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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정불교를 위한 바른불교 재가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무구
한국불교설화 - 서울·경기편
서울인천경기편
땅굴에서 나온 임금 | 찬즙대사와 동자 | 소몰이 노인과 무학 | 나루터의 구렁이 | 나옹 스님의 효심 | 정조의 독백 | 적장(敵將)의 편지 | 나녀(裸女)의 유혹 | 바다에서 나온 나한상 | 두 그루 은행나무 | 삼성산의 신비 | 도편수의 사랑 | 홍랑각시의 영험
땅굴에서 나온 임금 / 진관사
고려 제5대 임금 경종이 승하하자 자매 왕비였던 헌애왕후와 헌정 왕후는 20대의 꽃 같은 젊은 나이에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뛰어난 미모와 정결한 성격으로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던 헌정왕후는 성안(개경) 10대 사찰의 하나인 왕륜사 별궁으로 거처를 옮겨 관음기도를 하면서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
부처님께 의지하여 살아오기 어느덧 10년. 헌정왕후는 어느 날 불현듯 자신의 분신인 아들이나 딸이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 무슨 망상인가. 아니야, 양자라도 하나 들일까.』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맴돌던 어느 날 밤, 헌정왕후는 송악산에 올라가 소변을 보는데 온 장안이 소변으로 인해 홍수가 지는 꿈을 꾸었다. 하도 이상하여 복술가를 찾아가 물었다. 왕비의 말을 다들은 복술가는 얼른 일어나 아홉 번 절을 하더니 말했다.
『매울 길몽입니다. 아기를 낳으면 나라를 통치할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나는 홀로 사는 몸인데 그 무슨 망발인가.』
『아니옵니다. 이는 천지신명의 뜻이오니 거룩한 아드님을 낳을 징조입니다.』
『그런 말 두번 다시 입 밖에 내지도 말게나.』
그 무렵, 경종의 숙부이자 헌정왕후의 숙부인(고려왕실의 친족혼 풍습 때문임) 안종은 집 가까이 절에서 홀로 지내는 헌정왕후에게 간혹 선물을 보내느가 하면 집으로 초대하여 위로하곤 했다.
숙부의 친절에 감사하던 헌정왕후도 존경하는 마음에 호의를 품게되어 손수 수놓은 비단병풍을 답례 선물로 보냈다. 이러는 동안 두 사람은 정을 나누게 됐고 헌정왕후는 홀몸이 아니었다.
헌정왕후는 걱정 끝에 안종을 찾아가 송악산에서 소변 보던 꿈과 아기를 가질 무렵 관세음보살께서 맑은 구슬을 주시던 꿈 이야기를 하면서 멀리 섬으로 도망가 아기를 낳겠다고 상의했다.
『내 어찌 왕후를 멀리 보내고 살 수 있겠소. 더욱이 아기는 어떻게 하고….』
이런 이야기를 엿들은 안종의 부인은 두 사람을 괘씸히 생각하여 안종의 방 앞에 섶나무를 쌓고 불을 질렀다. 이로 인해 소문이 퍼지게 되고 이 사실을 안 성종(헌정·헌애왕후의 친오빠)은 안종을 제주도로 귀양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헌정왕후는 그 자리에서 실신하여 가마에 실려오다 산기가 있어 그날 밤 옥동자를 분만하니 그가 바로 후일의 현종이다. 헌정왕후는 아기를 분만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한편 헌애왕후는 두 살된 왕자 송을 기르면서 별궁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냈다. 본래 성품이 포악하고 음탕하여 동생 헌정왕후를 시기 질투하던 그녀는 외간 남자들에게 눈을 돌리던 차 간교하기로 소문난 외사촌 김치양과 정을 통하게 됐다.
왕자 송이 18세 되던 해에 성종은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송이 이으니 그가 바로 목종이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헌애 왕후는 정사를 돌보면서 천추전에 거처하니 「천추태후」라 불리었다.
태후와 놀아나던 김치양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호화로움을 누리면서 부정을 저질렀다. 목종은 김치양을 내쫓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마음이 상할까 염려하여 실행치 못했다.
어느 날 태후는 거리낌없이 김치양의 아기를 낳고는 장차 왕위를 잇게 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태후는 김치양가 모의하여 헌정왕후가 낳은 대량원군 순을 궁중에서 내쫓기로 했다. 이때 순은 나이 12세였다.
백모 태후가 시기하는 눈치를 채고 번화로운 궁중을 떠나 절에 가서 수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궁중에 들어와 설법하는 스님을 따라 개경 남쪽에 있는 숭교사에 가서 머리를 깎고 입산출가했다.
대량군 스님이 남달리 총명하여 10년 공부를 3년에 마쳤다는 소문이 나돌자 태후는 늘 감시를 늦추지 않고 자객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직감 있는 스님의 경계로 여러 차례 화를 면한 대량군은 그곳을 떠나 삼각산의 조그만 암자로 들어갔다.
암자의 노스님 진관대사는 대량군이 읊은 시 한 수를 듣는 순간 그가 용상에 오를 큰 인물임을 알았다.
대량군의 행방을 뒤쫓던 태후는 마침내 삼각산 암자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대량군의 신변이 위험함을 느낀 진관대사는 산문 밖에 망보는 사람을 배치하는가 하면 수미단 밑에 땅굴을 파고는 그 안에 침대를 놓아 대량군을 기거케 했다.
대량군이 3년간의 땅굴생활을 하는 동안 조정은 어지러울 대로 어지러웠다. 왕은 궁중이 어수선하여 심장병에 걸렸고, 이 틈을 타서 김치야은 역적을 모의했다. 그러나 강조가 먼저 변란을 일으켰다. 그는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군을 새 임금으로 모시기로 결심했다.
대량군 나이 18세 되던 어느 날.
『새 임금 맞이하니 신천지 열리고 새 일월이 밝아오네.』
3현6각의 풍악소리가 울리면서 오색 깃발이 하늘을 뒤덮는 가운데 금·은·철보로 장식된 8인교 가마가 산문 밖에 멈췄다. 스님들은 정중하게 행차를 맞이했다.
『대량군 마마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특명대사 김응인과 황보 유의는 진관대사에게 예를 올리고 찾아온 뜻을 말한 후 대군의 별당 앞에 국궁재배했다.
『대군마마! 대위를 이으시라는 어명을 받잡고 모시러 왔사옵니다.』
『내 운명 기박하여 세상을 등진 몸, 일생을 조용히 보낼 것이니 어서 물러들 가시오.』
하지만 대량군은 거듭 간청하는 특사의 뜻과 진관대사의 권유에 땅굴에서 나와 대궐로 향했다. 대군은 진관대사와 눈물로 작별하면서 자신이 거처하던 땅굴을 신혈이라 하고 절이름을 신혈사라 바꾸기를 청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현종은 자신의 심기를 달래며 거닐던 신혈사 인근의 평탄한 터에 진관대사의 만년을 위해 크게 절을 세우게 하고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명했다. 그 후 마을 이름도 진관동이라 부르게 됐다.
찬즙대사와 동자 / 봉원사
조선 영조대와 24년(1748) 초봄 어느날 아침. 지금의 연세대학 자리에 위치한 봉원사에 어명이 내렸다.
『귀사의 도량을 국가에서 긴히 쓰고자하니 새로운 도량을 정하도록 하라.』
『도량을 옮기라고? 어허 장차 이일을 어찌할꼬?』
궁으로 돌아가는 사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망연해하던 주지 贊汁스님은 법당으로 들어가 분향을 발원했다.
『제불 보살님께서는 어리석은 소승에게 길을 열어 주옵소서! 나무 석가모니불…』
스님은 이튿날 새벽 목욕재계하고는 백일 기도에 들어갔다. 초파일이 되어 신도들이 법을 청해도 찬즙스님은 응하지 않았다. 그렇게 백일쨰 되던날 새벽, 용맹정진에 들어간 찬즙은 비몽사몽간에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지금의 도량은 내가 머물기에 적합지 아니하니 대사께서 부디 좋은 가람터를 잡아 중생교화에 부족함이 없도록 해주시오.』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기암괴석 옆에 물병을 든 한 여인이 동자와 함께 서 있었다.
『아! 저분은 관세음보살님.』
찬즙대사는 황망히 머리를 조아리며 간곡히 청했다.
『소승 식견과 덕이 부족하오니 부디 길을 이녿하여 주옵소서.』
『대사의 신심이 능히 내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도량을 찾을 것이오.』
관음보살의 음성이 아직 허공에 맴도는듯 한데 여인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동자만이 산 아래로 날듯이 내려갔다.
찬즙은 동자를 쫓으려 급히 발을 옮기려다 그만 바위 아래로 구르게 됐다. 무엇인가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옆에서 누가 흔드는 바람에 정신을 차려보니 법당.
몸에선 땀이 비오 듯 했고 손에 들려있는 목탁채는 얼마나 힘을 주었던지 손자국이 나 있었다.
대사는 급히 상좌 도원에게 일렀다.
『도원아, 어서 길 떠날 차비를 해라.』
『스님! 오늘은 기도 회향일입니다.』
『인석아, 기도는 왜 했느냐?.』
찬즙대사는 대중 몰래 도원만을 데리고 꿈에 본 곳을 찾아 나섰다. 절 떠난지 벌써 여러날. 짚신이 동이나고 장삼모양도 말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날, 노상의 떡장수를 본 도원이 발길을 떼지않고 곁눈질만 하는 것이 아닌가.
『도원아, 떡좀 먹으련?.』
대답대신 방긋 웃으며 도원은 볼이 메어라고 떡을 먹었다. 떡을 손에 든 채 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대사에게 떡장수 할멈이 말을 건넸다.
『신심이 장해야 부처님을 뵙는다는 말이 있듯 시장이 지극하면 내 떡맛도 괜찮을텐데 스님은 아직 덜 시장하신가 보구려..』
맹랑한 떡장수 말에 기분이 언짢아 떡 두어개를 집어 먹고 일어서려는데 어딜 다녀왔는지 노파는 다시 배를 움켜쥐고 웃으며 다시 말을 던진다.
