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천의 유래와 천라수련원
기천은 우리나라 역사와 더불어 도도히 흘러온 민족 전통무예로서 근세에는 설악산에서 수련하던 수행자 원혜 상인(元慧 上人)으로부터 대양 진인(大洋眞人)으로 이어져 전통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세상에 전해진 것이다. 그 후 세상에 기천의 많은 제자가 길러졌으며 현재는 2대 문주인 중용선인(中庸仙人) 박사규 문주님이 계룡산에 터를 잡고 기천을 지도하고 있는 것이 공중파를 통해서도 많이 알려지고 있다.
원혜상인(元慧上人)은 기천의 마지막 산중 지킴이로서 불교의 큰스님이자 사상가였던 김탄허스님(1913-1983)과도 깊은 친분관계가 있었다고 한다.(대양진인의 전언) 원혜상인(元慧上人)에 대해서는 주로 대양진인(大洋眞人)에 의해 전해지고 있는데 홀로 산에서 자유자재로 살아간 큰 도인이었다고 한다.
기천의 큰 스승 대양진인
대양진인(大洋眞人)은 어렸을 때(본인도 알 수 없는 어린 나이라고 함) 기이한 인연으로 스승인 원혜상인(元慧上人)을 만나 기천수행의 생활 속에서 배우며 자라났다. 처음에는 그것이 수련인 줄도 모르고 죽도록 힘들고 하기 싫어 꾀를 부리다가 스승으로부터 심한 꾸지람도 받았다고 한다. 헌데 지나고 보니 그렇게 힘든 고통이 나를 다듬고 깎아 세운 커다란 수련법이었다고 대양진인(大洋眞人)은 깊게 회상하곤 한다. 그리고 그 법은 조상의 혈맥이 살아 숨 쉬고, 민족혼을 담고 있는 정신문화의 대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본인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기천을 몸에 익힌 대양진인(大洋眞人)은 1970년대 초에 설악산에서 하산하여 기천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 최초의 기천 지킴이가 된 것이다.
대양진인(大洋眞人)의 공력과 깊고 넓은 정신세계는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1970~80년대까지 기천을 세상 속에 세우기 위해 수많은 사연들이 있었으며, 그 중에는 타 무예의 관장들과의 일전도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그 때마다 일반인들의 무예로서는 대적치 못할 상승무공의 소유자임이 증명되면서 한때는 기천 수련원에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든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도장 경영 능력에 있어서는 전혀 문외한이신 대양진인(大洋眞人)은 수많은 기천인들을 규합하지 못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몇몇 제자들만이 그 분의 주위에 남아 있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또 다른 몇몇 제자들은 독자적인 무술협회로 나아가 독립을 하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1996년 기천문주를 당시 기천문인 회장이었던 박사규 제자에게 이양하고 2선으로 물러 나셨다. 그러나 최근 박사규 문주가 계룡산에만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서울에서 기천문을 사단법인에 등록시켜 다시 기천지도에 힘을 쏟고 계시다.
현재 기천을 이끌고 있는 중용선사(中庸仙人) 박사규 문주
중용선인(中庸仙人) 박사규 문주는 어려서부터 합기도, 태권도, 복싱 등을 연마하면서 한 때는 전남 광주 합기도 도장에서 사범생활과 시범단 활동을 했던 합기도 고수였던 분이다. 그 당시 여러 사람들과의 대련 경험이 많아 1:1 대련에는 어느 정도 자신 만만 했었다고 한다. 그 후 서울에서 의류사업을 하면서 다시 합기도 수련을 하고 있던 중에 친구 소개로 기천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천도장을 찾아가 대양진인(大洋眞人)을 만나게 되었고 자신은 그 분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대양진인(大洋眞人)과 같이 작은 몸에서 뿜어 나오는 괴력 같은 파괴력과 그동안 보지 못했던 기천의 오묘한 기술에 반하여 기천에 정식으로 입문하여 배우게 된다.
중용선인(中庸仙人)의 당시 상황 상 낮 시간에는 도장에 나가서 배울 수가 없어 대양진인(大洋眞人)을 새벽에 홀로 모시고 삼청동 공원에서 주로 개인 지도를 받게 됐다. 당시 중용선인(中庸仙人)은 사부인 대양진인(大洋眞人)께 주문하기를 “저는 기천의 변화 수 보다는 기천의 원형을 그대로 가르쳐 주십시오, 사부님께서 수련하신 그대로 해 주세요.” 라는 부탁을 늘 했었다고 한다. 그 바람에 많이 맞아가면서 혹독한 수련을 했었다고 한다. 덕분에 훗날 중용선인(中庸仙人)께서는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 당당히 기천의 맥을 잇는 적장자가 된 것이다. 중용선인(中庸仙人)은 처음에는 오로지 기천의 강인한 무공과 기묘한 무술에 반해서 입문했지만, 차츰 깊이 담겨 있는 기천 도학에 대해 깨닫게 되었으며, 그 후로 기천은 “몸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민족선도의 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는 계룡산에서 새로운 기천의 터를 잡고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건강법으로 기천을 펼쳐가고 있다. 1998년 계룡산에 내려와 새 터를 잡고 후학을 지도한 결과 현재 약 400~500명의 기천 예비 지도자들이 배출되었고, 10여개의 수련원이 새로 문을 열어 기천을 가르치고 있다. 계룡에 내려와 처음 인연이 된 제자들 중에서 최초 3개의 수련원이 먼저 개원하면서 계룡이 기천의 새 터로 자리잡아가게 된다. (천룡수련원, 천여수련원, 천라수련원)
천라수련원 원장 일저 조성호
