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속에서 살아가는 일은 죄책 감과 상처를 가져다 준다; 미래를 살아가는 일은 불안과 두려움의 뿌리이다; 현재를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말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을 조심하라.
*이혼으로 하나님께서는 내 생의 계획의 초안을 찢어버리셨다.
(Dorothe Soelle)
*잡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빈손으로 나아가는 자는 얻을 것이다.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성공의 문턱에서 실패한다.
*당신이 무언가 “성취”를 하는 그 순간에 영적으로 죽어간다.
*만약 당신에게 뜨거운 가슴이 있다면 당신은 구원 받을 가능성이 있다.
*사람마다 어느 순간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고 모든 일들이 그 지점으로 인도되며 범사가 거기서부터 흘러나옴을 깨닫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 있다. 영성 지도는 피지도자가 이러한 순간을 준비하도록 도우며 그것을 기억하도록 격려하며 그 결과와 더불어 살아가도록 지원적 책임을 제공하는데 있다.
*우리가 부르짖는 욕구는 우리 자신의 자아로부터 창조적 간격을 확립하는데 있다.
*인간의 곤경은 우리의 존재(being) 자체가 하나의 큰 선물이란 사실을 인정하길 꺼려하는데 그 뿌리가 있다.
*자기중심적인 모든 삶의 계획은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작은 생각과 시원찮은 모험을 우주의 중심에 세워두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망은 이러한 자세의 불합리성을 인정하는데 있다.
*사도 바울이 탄식했던 육체는 우리의 몸이라기보다 세속세계의 삶의 스타일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오직 그 안에서 우리가 이미 살고 움직이고 존재를 발견한다.
*내적 정화가 없이는 우리의 어떤 행동도 치명적이다.
*우울증은 우리의 상처 받은 교만을 감추는 덮개이다.
*교만이란 마치 하나님의 선물이 자기 것인 체 살아가는 오만이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소멸되지 않을 것이 없으므로 죽음도 인간을 지배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 이 세상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후의 망상이다.
*이 사회가 우리를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살아가도록 만들므로 단순히 바퀴 소리에 우리가 만족을 얻는다.
*아합 왕이 잃어버린 다리에 집착 함과 같이 생명을 상실함이 가장 큰 비극이다. 동일한 비극은 우리가 보다 큰 계획을 하찮은 것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힐 때이다.
*우리 모두가 어떤 형태로든 가담 하는 자살은 우리 자신의 생명을 던짐으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미친 짓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자살이란 존재를 거부함으로 하나님의 면전에 자신의 생명 티켓을 던져버리려는 시도이다.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스스로 고문 받는다는 느낌이 모든 증오의 뿌리이다.
*원죄에 당혹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모든 일을 자신의 편의로 돌리려는 경향이 있음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원죄는“자기중심”주의이다. 이것은 나, 나를, 또는 나의 것 에 대한 위험한 중독증세이다.
*인간의 모순은 우리가 죄로 가득 찬 만큼 죄인이 아니라는데 있다.
*질투는 다른 사람들을 상처 주고 우리 자신도 그렇게 만드는 원인이다.
*자범죄는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긴장시키나 원죄는 단절시킨다.
*타락이란 우리가 받은 상처를 영속화하여 옮기는 것이다.
*영화 스타들은 종종 그들의 미모가 쇠할 때 비참해진다.
*우리는 자신의 공허함을 낙서로 채우려는 집착에 빠져들기 좋아한다. 왜냐하면 소음은 침묵 가운데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회피하는 임시적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리 각 사람 마다 가면을 벗어야만 하는 한밤이 다가올 것이다.
*조만간 우리 각자는 밤교대를 배정 받게 될 것이다.
*죄는 행위라기보다 동일시이다.
*죄는 통제의 필요성이요, 좋은 평가를 받으려는 욕망 즉 야망의 결과이다.
*어두움의 시간을 맛보고, 침묵을 알고, 겸손히 봉사라고, 약간 허기지게 살고, 자신의 궁핍을 음미하라. 그리하면 만사가 올바른 전망 속에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나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당신이 다른 사람과 당신 자신으로부터 차용해온 것으로 그것은 곧 나의 당신에 대한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행동하고, 성취하며, 수행하도록 우리를 훈련하려는 의도로 나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존재요, 성장이며, 폭넓고 활발하게 사랑 하는 일이다.
*밤, 외로움, 침묵, 떨어져 있음, 은둔, 공허, 궁핍, 무익 즉 당신의 삶의 진정한 어리석음 등을 체험하라. 그리하면 결국 당신이 누구인가를 배우게 될 것이다.
*진정 영이 가난한 사람은 오직 미친 사람이 살고 야생 부엉이가 밤에 울부짖는 길로 깊이 내려가 함께 거한다. (매튜 켈티)
*비록 악마가 각 사람의 깊은 그림자 속에 숨어 있지만 부러움, 질투, 분노와 증오로 색을 칠할 때 그 분명한 얼굴을 볼 수 있다.
