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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막내 동생이 결혼하고나서도 우린 15년이나 한 집에서 살았다. 게다가 우리 아이들이 결혼이 늦어 내게 손자가 없기 때문에, 우리 부부에게는 조카들이 손자나 다름없었다. 어린 조카들이 크는 모습을 비디오로 찍으며 늘어가는 녀석들의 재롱에 푹 빠졌었다. 우리 아이들이 모두 유학을 떠나자 다섯 살 된 조카 녀석을 데리고 산책을 하기도 하고 어린이 놀이터에서 아이가 노는 모습을 보면서 위안을 받기도 했다. 몸이 아픈 나를 유난히 챙기던 그 어린 녀석은 미끄럼을 타면서도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길을 걷으면서도 위험하다고 나를 찻길 안쪽으로 밀어넣곤 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나를 좋아하고 배려했던 그 아이가 보고 싶어서 나 역시 볼일 보러 밖에 나갔다가도 서둘러 귀가를 하기도 했었다. 녀석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살이 쪄서 몸이 둔했지만 또래 아이들보다 유난히 키가 커서 그 학교 축구부 감독에게 골키퍼로 선발되었다. 어릴 때부터 순하고 착하지만 끈기가 대단하여 맡은 일은 해내고야 마는 근성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 몇 개의 학원을 다니던 녀석이 하루는 유난히 가기 싫다고 했다. 나는 어찌나 애처롭던지, 엄마한테 얘기 안 할 테니 오늘 하루만 쉬라고 했다. 그러나 엄마를 속이면 안 된다고 징징 짜면서도 끝내 학원에 가던 그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사춘기의 거친 협곡도 거치지 않은 녀석은 길이 아닌 길은 걷지 않았고, 나는 늘 작은 거인을 보는 것 같아 든든했다. 그러한 성품을 지닌 녀석은 멈추지 않는 노력과 끈기로 훌륭한 선수로 성장했다. 그리하여 여러 차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소년 대표팀 골키퍼로 선발되어 외국 팀들과의 경기에 참가했고, 마침내 골키퍼로서는 최초로 영광스러운 차범근 축구 대상을 받았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맹활약을 떨쳤던 한국 축구의 전설 차범근은 1989년 은퇴하고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후, 척박한 한국의 유소년 축구의 모범을 보여주겠다는 일념으로 1990년 차범근 축구교실을 개설했다. 그리고 그보다 이전인 1988년에는 차범근 축구상을 제정해 매년 유소년 유망 선수들에게 수여해 왔다. 이제까지 박지성, 이동국, 김두현, 최태욱, 기성용 등 한국 축구의 대들보 같은 선수들을 배출했던 최고 권위의 차범근 축구상 대상을 우리 조카가 받은 것이다. 그 날 시상식장에서 차범근 감독을 만나 “아이를 축구 유학을 보내면 어떨까요?” 라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는 축구 조기유학이 그렇게 좋기만 한 것이라면 자신의 아들도 보내지 왜 구태여 여기에서 축구를 시키겠느냐고 대답했다. 어린 나이에 홀로 집을 떠나서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클 수 있다는 우려이기도 했다. 그 당시 우리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는 독일로 조카를 유학보내고자 계획하고 있었다. 독일의 유소년 축구의 기반이 탄탄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또 우리 아이들이 독일에 있으니 충분히 돌봐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큰아들은 독일 축구 에이전시를 만나기도 하고, 독일 중부의 레버쿠젠 축구팀 유소년 클럽을 방문해서 사정을 알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차범근 감독의 조언도 있고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결국 조카는 유학을 포기했다. 동생 집에는 그때 차범근 감독을 비롯한 축구계 인사들과 찍은 사진과, 각종 대회 때마다 찍은 사진, 그리고 각종 트로피와 차범근이 수여한 실물크기의 황금도색 축구화가 벽 하나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진열장엔 먼지만 쌓이더니 어느새 벽에 걸려있던 사진들이 하나 둘 없어지게 되었다. 차범근 감독은 한국에서는 전례가 없었던 유소년 축구교실을 시작하는 배경을 설명하면서, “유소년 축구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우리나라의 경우 다 커서 축구를 배우기 때문에 공에 대한 적응력이 더디다. 