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100년은 고사하고 수십 년의 전통이라도 이어져 오는 제다법 역사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제대로 맥이 어어져 내려온 제다법의 전통이 없기 때문에 차 만드는 공장과 수백 개의 수제차(手製茶) 만드는 집이 있어도 뚜렷한 차별화가 이뤄지지 않아 다양하고 개성있는 차가 없습니다.
이런 제다법 부재 속에서도 김복순, 조태연 부부의 덖음차 제다법이 시작된 것은 여간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이분들의 손끝에서 시작된 화개 녹차는 한국의 현대 녹차 제다법 기원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복순씨는 일제 때 일본 규슈 지방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한국 청년과 혼인하게 되어 일본으로 가 살았습니다. 그의 일본 생활은 녹차 만드는 공장의 여공으로 시작되었지요.
처음엔 차 공장 안에 발을 들여 놓을 수도 없었습니다. 차밭에서 찻잎 따는 일로 여러 해를 보내는 동안 차 공장 안을 구경하고 싶었지요. 오랜 갈망 끝에 찻잎을 가공하는 부서로 보내졌습니다. 그곳에서 차 만드는 일을 곁눈질로 배웠지요.
자신도 차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지요. 찻잎을 뜨거운 무쇠솥에다 덖어내어 정성껏 비비고 다시 솥에 넣어 익힌 뒤 비벼서 만드는 과정을 눈여겨 보았지요. 하지만 공장 책임자는 한국인이 차를 만들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차를 한 번 만들어 보고 싶다는 욕망을 참지 못하고 찻잎을 따서 집으로 가져와 솥을 걸어 놓고 실험을 시작했지요. 그렇게 시작된 실험이 서너 차례 반복된 나머지 공장에서 보았던 것과 흡사한 모양의 차를 만들 수 있었지요. 그는 차를 그릇에 담아 공장 책임자에게 가져가 보였습니다.
책임자는 매우 놀라면서 차를 달여 보았지요. 차맛을 보고는 또 한 번 놀라워했지요. 그날부터 그는 차 만드는 부서에 배치되어 그의 숨은 솜씨를 한껏 뽐내기 시작했습니다.
곧 그는 공장 안에서 차를 가장 잘 만드는 기술자가 되었고 마침내 제다 부서 반장으로까지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지요. 그러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철저하게 빈손이었습니다. 자식들과 가난만 짊어진 채 돌아온 그는 부산 부둣가에서 밥장사로 연명했습니다.
그는 궁핍한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해야만 했지요. 밥장사와 술장사로 간신히 연명해 가던 중 6·25 전쟁을 겪게 되었고, 가난과 혼란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때 남편은 부두의 하역 노동자였는데 어느날 외항선의 짐을 운반하다가 우연히 일본의 차가 담겨있는 차통을 발견했습니다.
남편은 그 차통을 아내에게 보여주었지요. 아내는 차통을 보는 순간 가슴이 설빀지요. 차를 만들고 싶은 충동이 전신을 휘감았습니다. 하지만 실현될 수 없는 꿈임을 깨달으며 몹시 허탈해했지요. 그렇게 전쟁의 혼란이 가라앉고 나자 그는 또다시 차를 만들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습니다.
정동주의 茶이야기 <55> 한국산 홍차와 녹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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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초 정권의 비호를 받은 홍차에 맞서 최초로 녹차를 보급한 김복순 조태연씨 부부. 사진은 녹차 생산을 준비하던 1950년대말 경주에서 찍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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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생산되는 찻잎으로 홍차(紅茶)를 생산하게된 것은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인한 군사정권의 정책에 따른 것이었지요.
군사정권은 외국에서 수입한 물품을 배격하고 국산품 장려 정책을 폈지요. 1960년대 초 시중에 유통된 차 제품은 커피와 홍차가 주류를 이루었지요.
이것들은 모두 수입품이었습니다. 군사정권은 외화절약과 국산품 애용 정책으로 홍차의 수입을 전면 금지시키고 커피 수입량도 크게 줄였지요. 그러면서 농촌을 살리기 위한 특별 사업의 하나로 차밭을 만들어 찻잎을 생산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차밭을 조성하는 사람에겐 보조금과 융자금을 지원하여 차밭을 장려했지요.
이와같은 정책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보게 된 것은 전남 ‘보성다원(寶城茶園)’이었지요. 보성다원은 1941년 일본인 사업체인 ‘경성화학’이 만든 것이었는데, 해방 후 해군기술연구소가 관리하다가 사업가 장영섭(張榮燮)씨 소유가 되었습니다.
장씨는 찻잎을 이용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차밭에 포함된 임야를 가꾸기 위해 구입했다가 군사정권의 차밭 지원 정책으로 뜻밖의 사업을 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대한홍차’라는 한국의 첫 홍차 공장입니다.
대한홍차는 사업이 번창했습니다. 차밭을 계속 확장하면서 여러 곳의 야생찻잎을 사들여 홍차를 만들었지만 폭증하는 국내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지요.
그러나 차의 수요 문제를 전혀 예상하지도 않은 채 외화절약과 국산품 애용이란 정책을 강행한 나머지 홍차 공급은 금방 벽에 부딪혔지요.
미리부터 차밭을 조성해 놓은 뒤에 홍차 수입을 금지시켜야만 옳았을 터이지만 아무런 준비없이 단행된 차 관련 정책은 오히려 혼돈만 부추겼을 뿐이었지요.
홍차 소비량을 감당할 수 없게되자 홍차 생산업자들은 고춧잎과 감잎을 염색하여 가짜 홍차를 유통시키다가 발각되어 마침내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하고 말았지요.
1974년 ‘대한차업(大韓茶業)’, ‘동양홍차(東洋紅茶)’, ‘한국제다(韓國製茶)’, ‘화개제다(花開製茶)’ 등이 홍차 생산에서 이른바 녹차(綠茶)를 생산하는 체제로 부랴부랴 변신을 서두르게 될 때까지, 녹차를 만들어 시중에다 판매한 사람은 김복순, 조태연 부부가 유일했습니다.
물론 해남 대흥사와 사천 다솔사에서 나름의 비법으로 녹차를 만들어 차살림을 꾸리고는 있었으나, 시중에 판매할 수 있을 만큼의 수량도 아니었거니와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도 않았지요.
이처럼 녹차 만드는 기술을 대중화시키면서 국가의 비호를 받는 홍차에 맞서 녹차를 보급한 최초의 인물이 바로 김복순, 조태연 부부였지요. 이들이 녹차 만드는 일에 한 평생을 헌신하게 된 것은 개인사로서의 불행과 혹독한 시련 속에서 이룩된 것이어서 더욱 값진 문화유산이 되고 있습니다.
녹차 만드는 일을 꿈꾸던 이들 부부에게 기회를 가져다 준 것은 군사 쿠데타였지요. 군사정권의 명령으로 부산역 광장에다 수입물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불태울 때 이들 부부 눈에는 불타는 커피와 홍차가 보였지요.
그들은 한국인이 음료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음을 깨닫고 녹차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지요. 그날부터 차나무가 있는 곳을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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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56> 차나무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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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순 조태연 부부가 식당과 부두일을 걷어치우고 녹차를 만들기 위한 첫 모험은 차나무를 찾아나서는 일이었지요.
그들은 1950년대 중반 무렵 부산 동래의 우장춘 박사 농장에 차나무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을 직접 찾아갔던 적이 있었지요. 온천장 뒤 차밭골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찻잎을 따와 19공탄을 피워 놓고 차를 덖어보았지요. 해방전 일본 차공장에서 차를 만져본 뒤 십년만의 일이었지요.
김복순의 기억 속에 들어있던 제다 기술이 고스란히 되살아 났습니다. 연탄불 위에 무쇠솥을 얹어 놓고 차를 덖었지요. 그리곤 부산 중구 영주동 판잣집 다락방에다 덖은 차를 널어 말렸습니다.
이어 다 마른 차를 달여보았지요. 김복순은 눈물을 글썽이며 만족했습니다.
조태연은 차맛을 제대로 볼줄 몰랐지만 아내의 행복해하는 표정에서 확신을 읽었지요.
그동안 푼푼이 모아두었던 약간의 돈을 가지고 차나무가 있다는 전남 해안지방을 여행해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김복순은 부산에 남아 식당을 꾸리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조태연만 현지를 답사하면서 차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해 오기로 한 것이지요.
전라도의 해남, 고흥, 보성, 승주, 구례, 경남의 하동, 사천 등지를 답사하기로 마음 먹고 길을 떠났지요.
해남지방에 맨 먼저 도착하여 차나무가 있다는 곳을 찾아간 조태연은 몹시 실망했습니다.
초의스님께서 차를 만들어 차살림을 꾸리셨다는 역사로 볼때는 가장 큰 기대를 할만한 곳이라 여겼던 때문이었지요.
대흥사 주위에 차나무가 자라고는 있었으나 경제성이 없어보였습니다.
보성에는 대규모의 차밭이 있기는 했으나 제대로 손질을 해주지 않아서 찻잎의 생산이 당분간은 어려울 듯 보였습니다.
승주 일대의 송광사, 선암사 주위에도 차나무가 있기는 했지만 기껏해야 그곳 스님네들의 한철 양식으로도 부족할 듯 싶었습니다.
구례 화엄사 주위도 엇비슷한 사정이었지요.
조태연은 잔뜩 기대했다가 차츰 실망이 커지고 있었지요. 마지막으로 하동 화개로 갔습니다.
화개에는 야생차나무가 다른 어느 곳보다 무성했습니다. 1961년 봄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찻잎을 따거나 차를 만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조태연은 이틀을 머물면서 화개동을 샅샅이 돌아다녔지요. 찻잎을 누가 가꾸는지, 차를 만드는 사람이나 차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를 물었지만 그때까지 화개동에서 녹차를 아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옛날부터 자생해온 차나무를 모조리 뿌리째 뽑아내고 곡식 심을 밭으로 개간하고 있는 모습이었지요.
또 하나 이채로운 것은 나이 든 노인들 사이에서 이른바 ‘잭살’이라 하여 찻잎으로 감기 몸살약을 만들어 먹는 모습이었습니다.
늦봄 쯤 찻잎을 거칠게 훑어와서 그늘에다 말린 뒤 멍석 위에 놓고 비벼서 다시 말린 것을 잭살이라 불렀는데, 일년 사철 몸살 감기가 들면 이 잭살을 푹 삶은 물에다 생강, 모과, 돌배, 댓잎이나 인동초를 썰어 넣고 푹 끓여서 마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차의 근원이 약에 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조태연은 차나무를 뽑아내고 밭으로 개간하는 이에게 흥정을 했습니다.
