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20세기를 감동시킨 위대한 작가들
----허버트 미트갱[미국]
“뛰여난 작가들은 시대와 성별(性別)의 장벽을 뛰여넘어 모든 등장인물의 생각과 갈망을 묘사하고, 그들을 단순히 창조하는것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하고, 허구적인 인생을 통해 필연적인 진실을 밝혀낸다. 대통령에서부터 허풍선이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사실과 논픽션을 조작할수 있지만, 문학의 오랜 전통을 의식하고있는 시인과 소설가들은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 부정직할수 없다. 그들은 그들이 창조한 <인물>에게 충실해야 하고, 또 그 <인물>이 되여야 한다.
넬슨 오그렌과 스터즈 터켈 [Nelson Algren(1909-1981) 미국소설가] [Studs Terkel(1911-) 미국 인터뷰 전문방송인]
올그렌은 시카코를 배경으로 하층민의 실상을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생생히 묘사했다. <장화신은 녀석(1935)>으로 데뷔한뒤 <아침은 오지 않는다(1942)>로 이름을 날렸으며 대표작 <황금팔을 가진 사나이(1949)>에서는 아편상용자인 도박군이 퇴폐한 환경속에서 기절해가는 과정을 묘사하요 전미도서상을 받았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인 시몬 드 보봐르와 한때 내연의 관계를 가진것으로 알려져있다.
터켈은 1960년대에 미국에 생겨난 뉴저널리즘의 한 측면인 이른바 ‘구술체 기록문학’의 창시자로 알려져있다. 이것은 록음기를 리용한 인터뷰를 통해 취재대상의 생생한 삶을 묘출하는 일종의 르포르타주이다. 그의 <일하기(1974)>는 이런 장르의 대표적 성과로 꼽히고있다.
어느 금요일밤, 넬슨 올그렌과 스터즈 터켈은 시카코의 ‘리카도식당’ 뒤방에 앉아 마티니와 꼬냑을 번갈아 마셔대면서 뉴욕에서 온 촌뜨기를 놀려대고있었다. 아니, 어쩌면 말의 빗댄 표현법을 시험하고있었던것일뿐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60대중반인데도 여전히 정력적이였다. 그들은 시카코가 낳은 두 아들이였고 ‘워터 타워’빌딩만큼이나 위풍당당하게 그곳에 버티고있는 문학적 고착물이였다. 올그렌이 말했다. “엄마식당이라는 간판이 내걸린 곳에서는 절대로 음식을 먹지 마시오. 박사칭호를 가진 사람과는 절대로 카드게임을 하지 마시오, 당신보다 더 심각한 고민거리를 안고있는 녀자와는 절대로 잠자리를 같이 하지 마시오.” 터켈이 말했다. “그 멋쟁이 녀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봐야 합니다. 한때는 좌익 매춘부였지요. 그 녀자는 - 놀라지 마세요 - 모택동주석의 오랜 친구이름을 따서 자기 이름까지 바꿨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인생을 바꿨고 이름도 다시 바꿨지요. 지금은 갱생보호소에서 일하면서 짓밟혀 신음하는 불쌍한 자매들을 회개시키고있습니다.” 그는 공중전화박스로 갔다가 잠시뒤에 돌아왔다. “전화를 안받는군. 나중에 다시 걸어봐야겠어요.” 터켈은 시가에 불을 붙여 그것을 지휘봉처럼 빙빙 돌려서 웨이터를 부르더니 브랜디를 또 한잔 주문하고 커피로 입가심을 했다. 올그렌은 커피를 찻잔 받침에 조금 따라내고 커피잔에 브랜디를 탔다. 그는 마티니에 들어간 올리브때문에 그만큼 배수량이 늘어났다고 장난스럽게 불평했다. 올그렌이 말했다. “사이공에 있을 때인데, 중국인거리인 촐론에 세집을 하나 얻었지요. 거기서는 언제든지 중국인과 이야기를 나눌수 있었으니까요. 나는 중국말을 배우고싶었거든요. 내가 영자신문을 읽고있으면 중국인이 묻곤 했지요. ‘거기에 뭐라고 씌여있습니까?’ 촐론은 탈영병과 흑인장사군들로 들끓고있었답니다.” 터켈이 끼여들었다. “뭐 자네가 흑인장사군을 만났다고? 천만에. 자네가 만난건 매춘부뿐이였어. 당신이 사실을 듣고싶다면 내가 윁남 처녀의 말을 록음해두었으니까 그걸 들려드리리다. 그 녀자는 ‘화해협회’출신인데 참한 미인에다 인텔리였지요.” 올그렌이 말했다. “동양녀자들은 열여섯살만 돼도 자기가 사랑의 대상이라는걸 알지요. 미국녀자들은 그렇지 못해요.” “그 프랑스녀자는 어때?” 터켈이 물었다. 올그렌이 대답했다. “시몬 드 보봐르는 프랑스어선생이였을뿐이야. 그 녀자 책덕분에 내가 유명해진건 사실이지만... 몇해전 일인데, 내 소설을 읽은 몬트리올녀석이 시카코에 온 길에 우리 집을 찾아왔는데...” 터켈이 말을 가로챘다. “그 녀석은 카드게임을 한뒤로는 이 친구를 괜히 찾아왓다고 상당히 후회했지요. 우리는 이 친구네 집에서 포커판을 벌였는데... 그 자리에는 두명이 더 있었어요. 하나는 모레티라는 녀석인데, 이딸리아계지만 마피아는 아니고, 그저 그런 놈입니다. 그리고 또 한 녀석은 메노미니족 인디언이였지요. 두 녀석은 분명히 속임수를 쓰고있었지만 그걸 립증할수는 없었어요. 그런데 새벽 두시쯤에 카나다녀자가 어슬렁어슬렁거리며 들어오자, 이 친구가 뭐라고 한줄 아세요? 가서 잠이나 자라고 했지 뭡니까.” 올그렌이 말했다. “그 일은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고있습니다. 그 녀자는 그저 우리가 놀음하는것을 구경하고싶었을뿐인데, 야멸차게도 방에서 나가라고 했으니...” 터켈이 다시 일어나면서 말했다. “좌익 매춘부한테 다시 전화를 걸어봐야겠군.” 올그렌이 말했다. “몬태나주 뷰트에 귀여운 매춘부가 하나 있었는데, 고등학교졸업반 사진 한장만 달랑 들고 시골에서 올라온 녀자였지요. 그 마을은 애너콘다[뷰트 북서쪽에 있는 도시]때문에 폐쇄되여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녀자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싶어도 갈수가 없는 처지였지 뭡니까. 정말 끔찍한 기분이였을거예요. 그 녀자한테 남은거라고는 졸업반 사진 한장뿐이였지요.” “갱생보호소사무실로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안받는군.” 터켈이 자리로 돌아와서 말하고는 우리 모두를 위해 브랜디를 더 주문했다. 올그렌이 말했다. “비참한 녀자들은 흔히 작가들을 찾아옵니다. 인생상담하러. 