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본동초등학교19,20회
 
 
 
카페 게시글
불교 천주교 기독교 스크랩 해곡(海谷·74) 용인 와우정사 주지 스님 - 2014.10.25.조선
하늘나라(홍순창20) 추천 0 조회 117 14.10.27 19: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외국인 年30만명… '부처 테마파크' 만든 마당발 스님

 

용인 와우정사 해곡 스님, 글로벌 사찰을 키우다


서라벌예대 연영과에 간 佛子
몸이 약하니 고된 수행보다 포교하라고 큰스님이 말해…
낮엔 방송국 직원, 밤엔 승려… 수십년간 '이중생활' 했죠

태국 관광객만 한 해 20만명
臥佛·동남아식 불상과 탑… 태국 왕실·스님과 교류하며 한국선 보기 드문 사찰 됐죠
6·25참전 태국 군인 제사도

 

 

  경기도 용인에 한 해 30만명의 외국 관광객이 찾는 절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돌탑 위에 놓인 거대한 금빛 불두(佛頭·부처님 머리·높이 8m)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경내에 들어서면 어쩐지 분위기가 낯설다. 우리나라 절에 가면 늘 느끼던 그 느낌이 아니다. 마치 태국의 어느 유명 사찰에 온 것 같다고 할까. 절 이름도 특이해서 '와우정사(臥牛精舍)'다. 나지막한 산들로 둘러싸인 연화산 기슭에 이 절이 있다.

둘러보면 둘러볼수록 이국적이다. 호리호리한 몸매의 동남아식 불상과 코끼리 조각상, 독특한 양식의 탑들이 있다. 야외에 모신 작은 부처님들의 목에는 노란색 꽃다발이 걸려 있다. 절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 중에도 외국인이 많다. 태국인들이 곳곳에서 향을 피우고 기도를 올린다. 태국어 독경(讀經) 소리도 들린다. 나무로 조각한 와불(臥佛·누워 있는 부처)상도 우리나라 절에서는 보기 어려운 양식이다. 워낙 볼거리가 많아 부처님을 주제로 한 테마파크 같기도 하다.

와우정사는 1970년 창건되었다. 역사가 짧으니 절에 얽힌 이야기나 유명 사찰에 한두 개쯤 있는 문화재도 없다. 그런데도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특이하게도 이 절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한 해 30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이 중 20만명이 태국인이다. 스리랑카·미얀마·라오스·인도네시아·중국인들도 이 절을 찾는다. 경기관광공사 관계자는 "와우정사는 태국 관광객들 사이에선 한국 여행에서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성지(聖地) 같은 곳"이라고 했다.
용인 와우정사의 해곡 스님
용인 와우정사의 해곡 스님이 절 입구에 놓인 거대한 금빛 불두(佛頭?부처님 머리?높이 8m)상 앞에서 웃는 모습으로 합장하고 있다. 와우정사는 우리나라의 전통 사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양식의 불상과 탑이 많아 이국적 분위기를 풍긴다. / 이태경 기자
◇9세 때 절에 맡겨져

경기도 산속에 어쩌다가 이렇게 독특한 절이 들어서게 된 것일까. 이 절을 창건한 해곡(海谷·74) 주지 스님을 지난 14일 만났다. 남루한 가사를 걸친, 자그마한 체구의 스님은 절 안을 돌아다니며 담배꽁초와 종이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그는 날 때부터 허약했다고 한다. 약하디약한 체력이 해곡 스님 인생의 나침반이 됐다. 9세 때 출가한 것이나, 출가했으되 고된 수행보다는 포교로 방향을 튼 것이나 모두 약한 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서게 된 길이었다.

함경북도 나진 출신인 해곡 스님은 해방 직후 월남해 서울을 거쳐 부산 초량에서 살았다. 당시 아버지가 건어물·설탕·간장 대리점을 해서 집안은 넉넉했다.