*무언가 마시고, 씹고, 맛보고, 빨고, 흡연하는 유아적 욕구를 강조하는 이 사회는 결코 중요한 삶을 권장하지 않는다. (켈티)
*성령은 우리에게 미성취된 소원을 일으키는 불안의 원리이다.
*완전한 상황을 꿈꾸는 일은 부질 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언제나 겸손이 도전 받고 인내의 짐이 지워지며 연약성이 드러나도록 억압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는 고통의 피할 수 없는 원천이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깊이 상처 받는 일을 면할 길이 없다.
*하나님 없이는 불안이 우리의 유일한 확실성이다.
*헌신 없이 살기를 택하면 인간이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쪽에 헌신하려는 생각은 커다란 함정이다.
*우리는 인간의 삶, 역사, 세상과 교회의 결함에서 성령의 임재와 활동을 가장 잘 발견하게 된다.
*무존재, 무소유, 무소욕으로 우리는 모든 것에 풍성케 된다.
*각 영혼의 측량할 길 없는 심연은 하나님께서 집중적으로 무존재와 투쟁하시는 곳이다.
*인간의 본성은 의지에 머문다. 나머지는 동물이다.
*삶이란 매일 아침 그 누군가와 함께 있을 가치가 있음을 입증할 필요를 느끼며 깨어나는 소모이다.
*우리는 살아야 할 권리가 있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삶을 소진토록 운명 지워진 적자 구좌로 태어난다.
*사람이 하나님 안에 뿌리를 둔 존재임을 알기까지 삶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계속 다시 시작하는 끝없는 순환에 불과하다.
*우리가 자유를 동정심 보다 더 숭배할 때 만사가 잘못되기 시작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
회심
(의인화)
*회심을 위한 우리의 욕구는 우리의 행동이 언제나 안에서 밖으로 나온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먼저 내려가야만 한다.
*이 사회에서 회심을 위해 가장 무르익은 삶의 형태는 행함을 위한 끝없는 욕망과, 성취를 위한 끊임없는 욕구와, 결과를 위한 원색적 굶주림과, 가시적 성공에 대한 고집으로 우리를 눈멀게 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의 저변에는 스스로를 무가치 하다고 느끼는 분노의 상태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회심의 표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은사와 성취를 기뻐할 수 있을 때 드러난다.
*과거로 뒷걸을 치도록 이끌리는 상태에서 해방 받을 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현재적 자유를 누리게 된다.
*용서와 치유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우리의 가장 예민한 감각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받았던 상처와 연결됨을 인정할 때 회심이 입증된다. 예를 들면 용납 받지 못한 감정에서부터 거부당하고 밀려난 사람과의 동일시를 위한 동정심이 생겨난다.
*모든 권력의 주인인 의지는 반드시 잘 훈련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우리를 다시 불러들일 수 없게 될 것이다.
*첫 번 탄생과도 같이 중생도 고통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남 아프리카의 진리와 화해 위원회의 증언과도 같이 우리에게 고백의 용기를 주는 것은 용서의 약속이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가 신의 고통을 수반함을 보여주는 우주적 상징이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타락에서 일어날 수 없다고 느꼈을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을 생각할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즐기시는 놀이는 “패자가 전부를 차지하기”이다. 여기서는 가장 나쁜 패를 가진 사람이 최선을 다한다.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또 다른 놀이는 “잃은 자를 되찾기” 이다.
*자기 성취에 사로잡힌 대가는 자아 상실이다.
*탕자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기독교는 거짓에 불과하다.
*용서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책감을 삼켜버리신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더 이상 세상의 종이 되기를 거부함으로 세상을 섬기는 것이다.
*세상에 속했으나 세상의 삶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은 나에 대한 세상적 정의와 내가 되기를 원하는 그 사람을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즉 꼭 필요하다고 입증된 만남, 예기치 않게 열려진 길, 닫혀 진 또 다른 길, 우리가 반드시 말해야 될 필요가 있다고 느껴지는 일, 반드시 써야 한다고 느껴지는 편지 등이다. 이것은 마치 감춰진 직접적 힘이 즉 인격적이고 살아있고 자유로운 힘이 환경을 통해서 일하며 때로는 우리의 의도나 욕망과 반대로 작용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며 우리를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 간다. (에벌린 언더힐)
*누군가의 기독교 신앙을 모욕함으로 시험하는 것보다 유익한 일은 없다.
*기독교적 치유의 표지는 그 어떤 경쟁의 필요도 거부하는 데서 드러난다.
*오늘날 가장 절실한 질문은 하나님께서 존재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변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이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이미 발견된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하나님의 가장 거창한 행동은 내 죄에 대해 윙크해 주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당신은 자유를 누리게 된다.
*나는 무명의 묘비에 “그는 참 잘 살았다”는 기록을 부러워한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나 내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사람인가 이다.
은혜
(용서와 격려)
*은혜란 우리가 그것을 요구하지 않고, 소유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결코 그것을 누릴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지 않는 한 은혜로 남는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길이요, 넓이요, 높이요 깊이시다.
