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쏟아지는 햇살이 노거수들의 푸른 잎사귀에 부딪쳤다. 잘게 부서졌다. 바람이 이를 흐트렸다. 고목과 고택, 새롭게 지어진 건축물들 사이사이로 흩어졌다. 마을 나들목의 고샅들이 가지런하다. 들어섰다. 웬만한 첨단 건물이나 계획도시보다 정갈하다. 아침저녁으로 일꾼들을 동원, 빗자루질을 쉼없이 하면 이 정도 일까하는 생각이 든다. 고목의 키가 어지간하다. 녹음의 깊이도 예사롭지 않다. 한수 시를 읊어도 ‘시원찮다 하지마라’할 이가 없을 지경이다. 사뿐히 걸었다. 발걸음이 그렇다기보다 길이 발걸음을 그렇게 움직이게 했다. 소란스럽거나 번잡하지 않은 기품이 사방에서 풍겼다.
천년, 그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전남 영암 군서면 구림. 마을이 생긴 이래 수많은 문객과 명승, 문화유산, 역사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갖고 있어 호남의 명촌을 넘어서 우리나라 3대 명촌이라 불린다. 이를 모두 건사하기란 지면이 좁고, 쓰는 이의 힘이 너무 미약하다. 400년 넘게 이어온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전통부분인 계(契)만을 짚어보기로 했다. 조금 더 지나 무언가 쌓이면 다시 한번 찾을 것을 다짐했다. 구림 대동계는 1565년(조선시대 명종 20년)부터 시작됐다. 내용은 향약에서 비롯됐다. 화민성속(化民成俗·백성을 교화해 아름다운 풍속을 만든다)을 목적으로 지역실정에 맞게 꾸렸다. 구림 대동계는 부침은 있었으나 계가 만들어진후 현재까지 440여년동안 운영돼온 유일한 계이다.
대동계에는 동장 1명을 비롯해 부동장 2명, 계수 1명, 공사원 1명, 유사 2명이 핵심 구성원이다. 집회는 춘추강신(정기총회)이 있고 정월에 예회, 6월에 별회, 7월에 자복, 10월에 제석 등의 임시회의가 주요 일정이다. 특히 재산을 관리하는 제도가 있어 문서사정과 대차금 정산 등의 소회의를 뒀으며 유사 교체때는 사정위원을 별도로 선출하고 회계문서 사정때 유사의 입회를 금지했다. 의문점이 있으면 유사가 해명하기위해서만 입실할수 있다. 실제, 유사를 잘 치르지 못한 계원은 자기 소유 논밭을 팔아 변상하는 예가 있었을 정도로 엄격했다. 이같은 원칙이 있어 400여년동안 성쇠와 기복은 있었으나 지금까지 계가 온전히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동계에 입회하고자 하는 이는 구림을 중심으로 20리 안에 거주하면서 덕망이 있어야 한다. 20리 규정은 대동계에 공이 많았던 조행립이 미암면 선황리이고 임호의 후손이 서호면 청용리, 현건의 자손이 학산면 광암리에 거주함에 따라 편의상 설정됐다고 보면 될성싶다. 또 입계원서를 낸 후보는 흑과 백의 바둑알 무기명 투표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고 예납금을 완납해야 비로소 계원명부에 등재됐다. 이같은 과정이 400여년 전부터 시행되고 있다는 것은 대동계의 민주주의 원책을 새삼 일깨워준다.