『살다보니 별꼴 다 보겠어요 스님. 저쪽 장터에 가 보니 개눈을 가려 놓고는 먹을 것을 끈에 달아 희롱하고 있지 않겠어요. 헌데 우스운 것은 그 개 주인이 개를 향해 「눈가린 것 풀 생각은 않고 먹이생각만 하는것이 꼭 봉원사 주지 찬즙 같구먼」 하지 않겠수..』
대사는 한방망이 맞은 듯 급히 장터로 가봤으나 개는 커녕 인기척도 없었다. 다시 돌아와 보니 떡장수도 간곳이 없었다. 개에 비유된 자신의 무지함을 생각하며 걷는 찬즙에게 도원이 불쑥 말을 꺼냈다.
『스님, 더운데 등멱이나 하시지요..』
눈앞엔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다. 대사는 말없이 개울로 발길을 옮겨 물속에 몸을 담구었다.
그때였다. 등을 밀겠다고 다가온 도원이 대사의 등줄기를 후려치더니 태연히 한마디 하는 것이 아닌가.
『법당은 호법당인데 불무영험이로다.』
『너 지금 뭐라 했느냐?』
대사가 놀라 물었다.
『제 등좀 밀어 주시라고요.』
대사가 의아해 하며 도원의 등을 미는데
『등짝은 제대로 보는데 부처는 왜 못보나?』
찬즙은 급히 도원에게 절을했다.
『아이구 날이 더우니 우리 스님 실성하셨네.』
찬즙이 머리를 조아리니 도원은 대경실색하여 엉엉 울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일어서던 대사는 먹은 떡이 얹혔는지 그만 배를 움켜쥐었다.
놀란 상좌 울음을 멈추고 인근 의원을 불렀다. 약을 먹고 이튿날 정오에야 정신을 차린 찬즙은 봉원사로 향했다. 여러날 걸려 바로 절 밑까지 왔으나 도저히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람터를 찾지 못함이 한스럽구나. 목이 몹시 마르다. 물을 좀…』
대사는 상좌에게 마지막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물을 차던 도원은 물을 철철흘리며 물병을 들고오는 동자에게 물 있는 곳을 물어 정성스레 쪽박에 물을 길어왔다.
빈사상태의 대사 입에 물을 흘려 넣으니 신기하게도 혈색이 돌았다. 대사는 차츰 정신을 차리더니 쪽박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언제 아팠느냐는 듯 기운을 차린 대사는 상좌와 함께 샘터로 갔다. 돌틈에 두개의 샘이 아래위로 있었다. 아랫쪽 물에 손발을 씻고 윗물로 공양을 지어 불공을 올렸다.
『부처님 가피로 목숨 부지했사오나, 가람터를 발견하고 목숨 버림만 못하옵니다. 부디 소승의 발원 이뤄주옵소서.』
이때였다. 돌연 도원이 게송을 읊었다.
『말을한들 알까, 보여준들 알까, 물이 덥고 시원함은 마셔 봐야 알 것을.』
멍청히 듣던 대사는 종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바라보니 중암선사가 주석하는 반야암이었다.
암자로 오르는데 동자들이 바위 위에서 뛰노는 듯 오락가락 한다. 바로 꿈에 본 광경이었다. 다시 자세히 보니 바위전체가 자애로운 관음보살의 모습이었따. 찬즙은 눈물을 흘리며 무수히 절하면서 관음보살을 불렀다. 어느새 동자는 간곳이 없었다.
『아, 눈밝지 못하여 지척에 두고 먼곳을 찾았구나.』
반야암에 이르니 증암선사가 경내를 서성이다 반색을 한다.
『대사였구려.』
『무슨 말씀이신지요?』
『오늘 아침예불을 마치고 나오는데 웬 동자 둘이 와서 도량을 크게 일으킬 사람이 올테니 도와주라고 하지 않겠소. 그래서 기다리던 중이오.』
새 가람이 세워지자 사람들은 새로 옮겨 지은 절이라 해서 봉원사를 「새절」이라 불렀따. 지금도 절 동북쪽 능선에 서울의 안녕을 지키는 듯한 거대한 자연석 관음바위가 있고 새벽이면 약수터 찾는이가 줄을 잇고 있다
소몰이 노인과 무학대사 <서울 왕십리(往十里)>
조선 건국초. 송도 수창궁에서 등극한 이성계는 조정 대신들과 천도를 결정하고 무학대사에게 도읍지를 찾아달라고 청했다.
무학대사는 옛부터 신령스런 산으로 알려진 계룡산으로 내려가 산세와 지세를 살폈으나 아무래도 도읍지로는 적당치 않았다. 발길을 북으로 옮겨 한양에 도착한 스님은 봉은사에서 하룻밤을 쉬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뚝섬 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니 넓은 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방으로 지세를 자세히 살핀 스님은 그곳이 바로 새 도읍지라고 생각했다.
『음, 땅이 넓고 강이 흐르니 과연 새 왕조가 뜻을 펼 만한 길상지로 구나.』
무학대사는 흐믓한 마음으로 잠시 쉬고 있었다. 이때였다.
『이놈의 소는 미련하기가 곡 무학 같구나. 왜 바른길로 가지 않고 굳이 굽은 길로 들어서느냐?』
순간 무학대사의 귀가 번쩍 뜨였다. 고개를 들고 돌아보니 길 저쪽으로 소를 몰고 가는 한 노인이 채찍으로 소를 때리며 꾸짖고 있었다.
스님은 얼른 노인 앞으로 달려갔다.
『노인장, 지금 소더러 뭐라고 하셨는지요?』
『미련하기가 꼭 무학 같다고 했소.』
『그건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신지요?』
『아마 요즘 무학이 새 도읍지를 찾아다니는 모양인데, 좋은 곳 다 놔두고 엉뚱한 곳만 찾아다니니 어찌 미련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소.』
무학대사는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스님은 공손히 합장하고 절을 올리며 말했다.
『제가 바로 그 미련한 무학이옵니다. 제 소견으로는 이곳이 좋은 도읍지라고 보았는데 노인장께서 일깨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더 좋은 도읍지가 있으면 이 나라 천년대계를 위하여 일러주시기 바랍니다.』
노인은 채찍을 들어 서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10리를 더 들어가면 주변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시오.』
『노인장, 참으로 감사합니다.』
무학대사가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순간, 노인과 소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스님은 가벼운 걸음으로 서북쪽을 향해 10리쯤 걸었다. 그때 스님이 당도한 곳이 바로 지금의 경복궁 근처였다.
『과연 명당일구나.』
삼각산, 인왕산, 남산 등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땅을 보는 순간 무학대사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만면에 미소를 띤 스님은 그 길로 태조와 만나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여 도성을 쌓고 궁궐을 짓기로 했다.
『스님, 성은 어디쯤을 경계로 하면 좋겠습니까?』
태조는 속히 대역사를 시작하고 싶었다.
『북쪽으로는 삼각산 중바위 밖으로 도성을 축성하십시오. 삼각산 중바위(인수봉)는 노승이 5백 나한에게 예배하는 형국이므로 성을 바위 밖으로 쌓으면 나라가 평안하고 흥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핵대사의 뜻과는 달리 조정의 일파는 이를 반대,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아야 한다고 강경히 주장했다. 태조는 입장이 난처해졌다. 존경하는 스님의 뜻을 따르고 싶었으나 일등 개국공신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무학대사와 대신들의 도성 축성에 관한 논쟁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 졌다.
그도 그럴 것이 무학대사는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으면 중바위가 성안을 넘겨다보는 형국이므로 불교가 결코 흥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도전 일파 역시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아야 유교가 흥할 수 있다는 지론이었으므로 무학대사 의견에 팽팽히 맞섰던 것이다.
입장이 난처해진 태조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 결정키로 했다. 날을 잡아 제사를 지낸 이튿날이었다. 밤새 내린 눈이 봄볕에 다 녹아내리는데 축성의 시비가 일고 있는 인수봉 인근에 마치 선을 그어 놓은 듯 눈이 녹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정도전 등 대신들은 이 사실을 태조에게 즉시 고하고 이는 하늘의 뜻이므로 도성을 인수봉 안으로 쌓아야 한다고 거듭 주청했다.
『거참 신기한 일이로구나. 그 선대로 성을 쌓도록 하시오.』
이 소식을 들은 무학대사는 홀로 탄식했다.
『억불이 기운이 감도니 이제 불교도 그 기운이 다해 가는구나.』
성이 완성되자 눈이 울타리를 만들었다 하여 눈 「설(雪)」자와 빙 둘러싼다는 울타리〔圍〕의 「울」자를 써서 「설울」이란 말이 생겼고 점차 발음이 변하여 「서울」로 불리워졌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노인이 무학대사에게 10리를 더 들어가라고 일러준 곳은 갈 「왕(往)」자와 십리(十里)를 써서 「왕십리(往十里)」라고 불렀다.
일설에 의하면 소를 몰고 가다 무학대사의 길을 안내한 노인은 바로 풍수지리에 능했던 도선국사의 후신이라 한다.
이런 유래로 왕십리에 속했던 일부 지역이 도선동으로 분할됐다. 도선동은 1959년부터 행정동명으로 불리다가 1963년 법정동명이 됐다.
왕십리 청련사 부근에는 무학대사가 수도하던 바위터가 있었고 주위에는 송림이 울창했다고 하나 지금은 주택가로 변해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청련사 밑에는 무학과 발음만 같고 글씨는 다른 무학봉이 있고 이 이름을 딴 무학초등학교가 있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무학봉에서 도선국사가 수도했다는 전설도 있어 왕십리는 도선·무학 두 스님의 인연지인 것 같다.
그 밖에도 서울에는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무악재는 무학 스님의 이름에서 연유한 「무학재」가 변한 것이고, 청량리는 청량국사에서 비롯된 지명이라고 한다.
나루터의 구렁이 <여주 신륵사>
초여름 새벽, 한 젊은이가 길떠날 차비를 하고 나섰다.
『어머님, 다녀 오겠읍니다. 그동안 건강에 유의하십시요.』
『내 걱정 말고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그리고 꿈자리가 뒤숭숭하니 여자를 조심해라.』
『네, 명심해서 다녀오겠읍니다.』
봇짐을 고쳐 멘 젊은이는 늙은 어머님을 혼자 두고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어머님 계신 방문을 되돌아보며 사립문을 나섰다.
젊은이는 어머님 꿈이야기가 왠지 불길했다. 해가 떠오르자 날씨가 더웠다. 젊은이는 강가로 내려가 저고리를 벗고 얼굴을 씻었다.