한번은 어떤 녀자가 나를 위해 길건너편 모텔에 방을 잡아놓았다고 하더군요. 내가 그 방에 들어가서 옷을 벗었더니, 그 녀자가 느닷없이 이러지 않겠소? ‘댁은 누구세요?’ 그래서 나는 ‘이 방을 준비한건 당신이야’ 했지요. 그 녀자 왈, ‘여기서 뭘 하실건데요?’ 그래서 나는 말했지요. ‘여기서 뭐 할거냐고? 여기서 나갈거다. 나가서 정신과의사한테 전화할거다.’ 나는 그렇게 했고 나중에 들으니까 그 녀자가 정신과의사한테는 나주 분별있게 처신했다더군요. 이튿날 그 의사친구가 전화를 해서 그 녀자에 대해 물었지만, 그 녀자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게 없었어요.” 터켈과 올그렌은 그들을 후원하고 숭배하는 사람들을 험담하기 시작했다. 터켈 왈. “우리 후원자들중에는 우리가 하는 일을 후원해서 합법성을 얻고싶어하는 백만장자사기군이 한놈씩 있지.” 올그렌 왈. “그놈들은 둘다 공화당원이야.” 터켈 왈. “내 후원자는 재산이 7천만딸라지만, 자네 후원자는 재산이 백만딸라밖에 안돼.” 올그렌 왈. “어쩌면 그자들은 보험대리인보다는 작가가 시카코에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 올그렌은 황금빛손으로 술잔에서 마티니와 궁합이 맞지 않는 올리브쪼각을 꺼냈다. 터켈은 담배연기로 도너츠를 만들면서 말했다. “한번만 더 전화를 걸어봐야겠군.” 올그렌이 말했다. “내가 동양에서 아홉달을 지내면서 얻은 지혜가 뭔줄 아시오? 그걸 한마디로 요약하면, 날생선에 미친 사람이 아니거든 미닫이가 달린 식당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말것.” 우리 세사람은 각자 제 갈곳 - 마누라나 타자기 - 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이 시작되였을 때부터 그들은 결국 그곳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것을 알고있었다. 웬 일인지 이곳 생활은 다소 거칠게 진행되고있는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뻔뻔스러운 도시의 야바위판에 자극을 맏아 뉴저널리즘에 초석을 마련한 두명의 로련한 전문가는 그 생활을 단순히 테이프에 록음하거나 조립하지 않고 손으로 공들여 만들고있는것 같았다. 그것은 오래지 않아 그들이 말하거나 쓰고있는 문장과 소설속에 나타날것이다.
조르조 바사니 [Giorgio Bassani(1916-) 이딸리아의 유대계 작가]
바사니는 파시즘시기에는 반중부활동으로 투옥되였고 또 유대인으로도 박해를 받았다. 이처럼 이중으로 탄압받은 당시의 어두운 체험이 그의 문학색조를 결정지었고 그의 작품의 바탕에는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 지낸 페라라의 유대인공동체가 언제난 설정되여있다. 단편집 <페라라이야기(1960)> 장편소설 <핀치 콘티니가(家)의 정원(1962)>, <해오라기(1968)>등이 대표작이며, 시집 <유리에 비친 새벽(1963)>과 평론집 <준비된 언어(1966)>도 그의 문학활동의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장편과 단편에서 조르조 바사니는 독자들에게 자기가 살고있는 지역을 리해시키고 그의 주인공들이 맞이할 운명을 걱정하게 한다. 우리는 그가 망해가는 시대―파시즘시대―와 불운한 유대인가족들사이에서 젊은날을 보낸 곳―이딸이아북부의 페라라―으로 들어가는 려행에 우리를 데려가고있다는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섬세하고 신비적인 이야기의 <플롯>뒤에는 예술적 의도가 숨어있다는것도 알고있다. 독자들은 그가 대하소설형식으로 자신의 추억을 펼치면서 동시에 등장인물들이 겪고있는 모험을 기록하는것을 볼수 있다. 우리는 다가올 비극을 미리 알고있지만, 그럼에도 이 사람에게 또는 저 부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것인가를 걱정한다. 그리고 특히 사람들을 북쪽으로 싣고 가는 렬차들이 과연 돌아올것인지도 걱정한다. 페라라를 떠나 뉴욕에 온 바사니는 바다에서 륙지로 올라온 물고기 같았다. 그는 뉴욕의 이스트 50번가를 걷고있다. 갑자기 등신대로 확대한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뮤지컬영화인 <유쾌한 리혼> <톱햇> 등에 단짝으로 함께 출연한 남녀배우]의 사진을 발견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판지에 나붙은 그 사진은 건물 2층에 있는 무용교습소를 상기시키고있었다. 바사니는 영어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톱햇, 톱햇을 쓰고, 하얀 넥타이를 매고, 옷자락을 솔질하고...” 그는 아프테어를 가리키며 이딸리아어로 말했다. “정말로 멋지군!” 그때 유리창에 그의 모습이 비쳤다. 품위있게 찡그린 얼굴, 정성들여 지은 옷, 파격적이면서도 심사숙고끝에 만들어낸 그의 문장처럼 구김살없는 태도. 파크 애비뉴를 거너고있을 때 그가 말했다. “그 사진을 보니까 파시즘이 생각나는군요. 우리가 영화관에서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가 나오는 영화는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보았어요. 그런데 파시즘시대가 끝날무렵에는 미국영화를 수입하는것이 금지되였기때문에 우리는 흘러간 영화를 몇번이고 되풀이해서 보았지요. 그래서 그 노래들도 다 기억하고있답니다.” 그의 장편소설 <판치 콘티니가(家)의 정원>을 각색한 영화(그는 이 영화에서 원작자인 자기 이름을 빼라고 고집했다)와는 달리 그는 아스테어와 로저스의 조합에 대해서는 조금도 불쾌감을 품고있지 않았다. 바사니는 몇년에 한번씩 미국을 방문하고 몇년에 한번씩 그의 빛나는 단편집이 미국에서 번역된다. 가장 최근에 변역된 책은 청소년기의 재발견을 다룬 <문뒤에서>이다. 시대배경은 1930년이고 무대는 물론 페라라. 그 자신이 젊은 시절의 뿌리쪽으로 손을 뻗치고있기때문에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오락가락하면서 그를 읽고있는것 같다. <페라라이야기>는 파시즘시대를 초창기부터 1943년까지 담고있는데, 1943년은 페라라에 살던 수백명의 유대인이 일제 검거되여 독일로 강제이송되 해로 파시즘시대의 전환점이 되였다. <해오라기>는 유대인학살때 살아남아 죄의식에 사로집한 사람을 다루고있다. 