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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집 문집 제7권 / 비명(碑銘)
백씨 영의정 분사 이공 신도비명 병서(伯氏領議政分沙李公神道碑銘 幷序)
영의정을 역임한 백형(伯兄)이 회갑이 되는 갑신년(1644, 인조22) 2월에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遺言)하기를 “나의 신도비명을 내 아우에게 맡겨라.”라고 하였다. 당시 나 민구(敏求)는 서남쪽에서 객지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개 신도비명을 짓지 않자니 성대한 뜻을 저버려 저승에서 형님을 뵐 수 없게 될 것이고, 짓자니 당세와 후세의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을 수 없을까 두려웠기에, 나는 진실로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의 휘(諱)는 성구(聖求), 자는 자이(子異), 호는 분사(分沙)이다. 7세조 경녕군(敬寧君) 휘 비(裶)는 헌릉(獻陵 태종(太宗)의 소생이다. 그 뒤로 모양군(牟陽君) 휘 직(稙)과 선사군(仙槎君) 휘 승손(承孫)과 하동군(河東君) 휘 유(裕)는 대대로 종실(宗室)로서 군(君)에 봉해졌다.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한 조부(祖父) 휘 희검(希儉)과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선고(先考) 문간공(文簡公) 휘 수광(睟光)은 모두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었으니, 대대로 훌륭한 공렬(功烈)로 명성이 있었다. 선비(先妣)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상락공(上洛公)의 후예이며, 의금부 도사 휘 대섭(大涉)의 따님이다.
공은 어려서 조모(祖母) 유 부인(柳夫人)의 손에서 길러졌는데, 조모께서 직접 공에게 《소학》을 가르치셨다. 공이 처음 가숙(家塾)에서 공부할 때 지은 문장들이 매번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계묘년(1603, 선조36)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무신년(1608)에 대과(大科)에 합격하였는데, 초시(初試)에서부터 모두 가장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처음에 승문원(承文院)에 배속되었다가 예문관(藝文館)에 선발되어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겸직하였다.
신해년(1611, 광해군3)에 전적(典籍)으로 승진하고, 감찰(監察)로 옮겼다. 이듬해 제조(諸曹)의 낭관(郞官)을 거쳐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교리(校理)가 되었다. 이로부터 관직(館職)과 언관(言官)을 여러 차례 거쳤다.
당시 부친(父親) 문간공(文簡公 이수광(李睟光))께서 사헌부(司憲府)의 수장(首長)이셨고, 아우인 나 민구가 홍문관에 있었는데, 공이 헌납(獻納)이 되었으므로 탄식하여 말하기를 “한 집안의 세 사람이 삼사(三司)에 함께 있으니 위태롭다.”라고 하였다.
바야흐로 간신들이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그 여파가 모후(母后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까지 미쳤으니, 대간(臺諫) 정조(鄭造)와 윤인(尹訒)이 처음으로 별궁(別宮)에 거처하게 해야 한다는 의론을 만들었다. 공이 바른 의론을 견지하여 흔들리지 않자, 간사한 사람들이 이미 흘겨보기 시작하였다.
상국(相國)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일찍이 정협(鄭浹)을 변방 고을의 원으로 임명한 일이 있었는데, 정협이 역모에 연루되어 죽자, 의논하는 사람들이 이 일을 빌미로 백사공을 파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이 지평(持平)으로서 맞서 말하기를 “정협을 추천하여 임명할 때 반역할 줄을 어찌 미리 알았겠는가. 그 일의 책임이 대신에게까지 미치는 것은 너무 심하다.”라고 하였다.
간사한 무리들이 이전부터 앙심을 품고 있었던 데다, 또 공이 장차 이조(吏曹)의 관원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때였으므로, 공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갑인년(1614, 광해군 6)에 외직(外職)으로 이천 현감(伊川縣監)에 서용(敍用)되었다. 이듬해 모친상(母親喪)을 당했다.
