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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4.19혁명기념일
기념일을 맞이하여 4.19혁명에 대하여 공부해보자.
때는 한국전쟁이 휴전 협정으로 막을 내린 지 불과 7년 밖에 지나지 않은 1960년. 그때는 이미 국민들 사이에 민주주의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 들끓고 있었다. 민주화를 위한 요구는 적어도 5년 전부터 이미 있어 왔던 것이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다. 1950년대가 어떤 시대인가? 바로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어가며 국토가 잿더미가 된 시기였다. 그런데 이렇게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도 못한 시점에서 어떻게 시민들은 민주주의라는 숭고하고도 고결한 가치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 시대에 반독재 민주시위가 가능했던 것인가?
1950년대에 민주주의 정신이 국민들의 의식 속에 정착하는 것이 성공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필연적인 사회적 배경이 있었다.
1950년대 당시 언론인들은 최대의 지식인 계층에 속했다. 친정부적 성격을 띤 <서울신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논조는 이승만 정부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사회 참여적인 성격이 몹시 강했다. 각 언론사들의 주필들은 다양한 논설, 사설, 칼럼을 통해 민주적 가치를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환기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초기의 언론 자유에 대한 신념을 버리고 탄압 정책으로 전환했다. 그의 언론 탄압 이력은 적어도 1955년으로부터 시작된다. 어째 리스트가 좀 많긴 하지만 4.19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955년 동아일보 "괴뢰" 표기 오식사건
편집상의 실수로 대통령을 암시하는 단어인 "고위층" 앞에 북한을 암시하는 "괴뢰" 단어를 붙여버렸다. 200여 부가 인쇄된 후 부랴부랴 회수 및 폐기 처분했지만 이것만으로도 평소 눈엣가시던 동아일보 하나쯤 보내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발행인 및 편집인을 불구속 입건.
1955년 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
"백주대낮의 폭력은 테러가 아니다." 황당하지만 실제로 당시 경찰 당국의 발언. 정치깡패들은 소재불명으로 처리되고 정작 폭력 행위를 경찰에 신고한 주필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1957년 류근일 필화사건
1957년 동아일보 "고바우 영감" 필화사건
1958년 2.4. 국가보안법 파동
국가보안법의 3차 개정 과정에서 17조 5항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독소조항임이 발견, 이에 반발하는 야당 의원들을 무술 유단자들을 동원하여 한데 구겨넣어버리고 여당 의원들은 자기들끼리만 점심시간에 슬쩍 모여서 통과시켰다.
1959년 경향신문 폐간사건
이 사건은 미군정법령 88호 및 주한 미국 대사인 월터 다울링이 반대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한편 경향신문사는 행정처분의 가처분 신청이 수용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은 일이 이렇게 되자 폐간을 철회하고 그 대신 무기발행정지 처분으로 응수했다.
당시의 시대상이 이와 같았고 이미 언론에 대한 탄압과 정치깡패를 동원한 테러행위, 날조 및 공작행위는 곪을 대로 곪아서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중이었다. 그리고 이들 언론을 구독하는 국민들은 점차로 이승만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있었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는 현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물론 오늘날에 비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교육열은 사실상 "붐" 에 가까운 것이었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국가 총예산의 평균 10.5%는 교육 관련 지출이었다. 그 외에도 국민학교 의무교육제가 채택되었으며 또한 빈민층일수록 학구열은 더욱 높았다. 그 이유는 교육을 통해 신분이 상승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
1945년에서 1960년까지 학생 수는 3배로 증가했고, 문맹퇴치 5개년 사업을 통해 비문해율은 1945년 78%에서 1958년 4.1%까지 떨어지게 된다. 그와 함께 초등~중등 교육과정 중에는 자유 민주주의의 정신과 이상에 대한 교육이 반복적이고도 일관성 있게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이승만 정부의 원래 의도는 전혀 다른 것이었겠지만.
게다가 대학교에 진학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매우 강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많은 대학생들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오늘날에 비하면 결코 많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1945년 대학생 수는 7,819명이었는데 1960년에는 97,819명으로 대학생만 무려 9만 명이 늘었다. 통계청 기록에 의하면 대학 재학생 수는 69,961명. 이는 한국과 국민소득이 비슷한 다른 제3세계 국가에 비해 엄청나게 높은 비율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대학생의 수가 늘어난 것은 다름아닌 이승만의 교육정책 떄문이었다. 당시 1공의 최우선 목표 중 하나가 문맹을 퇴치하고 교육제도를 개선하며 학생 엘리트를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6.25 전쟁 이후 수많은 탈북민들이 남한에 정착하고 인구 구조가 새롭게 재편되면서 열 개 남짓의 도시들이 수 배의 급격한 인구 성장을 보였다. 총인구 대 도시인구 비율은 1949년에 17.2%였는데 1960년에는 28%로 늘었다.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교육받고 계몽되고 깨어있는 국민들이 도시를 중심으로 집중되면서 일종의 상승 효과가 나타났기 때문. 이들은 밤을 새워가며 시국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하고 개탄하였다.
당시의 교육 수준과 관련하여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1955년 전국 대학교 중 85개 대학교의 소재는 도시 내에 있거나 적어도 근교에 위치해 있었으며 특히 서울 소재 대학교만 29개에 달했다. 이러다 보니 1960년 기준으로 전국에 있는 대학생들 두 명 중 한 명은 서울에서 사는 대학생이었다.
게다가 앞서도 말했듯이 당시 언론사들은 매우 활발하고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정작 이를 읽을 만한 식자층이 없었더라면 언론인들의 목소리는 곧 잊혀졌을 것이다. 그러나 1961년 <한국신문연감> 통계자료에 의하면 전국의 일간지 보급률은 100명당 2.96부에 그쳤으나 서울의 일간지 보급률은 100명당 무려 25.5부에 달했다! 참고로 당시 유네스코에서 정한 근대화 기준 보급률이 100명당 10부였다.
문제는 이렇게 대학교를 졸업한 훌륭한 인재들이 일할 만한 일자리가 없었다는 것. 그래서 "대학교는 예비 실업자 양성소인가" 라는 자조적인 조롱이 유행하기도 했으며 실업률은 2명에 1명 꼴인 50%에 달했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찾을 수가 없었던 분위기였다. 거기다 그 무렵 들어 미국도 점차 경제 원조를 삭감하고 있던 추세였다. 그래서 사회 전반, 전 세대에서 이승만 정부에 대한 지지를 조금씩 철회하고 있던 중이었다.