그리고 그전에 발표된 <금테안경>에서도 우리는 <핀치 콘티니가의 정원>에 잠깐 등장하는 주요인물(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 나오는 인물과 비슷한 인물)을 만난다. 바사니는 작품에서 정치나 뉴스를 뒤쫓지 않는다. 이런것들은 성장하거나 투영된 장소와 사람을 통해 서로 엮어져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최근에 가족과 도시의 력사를 다룬 그러한 야십적인 년대기―세속적인 눈을 감고 고통받는 심장을 열어야 하는 년대기―를 시도한 미국작가는 거의 없었다.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려면 큰 사건과 맞서 싸우는 강력한 주인공이 필요없다는것이 권위있는 출판사 편집부의 지혜로운 생각이기때문이다. 바사니의 등장인물들은 상처입은 약자들이고 큰 사건과 맞서 싸우는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싸우고있다. 바사니는 몇년에 한번씩 나를 만나면서 의미를 포착하기 어려운 문학적인 말을 몇마디 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의미심장한 말은 “나는 미콜이다”는 말이였다. <핀치 콘티니가의 정원>의 화자는 곧 작가 자신이라고 할수 있는데, 이 ‘나’는 어렸을 때 페라라의 유대교회에서 미콜을 처음 만나 그녀가 아름다운 녀인으로 성장하는것을 지켜본다. 그러나 뛰여난 작가들은 시대와 성별(性別)의 장벽을 뛰여넘어 모든 등장인물의 생각과 갈망을 묘사하고 그들을 단순히 창조하는것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하고 허구적인 인생을 통해 필연적인 진실을 밝혀낸다. 대통령에서부터 허풍선이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사실과 논픽션을 조작할수 있지만 문학의 오랜 전통을 의식하고있는 시인과 소설가들은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 부정직할수 없다. 그들은 그즐이 창조한 ‘미콜’에게 충실해야 하고 또 ‘미콜’이 되여야 한다. 자신에 대해서는 겸손하지만 자신이 문학에서 차지하고있는 위치에는 분명 관심을 갖고있는 바사니는 대서양 량쪽 대륙의 헌신적인 소설가들가운데 정말로 중요한 작가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바사니가 소설가를 평가하는 기준은 업적과는 거의 관계가 없었고 인기도 판단기준이 아닌게 분명했다. 그가 좋게 평하는 소설가에 대해서는 ‘문학인’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는 여러명의 이딸리아작가와 이딸리아어로 번역된 미국작가를 언급하고 그들을 벽앞에 늘어세우고는 한사람씩 총을 쏘아 쓰러뜨렸다. 이 사람은 “재능을 있지만 류행에 지나치게 민감한” 작가이고, 저 사람은 “작가이기보다 저널리스트”이고, 그 사람은 “전문가이긴 하지만 문학전문가는 아니가”는 식이였다. 그가 거론한 작가들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관심있는 독자들은 스스로 판단하여 여기에 들어맞는 이름을 채워넣을수 있을것이다. 그의 소설에는 나오지 않지만―적어도 아직까지는 나오지 않았지만―바사니는 이딸리아의 정치적, 사회적 절망의 흐름을 의식하고있는 수많은 이딸리아작가들과 련결되여있다. 그는 그들과 공통된 경험을 쌓았고 같은 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1942년에 결성된 행동당의 발기싱이였으며, 1943년에는 석달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무솔리니가 몰락한 이튿날 석방되였다. 반파시즘 지하투쟁은 그 놀라운 신사실주의시대에 이딸리아의 정치와 예술을 이끌었다. 바사니는 좌익계 사회당에서 활동하게 되였고 ‘왼쪽출구’사상의 대변자로서 사회당의 리상주의적 목표에 참여했다. 이딸리아에서는 중도와 좌파―대부분은 좌파―에 속하는 화가와 작가들이 국회에 참여하고있다. 이것은 미국에서 창조적인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는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 단적인 례로, 캘리포니아주 의회를 대표하는 사람은 이류배우(로널드 레이건)였다. 소설가들은 의회에 단 하나의 의석도 갖고있지 않다. 이 말을 듣고 바사니는 깜짝 놀랐다. 그는 오늘날에는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단지 주변에서 참여하고있을뿐이다. 그는 이딸리아의 천연자원과 예술자원을 보호하려고 애쓰는 환경단체인 ‘이딸리아 노스트라(우리의 이딸리아)’의 회장을 맡고있다. 그의 소설배경에서는 ‘문뒤’의 정치적 현장이 희미하게 메아리치고있지만 페라라에서 자라면서 받은 우대식 가르침과 우대인 의식은 그의 소설전반에 스며있다. 그의 집안은 <베네치아의 상인> 이전에 이미 수백년동안 이딸리아에서 살았다. 바사니가 <핀치 콘티니가의 정원>을 각색한 영화와 자신의 관계를 부인한 가장 큰 리유는 조르조라는 주인공이 유대인 박해를 목격하고도 도덕적으로 전혀 성장하지 못하는것처럼 보이기때문이다. 바사니는 그 영화에 대해 이렇게 썼다. “페라라의 내 집을 촬영장소로 리용하여,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건들이 거기서 일어난것처럼 묘사하고는, 사랑하는 내 아버지의 인생을 장난감처럼 갖고놀수 있었노라고 주장하는것은 터무니없는 권력람용이다. 내가 아무 항의도 하지 않고 고스란히 당했다면 나는 작가도 아닐뿐더러 인간도 아닐것이다.” 옳소! 문학인이여.
아모스 오즈 [Amos Oz(1939-) 이스라엘의 소설가]
오즈는 예루살렘의 헤브라이대학과 영국 옥스포드대학에서 공부했다. 중동전쟁에 두차례 참전했으며, 1957년이래 키부츠에 거주하면서 교사와 로동자로 일하면서 소설을 쓰고있다. 그의 상징적이고 시적인 소설들은 이스라엘생활의 균렬과 긴장을 반영하고있다. 작품으로는 <아마 어딘가 다른곳에서(1966)> <나의 미카엘(1968)> <죽음에 이르기까지(1971)> <물을 만져라, 바람을 만져라(1973)> <이스라엘땅에서(1983)> 등이 있다.
