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부주의하기 원하지 않지만 부주의하곤 합니다. 실제로 미국의 한 병원에서는 환자의 멀쩡한 다리를 잘라 깨어난 환자가 기절한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물론 그런 일들은 아주 적은 확률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적은 확률을 가진 실수가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점에 우리는 동의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병원에서는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매직으로 멀쩡한 다리에 ‘NO’라고 표시를 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합니다. 매일 의식하지 않으면 자신의 신앙의 견고한 다리 한쪽을 한순간에 잘라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은 사적인 일 때문에 기도생활을 쉽게 잘라내고, 말씀 읽는 시간을 잘라내고, 교제하는 시간을 헌신짝처럼 잘라냅니다.
사실 그것들은 잘라내서는 안될 ‘NO'표시를 해두어야 할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역러분들의 하루 가운데 그저 쉽게 자신의 사소한 일들 때문제 잘라버리지 말아야 할 시간들에 ’No'라고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이 생각을 하면서 저는 유대인들이 왜 소매끝이나 모자등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은 작은 두루마리를 갖고 다녔는지 그 이유를 알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다름아닌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잊지 않게 하는 작은 장치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런 주님을 기억하는 장치들을 갖지 못할 때 우리는 신앙생활에 엄청나게 부주의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생활
마태복음 28장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동행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을 통해서 주님과 우리의 동행하는 삶이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는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뜻하는 파라클레이토스라는 말은 법정 용어로서는 변호사입니다. 이것은 요즘의 고객을 돈으로 생각하는 현대의 변호사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이 변호사는 고객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변호사로서 판사이신 하나님앞에 우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도움이신 동행자 이십니다.
그러나 한가지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사실이 한가지 있습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의 본질이 뭐냐?”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삶을 형통으로 인도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동행하시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를 주님의 사람으로 자라게 하고 열매맺는 삶을 살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은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예수님이 광야로 가신 것은 당신 자신의 의지가 아닌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광야란 곳은 사람들이 가기를 원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곳은 40일의 처절한 금식과 사단의 시험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항상 좋은 일이 있는 곳에 혹은 우리가 원하는 일들을 이루는 것을 돕는 분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의 목적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자녀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을 통해서 모델이 되는 사건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반응하고 결심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나를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훈련됨으로서 좋은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고 일군이 되어야 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성숙을 위한 인생의 광야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겐 성장의 기쁨이나 열매를 맛보는 일도 없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도자기라는 기업이 있습니다. 창업주인 김동수 회장은 1970년대 매우 어려운 여건 속에서 영국을 오가며 흙에 소뼈 성분을 첨가해 색도와 보온성이 뛰어난 본차이나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그 제품을 교황청 대사관 태국의 왕실에까지 공급함으로써 일약 명품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한 세미나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도자기는 흙과 불의 예술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흙을 반죽해 뜨거운 불에 굽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 반죽한 것일수록 명품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불에 굽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명품이 될 수 없습니다.”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갖고 도자기를 만들어도 오래 반죽되지 않고 불에 구워지는 연단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명품으로 태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도자기를 만드는 일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일선에서 물러난 지난 2년간 그는 수안보에 있는 파크호텔을 리모델링했습니다. 으레 휴양지면 있는 나이트클럽과 술집을 없애고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식당을 만들고 호텔안에 아담한 예배당까지 만들었습니다. 오래도록 역경속에서 훈련된 신앙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추석때 보니까 송편도 반죽을 오래해야 맛이 있답니다.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 만큼 훌륭한 맛으로 보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명품은 쉽게 아무렇게나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좋은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교우들 가운데 좋은 신앙인의 모델이 되는 분들이 나오기를 소원합니다. 부족하지만 주님의 마음을 알고 목사의 마음을 닮은 평신도 리더쉽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되어지기 위해 오래도록 반죽이 되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도 성령의 이끌리심을 통해서 연단의 과정을 겪어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우리도 당연히 신앙의 명품으로 거듭나기 위한 훈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말고,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함으로서 광야의 훈련을 통해 성숙하십시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안면도에서 목회하는 한 목사님의 얘기입니다. 어느 주일 목사님이 한달 김치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사연인 즉 사모님이 주일 오후에 김치를 담가 저녁밥상에 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님은 화를 내며 주5일 근무제로 인해 주일 지키기가 어려운데 사모가 주의 날을 거룩하게 안 지키면 어떡하느냐며 네 가지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첫째, 주일을 거룩히 지키란 계명을 어긴 죄, 둘째, 교인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이지 못한 죄, 셋째, 자녀들에게 바른 신앙유산을 물려주지 못한 죄, 넷째, 세상사람과 같이 주의 날을 구별하지 못한 죄, 그래서 목사인 자신은 한달 동안 근신하며 김치를 먹지 않겠다고 선포했다는 겁니다. 뭐 그런 일 같고 그러느냐고, 바리새인같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주님의 거룩함이 훼손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에서 비롯된 금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한주간 저와 여러분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금식을 해보면 어떨까요?‘컴퓨터(인터넷) 금식’‘커피금식’‘닭고기 금식’‘취미나 오락활동 금식’이렇게 주님의 거룩함을 구하는 우리들의 신앙적인 모습을 통해서 주님이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금식을 조금은 다르게 받아들였습니다. 