지난 7월 2년여의 산고끝에 탄생한 ‘구림사람들이 손수 쓴 마을공동체 이야기-호남명촌 구림’ 편찬추진위 최복 위원장. 최 위원장은 “남송정 지장개에 사는 박씨, 평리 월악 등에 사는 김씨, 죽정 선인동의 마씨, 백암동 검주리 천씨, 서호정 최씨, 법수거리 조씨가 마을에서 벗어나더라도 모두 구림사람”이라면서 “구림이라는 공동체에서 모두 하나”라고 말했다. 최 위원장은 이어 “지역을 기반으로 연과 정으로 묶여진 공동체에서 한 사람이라도 소외되거나 공동체 일을 방관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몸소 배웠고 실천해 왔다”면서 “사소한 감정은 접고 서로 도우며 더불어 살기위해 손을 맞잡고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보다 살기좋은 공동체를 만들수 있다는 믿음은 구림사람들을 언제까지나 한묶음으로 이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라도이색마을] 친환경농업 이런게 있어요
화들짝 놀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이제는 습관도 됐으려니 해도 악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근무 중 사무실에 인기척도 없이 스르르 꽃뱀이 문 안으로 들어섰다.’ 듣고보니 특히 여직원들은 손사래를 칠만도 하다. 이를 보면 자연생태계가 완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전남 강진군 옴천면사무소 가을 초입 풍경이다. 그나마 화사(花蛇)니 휘이휘이 내몰면 그냥 또 나간다. 다행이다. 옴천면은 방역이 없다. 농약도 없다. 해충이 드물다. 최근 몇년간 친환경농법이 농촌에 유행처럼 돌았다. 그 가운데 옴천면은 철저하고도 과학에 근거, 친환경 농법을 적용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게 방역이 없는 것. 강진읍에서 옴천면으로 가는 기알재를 넘으면 공기부터 다르다. 옴천면은 방역약품은 아예 구입하지 않는다. 군 역시 옴천면에 대해서는 어떠한 약품지원도 하지 않는다. 옴천면 전체 가로수에 대해서도 어떠한 방제를 하지 않는다. 대신 미생물제재품목을 지원한다. 방역살포기는 농약대신 미생물제재를 담아 논에 뿌린다. 청정지역으로 거듭나기위해 모기나 파리 유충 퇴치를 위한 미꾸라지, 참붕어 방류사업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해충이 사라질 수 밖에 없고 화사들은 점점 늘어난다. 친환경농법의 완성을 위한 면과 주민들의 노력은 대단하다. 단계별로 저농약, 무농약, 전환기 유기, 유기농까지 이어지는 몇년의 과정은 단 한번이라도 검증에 탈락하면 무용지물이 된다. 행정당국과 농업인들의 한결같은 의지가 가장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학비료나 농약에 대한 유혹은 철저히 배격해야 친환경에 이를 수 있다. 옴천면이 친환경 농업단지로 조성하게 된 배경은 지역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는 분지형으로 상수원 이외에는 외부에서 유입되는 수원이 없다. 이에따라 외부 오염원은 근본적으로 차단되며 지역내에 공장 등 오염원이 천혜의 친환경농업 최적지이다. 이와함께 장흥 부산면과 영암 금정면의 기존도로가 탐진댐 건설로 물에 잠기고 대체도로로 옴천오추터널이 개통됨에 따라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들이 인근 지역이나 대도시로의 판로개척이 쉬워졌다. 이밖에 탐진댐 완공으로 다산유적지와 병영성 복원, 수인산, 장흥 휴양림 등 인근의 자연경관과 함께 친환경농업단지로서 잠재력이 풍부하다. 지난 2001년 시작된 친환경사업은 보면 친환경 우렁이 농법 벼농사 도입, 2002년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저농약 품질인증, 2003년 왕우렁이 양식시설과 친환경쌀 가공공장 설치, 같은해 12월 전국 최초 면 전지역 친환경 농업단지 지정, 2004년 친환경시범포 조성과 미생물제조기 설치 및 목초액, 키틴 미생물 생산 등에 이르렀다. 올들어서도 객토공급과 미생물퇴비 공급사업, 품질인증수수료과 친환경직불제, 친환경참게농법 지원 등에 사업비를 확보했다. 옴천면 대곡리 오병집 이장의 친환경농법 사랑.