―9세 때 출가를 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어렸을 적 몸이 너무 약해 명이 짧을 것이라고 해서 집안에서 나를 절에 맡겼다. 원래 전통적인 불교 집안이었다. 9세 때 전북 완주 위봉사에 동진출가(童眞出家·어린 나이에 출가함)를 했다. 당시에는 몸이 아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이들을 부처님 은덕으로 살리기 위해 절에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고모가 스님이었는데, 마침 묵담(默潭) 큰스님과 잘 알았다. 그래서 묵담 큰스님의 제자인 충담 스님이 주지로 있던 위봉사에 나를 맡겼다."

―몸이 약하면 절에 보내기보다는 치료나 요양을 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부모님 결혼 후 10년 만에 태어난 첫 아이였다. 할머니가 나진에서 금강산 유정사까지 가서 불공을 드린 덕에 내가 태어났다고 했다. 하지만 몸이 너무 약해 태어난 지 3일 만에 병원에 입원했다. 며칠 후 의사가 죽었다는 판정을 내려 아기를 땅에 묻으려고 모포에 싸서 사과 궤짝에 넣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안 죽었다'며 보리차를 입에 넣어주고 사지를 주무르자 태어나서 1주일 만에 처음으로 대변을 보고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천운으로 죽음을 면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힘이 들었고 고뿔(감기)을 달고 다녔다. 어른이 되어서도 몸무게가 45㎏ 내외였다."

―병약한 아들을 절에 보낸 부모나, 9세에 부모 품을 떠나 출가한 아들이나 그 상황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 같다.

"자식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생각하셨을 것 같다. 또래 아이들과 밖에 나가 뛰어놀 수도 없을 정도로 몸이 약했으니까. 나는 절에서 부처님께 절하고, 목탁 두드리고, 염불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낮에는 스님들 따라다니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해가 떨어져 어둑해지면 엄마가 보고 싶어 울었다. 그럴 때면 스님들이 곶감을 주며 달래곤 했다. 지금도 엄마를 찾으며 울던 시절이 꿈에 가끔 보인다."

해곡 스님은 불교 교육 기관인 해동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스님이 예술대학에 진학하는 건 드문 일이었을 것 같다.

"고교 졸업 무렵 은사인 묵담 큰스님이 '너는 몸이 약해 근기(根氣)가 모자라니 수행보다 포교를 하라'고 권했다. 수행을 하려면 가부좌를 틀고 몇 날 몇 달을 꼼짝 않고 있어야 한다. 체력이 뒷받침될 때만 가능한 일이다. 큰스님께선 내가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말을 잘하는 것도 감안했을 것이다. 아버지도 방송의 역할이 커질 것이라며 방송을 통한 포교를 권했다. 부처님은 부처님 시대에 맞는 포교를 했고, 우리는 우리 시대에 맞는 포교를 해야 하는 법이다. 소리와 영상을 통한 포교를 하자고 마음먹고 방송계로 가보기로 했다. 당시는 방송을 배우려면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 예술대학)밖에 없었다."

―그래도 스님이 방송 공부를 하는 건 좀 어색해 보인다.

"방송 연출, 촬영, 제작, 연기, 노래, 시나리오 쓰기 등을 배웠다. 졸업도 하기 전인 1960년 KBS에 들어갔다. 승려 신분으로 방송사에서 일하니 불교 관련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면 나에게 조언을 구하더라."

승려이자 방송국 직원으로 사는 '이중생활'이 시작됐다. 낮에는 김해근(본명)이란 이름으로 양복을 입고 다니며 방송사 직원으로 근무하고, 밤에는 승복으로 갈아입고 해곡 스님으로 살았다. 그는 "당시는 스님 신분으로 교수나 기자 등 다른 직업을 가진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했다.

