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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기 바람은 가벼운 몸을 흔들며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다가 문득 어느 작은 집을 지나게 되었대요.
집 주위엔 잎사귀가 별로 없이 키만 삐죽한 나무들이 심겨 있었습니다.
작은 창문이 열려 있기에 아기 바람은 살그머니 안으로 들어가 보았지요.
방 안엔 여러 층의 시렁이 걸쳐져 있었고 그 위에는 밖의 나무에서 꺾어온 듯한 나뭇잎들이 가득 놓여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커다랗고 못생긴 애벌레들이 그 잎사귀에 붙어서 열심히 갉아먹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푸르고 싱싱한 잎들이 순식간에 구멍이 나서 없어지는 것을 보니 바람은 밖에 선 앙상한 나무가 몹시 가여웠습니다.
"그렇게 다 갉아먹으면 나무는 어떻게 자라니. 저렇게 여윈 가지 좀 봐.
너희들이 잎들을 다 먹어치워서 자꾸만 잎들을 다 잃어버리니까 햇빛에서 영양분을 받지 못해 그렇잖아."
"응? 아기 바람이구나.
앗! 가까이 오지 마. 뽕잎을 흔들면 우리가 떨어진단 말이야."
"으응? 뽕잎이라고? 너희들이 먹고 있는 게? 음, 그렇다면 너희들은 누에로구나.
전에 들은 적이 있어. 너희들이 비단실을 만든다는 것을.
그런데 생각보다 못생겼는걸."
말로만 듣던 누에를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 다가가려 하는데 그때까지 곁에서 흐뭇하게 누에들을 지켜보던 농부가 창문을 닫으려 했습니다.
아기 바람은 부리나케 창문을 빠져나왔지만, 뽕잎을 먹는 누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어요.
얼마가 지났습니다.
아기 바람이 다시 집 앞을 지나치다가 닫힌 창문 너머로 힐끔 보니 누에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사이 많이 커져 있었습니다.
저렇게 편안히 먹이를 먹고 잠을 자는 누에가 애기바람은 부럽기도 하고 샘이 났습니다.
자신은 늘 좁고 얕은 골짜기 사이로만 다녀야 했거든요.
조금만 벗어나면 수많은 나무와 풀 더미 사이에 엉켜 길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늘 엄마 바람을 따라다녀야 하는 자신에 비해 저렇게 편안히 잠을 자는 누에를 보니 심술이 났지요.
또 얼마가 지났습니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자 아기 바람은 엄마 몰래 골짜기 사이를 빠져나와 한참 놀다가 다시 누에가 자라는 집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열린 창문을 타고 들어가니 이번에는 입에 거품을 뿜으며 어떤 누에 하나가 하얀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거예요.
아기 바람은 생각했지요.
'그렇게 게걸스럽게 먹어대더니 결국은 먹은 것 다 게워내고 죽는구나.
저렇게 아래쪽에서부터 뻣뻣하게 굳어가는 것 좀 봐.'
주는 것 없이 미우면서도 한편으론 가여운 생각이 들어 살며시 다가가 누에에게 물었습니다.
"많이 아프니? 얼마나 아프면 거품을 다 토하며 몸이 굳어질까?"
".... 참 이상하구나. 너는 세상을 많이 돌아다녀 봤을 텐데 내가 왜 죽는다고 생각하지?
우리는 몸을 바꾸기 위해 고치를 짓는 거야.
이 몸으론 제대로 된 날개를 갖고 하늘을 나는 누에나방이 될 수 없거든!"
"꼭 그렇게 자신을 스스로 가두어야만 하니?"
"가둔다고? 하하, 두고 보렴.
지금은 이렇도록 밋밋한 허리지만 이 탈바꿈의 과정이 끝나면 아름다운 내 모습에 놀라게 될걸? 내 날개에 네 손이 닿을 겨를도 없이 말이야.
내가 좀 빨라서 그렇지 다른 누에들도 곧 나처럼 고치를 짓게 될 거야."