다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이 당시엔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이미 사회에서 '배운 사람' 축에 속했고, 이런 '배운 사람'은 (유교적 전통에 입각해서) 사회문제에 적극 뛰어들고 비판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유교적 전통에서는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사회를 이끌어야 하는 책임 역시 크다. 이 시대의 실업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들은 '배운 사람'으로서 사회에 뛰어들지 않거나 제대로 된 사람 구실을 못할 때 주어지는 비판으로, 오늘날의 청년실업 문제와는 사회적으로 주어지는 비판의 형태가 본질적으로 다르던 시대임을 염두에 둬야 한다. 실업 문제를 이 자리에서 언급하는 것은 상당히 2000년대적 사고방식으로, 이런 '대학생이라면'이라는 태도는 20세기를 통틀어 대학가에 오랫동안 있어왔다.
종합해보면 국민들의 민주주의 의식 고취는 거의 필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코흘리개 어린 시절부터 아득바득 학교에 갔더니 민주주의라는 것을 지겹도록 가르친다. 게다가 인구의 적지 않은 수가 의외로 가방끈이 길다. 언론 활동도 활발한 데다 장기간의 검열과 탄압으로 악에 받쳐있는 언론인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민주주의 의식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쓴 사설을 독자들이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다. 주위에는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전국 팔도 각 도시마다 집중되어있으니 조직적 시위를 도모하기도 쉽다. 게다가 이런 인재들이 일을 하지 못하고 놀고 있으니 "하아. 이것 참 나라꼴이 수상하다!"라는 여론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4.19 혁명은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촉발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59년 6월 29일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는 뜻밖에도 정부통령 후보지명대회가 되었다. 진행 도중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유시'가 있자, 돌연히 정회한 뒤 전당대회를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로 바꾸었다. 통상 5월에 선거가 치러지므로, 무려 10개월 또는 11개월 전에 후보를 지명한 것이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선거 실시 두 달 전에, 1952년에는 발췌개헌이 늦어서 17일 전에 후보를 정했었다. 또 다른 나라의 예를 보거나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예를 보더라도 이 같은 후보 지명은 너무나 조기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승만이 조기에 후보를 정하도록 한 것은 장관이나 자유당이 일찍부터 선거운동에 돌입하여 총력전을 펴라는 지시와 다름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최인규는 그해 11월부터 거의 매일 같이 경찰 간부와 군수, 시장, 구청장 등 공무원들을 안배해 불러서 만반의 대책을 세우도록 독려했다.
7월 31일, 이승만의 최대 라이벌 조봉암이 진보당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상고심을 맡았던 대법원의 그 재판부에서 7월 30일 재심을 기각하여 변호인들이 다시 재심을 청구하려 했는데, 그 다음날 바로 처형된 것이었다.
이로써 이승만과 대통령 당선을 두고 경쟁할 사람은 이승만에 맞서 싸울 투지가 별로 없었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밖에 남지 않았다.
자유당 전당대회에서의 후보지명보다 더 놀라운 사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이승만은 12월 11일 '반드시 농번기를 피해 조기선거를 해야 한다'고 피력한 이후 계속 그 주장을 했고, 다음 해 1월 27일에는 '농번기 전의 선거가 자신의 수 년 동안 지론'이라고 못 박듯이 말했다. 당시는 하지(양력 6월 21, 22일 경) 무렵에 모내기를 많이 했으므로 5월 초는 농번기가 아니었다.
발췌개헌으로 변칙적으로 치러진 1952년의 정부통령선거를 제외하면, 1948년 5.10 선거, 1950년 5.30 선거, 1954년 5.20 선거, 1956년 5.15 선거, 1958년 5.2 선거 등 정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가 모두 5월에 치러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또 5.2 선거 때까지 이승만은 '농번기 때문에 안 된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돌연히 농번기를 피해 조기선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조기선거 실시에 대한 이승만의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된다. 하나는 조병옥의 건강에 관련된 문제였다. 조병옥이 중병을 앓고 있음은 1960년 1월 중순에 보도되었다.# 조병옥은 1월 29일 '조기선거는 등 뒤에다가 총을 쏘는 격'이라고 반대하면서 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야당과 언론은 하소연도 하고 비열한 짓이라고 비난도 퍼부었지만, 그러한 반대에도 아랑곳 없이 정부는 2월 3일에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를 실시한다고 공표했다. 조병옥은 이후 2월 15일 미육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언론과 야당에서 조기선거를 반대한 이유는 또 있었다. 대통령 취임이 8월 15일이어서, 만일 3월 15일에 야당 후보가 당선된다면 그간의 이승만 정권 행태로 미루어 볼 때 5개월 동안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는 보장이 있겠냐는 것이었다.
정부통령후보 등록 마감일인 2월 13일, 이승만은 국민을 상대로 무서운 발언을 했다. "1956년 선거에서처럼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가 서로 다른 당에서 나오면,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응종치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가 다른 선거보다도 1960년에 치러질 정부통령선거에 더욱 큰 관심을 보이고 총기획자로서 역할을 한 것은 1956년의 정부통령선거 때문이었다. 8.5 정부통령선거가 치러진 1952년의 전시체제 상황도 아니고 1954년 5.20 총선이 치러진 준전시체제 상황도 아니어서, 유권자들이 조심스럽게라도 자신의 의사를 표출했던 1956년 선거에서 이승만은 자존심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유효표 721만여 표 중 이승만이 504만여 표, 조봉암이 216만여 표로 발표되었는데, 대부분이 신익희의 추모표인 무효표 185만여 표를 감안하면 이승만은 전체 투표자의 과반수를 약간 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항상 '민의를 따르겠다'면서 국민의 절대 다수가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고 과시했던 이승만으로서는 상당히 치욕적인 득표수였다. 더구나 부정 투, 개표가 적은 서울의 경우 이승만은 20만여 표밖에 얻지 못했고, 무효표가 28만여 표였다(조봉암은 11만여 표). 죽은 신익희보다 표가 훨씬 적게 나온 것이다. 사실 자유당은 서울 시민들에게 미움의 대상 그 자체였고, 선거 때마다 시민들로부터 심한 야유를 받았기 때문에 서울에서 선거운동을 할 수 없었다.
헌법 위에 군림해 헌법을 유린하는 발언을 또다시 공공연히 한 것이지만, 그의 담화는 단순히 국민을 협박한 것만이 아니었다. 이는 최인규나 자유당 간부들에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붕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지시로 들릴 수 있었다. 최인규는 나중에 법정에서 2.13 담화가 자신에게 큰 압박을 가해왔음을 고백했다.
시위의 시작은 2월 28일 대구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인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장면 유세일이 일요일이었는데 당국에서는 학생들이 유세장에 갈 수 없게끔 '영화 관람' 이나 '추가시험' 등의 명목으로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강제로 등교하도록 지시했던 것. 이에 반발한 경북고 학생들이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 고 가두시위를 벌였고 이에 호응한 대구지역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은 27일 시위를 벌였다.