기분이 상쾌하면서 시장기가 들었다. 젊은이는 물가에 앉아 주먹밥을 먹었다. 길 떠날 준비와 혼자 계신 어머님을 위해 집안 일을 살피느라 간밤에 잠을 설친 젊은이는 포만감과 함께 졸음을 느꼈다.
얼마쯤 잤을까. 젊은이는 문득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살폈다. 주위는 여전했다.
『분명 꿈을 꾸었는데… 이상하다. 전혀 기억이 안나다니.』
그러나 꿈은 풀리질 않았다.
─얘야, 부디 여자를 조심해라─. 신신 당부하시던 어머님 말씀을 떠올리면서 젊은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여자가 있었던가?』
젊은이는 꿈 속을 더듬으며 개나리 봇짐을 어깨에 메는 순간 그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렇지, 봇짐 속을 보자.』
젊은이는 짐을 풀었다.순간 젊은이는 화다닥 뒤로 물러섰다.
한 마리의 큰 구렁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젊은이가 큰 돌멩이를 들어 구렁이를 향해 던지려하자 구렁이는 스르르 몸을 풀어 숲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따. 젊은이는 돌을 든 채 물끄러미 구렁이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래, 저 구렁이가 사공에게 쫓기던 여인이 틀림없어.』
젊은이는 비로소 꿈속의 일을 기억해냈다.
스승의 심부름으로 나루터에 도착한 한 童子僧이 사공에게 배를 태워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뭐 강을 건너게 해 달라고? 꼬마상좌가 돈이 어디서 나서 배를 탈려고 해. 중이라고 배를 거저 탈 생각은 아예 말아야 한다.』
『네, 배삯은 있읍니다. 태워 주세요.』
『어디 그럼 삯먼저 내놔봐.』
童子僧은 엽전 꾸러미를 꺼냈다. 돈 꾸러미를 본 사공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너 그 돈 어디서 난 거냐? 바른대로 이르지 않으면 관가에 고할 것이다.』
『이 돈은 報恩寺를 중창할 시주돈예요. 스님께서 강건너 대장간에 갔다 주라고 하셔서 가는 길입니다.』
동승은 또렷또렷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건네주지. 어서 타거라.』
동자승을 태운 배가 강심으로 밀려나갈 무렵 한 여인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나룻배를 불렀다.
『여보세요, 잠깐만 기다려요.』
『안돼요. 배를 띄웠으니 다음 차례를 기다리시오.』
『잠깐만 사공, 저 여인을 태우고 함께 갑시다.』
동자승이 사공에게 청했으나 사공은 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여기 탄 손님은 스님이라 외간 여자와는 함께 타지를 않소.』
『아니 내가 언제 그랬소. 기왕이면 함께 가는 것이 사공에게도 이롭지 않소. 어서 배를 기슭에 대세요.』
사공은 하는 수 없이 배를 기슭 여인을 태웠다.
『고맙습니다. 스님.』
여인은 동자승을 향해 인사를 하더니 허리춤에서 엽전을 꺼내 사공 빌밑에 던졌다. 그리고 나서 동자승을 향해 돌아 앉았다.
『스님은 어디로 가세요?』
『예, 절 중창에 필요한 연장을 마추러 대장간에 가는 길입니다.』
『절을 중창하시면 시주를 거두시겠군요. 저도 시주를 하고 싶으니 저희 집에 같이 가 주시지요.』
『고맙습니다. 소승은 보은사 사미승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공이 갑자기 노를 들어 여인을 후려치며 외쳤다.
사공이 내려치는 노를 피해 물 속으로 뛰어든 여인은 금방 한마리의 큰 암구렁이가 되어 달아났다 그 바람에 놀란 젊은이는 잠에서 깼다. 해가 서산에 기울 무렵 젊은이는 나루터에 닿았다.
늙은 사공이 빈 배에 앉아 있었다.
『노인장 나루를 건네 주시겠읍니까?』
『어서 타시시요. 헌데 젊은이 이렇게 늦게 어디를 가시오.』
『과거를 보러 가는 길입니다.』
『나루를 건너면 30리 안에는 인가가 없는데 어디서 유하실려고?』
『인가가 없다니요?』
젊은이는 그제사 사공을 똑바로 보았다. 꿈속의 그 사공과 닮은 것 같았다.
『이곳이 麗江나루가 아닙니끼?』
『여강 나루이지요. 그러나 젊은이는 새벽부터 길을 잘못 들었소. 젊은이는 오늘 낮에 강가에서 암구렁이를 보았지요. 이 길은 저승으로 통하는 길이오. 나루를 건너면 報恩寺가 있지만 누구도 살아서 절에 닿는 사람은 없소.』
『노인장, 저는 그럼 죽은 것입니까? 산 것입니까?』
『죽지는 않았소이다. 다만 젊은이의 孝心 때문에 여기 이른것이오. 당신 어머니는 오늘 아침 당신이 길을 떠나자 곧 숨졌소. 지금은 보은사 羅殺이 됐는데 절이 퇴락해 거처할 곳이 없어 절 아래 동굴에 머무는데 그곳은 百?女라는 마귀의 집이라오. 그 마귀는 당신 어머니께 집을 빼앗기고 화가 나서 당신을 해치려 했으나 다행히 나한테 들켜 당신을 해치지 못한 것이오.』
『그러면 꿈속의 동승이 저입니까?』
『그렇소. 당신 전생 모습이오. 전생부터 보은사 중창서원을 세운 당신은 아직도 이행 못하고 있소. 오늘 이런 기회도 모두 부처님의 계시입니다.』
조선 성종 4년, 장원급제하여 여주 고을 원님이 된 젊은이는 대왕대비 특명으로 보은사를 크게 중창했다. 그후 부처님 신탁으로 중창했다 해서 신륵사(神勒寺)라 개칭했다. 지금도 신륵사 탑 밑에는 젊은이의 어머니인 나찰이 살고 있다고 한다.
나옹 스님의 효심(孝心) <이천 영월암>
지금으로부터 6백여 년 전, 고려의 유명한 스님 나옹화상(법명 ??, 1320∼1376)은 춘설이 어지럽게 흩날리는 길을 시자도 없이 혼자 걷고 있었다. 지금의 양주땅 회암사에서 설법을 마치고 이천 영월암이 있는 설봉산 기슭을 오르는 스님의 발길은 찌뿌듯한 날씨처럼 무겁기만 했다.
이때였다. 어디선가 가까이서 울리는 요령소리가 스님의 귓전을 울렸다.
『허, 또 누가 이생을 하직한 게로군.』
자신의 출가 당시 화두였던 사람이 오고가는 생사의 도리를 되뇌이면서 막 산모퉁이를 돌아서려던 나옹 스님은 초라한 장의 행렬과 마주쳤다.
상여는 물론 상주도 없이 늙수그레한 영감이 요령을 흔들며 상엿소리를 구슬피 메기고, 그 뒤엔 장정 하나가 지게에 관을 메고 무거운 듯 힘겹게 걷고 있었다. 바로 뒤엔 두 명의 장정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따랐다.
행렬은 스님을 보자 한쪽으로 비켜서면서 허리를 굽혔다.
『누가 갔는데 이처럼 의식도 갖추지 못하고….』
『예, 아랫마을 돌이어멈이 아직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거참 안됐구먼. 얼마 전 아들을 잃고 정신이 이상해졌다더니… 나무 관세음보살.』
스님은 마지막 가는 돌이어멈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염불을 하고는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다.
평소 마을을 지나다 몇 번인가 본 돌이어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아들을 잃고 난 뒤 충격을 받아 남의 집 물건을 예사로 훔치고 자주 마을 사람들과 싸우는 등 포악해졌다. 처음엔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마을 사람들도 나중엔 하도 말썽을 부리니까 가두어야 한다고 하여 한동안 보이지 않더니 그만 명을 달리하고 만 것이었다.
을씨년스런 날씨에 마음마저 착잡한 스님은 문득 출가 전 자신이 고뇌하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스님이 스무살 때였다. 생사고락을 같이 하자고 약속한 절친한 친구가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비통에 잠긴 나옹은 「사람은 죽으면 어딛로 가는가」라는 물음을 어른들께 수없이 되풀이했으나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벗과의 사별을 인생의 근본문제로 받아들인 나옹은 그 길로 공덕산 요연 스님을 찾아갔다.
『여기 온 것은 무슨 물건이냐?』
『말하고 듣고 하는 것이 왔으나 보려 하여도 볼 수 없고 찾으려 하여도 찾을 수 없나이다. 어떻게 닦아야 하겠나이까?』
이 말에 요연 스님은 나옹의 공부가 보통 경지가 아님을 알았다.
『나도 너와 같아서 알 수 없으니 다른 스님께 가서 물어라.』
나옹은 그곳을 떠나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다가 1344년 양주 회암사에서 4년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앉아서 용맹정진을 한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스님은 더 높은 경지를 체험하기 위해 1347년 중국으로 구법(求法)의 길을 떠났다. 연경 법원사에 도착하여 그 절에 머물고 있던 인도 스님 지공화상을 만나 계오(契悟)했다. 2년간 공부하다 다시 남쪽으로 가서 평산 처림에게 법의와 불자를 받고 사방을 두루 다니며 선지식을 친견하던 스님은 어느 날 어머니의 타계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이 솟아올랐으나 스님은 출가사문의 본분을 내세워 멀리서 왕생극락을 기원할 뿐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오랫동안 잊고 지내온 어머니 생각을 모두 떨칠 수는 없었다.
그날 밤 스님은 선정에 들어 어머니의 행적을 좇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나옹 스님의 어머니 정씨는 뜻밖에도 환생하지 못하고 무주 고혼이 되어 중음신으로 떠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님은 자신을 원망했다.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에 대해 그토록 무관심했던 자신의 불효가 한스러웠다.
「자식이 출가하면 구족이 복을 받는다는데 우리 어머님은 업장이 얼마나 두터우시길래 구천을 맴돌고 계실까. 혹시 아들의 모습을 못 보고 눈감으신 정한이 골수에 맺힌 것인 아닐까?」
스님은 지옥고에 허덕이는 어머니를 제도한 목련존자를 생각하며 어머니를 천도하기로 결심했다.