아모스 오즈는 예루살렘의 스코푸스산에 있는 작은 서재에서 글을 쓴다. 여름에는 헤브라이대학 학생들에게 체호브와 카프카에 대한 그의 생각을 나누어 주고 주말에는 안해와 두 딸이 살고있는 훌다 키부츠(집단농장)의 집으로 돌아가 뜨거운 태양아래서 몇시간씩 보초근무를 서거나 식사시중을 들거나 오렌지를 딴다. 오즈는 제2차세계대전의 소리, 1948년 당시의 이스라엘독립투쟁의 소리, 그리고 최근에 일어난 전쟁의 소리를 기억한다. 그는 이 모든 전쟁에 현역이나 보충역으로 참전했다. 그는 이런 경험들을 이스라엘판 미국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모두 겪은것에 비유했다. 몇년전, 골란고원의 한 전차부대에서 오즈는 시리아정보부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독창적인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히틀러이전의 세계를 잘 알고있는 한 병사는 명칭과 번호로 진지의 위치를 나타내는 대신 히틀러시절에 파괴되여 잊혀진지 오래인 폴란드의 게토(유대인공동체) 이름들을 각 진지에 붙인것이다. 이것은 도저히 풀수 없는 암호였다. 어느 누가 그런 암호를 생각해내고 상상할수 있었겠는가? 아이잭 싱어(폴란드태생인 미국의 유대계 작가. 1978년 노벨문학상 수상. 1904-91)나 마르크 샤갈(로씨아에서 태여나 빠리에서 활동한 유대계 화가. 1887-1985)이라면 그런 암호를 생각해내거나 상상할수 있었을지 모른다. 오즈는 이스라엘의 주요작가들중에서는 유일하게 키부츠에 살고있다. 그는 온종일 학생들을 가르치고 밭일을 한뒤 해뜨기전 몇시간동안 글쓰는 생활을 오래동안 계속해왔다. 그의 장편소설들 - <아마 어디 다른곳에서> <나의 미카엘> <물을 만져라, 바람을 만져라> - 이 출판된이후 키부츠는 그에게 집필시간을 좀더 많이 떼여주었다. “나는 글을 쓰거나 쓰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키부츠에서 내 지위는 목수나 수선공과 똑같습니다. 처음에 책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는 좀 어색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인세로 수표를 받으면 나는 그저 수표에 이서를 해서 키부츠회계원한데 넘길뿐입니다. 그 대신 나는 생계를 잇기 위해 인세에 련련할 필요도 없고 소득세신고를 할 필요도, 은행에 담보를 잡힐 필요도, 서평을 쓰거나 강연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에세이를 쓰는것은 단지 쓰고싶기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얻는 보상은 뭐냐? 시간입니다. 집에 틀어박히고싶거나 한동안 려행을 하고싶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수 있습니다. 키부츠의 생활수준은 지극히 수수한 편이지만 문학의 수족관에 갇혀사는것보다는 이런 생활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이곳 훌다 키부츠는 자연의 힘을 볼수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일몰이 있고 어둠이 있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는 늑대들이 청승맞게 우는 소리도 들을수 있었지요. 이곳은 좀 야생적인 곳일수도 있고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위기감, 적들에 둘러싸여있다는 위기감도 물론 존재합니다. 키부츠생활은 조용하지만 이곳에는 소설의 재료가 있습니다. 이웃집할머니가 옛날레 살던 동유럽국가에 대해 이야기하는것도 들을수 있고, 빈의 우아한 생활에 대해서도 들을수 있지요. 우리 키부츠에는 미국을 포함하여 19개의 나라와 19개의 언어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격리된 생활은 아니다. 오즈는 대서양너머의 작가와 작품들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있다. 그는 줄담배를 피우면서, 존 던(영국의 형이상파의 대표적 시인. 1573-1631)과 앨런 긴스버그(미국의 비트세대를 대표하는 시인. 1926-)와 고골리(로씨아 사실주의의 대표적 작가. 1809-52)에 대해 이야기하고, 고(故) 사무엘 요셉 아그논(오스트리아태생의 이스라엘작가. 1966년 노벨문학상 수상. 1888-1970)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표했다. “나는 미국의 유대계 작가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솔 벨로는 례외지만, 다른 작가들은 지나치게 령리해요. 그들의 등장인물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고 권투선수가 펀치를 교환하듯 상대를 코너에 몰아넣는 식으로 말을 나눕니다. 그들의 책은 빈틈없는 사회학일뿐입니다. 우주의 메아리가 없어요. 그들의 글에서는 별들을 찾아볼수가 없습니다.” 그의 책들은 이스라엘보다 미국에서 더 호평을 받았다. 이스라엘의 평론은 문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이다. 하지만 한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오즈는 최근에 상사에서 소위로 진급하여 이제는 변호사 두명과 화가 한명, 평론가 한명이 포함되여있는 키부츠예비군 소대를 지휘하고있다. 오즈는 청록빛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내 책을 비평하는 사람을 휘하에 두는것은 일종의 쾌감을 줍니다.” 오즈는 미국작가들가운데 허먼 멜빌, 셔우드 앤더슨, 월리엄 포크너가 자신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 셔우드 앤더슨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은 뜻밖인데요? “이곳 훌다 키부츠에 헝가리어를 가르치는 녀선생이 한분 계셨는데 그분은 미국에 가본적도 없었지만 <오하이오주 와인스버그>가 헤브라이어로 번역되자 나에게 읽어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분은 나한테 문학적 재능이 있단,ᄂ것을 알고는 글을 써보라고 권하기도 했지요. 나는 진정한 세계는 바깥에, 례를 들면 예루살렘이나 뉴욕이나 빠리에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오하이오주 와인스버그>는 진정한 세계란 어디에나 있다는것, 심지어는 작은 키부츠에도 있다는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는 그 책을 통해 모든 비밀은 같다는것을 배웠습니다. 사랑, 증오, 공포, 고독 - 인생돠 문학의 위대하면서도 단순한것들은 모두 같다는걸 알았지요.” 소설쓰기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영어에서는 소설을 ‘픽션’ 즉 ‘허구’라고 말하지만 헤브라이어에는 허구를 나타내는 낱말이 없습니다. 나는 그 낱말을 쓰지 않습니다. 허구는 진실의 반대를 의미합니다. 소설은 산문이지만, 허구는 아닙니다. 나는 산문을 씁니다. 나는 사실이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며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알만큼은 나이를 먹었습니다. 시를 쓰는것은 짧은 련애와 같고, 단편을 쓰는것은 긴 련애와 비슷하고, 장편을 쓰는것은 결혼과 비슷합니다. 장편에서는 부사의 선택에서부터 쉼표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50만번의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단 하나의 쉼표때문에 밤새 고민할수도 있습니다. 나는 작품을 쓸 때, 초고는 손으로 씁니다. 종이와 펜, 잉크, 그리고 내 손가락의 감촉이 필요합니다. 그다음에는 그 초고를 가지고 타자기와 씨름하지요.“ 오즈는 자신의 글과 중남미작가들의 글사이에 한가지 류사점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글은 그가 어디서 글을 쓰든지간에 이스라엘에 뿌리를 내리고있고, 중남미작가들의 글은 평범한 생활의 비범함을 감정적으로 이야기한다. “내가 보기에 중남미작가들은 부끄러운줄 모르고 용감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마치 지금까지 아무도 이야기를 한적이 없고 이야기를 들어본적도 없는것처럼 이야기하는 용기를 가지고있어요.” 지평선에 유대의 언덕들이 보였다. 시야를 방해하는것은 보초처럼 줄지어 서있는 나무들뿐, 력사는 이곳에서 체험되고 동시에 글로 씌여진다. 오즈의 안해는 키부츠운동자료실에서 일하고있다. 키부츠에서는 면화와 올리브, 이보카도와 과일을 재배하고 가축을 기른다. 저녁이 되면 남녀로소가 한자리에 모여 세상일을 토론한다. “이곳에서는 토론이 축구대신”이라고 오즈는 말했다.