구체적으로는 대구고, 경북고, 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 등 8개 학교 총 1,200여 명.
다음날인 28일, 당시 경북고 3학년인 학생회장 이대우는 "부정에 항의하고 신성한 권리를 지키는 것" 을 요지로 하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같은 경북고 3학년의 중퇴생이던 하청일이 초안을 작성한 결의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당국에서는 이를 공산당 사주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 일축하면서 학생의 시위를 경찰을 동원해 강제 해산시켰다. 당시 이강학 치안국장은 "학생들이 북한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허나 이런 그들의 주장과 무관하게 2.28 학생민주의거는 역사적인 4.19 혁명의 첫 도화선을 당기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선봉에 대구시가 있었다는 점과 종래의 동원형 강제 궐기대회가 아닌 한국 역사상 최초의 자발적 학생 반정부 시위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참고로 오늘날 대구에는 이 의거를 기념하는 시설물들이 존재한다. 2.28 기념탑이 경북고와 두류공원, 그리고 경북대사대부고에 있으며 대구의 번화가 동성로 근처에는 2.28기념중앙공원이 있다. 그리고 명덕역 근처에는 2.28 민주운동기념회관이 있다.
다시 돌아와 이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확산되어 수많은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관제시위를 통해 맞불 작전에 돌입하였으며 "학생들은 자중하라, 학원으로 돌아가라"란 구호를 외치게 했다. 이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관치행정이 민주주의냐, 썩은 정치 갈아보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어떤 이들은 "대학생들은 어디 있는가? 왜 침묵하는가?" 라며 우회적으로 참여를 호소하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의 수는 다음과 같다.
서울 1,000여명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균명고, 강문고, 중동고, 대동상고, 배재고, 수송고, 선린상고, 경기고, 보인고, 조양고, 중앙고, 대신고, 경동고 등
부산 7,800여명 "우리가 민주제단을 지키자"
동래고, 부산상고, 동성고, 혜화여고, 데레사여고, 항도고, 영남상고, 북부산고 등
기타 경기도 해동고 130여명, 대전시 대전고 1,000여명, 대전상고 300여명, 충청도 충주고 500여명, 청주고 100여명, 강원도 원주농고 100여명, 경상도 포항고 200여명 등
3월 15일,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일어났다. 이른바 3.15 부정선거. 전국적으로 부정선거가 적발되고 광주등 일부 도시에서는 투표권을 우롱당한 시민과 학생들이 시위를 하기도했다. 한편 3월 15일 마산의 경우 아침에 장군동 제1투표소에서 민주당 참관인과 자유당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참관인이 투표함을 엎어버리자 그 투표함에서 부정선거가 적발되었다. 투표함을 엎어버린 참관인 안맹선과 그의 남편이자 민주당 도의원 정남규는 사전투표를 발견했으나 곧 경찰서에 끌려가버린다.
당시 자유당에서 펼친 부정선거공작들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야당 참관인 쫓아내기 : 시계를 조작하거나 핑계를 대어 자유당 쪽 참관인이 야당 측 참관인을 몰아내고 그 사이에서 투표를 조작했다. 만약 말을 안들을 경우 납치, 폭행으로 대응했다.
3인조, 5인조 투표 : 선거에 익숙하지 않은 국민들을 지도한다며 3~5인씩 1조로 투표하게 한 것. 이 3인조는 모의투표까지 실시했었는데 일찍이 도시화가 진행되어 정치색이 짙은 마산 시민 입장에선 코웃음도 안 나오는 일이었다.
올빼미표 : 어둠을 틈타 개표통을 바꿔치기하는 수법.
피아노표 : 당장 개표장에서 일어난 부정행위 수법으로 부정개표가 얼마나 지능적(?)으로 되었는지 보여주는 사례. 이승만을 찍지 않은 표를 미리 매수된 개표원이 책상 아래에 떨군척 하며 책상 아래로 들어가 양 손가락에 지장을 듬뿍 찍은 채 피아노 건반을 누르듯 사정없이 찍은 것. 이로 인해 무효표를 만들 심산이었다.
이 외에도 사람들에게 음식이나 물건을 대대적으로 뿌리거나 어깨들을 동원해 협박하는 일 등도 당연히 있었다.
경찰서로 끌려간 정남규는 도의원 신분이라서 곧 풀려났는데, 그는 곧장 오동동 마산시당부로 가서 민주당원들과 논의한끝에 아침 10시 30분 독자적으로 선거포기를 선언하고 참관인들을 철수시킨다. 이후 방송을 통해 부정선거무효를 주장하고 오후 3시 30분부터 민주당원들이 모여 시위에 시작한다. 민주당원들은 가두시위를 벌이며 시위대를 모았고 오동동 마산시당부에 1,500여명의 시위대가 모였는데 이때 경찰들이 들이닥쳐 민주당원들을 연행하고 시위대들에게 해산할것을 요구하나 시민들에게 욕만 대차게 먹고 자리를 떠난다. 그후 남은 시위대들이 독자적으로 시위에 돌입하자 경찰과 반공청년단들이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시위대들은 저녁에 개표가 시작되는 시청으로 모이자고 서로 약속하고 해산하게 된다.
이 소식이 시내에 퍼지자 마산 시민들은 저녁 즈음 옛 마산시청 앞에 모이기 시작했고 시위 인원은 만여 명을 넘을 정도로 불어났다. (일부는 남성동파출소로 모였다.) 일몰 후 시위대와 경찰과 대치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던 중 시위진압을 위해 출동한 소방차가 무학초등학교앞 전신주를 들이받아서 전기 공급이 끊어졌다. 이로 인해 정전이 되고 신마산 일대가 깜깜해졌다. 경찰은 때를 놓치지 않고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같은 시각 남성동파출소에서도 발포로 한명이 사망했고 시청 앞 발포 이후 시위대들은 자정이 다될때까지 관공서, 경찰서, 자유당사등을 습격하며 저항했다.
제1차 마산의거로 총 8명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에 마산 시민들은 물론 전 국민이 충격에 빠졌다.
이 사건에 대해 후에 국회조사단이 이승만과 이기에게 경찰의 강경 대응에 대해 따졌는데 이승만은 공산당 사주로 벌어진 시위라고 보고받은 것을 그대로 발표했다. 심지어 최인규 내무장관 주도로 도립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마산고 1학년 C반 반장 김용실의 주머니 안에 '인민공화국' 운운하는 날조된 삐라까지 집어넣는 등 공산당의 배후조종으로 모는 공작을 펼쳤다.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은 "총은 쏘라고 줬지 갖고 놀라고 준 게 아니다" 라는 희대의 병크를 터뜨렸다. 가뜩이나 정부 수립이래 최초의 "평화적 시위대를 향한 대민발포" 사례인지라 그 파장은 컸다.