방송국에선 주로 음향효과를 담당했다. 1998년 정년퇴직 후에도 2007년까지 촉탁으로 일했으니 그에게 승려와 방송 겸업(?)의 시기는 꽤 길었다. 그는 방송국에 근무하면서 60년대 중반부터 30여년간 조계종 기획위원(부장급)으로 일했다. 조계종에서는 각종 불교 관련 사업과 행사 등을 기획·추진하고, 대외 교류 업무를 주관했다.

와우정사를 찾은 태국 스님들
지난 7월 와우정사를 찾은 태국 스님들과 신도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와우정사에는 매년 1000여명의 외국 스님들이 방문한다. / 와우정사 제공
해곡 스님이 와우정사 열반전에 있는 와불(臥佛?누워 있는 부처님)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해곡 스님이 와우정사 열반전에 있는 와불(臥佛?누워 있는 부처님)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길이 12m로 인도네시아에서 가져온 향나무로 만들었다. 팔베개를 하고 평안한 자세로 누워 있는 부처님은 모든 번뇌가 사라져 해탈한 모습을 상징한다. / 이태경 기자
◇태국 왕실이 금동불상 기증

지난 19일 오전 10시 용인 와우정사. 대형 버스 7~8대에서 관광객 300여명이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 관광객들이었다. 절 입구 플래카드와 복전함, 화장실 안내 표지판 등에도 태국어가 병기돼 있었다. 절 안에서도 내국인보다 동남아 관광객이 훨씬 눈에 많이 띄었다. 해곡 스님은 "태국 여행사들이 와우정사와 에버랜드를 연계한 패키지를 많이 내놓는다"고 했다.

―태국 관광객들이 와우정사를 많이 찾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내가 1970년대부터 태국 등 동남아 불교계와 활발히 교류하다 보니 그 인연으로 절이 외국에 알려져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것 같다. 인근에 에버랜드나 한국민속촌 등이 있는 것도 한몫했다. 와우정사는 사실 우리나라보다 외국에 이름이 더 알려져 있다. 지난해에는 정기 교류와 세미나 참석 등을 위해 와우정사를 찾은 외국 스님이 1000명을 넘었다."

―특히 태국과 인연이 깊은 것 같은데.

"1969년 박정희 대통령 초청으로 방한해 조계종을 찾은 푸미 폴 푼 태국 공주를 안내한 게 인연이 됐다. 나는 당시 조계종 행사와 사업 등을 맡은 기획위원 신분이었다. 이를 계기로 태국 왕실 및 스님들과 교류를 이어갔다. 6·25전쟁 때 참전해 전사한 태국 군인 129명의 제사도 1년에 한 번씩 지낸다. 이후 라오스, 스리랑카 등 인근 동남아 불교 국가들로 교류 범위를 넓혔다."

―한국의 전통 사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양식의 탑과 불상들이 많다.

"태국에서 가져온 불상들이 많아 그런 것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6년 동안 고행하는 모습을 담은 고행상(苦行像)도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희귀한 불상이다. 우리 절엔 미얀마·태국·스리랑카·중국 등에서 가져온 3000여점의 불상이 있다. 쌀로 된 불상, 크리스털 불상, 흙으로 된 불상, 와불상 등 박물관을 하나 만들 정도다. '글로벌 사찰'인 셈이다. 그렇다고 절을 지을 때 태국이나 동남아의 남방불교 양식을 따른 건 아니다. 지금 우리 시대가 공감할 수 있는 절을 짓고 있다."

―우리 시대가 공감하는 절은 어떤 절을 말하나.

"현대를 사는 우리의 생각과 문화가 스며 있는 절이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조선까지의 건축 양식은 잘 보존해야 하지만, 새로 짓는 절을 꼭 전통 양식대로 지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 절에 있는 탑은 대개 돌을 깎아 만들지만, 와우정사에선 기와를 쌓아올려 탑을 만들기도 했다. 태국 왕실이 기증한 10t짜리 금동불상(높이 5m40㎝)은 법당에 들어가지 않아 스테인드글라스로 지붕과 벽을 만들어 모셨다. 대신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연꽃을 그려 넣었다. 국내외 문화 양식이 어우러진 스타일이다."