이그나치오 실로네 [Ignazio Silone(1900-1978) 이딸리아 소설가]
실로네는 젊은 시절부터 정치활동에 뛰여들어, 1921년에는 이딸리아공산당 창당에 참여했고, 기관지 [전위(前衛)]의 주필로 일했다. 파시즘이 대두한뒤에도 지하활동을 계속했으나, 쓰딸린주의에 반발하고 탈당했다. 이무렵부터 작가활동을 시작하여 <폰타마라(1930)>, <빵과 포도주(1937)>, <눈밑의 종자(1944)> 등을 발표. 본국보다 외국에서 유명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난뒤 귀국하여 사회당기관지의 주필로 일하는 한편, <루카의 비밀(1965)>, <어느 불쌍한 기독교도의 운명(1968)> 등을 발표했다.
약속한 시간은 로마 사람들이 오후의 졸음을 떨쳐내느라 눈을 비비고있을무렵이였다. 나는 쾌적한 중산층 주거지역인 볼로냐광장의 빌라리코타가에있는 아파트안으로 들어가, 승강기를 타고 우층으로 올라갔다. 장난감같은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밖으로 나오자, 인쇄체로 산뜻하게 새겨진 문패가 보였다. 이그나치오 실로네. 나는 좀 충격을 받았다. 무엇인가 빠진것만 같았다. 이딸리아공화국이 수여한 명예로운 칭호나 하다못해 문장(紋章) 정도는 “<폰타마라>의 작가 실로네”를 장식하고있어야 옳지 않겠는가. 칭호를 중시하는 이딸리아에서 실로네는 아무런 칭호도 갖고있지 않았지만, 오로지 그 자신만의 무엇인가를 가지고있었다. 국제적 명성, 도덕적 립장, 파시즘과 투쟁한 경력, 그리고 작품들. 그의 명성은 분국보다 외국에서 더 높았다. 그는 현재의 문학적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있지만, 그의 도덕적 립장은 우파와 좌파 량쪽으로부터 존중받고있다. 그는 한때 망명지에서 반(反)파시즘운동을 전개한뒤, 나중에는 지하투쟁에 가담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 - 웬 일인지 - 개작되고있다. 그는 컴컴한 그늘에서 나와, 덧문이 닫힌 응접실로 들어왔다. 지난날 그토록 위기에 몰렸던 인물이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어떤 위기도 없는 나라에서 살고있었다. 그는 듬직하고 자신만만해 보였다. 내면의 고통도 없었고, 실패한 운동에 대한 열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예상했던것보다 한결 위엄이 있어 보였으며, 세상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있는것 같지도 않았다. 성기기 시작한 백발과 넓은 이마, 그밑에 있는 날카로운 눈매는 왠지 우울해보였지만, 이따금 입귀가 올라가면서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는 1900년에 태여났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빵과 포도주>가 1937년에 미국에서 출판되였다. 파시스트정권에 저항하여 농민과 로동자를 조직하기 위해 망명지에서 고향 아브루치로 돌아가는 지하운동가 피에트로 스피나의 모험을 그린 이 작품은 1930년대 프로레타리아문학의 한 리정표가 되였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실로네는 <빵과 포도주>의 내용을 고쳐쓰고 새로운 머리말을 붙인 개정판을 1955년에 내놓았고, 이 개정판은 하비 퍼거슨의 영역(英譯)으로 출판되였다. 이어서 1930년에 나온 <폰타마라>도 개정판이 출판되였다. 파시스트가 지배하는 도시에서의 선과 악을 다룬 <폰타마라>는 실로네의 처녀작이다. 1930년대에 나온 이 두 작품은 앙드레 말로의 <인간조건> 및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와 더불어 전세계의 리상주의자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복음서였다. 나는 력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오래동안 대중에게 호평을 받은 작품을 고쳐쓰는데에는 어떤 도덕성이 관련되여있는지 궁금했다. “내가 고쳐쓴 부분은 내 책의 근본적인 도덕성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사실은 오히려 사상을 강화하기 위해 고친것입니다. 내 사고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집니가. 개정판에서는 주제에서 벗어난 여담,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정리했지요.” - 구체적인 례를 들면? “례컨대 <빵과 포도주>의 경우, 개정판에서는 신부가 독살당하는 대목을 삭제했습니다. 왜냐고요? 내가 이 책을 쓰고있던 1930년대중엽에 반파시스트 신부 한분이 독살당했는데, 그때만 해도 충격적인 뉴스였고, 내 마음에도 강한 인상을 주었지요. 그래서 소설속에 그 사건을 포함시켰던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나는 단순한 보도기사에 불과한것은 소설에서 삭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빵과 포도주>의 주인공인 피에트로 스피나에 대한 감정, 그러니까 정치적 공감도 바꾸었습니까? “종교와 정치에 대한 내 견해는 <폰타마라>이후 지금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개정판은 초판본의 파생물이라는 성격을 갖는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개정판을 낸것은 예술적 통일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서일뿐입니다. 내 책들은 파시즘이 몰락한뒤에야 비로소 이딸리아에서 출판될 기회를 얻었습니다. 당신에 나라와 유럽 대륙에서는 출판되였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출판되지 않았지요. 그 소설들을 처음 썼을 때, 나는 차분한 서술보다는 멜로드라마적인 방법론에 더 기울어져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책을 고치는 작업, 책의 내용을 더욱 심화기키는 작업에 착수한것입니다. 게다가 나는 작가가 같은 작품을 끊임없이 고쳐쓰는것을 나쁘게 생각지 않습니다. 만초니(이딸이아의 랑만파 시인, 소설가. 1758-1873)를 생각해보세요. 