15일의 발포 사건은 이미 중앙 언론과 외신의 주목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당국에서는 여야합동 국회조사단을 파견, 치안국장의 사임 및 최인규 내무부장관의 교체로 사건을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홍진기 법무장관을 내무장관으로 자리만 옮기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인사조치였다. 게다가 홍진기 신임 내무장관은 공산당 사주설을 주장하면서 경찰의 실탄 발포를 지시하고 이후 강경 진압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마산 의거가 벌어진 뒤 여론은 계속 험악해져 갔다. 이에 몇몇 자유당 인사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어차피 우세한 선거였는데 너무 오버했다" 라며 지도부를 비난하였다. 또한 이승만, 이기붕에 의해 모든 당론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 의해 국회의원들이 거수기로 전락했다라며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모여 혁신 위원회를 조직하며 집단반발할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이승만이 직접 호통을 치자 이들은 기가 죽었다. 이에 이들은 이기붕과 면담을 갖고 이기붕이 당을 위해 애쓴다며 치하한 뒤 선처할 것을 약속하자 이에 만족하여 해산한다. 이에 동아일보 기자가 "앞으로 어떻게 활동할 것입니까?" 라고 묻자 이들은 '이기붕 의장이 선처를 약속하셨으니 앞으로 더 이상 혁신에 대해 거론 않겠다' 라고 답하였고 이를 동아일보측에선 이승만의 호통 한 번에 잠잠해졌으니 논에 우는 개구리한테 돌 던지자 순신간에 잠잠해진 격이라며 비꼬았다.
민주당은 3.15 선거 무효선언을 한 뒤 당 내 방침을 두고 신파와 구파가 내분을 일으켜 계속 지리한 회의를 거듭하였다. 구파는 국회 총사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신파는 원 내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이 논쟁으로 인해 3월이 다가도록 2주 동안에 걸쳐 대응방침조차 결정하지 못하였고 마침내 신파가 이겨 원 내에서 투쟁하기로 결정했을 땐 이미 자유당 측에서 마산 경찰들 체포와 내무장관 경질 등의 조치를 끝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자유당측은 공산당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여러 희생양을 찾으려고 했었고 때문에 민주당의 정남규 도의원을 남로당에 가입한 공산당원으로 총지휘하였다라고 혐의를 씌운다. 정남규 도의원은 당시 유치장에 갇혀있었는데 기자가 경찰의 혐의가 사실이냐고 물어보자 노발대발하며 "뭐요? 날더러 빨갱이라고? 그러면 어째서 나를 시의원으로 놔두고 도의원으로 당선되게 놔두었단 말이요?" 라며 반박한다.
그리고 22살 먹은 청년을 체포해 그가 경찰서를 방화하였다고 하고 그가 6.25 때 공산당 측에 부역한 자라고 하였는데 6.25 때는 그의 나이가 12세였으므로 말이 되지 않았고 이에 대해 민주당 측과 언론의 거센 비판을 받는다. 그러자 경찰측에선 32세라고 나이를 조작해서 발표하는 해프닝을 벌인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 청년은 그냥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체포되었으며 그의 신원조회를 하는 중 자동차 정비 면허증이 발견되었으며 이를 본 순경은 자동차=휘발유=방화라는 공식이 머리속에 떠올라 그에게 방화 혐의를 뒤집어 씌운 것이었다.
한편 3.15를 지휘하였으며 이 책임으로 물러난 최인규 전 내무장관의 후임으로 임명된 전 법무장관 홍진기 내무장관은 "경찰의 구속, 마산 시위대의 선처 등의 대략적인 조치를 한 뒤 모든 조치를 마쳤다" 라고 밝힌다. 이러한 눈 가리고 아웅식의 조치에 여론은 더더욱 악화되고 말았다.
이때 민주당은 간신히 내부 의견을 통합하고 서울 시내에서 집회를 열겠다고 하자 서울시장은 부정선거는 서울시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서울 어디에서도 집회를 열 수 없다라고 통보한다.
그러자 민주당 측은 이를 무시한 채 4월 6일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이 시위가 엄청난 시민의 호응을 받아 인파가 상당한 규모로 불어난다. 이 시위의 결과로 자신감을 얻은 민주당 측은 지부를 통해 각 지역에 시위를 벌일 것을 계획한다.
하지만 서울시에서의 시위에 놀란 정부측은 등교중지령을 선포하는 등 시위를 철통 같이 감시토록 하였고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에워쌌다. 부산에서 4월 8일 민주당의 지부에서 시위를 벌였으나 이러한 자유당 측의 감시에 의해 시위대는 소극적으로 가두행진을 벌인 뒤 해산하게 된다.
김주열 열사(1943.10.7 ~ 1960.3.15)
한편 3.15 마산의거 이후 마산 시내 분위기는 계속 을씨년스러웠다. 멀리 전라북도 남원에서부터 마산상고(現 마산용마고등학교) 입학시험 결과를 확인하러 왔던 상고생 김주열 군이 행방불명된 상태였기 때문. 3월 15일 이후로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어머니인 권찬주는 한 달 가까이 마산 거리를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연히 시민들의 입에는 김주열이란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었고 관심도 집중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당시 마산시청 뒤에 있었던 저수지의 물을 몽땅 퍼내고 시신 수색을 했을 정도.
그리고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신포동 부둣가(현 마산합포구 중앙동 대한통운 앞(다음 로드뷰))에 떠올랐다. 김주열은 3월 15일 형 김광렬과 함께 저녁시위에 참여했고 시청앞 발포 이후 경찰이 시신을 거두어들이던중 오후 10시경 자산동 옛 한전 앞에서 최루탄을 맞고 죽은 상태로 발견됬다. 당시 김주열의 시신을 발견한 경찰은 손석래 서장에서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지 물었고 알아서 처리해라는 손서장의 명령을 듣고 한 사업가의 운전기사를 시켜 마산세무서에서 마산항으로 옮겨 바다에 버리게 했다.
경찰 당국은 김주열의 시신을 도립병원(현 경상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마산의료원)으로 다시 옮기고 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나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 시내로 퍼졌다. 이에 흥분한 3천여 명의 시민들이 경찰의 저지를 뚫고 병원 안으로 밀려들어가 김주열의 사망을 확인했다. 김주열의 시신은 최루탄이 왼쪽 눈을 관통한 상태였다.
어머니 권찬주는 충격을 받아 시신의 인수를 거부했다. 여담이지만 이후 먼 훗날 이와 거의 유사한 또 다른 비극이 일어나게 된다.
