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12 조선일보 "'자본가의 하수인' 아버지 미워했지만…"
[詩人 박노해 아내 김진주씨]
전시관을 지나치던 초등생 두 명이 신기한 듯 아는 체한다. "어, 아줌마 어젯밤 TV에서 봤는데." "이게 라디오라는 거구나."
광화문 옆의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5층. 투명 유리 안에 국산 1호 라디오 '금성 A-501'(1959)이 있다. '아줌마'로 불린 김진주(61)씨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그래. 이게 바로 우리 아버지가 만든 라디오야."
아버지가 만든 라디오가 등 뒤에 있다. 국산 1호 라디오 금성A-501. 대한민국역사박물관 5층 전시실에서 김진주씨는 "감옥에 사는 동안 나는 아버지의 시대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엔지니어로서 얼마나 고뇌에 찬 나날을 고군분투하며 살아왔던가를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열 살 남짓 소년들은 김진주라는 이름도, 라디오라는 기계장치도 처음 듣는다는 표정. 단지 5월 5일 밤 방송된 KBS 과학 다큐 프로그램에서 잠깐 등장한 'TV 나온 사람'을 기억할 뿐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라디오를 만든 엔지니어 김해수(1923~2005)의 딸로 출연한. 당연히 그녀 남편 박노해의 이름도,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갈등과 화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 집안 사정도 알 턱이 없다.
"아버지는 4남매 중 고명딸인 나를 무척 아꼈어요. 하지만 난 아버지를 '군사독재와 자본가의 하수인' '비겁한 친일 협력자'로 미워했죠. 물론 대놓고 표현은 한 번도 안 했지만."
이화여대 약대 졸업, 구로공단 미싱사로 취직.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와의 결혼, 이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중앙위원 활동과 체포, 4년 간의 감옥 생활(1991~1995)…
한국 전자 산업의 선구자와
근대화의 주역인 딸,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갈등과 화해
지금의 40대 이상 세대에게 이 부부는 익숙하다. 하지만 그녀의 부친이 '조국 근대화의 주역'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늙은 아버지 옆에서 그의 삶을 받아 적었던 2004년까지만 해도 딸 역시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몰랐으니까. 아버지가 육필로 적고 딸이 정리한 '아버지의 라듸오'(느린걸음 刊)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산업포장' 훈장을 받았던 대한민국 1세대 엔지니어 김해수의 파란만장 일대기다.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시절 전기 기술을 배웠고, 1958년 금성사(지금의 LG)가 공채 엔지니어를 처음 뽑을 때 수석으로 합격했으며, '국산 라디오 1호' '국산 TV 1호'를 만든 한국 전자 산업 초창기의 주역이자 선구자. 하지만 영광의 산업화 무대 뒤에서는 딸과 사위, 그리고 막내아들까지 민주화 운동으로 구속되는 걸 지켜봐야 했던 비운의 아버지. 2016년 지금 시점에서 궁금했던 건 그 대목이었다. 부녀의 화해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평생 손찌검이라고는 모르던 아버지가 나를 밤새 때린 적도 있어요. 펑펑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죠. 그래도 변하지 않았던 내 생각이 바뀐 건 결국 감옥에서였어요."
그녀의 수감 기간은 1991~1995년. 말 그대로 세계사의 격변기였다. "내가 실제로 이룬 건 뭔가 반성했어요. 굳게 믿었던 사회주의가 무너지는 걸 지켜보면서, 모든 걸 다시 생각했죠. 사람 관계가 계급으로만 나눌 수 있는 건 아니구나. 운동도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안 되겠구나. 혁명적 계급투쟁 말고 문화적으로 할 수 있는 운동이 있겠구나…."
아버지 역시 자신의 신념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석방되어 집에 돌아왔을 때, 딸은 아버지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던 거실의 박정희 대통령 산업포장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아버지는 이렇게 회고했다.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두기로 했다. 우리 세대는 위대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위해서 희생당했다는 고통을 외면해온 죄를 짓기도 했다."
아버지의 라디오가 있는 박물관 3층 찻집에서 딸은 담담하게 말했다. "결국은 아버지의 사랑이 먼저였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빚진 마음으로 아버지와 그의 생애를 돌이켜봤습니다."
'국산 라디오 1호를 만든 엔지니어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 '아버지의 라듸오'는 결국 그 힘들었던 화해의 여정이기도 하다.
그녀를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를 극복한 르네상스인으로 명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부녀의 사례와 달리 세대 간의 화해는 완성되지 않았고, 게다가 2016년은 '산업화'나 '민주화'를 넘어선 새로운 가치가 필요한 시기니까. 하지만 대안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부녀의 고투(苦鬪)와 생애가 새로운 젊은 세대에게 어떤 힘과 에너지가 될 수는 있지 않을까.
그녀는 지금 구순의 노모(老母)를 모시고 경남 거제의 한 사찰에서 살고 있다. 생전의 아버지가 자신의 누이를 위해 지어줬던 작은 절. 이제는 절의 주인이었던 고모도, 대처승이었던 고모부도 세상을 떠났다. 따로 떨어져 글을 쓰고 있는 박노해 시인 역시 명절이나 제사 때만 찾는다는 조용한 절집의 삶이다. 학창 시절 전공을 살려 일주일에 3~4일 출근하는 요양병원 '월급 약사'로 생계를 꾸린다.