상기(喪期)를 마치자 영평 판관(永平判官)에 임명되었는데, 포천(抱川)에 종속된 고을이라 새로 시작된 일들이 많았지만, 사리에 맞게 시행하여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화합하였다. 그해 가을에 상공(相公)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가 유배지에서 운명하였다.
포천에 반장(返葬)하니, 고을 사람들이 서원(書院)을 세워 백사공을 봉안(奉安)하였다. 평소 탐탁찮게 여기던 사람들이 이 일을 빌미로 크게 들고 일어나, 공이 그 고을의 원이라는 이유로 자잘한 일들을 주워 모아 치밀하게 죄안(罪案)을 만들어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시종 세상 사람들이 공을 비방한 것이 이와 같았다.
권흉(權凶)들이 국권을 잡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화해를 통해 한가롭게 만들려는 생각에 빨리 동화될 사람을 찾으니, 자취를 더럽힌 사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공은 급류 속에서 꿋꿋이 버티고 서서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비판하였다.
계해반정(癸亥反正) 뒤에 첫 번째 인사를 시행하면서 공을 사간(司諫)으로 뽑아 임명하니, 폐단을 없애고 잘못 처벌된 사람들을 신원하였으며 사(邪)와 정(正)을 분변하여 바른 것은 시행하고 그른 것은 막았다. 예컨대 무분별하게 잡아들인 사람들을 너그럽게 풀어 주고, 도성문의 금지 사항을 완화하고, 침향산(沈香山)을 불사르고, 여악(女樂)을 파하여 내보낸 것 등은 모두 공이 처음으로 발의(發議)하여 새로운 교화를 도운 것이다.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옮기고 유장(儒將)에 추천되었다. 부응교(副應敎)를 거쳐 또 추천되어 강화 부윤(江華府尹)이 되었다.
을축년(1625, 인조 3) 봄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징소(徵召)되어 예조와 병조의 참의(參議), 대사간(大司諫)으로 옮겼다.
서성(徐渻) 공이 병조의 수장(首長)이었는데,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에게 자주 말하기를 “참의공과 근래 함께 일했는데, 큰일을 담당할 사람은 반드시 이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정묘년(1627) 봄에 이조 참의(吏曹參議)로서 세자를 호종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조정으로 돌아와서는 거듭 이조 참의와 대사간을 역임하고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직하였다. 이듬해 좌승지(左承旨)로서 길주(吉州)에서 무과(武科) 시험을 주관하고, 소장을 통해 백성들이 겪는 폐단을 16조로 나열하여 올렸다.
국옥(鞫獄)의 노고를 인정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전라 감사(全羅監司)가 되었다. 그해 겨울에 부친 문간공(文簡公)이 갑자기 심한 풍에 걸렸다. 임금께서 선전관(宣傳官)을 보내 교체될 관원을 기다리지 말고 서둘러 돌아오라고 명하셨는데, 그대로 부친상을 당하였다.
상기(喪期)가 끝나자 그날로 대사간(大司諫)과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특별히 제수되어 도총부 부총관(都總府副摠管)과 지경연관사(知經筵館事)와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와 세자시강원 우부빈객(世子侍講院右副賓客)을 겸직하였다.
계유년(1633, 인조 11)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특별히 임명되니, 유백증(兪伯曾)이 친인척의 작은 혐의를 끌어들여 개차(改差)할 것을 논하자, 사론(士論)이 그 교묘한 비방을 너무 심하게 여겼다. 곧바로 대사헌과 형조 참판에 임명되고,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나갔다.
대사헌과 부제학과 도승지를 역임하였다. 을해년(1635) 정월에 이조 판서의 자리가 비자, 임금께서 종2품의 관원을 함께 천거하게 하여 제수하시니, 공이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직하였다. 병자년(1636)에 체직되어 형조 판서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여름에 병조 판서와 체찰부사(體察副使)가 되어 인재를 반드시 공정하게 등용하니, 무관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12월에 청(淸)나라 군대가 봉화를 거두고 재빠르게 달려 사흘 만에 도성까지 다다르니, 어가(御駕)가 갑자기 강화도로 행차하게 되었는데, 도성을 미처 빠져나가기도 전에 적의 척후기병(斥候騎兵)이 사현(沙峴)을 넘어왔다.