그래서 무리해서 실력을 쌓으려 하고 공부를 팽개치고 구타와 욕설 속에서 운동 기계가 되기 때문에 축구를 그만두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인생이 망가지는 폐단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공부 아니면 운동 가운데 양자택일해야 하는 우리 입시 제도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차범근 선수가 오랫동안 활약했던 독일의 경우에는 어린 선수들이 학교 수업을 다 듣고 와서 운동을 하고, 운동 후에도 각자 취미 생활을 하는 등 충분히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나도 우리나라를 방문한 어느 독일 고교 팀의 경우 교사까지 동행해서 경기가 끝난 후 공부를 가르치는 것을 보고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달랐다. 우리나라의 축구 선수들은 축구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학업을 비롯한 모든 일반적인 학교생활로부터 갈라서야만 한다. 아이가 초등학교 때 유소년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파주의 국가대표 훈련장에서 연습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따라 다닌 적이 있었다. 작대기를 일렬로 촘촘하게 세운 틈 사이로 지그재그로 날렵하게 빠져 나오는 훈련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둔했던 몸을 저렇게 만들기까지 얼마나 지독한 훈련을 받았을까. 저런 경지까지 갈 때까지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싸하게 아파왔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내 모습을 보던 옆자리의 젊은 학부모가 손자냐고 물으면서 “그래서 저는 어머님을 안 모시고 온다.”고 했다. 어떤 날은 아이가 보고 싶어 밤늦게 중학교로 찾아갔더니 마침 선배의 담배 심부름을 나온 아이를 만났다. 그는 수업은 전혀 받지 않고 매일 축구부 합숙소에서 강행군을 하고 있었다. 축구에서는 골을 넣는 공격수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골을 넣는 것을 방해하는 수비수와 골키퍼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수비수와 골키퍼 간의 적절한 팀웍과 조율이 전략적으로 잘 이뤄져야 한다. 골키퍼인 그 아이는 다른 선수들을 주도하는 리더십도 가지고 있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거의 매 경기 승리와 매 대회 우승에 크게 기여하면서 개인적으로도 승승장구 성장해 나갔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아이 아빠가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되어 아이의 삶 전체와 축구선수 생활에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축구선수 생활을 돌보던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 엄마는 직장과 가사일로 눈코뜰새 없는데다가 축구에 대한 정보까지 충분하지 않아서 진학 문제에 있어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차범근 축구대상까지 받고 신문에 떠들썩하게 소개되고 유소년 대표로 뛰는 등 장래가 촉망받던 아이는 이곳저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결국 동생은 중학교 감독의 권고에 따라 지방의 어느 고등학교의 스카웃 제의를 수락했다. 축구선수들의 진학을 둘러싼 여러 가지 깔끔하지 않은 문제들이야 이미 언론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질 만큼 알려진 사실이고 조카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고등학교 진학 후 가족을 떠나 홀로 지방에서 합숙 생활을 하면서 그 힘든 훈련을 잘 견뎌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선택했던 그 학교는 불행히도 그 당시 축구로서는 지지부진한 학교였다. 고등학교 축구부가 전국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대학 진학이나 프로 진출의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그렇다면 운동선수 생활을 접어야 하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중고등학교까지의 학교 생활은 훈련 외에는 거의 공백 상태나 다름없는 아이가 축구를 그만두게 되고 대학도 진학하지 못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미래에의 불안을 안고 고민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듬직하게 훈련에 열중했던 아이는 축구 특기생으로서 전문대학이나마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그 대학의 축구부는 그에게 어떠한 전망도 줄 수 없어 고민은 깊어만 갔다. 