“논두렁을 높이고 물을 많이 넣은 뒤 우렁이와 참게, 잉어, 미꾸라지를 방류하면 잡초가 자라지않아 소출이 높습니다. 여기에다 참게의 생존율도 30%이상 돼 출하하면 짭짤합니다. 특히 일반 벼보다 보름정도 늦게 수확하는 녹미는 맛이 좋고 윤기가 납니다. 피부노화 방지에 효험이 있다고 하니 판로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옴천면사무소 이용현 담당. “365일 몇년째 토양과 물을 검증하는 등 친환경농업단지 조성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농업인들의 자력 의지에다 당국으로서 최대한 지원을 하겠다”면서 “옴천면이 전국 제일의 친환경농업단지로 앞서나가는데 하루하루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전라도이색마을]강진청자박물관과 푸조나무마을 지키는 푸조나무
고무신을 신고 다니기 어려웠다. 들녘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자기 파편들 때문에 밭일을 나가던 아버지, 어머니는 항상 조심스레 김을 맸다. 호미질을 하다 걸리면 그냥 툭, 밭두렁에 던졌다. 어느덧 문명의 그림자가 마을에 들어왔다. 60년대다. 비가 많이 쏟아지면 잠자고 있던 자기의 파편들이 스스로 빛을 드러냈다. 벽안의 사람들이 한두명 찾아들었다. 십환짜리 지폐 두어장을 건네며 그릇과 파편들을 달라했다. 감지덕지했다. 시절이 그랬다. 70년대 들어 일본인들이 자본의 힘을 빌어 그물질을 했다. 실로 엄청난 양의 ‘청자’들이 바다를 건너갔다. 한 무더기씩 휩쓸어갔다. 70년대 중반들어 마을의 뜻있는 이들과 문화재를 아끼는 이들이 지키기 시작했다. 청자재현사업소를 만들거나 중앙박물관, 마을회관에 청자를 보관하고 전시했다. 그러나 때는 너무나 늦었다. 민족이 갖고 있던 ‘빛깔’과 ‘문화’에 대한 무지가 이같은 상황을 만들었다. 돌과 파편들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흔했던 것들이 이젠 찾아보기 조차 힘들다. 희망은 있다. 실낱같이 흐르던 맥이 장인들의 손에서 빚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서른여섯가구 중 열두가구가 ‘청자’를 빚고 있다. ‘다산요’ 강기성 대표. 어렸을 적 기억이 생생하다. 뭔지모를 풍요로움이 깨진 그릇에서도 풍기더라는 것. “청자는 빛깔이 최우선입니다. 세계적으로 푸른색을 띠면 청자라로 일컫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청자는 전혀 다릅니다. 입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은은함이 묻어나옵니다. 두번째가 선입니다. 유려하면서도 잘 빠져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태극선을 들 수 있습니다. 매병의 경우 어깨선은 풍만하고 가운데는 잘록, 바닥은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넓습니다. 보면 볼수록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오는 게 한국 청자입니다.” 이어지는 강 대표의 강의. “모든 문양은 결국 원으로 통합니다. 학을 포함한 모든 문양이 컴퍼스로 휘익 돌리면 한자리로 돌아옵니다. 청자의 이미지인 ‘원’은 근본과 중심, 합일, 공동체 등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청자를 복원에 앞장서고 있는 자부심이 크다는 강 대표는 어려움 역시 토로했다. 뒤를 이을 후계자가 너무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대학의 관련학과를 졸업하더라도 이곳을 찾지 않는다. 빚는 일이 쉽지않아 금세 손을 떼는 젊은이가 많아 아예 30대 이후에 찾아드는 이들을 수련시킨다.