누에의 말을 잘 믿을 수 없었지만, 아기 바람은 고개를 끄떡거리고 창문을 빠져나왔습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누에가 좀 괘씸하게 생각됐지만 얼마 전 알에서 깨어나는 새를 본 기억이 났거든요.
그 작고 하얀 알에서 깨어나는 새들의 모습은 참으로 신기해서 한참이나 둥지 주위를 맴돌았지요.
아기 바람이 숲을 낮게 지나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바르르 떠는 기척이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살펴보니 풀줄기 사이의 커다란 거미줄에 작은 애벌레가 걸려 있었습니다.
애벌레는 입에서 허연 거품을 내뿜으며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거미가 부지런히 입에서 실을 뽑고 다리를 내저으며 애벌레를 거미줄로 칭칭 감고 있었습니다.
"작은 애벌레야, 너도 지금 탈바꿈을 위해 고치를 틀고 있구나.
그런데 너는 스스로 네 입으로 많은 실을 품어내지 못하는 모양이지.
음, 그동안 먹이를 부지런히 먹지 않았나 보구나.
네 곁의 큰 벌레가 네 엄마니? 너를 도와주고 있는 걸 보니……."
재잘거리는 아기 바람의 소리에 겨우 몸을 한번 움직인 애벌레가 힘들게 말을 했습니다.
"으으. 바, 바람이니? 네, 네가... 나를 도와주면 좋...을 텐데……. "
"무슨 소리니? 내가 너를 돕다니?
나는 내 입으로 실을 뿜어내지도 못할뿐더러 네 곁에 가다간 네가 애써 싸놓은 실들이 다 날아가 버릴 텐데?"
언젠가 다가간 누에에게 창피를 당했던 기억이 나서 잘난 척하며 아기 바람이 재빨리 말했습니다.
"세게... 나, 나에게 다가와 줘. 그러면, 나를 에워싼 거, 거미, 줄, 을 끊, 을 수 있... 악!"
가만히 동향을 살피던 거미는 애벌레가 말을 더 하기 전에 재빨리 허리에 독침을 꽂았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먹이를 거미줄로 칭칭 감았습니다.
이젠 웬만히 바람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게 말이지요.
그것도 모르고 아기 바람은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이상하네?
내가 무엇을 도울 수 있다는 거지?
곁에 제 어미가 저렇게 극진하게 다해주는데 말이지.
그런데 저 애벌레는 누에와 달리 꽤 아파하네."
아기 바람은 나중에 저 고치에서 얼마나 예쁜 아기 거미가 나오나 싶어 그 위치를 자세히 봐두었습니다.
사실 거미의 모습은 바람이 보기엔 너무 무서웠거든요.
산 너머 조금 더 놀러 가려고 몸을 크게 부풀리려는데 문득 엄마 바람이 다가왔습니다.
"어디 갔었니?
너를 찾느라고 이 골짝 저 골짝을 다 뒤졌잖아.
그렇게 혼자 돌아다니다 길을 잃으면 너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돼.
지금이야 튼튼한 네 어미 덕분으로 네가 지나가면 나뭇잎이 손뼉을 치며 흔들고 풀들이 네게 절을 하지만 말이야.
우리는 한데 몰려다니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엄마? 고치는 엄마가 대신 지어주기도 하나요?
저기 저 숲속에서는 커다랗게 생긴 벌레가 아기 애벌레의 옷을 입혀주던데요?"
"응? 어디 보자.
음……. 그건 네가 잘못 안거야.
그건 거미가 애벌레를 자기 먹잇감으로 잡아먹으려고 준비하는 거야."
“예? 그럼, 그것은 그 애벌레가 고치를 짓는 게 아니었나요? 아, 나는……."
아기 바람은 애벌레의 죽음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며 몹시 상심했습니다.
'그래, 그때 내가 세게 불었다면 거미줄을 끊을 수 있었을 텐데.'