그는 <약혼자>를 몇번이고 고쳐썼습니다. 무려 25년동안이나 같은 작품에 매달렸지요. 일부 작곡가나 화가도 마찬가집니다. 평생을 두고 같은 작품을 다듬지 않습니까. 내가 이야기하고싶은 기둥줄거리는 사실상 하나뿐입니다. <빵과 포도주>에 나오는 스피나는 <폰타마라> 끝부분에 등장하는 <이방인>과 관련되여있고, 그 이방인은 내가 전후에 쓴 여러편의 소설에는 또 다른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빵과 포도주>의 개정판과 초판본을 대조해서 읽는 비평적 독서를 해보면, 줄거리가 본질적으로 같다는것이 드러난다. 지하운동 지도자인 피에트로 스피나는 여전히 (미국의회의 반미활동대책위원회가 사용한 표현에 따르면) “시기상조의 반파시스트”로 남아있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무솔리니의 군단이 파쑈제국을 꿈꾸며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무렵이다. 물론 개정판에서는 정치적 년대도 최신식으로 바뀌였다. 하지만 이런 개작은 소설만이 아니라 1930년대의 력사적 현실속에 엄연히 존재했던 깁진사상의 양상까지도 바꾸어버리기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개정판에서 미묘하게 바뀐 부분을 한가지 인용하면, 어느 대목에서 스피나의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인터내셔널(국제로동자련맹) 멤버들이 서로 비슷한 옷차림을 하면 일반 사람과 쉽게 구별할수 있었을텐데, 칼 맑스가 왜 그걸 도입하지 않았는지 리해할수가 없단 말이야.” 같은 대목이 개정판에서는 이렇게 바뀌였다. “크멤린 사람들이 이런 옷을 입으면 명찰을 달고 회비를 내는 평범한 프로레타리아와 쉽게 구별할수 있었을텐데, 레닌이 왜 그걸 도입하지 않았는지 리해할수가 없단 말이야.” 앞의것은 빗대여 빈정거리는 말이고, 뒤의것은 맞대놓고 따귀를 때리는것 같은 통렬한 비난이다. <빵과 포도주>가 시종일관 진지하지는 않다는것, 뛰여나게 묘사적인 부분도 있고 농민 특유의 유머도 풍부하다는 사실을 서둘러 둣붙여야겠다. 두개의 우스꽝스러운 이름 - 카를로 캄파넬라(이 인물은 뉴욕으로 건너간뒤 찰스 리틀-벨[카를로는 영어의 찰스에 해당하며, 캄파넬라는 작은 종이라는 뜻이다]씨가 되였다.)와 시아트아프로인(그가 미국에서 이딸리아로 가져온 유일한 말이 ‘셧업!(입닥쳐!)’이였는데, 이 말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게 되였다) - 은 개정판에도 그대로 존재한다. 실로네는 한때 망명생활을 했고, 지금은 고향 아브루치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있지만, 거칠고 투박한 농민과 시골풍경을 설득력있게 전달하고있다. 실로네는 소설의 색조를 바꾸고싶어했는데, 그 차이는 실로네 자신이 가장 잘 설명하고있다. <빵과 포도주>가 이딸리아에서 처음 출판되였을 때, 그는 제목을 <포도주와 빵>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제목을 바꾼것은 망명지에서 출판되것과 파시즘이 몰락한뒤에 출판된것을 구별하기 위해서였노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나온 개정판 머리말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이 개정판에서는 포도주가 빵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이제 그는 널찍한 아파트의 응접실에서 수수께끼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인생에서도 포도주가 빵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은가요?” 이런 태도가 그의 현재 작없에 어떻게 반영되고있는지 궁금했다. “나 자신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인간의 조건에 전보다 더 마음이 끌립니다. 앙드레 말로처럼 말입니다. 현대소설의 형식은 지금 당장은 내성적이 아닙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있는것은 어느 한 시대의 운명입니다. 그건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일치하지요. 그리고 더 깊은 의미를 추구하는것은 이 시대의 요구와 일치합니다. 작가의 역할은 개인을 어떤 상황속에 집어넣고, 그 상황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때 그 상황을 폭로하는것입니다. 작가는 사회의 일원이고, 끊임없이 그 관계를 탐색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소설가가 정신분석학자와 경쟁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신분석학자는 순수과학적인 분석에서는 소설가를 릉가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심리학에 대해 조금은 알아야 합니다. 좀더 많은 문학이 세계인과 맞붙어야 합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있는 대상은 인간입니다. 인간이 지니고있는 약점, 인간이 겪고있는 어려움, 인간의 위대함... 나는 이런것들에 관심이 있습니다.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맡겨져있고, 자기 혼자서 절망이나 도덕적 위기와 맞서야 합니다. 그것이 내 소설입니다.”
칼 샌드버그 [Carl sandburg(1878-1967)
샌드버그는 가난한 스웨덴 이민의 아들로 태여나 어릴적부터 여러 직업에 종사했다. 1913년 시카코로 이주한뒤 <시카코 데일리뉴스>지의 편집자가 되여 중서부 시인들과 교류하는 한편 신흥도시의 우람한 자태를 읊은 <시카코>를 포함한 <시카코시집(1916)>으로 명성을 확립했다. 그후 <연기와 강철(1920)>, <굿모닝 아메리카(1928)>, <그렇다, 민중(1936)>을 간행했고, <시전집(1950)>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자였고, A. 링컨을 존경하여 <링컨전기> - <대평원시정(1926)>, <남북전쟁시절(1939)> - 를 썼으며 자서전 <언제나 젊은 이방인들(1953)>을 남겼다.