임금께서 길을 돌려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셨는데, 적병이 날마다 더욱 불어나 온 성 안의 사람들이 실색(失色)하였으나, 홀로 공만은 평소와 같이 행동거지가 평안하였으므로 상하의 사람들이 의지하여 존중하였다. 여러 장수들과 성을 나누어서 지켰는데, 큰 관을 쓰고 군복을 입은 채 큰 깃발 아래 우뚝 서서 말하기를 “나는 떳떳하게 죽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대사(大事)가 이미 기울어 가는 것을 본 어떤 사람이 일찌감치 항복하자는 의론을 따라 팔도의 백성들이 도륙(屠戮)되는 것을 면하게 해야 한다고 요청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왕의 군대가 한 번도 교전하지 않았고 외진(外鎭)도 다행히 온전한데, 어찌 갑자기 항복을 논의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성 안의 사정이 더욱 다급해져 성을 나가기로 결정하였다. 세자(世子 소현세자(昭顯世子))께서 볼모로 심양에 가시게 되었는데, 여러 대신들이 늙어서 갈 수가 없었다. 이에 공을 우의정(右議政)에 승진시키고 이어서 좌의정(左議政)으로 삼았다.
조정에서는 이미 공에게 위임하여 약조를 고쳐 정할 수 있게 하였지만, 청나라에서의 정황이 우리가 생각한 것과 크게 달라지자 사람들은 공이 명령을 저버리고 일을 그르쳤다고 하였다. 한 아들이 어린 나이에 포로로 잡혀갔어도 공은 아무 감정도 없이 바라보기만 했는데, 청나라에서 강제로 속금(贖金)을 정하여 몰아내는 데 이르게 되자, 사람들은 또 공이 아들을 속환(贖還)시켜서 뒷날의 폐단을 열었다고 비판하였다. 겸하여 체찰사가 군무(軍務)를 주관하여 나라를 그르친 죄를 논하면서 공에게까지 확대시켜 파직하였다.
공이 파직된 뒤에 동쪽 교외에 초가를 지었는데, 머리가 천정에 닿고 겨우 무릎을 들여놓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거처하였다. 시를 지어서 “밭 가운데 쓴 나물은 쓸개 씹어 먹는 것 같고, 성곽 밖 초가집 생활은 섶에 누운 격이네.”라고 하였으니, 가슴에 품은 뜻을 알 수 있다.
무인년(1638, 인조 16)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다시 서용되었다. 경진년(1640)에 또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신사년(1641) 10월에 영의정(領議政)에 임명되었다. 공은 관직에 있을 때 대체(大體)를 온전히 하는 데 노력하여 각박하게 실상을 캐내는 논의를 하지 않았으며, 매번 옥사를 처결할 때 법을 관대하게 적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나라의 큰일을 처리할 때는 확고한 의사를 내세워 흔들리지 않았으니,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설이는 기색이 없었다.
의주(義州) 사람 최효일(崔孝一)이 스스로 명나라 조정으로 귀순하였는데, 부윤(府尹) 황일호(黃一皓)가 그 가족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청나라 장수가 장차 형륙(刑戮)을 가하려고 하자, 공이 확고한 자세로 맞섰다. 청나라 장수가 화를 내며 말하기를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영의정 자리를 사흘도 지키지 못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저들의 뜻이 확고한 것을 보고 만류하여 변론하지 못하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비록 단 하루도 영의정 자리에 있지 못하더라도, 사람이 죄 없이 죽는 것을 보고 어찌 힘을 내 돕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라고 하였다. 공이 영의정이 된 뒤로부터 위험한 상황을 모두 겪었는데, 좌우(左右)의 사람들이 창과 방패처럼 맞서서 일마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조금 뜻을 누그러뜨려서 시의(時議)에 따르며 일을 해 나가야 한다고 충고하자,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일을 하는 것은 내게 달렸고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나의 뜻을 굽혀 남들과 영합하기를 바라겠소.”라고 하였다.