―와우정사(臥牛精舍)라는 절 이름도 낯설다.

"불교에서 소는 부처님을 뜻한다. 절 벽화로 많이 그려진 심우도(尋牛圖)는 인간의 본성 또는 부처님을 찾아가는 과정을 소를 찾는 과정에 비유해 그린 그림이다. 와우정사는 해탈한 부처님이 계신 집이란 의미다."

―와불(臥佛·누워 있는 부처님)상도 동남아에 가서나 볼 수 있는 불상인데.

"우리 절에서 으뜸가는 부처님으로 모신 와불상은 길이 12m, 높이 3m다. 인도네시아에서 가져온 향나무로 만들었다. 누워계신 부처님은 모든 번뇌가 사라져 완전히 해탈한 모습을 상징한다.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사원에서 수행 중인 한 인도 스님이 내가 절을 세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목조상을 만들 향나무를 보내주었다. 그런데 영어 주소가 잘못되는 바람에 인천항에 장기 보관되어 있었다. 3년 동안 화주를 찾지 못하면 폐기 처분되는데, 폐기 처분 일자(12월 31일)를 하루 앞두고 연락이 와서 가까스로 나무를 가져올 수 있었다."

―와불을 모신다고 불교계에서 반발할 수도 있을 텐데.

"처음에는 왜 부처님을 누워계신 모습으로 만들었느냐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남방불교 등에 대한 시야가 넓어지면서 이런 비판은 쑥 들어갔다. 요즘은 우리나라 절에서도 와불을 모시는 곳이 있다고 들었다."

용인 와우정사를 찾은 태국인 등 외국 관광객들이 공양한 기와들.
용인 와우정사를 찾은 태국인 등 외국 관광객들이 공양한 기와들. 자신의 이름과 소원을 적었다. / 이태경 기자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만들기

해곡 스님은 방송일을 하면서 조계종 기획위원으로 각종 불교 관련 사업에 참여했다. 태국·인도·스리랑카·버마·캄보디아·티베트 등과 불교문화교류협회를 만들어 국제 교류도 이어갔다. 부처님오신날 법요식에서 부를 찬불가(讚佛歌) '제등행렬의 노래' 작사도 했고, 1970년대 불교 새마을운동에도 참여했다. 비 새는 절간을 보수하고 담장 고치고 도로를 정비하는 일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불교계의 마당발이었다. 해곡 스님은 1978년 개봉한 영화 '관세음보살'(감독 최인현)의 원작을 쓰기도 했다. 신봉승씨가 극본을 쓰고 황해 등이 주연을 맡았다.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한 스님이 수행하는 과정을 담았다. 1980년부터 세계 각국 기자·PD 등을 와우정사로 초청해 한국의 불교 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낮에는 방송사에서 일하며 불교 일까지 하려니 힘들었겠다.

"보람이 있었다. 특히 1975년 '부처님오신날'을 법정 공휴일로 만드는 데 참여한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날이 공휴일이 된 것은 1973년 5월 10일 조계사에서 열린 봉축법요식을 TV로 중계방송한 것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 TV 중계방송은 외국 정상이 방문하는 등 특별한 경우에만 했다. 중계방송만 하면 시청률이 40% 이상 나왔다. 이 TV 생중계 이후 우리 불교계가 발전한 모습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었다."

―식생활 개선운동도 벌였다는데.

