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갯마을의 무대인 부산 기장군 일광면 학리항. 스무채의 초가가 삿갓 모양 옹기종기 엎딘 마을은 분주한 어항으로 변해 있다. |
| 오영수 문학기행에 나선 20일은 ‘갯마을’의 시원한 바람이 그리울만큼 장마끝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기행팀은 오영수의 대표작 ‘갯마을’의 무대에 앞서 그의 고향 언양을 찾았다.
언양은 오영수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미나리 강둑에 말같은 가시내들이 박 속같은 다리를 허벅지까지 걷어올리고 미나리를 뽑아주던 내 고향’이다.
난계(蘭溪) 오영수의 생가는 울주군 언양읍 동부리 313번지로 언양초등학교 운동장 북쪽 끝 체육관 바로 옆자리인데,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언양초등학교 동창들이 교정 한켠에 세운 ‘오영수 문학비’가 위안이었다. 이날 초청강사로 동행한 대하소설 ‘남도’의 작가 정형남씨는 문학비 앞 나무그늘에서 선생의 삶과 문학을 회상하듯 들려주었다. 정 작가는 선생이 말년에 낙향해 울주군 웅촌면 곡천리 침죽재(沈竹齋)에서 기거할 때 사숙하며 임종까지 지켜본 선생의 마지막 제자.
난계 선생은 가난한 집안의 4남매 중 장남이었다. 언양보통학교에서 월반을 거듭해 2년 빨리 졸업할 정도로 두뇌가 명석했으며, 글 뿐 아니라 글씨 그림 음악에도 능했다. 학비가 싼 사범학교에도 갈 수 없었던 선생은 집안의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우여곡절 끝에 동경 국민예술원을 졸업했다. 28세이던 1938년 결혼한 선생은 언양에서 ‘청년회관’을 열고 마을 젊은이들에게 역사와 한글 등을 가르치다 일제로부터 불령선인으로 낙인 찍혀 만주로 피신하기도 했다.
난계 선생은 만주에서 돌아와 어촌인 부산 기장(당시 동래 기장)으로 이사했는데, 여기서 문학인생의 결정적인 계기를 맞는다. 김동리의 백씨 범보를 통해 김동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었다. 해방과 함께 선생은 부산경남여고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본격 문학수업에 들어가 49년 9월 김동리의 추천으로 ‘신천지’에 ‘남이와 엿장수’를 발표, 문단에 데뷔한다. 그리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머루’가 입선되면서 본격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전쟁이 발발하자 청마 유치환과 함께 종군작가로 참전하기도 한 선생은 1953년 ‘현대문학’을 창간하면서 서울생활을 시작한다. 54년 제1창작집 ‘머루’를 발간했으며 이어 1965년 제5창작집 ‘수련’을 내놓기까지 왕성한 활동을 보인다.
그러나 선생은 ‘현대문학’ 창간멤버였던 조연현과의 갈등으로 66년 오랜 직장을 떠난다. 설상가상으로 위궤양 수술까지 받아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선생은 고향과 자연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76년 제6창작집 ‘황혼’을 출간한 후 이듬해 3월 침죽재로 낙향한다.
그런데 선생은 왜 고향인 언양이 아닌 웅촌으로 가게 됐을까. 그의 글 ‘낙향산고’는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
|
|
사진 위부터 언양읍 송태리 내곡의 오영수 묘소에서 기행팀. 언양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는 오영수 문학비. 울산시 남구 문화원 뜰에 있는 오영수 문학비. |
| ‘그러나 고향에는 가기 싫다. 뜨내기 일군들이 근 일년이나 들끓는 바람에 시속 물결을 타고 다방과 극장이 생기고 가시내들이 껌을 씹고, 쌘달을 끌고… 나는 이미 고향을 잃어버렸다. 차라리 타향에서 마음속으로 고향을 그리면서 살아가고 싶다.’
웅촌은 고향과 가까운데다 여동생과 고모가 살고 있어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웅촌 곡천리에서 말년을 보내다 고향인 언양에 묻혔다.
기행팀은 정형남씨의 안내를 받아 언양읍내 송태리 내곡 야산 기슭의 선생 묘소를 찾았다. 언양초등학교에서 걸어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무더위로 일행은 팥죽같은 땀을 쏟아야 했다. 마을 뒤 대숲을 지나 산길에 접어드니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솔향같은 운치를 뿜었다. 남향의 묘지는 아늑해 보였고, 서예가 농재 박후상씨가 쓴 ‘작가 오영수 여기 잠들다’란 글이 새겨진 묘비는 선생의 성정처럼 단순미가 느껴졌다.
