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6. 27. 주께서 찾으시는 자기백성 행16:11-15
하나님은 아시아로 가고자 하는 바울의 길을 막으시고 환상을 보이시면서 마게도냐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직접적인 역사라면 분명히 대단하고 큰 일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큰 일이냐 작은 일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는 대단한 일을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복종은 어쩔 수가 없어서 하는 숙명적인 복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감격스러워서 감사해서 그분을 사랑하는 표현이고 사랑해서 살아가는 하나의 삶입니다.
이러한 자의 삶은 얼마나 크고 위대한 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서 살아가는 그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일의 비중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범하게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무슨 공동체라고 하면서 세상이 칭찬하는 많은 일을 하고 소위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더 가치 있는 삶을 산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노벨 평화상을 받은 테레사 수녀와 촌구석에서 농사나 짓고 있지만 예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할머니의 삶을 그 가치적인 면을 따져 본다면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이 볼 때는 다를 수가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똑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사랑하였고 자기의 목숨보다 주님을 사랑하였기에 자신이 계획한 그 무언가의 대단한 일을 하는데 보람을 느끼고 즐거워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주님께 복종되어지는 그 자체를 보람으로 여기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이기에 하나님의 인도대로 빌립보에 와서 수백 수천 명을 만나 구원한 것이 아니라
루디아라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자가 주님이 찾으시는 주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성도들이 자신이 소금과 빛이 되어 세상을 구원해야지 하면서 부담감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크고 대단한 일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주님게 복종되어지는 삶을 살기를 원할 뿐입니다.
이상이 지난 주일에 설교의 요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루디아라는 여자를 찾으시면서 주께서 정하신 자기 백성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존재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주님은 자기 백성을 찾기 위해서 먼저 말씀의 사역 자를 만나게 하십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만남이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자식은 지혜로운 어머님을 만나고 부부는 사랑의 덕이 있는 아내와 남편을 만나고 학생은 능력이 있는 선생을 만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 중에서도 성도는 바울과 같은 말씀의 사역 자를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섭리요 구원의 방법이며 하나님의 백성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말씀의 사역 자는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요 그릇이며 심부름꾼이고 대사입니다.
말씀의 사역 자는 하나님이 자기백성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그대로 전달 할 뿐 그 이상의 어떠한 권한도 주어지지 아니 했습니다.
(갈1:6-9)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절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절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절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면서 바울은 계속해서 이러한 말을 합니다.
10절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말씀의 사역 자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종에 불과 합니다.
이러한 사역 자를 보내서 제대로 된 말씀이 전해 질 때에 성령이 역사 하여 듣는 자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깨닫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천사를 만나고 여호수아가 모세를 만나고 다웟이 사무엘을 만나듯이 사도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루디아는 바울을 만난 것이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이들이 만남은 인간 누구를 만난 것이 아니라 말씀 그 자체를 만난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만날 때에 예수님을 보고 내 자신을 바르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이 있는 곳에 내가 있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일날 나오는 것도 말씀을 듣기 위해서이고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 생명을 누리고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확인하고 검토하기 위해서입니다.
2. 마음의 문을 여심
우리의 마음은 죄로써 어두워 져있고 무디어 져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복음의 빛을 비추사 깨닫게 해 주시지 않으면 계속해서 진리를 분별할 수 없고 말씀에 응할 수가 없습니다.
(신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는 말씀대로 주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진리가 아닌 세상 것에다 가치를 두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거부하고 복음의 말씀을 무시해 버리고 사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본래의 모습니다.
이러한 자들이라도 주께서 은혜를 주시어 말씀이 있는 곳으로 불러주시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감화하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분을 만나게 하시고 예수의 가치 성을 깨달아 그 예수를 사모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큰 일이고 대단한 일입니다. 이 일이란 주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마음에 말씀이 깨달아 지는데서 시작됩니다.
여기에 예수가 있고 이러한 마음에 예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가 루디아라는 여인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마음에 문을 여시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상황과 동기에 따라 더 굳어지고 강팍해 질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바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 될 때에는 그 마음이 더 굳어집니다.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적군의 성을 얻는 것 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러니 한번 얻은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바쳐진 마음을 빼앗기 위해서 사단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중에도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말씀을 듣게 하시며 지금도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로 향하고 있다면 이것보다 큰 축복은 없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생명의 주가 되심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루디아는 바울의 말씀 전함을 듣고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 예수가 생명의 주가 되심을 깨닫고 고백의 증표로 그 집이 다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이 자신의 죽음이고 예수님의 부활이 새로운 자신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끝났고 이제 자신이 사는 것은 예수라는 새로운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세례는 자기가 중심이 되어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살아오던 옛사람은 죽어 끝났습니다.
조상으로부터 흘러오던 죄의 혈통은 차단되고 이제 예수라는 새로운 조상의 피에 의해서 태어난 예수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받을 심판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무서운 죄의 형벌을 끝내고 이제 자신은 예수님이 흘리신 피의 희생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는 고백이 세례 받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고백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고백이 날마다 반복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예수의 것이라고 확인하고 증명하며 증거 해야 합니다.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께 의미를 두고 주님을 사랑하며 그 주님으로 만족하고 주님께 복종되어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든 삶의 수고와 계획이 주님만을 위해서 이루어 져야 합니다.
4. 이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헌신하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루디아는 바울의 일행을 적극적으로 간청하여 자기 집에 유하게 하였습니다.
15절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합니다.
폴란드 격언에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최대의 사랑은 첫째는 어머니 사랑이고 둘째는 개의 사랑이고 세 번째는 연인의 사랑이고 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이란 이 땅위에 가장 희생적인 사랑이고 따듯한 사랑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근접하게 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개의 사랑은 주인을 끝까지 충성하고 따르는 사랑으로서 인간들의 이기적인 사랑을 꼬집어 말한 것일 것입니다. 에로스라는 연인들의 사랑이 아무리 뜨겁다 해도 시간이 지나 감에 따라 식어지고 조건에 따라 변하여 지고 감정에 의해서 돌아서기 때문에 제일 마지막에 두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그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의 전부임을 아는 것입니다. 무엇이 사랑입니까? 십자가에 나타난 예수님의 희생 그 죽음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전에 사랑이 무엇인가를 나타내셨고 느끼게 하였으며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하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허물이 있고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내 아들이라 칭하여 줌에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알고 그 예수의 사랑에 감동되어진 자는 예수를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위해서 헌신하게 되는데 헌신의 정도는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정해집니다.
신앙이란 법에 의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제도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도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하는 열심이 아니면 그것은 진정한 열심이 아니며 예수님을 사랑해서 되어지는 헌신이 아니면 그것은 진정한 헌신이 아닙니다.
(고전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그 예수님이 누구 신지 알았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에 놀라워하고 감격하며 감사하고 있습니까?
그 예수님의 사랑은 이론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 안에서 생명의 능력으로 역사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예수님을 사랑해서 사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고 본래의 모습이라고 가르치고 만들어 갑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를 위해서 희생하게 되고 헌신하게 됩니다. 이는 자신의 헌신을 통해서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보여주고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찾아서 이러한 사랑으로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예수를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