"당시 요리연구가 왕준연(1918~1999) 여사를 수양어머니로 모셨다. 집안에서 간장·설탕 대리점을 하다 보니 요리연구가 왕 여사와 잘 알게 됐다. 왕 여사는 대구에서 살 때 육영수 여사와 이웃에 살아 친했다고 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쌀이 부족했다. 육 여사는 왕 여사에게 수입한 밀가루로 빵과 국수를 만들어 먹는 식생활 개선운동을 맡겼다. 육 여사가 불교계에도 이런 운동이 필요하다고 해 나는 왕 여사와 함께 전국의 절을 돌아다니며 분식 장려 운동을 벌였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육 여사는 불교계를 많이 챙겨주었다."

◇정성과 인내로 쌓은 탑

1970년 건설이 시작된 와우정사는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공사 중이다. 해곡 스님은 방송국에서 완전히 은퇴한 2007년 이후에는 와우정사 짓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대한불교 열반종의 총본산인 와우정사는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호국사찰"이라고 했다.

"신라인들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호국불교의 상징으로 황룡사를 창건했다. 실향민인 나는 6·25전쟁 등을 겪으며 남북통일을 기원하기 위한 사찰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해 절을 짓기 시작했다. 신라시대 화랑도가 삼국통일을 위해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모셨듯, 와우정사 대웅전 옆에 높이 6m 미륵반가사유상을 세웠다."

대웅전 옆에 들어선 '통일의 종'(12t)은 88 서울올림픽 때 타종하는 모습이 TV로 방영됐다. 지난해에는 전 세계인들이 기부한 기와로 만든 '남북통일의 탑'과 '세계평화의 탑'도 들어섰다.

―평생을 조계종에서 일했는데, 왜 열반종으로 옮겼나.

"1400여년 전 고구려 영류왕 때 보덕 화상이 창종한 열반종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교종 종파 중 하나였다. 깨달음을 중시하는 선종과 경전 공부를 중시하는 교종은 사실 하나인데, 지금 우리 불교계는 선종이 대부분이다. 열반종을 중흥시키는 것은 우리 전통을 살리고 한국 불교의 균형 잡힌 발전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1970년부터 열반종 총본산으로 와우정사의 터를 잡고 공사를 시작했다."

―와우정사는 언제 완공되나.

"1970년대 초반에는 중장비가 없어 4~6명의 목도꾼이 무거운 돌멩이를 얽어맨 밧줄에 굵은 막대기를 꿰어 어깨에 메고 날랐다. 스님들은 전국 신도들이 가져온 돌로 탑을 쌓느라 손톱이 빠지기도 했다. 오랜 세월 한길로만 달려왔다. 거센 파도는 바위를 부술 수 없지만, 한 방울씩 떨어지는 낙수(落水)는 바위를 뚫는다는 심정으로 견뎠다. 하지만 절이 완공되려면 아직 멀었다."

―절을 짓는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진 않았나.

who is 해곡 스님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젊은 시절에 깨쳤다는 분들을 간절하게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결론은 깨달음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해선 안 된다. 인내(忍耐)하며 정진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지금 세태는 그런 인내를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다.

"우리 사회는 금전에 얽매여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거칠어지고 있다. 중도(中道)의 묘가 아쉬운 요즘이다. 거문고의 경우 줄을 너무 당기면 끊어지고 너무 헐거우면 아름다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세상살이도 마찬가지다. 중간에 절제하고 멈추고 인내하는 미덕이 없으면 화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신을 제대로 한번 돌아보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와우정사 경내에서 왼쪽 언덕길을 올라가다 보면 스리랑카·미얀마·태국·인도 등의 불교 성지와 전국에서 가져온 돌로 쌓은 돌탑 8개가 서 있다. 등산가 고상돈씨는 히말라야 돌을 가져왔고 베를린 장벽 조각을 보내온 사람도 있다.

"굴러다니는 돌도 정성을 들여 깨끗이 씻으면 경배의 대상이 된다. 그 돌로 탑을 쌓았다. 예전에 우리 선조는 성황당에 정성껏 돌을 쌓고 소원을 빌었다. 나도 성황당에 놓인 돌 같은 존재로 남고 싶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