나옹 스님은 영월암 법당 뒤 설봉산 기슭 큰 바위에 모셔진 마애지장보살님 앞에서 어머니 천도 기도를 시작했다.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옥의 한 중생까지도 제도하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어머니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나옹 스님의 독경은 간정했다.
그렇게 기도하기 49일째 되던 날, 나옹 스님은 철야정진에 들어갔다.
새벽녘 아직 동이 트기 전, 나옹 스님은 지장보살님의 전신에서 발하는 환한 금빛 광채를 보았다. 그것은 눈부신 자비의 방광이었다.
스님은 놀라서 고개를 들고 지장보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지장보살님의 눈에선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듯했다. 고통받은 지옥 중생 때문에 지옥 문전에서 눈물이 마를 새 없다는 지장보살님이 어머니를 천도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만 같았다.
「아, 지장보살님께서 내 기도에 감응하시어 눈물로써 현현하고 계시는구나.」
나옹 스님은 기도가 성취되어 기뻤다.
『어머니, 이제 아들에 대한 섭섭하신 마음을 거두시고 편히 극락에 드십시오.』
기도를 마친 나옹 스님은 선실에 입정하여 이미 천도왕생하신 어머니를 보았다.
그 이후부터 영월암 지장보살님 앞에는 선망 부모의 왕생극락을 빌면서 자신의 업장을 소멸하려는 기도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나옹 스님은 영월암에서 14안거를 성만하면서 후학을 제접하고 신도들을 교화했다. 이 마애지장보살상은 지난 1984년 12월 보물 제822호로 지정됐다.
정조(正祖)의 독백 <수원·용주사>
「백성들에게는 효를 강조하는 왕으로서 내 아버님께는 효도 한 번 못하다니….」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이 늘 가슴 아팠다.
왕세손이었던 정조 나이 11세 때, 할아버지 영조는 불호령을 내렸다.
『어서 뒤주 속에 넣지 않고 무얼 주저하느냐?』
어린 왕세손은 울며 아버지의 용서를 빌었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영조는 뒤주에 못을 박고 큰 돌을 얹게 한 후 손수 붓을 들어 세자를 폐하고 서인으로 만들어 죽음을 내린다는 교서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8일 후,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어릴 때 목격한 당시의 모습이 뇌리에 떠오를 때마다 정조는 부친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만 같았다.
『저승에서나마 왕생극락하시도록 돌봐 드려야지.』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묻힌 부친의 묘를 절 가까이 모셔 조석으로 영가를 위로하기로 결심하고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임금은 보경 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에 대한 설법을 듣게 됐다.
『불가에서는 부모님의 은혜를 열 가지로 나누지요. 그 첫째는 나를 잉태하여 보호해 주시는 은혜요, 둘째는 고통을 참고 나를 낳아 주신 은혜요, 셋째는 낳아 기르느라 고생하신 은혜요, 넷째는 쓴 것은 부모가 먹고 단 것은 나에게 주시는 은혜요, 다섯째는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뉘어 주시는 은혜요….』
설법을 다 들은 정조는 부친을 위해 절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임금은 먼저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 화산으로 부친의 묘를 옮겼다.
그리고는 가까이 있는 갈양사(신라 문성왕 16년에 세운 절) 터에 부왕의 명복을 기원하는 능사를 세우도록 했다.
왕은 보경 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았다. 백성들은 비명에 간 사도세자를 위해 절을 세운다고 하자 너도 나도 시주를 마다하지 않았다. 보경 스님은 8만냥의 시주금으로 4년만에 절을 완성했다.
낙성식 전날 밤, 정조는 용이 여의주를 입에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이튿날 낙성식장에 친히 거동한 임금은 절 이름을 용주사라 명했다. 이 절이 바로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송상리에 위치한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다.
정조는 자신에게 부모의 은혜를 새삼 일깨워주고, 용주사를 세우는데 크게 공을 세운 보경 스님에게 승려로서 으뜸인 도총섭의 칭호를 주어 용주사를 관장하게 했다. 그리고 전국에서 제일 그림 잘 그리는 화공을 찾아 부모은중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게 한 후 다시 경판으로 각하여 용주사에 모시게 했으니 이는 지금도 원형대로 잘 보존되고 있다.
또 임금은 궁에서 쓰던 명나라제 금동 향로와 야월낙안도(夜月落雁圖), 우중어옹도(雨中魚翁圖), 촌중행사도(村中行事圖), 산중별장도(山中別莊圖), 고주귀범도(孤舟歸帆圖), 산사참배도(山寺參拜圖), 강촌심방도(江村尋訪圖), 효천출범도(曉天出帆圖)와 용을 정교하게 양각한 8면 4각의 청동 향로를 하사했다.
임금은 능이 있는 인근 수원에 화성을 쌓아 소경(小京)으로 승격시키는 등 비명에 가신 부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다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기일뿐 아니라 평소에도 자주 용주사를 찾았다.
어느 초여름날이었다. 능을 참배한던 정조는 능 앞 소나무에 송충이가 너무 많아 나무들이 병들어 가고 있음을 보았다.
『허허 이럴 수가. 내 땅에 사는 송충이로서 어찌 임금의 아버지 묘앞에 있는 소나무 잎을 갉아먹는단 말이냐. 비명에 가신 것도 가슴 아픈데 너희들까지 이리 괴롭혀서야 되겠느냐.』
임금은 이렇듯 독백하며 송충이를 한 마리 잡아 이빨로 깨물어 죽였다. 그 이후로는 이 일대에 송충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한다. 지금도 용주사 주변과 융릉 지역은 송림이 울창하여 장관을 이루며 특히 용주사 주변의 회양목은 천연기념물 제10호로 지정돼 있다.
어느 가을날 용주사로 향하던 임금의 행차가 수원 못미쳐 군포를 지나 고갯마루를 오르느라 속도가 좀 떨어졌다. 가마 안에서 임금은 속이 타는 듯 호령했다.
『여봐라, 어찌 이리 더디단 말이냐?』
『언덕을 오르느라 좀 더디옵니다.』
부왕을 그리는 정이 몹시 사무쳐 빨리 절에 다다르고 싶었던 왕의 심정을 기려 주민들은 이 고개를 「지지대」라 불렀다.
적장(敵將)의 편지 <광주 남한산성>
『여보, 아마 우리에게도 기다리던 아기가 생기려나 봐요.』
『그렇게 되면 오죽이나 좋겠소. 한데 부인에게 무슨 기미라도…』
『간밤 꿈에 웬 스님이 제게 거울을 주시면서 잘 닦아 지니라고 하시지 않겠어요. 아무래도 태몽인 것 같아요.』
결혼한 지 10년이 넘도록 아기를 갖지 못해 영약이란 영약은 다 먹어 보고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올리던 충남 보은의 김진사댁 부인 박씨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남편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그로부터 10개월 후, 한가위 달빛이 휘영청 밝은 밤, 김진사댁에서는 낭랑한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기는 자라면서 남달리 총명하여 다섯 살 되던 해, 벌써 천자문을 마쳤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던 어느 여름 날, 돌이는 서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뒹굴기 시작했다. 나이 많은 서당 학우들이 업고 집에 이르자 놀란 김진사는 용하다는 의원을 부르고 약을 썼으나 며칠이 지나도 차도가 없이 병은 더 심해졌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수리 수리 마하수리….』
대문 밖에서 스님의 염불소리가 들렸다. 시주 쌀을 갖고 나온 김진사 부인은 스님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꿈에 거울을 주었던 그 스님이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묘한 인연이라 생각한 부인은 스님께 돌이 이야기를 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스님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듯 말문을 열었다.
『그러잖아도 소승이 돌이를 데리러 왔습니다. 절에 가면 곧 건강을 되찾을 것이며 장차 이 나라의 훌륭한 인재가 될 것입니다.』
김진사 내외는 귀여운 아들을 절로 보낼 수 없어 선뜻 대답하지 못했으나, 태몽을 생각하고는 하는 수 없이 스님 뜻에 따랐다.
스님 등에 업혀 절에 온 돌이는 언제 아팠느냐는 듯 건강해졌다. 낮에는 활쏘기 등 무예를 익히고 밤에는 불경을 읽으며 9세가 되던 해. 김진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고향에 돌아가 상을 치르고 돌아온 돌이는 부친을 여읜 슬픔과 함께 사람의 나고 죽는 문제로 번민했다. 스님께 여쭈어 봐도 「아직 어리다」며 좀체로 일러주시려 하지 않았다.
사미의 엄한 계율 속에 정진하던 '각성'은 14세 되던 해 '부휴스님'을 따라 속리산, 금강산, 덕유산 등으로 다니며 경전공부 외에 무술, 서예 등을 익혔다. 이렇게 10년이 지나자 부휴스님은 각성을 불렀다.
『이제 네 공부가 어지간하니 하산하여 중생을 구제하도록 하라.』
'벽암'이란 호를 받은 각성 스님은 그 길로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 묘에 성묘하고는 한양으로 발길을 옮겼다.
때는 조선조 광해군 시절. 조정에서는 무과 과거 시험을 치르는 방을 내걸었다. 각성 스님은 시험에 응시했다.
『김각성 나오시오.』
각성 스님과 마주한 상대는 호랑이 가죽 옷을 입고 머리는 풀어 흰수건으로 질근 동여맨 것이 마치 짐승같았다. 두 사람의 몸이 공중에 떠오르는 등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이 회를 거듭하던 중 짐승 같은 사나이의 목검이 부러졌다. 각성 스님은 절호의 기회였으나, 상대방이 새 칼을 들고 다시 대적하도록 잠시 기다렸다.
그때 성난 사나이는 씩씩거리며 규정에 없는 진짜 칼을 원했다. 이를 지켜보던 난폭한 광해군은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진짜 칼을 주도록 어명을 내렸다. 다시 징소리가 울렸다. 「얏! 에잇!」기합소리와 칼 부딪치는 소리뿐 장내는 쥐죽은 듯했다. 승부의 귀추가 주목되는 아슬아슬한 순간, 사나이의 칼이 스님의 머리를 후려치는데 스님은 날랜 동작으로 상대방의 칼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오, 과연 장한 솜씨로구나.』
광해군은 탄복을 금치 못했다. 무과에 급제한 각성 스님은 '팔도도총섭'이란 벼슬을 맡았다. 그러나 바른말을 잘하는 스님은 임금에게 성을 쌓고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간(諫)하다 뜻이 관철되지 않자 벼슬을 내놓고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몇 년간 무술을 더 연마하는 동안 나라는 점점 더 어지러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각성 스님은 부처님으로부터 세상에 내려가 성을 쌓고 전쟁에 대비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스님은 곧 대궐로 달려가 새 임금 인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고맙게 여긴 임금은 스님의 옛 관직을 회복하여 '팔도도총섭'에 명하고 남한산성을 다시 쌓게 했다. 남한산성이 다 이루어지기도 전에 청나라 군사가 쳐들어왔다.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하게 된 인조는 각성 스님의 공을 높이 치하했다.