잘 알지 못해서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동풍은 이제부턴 스쳐 가는 여러 가지 일들의 의미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세상은 거미줄에 칭칭 감겨 조금만 방심을 하면 쉽게 위험에 빠질 수 있는 곳이라 생각되어 아기 바람은 더욱 겁을 먹게 되었지요.
며칠 후 다시 작은 집 앞을 지나치다가 아기 바람은 누에가 궁금해졌습니다.
열린 문으로 살그머니 들어가 보니 누에들은 한창 고치를 짓고 있었습니다.
누에들을 보는 순간 아기 바람은 불쑥 그들을 곯려주고 싶은 심술이 들었습니다.
"너희들 참 열심히 고치를 틀고 있구나.
밖에서 아무리 매서운 추위가 닥쳐도,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고치 속에서 끄떡도 없겠구나.
밖에서 누가 얼어 죽든 말이야."
"……."
"그런데 너희들이 짓고 있는 고치가 너희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것으로 생각하니?"
".... 무슨 말이니?"
"음, 그러니까 말이지, 너희들이 짓는 이 고치실이 사실은 너를 꽁꽁 묶어두기 위한 거미줄인 줄 아니?"
"하하, 말도 안 돼. 내가 치는 이 고치가 어찌 거미줄이니?"
"글쎄, 그럴까? 네가 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가 네 입을 빌려 너를 싸고 있는걸.
내 눈엔 그 거미가 보이는데."
아기 바람은 짐짓 심각한 척 거짓말을 했습니다.
"뭐라고? 우리 눈에 안 보이는 거미가 우리를 잡아먹으려 한다고?
"뭐? 진짜니? 그렇다면 큰일 났네, 큰일 났어!"
고치 트는 것을 멈추고 누에들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미처 고치를 완성하지 못한 누에들의 몸이 서서히 굳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무심코 한 말이 이토록 순식간에 누에들에게 충격을 주다니, 아기 바람은 놀라서 자신의 말을 취소하려고 다시 누에들에게 다가갔지요.
그때 벌컥 농부가 들어왔습니다.
농부는 고치를 짓다가 멈춘 누에들을 둘러보곤 놀라서 소리쳤습니다.
"이런!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더니 못된 바람이 누에들에게 감기 들게 했구나."
농부는 얼른 문을 꼭꼭 닫고 방안에 따뜻하게 난로를 피웠습니다.
그러자 아기 바람은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점점 나른해지면서 정신이 몽롱해졌습니다.
그제야 갇힌 바람은 자신을 고치 속에 가두려고 힘써온 누에들의 용기를 생각하며 심술을 부린 자신의 어리석음을 반성했습니다.
방 안이 따뜻해지자 하나둘 씩 누에들은 굳은 몸을 풀며 다시 고치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잠시 엉뚱한 생각을 했구나.
우리가 열심히 만들고 있는 고치 집이 거미줄 수가 없지.
누구보다 튼튼히 내 힘으로 집을 짓고 있는데 말이야."
"그래, 그래."
"그렇지만 말이야. 바람이 거짓말할 리가 없어.
바람의 말대로 우리가 싸여 있는 것이 고치가 아니고 거미줄이라면 빨리 빠져나와야 하잖아.
그대로 있다간 거미 밥이 된다 말이야.
늦기 전에 빨리 이 질긴 줄을 끊어야만 해."
이렇게 말하며 몸이 풀린 누에 한편에서는 짓다 만 고치를 다시 입으로 녹이려고 하는 누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녹이려고 애쓰는 누에 입에서 나오는 실은 오히려 어중간한 껍질 막이 되어 점점 더 고치의 모습을 이상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문이 다시 열리며 농부가 들어왔습니다.
"음, 다시 방 안이 따듯해졌군. 그리고 누에들이 다시 고치를 틀고 있구먼."
흐뭇하게 방안을 둘러보다가 한쪽 끝에 반틈 고치를 지으며 굳어있는 누에를 발견하곤 농부는 혀를 끌끌 차며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농부가 다시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쏜살같이 밖으로 빠져나온 바람은 쓰레기더미에 버려지는 누에들을 보며 몹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 혼이 났네. 혼자 다니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로구나.