시신의 참혹한 몰골을 본 시민들은 당연히 분노했고 학생들이 제일 먼저 대열을 이루어 "살인선거 물리치자" 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먼저 마산상고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와 불종거리를 거쳐 시청 쪽으로 향하며 마산고 학생들과 합류했다. 1차 마산의거에서 총상으로 사망한 김용실 군이 마고생(1-C반 급장)이었고 김주열은 상고생이었기 때문.
이때 학생들 중 일부가 마산여고와 성지여고로 올라가서 시위에 참여하라고 악다구니를 쳤다고 한다. 처음에는 여고생들이 시위에 합류할 수가 없었는데 이유는 교사들이 신발을 전부 감춰버렸기 때문. 결국에는 안전을 이유로 교장이 직접 학생들을 인솔하고 나오는 풍경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장면이 사진 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되었고 전국판 신문에 실리며 타 지역의 시위 열기에 다시 불을 붙였다.
이때 중년 여성들까지 시위에 참여했다. 이들은 "죽은 자식 살려내라!", "차라리 우리도 죽여달라!" 고 절규하며 시위대의 행진에 함께하였다. 또한 특이한 점으로서 해인대학교 학생 5,000~6,000명,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도 시위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 정도면 시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시민들은 학생들을 향해 박수를 보냈고 시위 대열에도 합류했다. 이윽고 성난 2만여 명의 시민들이 마산 경찰서와 시청에 난입하였으며 많은 관공서 건물과 차량들이 대파된다. 그날 밤 경찰은 또 발포를 했고 두 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하지만 이는 마산 시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고 마산 시민들은 3일간 거리로 쏟아져나와 시위를 벌였으며 마산의 행정은 온통 마비되었다. 정부에서는 2차 마산 시위를 공산당이 사주한 것이라고 몰아붙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날 난동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특별담화를 발표, 15일에도 공산당 선전 때문에 마산 "폭동" 이 일어났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소위 "대공 3부 합동수사위원회" 를 구성, "적색분자들의 준동 혐의에 대해 과학적으로 수사하겠다" 고 하는 한편 "이번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 이라고도 하였다.
1960년 4월 11일 밤 분노한 시위대는 마산경찰서를 습격하여 수류탄을 탈취하고 경찰서장실 앞에서 터뜨렸다. 시위대의 숫자가 굉장히 많고 기세가 세다보니 경찰도 어찌 못할 정도였다.
이 즈음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의 수는 다음과 같다.
마산고, 마산상고, 청주공고, 청주상고, 청주고, 동래고, 총합 3,000여명.
4월 19일 화요일,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그날의 시위는 서울, 대구, 부산, 마산, 전주, 청주, 대전, 제주 등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그동안 미적하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서울의 경우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문을 나서자 여러 단과대생들이 합세하였고 서울 시내 대부분의 대학교, 이어 고등학교, 중학교 학생들까지 대대적으로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여담이지만 문리대 학생회가 당초 계획하던 의거일은 4월 21일이었다고. 이들은 정부의 반공 프로파간다를 의식했는지 "데모가 이적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즉 자기들은 결코 용공이 아니라는 구호다.
원래 문리대 학생회 등 대학생들이 계획했던 의거일은 4월 21일이었고 서울의 고등학교 학생들의 의거일이 4월 19일이었다. 그 이야기를 먼저 안 고대생들이 고등학생들에게 뒤쳐질 수 없다며 4월 18일날 먼저 시위를 했고 고려대생 피습 사건이 일어났으며 4월 19일 오전 8시 30분 서울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제일 먼저 가두시위를 시작하였고 부랴부랴 그 소식을 듣고 서울대 문리대생이 그 시위에 합류하였다.
이 날 정부에서는 귀가조치를 단행했으나 이미 10만명 이상의 학생들과 시민이 몰려나왔고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를 가득 메울 정도가 되었다. 학생들은 각기 세 방향으로 나뉘어 국회의사당이 있던 태평로를 점거하고 면담을 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승만이 있던 경무대와 이기붕의 자택 쪽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경찰은 중앙청 앞에서 저지선을 형성, 공포탄과 최루탄을 발포하며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오후 1시 30분경, 경찰이 곽영주의 지휘하에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기 시작했고 선두에 있던 여러 명이 쓰러졌다. 이때 발포로 인해 총합 21명 사망, 172명 부상. 특히 하단에 다시 서술하겠지만 경무대 앞에서의 소위 "죽음의 행진" 에서 피해가 워낙 컸다.
이날 서울에서의 총 사망자 수는 104명으로 이 중에 경찰측 사망자도 3명이 포함되어 있다. 기타 지역의 경우는 부산의 경우 사망 13명 부상 60명. 광주는 사망 6명(경찰 1명 포함) 부상 70명. 그 외의 지역에서는 경찰의 발포가 없어 사상자가 없었다.
데모를 나간 당시 한 여중생의 편지. 이 편지는 한성여중 2학년이었던 진영숙이 시위를 떠나기 전 홀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집에 남긴 쪽지였다.
4.19를 주도한 것은 학생들의 힘이었다. 서울시내 소재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뛰쳐나왔고 청년들의 의기는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던 것이다. 원인 중 하나지만 시초는 고등학생이다.
이것은 실제 4.19 혁명 유공자로 건국 포장(4.19 혁명 유공자는 건국포장을 일괄적으로 수여받음)을 받으신 분의 회고다.
3.15 부정선거 후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른 후 가장 분개한 사람들은 실제 같은 나이 또래인 고등학생이였다. 실제 각 학교 대표들은 미리 비밀스럽게 모여서 4월 19일날 전후로 지역적으로 각각 대대적인 데모를 계획하였었고 이 계획을 들은 고려대학생들이 어찌 고등학생들이 나서는데 우리가 잠자코 있을 수 있느냐며 4월 18일날 먼저 시위를 하였고, 하지만 서울시내 대학연합에서 4월 19일에 대대적으로 시위하기로 결정난 것을 먼저 튀어보이기 위해 핑계를 대면서 정작 사망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그 훈장을 포기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그로인해 고려대 피습사건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 고등학생이었고 그 후에 국민 전체가 들고 일어서면서 대표면담 등 협상은 어른들에게 맡기는 분위기였으며 그러다보니 언론에서 묻히며 지금은 잘 알려지지 않게 된 것 뿐이다. 그러다보니 아래의 글이 적히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생들이 주도하였다고 하였지만 대학생들이 주도한 곳은 서울의 시위였고 그 당시 지방에는 각 시도에 한두 개의 대학과 대학생들의 인원도 작았다. 실제 주도적으로 앞장선 이들은 대부분이 그 지방의 고등학생들이 앞장섰고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동참하는 형태였다.