칼 샌드버그의 유해가 대리석관속에 들어가기전에 이따금 그를 만나는 영광을 누린 자로부터 생생한 기억을 듣는것도 시의에 걸맞는 노릇일것이다. 샌드버그는 자서전 <언제나 젊은 이방인들>의 마지막줄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능하다면, 오래동안 어른이였던 남자가 소년의 마음을 가지고 죽는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그의 삶과 글을 통해 용감하고 자유롭게 용솟음쳐 나온것은 바로 소년의 마음이였다. 샌드버그는 그의 작품을 비판한 일부 평론가들처럼 오만하거나 고집스럽지 않았다. 글을 쓸 때는 지극히 신중했지만, 말할 때는 솔직하고 꺼리낌이 없었다. 기분이 좋을 때면 그는 누구보다도 쾌활한 사람이였고, 자신의 그 멋진 목소리를 음악처럼 리용할줄도 알았다(그의 친구인 안드레스 세고비아[에스빠냐의 기타연주자, 작고가]는, 칼릐 목소리를 듣고있으면 꼭 음악을 듣는것 같다고 말했다). 언젠가 우리는 <에이브러햄 링컨 - 대평원시절>의 무대인 스프링필드[미국 일리노이주의 주도(州都)]를 걷고있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읊조리며 즐거워했다. “내가 당신과 입맞춤한 첫번째 녀자인가요?” “아뇨. 하지만 내가 옛날보다 입맛이 훨씬 까다로워졌다는걸 알려드리고싶군요.” “이 도시에 혹시 당신을 변호해줄 형사변호사가 있나요?” “아마 있을겁니다. 나를 제대로 변호해줄수 있을만큼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의 대화는 <대평원시절>에 나오는것으로 스프링필드에서 변호사로 개업한 링컨이 나중에 안해가 된 메리 토드를 만나는 장면이다.) 우리는 월그린상회앞을 지나쳤다. 그는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였다. 그는 그 주머니칼로 시가를 동강낸다음, 멋쟁이들이 손수건을 꽂고다니는 가슴주머니에 시가 반토막을 집어넣었다. 나머지 반토막을 다 피우자 그는 주머니칼을 담배에다 교묘히 찔러넣고 주머니칼을 손잡이로 리용해서 1센치메터쯤 남은 꽁초를 마저 다 피웠다. 그는 싱긋 웃으면서, 이게 부랑자들이 ‘니꼬찐을 흡입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길거리에서 흔히 보이는 평범한 일들을 그는 진기하거나 상스럽게 만들었고 때로는 유쾌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떤 간판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자동차는 셸[석유회사이름]을 사랑한다’ 그는 이것을 부연해서 말했다. “자동차는 셸을 숭배한다... 자동차는 셰을 열렬히 갈망한다.” 광고문구는 그를 화나게 했다. 그는 특히 텔레비죤광고를 경멸하고 조롱했다. 식사를 할 때 텔레비죤에 광고가 나오면 그는 작은 기계장치를 리용하여 광고를 중단시켰다. “아이쿠, 저기 음식을 야단스럽게 먹어대는 녀자가 나오는군.”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기계장치를 눌러댔다. 식사하는동안에 그는 음식을 삼키기전에 CM송이 나오는 옛날의 텔레비죤광고를 익살스럽게 흉내냈다. “입술을 통해 혀바닥을 지나... 조심해라. 창자야! 내가 간다!” 이 말은 한때 류행했던 ‘플레처 식이료법[속이 비여있을 때에만 식사를 하되 모든 음식을 골고루 조금씩 먹고 충분히 씹는 섭생법]’에서 나온거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가 식당이나 길거리에서 싸인을 해주는 방식은 일정한 론리를 갖고있었다. 어린이가 냅킨을 가지고 다가와서 싸인을 부탁하면 그는 대개 싸인을 해주었다. 어른 남자가 다가오면 그는 자기 책을 몇권이나 읽었느냐고 물었다. 대답이 만족스러우면 싸인을 해줄수도 있지만, 대답이 시원찮을 때에는 자기 책을 한권 가지고 다시 오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른 녀자의 경우에는 미인일수록 싸인을 받기가 쉬웠다. 손때 묻은 샌드버그의 책은 언제나 도움이 되였다. 웨이트리스. 구두닦이소년. 스튜어디스들은 대개 인쇄체로 또박또박 쓴 싸인을 얻었지만, 점잔을 빼는 사람들은 거의 싸인을 받지 못했다. 그는 정치인, 특히 공화당원을 호되게 야단칠수 있는 인물이였다. 하루는 우리 둘이서 저녁식사를 끝내고 일리노이주의회 의사당안으로 들어갔다. 주지사의 부친과는 오래전부터 - 아는 사이라고 샌드버그는 말했다. 공화당 홍보 담당자가 샌드버그에게 정치전단을 건네주자 그는 그것을 얌전히 받아들었다. 그러자 홍보 담당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 전단을 드리는것은 일리노이 주무장관(州務長官)이 선생님께 보이는 호의입니다.” 이 말에 샌드버그는 발끈했다. “주무장관한테 가서 지옥에나 가라고 해!” 나중에 나는 그 가엾은 사람을 왜 그토록 야단쳤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샌드버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주의회의사당은 정치전단이나 나누어주는 곳이 아닐세.” 그의 고향인 게일스버그에 갔을 때 우리는 녹스대학 캠퍼스의 ‘구본관’앞에 서있었다. 녹스대학은 1858년에 링컨이 더글러스와 공개토론을 벌인 곳으로[일리노이련방 상원의원선거에서 공화당의 링컨과 민주당의 더글러스는 노예제 존폐문제를 놓고 7회에 걸친 공개토론을 벌였다. 링컨은 비록 이 선거에서 패했지만 일약 전국적인 인물이 되였고, 이에 힘입어 1860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였다] 샌드버그는 젊은 시절에 우유배달을 하면서 이 대학 캠퍼스를 수없이 지났고, 현판에 새겨진 링컨의 말 - “그들[노예소유주들]은 우리를 에워싸고있는 도덕의 불빛을 훅 불어서 끄고있다” - 도 수없이 읽었다. 링컨이 이곳에서 독설을 던진지 한세기가 지난 지금, 샌드버그도 새로운 표적을 향해 독설을 던지고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우리 나라에서 지금 ‘존 버치협회[미국의 반공극우단체]’ 회원으로 알려져있는 자들한테 말해주고싶군요.” 그는 얼굴에 랭소를 띄면서 말을 이었다. “그들은 확실한 증거도 없이 대법원장을 탄핵하려하고있는데, 그들은 우리를 에워싸고있는 도덕의 불빛을 훅 불어서 꺼버리려하고있다고 말입니다.” 그는 앞에 모여있는 학생들에게 더욱 열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존 버치협회는 나치처럼 은밀합니다. 워런 대법원장을 탄핵하려는 자들은 미국을 모르는 자들이예요. 리처드 닉슨.” 