내가 쓸데없이 입을 놀리는 바람에 애꿎은 누에가 죽게 되다니.'
문밖에선 엄마 바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엄마 바람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 하다가 그냥 말없이 아기 바람을 안고 골짜기를 넘어갔습니다.
엄마 바람에 안겨 기운을 차리자 아기 바람은 다시 누에 생각이 났습니다.
그 집 속의 누에들이 무사히 어른벌레가 되었는지 몹시 궁금해졌지요.
다시 바람은 엄마 눈을 피해 살며시 산 아래 작은 집으로 갔습니다.
가는 길이 언뜻 생각나지 않아 이리저리 돌아가다가 아기 바람은 소나무 숲을 지나치면서 벌레들이 솔잎을 갉아먹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밖에서 자라는 누에도 있구나. 저 누에는 저렇게 뾰족뾰족한 잎을 먹고 온몸에 가시를 세우는구나.'
털이 숭숭 난 것이 몹시 사나워 보였지만 아기 바람은 전에 있었던 일을 사과할 겸 다정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안녕? 누에들아. 전에는 참 미안했어. 나는 그냥 놀려줄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어쩌면 밖에 있던 너희들이 잘 모르는 일이겠지만."
"응? 방금 나한테 한 말이니?
음……. 나는 누에가 아니야. 솔잎만 먹는 송충이지.
난 지금 햇볕을 쬐며 쉬고 있어.
귀찮게 굴지 마."
"송충이? 그래서 모습이 좀 다르구나. 난 그렇게 길쭉하면 다 누에인 줄 알았는데."
"하하하. 우리는 곧 어른이 될 거야.
이 산엔 먹이가 너무나도 많이 있어.
태어나서 다시 온 산의 소나무에 알을 낳아도 다 먹을 만큼 많은 솔잎이 있지."
"그래. 너희들은 좋겠다. 그런데, 너희들은 무슨 좋은 일을 하니?"
"좋은 일이라니?
그냥 먹고 놀다가 죽는 거지, 무슨 좋은 일?
사람들이 좀 싫어하지만 말이야."
"이상하다? 누에들은 좋은 실과 비단을 만들어 사람들이 입을 옷을 만들어주는 일을 한다는데."
"누에들이 좋은 일을 한다고? 흥! 좋은 일을 하면 뭘 해. 자기는 죽고 마는데."
"으응? 그게 무슨 말이니? 누에가 죽는다고?"
그때 산 밑에서 문득 나무꾼 아저씨가 다가왔습니다.
"어허, 이 소나무에는 유독 송충이가 많구나.
이 송충이 때문에 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면 내가 벨 나무가 없어질지도 몰라.
저 아랫마을 뒷산엔 송충이들 때문에 나무가 다 죽어 산이 벌거숭이가 되었다지?
이 산도 그렇게 되기 전에 부지런히 송충이들을 잡아야겠군."
나무꾼은 지게를 내려놓고는 작대기를 쥐고 송충이들을 털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으악! 살려줘!"
"아, 내가 가지를 흔드는 게 아니야, 송충아.
그런데 누에가 좋은 일 하다 죽는다는 게 무슨 말이니?"
나뭇가지에 붙어 안간힘을 다해 떨어지지 않으려는 송충이에게 아기 바람은 또 물었지만 정신없는 송충이가 대답할 리 없지요.
나무꾼은 긴 가지를 꺾어 집게를 만들고는 잘 떨어지지 않는 송충이를 하나씩 잡아냈습니다.
그리고는 한곳에 모아 불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아기 바람은 깜짝 놀랐습니다.
불에 태워 죽이려 하다니, 아기 바람은 송충이가 죽는 게 또다시 자기 탓인 것 같아 힘껏 힘을 모아 달려가 불을 끄려 했습니다.
"음, 마침 바람이 알맞게 부니 불이 잘 타는구나. 고맙다. 바람아."