밭과 그 일대의 차나무를 15년 동안 이용하는데 10만원을 주고 임대계약을 하자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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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57> 모험에 찬 첫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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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군 화개면 신촌의 산비탈에 자생해온 차나무를 15년 임대하기로 계약까지 해놓고 돌아온 조태연은 아내에게 이사를 가자고 했지요.
길섶에 있는 조그마한 초가 한 채도 이미 사두고서였습니다. 1962년 2월 부산에서 하동 화개로 이사를 했습니다.
지독한 산촌인데다 궁핍한 살림들이었지요. 어느 집에도 방바닥에 깔고 자는 이부자리가 없었고, 음식에는 양념기가 없었으며, 등잔불도 넉넉지는 못했지요.
이사온 그해 봄부터 찻잎을 따서 차를 만들기 시작했지요.
부산의 식당과 집까지 판 돈으로 무려 50만원어치가 넘는 녹차를 만들었습니다.
차 덖는 일손은 마을 아낙들의 손길을 이용했지요. 찻잎 따는 일도 아낙들에게 현찰을 품삯으로 지불하면서 도움을 받았지요.
금방 부자가 될 것 같은 설렘으로 힘든 줄도 몰랐지요.
차를 다 만든 뒤에는 상품이 되도록 포장을 해야 했는데 적당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궁리하던 끝에 조태연은 부산 국제시장에 가서 커피병을 사오기로 했습니다. 빈 커피병을 가져와 끓는 물에다 삶아낸 뒤 커피 레테르를 벗겨냈지요.
그때 조태연은 자신들이 만든 차에도 상표가 있어야겠다고 착안했습니다.
부산에 아는 사람을 통하여 상표도 만들었습니다.
상표를 만들기 위해서 지은 최초의 차 이름은 ‘선차(仙茶)’였는데, 우리나라 녹차 역사상 판매 목적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차 이름입니다.
공장 이름은 ‘고려제다본포(高麗製茶本鋪)’라 짓고, ‘고려명산차’란 선전 글귀도 넣었습니다. 또한 김복순이 일본에서 여러 해 동안 차만드는 기술을 익혔다는 점과 외국차를 능가하는 유명한 ‘발명차(發明茶)’라고 썼습니다.
비록 효험은 적었지만, 늙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는 신선이 마시는 차이며, 일상생활의 음료수이자 약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글귀를 넣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차에 함유된 성분을 분석하여 기록해 놓고 있는 점입니다. 그러기 위해 조태연은 자신들이 만든 차를 ‘경상남도 위생시험소’에 의뢰하여 ‘시험성적서’까지 받았지요. 이 시험성적서도 우리나라 녹차 판매를 위한 첫 성분 분석표였지요.
그토록 정성을 들여 차를 만들었지만 돈을 주고 사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괴상한 잭살을 만드는 사람’으로 놀려대기까지 했지요. 차를 만들어 돈을 받고 팔겠다는 이들 부부를 바라보는 이웃의 눈빛은 조소와 우려가 뒤섞인 것이었습니다.
부산의 어느 일식집 하는 사람이 차를 사주겠다는 연락을 했지요. 조태연은 차를 싸들고 부산으로 갔더니 그 집에서는 너무 헐값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조태연은 몇 번 사정을 해봤지요. 이익은 버리더라도 생산 원가는 건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매달려도 보았지요.
그럴수록 일식집 주인의 태도는 더욱 거만해져 갔습니다. 조태연은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만든 처음 ‘선차’는 대부분 팔지 못하고 말았지요.
김복순은 조태연의 꼬장꼬장하고 불같은 성미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을 몰라주거나 욕되게 하는 사람에겐 차를 팔지 않겠다는 생각까지 했지요.
이사온 첫 해의 참담한 실패가 낳은 후유증은 그들 부부를 오래도록 고난 속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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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58> 녹차 본격 보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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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茶千年 58
<국내 녹차 제조의 교과서>
국산 홍차 산업이 쇠퇴하게 된 것은 제조업이 지녀야 할 윤리, 즉 정직함을 상실했기 때문인데, 이같은 윤리적 타락은 당시 우리나라 제조업의 공통된 문제점이기도 했습니다.
홍차업자들이 생산체제를 다른 차 종류로 전환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을 때 일본에서는 녹차(綠茶)를 기계로 대량 생산하는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이른바 증차(烝茶) 즉 수증기로 찻잎을 쪄서 만드는 방법입니다. 그런 다음 전기로 가열된 열판을 이용하여 볶는 과정과 건조시키는 과정을 단순화한 것입니다.
녹차는 홍차를 만들던 설비를 부분적으로 혹은 대폭 손질한 증차 제조 기술을 도입한 이후의 산물입니다. 녹차 생산이 본격화된 1972년 이전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어 시판된 녹차는 김복순 부부가 전과정을 손으로 만든 선차가 유일했습니다.
수제품인 선차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아주 느리게 거치면서 만들어졌습니다.
①찻잎을 따서 시루나 가마솥에서 수증기로 찐다. 시루에서 들어내어 서늘한 그늘에서 말린다.
② 연한 불에 가볍게 덖는다.
③ ①, ② 과정을 각각 세 번 반복한다.
④ 그늘에 널어 말리면서 잡티를 가려낸다.
⑤ ②보다 열을 더 올린 가마솥에 넣고 천천히 저으며 볶는다.
⑥ 멍석에다 비비고 털어서 건조시킨다. 이때 깨끗하게 잘 말려야만 한다.
⑦ 다시 가마솥에 넣고 볶는데, 은은한 불길에서 오래 뜸을 들일수록 특유의 맛과 향기를 머금게 된다.
⑧ 불순물을 제거하여 포장한다.
이와같은 공정을 거쳐 완성되는 선차의 제조 기법은 1962년부터 약 10여년간 우리나라 녹차 제조법의 기초 교과서 역할을 했습니다.
일손이 많이 드는 작업이므로 마을 아낙들에게 품삯을 주고 단계별로 일을 시켰는데, 녹차 만드는 일을 거들어준 마을 사람들은 얼마만큼 시간이 흐른 뒤에 독자적으로 녹차 생산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김복순 부부는 가장 중요한 부분의 작업은 손수 했기 때문에 단순노동을 반복한 그들이 제대로 된 녹차를 만들기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녹차 만들기를 계속했고, 이들의 제조법은 또 다른 외부 사람들로 하여금 어깨너머로 훔쳐보거나 정확하지 않은 채로 전수되기도 하면서 선차를 흉내낸 녹차 생산이 확대되었습니다.
김복순 부부의 선차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부산에서 ‘고려민예사’를 경영했던 금당(錦堂) 최규용(崔圭用) 선생을 통해서 였습니다.
1965년 한일국교가 다시 열린 뒤 일본인들의 부산 관광이 활성화되자 금당선생의 고려민예사는 일본인들의 한국 여행 정보를 제공하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김복순 부부의 선차도 그렇게 소개된 한국 전통상품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통도사 극락암에서 수행하셨던 경봉(鏡峰) 스님과 삼락자(三樂子) 스님이 선차를 즐겨 드시게 된 것도 조태연이 금당선생과 함께 두 어른을 찾아뵈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경봉 스님께서 조태연 내외에게 내려주신 격려 법문은 고난과 좌절을 겪던 그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경봉 스님께서 선차를 즐겨 드시게 됨으로써 우리나라 절집에 선차 소식이 골고루 퍼졌고, 수행승들의 선차 주문이 이들 부부를 간신히 견디도록 해주었지요. 그러면서 스님들이 녹차 만들기에 관심을 보이게도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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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59> 仙茶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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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상표로 더러 쓰이는 '지리산 죽로차'. 1965년 하동의 김복순씨가 만든 차에서 비롯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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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선차는 계속 만들어졌습니다. 1964년 11월 8일 하동군 농산물 품평회 2등(당시 군수 한형구), 1966년 10월 4일 제 3회 하동종합문화제 특산물 공예부 2등(군수 손영식), 1967년 4월 12일 경남도지사(이계순) 감사장, 1967년 11월 19일 하동군 농산물 품평회 우수상(농협장 전상수) 등의 평가를 받게되면서부터 명성이 널리 알려졌지요.
곤양 다솔사의 효당 최범술 선생을 위시하여 청사 안강석 선생과 전국의 여러 스님들이 이들 부부를 찾아와 격려했습니다. 특히 효당 선생께서는 선차라는 이름 대신 ‘죽로차(竹露茶)’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겠다는 도움 말씀을 주기도 했는데, 이들 부부는 1965년부터 ‘지리산 죽로차’라는 이름과 ‘지리산 작설차’라는 두 이름도 함께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67년에는 경남도로부터 식품허가를 받아서 본격적인 녹차 생산을 시작했지만 가난은 계속되었습니다. 녹차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전반적인 사정이 계속 어려운 가운데서 홍차 만들던 이들이 녹차 생산으로 변신하게 되었지요.
이들 부부의 수제차는 자본과 공장 시설을 갖춘 홍차업자들의 대량 생산으로 새로운 곤경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선차의 제조 기술을 탐지해내기 위한 온갖 방법 앞에서 또 다른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기술 정보가 뜻대로 탐지되지 않게 되자 이들 부부가 갖고 있는 식품허가를 취소시켜 버림으로써 아예 녹차 제조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음모가 공공연하게 시도되었습니다.
자본을 가진 사람들의 이 시도는 결국 관철되었고, 보건소 직원들은 식품위생법 위반 사실을 적발하기 위하여 밤낮 이들 부부를 감시하게 되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녹차의 생산 판매가 전국적으로 일반화되기 시작했는데, 일본에서 개발한 기계식 증차법으로 만든 녹차와 김복순 내외를 원류로 한 손으로 만드는 녹차 종류들이 함께 시판되었습니다.
1974년 ‘대한차업’이 일본 ‘환홍(丸紅)’과 합작 투자 회사를 설립하여 만든 녹차를 모두 일본으로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정부 승인을 얻었습니다.
녹차 소비량이 늘어나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에는 ‘동서식품’도 가담했지요.
1978년에는 ‘한국브리태니커’의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 사업부에서 하동 화개에서 만들어지는 녹차 상당량을 사들여 ‘뿌리깊은 나무 잎차’라는 상표로 판매하기 시작했지요.
녹차 인구가 늘어가자 박동선(朴東宣)을 주축으로한 녹차운동 그룹이 생겨났고, 1980년에는 ‘한국차인회’가 창립되었지요. 박동선은 ‘한남체인’이란 회사를 세워 녹차 판매사업에 가담했는데 ‘신록차(神綠茶)’란 상표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뒤이어 태평양화학이 ‘설록차’란 상표의 녹차 생산을 시작하여 국내 최다량의 녹차생산업자가 되기도 했지요.
그리하여 한국의 녹차는 가공업자와 판매업자로 분업화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판매업자인 자본가들의 지나친 이윤추구 때문에 녹차의 판매 가격이 끊임없이 높아졌습니다.