*은혜란 단순히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한 속성이다.
*이 세상이 줄 수 없고 흔들 수 없는 평화란 사랑하는 부모의 팔에 안겨 잠든 어린이의 맡김과 같다.
*은혜는 하나의 사건이지 결코 성취가 아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빚진 까닭에 나의 구속자로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나는 아무 것도 갚을 길이 없이 이중의 빚을 지게 되었다. (클레르보의 버나드)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했던 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우셨는데 보상의 개념이 어떻게 의미가 있겠는가?
*하나님을 사랑함에 대한 보상은 하나님이시다.
*연약성은 은혜를 향한 가능성이다.
*타락이란 이 세상의 모든 상처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선포인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통하여 여과시킬 수 있도록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부름 받았다.
*수용적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은사다.
*가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도로 말미암았다.
*구속이란 우리의 자아를 하나님의 눈을 통해 보는 것이다.
*은혜는 즉각적 평가나 보상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랑의 충동을 일으킨다.
*인간의 장점은 사실상 하나님의 선물이다.
*자비와 선으로 충만한 왕께서는 나를 꾸짖기를 멀리하시고, 사랑으로 나를 감싸 안고, 그분의 상에서 함께 먹게 하시고, 그분의 손으로 나를 섬겨주시고, 그분의 보물을 열수 있는 열쇠를 주시며, 끊임없이 나와 함께 대화하며 그분을 기뻐하며, 그분의 가장 귀한 대상으로 나를 존중함으로 대하신다. (로렌스 형제)
*6피트짜리 글라이더를 제작하는데 여러 달을 소모하고는 마을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의 탑에서 날리기 시작하여 단 일분간의 비행에 짜릿함을 느끼고 끝난 사실을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선택으로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다.
*은혜란 우리의 자아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된 놀라운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져야만 하는 사랑이다. (프랑소와 페넬롱)
*성육신이란 “우리가 여기서 함께 한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예수님은 의사이며 동시에 사랑하시는 분이셨다.
*에벌린 언더힐은 자신이 화원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을 길거리에 서서 바라보는 어떤 소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소년에게 꽃을 몇 송이 주며 집으로 가져가라고 말했다. 곧 그 소년이 되돌아 왔다.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그녀가 물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라고 그가 대답했다. “나는 그저 함께 있기를 원해요.”
*우리는 지식을 얻기 위해 믿는다. 그러나 믿기 위해 지식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어거스틴)
*그리스도 사건 안에서 하나님은 탕자와 같이 우리가 돌아옴을 체험하신다.
*오직 우리가 자유롭게 받을 때 자유롭게 줄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일은 우리의 마음의 집과 삶의 뜰을 찾아온 거룩한 방문객을 보여주는 일이다.
*침묵은 듣는 자세이다.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시16:2)
*은혜란 하나님과 어떻게 춤을 추는지를 무료로 가르쳐 주는 것이다.
사랑
(사랑받고 사랑하기)
*“영원한” 사랑을 약속함은 영원의 의미를 양적인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영광이다.
*잘하든 못하든 우리는 사랑 받은 만큼 사랑한다.
*모든 죄는 사랑에 대해 “아니요”라고 축소시키는 행위이다.
*진정한 일부일처제는 오직 하나님께만 소속되려는 헌신을 말한다.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은 우리가 사랑 받는다는 확신이다. 우리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도 불구하고..... (빅톨 유고)
*아마도 언젠가 어디선가 나는 어머니가 나의 허물을 책망할 때 그분을 끌어안고 장난스럽게 놀릴 것이다.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하나님께 사랑 받는 것은 모든 가식에서부터 해방을 받는 일이다.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감사로 받아들여 진다.
*기독교적 삶은 사랑하라는 명령과 더불어 시작하기보다 사랑 받음에 대한 응답이다.
*기독교인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무모함에 대한 가장 좋은 비유는 첫 사랑에 빠진 청소년의 어리석음과도 같다.
*자신을 사랑 받아야 할 사람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사랑하는 일 외에는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시에나의 캐더린)
*하나님의 사랑은 깨어질 수 없는 평화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안정을 가져다 준다. 그 결과 우리가 험담, 조롱, 핍박, 상처, 아픔, 질병, 그리고 불행 등에서 면역이 되게 해 준다. 그래서 마치 물이 돌 위에 떨어지듯이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영혼으로 떨어져 내린다.
*사랑 그 자체를 위한 사랑은 위대한 음악에 동참하는 것과 같다.
*나는 성취의 소망으로 자극 받은 그 어떤 사랑도 의심한다.(클레르보의 버나드)
*하나님은 보상 없이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보상에 대한 생각이 없이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내적 거룩성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다; 외적 거룩성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다.
*자신과 같이 낯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자신 안에 있는 이방인을 사랑하는 일이다.