끄려고 했던 불이 더 잘 피자 아기 바람은 몹시 당황해서 서둘러 산을 내려왔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말썽을 피울까. 내가 간 곳엔 다 나쁜 일만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야.'
아기 바람은 힘이 빠져 땅 위로 슬슬 기어갔습니다.
"야! 갈려면 그냥 지나가지, 왜 이파리는 마구 흔드니?"
문득 바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언뜻 아래를 바라보니 배추밭의 배춧잎에서 연초록색 애벌레가 꼬리의 붉은 눈을 치켜들고 노려보는 것이었습니다.
바람은 버꿈버꿈한 배춧잎을 지나면서 햇볕이 부서져 애벌레의 색깔이 바뀌었나보다 생각하고는 좀 망설이다가 다정하게 물었습니다.
"너희들... 땅에 사는 누에... 맞지? 전에는 미안했……."
"시끄러워! 난 지금 바쁘단 말이야.
다른 친구들은 다 고치를 틀고 있는데 나는 늦었단 말이야.
가까이 오지 마! 배춧잎이 흔들려 떨어질 것 같잖아!"
잔뜩 주눅이 들어 바람은 기어가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습니다.
"배춧잎이라고? 네가 먹는 게? 그러면 너는... 누에가 아니구나."
전에 누에들이 뽕잎만 먹는다는 소리를 기억해내곤 바람은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이제 알았니? 나는 배춧잎만 먹는 배추벌레야. 그런 바보 같은 누에하곤 달라."
"바보라니? 누에가 바보라고?
누구보다 열심히 뽕잎을 먹고 고치를 만드는 누에가 말이야?"
"그러니까 바보지.
자기는 세상에 이로운 일을 한다고 재지만 자기가 죽어야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걸 모르니 말이야."
"너도 송충이와 비슷한 말을 하는구나.
제발 알려 줘. 나는 그 누에들에게 큰 빚을 졌단 말이야."
"실이 그냥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니?
누에고치에게서 얻는단 말이야.
자기가 나방이 되기 위해 고치를 뚫고 나오면 고치를 싸고 있는 실이 다 끊어질 것 아니겠니.
그래서 사람들은 고치가 다 익어 누에나방이 나오기 전에 고치를 삶아버린단 말이야.
그러면 뭐야. 고치 속의 번데기는 죽잖아.
한 번도 나방이 되어 날개를 펴기도 전에 말이야.
누구 좋으려고 그 짓을 하니?
우리 같은 벌레들은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진 않지만, 한껏 하늘로 날개를 펼 수 있잖아.
제대로 자라기만 하면 말이야."
아기 바람은 다시 가슴이 아파졌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고치를 짓고도 제대로 날개를 펴보지도 못한 채 죽어야 하는 누에의 삶이 너무나 불쌍하였거든요.
그때였습니다.
"앗, 여기도 배추벌레가 있네.
올해는 이놈들이 더욱 극성이란 말이야.
입에 바로 들어가는 채소에 농약을 칠 수도 없고.
마침 바람이 불어 배춧잎 뒷자락이 들추어져서 요놈을 발견하게 된 게 다행이군.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잖아."
농부 아저씨는 작은 집게로 배추벌레를 쏙 집어 들어서는 손에 들고 있는 비닐 주머니에 넣는 것이었지요.
주머니 속에는 많은 벌레가 들어 있었습니다.
‘어! 또 나 때문에 배추벌레가 죽게 되었구나.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치는 아기 바람은 풀이 죽어 더는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선가 슬며시 나타난 엄마 바람이 다시 끌어안아 주지 않았더라면 찬 이슬이 되어 밤사이 풀밭에서 사라질지도 몰랐지요.
그러나 다음날 다시 해님이 뜨자 아기 바람은 도저히 엄마 곁에 그대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누에들의 불행을 자기 혼자만 알기엔 너무나 안타까웠거든요.