녹차의 재배와 가공업자는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데도 판매업자는 계속 이득을 챙기는 모순이 심화되었지요. 그 과정에서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증차와 함께 김복순의 선차를 원류로 한 이른바 전통 수제차 종류도 점점 늘어나면서 품질은 저하되고 가격만 높아지는 모순이 쌓여왔는데, 이는 숨길 수 없는 한국 녹차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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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60> 한국 녹차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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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 녹차의 주역인 김복순씨 생전 모습(1986년 ). 자신이 만든 차를 달여내고 있는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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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녹차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대량 생산 기계설비를 갖춘 공장에서 만드는 일본식 증차가 있고, 제조 전과정을 손으로 처리하는 이른바 전통 수제차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차’라는 수식어는 모든 녹차 종류마다 붙여지고 있어서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은지 오래 되었지요.
손으로 만드는 녹차는 다시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해남 대흥사 초의선사의 제다법을 원류로 삼는 사찰녹차와 김복순에게서 시작된 덖음녹차입니다.
초의선사의 제다법은 세 갈래로 사자전승(師子傳承=절집에서 스승과 제자 스님으로 이어져 내리는 법) 되었습니다.
첫째, 대흥사 차법은 초의-범해-각안-선기-여호-응송스님으로 이어졌고, 둘째, 송광사 차법은 범해-각안-다송자-구산스님으로 이어졌습니다. 셋째, 선운사 차법은 초의-수홍-도범스님으로 차법의 맥이 이어졌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대부분 정화 이후 조계종과 태고종의 대립과 종파의 난립으로 명확하게 제다법이 전수되고 있지 않습니다.
초의선사의 제다법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재현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한가지 추측해 볼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다송’에서 이르기를, ‘칠불사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은 항상 차잎을 늦게 따서 땔감을 말리듯해서 시래깃국 끓이듯 푹푹 삶으니 차 색깔은 탁하고 붉으며 맛은 쓰고 떫어서 천하의 좋은 차를 속된 솜씨가 다버려 놓았다’고 한 것입니다.
이 기록의 내용과 같은 차 제조법은 화개지방에서 수백년 전부터 민간에 전해지는 ‘잭살’이라는 차를 말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반발효 또는 발효차라고 일컬어지는 원류이자 중국의 보이차와도 유사한 종류로 간주됩니다. 그렇다면 초의선사의 제다법은 이와 다른 것으로서 차의 색이 맑고 향이 은은하며 맛이 달고 가벼운 청차(靑茶) 계열인 듯 싶습니다.
맑은 색이란 연한 청록이거나 황색을 띤 것으로서 반발효와 덖음이 적절하게 조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명확한 기록이나 제다법이 전해지고 있지 않아서 안타깝습니다.
해남 대흥사 응송스님의 제다법은 차잎을 따서 숨죽이는 법-흔히 살청(殺靑)이라고도 함-인데, 차잎을 솥에 넣고 불을 땔 때 물을 적당히 뿌린 뒤 솥뚜껑을 덮었다가 일정 시간이 지난 다음 꺼내어 비비는 것입니다.
곤양 다솔사 효당스님의 제다법은, 펄펄 끓는 물에 차잎을 살짝 데쳐내어 덖고, 비비고, 따뜻한 방안에서 적당하게 띄워서 만듭니다.
해남지방에서 시도되었던 중국차법을 응용한 김두만(金斗萬)의 경우는 시루에다 차잎을 넣고 증기로 쪄낸 다음 비벼 말리는 것이었지요.
응송스님과 효당스님의 제다법은 온돌방에서 띄워 말리는 점이 닮았습니다. 또한 두 어른 모두 일본 유학파였고 처음엔 조계종 승려였다가 나중엔 갈등을 빚은 것도 닮았는데, 두 어른의 차법은 각각 영남과 호남 차법의 큰 산맥을 이루었음도 공통점입니다.
김복순의 수제차법은 제대로 전승되지 못하고 저마다 어깨너머로 훔쳐보았거나 훔쳐보고 만드는 이를 다시 훔쳐보고 흉내내면서 복잡하고 억지스러운 저마다의 독창성이 더해지거나 빠졌습니다.김복순 차법에서 분파된 녹차와 사찰녹차법의 아류가 뒤섞여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 우리나라 전통수제 녹차의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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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61> 차에의 歸依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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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순 내외가 받았던 식품제조허가(정확하게는 조태연 명의로 되어 있었음)는 우리나라 녹차 제조 역사상 최초의 것이었습니다.
홍차 등 다른 식품 분야에는 이미 허가제도 시행 이후 수많은 허가증 발급이 있어왔지만 녹차만은 정확한 제조법을 몰랐기 때문에 허가를 신청하는 사람이 없기도 했겠지요.
김복순 내외는 녹차 제조 허가를 받는데 필수적인 근거 자료이자 녹차가 어떤 식품인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녹차의 성분분석표인 ‘시험성적서’까지 발급 받았지요.
1962년 9월 18일 ‘경상남도 위생시험소’에서 분석하여 발행한 자료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총 9개 항목에 걸쳐 시행된 시험에서 △관능시험 즉 냄새와 맛은 ‘보통’이며 △성상은 특수 향이 있는 녹갈색의 마른 잎으로 적혀 있습니다. 또 △불순물은 검출되지 않았으며 △유해성 중금속도 검출되지 않았고 △인공 착색 물감도 나오지 않은 것으로 돼 있습니다. 이어 △수분은 55% △단백질 25.7% △조지방 2.3% △회분 6.2%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엄격한 법 절차를 거쳐 발급된 식품제조허가증을 가지고 녹차를 만드는 김복순 내외가 몹시 불편한 존재로 떠오른 것은 홍차산업이 재미를 못보게 되면서부터 였습니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녹차를 만들 줄 모르기 때문에 기술적인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겠지요. 기술을 모두 가르쳐주거나 이전해달라는 직접 간접 요구가 거절당하고, 녹차가 장차 돈이 되리라는 전망이 분명한 상황에서 김복순 내외는 걸림돌이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무엇보다 얼렁뚱땅 대량으로 만들어 큰 돈을 쥐겠다고 설치는 자들에게 이 부부의 존재는 몹시 거북했겠지요.
그리하여 이들의 식품제조허가를 취소시켜버리기 위한 치밀한 계획이 세워지고, 앞에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한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는 하급직 공무원 한 사람이 지목되었지요.
상당한 자본과 무시할 수 없는 권력으로 무장한 세력의 사주를 받은 하급직원은 이를 거절할 수 없는 약점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자는 먼저 허가증을 반납해달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허가증의 규격이 바뀌었기 때문에 새로운 규격으로 된 허가증으로 바꾸기 위해서라고 했지요.
하도 공력을 들여 발급받은 허가증이기도 했거니와 10년 넘도록 가난과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허가증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서 계속 시일을 끌었지요.
담당자는 집요하게 반환을 요구했습니다. 하도 귀찮게 굴어서 김씨 부부는 결국 시키는대로 했지요. 그런 뒤 그 담당자는 이런저런 변명을 대면서 새로운 규격으로 된 허가증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런지 몇달 뒤 허가증을 재발급 받으라는 공문이 왔지요. 그제야 놀라서 관청으로 갔더니 이미 재발급 신청기간이 한달이나 지났기 때문에 이들 부부의 허가는 자동으로 취소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알고보니 그 담당자가 일부러 재발급 신청 공문을 붙잡아두었던 것이었지요.
다른 여러 사람들은 신규로 허가를 받았지만 이들 부부만 무허가가 된 것이지요. 군청, 도청, 보건사회부로 찾아가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담당자도 병으로 죽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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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62> 차에의 歸依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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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가가 취소된 뒤부터 참으로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무허가 식품인줄 알면서도 이들이 만든 차만 찾는 사람이 계속 늘어난 것이지요. 이들의 차를 즐겨 마시고, 존경이나 정중한 인사를 치러야 하는 자리에 선물로 내놓기 위해서 이들의 차를 적잖이 사가는 이들 중에 공직자가 많이 있었다는 것은 결코 웃어넘길 일이 아니었습니다.
무허가 식품을 단속하고 처벌해야 할 자리에 있는 공무원들일수록 이 부부가 만든 차만 사갔으니까요.
그같은 분위기를 잘 반영해주는 말이 생겨났지요. 낮에는 무허가 식품을 단속하러 나왔다가 밤이면 낮에 단속했던 그 무허가 제품 차를 사가는 단골 고객이 된다는 말이 그것이었지요.
김복순 내외가 만든 이른바 무허가 식품에 대한 경찰, 보건소 직원, 군청 직원들의 이중적 태도는 당시의 녹차 제조를 둘러싸고 암암리에 벌어졌던 제도적 모순관계를 엿보게 해줍니다.
군사정권은 총과 강압으로 국정 전반을 무섭게 밀어붙이는 이면에 아부와 뇌물로 이권을 농단하고, 교활한 인맥의 연줄과 지연 학연으로 얽힌 권력관계의 부패로 치달았지요.
먼 일가붙이 한점도 없는 철저한 객지에서 어린 자식 여섯을 데리고 다시 무허가 식품의 제조와 밀매 혐의를 받으며 살아가는 나날은 참기 어려운 수모와 고통으로 얼룩졌지요.
부산을 떠나올 때 한 삼사년만 고생하면 보람도 누리고 생활도 안정되리라 여겼던 것이 십년이 지났어도 그 아득한 좌절의 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에게 중학도 제대로 시키기 어려웠고, 추운 겨울 닳아서 구멍난 신발 바닥으로 눈녹은 물이 스며올라도 새 신발을 사 신길 수 없도록 생활은 어려웠습니다.
양식이 없어서 두부 만들고 난 뒤에 남는 콩비지로 아이들의 허기를 달래주면서 김복순이 흘린 눈물은 피였습니다. 허가증을 가져간 사람, 그 자를 내세워서 허가를 취소시킨 이들에 대한 원망이 어찌 없었겠습니까만, 그래도 드러내 놓고 원망할 수 없는 외로운 객지였습니다.
죄가 있다면 녹차 만드는 솜씨가 탁월하여 이름이 널리 퍼졌다는 것이었겠지요. 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탄압은 끈질기게 계속되었지요. 단속하러 나온 공무원들도 보다 못해 김복순 내외에게 귀띔해주기도 했습니다.
왜 이렇게 당하고만 있느냐, 차라리 다른 곳으로 이사해서 만들면 안되느냐, 우리들도 괴롭다, 미안하다는 등의 말을 하면서 자리를 뜨기도 했지요.
이들 내외는 이를 악물었습니다. 차(茶)는 원래 은혜의 산물인데, 직접 간접으로 녹차 만드는 기술을 배워서 그만큼 돈 잘벌고 유명인사도 된 것이 누구 덕인 줄 아느냐, 은인을 이다지도 배반하고 짓밟아서야 되겠느냐는 속울음을 울면서 몇번이고 다짐을 했습니다.