그리고 채산성이 갈수록 악화돼 더욱 이 마을을 힘들게 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나고자란 강 대표의 전시관에 앉았다. 자신이 빚은 청자컵에 커피를 즐기는 그의 모습이 아이러니하다. 원두커피를 갈아 청자컵에 받아든 과객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웬걸, 커피향이 진했다. 청자안에 담긴 무엇이든 이를 마시면 품이 넓어지고 여유로워졌다. 그는 “상감청자를 빚던 옛 선현들의 모습을 온전히 잇기는 어렵지만 강진 땅과 하늘에서 내리는 천혜의 여건에 우선 감사한다”면서 “언젠가는 스스로 흐뭇함을 느낄수 있을 정도의 ‘청자’를 빚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쓱싹 쓱싹 톱질이야, 툭. 쓱싹 쓱싹 톱질이야, 툭. 마당 한켠에 쪼그려 앉아 원하는 제 크기로 대를 잘랐다. 전남 담양군 담양읍 차전리 내다마을 송동수(73) 할아버지 댁 마당 한켠. 오랜 세월 손때를 탄 가늠자가 대나무다. 가늠자를 대고 대나무를 알맞게 자른다. 능숙한 솜씨지만 꼬박꼬박 가늠자를 댔다. 여러개를 나란히 세웠더니 키가 똑같다. 대나무 마을서 나고자란 덕에 50년을 이어왔다. 툭툭 털고 일어났다. 방안 작업이 송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 방안에는 벌써 오십여년 가까이 호흡을 맞춰온 국쌍순 할머니가 바쁜 손놀림을 선뵌다. 착착 석짝을 휘감는 것이 안봐도 척척이다. 물었다. “마을 이름이 차전린데 예전에 차밭이 있었습니까.” 송 할아버지. “차차에 밭전자를 써서 차전리여. 지금도 죽로찻잎을 따서 차를 덖은께. 진즉부터 대밭천지에 차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제.” “왜 석짝마을인지 자랑좀 해주세요.” “자랑이라면 뭐 하지만서도. 우리 마을은 한 60여호 사는데 석짝만드는 집은 한 열댓집 되제. 전부가 다 담양서 자란 대나무로 석짝을 만들어. 네모진 말석하고 지다란 진석, 모양은 이렇게 두가지고, 크기별로는 일곱치짜리, 여덟치짜리, 아홉치짜리가 대부분이여. 낱개로 팔기도 하고 묶어서 한꾼에 내놓기도 하고.” “차전리 석짝이 왜 이렇게 잘 팔리고 유명합니까.” “그야 물론 품질이 좋은께 그러것제. 바람이 잘 통하니께 밥이여 뭐여 전부 담아놓으면 쉬거나 상하지를 않지. 물밀듯이 들어온 중국산은 니스칠을 해 냄새가 나고 잘 부러져. 하지만 우리마을 것은 심려 놔도돼.” 국 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7~8년전만 해도 시세가 좋았제. 시집 장가 가는 집에서 이바지 해갈때 석짝을 다섯개, 일곱개, 많게는 아홉개를 한꺼번에 사가거든. 석짝에 담은 돼지고기여, 생선이여, 모두 상하지 않고 그대로 가니까 너도나도 찾았어. 특히 경상도 대구같은 디서 엄청나게 사갔지. 없어서 못팔 지경이었어. ‘소구루마’에 싣고 장에 나가면 오전 나절이면 금세 동이 났어. 요즘이사 한과담는데 많이 쓰제. 하여간 석짝 만들어 다섯남매 모두 대학까지 갈키고 집 사주고 했응께 남들은 소 팔아 자식들 키웠다지만 우린 석짝 팔아 건사했지.” “차전리 석짝은 어떻게 만들기에 튼튼하고 좋습니까.” 국 할머니. “일단 3년 이상 자란 담양 대를 써야해. 그래야 좀이 안슬지. 3년이 못되면 벌레가 진을 쳐 재료로서는 빵점이야. 그리고 일일이 이렇게 촘촘히 손을 놀려가며 정성스럽게 짜야 튼튼해.” “예전보단 덜 찾습니까.” 송 할아버지. “그렇긴 해. 요즘 사람들이 신식이 돼 가지고 덜 찾아. 하지만 좋은 것을 아는 사람들은 꾸준히 사랑해주고 있어. 이번 추석참에도 2천개를 주문받아 700개를 우리집에서 만들었어. 엊그제 실어갔어.” “힘든 점도 있지요.” “아암, 인자는 마을사람들이 늙어서 못하고 노인내외 중 누구 하나 하직하면 나머지 하나도 그냥 손을 떼. 젊은 사람들은 당연히 이런 일을 안할려고 하고, 하지만 힘 닿는데까정은 해야지 어쩌것는가. 부지런히 손을 놀려야 살제.” 오가는 얘기속에도 두 내외의 손은 바삐 돌아갔다. 속지와 피지를 동시에 손에 걸고 휘익 휘익, 석짝을 완성해 갔다. 방안에 가득한 석짝, 두 내외의 공력이 배어있다. 올 가을 혼례를 치를 이들은 한번쯤 구경해도 손해볼일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