아기 바람은 햇볕을 받자 살며시 골짜기를 벗어나 누에가 자라는 집에 갔습니다.
이번에는 길을 헤매지 않고 바로 찾아갔지요.
마침 집의 창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안녕? 그동안 잘 지냈니? 전엔 참 미안했어.
그래서 이번엔 진심으로 사과하는 뜻으로 너희들에게 큰 비밀을 알려주려고 왔……."
"또 촐랑거리며 거짓말을 하는 아기 바람이구나. 이제 제발 좀 조용히 해라."
어디선지 고치를 다 만들지 못한 누에가 마지막 고치 뚜껑을 씌우며 말했습니다.
"아니 이번에는 진짜야. 너희들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문제란 말이야."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고치를 짓니?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
짐짓 큰 비밀을 알려주는 모습으로 몸을 한껏 부풀리며 바람이 말했습니다.
"……. "
"내 말 안 들리니?
너희는 고치 속에 갇히면 날개를 펴기도 전에 죽는단 말이야.
끓는 물 속에 담겨서……."
"……."
"아니? 너희들은 이런 말 듣고 놀라지도 않니?"
그때 어디선가 굵은 목소리가 고치 안에서 들려왔습니다.
"그래, 바람아, 네 말대로 우리가 고치 속에 갇혀 죽는다고 치자.
그렇다고 우리가 그 순간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도 있니?"
"응? 그, 그러네.
그렇지만 나는 너희들이 바로 알고 거기에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해서..."
"……. "
"왜, 그러고 나서는 또 말이 없니?"
".... 우리는 바보가 아니야.
우리가 개미누에에서 넉잠누에가 되기까지 그냥 잠만 자고 밥만 먹으며 편안히 시간을 허비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사람들이 구해주는 뽕잎을 먹고 몇 번의 허물을 벗으면서 때로는 누에라는 우리 자신에게 우쭐해질 때도 있어.
그러면서 과연 우리가 이렇게 편안히 자라도 되는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 생각을 하며 한 겹씩 허물을 벗는 거야.
첫잠을 자고 허물을 벗기 전 까맣던 우리 몸들이 조금씩 희게 되면서 말이야."
그리자 여기저기 고치 속에서 수런수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씩 허물을 벗을 때는 알을 깨는 새와 같은 기분이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배를 땅에 붙여 기다가 퍼뜩 어른 나방이 되어서 하늘을 날아야지 하는 꿈을 갖는 거야."
"그렇지만 우리가 더 이상 어른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한 번씩 잠을 자고 허물을 벗을 때마다 깨닫게 되지.
네가 일전에 우리를 놀렸듯, 우리 자신도 이 허물 벗기가 거미줄 같다고 느낄 때가 많아.
그대로 멈추면 죽을지 모르는……."
"그러나 사실 우리는 모두 시간이라는 거미줄에 둘러싸인 게 아니니?
그대로 가만히 있다간 조여서 죽을 위험에 항상 닿아 있지.
우리가 조금씩 변화하는 몸짓이 있어야 우리 주위를 둘러싸서 굳어가는 거미줄이 끊어지는 거야.
움직이는 게 바로 시간과 환경의 거미줄을 끊임없이 끊어내는 것 아니겠니."
"우리가 고민하는 것은 우리가, 과연 우리가 알고 있듯이 진짜 누에냐 하는 것이지."
"그래, 그래, 우리의 목표는 누에로서 죽는 거야.
그러나 내가 편식하고 있는 이 뽕잎이 뽕잎이 아니라 솔잎이거나 배춧잎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지.
내가 누에가 아니라면 내가 고치를 틀고 그 속에서 그냥 죽으면 안 돼.
송충이와 배추벌레의 고치는 저 자신 이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어.
그 속에서 익은 채로 죽는 게 자기들에게는 물론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야."
"내가 스스로 누에임을 인정하고 고치 속에서 온전한 죽음을 맞는 게 그냥 이루어질 것 같니?
