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26:57-65
찬송가 379장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들지 아니하였으니(57-62)
하나님은 약속의 땅이 바로 보이는 모압 평지에서 2차 계수를 진행하십니다. 사실 다윗은 인구조사를 함으로써 무서운 징계를 받았습니다. 사람을 수치로 여기는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언가를 수치화함으로써 통제 불가능한 세상을 통제 가능한 것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기술을 발달시켜 왔습니다. 작년 우리나라 사망자 수가 31만 7,680명이라고 합니다. 매일 900명 정도에 해당합니다. 어떠한 이유든지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남은 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온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그 목숨을 어떻게 숫자로 대체할 수 있으며, 그 사랑의 기억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사망 이유를 여러 가지 암과 질환 및 운수사고 자살 등으로 분류하여 마치 죽음까지도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있는 대상으로 수치화하고 어떤 질서 속에 편입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숫자로 만들고 기술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사람은 소외됩니다. 죽음까지도 데이터로 만들어 소유 가능한 정보로 만드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인구 조사는 그와 전혀 다른 기능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에 걸쳐서 인구 조사를 명하신 이유는 기본적으로, 민수기 1장 3절과 민수기 26장 2절이 말하듯 이십 세 이상으로 능히 전쟁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또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떠한 이유로 그 인원을 파악하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수효를 알지 못하시기에 인구 조사를 하라고 하신 것은 분명 아닙니다. 또 그들이 손에 쥘 수 있는 어떤 숫자를 보여줌으로 그들을 위로하심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전투하는 공동체였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첫 번째 인구 조사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막을 호위하여 나아가는 공동체 조직을 위한 것이었고 두 번째 인구 조사는 그들이 쟁취하게 될 땅을 미리 구상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차지하기는커녕, 구경조차 하지 못한 땅을 미리 자신의 것으로 삼도록 머리에 그림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마음을 다잡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헤아리심은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광스러운 기업을 누릴 지파들을 소개한 후에 이스라엘 자손으로 계수되지 않는 존재가 나타납니다. 그들은 바로 레위인이었습니다.
(57-58) 레위인으로 계수된 자들의 종족들은 이러하니 게르손에게서 난 게르손 종족과 고핫에게서 난 고핫 종족과 므라리에게서 난 므라리 종족이며 레위 종족들은 이러하니 립니 종족과 헤브론 종족과 말리 종족과 무시 종족과 고라 종족이라 고핫은 아므람을 낳았으며
레위인으로 계수된 자들의 종족은 레위의 아들로 여겨지는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 종족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부속된 다섯 가족입니다. 즉, 게르손에게 립니 종족이 났고, 고핫 종족에게서 헤브론 종족이, 므라리에게서 말리와 무시 종족이 났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를 비교해 보면 여기에 언급된 레위 가족은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는 생략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 지파 중에 아므람의 가족이 두드러지게 기록된 것은 이 가족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도구로 특별히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59) 아므람의 처의 이름은 요게벳이니 레위의 딸이요 애굽에서 레위에게서 난 자라 그가 아므람에게서 아론과 모세와 그의 누이 미리암을 낳았고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따르자면 모세의 아버지는 레위의 손자인 아므람입니다. 아므람은 레위의 아들인 고핫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게벳은 레위의 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므람은 고모와 결혼하여 모세를 낳았다는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기간이 사백삼십 년이라는 기록을 고려한다면 레위의 딸이 요게벳이고, 그 아들이 모세가 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렇기에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아들과 딸이라는 단어가 직접 낳은 자녀가 아닌 그 후손을 의미한다고 보는 편이 적절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레위와 모세 사이에는 실제로 기록할 필요가 없는 여러 세대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60-61) 아론에게서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났더니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리다가 죽었더라
아론의 후예를 다루는데 네 아들 가운데 두 아들이 죽은 사실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본문은 계수 작업을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했다고 전합니다. 이제 아론은 죽었기에, 시내 광야에서는 모세와 아론이 계수하였으나, 모압 평야에서는 모세와 그 아들 엘르아살이 계수를 합니다. 대를 이어 하나님의 거룩한 직분이 계승됨을 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레위인, 특히 제사장직이 영광스러운 자리라는 사실은 잘 알지만 동시에 얼마나 무겁고 버거운 자리인지를 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헌신된 자로서 복을 받게 된 계기는 우상 숭배한 형제 삼천 명을 죽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옳은 일이었지만 형제를 죽이기란 내키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또 네 형제 중에 둘이 제사장 위임식을 마치고 분향하다가 죽고 맙니다. 레위기 10장에는 아론의 비통한 마음이 간접적으로 드러납니다. 두 아들이, 두 형이 죽임 당한 것을 보면서도 그 거룩한 일을 계속해야 하는 가족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만큼 사명의 자리는 무겁고도 엄중했습니다. 다른 이의 영적 생사를 결정하는 자리이기에, 자기가 죽을 수 있고 남을 죽임으로써 미움을 받는 위험한 자리임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사명이기 때문에 감당한 것입니다. 게다가 레위인들에게는 자신들이 경작할 기업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하나님께 바친 것에 의지하는 존재, 삶을 빚진 자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 약속의 비옥한 땅에서 자신이 노동하고 그 대가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컸겠습니까만 그들은 그러한 육체의 근본적인 욕구를 부인해야만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이러한 엄중한 책임을 받았습니다. 때로는 자신을 죽여야 하며, 남의 죄악된 모습을 들춰 죽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존재 자체를 하나님에게만 의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두렵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정의의 측량줄과 공의의 정의추로 삼아 이 사명을 잘 감당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62) 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된 레위인의 모든 남자는 이만 삼천 명이었더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 계수에 들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그들에게 준 기업이 없음이었더라