예를 들어 충북지방에서는 충주고를 시작으로 시위를 시작했고 참여한 학교는 청주고, 청주상고, 청주공고, 청주농고 등이였다. 실제 4.19 혁명 며칠 전 각 고등학교에서 그 학교들을 대표할 만한 사람들이 모여 거사일을 정하여 지금의 청주시내 도청 앞에 모여 시위를 하였고 경찰들의 곤봉에 수많은 학생들이 다쳤다. 자료는 그당시 충청일보 신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4.19 당일 맨 먼저 시위에 참가한 것은 의외로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들이었다. 신설동 로터리에 있는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오전 8시 30분경 로터리를 점거한 후 동대문 쪽으로 쪽으로 행진을 시작했고, 혜화동의 동성고등학교 학생들 또한 합류하였다. 그리고 거의 때를 같이하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들이 종로로 진출했다. 이어 9시경에는 법대와 약대, 수의대, 치의대 등 동숭, 연건 캠퍼스의 거의 모든 단과대학이 합류했고 사범대 및 비교적 멀리 있던 상과대학생들은 9시 30분경에 합류했다.
특히 다소 늦게 합류한 의대생들은 흰 의사 가운을 입고 시위에 참여했는데 의대생답다면 의대생다운 자기들만의 독특한 구호를 썼다. 예를 들자면 "학우들이여, 메스를 들어라! 썩은 정치 수술하자!" 이런 구호들.
10시경에는 전날 시위를 벌였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다시 시위대에 합류했고 이어 건국대학교, 동국대학교,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이 각각 수천 명 단위로 몰려나왔다. 그리고 정오가 되자 연세대학교와 중앙대학교 학생들까지 가세하여 학생시위대는 순식간에 10만 명까지 불어나 서울 도심을 가득 메웠다.
다음은 시위에 참여한 대학교들의 이름과 참여 숫자를 시위에 참여한 순서대로 정리한 것이다.
서울대 3,000여명, 고려대 4,000여명, 건국대 2,000여명, 동국대 2,000여명, 성균관대 3,000여명, 연세대 3,000여명, 중앙대 4,000여명, 홍익대, 경기대, 한국외대, 단국대, 국학대, 국민대, 서라벌예술대, 숙명여대, 이화여대 등.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태평로의 국회의사당 앞을 선점했을 때 동국대학교 학생들은 효자동 쪽으로 진출했다. 시위를 주도했던 김칠봉(당시 법대 '58)은 "이승만과 면담하러 가자!" 고 외쳤고 이 소리를 들은 학생들은 경무대(현 청와대 위치보다는 약간 뒤쪽)로 향하기 시작했다. 중앙청 앞에서 경찰과 부딪친 시위대는 이에 맞서서 큰 수도관을 굴리며 행진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최루탄을 도로 주워 경찰들에게 던지며 전진했다.
당시 동국대는 서울대보다 경무대에 가까웠고 서울대생이 동국대로 올때쯤엔 이미 바리케이트를 뚫기 시작했다. 이러한 바리게이트를 뚫을때 동국대생은 당시 효자동 근처에서 공사중이었던 대형 수도관 2개를 앞에 굴리며 전진했다.
이에 경찰은 해산을 위해 최루탄을 쐈고 이 최루탄에 항거하기 위해 학생들은 두건으로 눈을 가리고 전진했다. 이것이 유혈사태의 시작이 될거라곤 모른채로 말이다.
대치 상황에서 선봉을 맡은 법대와 농대 학생들 중 일부가 3차 저지선으로 형성해 둔 소방차(혹은 전차(電車)) 위에 기어올라갔고 저지선을 뚫은 시위대 중 일부는 최종목표인 경무대를 향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시위대의 선두로부터 경무대까지는 100여미터를 목전에 둔 상황. 나머지 대열은 중앙청 옆길에서 경찰과 여전히 엉켜있었다.
마침내 오후 1시 30분경(40분이라는 얘기도 있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가했고 총격을 맞고 노희두 열사(법대 '59)와 박흥규, 이종학(농학 '59) 등 여러 명이 즉사하거나 부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이러한 조준사격은 경고사격에서 최루탄으로 눈을가린 몇몇 학생들이 전방을 보지 못해 당하게 된것이다. 시위대가 앞으로 와도 경고사격의 조준점을 낮춰야했던 경찰들은 그러한 행위를 하지않았고 결국 이렇게 몇명의 학생들은 즉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당시 조준사격은 일반 소총이 아닌 기관총을 쏜것이다.조준 사격에 분노할 대로 분노한 법대 학생들은 서소문을 지나 서대문 로터리로 몰려가서 적십자병원 옆 이기붕 국회의장 자택을 점거해버린 후 한달음에 서쪽 끝인 서대문에서 동쪽 끝인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역사문화공원)까지 시위를 벌이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한참 지나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해산했다.
"희두가 4.19 혁명 당일의 최초 희생자였다" 라고 김칠봉 열사는 증언하였고 이 노희두 열사의 경우는 불행히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법정대학의 후신인 동국대학교 법과대학은 이를 기리는 의미에서 현재에도 '선봉법대' 의 칭호를 유지하고 있으며 매년 4월 중순에는 단과대 로비에 분향소를 마련해 추모하고 있다. 또한 동국대 전체적으로는 만해광장 한 켠에 '동우탑' 을 건립하여 기리고 있으며 매년 수유리 4.19 민주묘역에서 북한산을 오르는 '4.19 등반대회' 를 개최하고 있다.
이후 4.19 혁명 50주년을 맞이하여 정부에서 수여한 4.19 혁명 공로훈장 건국포장 239개 중에서는 35개가 동국대학교에 추서 혹은 서훈되었다.
사태가 워낙 심각해지자 정부는 19일 당일 오후 3시 서울지역 일대에 긴급히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런데 이때 총격사망 문제를 덮기 위해 1시로 소급하여 적용하였다.
계엄령은 서울, 수원, 목포, 대전, 대구, 전주, 충주,부산 일대에 선포되었다. 이로써 시위는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그런데 계엄군은 경찰과는 대조적으로 중립을 지켰고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시위가 있어도 발포를 하지 않았으며 시위대와 협상을 하기도 하는 등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서울에 계엄군이 진주하자 어느 노신사가 계엄군에게 "우리를 죽이려고 왔는가? 죽이고 싶다면 얼른 죽여라!"라고 울부짖었고 이에 지휘관이었던 젊은 장교가 당황하여 경상도 사투리로 같은 대한민국 사람들끼리 어떻게 죽일 수 있겠는가 라고 대답하자 시위대가 군대가 시민의 편이라고 환호하고 군인들과 얼싸안고 눈물을 흘린 사건도 있었다 한다. 이들 계엄군이 경찰들처럼 강경하게 시위대를 진압하지 않은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로 군부 내에서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승만이 경찰 세력을 비호하는 한편 독재 연장에 공헌을 한 적 있는 군부에게 보상을 제대로 내려주지 않았다는 점. 당시의 경찰은 내무치안 조직이라기보다는 공비 토벌 등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으면서 사실상 준군사조직에 가까웠으며, 국내의 '무력 조직'으로서 경찰과 군의 라이벌 의식은 상당히 강했다.