아니야. 내가 고치를 다 짓고 그냥 고치 속에서 죽는다고 해도 고치 속에서 내가 번데기로서 살아 있지 않으면 고치에서 비단실을 뽑을 수 없어.
내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끓는 물 속에 들어갈 때까지 번데기로서 충실하게 진화해야만 훌륭한 비단실이 되는 거야.
우습지 않니? 아무런 소용도 없을 번데기를 최대한 진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내가 고치 속에서 죽을지, 누에씨를 얻기 위해 고치 밖으로 나가는 어른 나방이 될지는 알 수 없어.
그건 내가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야."
"고치 밖에 나온 누에나방의 모습이 우리 삶의 꼭대기는 아니야.
밖에 나온 누에나방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번식을 위한 노력만 하다가 하루 이틀 안에 죽고 말지.
나방의 삶은 그러니까 긴 누에의 삶 끝에 곁다리로 끼어있는 것에 지나지 않아.
누에나방이 되기 전 뽕잎을 먹고, 잠을 자고, 고치를 트는 누에의 과정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야.
그러니까 일생의 대부분을 보내는 누에의 모습이 진짜 중요하다는 거지."
"그러니까 말이지, 내가 고치 속에서 번데기로 진화하여 고치를 뚫지 못하고 죽든, 고치를 뚫고 누에나방으로 죽든 별 차이가 없는 거야.
고치를 뚫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
그러면서 번데기의 진화는 계속되는 거지.
누에나방이 되고 말지는 내가 알 수 없으니까, 내가 끓는 물 속에서 죽는다는 것을 알아도 나의 삶은 하등의 변화가 없는 거야.
오직 지금 이대로 꾸준하게 가는 것이 옳다는 거지."
"비단실을 얻는건 사람들이잖아.
아니 막상 너희들에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데 사람들을 위해 왜 그렇게 죽어야 하지?"
아기바람이 안타까와하며 물었습니다.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사람들이 비단실을 얻기위해 어떤 일을 하지?
뽕나무를 심고 뽕잎을 따서 우리에게 주잖아.
만약 뽕잎만 먹는 우리가 스스로 찾아서 자라고 번식하려면 얼마나 힘들겠어.
편식만 하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다고 어떻게 자신할 수 있지?"
"아니 아니, 산에 사는 산누에 나방은 지금까지 잘 살아왔잖아?"
아기 바람이 이마를 찡그리며 다시 물었습니다.
"산누에나방은 일찌기 흔한 도토리나무나 밤나무 잎으로 식성을 바꿨지.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야.
네가 감히 우리를 산누에나방이랑 비교한거니?
우리는 사람들과 같이 살면서 눈부시게 진화했어. 최고의 비단실을 만들 수 있는 누에로 말이야.
도태되어 아무 것이나 먹으며 살아남은 것들과는 너무나 달라.
사람들에게 비단실을 주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최고의 모습으로 살아온거지."
"내 말은... 지금까지 살아남은 씨나방말고는 모두들 어른나방이 되기 전에 죽었잖아.
너는 그렇게 죽는 너희들이 화가 나지 않니?
아니 태어나서 나방이 되기도 전에 죽는걸 너희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잖아."
"한 개체가 살아남는 게 그렇게 중요하니?
생각해봐. 살아있는 생물은 누구나 번식하는 게 목표야.
한 개체의 생존도 번식을 위해 일어나는 거라구.
그렇게 해서 영생하는거야.
한 개체가 오래 사는 게 목표가 아니라구."
"그럼 너희들은 몇몇 씨나방만 살아남도록 희생하는거구나?"
"아직도 알아듣지 못하는구나.
그런 건 희생이라고 하지않아.
영원히 살기 위해 당연히 해야할 삶의 책무지"
"사실 우리는 고치를 다 지으면 죽는거야.
숨쉬는 것 같지만 고치를 짓고 죽는거지.
나방으로 태어나는 건 부활이야.
보너스지. 새 생명을 위한 위대한 과업이지."
"우리는 사람을 부려먹으며 영원히 사는거야.