레위인은 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 중 계수에 들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전투를 위한 인원이 아니라 성막 봉사와 장자를 대속하는 인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창세기 49장 5절에서 7절에 레위에 대한 예언이 나오는데 그들은 칼을 폭력의 도구로 삼았기에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리라고 합니다. 다만 레위인의 수효를 계수한 이유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피자면 그들이 48개 성읍을 받아 흩어져야 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레위 자손은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는 위기 가운데 그들을 정죄하게 만들었던 칼을 오히려 정결케 하는 도구로 삼아 여호와께 헌신함으로 이 예언을 복으로 돌립니다. 또한 민수기 25장에서 비느하스가 시므리와 고스비를 창으로 찔러 죽임으로 속죄하고 평화의 언약을 받아 제사장 직분을 담당하게 됩니다. 물론 예언대로 레위인은 흩어지게 되지만 그 흩어짐으로 인해 오히려 이스라엘 전체에는 복을 끼치는 존재로 변모합니다. 그들은 레위라는 이름의 뜻, 즉 연합이라는 의미에 걸맞게 이스라엘이 하나 되게 하는 역할을 신실하게 감당합니다.
여름에 한 교회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교차로에 있는 자그마한 빌딩 6층에 위치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건물 구성을 보고 흥미롭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하에는 노래방이 있었고, 1층에는 편의점과 미용실, 2층에는 치과 의원, 3층에는 복싱 클럽, 4층에는 회사, 5층에는 당구장, 그리고 6층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처음 교회에 들어갔을 때는 별 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천천히 걸어서 내려오며 각 층을 보면서 교회의 역할을 새삼 돌이켜 보게 되었습니다. 위에서는 예배하고 있는데, 바로 아래층에서는 당구를 치고 있었으며, 그 아래층에는 사람들이 일에 몰두하고 있었고 또 그 아래에는 사람들이 몸을 단련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는 사람들이 치료받고, 1층에는 편의를 위한 점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하에는 노래방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다층화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제각기 역할에 몰두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이의 역할과 의미를 부여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레위라는 이름이 의미하듯이 교회가, 그리스도가 그 책임을 합니다. 이 땅의 타락은 어디에서 옵니까? 정치인이나 경제인의 타락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타락이 근본 원인입니다. 이 세상은 원하는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인이 제 역할을 잘 담당하고 레위인들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이 땅에 속하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눈을 들고 살아갈 때 우리 사회가 타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막중한 책임의식과 부채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밝게 하고 맛을 내는 존재입니다. 많이 맡은 자에게 많이 달라고 하실 주님을 의식하고 오늘도 받은 은혜에 따라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처신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들지 못하였으니(63-65)
(63-65) 이는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계수한 자라 그들이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계수한 중에는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그중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말씀이 성취된 까닭입니다.
(민수기 14:28-30)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남아 그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심판을 선포 받았을 당시 20세 이상 되는 모든 자는 광야에서 쓰러져 죽거나, 염병에 죽었습니다. 지금 이순간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남았습니다. 모든 이가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마음은 문드러졌을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이름을 지워서라도 이스라엘을 용서해달라고 구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을 악착같이 증오하고 죽이려 하던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또 간구하여 겨우 멸망에서 돌리고 멸망에서 돌렸습니다. 하지만 결국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모두 목격해야만 했던 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물론 새 세대를 바라보며 가슴 벅차기도 했지만, 그 삶은 슬픔과 애수로 가득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의와 공의를 알고 그대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자기 부인과 희생이 반드시 따릅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광야는 멸망의 장소가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연단을 받아 더 정결하게 되는 훈련의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끝까지 신뢰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아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분명히 우리 안에 넘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연합의 놀라운 일이 일어나 화평하게 하는 자,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계수에 들지 않은 레위인을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계수되지 않는다고 슬퍼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기업으로 삼아 연합의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또한 같은 광야를 살아갔지만 결국 계수에 들지 못한 자들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의로우심만을 간구하며 찬양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세상이 수치를 헤아리는 이유와 하나님이 수치를 헤아리는 이유는 어떻게 다릅니까?
2. 레위인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왕 같은 제사장의 영광스러운 직분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3. 모세, 아론, 여호수아, 갈렙이 감내해야 했던 어려움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영광 뒤에 있는 아픔은 무엇인지, 하나님은 어떻게 위로하셨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4. 누군가에게는 광야가 멸망의 장소였지만, 누군가에게는 훈련의 장소였습니다. 나는 광야를 어떠한 믿음과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작성: 이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