하늘 두쪽나도 녹차 만드는 일로 승부를 낼 것이며, 차 만드는 일을 하다가 일 속에서 굶어죽을 수 있다면 그 길이 가장 깨끗하고 떳떳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지요.
자식들한테는 참으로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자식들도 머잖아서 부모가 걸어간 길이 정녕 부끄러움의 죄가 아니라는 걸 알게되리라 확신했습니다.
김복순 내외가 겪은 수난과 식구들의 고통은 곧 그들의 생존이 차에의 귀의(歸依)였음을 알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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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63> 차에의 歸依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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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치르는 고난은 아무리 크고 오랜 것일지라도 그 나름의 까닭이 있고, 또 잘만 견디어내면 고난 아니고는 깨달을 수 없는 숭엄한 가치도 들어 있게 마련이지요.
김복순 내외가 겪는 어려움도 그랬습니다. 차맛을 제대로 아는 분들이 보내주는 끊임없는 격려와 도움이 이들로 하여금 모진 생각 안먹게 하고, 비열한 짓 하지 않도록 울이 되어 주었거든요.
통도사의 경봉노사, 삼락자, 수안스님, 청사선생, 부산의 금당선생, 사천의 효당스님, 광주의 의재선생 같은 어른들이 보내주시는 격려는 큰 힘이 되었지요.
봄철에서 초여름 사이에는 어김없이 다녀가시는 전국 여러 사찰의 스님들과 명사들의 도움은 생활에 큰 보탬이 되어 주었습니다.
허가를 갖고 있을 때 사용했던 ‘선차’라는 상표와 고려제다라는 이름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요. 그 대신 ‘죽로차(竹露茶)’라는 새로운 이름을 쓰게 되었는데, 1965년 다솔사에 주석하시던 효당노사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지요. 그 뒤로 한일제다, 한림제다, 방산다장(方山茶藏)등으로 바뀌면서 어려움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차에 대한 평가는 점점 널리 퍼져서 일본 차인들이 화개를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김복순의 차만들기 내력을 들은 그들은 일본에서도 사라져버린 그 차맛과 함께 한국의 차나무와 풍토적 특성이 어우러져 생기는 독특한 맛에 감탄했지요.
일본으로 차를 수출하는 문제가 거론되었습니다. 하지만 허가가 없다는 점, 대규모 생산 설비가 안되어 있다는 점 등이 장애물로 작용하여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가증이 또다시 김복순 내외의 마음에 굵고 깊은 상처를 만들었습니다. 허가증을 돈으로 살 수도 있다는 제의가 여러번 있었지만 먹고 살기도 벅찰 뿐만 아니라 누구한테 돈을 빌릴데도 없었지요.
피눈물로 보낸 세월이 1980년대까지 밀려왔지요. 80년대 들어 박동선씨가 찾아 왔습니다. 차맛이 좋다고 소문을 듣고와서 친구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많은 양의 차를 사갔지요. 그 인연으로 뒷날 박씨가 만든 미륭그룹 산하에서 식품판매를 위해 설립한 ‘한남체인’이 ‘신록차’라는 상표의 차를 판매하게 되었지요. 그 신록차의 알맹이 중에는 김복순의 화개차도 포함되었지요.
또한 ‘뿌리깊은 나무’에서 ‘뿌리깊은 나무 잎차’라는 상표를 붙여 녹차 사업을 할 때(당시의 책임자는 한상운씨였음) 그 차의 알맹이도 김복순이 만든 찻잎이 들어 있었습니다.
김복순 내외가 겪는 고난을 말없이 지켜보시던 삼락자스님께서는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을 찾고 계셨던가 봅니다. 부산에서 크게 차판매 사업을 하던 조선생(은행 간부로 있다가 정년퇴임했음)의 부인한테 김복순의 차를 소개해주셨습니다.
그 부인은 뒤늦게 김복순의 차를 알게되어 크게 기뻐하면서 한꺼번에 5백만원어치의 차를 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차값을 미리 건네주기까지 했지요. 김복순 내외는 하늘이 도우셨다고 믿었습니다. 그 5백만원이면 허가증을 살 수 있었거든요. 수소문한 끝에 폐업중인 어느 식품회사의 허가증을 샀습니다.
‘보건사회부 제 47호’인 이 허가증은 원래 ‘조양식품’이란 회사의 것이었는데, 허가증의 주소지, 대표자 명의를 변경 신청하여 다시 어엿한 녹차 제조업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해서 만든 것이 저 유명한 ‘쌍계제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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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64> 차에의 歸依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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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순 내외가 녹차 제조법을 처음 이용하여 ‘선차’를 선보인 이후 그들의 제다법이 불완전한 상태로 차츰 일반에 알려졌습니다. 가장 핵심 기술이라 할 수 있는 향기와 맛을 결정짓는 마지막 단계는 철저한 비밀에 부쳐졌고요.
이들이 무허가 신세가 되어 곤경에 빠져있던 십 수년 동안 한국의 녹차 산업은 그럭저럭 규모가 커지고 수요량도 경이적인 폭증을 거듭해왔습니다.
김복순 제다법을 어깨너머로 훔쳐보았거나, 훔쳐본 이들의 기법을 또다시 훔쳐본 사람들 중에서 뜻밖의 성공을 거둔 사람도 생겨났지요.
김복순 내외는 여전히 궁핍과 핍박 속에 놓여 있었지만 어깨너머로 훔쳐보고 만든 녹차를 팔아서 큰돈을 쥐게 된 이들일수록 김복순 내외를 멀리했습니다.
성공과 함께 상당한 돈도 벌게 된 이들 중에는 1970년대 중반과 후반 무렵 처음 녹차를 만들기 시작하여 김복순으로부터 기술지도를 받았거나 상당한 조언을 받아 사실상 제자라고 봐야 할 사람도 몇몇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이런 사실을 극구 부정합니다. 오직 자신들의 독자적인 연구 결과라고 강변합니다.
차는 만드는 일뿐만 아니라 마시고 깨닫는 정신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형이상학적 음료입니다. 은혜를 모르고서 차를 만들거나 마시는 것은 큰 불행이며, 이 불행은 차 마시는 이의 가족과 이웃까지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김복순 내외가 오랜 고행 끝에 다시 허가증을 갖춘 차만들기를 시작했지만 세상의 변화는 벌써 이들이 그토록 추구했던 좋은 차를 제대로 만드는 일보다는 돈을 많이 벌어들이는 것을 중시하는 풍조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비록 큰돈을 만들 수는 없을지라도 제대로 된 차를 만들다가 죽어야만 죄짓지 않고 부끄럽지 않은 삶이 되리라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며 살다 갔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가난하고 외로웠으며 불행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한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차는 은혜의 산물이어서 차를 시작할 때 은혜의 문을 들어서서, 차를 마치고 생을 닫을 때는 더 크고 넓은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던 김복순의 차 철학은 누구도 더럽힐 수 없는 한국 차의 아름다운 미덕입니다.
좋은 차를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차에 대한 나름의 철학 말고도 몇 가지 필수적인 조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깨끗하고 좋은 찻잎을 선택하는 것이 첫 번째 조건입니다. 그 찻잎을 따서 지체하지 않고 열처리하는 것이 두 번째 조건이지요. 차 만드는 이의 몸이 청결해야 하고 마음에 사악함이 없어야 합니다.
예부터 정해 놓은 절차대로 따라야 하며, 세상의 평가에 휘둘리지 말고 배우고 터득한 대로 몰두해야 합니다.
다 만든 뒤에는 차를 달여서 하늘에 제사해야 합니다.
이같은 차만들기는 곧 차에의 귀의이며 종교와 정신세계로의 발원이기도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수단방법 안가리고 흉내내기에 매달리는 것은 죄악이 됩니다. 오늘날 저 수많은 전통수제차 만드는 이들 중에는 지탄받아야 할 잘못을 범하고 있는 사람도 몇몇 있습니다.
그 잘못이란 곧 인간의 건강을 해치고, 차문화를 왜곡하며, 시대와 민족에 큰 걱정을 끼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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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65> 좋은 차의 조건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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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茶千年 65.
<좋은차의 조건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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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만든 좋은 차가 있어야만 차살림의 멋과 철학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차문화의 근본이 제대로 된 좋은 차에 있다는 것이지요.
초의 스님께서 말씀하신 ‘동다(東茶)’란 곧 제대로 만든 좋은 차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차살림에서 인간과 나라가 함께 생각하고 더불어 누릴 만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잘못 만든 차는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잘못 만든 차를 잘못 마시게 되면 더 큰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빈 속에 차가운 녹차를 많이 마셨을 때 흔히 나타나는 속쓰림은 뜨거운 차라 할지라도 피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잘못 만든 차일수록 속쓰림은 더 심해지고 만성 위염증세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또한 마실수록 입속과 목구멍에서 침이 마르며 갈증이 심해지는 경우도 있지요.
제대로 만든 차는 갈증을 풀어주지만 그렇지 못한 차는 반대 현상을 보이지요. 제대로 만들지 않은 차는 차 마시는 이들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겠지요.
더 나아가서는 마음놓고 마실 만한 국산차가 많지 않아서 중국과 일본의 비싼 차를 수입해서 마시게 되는 원인을 만들어 내는 셈입니다.
차문화의 근본이 좋은차 제대로 만드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고 보면 좋은 차 만들기에 생애를 바친 김복순 조태연 부부의 삶이 지닌 향기와 교훈은 숭고하기까지 합니다.
2004년 농산물 수입 개방을 눈앞에 두고 한국의 많은 차인들과 녹차 만드는 이들은 한국 녹차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미래가 비관적으로 예견되는 가장 큰 이유는 중국, 일본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유명한 차들과 비교할 만한 명차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현실 때문입니다.
녹차를 만들기 시작한 지 40여년밖에 안되는 짧은 역사인데다 그나마도 좋은 차 만드는 솜씨를 칭찬하고 도와주는 정책이나 차인들의 예절이 뒤따르지 못했던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요.
녹차의 소비량 증가를 따르지 못하는 찻잎의 공급 문제는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좋은 차든 나쁜 차든 찻잎이 넉넉해야만 가능한 것이니까요.
차나무 재배면적이 좁고, 차나무의 품종 또한 개량할 필요성과 함께 재래종 자체의 특장을 더욱 키워갈 수 있는 재배법의 연구도 근본 문제에 포함되었지요.
국토 면적이 중국이나 일본처럼 넓지 못하고 차나무 재배에 적합한 기후대로 따질 때는 더욱 더 제한된 면적안에서만 찻잎 생산이 가능하므로 단위당 찻잎 생산량을 늘리면서 우수한 품질을 지켜내기 위한 연구와 투자가 절실합니다.