*자신의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원수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의 갈증을 해소한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연인의 이름을 듣고 기뻐함과 같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를 위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흔히 즐기고 있는 삶의 형태의 맛을 잃을 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성공에 그 감춰진 욕망을 정박시키고 말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려는 사랑의 맛은 그 신분이 알려짐과 상관없이 작용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신실한 영혼의 표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충분히 응답하는지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결코 불필요한 군더더기 말이 아니다.
*놀이는 사랑의 씨름이다.
*기독교적 사랑은 마치 순수한 신앙이 보지 않고 믿을 때 가능하듯이 감정에 기초하지 않을 때 순수해진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왜냐하면 나는 사랑하기를 사랑하기 위해 사랑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고통도 없다. (어거스틴)
*감정의 행위로써 에로스는 그 범위가 좁다. 의지의 행위로써 아가페는 우주를 수용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내재하시는 까닭에 모든 사람들 사랑 함으로 하나님을 사랑케 된다.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기 까지 그 사람들이 가도록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
*사랑은 그 누구에게도 원수가 되는 권리를 거부한다.
구원
(건강과 전체성을 제공)
*구원이란 단어는 여러 개의 파생어를 낳는다. 즉 “치유하다”, “보존하다”,“화평을 주다”, “중심을 잡다”는 의미이다.
*구원은 감사를 통해 동기의 변화가 중심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이다.
*우리가 어떻게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가가 현재를 결정하는 까닭에 구원은 기억의 재구성을 요청 한다.
*나중이 되려는 의지는 우리가 처음과 나중이 되려는 게임의 입맛을 잃었을 때야 비로서 가능하다.
*성령께서 우리의 성향을 바꾸실 때 심지어 외모 까지도 변화된다.
*믿음은 거짓된 의식이 포기되는 마음의 진화이다.
*믿음은 안전을 위해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자아를 포기하는 신뢰를 말한다.
*믿음은 나눠줌으로써 가지며, 느끼지 않고 사랑함이며, 증거 없이 바람이며, 알지 못하고 믿는 모험이다.
*우리의 죄의식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삼켜짐으로 흐트러진 채 하나님의 자비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 때 텅 빈 무방비 상태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그러면 만사가 고요해지며 그 때부터 나는 연약을 허용케 되며, 다른 죄인들이 형제로 보이게 되며, 나의 상처들이 경이로움으로 꽃피게 되며, 타인들의 결점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하며, 비록 이상하게 보이긴 하지만, 나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부드러운 친구로 보이게 된다. (안드레 라우프)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짐으로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심을 믿을 때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
*하나님은 영혼의 신랑이시다. (클레르보의 버나드)
*나는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는 어떤 일을 하거나 무언가가 되도록 피조되었다....... 하나님은 나를 아시고 내 이름을 불러 주신다. 나는 결코 버림받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병들었다면, 그 병이 하나님을 섬길 것이다. 만약 내가 슬픔 가운데 있다면 그 슬픔이 하나님을 섬길 것이다. 질병이나 당혹스러운 일이나 슬픔은 어쩌면 우리를 훨씬 뛰어 넘은 보다 원대한 일을 이루기 위한 사건들일 수 있다. 하나님은 결코 헛된 일을 행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낯선 사람들 가운데 나를 던져 넣으실 수 도 있다. 더 나아가 그분은 내가 황폐함을 느끼게 하시며, 나의 영혼을 침체되게 하시며, 미래를 나에게서 감추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하시려는 일을 분명히 알고 계신다. (죤 헨리 뉴맨)
*고독이란 다른 사람의 부재라기 보다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존재하다”는 행함과 소유가 의미를 드러내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 외에는 우리가 추구해야만 하는 그 어떤 대상도 완전할 수가 없다.
*하나님 안에서 포기란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기에 당신이 바로 사랑 받고 가장 귀하게 여김 받는 대상임을 발견하기 위해 당신이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작별을 고하고 한 때 그렇게 귀하게 여겼던 것들을 나주어 주는 일이다.
*치유를 받는다는 것은 자아 안에서 세상을 향해 곪아 들어가는 상처들을 치유 받음을 전제하고 있다.
*클레르보의 버나드가 카톨릭 교인들과 개신교인들 모두에게 사랑을 받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우리에게 할당된 분복으로써 불안과 고독을 이해하였다. 예컨대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이성과, 죽음에 직면하여 느끼는 고뇌, 은혜를 위한 능력으로써의 연약성, 변화를 위해 필수불가결 요소로써의 은혜, 영혼의 동반자로써의 육체, 거룩한 사랑의 표현으로써의 감각, 하나님을 향한 영원한 향수병, 신성의 여성적 차원, 겸손으로부터 황홀 체험을 향한 움직임으로써의 사랑, 하나님을 향한 승천으로써의 생의 순례로 이해하였다.
*영원은 안식일 중 대안식일이다.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일 보다 우리가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방어적 태도로부터 타인에게 부가한 상처해소의 열망이란 변화를 맛보는 사람은 복이 있다.
*서약이란 의무수행 이상으로 은사의 수용을 의미한다.