일행은 산을 내려와 난계 선생이 말년을 보낸 침죽재로 향했다. 부산~울산 국도변 웅촌읍에 내려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앞장 선 정 작가가 마을 뒤편 대숲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외쳤다.
“침죽재가 없어져 버렸어굩”
예전 침죽재였다는 곳은 밭으로 변해 있었다. 주변의 몇 그루 감나무만이 이곳이 예전에 집터였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었다. “4년전에만 해도 분명히 침죽재가 거의 옛날 모습으로 있었는데…”하며 말끝을 흐리는 정 작가는 아쉬운 마음이 역력했다. 정 작가의 설명을 들은 일행들은 “울산시의 문화 마인드가 한심하다”며 성토했다.
난계 선생은 1977년 3월 이곳에 와 79년 5월 타계할 때까지 3년 넘게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며 집필활동을 했다.
정 작가는 젊은 시절 방랑을 하고 있었는데, 난계 선생으로부터 “문학수업을 하러 오라”는 편지를 받고 침죽재로 들어와 사숙을 시작했다. 선생은 아들 윤과 노상 술마시며 방황하는 정 작가를 눈여겨 봐왔던 것 같다. 선생은 타계한 해인 79년 정 작가를 ‘현대문학’에 추천해주었다. 선생의 마지막 추천이었다.
정 작가는 대숲을 가리키며 “선생은 대숲에서 자주 문학강의를 해주었다”며 “‘겉멋을 부리지 마라, 알맹이가 실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했다”고 말했다. 또 선생은 처음 보면 냉기가 느껴질 정도이지만 가까이 지내고 보면 따뜻한 인정주의자라고 말했다.
난계 선생의 문학을 관통하는 정서 또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다. 그의 주인공은 자연과 자연 속의 순진무구한 사람, 혹은 소외된 인간들인데, 선생은 이들에게 언제나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그는 단편소설만 썼고, 한국 서정소설의 정점으로 평가된다. 그런가 하면 현실인식이 부족하고, 인간성 탐구가 소극적이다는 비판도 받았다.
정 작가는 이러한 매도는 부당하다고 잘라 말했다. 선생은 삶과 현실을 그리되 그것을 넘어서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것을 담는 그릇으로 선생은 서사적·리얼리즘보다는 서정적 구조를 택한 것 뿐이라는 것이다. 선생은 이데올로기보다 문명이 더 인간성에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연을 문명의 위협에 대한 구원으로 생각했다. 자연과 원시공통체로의 귀향의식이 선생의 문학에서 나타나는 것은 이런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선생은 79년 초에 각 지방의 특징을 밝힌 ‘특질고’의 필화사건을 겪고 심신에 돌이킬수 없는 충격을 받아 안타까웠다는 정 작가의 말을 끝으로 일행은 침죽재(터)를 나와 ‘갯마을’의 무대로 향했다.
그곳은 현재 기장군 일광면 학리다. 일행이 찾았을 때는 ‘덧게덧게 굴딱지가 붙은 모 없는 돌로 담을 쌓고, 낡은 삿갓 모양 옹기종기 엎딘 초가가 스무 집 될까말까’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그만 멸치 후리막’ 대신에 긴 학리 방파제와 원양어선과 멸치잡이 어선들이 가득한 학리항이 버티고 있었다. 다만 작품에서 ‘달음산 마루에 초아흐레 달이 걸렸다’고 했던 달음산이 눈앞에 다가서 있고, 마을 중간에 당산나무를 방불케 하는 수아름드리 소나무가 ‘갯마을’의 실제 무대임을 웅변해주었다.
1953년 발표된 ‘갯마을’은 갯마을에서 태어난 해순이가 농촌으로 개가했다가 갯마을이 그리워 되돌아 온다는 단순한 줄거리다. 이 소설은 해순의 삶이나 갯마을이라는 자연을 그리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 본연의 회귀성을 말하고 있다. 이는 난계 문학을 관통하는 사상이다.
정 작가는 이날 “1978년 선생과 이곳에 와 낚시를 한 적이 있는데, ‘일광에 살 당시 이곳에 자주 낚시하러 왔다가 작품을 구상하게 됐다’는 말을 선생이 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학리 인근 일광면 이천리에 「오영수의 ‘갯마을’의 현장」이란 표지석이 기장문인협회 이름으로 세워져 있었다. 정 작가와 기행팀은 이곳은 영화 ‘갯마을’의 촬영지일 뿐이라며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천리는 횟집마다 ‘갯마을’ 덕택인지 손님들로 북적댔다. 일행은 장어구이에 소주로 여정의 피로를 풀었다. 정 작가는 일행들의 권유로 단가 ‘쑥대머리’를 구성진 중도제로 불렀다. 그의 목소리엔 침죽재 망실의 서운함과 스승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묻어났다. / 조송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