한국의 차나무 재배 역사는 결코 짧은 것이 아니지만 정책적인 재배는 일제때인 1939년부터였습니다. 식민통치 정책의 하나로 시작된 차나무 집단재배는 전남 보성 봉산리에 차 농장을 만들면서 시작되었지요.
이 해에 일본인 차 전문 기술자들에 의하여 한국에서 최적의 홍차 재배지로서 보성이 선정되었지요. 차나무는 연중 날씨가 따뜻하고 1천5백mm 이상의 비가 내리는 해양성 기후에 알맞는 온대 식물이거든요.
보성은 강우량이 다소 못미치지만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가 교차하는 곳이어서 안개가 많아 부족한 수분함량을 보완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베니오마레’라는 인도산 차종자를 수입하여 심은 것이 시초였지요.
그때 일본 차 종자도 함께 심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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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66> 좋은 차의 조건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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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 전남 보성 차단지는 외국 차나무의 한국 점령을 위한 전진기지였던 셈입니다.
보성 지역이 차나무 재배에 필요한 기후 조건과 기타 여건이 가장 적합하다는 일본인 차나무 전문가들의 판단이 순수한 식물학자의 학문적 견해라고만 보기에는 어딘가 석연찮은 데가 있습니다.
1939년과 1940년이라는 시기는 일제가 한국의 민족성 말살을 통한 한국인의 노예화를 위해 광분했던 때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 수천년 동안 지리산록에서 무성하게 자생해온 야생 차나무가 아닌 인도산 차 종자를 일부러 수입해 보성에다 심은 것을 식물학자의 순수한 학문적 판단에 따른 것으로만 보기는 어렵지요.
참으로 진지한 차나무 재배 전문가였다면 오랜 세월동안 지리산 일대에서 잘 자라온 자생 차나무에 먼저 관심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먼저 전남 보성과 지리산은 근접하고 있어서 기후대가 동일하며 지리적 여건도 비슷하기 때문에 차 종자의 번식과 재배가 인도산에 비해 유리한 점이 있다는 것 쯤은 상식이겠지요.
물론 인도산 품종이 월등하기 때문에 그런 판단을 했다고도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로부터 약 6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면 그런 판단을 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재래종보다 좋은 품종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인도산과 일본산이 혼재하면서 번식을 해왔고, 1970년대 들면서 차나무 재배가 농업정책으로 권장되어 하동과 경남 지역에까지 혼합종 차나무가 퍼져 재래종과 뒤섞여버렸지요.
이같은 혼돈속에서 녹차의 수요량이 계속 늘고 있습니다. 물의 중금속 오염과 생태계 파괴현상 앞에서 녹차가 지닌 특별한 약리 기능도 한몫 하는 셈이지요.
녹차의 약리학적 효과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팽창하는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차나무에 거름을 주는 문제가 현실화되었지요.
거름의 주된 종류로는 질소비료였습니다. 값이 싸고 효과가 빠르며 확실한 질소 비료는 한동안 아무런 비판도 받지 않고 널리 쓰여졌습니다.
찻잎 따는 시기는 제한되어 있어서 이 기간 중 보다 많은 양을 수확하기 위해서는 질소비료를 많이 뿌리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질소비료를 많이 먹고 자란 찻잎으로 차를 만들면 수분 함량이 지나쳐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차의 깊은 맛이 줄어들고 향기도 약해지며 자칫 차에서 악취까지 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차를 나쁜 차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1960년 말부터 시작된 질소비료 의존은 꽤나 오래 계속되었지요. 이때 김복순 내외는 이같은 찻잎으로 차를 만들어서는 안된다며 매우 단호한 입장을 보였지요.
좋은 찻잎을 구하기 위해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깊은 계곡이나 비탈에서 자라는 찻잎을 찾아 다녔습니다.
또한 그런 곳에서 따온 찻잎을 돈 을 더주고 사기도 했고요.
좋은 찻잎 따느라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거나 계곡의 잡목숲에서 길을 잃고 죽을 고비도 더러 넘겼습니다.
좋은 차는 사람 몸의 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도 치유시킬 수 있다는 품질 제일주의에 존재 이유를 두었던 김복순의 제다 정신은 곧 한국인의 장인정신이기도 합니다. 그걸 되살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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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67> 차농사의 문제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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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茶千年 67.
차 농사의 문제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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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에 함유되어 있는 매우 희귀한 성분들의 특별한 약효가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녹차의 소비량은 전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고혈압, 심장병, 당뇨, 뇌혈관 계통의 질환에 대한 예방효과가 있다는 서구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른 것이지요.
특히 서구 사회의 육식문화가 무분별하게 범람하면서 폭증하고 있는 비만과 대장의 질환은 한국인 삶의 질을 저하시키는 한 요인으로까지 지적되고 있습니다.
일찍이 육류 중심의 음식문화를 생활화해 온 북방의 유목민족, 특히 몽고족들은 녹차를 주된 음료로 상용했습니다.
정확하게는 녹차가 아닌 반발효 또는 발효시켜 만든 잎차를 달여 뜨겁게 마셨는데, 하루 내내 틈 있을 때마다 차를 마시며 살지요. 생활의 여유나 멋으로서가 아니라 살아가기 위하여 반드시 마시지 않으면 안되는 필수적인 음료이자 약이기 때문입니다.
차나무는 몽고지방에서도 자라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양자강 남쪽 따뜻하고 비가 자주 오는 광동성, 복건성, 귀주성 등지에서 나는 찻잎들로 만든 차를 수입해다 마셨지요.
아무튼 커피, 코코아와 함께 인류의 3대 기호 음료로서 세계 160여 국가에서 널리 마시고 있는 녹차(반발효, 발효차 포함)의 수요량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커피와 코코아의 증가율을 훨씬 앞지르고 있는 추세지요.
이같은 현상은 한국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녹차 제조 기술이 지닌 문제점과 함께 차농사가 지닌 문제점까지 더해져서 한국 차보다는 중국과 일본 차 소비량이 훨씬 더 많습니다.
한국 차농사의 문제점은 차나무를 재배하는데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거름의 종류와 차나무 품종, 재배 기술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거름으로 가장 부적절한 것은 질소 성분이 과다한 요소비료와 충분하게 발효시키지 않은 닭똥거름이나 돼지똥거름입니다. 이런 종류들을 장기간 사용할 경우에는 수질오염도 생각해볼 수 있는 위험한 일이지만 짧은 시일 안에 나타나는 부작용으로는 차나무의 생태가 변질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원래 차나무는 뿌리를 깊게 내려 뻗는 직근성입니다. 땅속 깊게 뻗기 때문에 흙속의 다양한 광물질을 흡수하여 수십 종류의 희귀하고 유익한 성분을 지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차나무에다 질소질 거름을 과다하게, 지속적으로 주게 되면 차나무 뿌리가 질소질을 빨아먹기 위하여 지표면 가까운데로 뻗어나게 되지요.
땅속 깊게 뻗는 것을 포기하고 되도록 쉽게 인공 비료성분을 빨아먹기 위해 옆으로 뻗으면서 잔뿌리를 발달시키게 됩니다.
직근성인 차나무는 잔뿌리가 거의 없어 옮겨심을 경우 고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질소질에 민감한 잔뿌리가 발달한 차나무는 옮겨 심기도 비교적 쉬운 편입니다.
문제는 그때부터 발생합니다. 뿌리를 땅속 깊게까지 안내리고 무성한 잔뿌리로 지표면 가깝게 뻗은 차나무의 찻잎으로 만든 차는 맛과 향이 확연하게 떨어지지요. 땅속의 다양한 광물질을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뿐 아니라 해충이나 질병에 약하여 마침내 농약을 뿌려야 하는 사태로까지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본래의 차는 없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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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68> 차 농사의 문제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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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독기 묻은 손으로 더럽혀지고 병을 앓는 차밭에서 인공 질소비료의 힘으로 키운 차나무에서 수확한 찻잎으로는 결코 맛있고 향기 짙은 차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가장 분명한 증거는 질소질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60년대와 70년대 중반 또는 80년대 초반까지 맛볼 수 있었던 그윽한 향기와 깊은 맛이 우러나는 녹차를 만나기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욕망, 이 욕망의 부산물인 대량생산과 경제적 이익의 추구가 함께 빚어낸 불행이지요.
이같은 차농사의 문제점이 본질적으로 고쳐지지 않고 있는 것은 엉뚱하게도 지방자치제도의 실시와 관련이 있습니다.
시·군 지자체들은 수익 사업의 새로운 발굴이나 기존의 규모를 확장하는데, 차밭을 조성하고 녹차 가공 시설을 짓는데 많은 투자를 하고 있지요. 남해안에 인접해 있는 지자체 대부분이 녹차 생산을 위한 나름의 계획에 따라 투자를 늘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녹차 산업이 지닌 여러 가지 매력에만 관심을 두고 다투어 사업을 벌이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차농사에 있다는 것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단체 책임자의 임기 중에 수익을 올리기 위한 조급함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차농사는 달라야 합니다.
우선 강수량이 충분하거나 수분을 충분하게 공급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곳에다 차밭을 만들어야겠지요.
차나무는 습기를 좋아하는 식물이거든요. 찻잎을 기계로 수확할 것인지, 일일이 손으로 채취할 것인지를 미리 계획하여 차나무 심는 방법을 결정하는 것도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기계 작업을 해야 할 것이라면 밀식해야겠지만 손으로 찻잎을 딸 계획이라면 드문드문 심어야만 좋은 찻잎을 보다 많이 수확할 수 있겠지요.
어떤 거름을 주어서 재배할 것인지도 계획해야 합니다. 가축의 분비물을 거름으로 쓰기 위해서는 충분한 발효와 함께 낙엽이나 퇴비를 섞어 영양분이 많은 거름을 생산해야 하겠지요.
품종 개량도 서둘러야 할 과제입니다. 지리산록에서 자생하는 차나무는 그대로 보존하면서 잘 관리하여 지리산 찻잎 고유의 맛과 향기를 유지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른 지역의 고유한 차나무도 다른 품종과 섞지 말고 보존 관리해야 한국 녹차의 다양한 품질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해남 대흥사 주변, 순천 송광사와 선암사 주변의 차나무, 구례 화엄사와 하동 쌍계사, 칠불암 주변의 차나무, 곤양 다솔사, 사천 배방사와 와룡사지 부근의 차나무, 김해와 양산 지방의 차나무들이 여기에 해당되겠지요.
이곳을 제외한 새로운 차밭의 조성에는 품종 개량이 이루어진 새로운 품종을 심어서 찻잎의 수확량을 늘리면서 차의 품질도 다양화 할 수 있도록 면밀한 계획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차나무를 계획적으로 대량 생산하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준비가 절실합니다. 차나무가 성장할 수 있는 기후와 토양이 매우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적당한 조건을 갖춘 지역의 산은 물론 벼농사를 짓는 논이나 밭에까지도 차나무를 재배하는 계획이 필요할 것입니다.