*우리가 자신을 아버지의 딸로, 더 나아가 배우자나 그 아들의 자매로 인식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다. (클레르보의 버나드)
*오직 한 가지를 바라는 것은 분리되지 않은 순수한 마음을 아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유일한 욕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채워지고, 사용 받고, 온전케 되는데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위협을 받거나 상처 받을 이유가 없다.
*진정으로 존재란 결과와 관계없이 행하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영혼의 관계는 하나의 유업, 하나의 식탁, 하나의 집, 하나의 육체, 하나의 침대를 공유하는 것과 같다.
*영혼은 성장의 중심이다. 여기서 이성, 기억, 상상력이 의지라 불리는 헌신 속에서 하나가 된다.
*성자들은 한 방을 같이 쓰는 친구와도 같다. 그들에게는 한 밤을 함께 나누는 친밀함이 있다.
*하나님께서 나의 고유성을 선포하셨을 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려는 나의 집착증은 무의미해지며, 그로 말미암아, 내가 부적절하다는 느낌도 의미를 상실한다.
성화
(은혜 가운데 성장)
*기독교인은 단순히 하나의 평범한 인간으로 회복되어져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다.
*거룩성은 전인이 됨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은 평화의 예술가이며 기쁨의 모험가이다.
*중심이 잡힌 사람을 느끼기가 어렵지 않다.
*성령의 일상적 은사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갈 5:22-23)이다. 이러한 특성이 드러남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특별은사 유무를 맛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 모습에 사로잡히지 말라. 오히려 동정적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이끌리라.
*평화란 영혼 안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의 증표인 까닭에 우리는 오직 그것을 인식함으로 결코 잊지 않게 된다.
*하나님에 의한 입양으로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하지 않는다:
-외로움, 까닭은 내가 그리스도의 동행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질투, 까닭은 내가 하나님의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탐욕, 까닭은 내가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분노, 까닭은 내가 무조건적으로 용서 받고 용납되었기 때문이다.
-슬픔, 까닭은 내가 영원한 행복으로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근심, 까닭은 내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안식하기 때문이다.
-사랑 받지 못함, 까닭은 하나님께서 나를 안아주시기 때문이다.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께서 누가 이런 일을 했는지 모르실 것이라는 가정 아래 선행을 추구해 나갔다.
*모든 영적 훈련의 목적은 자유이다.
*하나님의 행동 보다 감정을 강조하는 영성에 관심을 기울이라.
*기독교인의 삶은 거룩한 욕망 보다 다른 작은 일로 이루어진다. (어거스틴)
*기독교인의 표징은 고요한 중심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평안이다.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그것은 단번에 해결된다. 그 외에 모든 것들과 함께 그것은 계속되고 또 계속된다.
*우리가 허락하고, 양육하고, 따를 수 있는 감정을 선택할 수 있는 까닭에 무언가를 원하는 것이 함정이다.
*영성이란 기독교적 삶의 한 특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그 기독교적 삶이다.
*기억은 신실성의 주된 형태이다.
*기독교인이란, 밤중에 일어나, 즉시 하나님을 향해 드릴 말씀이 있는 사람이며 아침에 일어나서 감사함으로 첫 단어를 시작하는 사람이다.
*기독교인은 사모하고, 바라고, 기다리고, 그리고 기대하는 경계 선을 넘어설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거룩으로의 부름이 우리 인생의 모든 영역을 포함하고 있는 까닭에 온 세상을 성화시키는 일은 실제로 우리의 소명이다.
기독교인의 삶
*기독교적 삶이란 너무나 단순해 보인다. 즉 당신 자신을 위해 하듯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우리는 영혼의 중심에서부터 단 하나의 행동을 필요로 한다.
*반복된 모든 행동들은 습관을 형성한다.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지닌 가장 깊은 열망의 가장 자리에서 산다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이 되기보다는 무언가를 행하는 편이 쉽다.
*충분할 때 충분함을 아는 사람이 언제나 충분히 가질 수 있다.
*매일 아침에 새로운 사람이 깨어 난다.
*기독교인이란 위로 받기 위해 일하지 않고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일한다.
*기도란 이 세상의 고뇌를 하나님께로 치켜드는 것이다.
*내가 죽기 전에 온전에 이를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는 것이 지나친 일일까?
*하나님의 두드리심으로써 방해를 받아들이라.
*사랑과 이기심, 진리와 거짓, 삶과 죽음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을 결코 허용하지 말라.
*성육신은 이 세상에 동참하는 기독교적 모범이다.
*사람은 안팎으로 하나님께 신실해야만 한다.
*사고와, 욕망과, 행동들로 발전 되기 전에 부정적 충동들에 사로 잡히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가 더불어 행하는 성령만큼 무엇을 행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비폭력이 억압자의 마음을 즉시 변화시키는 일을 드물지만 비폭력을 사용하는 영혼에게 즉각 어떤 일을 일으키기는 충분하다.
*자신에게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은 타인을 위한 절대적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성 프란시스코는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왕의 군중으로 예우하였다.
*절반만 기독교인이 되기는 결코 불가능하다.