『대사의 선견지명이 아니었던들 내 어찌 생명을 보존했겠소.』
성곽 수호를 관군에게 맡긴 각성 스님은 의승 천명을 모아 「항마군」을 조직, 북으로 진격했다.
『나는 팔도도총섭이다. 대장은 나와서 나와 겨루자.』
이때 적진에서 달려나오던 대장은 갑자기 멈춰섰다.
『혹시 김각성 장군이 아니오?』
『그렇소만….』
『지난날 과거장에서 칼을 잃고 도망간 사람이 바로 나요, 나는 그때 조선의 정세를 염탐하러 왔다가 하마터면 목이 달아날 뻔했지요. 그때 살려준 은혜 잊지 않고 있소. 오늘 저녁 술이라도 한 잔 나눕시다.』
『술도 좋지만 우선 승패를 가리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소?』
『좋소. 그럼 내일 싸우도록 합시다.』
이튿날 아침, 벽암대사는 의병을 이끌고 적진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그 많던 적군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들판에는 편지를 매단 창이 하나 꽂혀 있었다.
『김각성 장군! 지난날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해 그냥 돌아가오.』
편지를 읽은 스님은 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돌아와 '장경사'를 건립했다.
훗날 조정에서는 스님의 공을 기리기 위해 남한산성에 「청계당」이란 사당을 지어 매년 추모제를 올렸다.
나녀(裸女)의 유혹 <소요산·자재암>
『이토록 깊은 밤, 폭풍우 속에 여자가 찾아올 리가 없지.』
거센 비바람 속에서 얼핏 여자의 음성을 들었던 원효 스님은 자신의 공부를 탓하며 다시 마음을 굳게 다졌다.
『아직도 여인에 대한 동경이 나를 유혹하는구나. 이루기 전에는 결코 자리를 뜨지 않으리라.』
자세를 고쳐 점차 선정에 든 원효 스님은 휘몰아치는 바람과 거센 빗소리를 분명히 듣는가 하면 자신의 존재마저 아득함을 느꼈다. 「마음, 마음은 무엇일까?」 운효 스님은 둘이 아닌 분명한 본래 모습을 찾기 위해 무서운 내면의 갈등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바지직」하고 등잔불이 기름을 튕기며 탔다. 순간 원효스님은 눈을 번적 떴다.
비바람이 토굴 안으로 왈칵 밀려들었다.
밀려오는 폭풍우 소리에 섞여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스님은 귀를 기울였다.
『원효 스님, 원효 스님, 문 좀 열어주세요.』
스님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망설였다. 여인은 황급하게 문을 두드리며 스님을 불렀다.
스님은 문을 열었다. 왈칵 비바람이 방안으로 밀려들면서 방안의 등잔불이 꺼졌다.
『스님, 죄송합니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찾아와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비를 맞고 서 있는 여인을 보고도 스님은 선뜻 들어오란 말이 나오질 않았다.
『스님, 하룻밤만 지내고 가게 해주세요.』
여인의 간곡한 애원에 스님은 문 한쪽으로 비켜섰다. 여인이 토막으로 들어섰다.
『스님, 불 좀 켜 주세요. 너무 컴컴해요.』
스님은 묵묵히 화롯불을 찾아 등잔에 불을 옮겼다. 방 안이 밝아지자 비에 젖은 여인의 육체가 눈에 들어왔다. 와들와들 떨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스님, 추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제 몸 좀 비벼 주세요.』
여인의 아름다움에 잠시 취해 있던 스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공연히 들여놨나 싶어 후회했다.
떨며 신음하는 여인을 안 보려고 스님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비에 젖어 속살이 들여다보이는 여인의 모습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것. 내 마음에 색심이 없다면 이 여인이 목석과 다를 바 있으랴.』
스님은 부지중에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여인을 안아 침상에 눕히고는 언 몸을 주물러 녹여 주기 시작했다. 풍만한 여체를 대하자 스님은 묘한 느낌이 일기 시작했다. 스님은 순간 여인을 안아 침상에 눕히고는 언 몸을 주물러 녹여 주기 시작했다. 스님은 순간 여인을 침상에서 밀어냈다.
「나의 오랜 수도를 하룻밤 사이에 허물 수야 없지.」
이미 해골물을 달게 마시고 「일체유심조」의 도리를 깨달은 스님은 다시 자기 정리를 시작했다.
「해골은 물그릇으로 알았을 때는 그 물이 맛있더니, 해골을 해골로 볼 때는 그 물이 더럽고 구역질이 나지 않았던가. 일체만물이 마음에서 비롯된다 하였으니 내 어찌 더이상 속으랴.」
이 여인을 목석으로 볼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여인으로 보면서도 마음속에 색심이 일지 않으면 자신의 공부는 온전하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다시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여인의 몸을 비비면서 염불을 했다. 여인의 풍만한 육체는 여인의 육체가 아니라 한 생명일 뿐이었다. 스님은 여인의 혈맥을 찾아 한 생명에게 힘을 부어주고 있었다. 남을 돕는 것은 기쁜 일. 더욱이 남과 나를 가리지 않고 자비로써 도울 때 그것은 이미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이 되는 것이다.
도움을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구별이 없을 때 사람은 경건해진다. 여인과 자기의 분별을 떠나 한 생명을 위해 움직이는 원효 스님은 마치 자기 마음을 찾듯 준엄했다. 여인의 몸이 서서히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여인은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스님 앞에 일어나 앉았다. 여인과 자신의 경계를 느낀 스님은 순간 밖으로 뛰쳐 나왔다.
폭풍우가 지난 후의 아침해는 더욱 찬란하고 장엄했다. 간밤의 폭우로 물이 많아진 옥류폭포의 물기둥이 폭음을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스님은 훨훨 옷을 벗고 옥류천 맑은 물에 몸을 담그었다. 뼛속까지 시원한 물 속에서 무한한 희열을 느끼는데 여인이 다가왔다.
『스님, 저도 목욕 좀 해야겠어요.』
여인은 옷을 벗어 던지고는 물 속으로 들어와 스님 곁으로 다가왔다. 아침 햇살을 받은 영인의 몸매는 눈이 부셨다. 스님은 생명체 이상으로 보이는 그 느낌을 자제하고 항거했다. 결국 스님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너는 나를 유혹해서 어쩌자는 거냐?』
『호호호, 스님도. 어디 제가 스님을 유혹합니까? 스님이 저를 색안으로 보시면서.』
큰 방망이로 얻어맞은 듯한 순간 스님의 머리는 무한한 혼돈이 일었다. 「색안으로 보는 원효의 마음」이란 여인의 목소리가 계속 스님의 귓전을 때렸다. 거센 폭포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계속하여 여인의 음성이 혼돈으로 가득 찬 머리 속을 후비고 들어올 뿐.
「색안으로 보는 원효의 마음」을 거듭거듭 뇌이면서 원효 스님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폭포소리가 들렸고 캄캄했던 눈앞의 사물이 제 빛을 찾고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의식되는 눈앞의 경계를 놓치지 않고 원효 스님은 갑자기 눈을 떴다.
원효 스님은 처음으로 빛을 발견한 듯 모든 것을 명료하게 보았다.
「옳거니, 바로 그거로구나. 모든 것이 그것으로 인하여 생기는 그 마음까지도 버려야 하는 그 도리!」
스님은 물을 차고 일어섰다. 그의 발가벗은 몸을 여인 앞에 아랑곳 없이 드러내며 유유히 걸어나왔다 .주변의 산과 물, 여인과 나무 등 일체의 모습이 생동하고 있었다.
여인은 어느새 금빛 찬란한 후광을 띤 보살이 되어 폭포를 거슬러 사라졌다. 원효 스님은 그곳에 암자를 세웠다. 자기의 몸과 마음을 뜻대로 한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 「자재암」이라 했다. 지금도 동두천에서 멀지 않은 단풍으로 유명한 소요산 골짜기에는 보살이 목욕했다는 옥류폭포가 있고 그 앞에는 스님들이 자재의 도리를 공부하는 자재암이 있다.
바다에서 나온 나한상(羅漢像) / 강화 보문사(普門寺)
『오늘은 날씨가 이렇게 화창한 걸 보니 고기가 많이 잡힐 것 같군. 자네는 기분이 어떤가?』
『글쎄, 나도 오늘은 꼭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으이.』
신라 진덕여왕 3년(649) 4월. 강화 보문사 아랫마을 매음리 어부들은 새봄을 맞아 출어 준비를 하며 만선의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었다.
준비를 마친 어부들은 풍어를 기원하면서 앞바다로 나갔다. 4월의 미풍은 바다 내음을 싣고 와 피부를 간지럽혔고, 고기잡이에 알맞게 출렁이는 물결은 봄햇살 때문인지 여느 때보다 더욱 풋풋하고 싱그러워 보였다. 그물만 넣으면 금방이라도 고기들이 가득 담겨 올라올 것만 같았다.
어부들은 콧노래를 부르며 큰 그물을 바닷속에 던졌다.
얼마가 지났을까. 어부들이 그물을 올리려고 보니 바다는 숨을 쉬지 않는 듯 고요했다.
『여보게. 우리가 그물을 올리려고 하니 어쩜 바람 한 점 일지 않네 그려.』
『그도 그렇지만 대단히 큰 고기가 걸린 모양일세.』
『그러니까 그물이 이렇게 묵직하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무거울 리가 있겠나.』
자 어서들 힘을 모아 끌어올립시다.
어부들은 난생 처음보는 대어가 올라올 것을 기대하면서 그물을 끌어올렸다.