특정 지역 농업 작물로 지정하여 쌀농사를 대신하게 만들어도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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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69> 차살림의 병폐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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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차인들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병폐 열가지를 앞서 지적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나라 고유의 차살림 역사와 살림하는 법을 모른채 중국과 일본의 차문화를 우리 것인양 흉내내고 있다는 것을 살폈지요.
두 번째는 한국에서 자라는 찻잎으로 만드는 차의 종류가 덖음차 하나로 획일화되어 있고, 그나마도 좋은차 만드는 법을 잃어버리고 조악한 품질을 이름만 다르게 붙여 비싼 가격에 팔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세번째 병폐인 차살림의 지독한 병폐와 그 원인, 실상을 파헤쳐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차살림 문제는 먼저 그 명칭부터 잘못되어 있습니다. 가장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 ‘다도(茶道, 또는 차도)’라는 일본 문화를 말 그대로 사용하거나, ‘다예(茶藝)’, ‘차회(茶會)’라는 중국 문화를 언어 그대로 사용하는 점입니다.
한국인에게는 신라 시절부터 ‘차살림’이라는 참으로 뜻 깊고 맛깔스런 이름씨가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중화사대주의 독소와 일본주의 역사의식에 사로잡혀 오늘날까지도 외세를 따르고 있습니다.
모르고 썼다면 당장 그만 두어야 옳고, 알면서도 그랬다면 그 까닭을 자신있게 밝혀야만 차 마실 인격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혹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차 문화 관련 단체의 위세나 온당치 못한 완력 등으로 자신의 모순을 숨기려 한다면 이는 한심한 일입니다. 차살림이 제대로 안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차살림의 기초인 차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고 있는 점입니다.
굳이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유행어를 빌릴것도 없이 한국 차살림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한국 토양과 풍토에서 자란 찻잎을 재료로 하여 제대로 만들어진 차가 있어야 합니다.
차농사를 잘 지어서, 그 찻잎으로 정성껏 차를 만들어, 뿌리 깊은 차살림 예절대로 차 한잔 달여낼 수 있어야 차인(茶人)입니다. 그런데 차 농사나 좋은 차 만드는 법 따위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차 그릇을 다루는 기이한 손놀림과 화려한 옷치장, 수많은 차 그릇들의 진열과 과시, 남에게 보이기 위한 차 행사, 값비싼 외국 차에 관한 지식의 암기, 소문난 차 단체에 들었다는 우쭐댐 등으로 차인의 품성을 말하려 하는 것은 모래 위의 성처럼 허망한 것일 수 있습니다.
차인의 근본은 초의 스님께서 이르신대로 동다(東茶) 정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즉 차 농사짓기의 정직함, 그 차 농사로 얻은 찻잎으로 차를 만드는 지극한 정성, 그렇게 만든 차를 달여 남을 위해 내놓는 예절을 몸소 실천하는 것을 동다정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남을 부리는 짓으로 차를 말해서는 안되지요. 차 농사는 소작인이나 머슴이 짓고, 차 만드는 일은 하인들이 하고, 차를 달여 내오는 일도 종이나 아랫것들이 도맡기 때문에 차인이란 자는 고작 손으로 찻잔을 들어 마시기만 하면 되는, 조선조 말기의 부패하고 무능하며 타락한 지배계층들을 질타하기 위해 지은 책이 동다송(東茶頌)이지요.
불행하게도 이 시대 차인이라는 사람 중에는 아직도 차 농사 짓고, 차 만드는 이들을 얕잡아 보면서, 입으로 마시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차가 그래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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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70> 차살림의 병폐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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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茶千年 70.<차살림의 병폐②>
한국의 현대 차살림은 대흥사 스님이셨던 초의선사의 중정(中正) 사상을 모체로 삼고 있습니다. 초의(草衣·1786~1866) 스님의 차살림은 연담(蓮潭·1720~1799) 스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며, 연담스님은 서산(西山·1520~1604) 스님의 차맥(茶脈)을 이어 받고 있습니다.
중정사상(中正思想)은 초의스님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서산에서 연담을 거쳐 은밀하게 이어져 내려온 정신이지요.
불교적 측면에서 살피자면 선(禪)과 교(敎)가 병행하는 수행법을 뜻하며, 현실 세계와의 관계 측면으로 볼때는 고난받는 중생의 삶을 외면하고는 어떤 수행도 부질없다는 뜻이 녹아들어 있지요.
따라서 중정은 매우 이성적인 현실참여와 중생(사회) 구제가 아닌 중생과 함께 살아가면서 부처의 길을 몸소 실천해 보이는 적극적인 보살행의 원천을 뜻합니다.
서산대사의 삶은 임진왜란의 전쟁속을 헤쳐다니면서 인간의 길이 어디로 나 있는지를 온몸으로 보여 주었지요. 그같은 실천은 곧 선교(禪敎)를 병행하여 수행해온 데서 생겨난 정신이었습니다. 이 정신은 사명대사를 거쳐 선교의 총본산이었던 해남 대흥사의 연담스님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연담스님은 당대의 중도주의(中道主義) 정치철학을 확립하고 실천했던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과의 절묘한 교우관계를 통하여 억불정책 속에서도 불교문화를 꽃피운 스님입니다.
채제공은 사실상 남인(南人)의 영수이면서도 당파를 초월하여 정치를 했던 분입니다. 정통 성리학을 계승하면서도 불교와 천주교를 적극 탄압하는 정책을 반대했지요.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되,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옳게 이용할 수 있다면 포용해야 하고, 천주교 또한 패륜과 신이적(神異的)인 면이 있으나 극단적으로 탄압하기보다는 교화(敎化)정책으로서 유도하는 정책을 썼지요.
그리하여 그의 제자가 된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이 천주교의 씨앗을 널리 퍼뜨릴 수 있게 했고, 연담스님을 비롯 대흥사 승려들과의 은밀한 교류를 통하여 불교문화의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특히 정약용이 암행어사로 나갈 때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수행중인 연담스님을 찾아보도록 주선한 것은 뒷날의 기적같은 일들이 이루어지게 된 시초였습니다. 다산은 연담스님의 치우침 없는 평등정신에 크게 감화받았지요.
그리고 후일 정약용이 강진 땅에서 유배생활 할 때 다산(茶山)이란 호를 쓴 것이나 연담스님의 제자 초의스님을 만나 유교경전을 가르친 일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초의스님이 집대성한 중정철학의 사상적 내력도 여기서 비롯됩니다. 이렇듯 중정은 종교, 역사, 정치, 사상을 초월하는 높고 큰 지혜를 뜻합니다.
통일이나 화합의 의미가 아닙니다. 중생과 부처의 마음은 각각 원만하고 완전하여 원래 하나이며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같은 불교적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은 수행자가 사는 현실세계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삶과 그 원인을 알고 치유하는 실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차의 중정은 이같은 보살행을 위한 서원을 세우고 또 자신에게 거듭 되묻고 타이르는 참선 수행을 뜻합니다. 따라서 차인(茶人)은 중정을 실천하는 수행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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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71> 차살림의 병폐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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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간을 맞추는 방법, 물을 끓이고 익히는 기준, 찻잎을 딸 때부터 좋은 차가 만들어지기까지의 물 불의 온도와 세기의 정도 혹은 사람 손길의 더해짐과 덜해지는 정도를 두고 가장 이상적인 상태나 균형을 일컬을 때 흔히 중정(中正)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중정의 한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중정의 실체는 차 마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상 한 복판으로 걸어나와야만 만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은 움직입니다. 온갖 힘들이 서로 다른 목적과 방향으로 움직여가면서 부딪치고, 깨어지며, 한데 보태지거나 공존하기도 하면서 움직입니다. 이때 어느 한쪽으로 쏠리거나 억지로 쏠리게 함으로써 반대쪽의 존립이 위태롭게 되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시키려는 것이 중정의 핵심이지요.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있고, 그 관계는 평등한 것이라는 불교 사상이 집약된 것을 중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차 한잔으로 집약되어 나타나는 중정의 정신을 근간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중정을 유지하고 실천하려는 것이 차의 미학이겠지요.
오늘날 우리나라 차인들의 차살림에서는 이같은 중정 정신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차살림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겉으로 차를 내세우기는 하지만 속마음은 차가 아닌 권세와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차 모임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경우는 명백히 차를 빙자한 속물의 위선이지요.
차살림이 전통적으로 지녀온 품격과 명성을 훔쳐 속물의 재력과 권세 위에 덮어 씌워 또 하나의 권위주의를 만드는 어리석음일 따름이지요.
수백명의 회원을 조직적으로 거느리고 빈번한 차모임을 화려하게 열어 세력을 과시하는 모습은 이미 차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는 사치와 향락으로 보입니다.
차의 본질이 중정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에 주도하는 이의 억지에 동조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무슨 유파니 하는 차모임을 만들지요.
그렇게 하여 생겨난 차모임이 300여개나 된다는 것은 곧 우리나라 차살림의 혼돈 상태를 보여주는 셈입니다. 중정을 잃은 차모임들은 자칫 가난하고 바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갈등관계를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몇몇 차 단체들의 호화 사치풍조는 서민들에게 소외감을 갖게하고 있습니다.
이런 행태는 분명 중정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임과 동시에 차의 본질을 더럽히고 왜곡하여 차살림을 망쳐 놓는 죄악입니다.
심지어 돈을 주고 회원을 모집하여 세력을 키우고, 자신들의 주장이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짓을 서슴지 않는 어느 차 단체의 행동은 추악한 정치판을 닮아가고 있어 환멸을 느끼게도 합니다.
한국인은 유독 권력관계에 집착한다는 어느 인문학자의 지적처럼 차살림까지도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해야한다는 것은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생긴 자아상실 증후군의 한 증거인지도 모르지요.
차살림은 나와 다른 모든 것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은혜를 깨닫는 예절이자 참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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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72> 차살림의 병폐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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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조직, 화려한 차 행사, 사치스런 옷치장과 비싼 차 도구들, 현란한 손동작과 일사불란한 단체행동 등으로 상징되는 오늘날의 여러 차 단체들은 어딘지 모르게 주인의식을 잃은 듯한 인상을 줍니다.