능력을 받는 도구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40일 금식을 몇 번했느냐가 일종의 영력의 깊이를 좌우하는 기준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58:6절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곧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참된 금식입니다. 금식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금식을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고 가서 40일을 금식하도록 하셨습니다. 왜 40일씩이나 금식을 하도록 하셨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3일정도만 금식하면 돌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이 제게 아주 좋은 식욕을 주셔서 말이죠.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기 전에 광야의 40일의 금식이 도대체 왜 필요했을까? 능력이 부족한 분도 아니요, 굳이 금식을 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말씀 자체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당신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2중적으로 증거되었습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말씀하지 않고 실제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 원수를 사랑하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가르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사마리아 수가 마을을 찾아가 한 여인과 그 마을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되풀이 말해서 주님의 말씀은 행함을 통해서 증거되고 열매맺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말씀하시고 당신의 삶을 통해서 그 증거를 보여주셨다는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사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문제가 뭡니까? 믿지 않는 부모의 반대요? 남편이요? 그런 반대없으면 잘 믿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예수 믿고 사는 삶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 바로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여기에 걸립니다. 당장 눈앞에 먹고사는 문제가 있는데 예배는 무슨? 십일조는 무슨? 당장에 내가 죽게 되었는데. 세상이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온실가스 규제하자고 유엔에서 말하니까 미국은 스스로 알아서 하자고 합니다. 환경파괴한 댓가로 돈벌어 세계를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면서 댓가 지불 안하는 거잖아요. 미국 나빠요!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주님이 “야 너 당장에 하던 일도 그만두고 기도원에 올라와서 40일 금식해라”고 하신다면, 아주 선명하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다면 누가 순종할까요? ‘에이 주님 나 말구요, 우리 목사님한테나 가서 하세요. 난 못해요. 왜 이러세요. 누구 잡을 일 있어요?’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래도 순종 못해요.
당장에 먹고사는 문제는 어떻게하고... 이 문제에 대한 실제적인 증거를 예수님은 40일의 금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 겁니다. ‘봐라,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 무엇보다 주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먼저다. 너 굶어도 안죽는다. 너 직장 짤려도 안굶는다. 내가 살아있는데 네가 왜죽느냐?’
그러니 먹고사는 문제에 매이지 말고 주님의 뜻을 위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는 것이 40일간의 금식에 담긴 실제적인 삶의 모범인 것입니다. 사단은 얼마나 치밀합니까? 금식 중간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 끝내고 이제 음식을 먹을 수 있을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어라’고 말합니다.
“네게 가장 필요한 것이 떡이 아니냐? 너 죽게 생겼는데 주님의 뜻이고 나발이고 먼저 먹어야지 살지?”이 유혹앞에서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고 나발이고 라고 말해지는 그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그 유혹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습니다. 예수님이 이 유혹에 굴복했다면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어떤 독일군 부대가 그들의 물자 보급선으로부터 차단되게 되었습니다. 강렬한 사막의 열기로 목이 바싹 말랐던 그들은 영국군이 새로 건설한 송수관을 발견하고 미칠 듯이 기뻤습니다. 송수관에 총을 쏘아 많은 구멍을 낸 후 그들은 엎어져서 정신없이 물을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국군이 바닷물로 송수관을 실험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죠 그들은 하루가 지나기 전에 갈증을 견딜 수 없었고 결국 서둘러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물을 마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쟁에서의 승리였습니다. 승리를 원하는 사람이 눈앞의 물한잔의 유혹을 이길 수 없다면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40일간의 금식과 사단의 시험을 이기심으로서 우리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라고 당당하게 요구하시고 계십니다.
실제로 제자들의 부르심을 통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바로 먹고사는 문제를 극복한 그리스도인들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배를 버려두고, 요한과 야고보는 배와 그물 그리고 아버지를 버려두고, 마태는 번듯한 직장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더 가치있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와 생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생존을 결정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은 밥을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밥만 어떻게 먹어? 반찬도 먹어야지! 아뇨!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살수 없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존이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달렸다면 우리가 뭐에 매달려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말씀 읽는 시간은 그렇게 잘 잘라냅니까? 가장 먼저 잘라내죠. 항상 하는 말이 ‘목사님은 이해못해도 주님은 이해하실 거야’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주님이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신 모범을 거부하는 일입니다.
첫키스만 50번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이 루시라는 여인은 언제나 교통사고를 당하여 기억을 잃기 전의 하루를 살뿐입니다. 그리고 한날의 모든 기억은 아침이면 다 잊어버린 채 새로운 날을 맞이하게 되지요. 그런 그녀를 사랑하게 된 헨리라는 수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업을 해놔도 소용이 없는 것이 다음날이면 ‘당신 누구세요?’이렇게 나오는데는 기가막힐 노릇입니다. 마침내 남자는 모든 어려움을 딛고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남편이 만들어 놓은 비디오를 보고 하루를 시작하게 됩니다. ‘영화속의 주인공 헨리는 기억을 잃고 반복된 하루를 사는 연인 루시에게 기억이 사라진 이후의 일들을 비디오테입으로 보여주며 그녀가 새로운 하루를 살고 미래를 채워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녀가 누구와 결혼했으며 지금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내용입니다.’영화는 우리에게 지나간 사랑을 기억하기보다는 매일 다시 새롭게 사랑을 시작하면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도 하루를 시작할때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았으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 것을 기억하게 하는 비디오를 본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말씀안에서 그런 약속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요14: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아 그렇게 세밀하게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가르치심을 기억하며 살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맞게 될 광야의 고단함도 사단의 시험도 모두 주님의 능력과 은총을 기억하도록 하신 주님의 장치라면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함으로서 성장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