그물이 서서히 물 위로 오르자 갑판에는 순간 긴장의 빛이 감도는 듯했다. 무게로 봐서 대단히 큰 물고기일 거라고 생각한 어부들은 가슴이 조마조마함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막상 그물을 올려놓고 보니 펄떡펄떡 뛰는 고기는 한 마리도 없었다. 그물 속에는 고기 대신 인형모양의 돌덩이들을 즉시 바닷속에 쏟아버리고 새로 그물을 쳤다.
『날씨가 너무 좋아 일진이 좋으려나 했더니 돌덩이라니, 오늘 점 잘못친 거 아닌지 모르겠군.』
구레나룻이 많은 털보 김시가 바다를 향해 「퇴퇴퇴」침을 3번 뱉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점심때가 좀 기울어 어부들은 다시 그물을 걷어 올리려 했다. 이상스럽게도 바다는 다시 잠잠해졌고 그물은 앞서와 다름없이 굉장히 무거웠다.
『혹시 또 돌덩이가 걸린 건 아닐까?』
『아무튼 끌어올려나 보세.』
어부들은 다시 있는 힘을 다해 그물을 올렸다. 역시 또 22개의 돌덩이가 담겨 올라왔다. 어부들은 다시 인형처럼 생긴 돌덩이를 바닷속에 버리고는 그만 뱃머리를 뭍으로 돌렸다.
『아무래도 무슨 조심인 것 같군. 돌덩이가 그것도 22개씩 똑같이 두 번이나 걸리다니. 오늘 은 해도 기울고 했으니 그만 돌아갑시다.』
어부 중 제일 나이가 지긋한 박씨의 의견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빈손으로 돌아온 어부들은 한결같이 그날 밤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하얀 수염의 노스님이 나타나 하는 말이,
『그대들은 어찌하여 귀중한 것을 두 번씩이나 바다에 던졌느냐. 내일 다시 그물을 치면 그 돌덩이들이 또 올라올 테니, 그들을 명산에 잘 봉안하라. 그러면 길상이 거듭될 것이니라.』
이튿날 꿈 이야기를 주고받은 어부들은 모두 똑같은 꿈을 꾸었음을 예사롭지 않게 생각, 어제 그 장소로 다시 나갔다.
돌 인형은 어제와 다름없이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어부들은 노승이 일러준 대로 그 돌들을 신령스런 산에 봉안하기 위해 정성껏 마을로 모셔왔다.
『우리 마을에선 보문사가 있는 락가산이 제일 명산이니 그곳으로 모시고 가서 적당한 자리를 찾아봅시다.』
락가산으로 돌덩이를 옮기던 어부들이 보문사 앞 석굴 부근에서 잠시 쉬고 다시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돌은 더 무거워진 듯 꼼짝도 안했다.
『예가 바로 신령스러운 곳인가 보오. 이곳 굴 속이 비었으니 여기에 모시도록 합시다.』
그렇게 해서 스물 두 분의 인형 돌덩이를 굴 속에 봉안하니 이들이 바로 오늘까지 현존하는 보문사 굴법당 3존불상과 18나한, 그리고 나반존자이다. 그 후 뱃사공들은 모두 거부가 되었다 한다.
회정대사가 금강산에서 내려와 이곳에 관음도량을 개창하고 산 이름을 락가, 절이름을 보문사라 칭한 지 14년만에 일어난 일이다. 그후 이 석굴법당은 많은 신통스런 영험이 일었다 하여 일명 신통굴이라고도 불리었다.
보문사 법당에는 옥등잔이 있었다.
참기름을 준비한 사미 스님이 옥등잔을 갖고 굴법당으로 갔다. 등잔에 기름을 부어 불을 당기고는 올려놓다가 그만 잘못하여 등잔을 깨뜨렸다. 놀란 사미승은 겁이 나서 방에 들어가 울고 있었다. 대중 스님들이 연유를 물었다. 사중(寺中) 보물인 옥등을 깨뜨렸다는 사미승의 말을 듣고 대중 스님들은 굴법당으로 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깨졌다던 옥등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옥등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어느 날 보문사에 도둑이 들어 향로, 다기, 촛대 등 유기그릇 일체를 훔쳐 달아났다. 무거운 유기그릇을 한짐 지고 끙끙거리면서 밤새 도망친 도둑은,
「이제 아무리 못 와도 70∼80리는 왔을 테니 좀 쉬어 가도 잡히지 않겠지.」
하고는 짐을 내려놓고 조금 쉬려니 바로 발 아래서 새벽 범종소리가 울렸다.
「밤길이 어두워 내가 겨우 도망친다는 게 다른 절로 온 게 아닌가.」
덜컥 겁이 난 도둑은 얼른 일어나 다시 도망치려고 짐을 지려는데 뒤에서 누가 목덜미를 탁 잡는 것이 아닌가.
『이 녀석, 어디서 무슨 짓을 못해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성물을 훔쳐 가느냐?』
『아이구 스님, 잘못했습니다. 밤새 걸었는데 보문사 경내를 벗어나지 못했다니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모두가 나한님의 신통력 때문이니라.』
새벽에 도량석을 하려고 나왔던 스님에게 잡힌 도둑은 그 후 착한 불제자가 되었다 한다.
3개의 홍예문을 지닌 이 천연동굴 법당은 지방문화재 제57호로 석실 면적 320㎡에 놓이 8m 규모. 내부에는 반월형 좌대를 마련하고 탱주(撑柱)를 설치, 그 사이의 21개 감실에 높이 30cm 정도의 나한님과 석불을 모셨다.
두 그루의 은행나무 / 강화 전등사
『스님-.』
『… ….』
『노스님-.』
동승은 백발이 성성한 노스님 앞으로 가까이 다가서며 목청을 높였다. 노스님은 마치 천년 고목인 양 눈을 감은 채 말이 없다.
하늘을 덮은 두 그루 은행나무가 서 있는 일주문 밖에 노스님은 아침부터 그렇게 앉아 있었다.
『노스님!』
사미승은 염주가 들린 노스님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스님, 관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또 무슨 일로?』
『상감께 진상할 은행을 작년의 두 배인 20가마를 내라는 전갈입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산까치 울음소리가 고요한 가을 산사의 적막을 깬다.
노스님은 육환장을 짚고 일어나 동승과 함께 일주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선재야, 너 벼슬아치 성화가 무서우냐?』
『아뇨. 다만 해마다 은행은 10가마 정도밖에 열리지 않는데…』
『그래도 바쳐야지.』
『소승은 벼슬아치들이 부처님 도량에 와서 행패를 부릴 때면 그들이 측은하게 생각됐는데 이제는 그들이 미워집니다. 스님, 어찌하면 남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선재야.』
『네, 스님.』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바라봤다. 노승과 동승은 마치 자신들의 전생과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남을 미워하는 것은 자기를 아끼기 때문이니라. 자기를 아끼는 마음은 남을 미워하기도 사랑하기도 한단다. 이는 모두 인연따라 일어나는 일이니 나의 업연으로 인해 남을 미워함은 곧 나를 미워함과 같느니라. 출가한 사문은 이런 마음을 버려야 한다. 오늘날 조정은 물론 사대부까지도 불법을 욕되게 하나 그렇다고 그들을 미워해서는 안된다. 부처님 법은 결코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니 자비로써 대해야 하느니라.』
동승은 노스님 앞에 머리 숙여 합장했다.
불교 탄압이 심했던 조선조 시절. 나라에 공물을 바치고 사역을 해야 했던 스님들은 깊은 산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따라서 많은 절이 폐사 또는 퇴락해 갔다. 이럴 즈음 강화도 전등사에도 벼슬아치와 토호들의 토색질이 심했다. 젊은 스님들은 강화성을 쌓는 데 사역나갔고 나이든 스님들은 절에서 종이를 만들어 바쳐야 했다. 스님들은 이런 어려움을 수행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10가마 이상은 열리지 않는 은행을 20가마나 공물로 바치라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종이를 만들던 한 스님이 동승과 함께 다가오는 노스님을 향해 합장하며 말했다.
『스님, 스무 가마의 은행을 어떻게 바치겠습니까?』
『글쎄 어찌하면 좋을꼬?』
『상소? 소용없는 노릇이야.』
『그럼 탁발을 해서 바쳐야 할까요?』
『그것도 안될 일. 만약 그 사실이 알려지면 우리가 좋은 은행은 다 먹고 탁발한 은행을 진상했다고 트집잡을 것이다.』
노스님 주변으로 경내 대중들이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하나 둘 모여들었다.
『너희들이 걱정할 일이 아니다. 어여 가서 열심히 공부나 하여라. 불법의 길은 각자가 하는 일 속에 있으니 소임에 충실하거라.』
노스님은 다시 동승에게 일렀다.
『선재야. 너는 곧 백련사에 가서 추송 스님을 모셔오너라.』
말을 마친 노스님은 육환장을 끌면서 선실로 들어갔다.
『그렇지! 그 스님이면 될거야. 바람과 비를 몰아오는 신통력을 지녔으니 은행 20가마 열리게 하기란 어렵지 않을거야.』
땅거미가 질 무렵, 추송 스님은 동승을 앞세우고 전등사에 도착했다.
추송 스님은 곧장 주지실로 들어갔다. 수인사를 마친 두 스님은 한동안 무엇인가 의논했다.
이윽고 노스님이 동승을 불렀다.
『선재야, 모든 대중을 일주문 밖 은행나무 아래로 모이도록 일러라. 그리고 별좌 스님은 은행나무 아래 제단을 마련하고 3일 기도 올릴 준비를 하도록 해라.』
『스님, 은행을 많이 열리게 하는 기도인가요?』
『그렇다. 어서 전하기나 해라.』
노스님은 동승을 재촉했다.
이튿날 아침부터 은행을 더 열리게 하는 3일 기도가 시작되었다.
이 소문은 곧 인근 마을에서 마을로 알려져 강화섬 전역에 퍼졌다. 구경꾼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구경 나온 아낙들도 추송 스님을 따라 절을 하면서 함께 기도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올리는 재는 그 열기가 점점 고조되어 갔다. 당대의 도승 추송 스님이 친히 3일 기도를 올린다 하니 강화섬 벼슬아치들도 호기심을 갖고 기도장에 나타났다.
『노인, 당신이 주지요?』
『그렇소.』
포졸 서너 명과 함께 나온 군관이 노스님에게 시비를 걸었다.