마음 속에서 기쁘고 편안하게 우러나는 차는 결코 겉모양새를 꾸미려고 하지 않습니다. 꾸민다는 것을 중요시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편안하고 고요하여 바라만 보아도 행복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어느 때, 누구 앞에서든 한결같이 편안하고 기쁘게 미소짓게 합니다. 그것이 모두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일부에서 보여주는 차살림은 겉치장과 손놀리는 동작에 지나치게 매달리고 있습니다. 마치 요술 램프를 만지작거리면서 비밀 주문을 외우는 마술사의 손짓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차 도구들을 펼쳐 놓고 있는데, 그릇 하나 하나의 진열 방법과 이론적 역사적 근거도 각양각색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농차(濃茶)이든, 잎차이든 각 유파마다 그릇과 놓는 방법이 조금씩 다릅니다. 하지만 농차는 농차로서의 기본 예절이 정해져 있고, 잎차 마시는 법도 정해진 예절이 있습니다.
올바른 전통 속에서 잘 정비된 차살림 예절은 결코 까다롭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불편함이나 부담감을 주지 않습니다. 차살림 예절의 기본이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오늘날 한국 차살림, 흔히 다도라고 하는 일부 모임들을 보게 되면 사람을 위압하고 낯설게한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차실의 화려하고 고급스런 분위기로 손님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차살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므로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인 양 생각하는데, 이야말로 허세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 차인들의 경우에는 다도의 전통 예법이 워낙 엄격하여 오래도록 수련해 온 사람이 아니고는 섣불리 손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도는 일본문화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한국인이 일부러 외국 문화를 배우기 위해서라면 모르되, 다도를 한국 문화로 잘못 알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한국인에겐 예부터 한국의 차살림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있었는지도 몰랐다고 항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항변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지요.
이렇듯 겉치장을 중시하는 차살림이다보니 적지않은 사람들이 차로 인하여 갈등을 겪게 됩니다. 흉내내기, 무조건 따라하기를 통하여 진정한 마음의 평정을 얻고 세상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넉넉하게 웃기란 어려운 일이지요.
차살림은 누구에게든 문턱이 없어야 하고, 언제 어디서든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격식이 없는 가운데서 나오는 아름다운 예절이 사람과 사람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감싸줍니다.
차를 마시면서 얘기하고, 노래도 부르고, 흥겨우면 춤도 출 수 있어야지요. 원효스님의 무애차가 그 전형입니다.
차가 있고, 물이 있고, 적당한 그릇이 있고, 즐겁게 마실 이웃이 있다면 항상 차살림은 가능합니다.
차인은 마음에서 차의 중정이 만들어집니다. 겉치장이나 돈, 지난친 격식 따위로는 중정을 만나지 못하며, 차의 마음에 영원히 가 닿지도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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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73> 차살림의 병폐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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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茶千年 73.
<차살림의 병폐⑤>
차인(茶人)은 생명을 이루고 있는 자연 질서를 배우고 깨달아서 인간 생활을 아름답게 만드는 예절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생명을 이루고 있는 자연 질서를 배우고 깨닫는 일이어서 불법(佛法)의 참선과도 깊은 관련이 있고, 삶의 아름다움과 예절을 접목시키는 일이어서 예술 세계와도 이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차살림은 생명과 관련된 오래된 인류의 문화유산이자 미래 세계로의 길이 들어 있는 정신의 보고입니다.
차살림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마음’, ‘평상심’입니다. 지식이나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권위며 물질적 가치들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평상심을 흐리게 하고 때가 끼게 합니다. 흐려진 눈과 욕망으로 충동질당한 마음으로는 어떤 삶이 아름다운지를 볼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차에 관한 쓰잘데없는 잡동사니 지식 나부랭이에 정신이 붙들려 있는 사람은 이미 지식에 점령당하고 있어서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냥 차를 만들고, 차를 마시면서 살아가면 될 일인데 괜스리 무슨 목적을 억지로 만들고, 그 목적에 맞는 형식을 짜내어 거기에 구속되는 것을 이른바 차사범(茶師範)이니 차선생 또는 전문가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아름다움에서 크게 벗어난 것입니다.
호들갑스런 소위 행다법(行茶法)이란 것들 중에는 상업적인 술책도 들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일본 다도계에서 열 세가지 행다 방법을 삼년에 걸쳐 배우는 동안 한 단계마다 돈이 오가며, 차사범 면허시험에서도 묵시적인 부조리가 얽혀있듯이, 어느새 한국에서도 차살림을 둘러싼 장삿속이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차살림에서 금전과 권세가 영향력을 미치게 된 이후로 부자들이 좋은 차라고 말하면 무조건 따라서 그렇게 믿어버리는 일이 생겨났지요.
차사범의 말이나 행동도 마찬가지지요. 걸핏하면 차선일미(茶禪一味)를 들먹거리지만 그들이 과연 종교적으로 얼마나 참선을 했으며 수행을 하면서 그런 말을 뇌까리는지 따져 물어볼 일입니다. 이 시대 한국의 차만큼 깊고 고요한 사색과 수행에서 멀찌감치 벗어난 적도 일찍이 없었을 것입니다.
정녕 생명의 질서대로 차농사를 짓고, 차를 만들며, 차를 마시는 차인이 아니라 이런 저런 작위적인 유명세를 앞세워 뛰어난 차인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일입니다.
어느 시대건 차의 병폐는 있었겠지만 오늘날 만큼 여러 분야에 걸쳐 병들었던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한국 차살림의 병폐는 너무 깊어져서 웬만한 치료법으로는 치유하기 어려울 만큼 나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차인들이 서둘러 이 병폐를 고치지 않으면 차는 세상의 비웃음을 사게 되고, 마침내 중국과 일본차의 식민지로 전락할지도 모릅니다. 차의 식민지는 식량이나 정치 군사적 식민상태와는 사뭇 다른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식량, 에너지, 정치 군사(경제)적 식민상태는 회복이 가능한 것이지만 정신적 문화적 식민상태는 회복이 거의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은 차인들의 몫이자 영예로운 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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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74> 茶人論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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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는 아름다움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어서 자연, 종교, 예술의 본질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불교 수행자들이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을 지켜오는 것이나, 차인들이 불교 수행자들의 정신 세계를 느끼고 깨닫기 위해 정진하는 이유도 차의 세계에 함유된 맑고 큰 정신속으로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차를 통하여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보려고 하는 이를 차인(茶人)이라 합니다.
지식 등 인위적인 작위와 조작에 의한 선입견 없이 본래부터 ‘있어온 그대로의 마음’을 찾아가는 것이 차요 차인이기 때문에 차와 차인은 필연적으로 차의 법(法=형식)을 따라야 합니다.
‘필연적인 법’이므로 억지, 과장, 부자연스러움은 차와 차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이자 독입니다.
정녕 아름다운 차의 법은 역사니 전통이니 권위와 위엄으로 치장된 불변의 예(禮)가 아니라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입니다. 유동(流動)하는 것이기는 하되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 아니라 지극한 예절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어서 스스로의 형식으로 들어가서 형식을 잊어버리는 것이지요.
수행자가 엄정한 계율을 기꺼이 따름으로써 계율의 불편함, 까다로움, 두려움을 잊고 계율이라는 그지없이 좋은 방편을 이용하여 부처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차의 법을 엄격하게 따름으로써 법의 구속성을 초월하여 법 안으로 들어가 자연, 종교, 예술의 근원을 이루는 차의 마음에 가 닿게 됩니다.
차의 법은 예절과 차에 필요한 차그릇이라는 두 가지의 필연적인 조건을 매개로 하여 아름다움의 세계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차인이란 예절과 찻그릇이라는 두 개의 방편에 의지하여 아름다움의 세계를 향하여 길을 떠난 나그네지요. 차인은 근원적으로 수행자와 같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차의 예절은 차농사 짓기, 차 만들기, 차 달여 대접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정신을 말합니다. 차의 정신이지요. 만일 세 과정 중 어느 하나에서라도 이 정신이 결여되면 이미 차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정신이 들어있지 않은 차는 그저 물건일 뿐이지요. 물건은 경제적인 고려의 대상입니다. 비싼 물건, 값싼 물건으로 분류됩니다. 물건의 세계에서는 대개 부자가 판세를 좌우하게 되지요.
현대 한국의 차와 차인을 말할 때 예절보다는 부자의 위세와 명성이 더 크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의 힘이 차의 세계에까지 막강한 존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부자가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원래 차에는 부자, 가난뱅이 차별이 없었지요. 차는 차일뿐이니까요. 그런데 한국의 차에는 유독 부자의 돈과 위세가 판을 좌우하는 듯 합니다. 수많은 차 모임을 주도하는 맹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부자 앞에서 알랑거리는 사람, 부자의 차가 좋다고 목청 높여 감탄하는 사람, 부자에게 빌붙어 다니며 차인을 계급으로 서열화시키는 사람, 돈 자랑을 위해 거만하게 행동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이 차인이란 이름으로 행세하는 한 진정한 차와 차인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돈은 사치를 만들고 사치에는 많은 독소가 들어 있어 차의 본질을 훼손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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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75> 茶人論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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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고 자연스러움이 풍겨나는 대나무로 만든 꽃병. 차의 아름다움은 이같은 자연스러움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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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차인은 차의 예절을 숭상하고 지켜 아름다움의 세계를 많은 이웃에게 나눠주는 사람입니다.
차의 예절이란 저절로 내는 마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지를 싫어하고, 과장을 부끄러이 여기며, 부자연스런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차에는 억지가 매우 많습니다. 억지는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을 부정하는 것이지요. 새로운 변화와 다양한 창조를 가장 싫어합니다.
틀에 박힌 형식을 고집하면서 겉모양새의 화려함을 강조하지요. 그러다보니 차의 세계를 향하여 마음이 깊어질 수 없고 사치의 위험을 깨닫지도 못합니다. 이러한 상태를 가장 좋아하는 것이 부자이면서 차인 행세를 하려는 사람과 차와 차 그릇 장사들입니다.
과장됨은 진정한 차인의 마음을 흐리게 하고 차의 예절을 더럽혀 마침내는 차를 죽일 수도 있는 허위의식입니다.
이런 상태는 차인의 열등의식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지나친 경쟁의식이 저지르는 잘못된 자기 현시욕에서 생겨나기도 하지요.
또한 과장이 오랜 기간 계속되다보면 거짓이 진실을 덮어버리기도 합니다.
이같은 과장은 흔히 차를 만드는 사람이 자기 제품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곧잘 사용합니다. 차모임을 조직하여 이끄는 부자가 다른 차 단체를 멸시하거나 자신의 단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도 쓰입니다.
아무튼 과장됨은 상대에 비하여 열등하다고 생각되거나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상대를 극복하기 어려울 때 쓰이는 비열한 방법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부자연스러움은 차 그릇을 이용하여 차를 마시거나 제례를 올릴 때 주로 나타납니다. 차를 다루는 기본 예절에 익숙하지 못하거나 잘못 배웠을 때도 나타나지요.
특히 차를 처음부터 사악한 목적을 위한 이용물로 여긴 이들에게서 많이 발견됩니다.