임오년(1642, 인조20) 가을에 사관(史官)이 부적합한 사람을 추천하자, 공이 그 사사로움을 밝혀내 그 추천서를 삭제하였다. 이에 공을 흔드는 말이 사방에서 일어났는데, 승지(承旨) 홍무적(洪茂績)이 왕성한 기세로 마구 비방하니, 그 말이 더욱 참담하고 각박하였다.
공이 병을 핑계로 열 차례 소장을 올리니, 이에 체직되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처음에 공이 예문관(藝文館)에 있을 때에도 동료가 왕실의 친인척을 사국(史局)에 이끌어 들이자, 공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다가 죄를 얻어 파직되었으니, 사관의 직책을 소중하게 여기고 권귀(權貴)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는 늙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청나라 사람이 봉황성에 이르러 이계(李烓)가 선천 부사(宣川府使)로 있을 때, 남선(南船 명(明)나라 상선)과 무역했다는 이유로 포박해 가고, 이어서 일에 관련된 여러 재상들을 체포하니, 온 조정이 깜짝 놀랐다.
도신(道臣) 구봉서(具鳳瑞)가 말하기를 “이계가 밀서를 바쳐 우리나라의 기밀을 다 알려주었다.”라고 하니, 상하의 사람들이 모두 성을 내며 미워하여 이미 이계를 죽이고, 또 그 가족을 처벌해야 한다고 논의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계의 죄는 진실로 만 번 죽어 마땅하지만, 그가 기밀을 누설했다는 것은 구봉서 한 사람에게서 나왔고, 의주에 있는 이경증(李景曾) 등 여러 신하들의 장계 내용과 서로 어긋나니, 마땅히 사실을 밝혀 처리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역적을 비호한다는 시의(時議)가 일어나, 처음에는 삭출(削黜)을 요청하다가 유배 보내야 한다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임금께서 파직만을 윤허하셨다.
양화강(楊花江) 가에 우거(寓居)하며 그 집에 ‘만휴(晩休)’라고 편액을 걸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수십 년간 나를 알아주는 임금을 만나 파도 속에 빠져 지내다가 늘그막에 한가롭게 지내니, 마음에 매우 흡족하다.”라고 하였다. 남여(籃輿)를 타거나 죽장(竹杖)을 짚고 한가롭게 소요하니, 한미한 선비와 다를 것이 없었다.
집에 불이 났는데, 밖으로 나와 밭 사이에 앉아서 말하기를 “술동이는 아무 탈이 없는가.”라고 하고는 술을 마련하여 이웃 사람들에게 사례하게 하고, 그 나머지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계미년(1643, 인조 21)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서용되었으나, 봉록을 반납하고 일을 끊은 채 장차 생을 마칠 것처럼 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세자께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무리해서 일어나 수레를 맞이하러 나갔는데, 이때 감기에 걸려 드디어 운명하였다. 처음 운명했을 때, 흰 기운이 올라가 하늘에 퍼져 흩어지지 않았고 빛이 땅을 비춰 밤에도 환하였으니, 보는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관청에서 예법대로 장례를 도와 양주(楊州) 장흥리(長興里)에 안장하였다.
공은 아름다운 풍도(風度)를 지녔고 체구가 헌칠하였다. 조정에서 바른 낯빛으로 있으면 백관들이 공경하였으며, 너그럽고 온화하면서도 절제된 면이 있어서 사람들이 친소(親疎)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남다른 주장을 내세우거나 무턱대고 남을 따르지 않았고, 성난 목소리나 화난 기색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막부의 장수와 막좌(幕佐)들이 다 복종하여 고개를 숙이고 등에 땀이 나면서도 물러나서 그렇게 된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공은 오래도록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주변을 차분하게 정리하여 문 앞에 뇌물을 보내는 사람이 없었고 골목에 사사롭게 찾아오는 수레가 끊어졌으며, 요로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과는 접촉하는 일이 드물었다. 강호로 물러나 지내는 데 이르러, 빈객이 들르면 반드시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그들을 예우하니, 봄날의 온화한 기운이 배어났다.