우리의 영생을 위해 사람들은 기꺼히 일을 하지.
실컷 살고난 후 우리의 껍질을 던져주는데도 말이야."
저마다의 말들을 마친 누에고치는 그 빛나는 흰색이 더욱더 짙어졌습니다.
고치를 싸고 있는 실이 더욱 질기고 부드러워지고 있는 모습이 틀림없습니다.
아기 바람은 앞다투어 이야기하는 누에들의 말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누에가 온전한 누에고치로 익기까지 저토록 많은 고민과 생각을 거쳤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요.
그저 누에들이 주어진 먹이에 배불리 살만 찌우고 잠만 잔다고 생각했던 아기 바람은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그동안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헛되이 보낸 시간이 자꾸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괜히 생각 없이 남을 괴롭힌 많은 행동도 떠올랐습니다.
깊은 생각과 후회로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데 농부가 그때 발칵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흠. 고치 색깔이 아주 잘되었군. 바구니를 가져와야겠어."
"아기 바람아, 다시 문이 닫히려고 해.
이 방은 곧 뜨거워질 거야. 저번처럼 갇혀서 혼이 날지도 몰라.
빨리 저기 열린 창문으로 도망가렴."
오히려 하얀 고치 속에서 바람을 염려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아기 바람은 밖으로 빠져나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날 염려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나는 몸을 쪼개어 너희들 몸속에 들어갈 거야.
너희들의 생각이 어떻든 당장 너희들이 고통스럽게 죽는 건 안타까워.
뜨거워질 너희 몸을 잠시라도 덮어주는 따뜻한 공기가 되어 꼭꼭 감싸 안아 줄 거야."
"안 돼, 안 돼. 네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주 짧은 시간밖에 안 돼.
그리고 너는 뜨거운 김에 휩쓸려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걸?"
"그래도 괜찮아. 너희들을 그냥 보낼 순 없어."
농부는 꼭꼭 문을 닫고 물을 끓였습니다.
그리고 고치들을 바구니에 담아 끓는 물 속에 확 뿌렸습니다.
"음, 마침 창문을 열어두었더니 바람에 알맞게 고치가 말랐군.
실이 엉키거나 중간에 떨어지지 않겠는걸.
아마 좋은 실을 기대해도 되겠어."
뜨거운 기운이 확 끼쳐왔습니다.
아기 바람은 고치 속에서 잔뜩 웅크린 번데기를 와락 힘주어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미소 짓듯 번데기의 주름이 벌어지면서 나오는 들릴락 말락 한 소리를 들으며 아기 바람은 정신을 잃었습니다.
"고, 마, 워."
밖에는 세찬 바람이 종일토록 집 주위를 휘돌며 불었습니다.
지붕도 문짝도 나무들도 다 저마다의 소리로 엄마 바람을 대신해 울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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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썼던 글입니다.
최근에 다시 글을 다듬었습니다.
제 글은 어느 연령대에 맞을지 정확히 포커싱이 안되어 읽혀지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이왕 이런것, 아예 어른들의 눈높이로 글을 첨삭했습니다.
퇴고라는 표현은 가당치가 않습니다.
그저 젊은 시절의 혼돈과 고뇌같은 것을 가벼운 이야기로 묘사하려한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20년을 두고 시간으로 엮어진 가마떼기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누가봐도 아이를 위한 동화는 아닙니다.
죽음은 부활을 위한 조건이라고,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죽으면서 영속하는 것이라고 누에의 입을 빌어 덧붙여 봅니다.
애벌레가 끝이라고 생각할때 하느님은 나비가 되게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기바람은 흩어져서 다시 바람으로 모이겠지요.
원래 바람이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촛불을 예로 들어보면 불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걸까요.
불이 꺼진것이 영원히 꺼진 걸까요.
지금 타고있는 불꽃은 바로 직전의 그 촛불이 아닙니다.
촛불은 사건 그 상호작용으로 있지 존재로 타오르지 않습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사족이 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