의도(意圖)에 사로 잡히면 차의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죽여버리고 사악한 욕심으로 그려 넣은 위선이 자연스럽게 어렵지요. 가끔 차에 덜 익숙한 사람의 눈을 속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참된 차인의 눈은 속이지 못합니다. 부자에게 빌붙어 사는 차인이란 이들의 행위가 대개 그러합니다.
아취(雅趣)에 구속된 차인의 행동 또한 부자연스럽지요. 이는 기형적인 취미나 자신만 아는 세계에 몰입함으로써 함께 공존해야 하는 차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겠지요.
차는 평상심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차를 생활화 하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평상심을 잃게되면 혼돈에 빠지지요. 자칫 아취에 구속되면 평상심을 놓쳐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작위(作爲)와 돈에 빠져서 하는 몸짓도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이 경우는 거의 대부분 돈이 많은 부자들과 그들 주위에서 아첨으로 사는 이들의 행동입니다. 자유분방한 상상력이나 창조적 열정의 산물로 나타난 생명의 형상화가 아니라 다만 기괴스럽고 엉뚱한 모양새를 좋아하는 것이지요.
한국의 차가 지니고 있는 병폐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이 작위와 돈으로 해괴하고 천박스런 행다(行茶)를 지어내는 것입니다.
차는 손가락 모양, 옷감의 종류, 차실의 크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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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76> 茶人論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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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茶千年 76.
<茶人論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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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인은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종교와 예술의 근원인 정신 세계를 지향하는 삶을 동경하지요. 뭔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존경하는 것이고, 존경심은 겸손에서 우러나는 마음입니다.
결국 아름다움을 존경한다는 것은 물질적이고 개인적 욕망을 초월한 것이어서 아름다움을 아는 모든 이의 것이며 자연의 마음이지요.
자연에서는 모자라는 것도 부질없이 남아도는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필연적이며 알맞습니다. 이를 중정(中正)이라 부릅니다. 중정은 조화를 만들어내는 신비를 다르게 부르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차는 자연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자연이 되려는 수행 그 자체입니다.
이때 중정은 수행의 구체적인 방법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자들에게는 아무래도 어울릴 수 없는 경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행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며 이를 평상심이라 부릅니다만, 평상심의 세계를 이상으로 보기 때문에 차의 세계는 곧 민중의 삶 속에서 가장 쉽게 이뤄질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차실 안에서 인위적이고 가식적인 작위의 차가 아닌 열려있는 자연속 어디에서든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마음만 있다면 자리를 펴고 차를 마시면 그만입니다. 탁자며 깔자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필연적인 조건이 있기는 하지요.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들과 욕심으로 꾸미고 지어낸 것들을 근원에서부터 배제시키기 위한 조건들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필연적이므로 단순하고 소박합니다. 간소함을 가장 큰 미덕으로 삼지요.
차를 마시기 위해 차실을 따로 갖추는 것은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주로 중국과 일본 역사에서 생겨난 것이지요. 대개 부자나 권세가들이 위세를 떨쳐보이기 위해 생겨났습니다.
그들의 차실 문화는 시대의 흥망성쇠와 함께 변천했습니다. 굳이 차라고 말하기 보다는 금력과 권세의 부정적인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 끌어다 놓은 위선의 산물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차 문화에서 진부하도록 일본화 되고 있는 것이 이 차실 만들기입니다. 아파트건 단독주택이건 웬만큼 차를 말하는 사람이면 차실을 따로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차를 마십니다. 그런데 이 차실 문화를 주도하는 것이 부자들이며, 부자들이 좋아하는 것이면 무작정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부자가 결코 훌륭한 차인이 될 수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좋은 차인이 되기 어려운 것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겉모양새를 꾸미는데 유달리 많은 것을 허비합니다. 그것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 한국 차인들의 숨길 수 없는 현실입니다.
부자들이 좋은 차라하여 즐겨 마시면 무턱대고 따라 마십니다. 부자들이 좋은 차그릇이라 하여 사들이면 그것도 따라 합니다.
부자들에게는 중정보다 이익을 많이 남기기 위한 계산과 결단이 더 중요합니다. 자연의 마음을 깨닫기 위한 수행보다는 이익이 있는 곳을 알아내는 이재의 눈이 더 중요합니다. 한국 차인이 혹 후자의 마음을 동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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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77> 茶人論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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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茶千年 77.
<茶人論④>
‘아는 것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지요. 이 시대에 생겨나 크게 유명해진 이 말은 주로 미술이나 문화재 분야에서 사용되지요. 차와 차인의 경우 이 말은 좀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차와 미술 모두 아름다움을 본질로 하고 있습니다만, 차는 아름다움을 보는 안목을 키워 아름다움 자체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미술의 경우 작가가 아닌 관람자의 입장에서 볼 때 관람자의 눈과 미술품 사이에 일련의 지식이 개입되는 것을 허용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 만큼 보인다’는 말이 성립되지요.
눈과 미술품(사물) 사이에 끼이는 지식이란 비교, 판단, 평가 등을 내용으로 한 척도(尺度)를 뜻합니다.
그런데 차에서 말하는 안목이란 지식이 아니라 직관(直觀)을 뜻합니다. 직관은 눈과 사물 사이에 지식 따위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사물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곧장 간파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차와 차인에게 잡다한 지식은 오히려 직관을 흐리게 하고 때로는 방해하는 것이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나 ‘평상심’이 중요한 이유도 이것이지요. 지식은 지식 그 자체의 한계 안에다 생각을 가두어버리기 때문에 아름다움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입으로만 아름다움을 떠들기 쉽습니다. 지나친 형식, 기교, 끊임없는 반론과 시끄러움이 차의 본질처럼 되고 있는 우리나라 차살림의 병폐는 그래서 생겨납니다. 치유되기 어려운 이유도 그 때문이지요.
흔히 ‘마음을 비운다’고 하지요. 참선에서 제시하는 ‘일물부장래(一物不將來)’ 즉 아무 것도 갖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철저하게 빈 마음이라야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이 말은 차와 차인이 궁극의 목표를 찾아가는 안내자로 삼아야 합니다.
한국의 차인들은 미리부터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소유하고 있어서 정작 눈에 보이는 것은 지식과 소유물의 울타리 안의 껍데기 뿐입니다.
차를 말하면서 관념의 유희에 빠져 난해하고 혼란스런 언어에 매달리는 것은 지식의 병폐가 차를 어떻게 왜곡하고 죽이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입니다.
차를 보여준다면서 현란하고 번잡한 형식적 기교로 시종하는 것은 여전히 차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고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부질없고 망령된 지식을 쌓아 그 지식의 성채 안에 유폐당한 채 아무도 듣거나 보지 않는데도 혼자 떠들고 허우적거리는 것입니다. 지식의 독에 도취되어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인의 숫자가 몇 백만명이라고 합니다만 죽은 지식의 속박에서 벗어나 걸림없는 아름다움을 차로 녹여내는 차인은 결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차를 가르친다면서 차에 관한 지식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여길 수도 있기는 하지만, 자칫 엉터리 의사에게 얼굴의 성형수술을 맡겼다가 수술하기 전의 그 수수한 얼굴을 영원히 잃어버리고 통탄하게 되는 어리석음이 될지도 모릅니다.
한국 현대 차살림의 중흥시조라 일컫는 다솔사 효당노사께서 달여주시던 차를 마셔본 사람이면 압니다. 그 어른이 차에 관해 어떤 지식을 가르치셨던지를 말입니다. 차에 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신 적이 없지요. 그래서 그분을 차인의 전형적 존재로 기억하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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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78> 茶人論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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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알기 위하여 지식 교육을 받는 것이 옳은지 어떤지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차에 관한 이러저러한 지식을 지어내는 일이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지적 욕망으로 된 것이어서 자칫 더 큰 혼란을 가져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말해보고자 합니다.
어떤 이의 지식은 중국 차예(茶藝) 이론을 적당하게 짜깁기하여 마치 자신의 순수 이론인 양 버젓이 내놓고 있지요. 또 어떤 이는 일본 다도(茶道) 이론과 중국 차예 이론을 절묘(?)하게 뒤섞어서 그럴싸하게 편집하여 자신의 저술이라며 던져 놓기도 합니다.
무릇 중국 차예이론이나 일본 다도이론은 중국과 일본 역사 속에서 차인들이 차를 통하여 깨달아 온 그들 정신사의 흔적입니다. 한국 차인들이 그 정신사를 연구하거나 교양을 쌓기 위해 읽어보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외국 정신사를 마치 한국 정신사인 양 표절 왜곡하는 것은 주권과 인권을 말하는 한국인으로서 할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야만을 선택하는 것이며, 속아서 배우는 이들에게도 해서는 안 되는 나쁜 짓이지요.
더 나아가서는 한국 정신사를 외국어 정신사로 바꾸기 위한 매국행위가 됩니다. 다소 극단적인 표현이기는 합니다만 적지 않은 차인들이 벌써 그 외국의 정신사에 눈을 빼앗긴지 오래 되었습니다.
혹자는 이렇게도 말하지요. 중국 일본은 차에 관한 수많은 기록들을 남기고 있는데 왜 우리는 그렇지 못했느냐고 말입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누가, 어떻게 해야 옳을지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만, 이런 생각을 해볼 수는 있겠지요.
중국 일본처럼 우리나라도 문자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차에 관한 일들을 기록하기 위한 문자 생활은 중국이나 일본 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차 관련 기록을 많이 가지지 못한 것은 차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기록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삶의 정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한국 고유의 차살림이 지녀온 세계를 연구하기 보다는 중국 일본 차 역사와 이론을 주축으로 삼아 편집한 차 관련 지식들을 가르치고 배운 이들은 반드시 특정 조직을 만듭니다.
가르친 이의 신분이나 사회적 성향 또는 명망의 높낮이에 따라 조직이 달라지고 편이 갈라집니다.
한 조직과 특정 편에는 이것을 반대하거나 차별화하는 조직과 편이 또 나타납니다. 이렇게 생겨난 조직들은 단체를 만듭니다. 정치단체들처럼 세력을 과시하면서 회장, 이사장 등 고급스럽게 명패를 새기고 깃발과 휘장까지 만들어 떠들썩하게 단합대회를 합니다. 이는 차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 차를 빙자한 권력단체의 호화로운 과시욕이라 할 수 있지요.
이런 곳에서는 어김없이 무슨 상(賞)들을 경쟁적으로 만들어 주고 받습니다. 어떤 상을 제정한 정신과는 사뭇 동떨어지게 살아온 사람에게 상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조직의 세력화에 도움이 된다하여 주는 이들 상은 차가 가장 멀리해야 하는 정치적 세속화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한국 차의 병폐입니다.
차를 보는 눈이 정치적 계산으로 오염된 것이지요. 그런 생각으로는 아무리 긴 시간을 투자해도 진정한 차의 세계에는 다가가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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