『이 재는 왜 올리는 거요? 나라에 공물을 바치기 싫어서 상감마마와 백성을 저주하는 기도가 아니오?』
『어찌 그런 무엄한 말을… 우리는 상감마마에게 진상할 은행이 많이 열리기를 기원하고 있을 뿐이오.』
『하하하, 은행이 어디 사람 맘대로 더 열리고 덜 열릴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어리석은 소리로군.』
군관은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비웃었다.
그때였다. 웃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군관은 얼굴을 감싸고 땅 위에 나둥그러졌다. 새파랗게 질린 군관이 정신차리고 일어섰을 때 군관의 한쪽 눈은 부은 채 멀어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구경꾼은 자꾸만 늘어났다.
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목탁과 바라소리, 그리고 염불소리가 일시에 멎었다. 신비로운 적막이 천지를 뒤덮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추송선사의 낭랑한 음성이 적막을 깨뜨렸다.
『… 오늘 남섬부주 해동 조선국 강화도 전등사에서 3일 기도를 지성봉행하여 마치는 대중들은 두 그루 은행나무에 열매가 맺지 않게 해주기를 축원하나이다. 백년이고 천년이고…』
모였던 대중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선사의 축원이 끝나자 마자 바람이 일고 뇌성이 치더니 때아닌 먹구름이 일면서 우박과 비가 퍼부었다. 그 위로 은행 열매가 우수수 떨어졌고, 육환장을 짚고 선 노승과 동승이 마주서서 크게 웃고 있었다.
이날 이후 노승과 동승은 물론 추송선사도 보이지 않았으며 관가의 탄압도 없어졌다.
또한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오늘날까지도 열매를 맺지 않는데 사람들은 이 은행나무 하나를 노승나무, 다른 하나를 동승나무라고 부른다.
삼성산의 신비 / 호압사
『음, 또 무너졌구나.』
한양에 궁굴을 건설하기 시작한 태조 이성계는 이제 절망적이었다. 기둥을 세우고 집을 완성해 놓으면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 버리기 벌써 여러 차례. 그러나 태조는 일을 중단치 않았다.
『나라 안에서 이름난 대목들을 모두 뽑아 오너라.』
태조가 영을 내리자 방방곡곡에서 유명한 장인은 모두 한양 대궐 짓는 곳으로 모였다.
몇 번이나 짓기에 실패한 대궐이기에 장인들은 심혈을 기울여 일했다. 그러나 이들의 정성도 아랑곳없이 대궐은 또 무너졌다.
태조는울화가 치밀었다.
『저 꾸물거리는 대목장이를 이리 불러오너라.』
왕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대목장이는 태조 앞에 나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네 이놈 듣거라!』
『황공하옵니다, 상감마마.』
『어찌하여 일을 게을리 하는지 연유를 말하라.』
『기둥을 세우고 건물을 완성시키면 밤새에 그만….』
대목은 움츠렸던 목을 간신히 풀며 작은 목소리로 아뢰었다.
『너희들이 빈틈없이 일을 잘해도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이냐?』
『아니옵니다. 아무리 잘해도 번번히 실패이오니 그 곡절을 알 길이 없사옵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저희 장인들과 일꾼들은 이 궁궐 일을 두려워하고 있사옵니다.』
『뭐라고! 두려워한다고? 어서 그 연유를 일러라.』
태조의 노한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저희 장인들과 일꾼들이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 잠자리에 들면 한결같이 꿈에 사나운 호랑이가 나타나 잡아머을 듯 으르렁거리며 달려든다 하옵니다. 마마, 통촉하옵소서.』
『고얀지고. 필시 짐을 우롱하려는 수작이지 그럴 리가 있느냐?』
『아니옵니다. 황송하오나 이 늙은 것두 밤마다 호랑이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있사옵니다.』
『뭣이?』
태조는 화가 치밀었으나 세우기만 하면 허물어지는 궁궐을 생각하니 괜한 말이 아닌 듯싶었다.
잠시 시름에 잠겼던 태조는 공사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니…』
임금은 그만 말을 잇지 못한 채 말문이 막혀 버렸다.
석주장이 대목장이 몇 명이 짐을 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장인들은 하루빨리 이 불안한 공사장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임금이 대노하니 신하와 감독관들은 더욱 난감했다.
『모두들 듣거라. 하루 속히 궁궐이 완성되어야 하는 이 마당에 일을 버리고 도망치려 하다니 이는 필시 상감마마에 대한 불충일진대 오늘 우두머리 몇 놈을 처단할 것이니라.』
신하의 고함소리에 장인들은 숨소리조차 크게 내쉬지 못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우두머리 장인 하나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절대 불충이 아니옵니다. 우리가 애써 지은 건물이 밤마다 무너지는 이유를 알고자 저희들은 간밤부터 이 궁궐 일터를 지키고 있었사옵니다.』
『그래? 그럼 무얼 알아냈느냐?』
『지난밤 부엉이가 우는 깊은 시각이었습니다. 반은 호랑이요, 반은 형체를 알 수 없는 상상도 못할 만큼 큰 괴물이 나타나 벽과 기둥을 모조리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태조가 소리쳤다.
『그래 너희들은 보고만 있었느냐?』
『아니옵니다. 모두 덤벼들려 했사오나 호랑이가 내는 바람이 어찌나 거세었던지 몸이 날아갈 듯해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틀림없으렷다.』
『믿기 어려우시면 몸소 확인하셔도 좋을 줄 아뢰옵니다.』
이날 밤 태조는 몸소 용장을 거느리고 궁궐 터로 나왔다. 휘영청 달빛이 어둠 속 공사장을 비추고 둘레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밤이 깊어 졌을 때 어디선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순간 다가오던 괴수가 불쑥 형체를 나타냈다. 눈을 휘번쩍거리는 호랑이 모습의 괴물은 건축 중인 궁궐로 향했다. 대궐 문 앞에 다다르더니 「어흥」천지가 떠나갈 듯 포효했다.
『활을 당겨라.』
태조의 명령이 떨어지자 화살이 빗발치듯 괴수에게 퍼부어졌다. 하지만 괴수는 늠름했다. 태조는 발을 구르며 다시 벽력같이 명을 내렸다.
『뭣들 하고 있느냐.』
그러나 벌써 궁궐은 다 헐리고 괴수는 의젓한 모습으로 늠름하게 되돌아갔다. 담력과 기개를 자랑하는 태조도 그리고 그 휘하의 용장들도 괴수 앞에서 맥을 못추고 말았다.
『아, 분하다. 한양은 내가 도읍할 곳이 아닌가 보구나.』
처소로 돌아온 태조는 침통해 했다.
『아닙니다. 전하, 한양은 왕도로서 더없이 좋은 지세입니다. 실망하지 마옵소서.』
비통에 빠져 있던 태조의 귀에 들려온 뜻밖의 소리. 태조는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흰 수염을 가슴까지 드리운 노인은 교교한 달빛 속에 성자처럼 서 있었다.
『아니, 노인은 뉘시온지요?』
『그걸 알 필요없소. 다만 전하의 걱정을 좀 덜어 주려는 것뿐이오.』
노인의 음성은 낭랑했다.
『고맙소이다. 노인장, 무슨 묘책이라도 있느지요?』
『저기 한강 남쪽 산봉우리가 보이지요?』
『아니, 저 모습은 산봉우리가 아니라 거대한 호랑이….』
노인의 손끝을 바라본 태조는 어안이벙벙해 말을 맺지 못했다. 아까 본 괴물과 똑같은 모습의 산.
달빛 속에 선명히 모습을 드러낸 그 산은 시흥에서 동쪽에 위치한 관악산 줄기의 삼성산이었다.
『노인, 저 산봉우리가 한양 도읍지를 성난 자태로 바라보는 것 같군요. 저 호랑이 산봉우리의 기를 누를 수 없을까요?』
『허허… 겁낼 것 없소. 호랑이란 꼬리를 밟히면 꼼짝 못하는 짐승이니까.』
노인은 껄껄 웃으며 호랑이 형체의 산꼬리 부분에다 절을 세우라고 일러주고는 사라졌다.
이튿날 태조는 당장 절을 지으라고 분부했다. 절이 다 지어지자 궁궐 공사는 희한할 정도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 후 삼성산의 억센 기운을 눌러 궁궐 공사를 무사히 마쳤다 하여 이 절 이름을 호압사라 불렀다
도편수의 사랑 / 강화 전등사
경기도 강성군 소재 전등사를 창건할 때의 이야기다.
아침 저녁으로 목욕을 재계하고 톱질 한 번에도 온 정성을 다하던 도편수는 어느 날 일을 마치고 피곤을 풀기 위해 마을로 내려와 주막을 찾았다.
텁텁한 막걸리로 목이나 축이려던 도편수는 그만 주막집 작부와 눈이 마주쳤다.
『너 참 예쁘게 생겼구나. 자 이리 가까이 와서 너도 한 잔 마셔라.』
작부는 간드러진 웃음과 함께 술잔을 비우고는 다시 도편수에게 권했다.
『암 들구 말구. 잔이 철철 넘치도록 따라라.』
술이 거나해진 도편수의 눈엔 작부가 더없이 예쁘고 아름다워 보였다.
『너 그 손 참 곱기도 하구나. 이 억센 손과는 비교가 안되는구나.』
『나으리의 이 손이야말로 보배 손이 아니옵니까?』
『보배라니? 거 별소릴 다 듣겠구나.』
『이 손으로 성스러운 대웅전을 짓고 계시니 보배스럽지 않습니까?』
작부가 입이 마르도록 극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거친 손을 만져주자 도편수는 그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할 정도로 기분이 들떴다.
작부는 이때다 싶어 도편수 곁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앉아며 갖은 애교를 다 부렸다.