첫 번째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절도사(節度使) 열(說)의 딸이고, 두 번째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휘 흔(盺)의 딸이다. 윤씨 부인은 아들이 없었는데, 공은 절도사의 부인을 이웃집에 모시고 정성을 다해 섬겼고 돌아가신 뒤에 장사하였다.
이윽고 윤씨 집안의 지서(支庶 장남 이외의 아들과 서자)를 데려다가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고, 노비와 전려(田廬)는 하나도 물려받은 것이 없었다. 판서(判書) 이경직(李景稷)은 곧 윤열 공의 중표(中表)인데, 매번 탄복하며 자신은 미칠 수 없는 경지라고 하였다.
선조(先祖) 판서공(判書公 이희검(李希儉))으로부터 대대로 청고(淸高)한 절조로 명성이 드러난 데다, 공이 오랫동안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더욱 깨끗한 지조를 힘썼으므로, 큰일을 당했을 때 염습할 물건조차 없을 정도로 집안 살림이 빈한하였다.
권씨 부인은 타고난 자품이 명철하고 정렬(貞烈)하여 아녀자의 아름다운 자질을 두루 다 갖추었다. 5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상규(尙揆)는 강화도에서 죽었다. 참봉 동규(同揆)는 유일(遺佚)로 천거되었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현감(縣監) 당규(堂揆)와 좌랑(佐郞) 석규(碩揆)와 태규(台揆)는 모두 그 집안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러나 부인과 상규의 처 구씨(具氏), 그리고 판서 이일상(李一相)과 급제한 한오상(韓五相)에게 시집간 두 딸은 모두 순절하여 정려가 세워졌다. 공에게는 서자(庶子) 선규(善揆)와 윤두종(尹斗宗)에게 시집간 서녀(庶女)가 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아 아늑한 동쪽 동산에 / 於穆東園
묘소도 있고 사당도 있으니 / 有寢有廟
사마를 지낸 조부님과 / 司馬維祖
총재를 지낸 선친이시네 / 冢宰維考
영상께서 계승하여 / 上相承之
더욱 그 계책 넓혔으니 / 冞闡厥猷
그 계책은 어떠했나 / 厥猷伊何
대단히 원대하고 대단히 굳건했지 / 克邁克遒
조용하고 공손하게 직위에 머물며 / 靖共在位
흔들리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니 / 不那不竦
의젓한 모습 조정에 드날리며 / 羽儀揚庭
드디어 영의정에 이르렀네 / 遂都大政
사특한 관리 변별하여 막으니 / 辨遏官邪
뭇 관료의 모범 되셨는데 / 作刑庶寮
백성들이 복이 없어 / 民方無祿
