들의 죄와 문제점들을 일일이 지적한 것입니다.
사실 기쁨이란 십자가 지신 주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기쁨의 이유가 자기 죄를 아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성도가 비록 약하고, 죄악 투성이 일지라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한가지 입니다.
바로 십자가 지신 주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자신의 죄를 말씀을 통해 일일이 지적당하면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놀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매주 모이면서 이런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이런 기쁨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날마다 얼마나 괜찮은 인간이 되어 가느냐? 아니면 앞서 언급했듯이 이 땅의 소유가 얼마나 늘어나는가? 아니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로 기쁨을 누립니다.
지옥가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오직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알므로 참 기쁨을 누립니다. 이것은 주눅들어 사는 삶이 아니라 자유로운 삶입니다.
여러분들도 자유로운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온전케 되며 라고 합니다.
여러분 방금 제가 주눅들어 사는 삶이 성도의 삶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말하는 온전케 되며 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기가 팍 죽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이 말 앞에 우리는 너무나 부족하고, 아니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개판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준은 누구의 기준입니까?
십자가 지신 주님의 기준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첫째 아담을 닮은 죄인들의 기준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 보세요. 온전케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무 생각이 안 납니까?
이거 문제 있습니다.
생각 없이 사는 것입니까?
흐르는 강물위에 떠서 흘러 내려가는 낙엽처럼 살아갑니까?
조금은 생각을 해 보면, 죄를 짓지 않는 쪽으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죄를 조금이라도 덜 짓는 쪽, 그래서 날마다 덜 죄인이 되어 가는 쪽으로, 점점 더 온전해 지는 쪽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교리를 보면 성화라는 것이 나오는데,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죄인은 이 땅에서는 온전히 성화를 다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죽을 때 이룬다는 것입니다. 말이 안 되지요, 인생의 행위가 그쳐지는 것을 보고 완전히 성화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살아 있을 때에는 인간의 행위를 갖고 성화 운운해 놓고, 죽으면 인간의 행위가 없는 것을 완전히 성화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6: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11절을 보세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
이미 성도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데, 무슨 인간의 행위를 운운할 수 있겠습니다.
사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인데.
성도는 날마다 자신이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자가 참 성도입니다.
이 믿음이 없이 자꾸 온전케 되려고 발부둥 친다면 참으로 이런 자는 믿음 없는 자요 성도가 아님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전케 된다는 말씀의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온전케 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자꾸 행위로 믿음을 대체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은혜를 자꾸 밖으로 밀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후 세 번째 위로를 받으며라고 말씀합니다.
당연히 위로가 되겠지요.
자신들의 행위를 본다면 도무지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심이 참된 위로가 됩니다.
자기 행위를 바라보는 자가 있다면 결코 바울의 편지가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짐이되고, 부담이 됩니다.
아하, 고린도교회 성도같이 살아서 안 되겠구나.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그래 저들이 한 나쁜 짓은 하지 않아야 돼. 헌금도 제대로 하고, 세상에서 깨끗하게 살아야지.
이런 식이 되어 버리면 하루하루 사는 것이, 직장 생활하는 것이 너무나 큰 짐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로 내가 산다는 것을 안다면 오히려 모든 것이 감사의 제목이 될 것이요.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일로서 즐거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봉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유로움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바울의 말을 통해 우리는 부담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더욱더 분명히 보게 됨으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바울은 네 번째로 마음을 같이 하라는 말을 합니다.
많은 교회에서 이 말씀을 지켜보려고 발부둥 칩니다. 그런데 마음을 같이 하라고 한다고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죄인이 아닙니다.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게 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제대로 아는 자들이 모여 있다면 그들이 당연히 한 마음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억지로 노력한다고 끼어 맞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우리 하나 됩시다를 설교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죄악을 다 들추어 내어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줄서기가 시작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무리들, 회개하는 무리들과, 더욱더 마음이 강퍅해 지는 무리들로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평안할 지어다 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평안을 찾아 일생을 헤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정이, 직장이 돈이, 건강이 자신에게 평안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세요. 이런 것이 다 있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평안은 어디에서 옵니까?
바로 주님의 사랑에서 옵니다.
요한 일서4:18절을 봅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스데반 집사가 어떻게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가족으로, 건강으로, 장수로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십자가 사랑을 온몸으로 받은 자로써 참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평안에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날마다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는데, 우리는 오히려 죽기를 무서워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내일 우리 사업이 망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 아이가 갑자기 죽으면 어떻게 될까?
등등. 많은 근심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탄복할 것인데 이 은혜를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참으로 근심에 차서 살아가는 하루하루입니다.
여러분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참 평안에 있습니다.
죄를 지었다고 불안하지 않습니다.
본래 죄인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십자가의 은혜를 더욱더 깊이 아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린도교인들이 만일 바울의 말을 듣고 받아들인다면 얼마나 큰 평안이 찾아오겠습니까?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모든 기쁨과 온전케 됨과 위로와 마음을 같이하는 것과 평안은 오직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이런 일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이런 기적을 여러분들이 맛보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