천라수련원 원장은 20대 중반부터 정신수련에 심취하여 단전호흡 수련을 해 오다가 20대 말렵에 해동검도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 당시 해동검도는 전국에 서울 본원과 천안 지관이 하나 있었을 때였으며 나는 천안 지관에 입문하여 수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단전호흡과 명상 수련을 하면서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기르기 위해 해동검도를 방편으로 나만의 수련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수련경험이 깊어지면서 수련에 대한 관점과 비젼도 바뀌어갔으며 수련은 점점 내 삶의 전부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후 수련에 전념하면서 삶을 영위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1995년 초 공주에 해동검도장을 오픈하게 된다. 도장을 오픈하게 되면 수련은 뒷전이 되고 경영이 우선시 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나는 그 반대가 되어 개인적 수련에 심취해 들어갔다. 해동검도장을 오픈했으니 몸을 쓰는 수련을 게을리 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오히려 정신수련 쪽에 더 많은 관심과 시간을 투자 했었다. 당시는 못 느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수련에 올인한 삶을 살아 왔던 것 같다..... 그러다가 필연적인 인연에 의해 기천을 만나게 된다. 옛날 천안에서 명상수련을 할 때 호형호제 하던 김백봉 형님이 서울로 가서 기천수련을 하면서 여러번 기천수련을 할 것을 추천했었던 것이 인연의 고리가 된 것이다. 그 분의 말에 따르면 해동검도를 하는 나에게는 꼭 해야할 운동이라고 강력히 추천했었으나 당시 천안에서 명상(단전호흡)수련과 해동검도를 하면서 추가로 서울로 올라 다니며 기천까지 한다는 것이 시간 상 도저히 불가능하여 그냥 미루고 미뤘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공주로 내려가게 된 것이다. 내가 공주로 내려간 다음 해인 1996년 말에 서울에서 김백봉 형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서울에서 기천수련을 하던 지성철 범사가 대전에 수련원을 오픈한다고 지역과 전화번호를 자세히 알려주는 바람에 곧장 대전으로 나가 보니 수련원 내부시설 공사중 이었다. 서울로 가기는 벅찼으나 공주에서 대전으로 다니기에는 충분히 가능한지라 망설임 없이 정식으로 입문하여 수련을 시작하게 된 것이 기천과 인연이 되었다.
그 후 약 3년 후 1999년 기천 지도자 과정에 입문하여 수련하면서 당시 계룡산에 내려와 계시던 박사규 문주님과 첫 인연이 되어 계룡산에서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 말에 공주 해동검도장을 조윤상 사범에게 인계하고 잠시 세속과의 인연을 접고 정신적인 수련을 위해 산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나름 나의 모든 것을 건 절박한 상황으로 수련에 전념하였다. 처음에는 편안하고 여유롭게 시작한 수련이었으나 차츰 수련에 불이 붙으면서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면서 용맹정진하게 되었다. 졸리고 나태해 질 때는 자신이 야속하여 머리를 나무에 찧어가며 혹독한 수련으로 자신을 몰아세우던 어느날 발 아래 티끌 하나 없는 파란 하늘이 확짝 열리면서 몸도 아음도 허공에 흩어져 없어지는 것이었다. 이 때 한계 없는 자신이 우주 허공과 함께하는 경이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몸의 한계도 마음의 한계도 느낄 수 없는 무한한 존재성의 인지와 함께 황홀경이 되어 새벽에 산길을 무한정 걸었던 그날!!! 인생에 가장 커다란 정신적 의식의 변이를 경험하게 되면서 내 삶의 방향이 확정되어진 것이다.
입산하여 정신수련을 하던 몇 개월 동안 기천의 몸 수련은 잠시 내려 놓고 있었는데 의식의 큰 변이를 경험한 후 천천히 기천의 몸 동작을 다시 해 보니, 기천육합은 오장육부의 기운과 연결되고 수행을 통해 기맥이 열리면 마음이 녹아내리며 마음이 없어질 때 의식은 자신의 한계를 놓고 순수의식으로 돌아가는 이치가 기천의 수련법 안에 숨어 있음을 몸으로 느끼고 깨닫게 되었다. 방금 전 경험한 의식의 변이도 그동안 내가 해온 기천수련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게되면서 기천이야말로 변형되지 않은 깨달음의 정수를 그대로 간직한 원석(原石)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
"개인의 감정과 한계를 벗고 순수의식 상태로 돌아갈 때 우리는 무한한 생명 자체이다" 무한한 생명에너지! 그 자체가 바로 진리이며 그것을 깨닫는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수련이다. 그 어떤 이름의 진리도 생명보다 위에 있을 수 없음을 당당히 말하고 싶다. 자신이 오묘하고 무한한 생명의 본성임을 자각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깨달음이며 진법 중의 진법이라고 전하고 싶다. 모든 생명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경이로움이 바로 자신 안에 있음을 깨닫고 꽃 피우는 일! ...... 이것이 바로 내가 전하고 싶은 법이다.
얼마후 산에서 내려와 내가 직접 체험한 그 아름다운 진법을 어떻게 말하고 전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기천을 통해 전하리라 생각하고 2001년에 대전시 서구 삼천동에 기천 천라수련원을 오픈하게 되었다. 기천의 천룡, 천여, 천라에서 따온 이름이지만, 내게는 참으로 잘 어울리는 이름으로 생각하고 기천을 통해 생명의 진법을 전하고 펼치겠다는 각오로 수련원을 연 것이다. .....
지금 천라수련원은 대전에서 명상과 더불어 기천을 정신적 수행의 길로 안내하는 구체적 지표를 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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