요즘 아이들 같지 않게 말수가 적고 듬직하며 착하고 순수한 성품을 지닌 그 녀석은 호들갑스럽게 자신의 감정을 나타낼 줄도 모른다. 그저 혼자서 고민을 삭히던 그는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기로 하고 일단 휴학계를 내기로 얼마 전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이제 낯선 세상에 나와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187센티미터의 큰 키에 체격도 좋고 얼굴도 이른바 꽃미남인 그는 이제 모델이 되는 것이 꿈이다. 그동안 스스로 많은 고정관념들을 깨뜨렸다고 생각했지만 이런저런 잣대로 아직도 다소 보수적인 나는 모델이란 직업이 마음에 안 들지만, 그가 무엇을 택하든지 우선 그의 마음으로 들어가 일치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암울한 현실에서 아이의 발바닥에 강력한 본드를 붙여 굳건히 현실에 발붙이게 도와주는 일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에, 비단결 같은 물보라로 아이의 마음을 포근하게 적시리라. 나는 서성서성 눈물을 주우며 침통한 심정으로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축구 선수들의 격정적인 토론들을 접했다. 그들은 “다시 태어나면 한국에서 운동하지 않겠다.”며 울분에 차 있었다. 운동선수로서 공부와도 담을 쌓았고 일반적인 학교 생활과도 거리가 멀었던 그들은 고교 시절 합숙 때는 자신들을 빼놓고 떠나는 수학여행 버스를 보며 눈물을 찔끔거린 적도 있었다. 대학에 들어와 처음 배운 것은 시험지 위에 교수님께 편지 쓰기였고, 약속 장소 바로 앞에서 영어 간판을 못 읽어 헤맨 적도 있었다고 했다. 한국에서 운동선수들의 합숙은 군대의 축소판이다. 합숙을 하면서 자유 시간에라도 책을 펴는 아이는 왕따 당하기 딱 좋았다. 그러니 자연히 그저 같은 운동선수들과 어울려 놀게 된다. 선배들은 할 일이 없으니까 후배를 괴롭히고, 후배도 선배가 되면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답습하게 된다고 했다. 술과 담배도 합숙소에서 배운다고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운동부 숙소 생활을 하면 외딴 섬에 있는 것과 다름없다. 수업에도 거의 들어가지 못하고 일반 학생들과 어울릴 일도 별로 없고 동아리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한다고 한다. 어느 선수는 캠퍼스 커플인 여자 친구와 서로 대화가 안 통할 때가 많다고 썼다. 어느 날 여자 친구가 자신에게 “백치미가 있다.”는 말을 했는데 좋은 뜻인 줄 알고 그냥 웃고 말았다가 나중에 찾아보고야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개그 프로그램을 보다가도 영어가 섞이면 자신만 그 뜻을 몰라 웃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들은 이미 중고등학생 때면 축구를 그만두고 백지상태와 마찬가지인 공부를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 운동을 해오면서 주변의 그 누구도 공부를 비롯한 다른 가능성에 대해 진지한 조언을 해주지 않았다. 운동부라는 울타리 속에서 다른 전망도 없이 흘러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사실 나 역시 그동안 우리 아이들 유학 문제로 바빠 언제 한번 조카 아이의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보기나 했던가. 그런 생각을 하니 인터넷에 떠도는 글이 무수히 많은 돌이 되어 날아온다. 그 돌들을 맞으면서 아득한 아픔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는 너무 잘해내고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그러면서 이러한 교육 현실에 어두운 동생을 원망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자식에 대한 그녀의 고민은 나보다 훨씬 더 깊지 않겠는가. 그저 이 나라의 교육제도가 이미 형벌이라고 할 수 밖에.
첫댓글 진로에 대한 판단 잘못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네요.어른들의 잘못이고 한국 축구가 그 웑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