유력한 부통령 후보였던 국방부 장관 이범석을 부통령 후보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일을 저지른 적이 있다는 점.
당시 서울지역 계엄을 담당했던 부대는 15사단 조재미 준장으로 자체적으로 이하와 같은 세 가지의 원칙을 엄정히 지킬 것을 각급 부대에 지시한 바 있다.
상관의 허가 없이 시위대에 무단으로 발포하는 것을 금지한다.
민가 건물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금지한다.
민간인들에게 음식 등을 제공받는 것을 금지한다.
저녁이 깊어가면서 시위대는 점차 진압되어가기 시작했다. 잔혹한 유혈진압을 서슴지 않는 경찰과 탱크를 앞세우고 압박해 오는 계엄군 앞에 시위대는 쫓기고 쫓기기를 거듭했다. 일부 시위대는 차량을 닥치는 대로 징발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완강하던 시위대도 맨 주먹으로는 더 이상 일제 사격 앞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무렵부터 급격히 세력이 약화되면서 도심지에서 점점 밀려났다. 한편 일부 시위대는 눈에 띄는 차량들을 닥치는 대로 징발, 차에 올라타고 경찰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한 채 길을 누볐다. 오후 6시 40분경, 소방차와 트럭 등에 분승한 시위대가 동대문경찰서 앞을 지날 때 경찰서 안에서 발포, 다시 1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기동화한 시위대는 밤 8시 경, 40여 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연도의 파출소를 모조리 불질렀으며 파출소에서 탈취한 카빈 소총 27정으로 무장, 한때는 경찰과 총격전까지 벌였다. 시위대 일부는 20여대의 차량에 분승, 미아리 쪽으로 퇴각하여 의정부무기고를 찾아 창동까지 밀려갔다. 이들은 창동지서 경찰들과 한때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정무렵 급거 출동한 계엄군과 경기도경이 협공할 기세를 보이자 다시 시내로 되돌아와 고려대 뒷산 쪽으로 몰렸다.
시위대는 결국 고려대학교 교정에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바로 이때의 에피소드가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극적인 사건이다. 궁지에 물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이대로 곧장 밀고 들어갔다가는 양쪽 모두 최악의 참사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 자명한 일. 이때 놀랍게도 사단장 조재미 준장은 단 두 명의 부관만을 대동하고 캠퍼스에 진입했고 학교 강당으로 들어가서 즐비하게 놓인 수많은 희생자들의 태극기로 덮인 시신들 앞에서 정중하고 깍듯한 태도로 조의를 표했다. 당혹감과 착잡함이 교차하는 심경으로 이를 지켜보던 시위대들은 결국 그 자리에서 전원이 무기를 버리고 해산, 계엄군에 연행됨으로써 무혈 진압에 성공했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이제는 감을 좀 잡아도 좋으련만 이승만은 여전히 착각 속에 빠져있었다. 다음은 4월 20일자 대국민 담화의 내용 중 일부다.
"어제의 난동으로 본인과 정부 각료들은 심대한 충격을 받았다. 전 생애를 바쳐 온 애국적인 한국민이 그러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고는 거의 믿지 못할 일이다..."
그동안 미국은 1, 2차 마산 항쟁에 유감의 뜻을 표했을 뿐이었지만 4월 19일의 사태에 대해서는 월터 패트릭 매카나기(Walter Patrick McConaughy) 주한미국대사가 경무대를 방문해 정당한 불만의 해결을 희망한다고 요청했으며 대사관으로 돌아오는 즉시 학생들의 행동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미 국무부장관이 주미 한국대사에게 항의각서를 보내기에 이르렀다.
다음은 미국 국무부 기자회견 내용 중 일부이다. 세세한 토씨의 경우 다소 다를 수 있다.
"국무부는 금일 오후에 한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국민의 불안과 폭력행위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중략) ...미국 정부는 한국의 시위가 근래의 선거와 비민주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에 대해 품고 있는 국민들의 불안을 반영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양유찬 대한민국 대사에게 통고하였습니다..."
이렇게 미국이 등을 돌린지 얼마 안 되어 4월 21일에는 국무위원이 일괄 사표를 냈고 23일에는 장면이 부통령 사임서를 냈으며 그 날 이기붕은 부통령 당선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날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 번 끓어오른 사회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점차 소강되기 시작하던 시위에 다시 불을 붙인 계기.
이번에는 학생이 아닌 대학 교수들이 모여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오후 5시 50분경에는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를 하기에 이른다. 이에 시민들이 호응하여 시위 군중은 삽시간에 1만 명까지 불어났다.
이들은 19일에 있었던 참혹한 사태에 대해 지식인으로서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생때같은 자신의 제자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두려움 없이 나섰고 자신들을 겨누고 있는 총 앞에서 의연히 행진했고 결국 피를 흘려야만 했던 것에 대해 자신들 역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굳이 25일이냐 하면 먼저 매달 25일은 교수들의 봉급날로서 이때 정기적으로 많은 교수들이 한데 모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봉급을 핑계로 당국의 의혹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생기는 셈이었다. 처음에 교수들은 많아봐야 50~60명 정도만이 모이리라 여겼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모인 교수들의 머릿수는 무려 258명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들은 열화와 같은 기립박수 속에 일사천리로 반정부 시위 및 행진을 결의하고 시국선언문을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시국선언문에는 참석자 258명 전원이 서명하였다. 그 중에 몇 명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종우(고려대), 이희승(서울대), 정석해(연세대), 조윤제(성균관대) 외 시국선언문 서명자 258명
이번 4.19의거는 이 나라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중대한 계기다. 이에 대한 철저한 규정 없이는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도저히 만회할 길이 없다. 이 비상 시국에 대처하여 우리는 이제 전국 대학 교수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아래와 같이 우리의 소신을 선언한다.
1) 마산, 서울 기타 각지의 학생 데모는 주권을 빼앗긴 국민의 울분을 대신하여 궐기한 학생들의 순진한 정의감의 발로이며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는 민족 정기의 표현이다.
2) 이 데모를 공산당의 조종이나 야당의 사주로 보는 것은 고의의 곡해이며 학생들의 정의감의 모독이다.