『정말 나으리의 솜씨는 오묘하옵니다. 나무기둥 조각 하나하나가 어찌 그토록 섬세하고 정교할 수가 있는지요.』
『그래 고맙다.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섭섭할 이 솜씨를 네가 볼 줄 알다니, 오늘밤 내 흠뻑 취할 것이니라. 자 어서 따르거라.』
『나으리, 그 공사는 몇 해나 걸리나요?』
『음, 앞으로 대여섯 해는 족히 걸릴 것이다. 한데 그건 왜 묻느냐?』
『소녀가 나으리를 얼마간 모실 수 있나 알고 싶어서지요.』
『오, 거참 영특하구나. 네가 원한다면 내 매일밤 너를 찾아와서 술을 마실 것이니라.』
『소녀 더이상 아뢸 말씀이 없사옵니다.』
『네 말 한마디가 그저 이쁘기만 하구나. 이리 더 가까이 오너라.』
『나으리 이러심 안돼요. 이 손 놓으시고 오늘밤은 늦으셨으니 그만 돌아가세요. 나으리 모실 날이 오늘만은 아니잖아요.』
『허긴 네 말이 맞다.』
만취하여 주막을 나선 도편수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거르지 않고 주막을 찾아 곤드레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
그러나 작부는 매일밤 도편수의 애간장만 타게 할 뿐 쉽게 정을 주지 않았다.
『히히 목수 녀석, 오늘밤도 돈만 뿌리고 돌아갔구나.』
주막집 노파는 매일밤 돈을 물쓰듯 하는 도편수가 마치 큰 봉인 듯 작부에게 단단히 일렀다.
『얘야, 절대로 정을 줘서는 안된다. 정을 주는 날이면 그날로 돈 벌기는 틀린 게야.』
이같은 계략을 알지 못하는 도편수는 대웅전 불사가 더디어지는 것도 생각 못하고 매일 술에 취했다. 도편수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초췌해졌다. 작부는 일말의 가책을 느꼈는지, 아니면 연민의 정을 느꼈는지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제 도편수하고 살림을 차려야 할까 봐요.』
『얘, 그 무슨 소리냐. 네 덕분에 내 팔자도 좀 고쳐 볼 참인데…』
『팔자고 뭐고 더이상 그 순진한 어른을 괴롭힐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쯧쯧, 큰소리 탕탕 치더니 어느새 정이 든 모양이구나.』
『아닌 게 아니라 정도 들만치 들었어요.』
『허나 안된다. 돈도 돈이지만, 돌쇠가 알면 널 그냥 둘 것 같으냐?』
작부는 그말에 그만 흠칫했다. 돌쇠와는 오래 전부터 정을 통해온 사이로 돈만 벌면 육지로 나가 잘살아 보자고 약속한 터였다.
세월은 흘러 대웅전 불사도 어느덧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공사비로 많은 돈을 받았건만 목수에겐 동전 한 닢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도편수는 마음속으로 다집했다.
「오늘은 약속을 받아내야지. 곧 새살림을 내자고.」
주막에 이르러 막걸리를 마시며 색시를 찾았으나 보이질 않았다.
『할멈, 색시는 어디 갔기에 이렇게 늦도록 오지를 않소.』
『도편수 어른 뵈러 간다고 나갔는데 웬일일까?』
『나를 만나러요?』
『아니 그럼, 이년이 혹시 그 돌쇠 녀석하고 줄행랑을 친 게 아닌가?』
이미 나룻배를 마련하여 돌쇠와 육지로 도망간 줄 뻔히 알면서 노파는 딴전을 펴고 있었다.
『아니 줄행랑이라뇨? 나를 두고요.』
『글쎄 고것이 사나흘 전부터 어째 수상쩍다 싶더니, 아마 돌쇠 녀넉하고….』
『이런 빌어먹을….』
도편수는 술상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늘엔 별들이 어제와 다름없이 여전히 반짝였고, 바닷바람 역시 무심히 스쳐갔다.
오직 도편수의 마음만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질 듯 했다. 몇날 몇밤을 지새운 도편수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지난날의 사랑이 증오로 변하면서 그는 복수를 생각했다.
어느 날 무슨 묘책이 떠올랐는지 목수는 여인상을 깎기 시작했다.
여자의 형체 4개를 조성한 도편수는 법당 네 귀퉁이 추녀 밑에 여인상을 넣고는 무거운 지붕을 받들게 했다.
『나를 배신하다니… 어디 세세생생 고통을 받아보거라.』
장식수법이 화려한 전등사 대웅전(보물 제178호) 네 귀퉁이 용마루 밑에는 지금도 4개의 여인상 마치 벌을 서는 형상으로 무거운 추녀를 이고 있다.
이 인물형 조각은 많은 참배객과 관광객 등 보는 이로 하여금 도편수의 우매한 사랑과 복수심이 담긴 전설을 음미케 한다.
홍랑각시의 영험 <화성 홍법사>
『아니 중국 천자는 자기 나라에 여자가 없어서 조선으로 여자를 구하러 보냈나.』
『다 속국인 탓이지요.』
『아무리 속국이기로서니 조정에서 이렇게 쩔쩔매니 장차 나라꼴이 큰일이구려.』
『자, 이렇게 모여 있을 것이 아니라 어서 여자들을 피신시킵시다.』
『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누구네 집에 어떤 딸이 있는지 다 알고 있을 텐데.』
신통한 묘책이 없어 수심에 잠겨 있는 마을 사람들 앞에 드디어 관원들이 나타났다. 육모방망이를 든 포졸들을 앞세우고 외쳤다.
『얘들아, 마을을 샅샅이 뒤져 젊은 여자를 모조리 잡아 끌어내라.』
포졸들에게 끌려 나오는 여인들의 치마는 땅에 끌렸으며, 강제로 허리를 껴안고 나오는 포졸들의 입은 헤벌려 있었다.
마을에서 자색이 뛰어난 홍만석의 딸 홍랑 역시 발버둥을 치며 끌려나왔다.
『오늘 우리는 중국 천자에게 진상할 처녀를 물색하러 조정의 명을 받고 나왔느니라. 우리 고을에선 홍만석의 딸 홍랑을 진상키로 하였다. 만약 이를 거절한다면 왕명을 어긴 죄로 3대를 멸할 것이며 우리 홍법리 마을은 마땅히 폐촌을 면치 못하리라.』
관원은 득의양양하게 일장 연설한 다음 홍랑에게 말했다.
『홍랑아, 어서 분단장 곱게 하고 관아로 가자.』
어찌할 바를 모르던 홍랑은 넋을 잃고 주저앉은 아버지 홍만석의 모습과 자기만을 주시하는 마을 사람들을 보고 결심을 했다.
『가겠습니다. 나으리. 그러나 명나라에 가게 되면 모래 서말과 물 서말, 그리고 대추 서말을 가져 가게 하여 주십시오.』
『그야 천자의 애첩이 될 몸인데 무슨 소원인들 못 들어 주겠느냐. 어서 가자.』
동헌마루에 높이 앉은 명나라 사신은 곱게 차린 홍랑을 보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헤헤… 조선에 미녀가 많다더니 이거 참으로 선녀로다!』
임진왜란의 상처가 채 아물기 전인 광해군 2년(1610), 홍랑은 명나라로 떠났다.
『허- 참으로 아름답구나. 네 이름이 무엇인고?』
『홍랑이라 하옵니다.』
『홍랑이라. 이름도 곱구나. 참으로 조선에 천상의 미녀 못지않은 미인이 있었구나. 여봐라, 홍랑을 별궁에 거처토록 하고 매사에 불편이 없도록 하라.』
천자는 명을 내렸다. 천자의 후궁이 되면서부터 홍랑은 말을 잃었다.
가져온 모래를 뜰에 뿌리거나 목이 마르면 가져온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대추로 연명했다.
홍랑의 아름다운 자태는 날로 수척해 갔다. 고향과 부모를 그리며 염불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아씨, 오늘은 제발 저녁을 드십시오.』
『아니 먹을 것이니라. 나는 명나라 후궁이 되었으나 오늘까지 명나라 음식은 커녕 물 한 모금 먹지 않았으며 명나라 흙도 밟지 않았느니라.』
『내일이면 물도 대추도 떨어집니다. 이제 무얼 잡수시겠습니까?』
『내일이면 내 생명은 다할 것이나, 죽어 보살이 되어 천자를 회개시킬 것이다.』
다음날 홍랑은 세상을 하직했다.
홍랑이 죽은 지 사흘째 되던 날, 천자는 우연히 병을 얻었으며 병세는 날로 악화돼 혼수상태에 빠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천자는 비몽사몽간에 홀연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오, 너는 홍랑이 아니냐?』
『그러하옵니다. 소첩이 폐하를 구하러 왔사오니 제 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홍랑의 말소리는 허공에 울리고 천자는 두려움에 떨었다.
『폐하, 앞으로는 백성을 아끼고 불도를 닦는 착한 임금이 되십시오. 그리고 소첩을 고향으로 보내 주옵소서.』
『내 착한 임금이 되도록 힘껏 노력은 하겠으나 너를 어떻게 고향으로 보낼 수 있겠느냐. 제발 짐을 살려다오.』
『폐하, 소첩의 혼이 담긴 보살상을 조성하여 무쇠 사공과 함께 돌배에 태워 보내십시오.』
『아니 그럼 홍랑은 보살님이시었던가.』
천자는 석달 열흘에 걸쳐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며 천하유명한 석공과 철공을 모아 돌배와 무쇠 사공을 조성했다. 그러나 괴이하게도 홍랑의 보살상은 완성될 무렵이면 두쪽이 나곤 했다. 세번, 네번 다시 만들어도 마찬가지였다.
천자는 쉬지 않고 일심으로 기도했다. 어느 날 새벽 인시 북소리의 여음에 이어 인자한 음성이 들렸다.
『착하도다. 대왕은 홍랑의 마지막 모습을 보살상으로 새겨야 하느니라.』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보니 천자는 불상 앞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정신을 차려 홍랑의 모습을 그려 봤으나 영 떠오르지를 않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홀연 한줄기 바람이 일며 홍랑이 나타났다. 수척하면서도 인자한 모습 그대로...
이를 본 천자는 죄업을 뉘우치며 전신을 찌르는 아픔을 느꼈다.
『홍랑보살님, 짐의 죄를 용서하십시오.』
다시 석공을 불러 보살상을 조성한 지 백일째 되던 날 홍랑보살상이 완성됐다. 천자는 크게 잔치를 베푼 후 홍랑보살상을 12명 쇠사공과 함께 돌배에 태워서 물에 띄웠다. 돌배는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홍법리 홍랑의 고향 앞바다에 닿았다. 때는 광해군 3년(1611)의 이른 봄. 마을에선 홍랑보살의 영험을 기리기 위해 절을 세우고 홍랑보살상을 모신 후, 절 이름을 '홍법사'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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