높은 산 그 봉우리 무너졌네 / 嶽摧其喬
울창한 저 서쪽 등성이 / 鬱彼西岡
삼대의 인물이 한 자락에 묻혔는데 / 三世一麓
그 아래 큰 길 있어 / 其下長逵
지나는 사람마다 반드시 예를 갖추네 / 過者必式
우뚝 선 커다란 비석에 / 豐碑揭揭
환하게 덕을 기록하니 / 紀德有融
근원을 트고 흐름을 인도하여 / 疏源導流
몽매한 후손 계도하리라 / 以啓後蒙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 강원모 오승준 김문갑 정만호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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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伯氏領議政分沙李公神道碑銘 幷序
元兄議政公用回甲之歲甲申二月捐館舍。治命曰。吾神道文屬余季。時不肖敏求漂寓西南。旣聞而悲之。蓋不爲也。爲虛盛意負泉壤。爲之也。懼無以信當今與後世。實兢兢焉。公諱聖求。字子異。號分沙。七世祖敬寧君諱裶。出獻陵。其後牟陽諱稙,仙槎諱承孫,河東諱𥙿。代以宗籍封君。祖兵曹判書諱希儉。考吏曹判書文簡公諱睟光。俱贈領議政。世載烈聞。妣安東金氏。上洛公後。義禁府都事諱大涉之女。公幼鞠于太母柳夫人。親授小學。始就家塾。造語輒驚人。擧癸卯進士。戊申大科。其發解俱居一甲。初隷承文院。選入翰苑。兼春坊說書。辛亥。陞典籍。轉監察。明年。歷諸曹郞。入玉堂爲校理。自是屢踐館職言官。時文簡公長憲府。弟敏求處玉堂。而公爲獻納。歎曰。一家三人幷列三司。殆哉。方奸臣構大獄以及母后。臺諫鄭造,尹訒創爲別處之論。公持正議不撓。壬人已側目矣。白沙李相國嘗任鄭浹邊倅。浹坐逆死。論者以是持白沙公罷相。公爲持平。抗言浹之薦用。安能逆知反狀。波及大臣爲已甚。奸黨嗛前後憾。且以公將入銓席。劾罷公。甲寅。外敍伊川縣監。翌年。丁太夫人憂。制除。拜永平判官。寄治抱川。事多新刱。設施中窾。公私和輯。其秋。白沙相死纍所。歸葬抱川。邑人立書院以奉沙公。不悅者因是大噪。以公倅其邑捃摭爲案。罷職不敍。終始齮齕如此。權兇柄國旣久。欲以計調停游散。求速化者不能無濡跡。公壁立頹流。斥言其非僻。癸亥反正。初政擢拜司諫。剗弊伸枉。辨遏邪正。如寬縱濫繫。弛禁都門。焚沈香山罷遣女樂。皆公首發以贊新化。遷議政府舍人。薦儒將。由副應敎又薦爲江華府尹。乙丑春。以同副承旨徵。移禮兵參議,大司諫。徐公渻長夏官。亟言于申文貞公曰。參議公近與共事。當大任者必是人也。丁卯春。參議吏曹。扈東朝南下。旣還。荐更吏議,大司諫。兼承文院副提調。明年。以左承旨試武科吉州。疏陳民瘼十六條。用鞫獄勞。進嘉善階全南監司。其冬。文簡公暴風疾革。上爲發宣傳官。諭以急歸無待代。仍遭大故。服闋。卽其日拜大司諫,都承旨。冬。特除吏曹參判兼副摠管,經筵春秋館事,世子右副賓客。癸酉。特授兵曹判書。則兪伯曾引葭莩微嫌論改之。士論甚其巧詆。卽拜大司憲,刑曹參判。按畿輔。歷大司憲,副提學,都承旨。乙亥正月。天官卿缺。上命幷薦從二品以授。公兼知成均。丙子。遞拜刑曹判書,大司憲。夏。判本兵體察副使。擧用必公。兜䥐胥悅。十二月。淸兵輟烽疾驅。