*낯선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미소를 보이면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기독교인의 평생과제는 일생을 거쳐 서서히 형성된 습관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자연적 삶의 방식이 되기까지 제2의 천성을 획득하는데 있다.
*하나님 안에서 견고히 뿌리를 내림으로 우리는 융통성이 있으면서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으며, 헌신적이면서 지나치게 엄격하지 않고, 도전하면서도 방어적이지 않고, 용서하면서도 무르지 않고, 증거 하면서 조종 하려 들지 않게 된다.
*쾌락과 기쁨 사이의 광대한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은 복되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감자를 삶을 수 있을 때 바른 생각을 갖기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어려운 일을 감당하거나 또는 부적절한 장소에서 인기 없는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다. (에벌린 언더힐)
*행동은 죄악도 덕목도 아니며 그 행동이 자동적으로 따르게 되는 마음 상태에 달려있다.
*하나님의 법이 우리의 행동을 올바르게 만드는 것과 같이 우리의 방을 깨끗이 청소할 자가 누구인가? (죠지 허버트)
*기독교인들은 볼 수 없는 것을 꿈꾸며, 알지 못하는 것을 믿으며,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헌신한다. 얼굴에 기쁨이 가득 찬 미소를 띄고서...
*하나님께서는 매우 싼 값에 거룩성을 파신다. 빵 한 조각, 값 싼 옷 한 벌, 냉수 한 잔, 호주머니 속에 있는 동전 한 닢 등과 같은....
*기독교인은 인간에 대한 뿌리 깊은 비관주의자이나 하나님께는 어쩔 수 없는 낭만주의자이다.
*서정적 단순성과, 고요한 기적과, 측량할 수 없는 신비는 기독교인의 일상적 양식이다.
*기독교인이 통과하기 원하는 시험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포기함
-순수한 사랑의 동기에서부터 핀 하나를 고를 수 있는 능력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단순히 하나의 세포가 되기에 만족하는 일이다.
*성령은 만물과 “함께하심”이다.
*성이란 영과 육의 즐거운 교차이다.
*하나님의 현존은 우리 주위에, 우리 안에, 우리 사이에, 언덕과, 숲 안에, 어둠과 무거운 짐 속에, 슬픔과 웃음 속에, 어디서 나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웃을 수 있고 그와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된다. 물 위를 걸으며, 다볼 산에 올라가며, 감람산과 갈릴리 가나를 함께 걷는다. 그와 함께 어디든 언제든 동행한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다. (폴 폴센)
*하나님께서는 낯선 사람을 통해 우리와 대화하기를 좋아하시는 것 같다.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이 어떤 사람이든 자신의 전 영혼을 쏟아 붓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
*잘만하면, 일도 의미 있는 기도가 된다.
*일반적으로 기도는 나와 너의 대화로써 시작된다. 그리고 나면 침묵의 연합으로 끝이 난다.
*사막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악마”를 물리칠 수 있는 이러한 핵심무기들을 발견하였다. 즉 돈을 사랑치 않게 되며, 분노를 극복하며, 자만을 상실하며, 빈자를 사랑하며, 모든 사람에게 관대하며, 낯선 사람을 환대하며, 위협 가운데 침착하며, 범사에 겸손한 열매를 맺게 하는 금식과, 깨어있음과, 기도와, 성경 말씀이 바로 그 무기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들은 그리스도께 충성된 삶을 살았다.
*아주 작은 일로 들릴지 모르나,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잘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 되었다는 말은 피조물의 공동창조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기독교인과 세속인의 차이는 그 동기에서 구별된다.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면 결과 보다 일 자체가 더 중요하다.
*만약 성령의 은사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면 우리가 무엇을 더 바랄 수 있단 말인가?
*메마름, 우울, 또는 권태의 계절에 당황할 때 당신이 그녀의 사랑을 느낄 수 없으며, 공허하고 냉담하며, 그녀를 그리워하며, 그녀의 명백한 놀음에 당신이 지쳐있음을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고하라.
*리수의 테레사 (“작은 꽃”)는 일상생활의 사소한 임무를 전 우주와 조화를 이루는 데 필수적인 것과 동일시함으로 자신의 “작은 길”을 이해하였다. 그렇게 봄으로써 작은 일도 사랑으로 행해져야 하며 가장 관심이 집중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 이유는 작은 일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현존의 증거는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마11:5) 일이다.
*마음에 있는 내용을 말하도록 당신의 입을 훈련시키라.