3) 평화적이요 합법인 학생 데모에 총탄과 폭력을 기탄 없이 남용하여 대량의 유혈, 참극을 빚어낸 경찰은 '민주와 자유'를 기본으로 한 국립 경찰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일부 정치 집단의 사병이었다.
4) 누적된 부패와 부정과 횡포로서의 민족적 대참극, 대치욕을 초래케 한 대통령을 위시하여 국회의원 및 대법관 등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지 않으면 국민과 학생의 분노는 가라앉기 힘들 것이다.
5) 3.15선거는 불법 선거이다. 공명 선거에 의하여 정, 부통령 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6) 3.15 부정 선거를 조작한 주모자들은 중형에 처해야 한다.
7) 학생 살상의 만행을 위에서 명령한 자 및 직접 하수자는 즉시 체포 처형하라.
8) 모든 구속 학생은 무조건 석방하라. 그들 중에 파괴 또는 폭행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동료 피살에 흥분된 비정상 상태하의 행동이요, 폭행 또는 파괴가 그 본의가 아닌 까닭이다.
9) 정치적 지위를 이용 또는 권력과 결탁하여 부정 축재한 자는 관, 군, 민을 막론하고 가차없이 적발, 처단하여 국가 기강을 세우라.
10) 경찰은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11) 학원의 정치 도구화를 배격한다.
12) 곡학아세하는 사이비 학자와 정치 도구화하는 소위 문인, 예술인을 배격한다.
13) 학생 제군은 38선 넘어 호시탐탐하는 공산 괴뢰들이 군들의 의거를 선전에 이용하고 있음을 경계하라. 그리고 이남에서도 반공의 이름을 도용하던 방식으로 군들의 피의 효과를 정치적으로 악이용하려는 불순 분자를 조심하라.
14) 시국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여 학생들은 흥분을 진정하고 이성을 지켜 속히 학업의 본분으로 돌아오라.
- 단기 4293년 4월 25일, 대학교수단"
이는 이전의 시위와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인 것이었다. 위에 인용된 각 학교별 선언문에서 보듯 이전에는 '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는 것이 주요 요구였고 이승만 하야는 주요사항이 아니었으나 교수들은 이승만 하야를 직접적으로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교수들이 서울 시내를 질서정연하게 행진하고 그 뒤를 시민들과 학생들이 따르고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하고 애국가까지 제창했는데도 단 한 명의 경찰도 얼씬하지 않았다. 사전에 당국에 알리지도 않은 강행 시위였는데도. 당대의 교수라는 직분이 가지는 사회적 권위와 책임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보여주는 예.
교수단 데모가 끝난 뒤에도 시민, 학생들이 통금 사이렌을 무시하고 시위를 계속했으며 일부는 철야농성까지 벌였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5시,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오전 7시에는 3만여 명이 모여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였고 1만여 군중은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윽고 9시경에는 서대문에 있던 이기붕의 집이 파괴되는가 하면 같은 시각 45분경에 파고다 공원에 있는 이승만 동상이 군중들에 의해 철거되었다.
교수들의 시위가 끝난 후 계엄군이 출동하긴 했지만 탱크를 앞세운 데다 착검까지 하고 방독면을 쓰고서도 이미 군인들은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시위대 속 한 10대 소년이 탱크 위로 뛰어올라가서 외쳤다. "대한민국 국군 만세!" 민주화 관련 사료들 중에는 이때 눈물을 흘리는 군인들도 있었다는 서술이 있다.
이후로 계엄군은 시위대 건으로 현장에 출동할 때마다 시위대의 따뜻한 환영과 환호,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이미 계엄군은 이승만 정부를 지킬 마음이 사라져버린 상태였으며, 계엄군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사병'이 아닌 국민을 지키는 '군대'가 되어있었다. 이후 시위대가 시위를 벌이는 곳에는 항상 탱크가 상징처럼 따라다녔다. 시위대는 탱크 위에 올라가서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쳤다.
상황은 이승만에게 명백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26일 아침 김정렬 국방장관이 강경히 이 대통령에게 하야를 진언했고, 부인 프란체스카도 귀에 대고 결심을 재촉했으며, 4월 25일 수석국무위원으로 입각한 허정도 하야를 권유했다. 김정렬 회고록에 따르면 이때 이승만은 "내가 그만두면 더 이상 다치는 사람이 없단 말이지?"하고 결국 하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이승만은 박찬일 비서관을 불러 성명서를 쓸 것을 지시했다. 초안에는 대통령 하야, 내각책임제, 재선거 등이 적혀있었지만 이승만은 그렇게 쓰면 안된다고 새로 쓰게 했다. 송요찬의 건의로 이기붕의 공직 사퇴 내용도 첨가되었다. 두번째로 쓰인 성명서가 밑에 있는 성명서다.
그때 송요찬 계엄사령관이 시민, 학생대표 5명과 이승만 대통령의 면담을 주선했다. 고려대 정치학과 유일나 등이 경무대 후원에서 이승만과 면담했다. 유일나가 "각하께서 하야하시는 길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입니다"라고 직언했고 이승만이 "뭘 하라고?"라고 알아듣지 못하자 옆에서 곽영주가 "step down"이라고 속삭였다. 이승만은 "날더러 저 하와이나 외국에 가서 살란 말인가?"라고 물었고 유일나는 "국민이 원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때 미국 대사 맥카나기가 도착했다. 이승만은 대사를 기다리게 한 다음에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유일나는 이집트의 나세르의 예를 들며 북한과 대치 중이니만큼 2년간 군정을 한 다음에 민정으로 이양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허정이 옆에서 반대의 뜻을 밝혔고 이승만은 그게 송요찬의 지시로 한 말인 줄 알고 한국과 이집트는 상황이 다르다고 반대했다. 결국 이승만은 시민 대표와의 면담을 받아들였다.
10시 20분경 드디어 이승만이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사임할 것을 발표했다. 비슷한 시간인 9시 45분경 파고다공원에 몰려든 데모 군중이 이승만 동상의 목에 철사줄을 걸어 쓰러뜨렸다. 현재는 그 자리에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10시 40분에 이승만은 맥카나기 대사와 면담했는데 미국의 사퇴 압박을 전하려던 대사는 사퇴 성명서를 듣고 성명 지지 의사를 전달했다.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갑자기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이미 방송으로 다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비서들의 잇따른 사임서 사인 요구에 버텼다.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노(老) 독재자의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허정도 설득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김정열이 나서서 또 촉구했지만, 이승만의 대답은 역시 '사임하면 온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허정이 질서를 확고히 유지할 수 있다고 역설하자 그때서야 어쩔 수 없었던지 사임서에 사인을 해 국회에 제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