三日而傅國都。輿駕遽幸江都。未出城。候騎踰沙峴。上轉入南漢。則敵兵日益滋。闔城無人色。獨公擧止安重如平素。上下倚以爲重。與諸將分城以守。大冠戎衣挺立大旗下曰。我欲明白死。或見大事已去。請早從降議。免使八路糜爛。公曰。王師一未交鋒。外鎭幸全。何可遽議降款。旣而城中益急。定計出城。副君入質瀋陽。諸大臣老不任行。乃進公右議政。仍陟左揆。旣使朝廷委公更定約條。而彼中情形與我大別。則人以爲棄命廢事。一子羈丱被俘。公見之若無情。及其勒贖驅遣。則人以爲贖子啓後弊。兼論體臣主兵誤國。幷及公罷職。葺草屋東郊。打頭容膝。處之晏如。賦詩曰。田中苦菜猶嘗膽。郭外茅茨當臥薪。所存可知也。戊寅。復敍領敦寧府。庚辰。又奉使淸國。辛巳十月。拜領議政。公居位。務全大體。不爲刻覈之論。每從讞獄。多所平反。而至當國家大事。挺特不撓。無依違去就色。龍灣人崔孝一自拔歸明朝。淸將以府尹黃一皓振贍其家族。將加刑戮。公爭之甚確。淸將怒曰。苟如是。不得三日作相。僚相見彼意堅。欲止無辨。公曰。雖不能一日作相。視人無罪入死地。何可不出力以救。自公秉政。備歷危險。左右矛楯。動不得如意。人或規公宜少降志循時以濟事者。公歎曰。作事在我。成事在天。烏可枉己而求合。壬午秋。史官引進非人。公䮕其私。削其薦剡。於是敲撼四發。承旨洪茂績盛氣橫詆。所言尤慘礉。公引疾。章十上。乃遞拜領中樞。始公在翰苑。僚員引戚畹入史局。公執不可。獲罪罷。其重史職。不懾於權貴。至老不變。其冬。淸人至鳳凰城。以李烓任宣川時接遇南船。鎖以去。仍逮在事諸宰。擧朝震駴。道臣具鳳瑞
言李烓納赫蹄書。悉輸我國陰事。上下憤嫉。旣誅李烓已。又議收族。公曰。烓罪固宜萬殞。至其漏言之云。獨出於鳳瑞一人。而灣上諸臣李景曾等狀啓與相抵迕。宜覈實以處。時議指公爲護逆。始請削黜。至加流竄。上只允革職。僑寓楊花江上。榜其庵曰晩休。嘗曰。遭逢數十年。汩沒波流。晩得閒適。甚愜心賞。籃輿竹杖。逍遙散朗。自同寒士。家嘗失火。出坐田間曰。酒瓮無恙否。因命酌以謝鄕隣。餘無所問。癸未。敍領中樞府。納祿謝事。若將終身。越正月。聞世子回轅。強起迎駕。因感疾遂不起。始歿。白氣上漫天不散。光燭地夜明。觀者異之。官庀葬如禮。厝于楊州長興里。公美風度。標擧軒然。正色朝端。百僚竦敬。寬和有制。人不得以親疏。未嘗肯崖異詭隨。未嘗肯聲色加人。而幕府將佐皆伏。抑首汗背退。而不自知其然也。久處顯位。却掃靜穆。門無苞餽。巷絶私軌。要津形勢。罕所接遇。及居江湖。賓客過從。必有酒食。禮待勤渠。春和盎襲。始娶坡平尹氏節度使說之女。繼聘安東權氏。議政府舍人諱盺其考也。尹夫人無子。公奉節度夫人隣舍。事葬以誠。旣又取尹家支庶俾承其祀。臧獲田廬。一無濡染。李判書景稷卽尹公中表。每歎以爲不可及。自先祖判書公。世以氷蘗著。公積膴仕。愈勵潔操。及大事。至無以斂。權夫人天資明烈。衆美咸具。生五子二女。男尙揆。歿江都。參奉同揆。擧遺佚不仕。縣監堂揆。佐郞碩揆,台揆。俱世其家。夫人與尙揆妻具氏。二女判書李一相,及第韓五相妻。皆殉節以旌閭。公有庶子善揆。女適尹斗宗。銘曰。
於穆東園。有寢有廟。司馬維祖。冢宰維考。上相承之。冞闡厥猷。厥猷伊何。克邁克遒。靖共在位。不那不竦。羽儀揚庭。
遂都大政。辨遏官邪。作刑庶寮。民方無祿。嶽摧其喬。鬱彼西岡。三世一麓。其下長逵。過者必式。豐碑揭揭。紀德有融。
疏源導流。以啓後蒙。<끝>
東州先生文集卷之七 / 碑銘