*암으로 죽어가는 목회자 친구가 자신의 동료에게 이렇게 고별인사를 남겼다:
나는 오랬 동안 병을 앓았고 참으로 고통스러웠으며 이는 내 일생 중 가장 어렵고 큰 시련의 때였습니다. 이런 때 당신이 내게 보여준 포옹과, 입맞춤과, 지원과 관심, 접촉과, 편지와 카드, 전화와 방문, 그리고 나를 돕기 위해 이 시기에 당신이 내게 행한 모든 일들이 얼마나 내게 큰 의미를 주었는지 당신이 알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엄청난 지원과 예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이 나에게 매일 힘과 평안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나는 이제 그 모든 졸업장과, 학위와, 상패와, 수료증과, 수상품과, 명예와, 기념 핀과 메달, 표창장과, 기념물과 업적을 뒤에 남겨두고 떠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 앞에서 빈손으로 서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만이 나에게 천국 문을 열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일이 당신에게 달린 것처럼 일하라; 모든 일이 하나님께 달린 것처럼 기도하라. (로욜라의 이냐시오)
*은혜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당신을 알 수 있는 지혜를, 당신을 추구할 수 있는 부지런함을, 당신을 기다릴 수 있는 인내를, 당신을 볼 수 있는 눈을, 당신을 묵상할 수 있는 가슴을, 당신을 선포할 수 있는 삶을 주십시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능력을 통해.... 아멘. (성 베네딕트)
*우리가 “한 가지 삶의 방식”에 헌신할 때 “삶의 양식”이 그 부수적 결과로 나타난다.
*영원의 목표는 온전한 황홀경이다.
*육체를 영혼의 선하고 신실한 동무로 대우하라. (클레르보의 버나드)
*만약 더 이상 탐욕에 빠지지 않는다면 악의 터전을 상실케 된다.
*어린 아이 같이 되면 현재의 즉 각성을 맛보기 시작하게 된다.
*모든 사람마다 잠재적 이웃인 까닭에 이방인이란 없다.
*하나님을 위한 사람이 되심으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람이 되셨다.
*계속적 반복으로 말미암아 형성되었으나 지울 수 없는 것은 오직 망각이란 재앙에 대항하는 소망이다.
*에로스를 아가페와 연합시킴으로 기독교적 삶은 건전한 도취에 빠져들게 된다.
*사막의 교부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팔도록 말해주었던 바로 그 책을 팔았다.
*기쁨을 가져다 주는 선물은 자신을 잊게 하는 자유이다.
*신비주의와 혁명이 포옹할 때 우리는 진정한 한 기독교인을 보게 된다.
*어떻게, 언제, 얼마나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의무라는 낡은 법 아래에 살도록 만든다.
*영성이란 하나님께 대해 말함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대화로 옮겨갈 때 비로서 시작된다.
*야망, 지위, 소유, 그리고 영향력의 호소력이 상실될 때 부러워함으로 적을 만드는 능력도 그렇게 된다.
*성 프란시스는 그의 강한 도시가 흔들릴 수 없다는 자만심에 빠져 들기보다 그 도시가 타락에 빠져 들지 않았음을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G.K. 체스터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가장 귀찮은 허드렛 일도 마다하지 않으려는 열망이다.
*기독교인의 우정에는 나무, 돌, 은하수, 현관 앞에 있는 개구리까지 포함된다.
*기독교인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향한 순종으로 가장 잘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망에 신실함으로써 그러하다.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한 몸짓을 매일 실천하기 위한 몸단장 연습이다.
*우리가 서로 함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기만 하면 만사가 달라질 것이다.
*쌓아두는 것은 넓히는 일이요, 단순화하는 것은 깊이를 추구하는 일이다.
*염려는 결코 유익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근심은 우리의 에너지에 대한 좋지 못한 투자이다.
*무엇이든지 우리의 현재를 빼앗아 가도록 허용하는 일은 결코 대치될 수 없는 것을 훔쳐간다.
*하나님께 사랑 받는다는 것은 세상과 다른 사람들에게 완전히 개방적이 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보상으로 그들의 사랑을 더 이상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국은 그 어떤 것에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끝없는 추구의 체험이다. 즉 깨어있음 가운데 도취이며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고 사랑함이다.
*기독교인은 연결부호(-)로 표현되는 사람들이다. 즉 전사-수도사 또는 혁명가-성자와 같은 표현으로.....
*청지기란 마치 자신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처럼 가질 수 있는 사람이다.
*욕망과 필요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은 구속 받은 식욕의 표징이다.
*바깥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독교인의 삶은 영웅적으로 보여야만 한다. 즉 공포에 직면하여 인내하며, 의심을 뛰어 넘어 견디며, 오해 받을 때 침묵하며, 비판에 감사하며, 야망을 억누르며, 분노를 거부하며, 부적합하고 고되며 보상이 따르지 않는 일을 겪으면서 잘 참아내야 한다. 안에서 보면 이는 단순히 하나님의 은사이다.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물으실 질문에 대답한 준비를 갖추어야만 한다. 내게는 이런 질문이 있을 것이라 도박을 걸어본다. 너는 깊이 있게 살았고, 크게 생각했고, 열정적으로 사랑했으며, 많은 아름다움을 생산해 냈고, 이런 일들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졌는가?
교회
*나는 교회의 딸이다. (아빌라의 테레사)
*내 어머니 교회의 심장 안에서 나는 사랑이 될 것이다. (리소의 테레사)
*교회의 주된 임무는 사랑의 예술에 대한 훈련 과정이 되는 일이다.