그는 일부러 심술궂은 목소리를 내면서 빈정조로 덧붙였다. “아이젠하워장군, 그는 매카시[미국의 정치가. 1952년에 상원의원에 선출된뒤 정부활동 특별조사위원장으로서 공산주의자 숙청을 전개하여 소위 ‘매카시선풍’을 일으켰다]시대에는 침묵을 지키고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가요?” 이곳은 애들라이 스티븐슨[미국의 정치가. 1942년 일리노이 주지사에 취임했으며, 52년과 56년에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으나 두번 다 아이젠하워에게 패했다]으 본거지였기때문에, 그의 오랜 친구이며 선거운동원이였던 샌드버그는 정치적으로 기세가 올라있었다. 대학신문사 기자라는 학생이 아까부터 샌드버그를 약올리더니 로버트 프로스트[미국의 시인. 뉴잉글랜드지방의 자연과 인생을 쉽고도 솔직하게 읊어 국민시인으로 추앙을 받았다. 1874-1964]의 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으로 마침내 샌드버그를 화나게 하는데 성공했다. 샌드버그는 으르렁거리며 되물었다. “자네는 내 시와 프로스트의 시를 몇편이나 읽어봤나?” 학생은 우물거리다가 몇편 읽었다고 말한 다음 슬며시 후퇴했다. 그러나 학생기자가 던진 질문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점이였고 샌드버그의 대답에는 사실 나도 관심이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호텔방에서 그가 좋아하는 ‘잭 다니얼 블랙’을 마시며 앉아있었다. 처음에는 소다수를 타서 마셨지만 나중에는 물을 타서 마셨다. 마침내 술병이 거의 바닥나자 우리는 적절한 대응책을 찾아냈다. 위스키에 얼음을 타서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방법이였다. 이때쯤에는 나도 거나해져서 한번 그에게 물어보자고 용기를 낼수 있었다. “선생님은 프로스트의 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로버트 프로스트는 훌륭한 시인일세. 하지만...” 그는 악의나 적개심은 추호도 내보이지 않고 오히려 슬픈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에게서 무얼 기대할수 있겠나? 그는 공화당원인데.” 이튿날 우리는 그의 생가인 이스트 3가 331번지로 갔다. 그는 1878년 1월 6일에 그 집에서 태여났다. 방이 세개인 그 판자집은 시카코 - 벌링턴 - 퀸시를 잇는 철로에서 동쪽으로 두번째 집이다. 그가 별안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엄마. 소식 들으셨어요? 아버지가 시카코 - 벌링턴 - 퀸시선로에서 죽었대요.” 그의 생가는 ‘칼 샌드버그협회’가 관리한 덕택에 잘 보존되여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철도회사 대장간에서 망치를 휘둘렀다네. 그분은 자신의 이름도 쓸줄 몰라서 서명을 해야 할 때는 ×자를 그리곤 했지. 서명도 할줄 모르는 아버지를 둔 사람들이 모여서 단체를 만들어야 돼. 그 단체는 소위 국수주의적 단체들보다는 이 나라에 대해 좀더 많은것을 말할수 있을걸세.” 비바람을 제대로 막아주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링컨의 통나무집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스웨덴출신 개척자의 오두막에서, 샌드버그는 옥수수껍질로 만든 매트리스우에서 태여났다. <옥수수껍질을 벗기는 사람들>에 실려있는 그의 시 한편이 떠올랐다.
나는 초원에서 태여났으며, 그 초원의 밀밭의 우유빛. 토끼풀의 붉은 빛, 녀인네들의 눈빛이 나에게 노래와 구호를 주었다.
여러 로선의 렬차들이 게일스버그를 통과했다. 야간렬차의 기적소리는 오래전에 샌드버그를 시카코로 불러냈고 시카코로 간 그는 거기서 미국을 횡단했다. 지금도 그는 시카코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우선 안해인 폴라한테 전화를 걸어, 이제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폴라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플랫록에 있는 농장에 머물고있었다. 샌드버그는 그의 게일스버그방문을 다룬 신문기사를 안해한테 읽어주었다. “여보, 당신이 누구랑 결혼했는지 알고있었소? 이 글에는 내가 ‘백발을 머리에 인 80대 로인’이라고 되여있군.” 폴라는 두사람이 민주당지역책으로 활동하던 20세기초를 회상하면서 말했다. “당신은 그보다 더 심한 말도 들었잖아요.” 고향에서 빨리 벗어날수 있는 렬차는 하나도 없었다. 샌드버그는 녹스대학 교수로 재직하고있는 옛친구 맥스 구드실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말했다. “자, 이 손을 잡게나. 엘비스 프레슬리와 악수한 손을.” 이어서 우리는 ‘추잉검’ 항공사의 쌍발려객기에 올라탔다. 샌드버그는 좁은 좌석에 편안히 앉으려고 애썼다. 비행기는 덜컹거리며 달리다가 몸서리를 치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스튜어디스가 추잉검을 가지고오자, 샌드버그는 눈을 뜨고 손을 뻗어 껌 한개를 집어들더니, 시가 토막이 들어있는 웃주머니에 껌을 집어넣고, 얼굴이 빨개진 스튜어디스에게 이름을 물었다. “이 항공사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지만, 아가씨가 그 문제는 아니오.” 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손수건을 꺼내 눈을 가리고는, 시카코를 가는 길을 꿈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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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999년 여름 어느 비내리는 날 새벽, <중앙일보> 이경철記者한테
끌려서 일산에 있는 그의 저택 서재에서 하룻밤을 잔 적이 있다.
그는 만취상태였고, 자기 집에 가서 하룻밤을 꼭 자지 않으면 안된다는, 설복불가능한
고집에 부득이 "끌려" 갔던 것이다.
이틑 날 아침, 네 벽에 꽉 차있는 서재를 혀를 차며 둘러보는데, 욕심나는 책이 있으면 마음대로
가져가라지 않는가! 그래서 두 권을 골랐었다.--러시아(소련) 詩人 예프투센코의 장편소설 <산딸기>와
바로 이 허버트 미트갱의 인터뷰집 <20세기를 감동시킨 위대한 작가들>...
타자를 해서 연재식으로 카페에 올리려 했는데, 너무 벅차서 그만 포기...후훗~
그리운 추억이다.
허버트 미트갱 著 <작가를 찾아서>
--<20세기를 감동시킨 위대한 작가들> 66人에 대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