그는 "무엇보다 젊은 세대가 행복한 인간으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행복하려면 먼저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그런데 이건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죠. 자기가 직접 배울 수밖에. 그런데 한국 남자들은 사랑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 같아(웃음). 사랑하면 자기도 남도 다 행복한데 말이죠. 비싼 밥 사주고, 멋진 곳 데려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손으로 집 청소하고, 아이들과 함께 조금 더 놀아주고. 그런 남자가 좋은 남자예요."*********************************************************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으로 LG그룹의 기틀을 닦아
구인회는 먼저 국산 라디오 개발을 지시했다. 진공관 라디오 설계를 맡은 사람은 엔지니어 김해수였다. 1923년생인 그는 도쿄고등공업학교 졸업반이던 1943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인천 조병창 전기주임으로 발령되었으나 탈출하여 강원도 산골에 숨어 광산 전기책임자로 일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그 뒤 미군 PX의 라디오 수리점을 운영했으며, 1958년 공채로 금성사에 입사했다. 산업기반이 전혀 없는 나라에서 라디오를 생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시제품을 힘들게 완성해도 부품이 거의 수입품인지라 생산단가가 비쌌다. 결국 품질이 떨어지더라도 직접 부품을 제작해 제품의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설계 작업과 부품 생산이 동시에 이루어져 나갔다. 금성사는 창립 1년 만인 1959년 11월 첫 국산 진공관식 라디오 ‘A-501’을 자체기술로 만들어내 한국 전자산업의 신기원을 이룩한다. 라디오에는 금성사의 상징인 왕관 모양 마크와 ‘Goldstar’ 로고도 함께 찍혔다. 미제 제니스(Zenith) 라디오가 한국 시장을 한창 휩쓸던 때였다.
그러나 금성사는 예상치 못한 시련에 맞닥뜨렸다. 수요층 대부분이 외제만 선호하는 데다 밀수품의 기승으로 판매가 부진했다. 3년 연속 적자에 허덕이던 금성사는 문 닫을 위기에 처했다. 더는 지탱할 수가 없었다. 구인회를 비롯 금성사 직원 모두가 자포자기 절망뿐인 심정이었다. 그런데 1961년 9월 어느 날 부산 연지동 금성사 라디오공장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군인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마침 생산과장 김해수는 혼자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군인의 얼굴을 바라본 그는 가슴이 마구 뛰었다.
‘요즘 신문에 자주 나오는 박정희 의장이다!’
5·16군사정변의 주역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부산에 내려왔다가 시간을 쪼개어 라디오공장을 둘러보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김해수는 부품가공실, 라디오 조립실, 검사실을 안내했다. 시설을 꼼꼼히 살펴본 박정희는 김해수에게 제조과정에 대한 설명까지 들었다.
“공장의 기계시설은 어느 나라 것이오? 부품의 국산화는?”
“김 과장은 어느 학교를 나왔소?”
“하루에 몇 대나 생산하오?”
박정희가 잇따라 질문을 쏟아냈다. 김해수는 왠지 모르는 진지한 이끌림에 차근차근 열정적으로 설명을 했다.
“이래서 살아남을 수 있겠소? 내가 무얼 도와주면 좋겠소?”
순간 김해수는 울컥 울음이 치밀어 오르는 심정으로 하소연했다. “회사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상품의 질과 직원들 사기는 보장합니다. 밀수품과 면세품의 유통을 막아야 전자산업이 살아납니다.”
“알겠소! 기다려보시오. 곧 좋은 소식이 올 거요.”
다음 날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구인회는 박정희의 예고 없는 부산 공장 방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최고 권력자의 깜짝 방문에 금성사는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일주일 뒤 밀수품 근절에 관한 최고회의 포고령이 발표되면서 금성사 라디오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더불어 공보부 주관으로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전개되면서 주문전화가 빗발쳤다. 그 결과 한 해 1만대에도 못 미치던 금성라디오 판매량이 1962년에 들어서며 13만7000대로 늘어났으며 1961년 89만여대였던 라디오 보급 대수가 1962년 끝 무렵에는 134만대로 늘어났다. 시인 김수영은 아내가 A-501을 사온 것을 소재로 ‘金星라듸오’라는 시를 썼다. 한 기업의 제품이 광고나 홍보가 아닌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라디오가 그만큼 서민들의 삶과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구인회는 화학과 전자산업을 두 축으로 LG그룹의 기틀을 닦아 나아갔다.
럭키치약 못지않은 대히트 상품인 ‘하이타이’ 개발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구인회는 1962년 락희유지 상무 허신구를 일본·홍콩·동남아시아로 보내 시장개척 아이디어를 얻어오게 했다. 출장을 마치고 온 허신구는 간부회의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태국 방콕에 가 보니, 강가에서 무슨 가루를 뿌려 빨래하는데 희한하게 때가 다 빠지더군요. 합성세제라 하는데, 아직 양잿물로 끓이고 방망이질하는 한국에서 생산하면 아주 잘 팔릴 것 같습니다.”
그때 이미 럭키빨랫비누가 나와 아주 잘 팔리고 있었다. 기존 상품의 수요를 깎아먹을 수 없었으므로 일단 가루세제 아이디어는 접어야 했다. 그 뒤로도 허신구는 집안사람들이자 경영층을 1년 넘게 설득해 나갔다. 그 모습을 본 구인회는 마침내 허락했다.
“그토록 집념을 갖고 해보겠다니, 나름대로 확신이 있나보구먼. 좋네, 자네를 한번 믿어보겠네.”
최초의 합성세제 ‘하이타이’가 개발되자 영업사원들은 전국 곳곳에서 세탁 시연을 해보이며 판매에 열을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이타이는 주부의 필수품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공장 시설을 두 배로 늘려야 할 만큼 성공을 거두었다. 샴푸도 개발하여 큰 인기를 모은다. 그전까지 비누로만 머리를 감던 사람들에게 샴푸는 한마디로 문화충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