*사회나 개인에게 있어서 교회는 도피를 방지하도록 부름 받았다. 결국 모두가 거울을 들여다보게 되어야만 한다.
*에클레시아 (“큰 교회”) 안에 언제나 에클레시올라(“작은 교회”)가 있었다. 외적으로 친밀한 그룹과 내적으로 영혼의 포옹이 이루어지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충만이 될 수 있다.
*우리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의 바람은 소속감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우리의 입양 증명서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최고의 기적은 주유소 옆에 있는 곰팡이 냄새 나는 교회 건물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이 되게 하신 일일 것이다.
*교회의 가장 큰 실패는 복음을 그토록 복잡하게 만들어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핑계거리를 제공하는 경향에 있는지 모른다.
*교회와 영혼은 쌍둥이 신부이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왜냐하면 고고학자들이 인간의 증명을 그 어디서 발견하든지 그것은 영적인 내용의 집단적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몸으로써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 우리 각 사람을 소속감과 치유로 어루만져 준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일도 있다; 일이 있는 곳에서 기독교인은 세상을 인간화하는 교회이다.
수도원
*수도사가 (남녀를 불문하고) 되는 일은 전심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방법에 불과하다.
*수도사를 구별해 주는 것은 그들이 무한정 외롭기 때문이 아니라 그 외로움 가운데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켈티)
*어떤 수도사가 자기는 수도원에서 자기 만족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머잖아 그곳을 떠나게 될 것이다. 어떤 수도사의 관심이 기도에 있다면, 어려움에 대한 어떤 불평에도 불구하고 그는 머무를 것이다. (죠지 힐러리 2세)
*순례자로써 불교도의 삶에서 상당 부분 배울 것이 있다. 즉 집 없이 떠도는 삶, 방랑자, 거지와 같은 모습이다. 그는 대나무 모자 하나를 쓰고 수도원에 나타나며 짚신을 신고, 자신이 짠 옷을 입고, 면도날이 든 종이 백을 목에 걸고 다니며, 구걸용 밥그릇 하나, 몇 권의 책, 자신의 장례식을 치르는데 필요한 만큼의 돈을 소유하고 다닌다. 그는 적어도 한 번 이상 문전박대를 당한다. 그러나 만약 잘 인내한다면, 자신이 숙박하는 곳에서 가로 3자 세로 5자 넓이의 참선처(參禪處)를 제공받게 될 것이다. 거기서 그는 자신에게 중요한 모든 것을 발견하게 된다.
*수도원의 훈련은 우리가 형제나 자매의 짐을 느낄 때 비로서 시작된다.
*사막의 어른들은 수도사의 적절한 의상을 생각할 때 어떤 종류의 옷이든지 밖에 던져 삼일 동안 아무도 가져가지 않으면 합격으로 간주했다.
*수도원은 사랑과 칭찬이란 두 기둥을 가지신 하나님 안에서 우주의 재창조를 기대한다.
*침묵은 한 사람의 주변에 평화의 영역을 형성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현존을 거부할 수 없게 된다.
*여명의 틈새에, 어둠과 빛 사이의 특별한 순간에 부딪힘으로 수도사는 사라져가는 세상과 새롭게 태동하는 세상 사이의 전선에 우뚝 서게 된다.
*심오한 기독교적 삶이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현실주의자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을 높은 산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몰아주는 획기적 원동력으로써 그들은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을 추구하려는 헌신으로써 수도원적 서원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 사람을 찾아주시지 않으면 지키기 불가능하다.
*서로 상처를 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수도원에서 상호 용서는 매일을 과제가 된다.
*수도원의 목적은 사랑하는 사람을 키우는데 있다.
*안정의 서원은 우리가 십자가를 피하지 않는다고 보장하는 인내의 외적 서원이다.
*서원이 없이는 세상적 가치를 뒤집겠다는 기독교인의 생각은 엉뚱한 무정부 상태에 머물고 말 것이다.
*수도사가 된다는 것은 매일 자신의 우상을 성공적으로 파괴할 것에 동의한다는 의미이다.
*성회 수요일에 맨발로 걸으며 마치 크리스마스 전야처럼 대강절의 잔을 마시라.
*수도사는 그 영혼 안에 모든 피조물을 향한 광대한 열망이 있음을 인정하는 훈련을 받기 위해 세상에서부터 물러난다.
*어떤 사람에게 수도원은 삶의 한 방식인 동시에 만인을 위한 영적 병원이 될 수도 있다.
*사막의 교부인 아바 푀멘이 만약 한 형제가 성찬식 기도 가운데 조는 것을 보았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자 “나는 그의 머리를 내 무릎 위에 눕히고 편안히 쉬게할 것일세”라고 대답 했다.
*그 신화적 운둔 생활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매일의 시간 가운데 일부분을 단순히 무익해 보이는 행동을 위한 시간으로 남겨두었다. 이런 분리를 통해 매일의 생활 가운데 빛과, 매력과,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다.
첫댓글 !!!!!
Hey, my friend, what you me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